1 이름없음 2020/03/11 21:16:20 ID : pQk8mNy1DyZ 0
방학에 억울하게 귀신도 나도 한이 서린 이야기.
2 이름없음 2020/03/11 21:17:47 ID : pQk8mNy1DyZ 0
일단 가족관계를 설명해 줄게! 우리집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혼혈이야. 일본인! 증조할아버지대에 일본인 할머니와 결혼을 하셨어. 존댓말은 쓰고 싶지 않지만 할머니는 죄가 없으니 붙여드림.
3 이름없음 2020/03/11 21:20:51 ID : pQk8mNy1DyZ 0
이 이야기는 고1때 이야기인데. 방학에 외할머니 댁으로 놀러갔어. 할머니댁은 흔한 지방 분지야. 한참 걸려... 교통비는 대주셔서 KTX에 택시까지 동원하며 눈물의 여행을 하였다. 외할머니는 음식도 잘하시고 참 좋은 분이므로 만날 생각에 들떴지롱. 외할머니를 단둘이 만나는 건 오랜만이기도 하고. 간김에 동갑인 친척이랑 놀 생각도 했음.
4 이름없음 2020/03/11 21:21:13 ID : 01bjxU2Mqkq 0
보고있으
5 이름없음 2020/03/11 21:22:43 ID : PfXy2JO2nzX 0
ㅂㄱㅇㅇ!
6 이름없음 2020/03/11 21:23:33 ID : pQk8mNy1DyZ 0
마당에 들어갈 때만 해도 할머니 멍뭉이가 날 반겨줬다... 역시 시골똥개가 최고야. 아무튼 아침에 출발해 늦은 점심에 도착해 된장찌개와 밑반찬을 원샷하고 몰아서 가져온 학원 숙제를 좀 한 다음에 친척이랑 통화나 했다. 친척은 주말에 만나자고 하더라고. 뭐 얼마나 짱박혀 있든 크게 문제는 안 되니까 그러자고 했지.
7 이름없음 2020/03/11 21:25:27 ID : pQk8mNy1DyZ 0
아무튼 다 좋았다 공기도 맑고... 여름방학이라 밖은 더워도 할머니 집은 에어컨이 빵빵했고 좋았음 저녁에는 수박도 먹고 해가 떨어지기 전에 야간 산책도 하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뭐 그런... 할머니 거실에 십자가가 안 보인다는 점만 빼면 예전이랑 비슷하고.
8 이름없음 2020/03/11 21:25:52 ID : pQk8mNy1DyZ 0
그래서 안심하고 자면 안 되는 거였는데.
9 이름없음 2020/03/11 21:26:34 ID : pQk8mNy1DyZ 0
할 것도 없으니 할머니 생활패턴에 맞춰 10시에 씻고 잠자리에 누웠다. 금방 눈을 붙인 것으로 기억함.
10 ◆du2oFio1xu5 2020/03/11 21:28:22 ID : pQk8mNy1DyZ 0
인코를 깜박했군... 아무튼 그래서 잠들었고 대강 느낌이 오지.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할머니가 왜 방에 들어오셨을까? 눈을 돌려 바라보니 시발 말로 설명하고 싶지 않은 흉악한 몰골의 무언가가 나랑 눈이 마주쳤다. 눈을 돌리고 싶어도 안 돌려지더라...
11 ◆du2oFio1xu5 2020/03/11 21:31:18 ID : pQk8mNy1DyZ 0
내가 한평생 가위눌림이라곤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지금도 안 겪어봄) 이게 가위눌림이구나 신기하면서도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길가다 비둘기 시체를 보면 불쌍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소름돋잖아. 그런 느낌이었어. 자세히 보고 싶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오더라고. 그리고 귀에 대고 자꾸 속삭이는데 뭐라고 하는지는 안들렸다 너무 빨라서. 눈도 못 감고 온갖 불쾌하며 무서운 기분은 다 느끼면서도 깨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도 해보고... 그렇게 무서워하다 피로가 몰려와서 다시 잠들고 아침을 맞았습니다.
12 ◆du2oFio1xu5 2020/03/11 21:33:47 ID : pQk8mNy1DyZ 0
등이 축축하지 않은 걸 보니 가위눌린 지 좀 시간이 지났구나 생각했어. 뭐 불쾌하긴 해도 가짜니까 상관없지! 그냥 악몽이라고 생각하고 평소처럼 아침을 맞았는데 세수하는 동안 누가 문을 두드리더라고. 저 세수해요~ 라고 말했는데 점점 세게 두드리는 거야. 소름이 돋아서 아무것도 못 하던 순간 알람소리가 들려왔음.
13 ◆du2oFio1xu5 2020/03/11 21:35:44 ID : pQk8mNy1DyZ 0
두번이나 불쾌했으니 이번에는 RC체크를 해봤는데 이번엔 현실이더라. 다행이었다. 그렇게 아침밥을 먹고 폰질 좀 하고 산책도 하고... 시간낭비 하다가 낮잠을 잠깐 잤는데 귓가에서 누가 자꾸 속삭이는거야. 자세히 들어보니까 어젯밤의 그 목소리...
14 ◆du2oFio1xu5 2020/03/11 21:36:55 ID : pQk8mNy1DyZ 0
그런 상황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다행히 나는 변호사 친구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무당 친구... 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님이 무당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15 ◆du2oFio1xu5 2020/03/11 21:39:14 ID : pQk8mNy1DyZ 0
부모님과도 어느정도 면식이 있었기에 친구는 곧바로 부모님과 연결을 시켜줬어. 대화 내용은 별 거 없고 점 쳐봤는데 귀신 붙은 것 맞는 거 같다고, 최근에 달라진 거 없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거실에 있던 십자가 사라진 거 빼고는 없다고 했다. 할머니도 계속 성당을 다니고 있는데 십자가가 파손돼서 새거 살 동안 비워져 있던 것 뿐이었음.
16 ◆du2oFio1xu5 2020/03/11 21:40:45 ID : pQk8mNy1DyZ 0
이런 상황에 돈부터 생각하긴 그렇지만 복채를 혹시나 여쭤봤는데... 아들 친구니까 특별히 무료로 해준다 하시더라. 굳이 공짜인게 미안하면 저번에 친구(그분 아들) 통해서 받은 벌꿀로 퉁친다고 생각하라고 하심. ㅇㅇ이 어머님 지금도 감사합니다...
17 ◆du2oFio1xu5 2020/03/11 21:43:00 ID : pQk8mNy1DyZ 0
십자가가 부숴진 것도 우연일 수도 있지만 그 귀신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하셨음. 본인이 가면 좋겠지만 여유가 안 되니까 일단 귀신과 대화를 시도해보자는 결론으로 도출됨. 준비물은 두가지. 1. 할머니한테 좋은 꿈을 꾸게 기도해달라고 할 것. 2. 새벽 2시에 일어나서 다시 잘 것.
18 ◆du2oFio1xu5 2020/03/11 21:47:01 ID : pQk8mNy1DyZ 0
귀신이라 하더라도 일단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거면 엄청난 악귀는 아니라고 하셨지. 자세한 이유는 설명을 못 들었으나 우리 집은 나 빼고 천주교이기 때문에 평소에 기도받은 짬밥이 있어서 일종의 마지노선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본다... 아무튼 신앙심 깊은 할머니의 기도가 방패 역할을 할 거라고 하셨어.
19 ◆du2oFio1xu5 2020/03/11 21:48:09 ID : pQk8mNy1DyZ 0
새벽 2시는 그때가 가장 귀신이 잘 보이는 시간대이므로, 그때 깼다가 다시 잠들면 귀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보다 또렷하게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 그랬는데 말이 안 통하면 그때는 그냥 퇴치하는 쪽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20 ◆du2oFio1xu5 2020/03/11 21:48:35 ID : pQk8mNy1DyZ 0
아무튼 그래서 알람을 맞춰놓고 할머니한테 부탁도 드리고 잤어.
21 ◆du2oFio1xu5 2020/03/11 21:49:22 ID : pQk8mNy1DyZ 0
새벽에 우중충한 기분으로 깨고 5분동안 네이버 뉴스 보며 버티다가 다시 잠들었지. 그랬더니 진짜 꿈에 나오더라고. 사람 모습으로.
22 ◆du2oFio1xu5 2020/03/11 21:50:17 ID : pQk8mNy1DyZ 0
해괴한 몰골은 마찬가지지만 이번에는 그래도 봐줄 만 했어. 무서움도 살짝 사라져서 자세히 볼 용기가 생겼지. 목에 밧줄 자국이 있더라. 자살했었나보다- 하고 생각하고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어.
23 ◆du2oFio1xu5 2020/03/11 21:51:38 ID : pQk8mNy1DyZ 0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뭐냐, 난 당신을 본 적이 없는데 왜 이러는 거냐고 물어봤는데 이번에는 신사적으로 느리게 말하셨다. 논문을 달라고 하심. 말투가 살짝 특이했어. 70년대 서울말 느낌? 옷도 정장이긴 한데 낡았고.
24 ◆du2oFio1xu5 2020/03/11 21:54:00 ID : pQk8mNy1DyZ 0
논문이 뭐냐고 대화를 이어나갔는데, 네 조상이 어쩌고 하던 와중에 눈앞이 흐려져서 잠에서 깨어남...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내가 그걸로 추론 가능한 건 두가지였어. 1. '논문'이 존재하던 시대 사람이다. 2. 조상님이 쌓은 업보다.
25 ◆du2oFio1xu5 2020/03/11 21:55:12 ID : pQk8mNy1DyZ 0
그래서 일단 집에 논문이 있나 보기로 했지. 할머니한테 종이뭉치 쌓아둔 곳이 어디냐고 여쩌봤는데 장롱 위에 상자가 있다고 하시더라고.
26 ◆du2oFio1xu5 2020/03/11 21:56:57 ID : pQk8mNy1DyZ 0
어찌저찌 상자를 꺼내 들춰봤는데 뭔가 이상하네. 종이가 일본어로 뭐라 적혀있었어. 할머니한테 이게 뭐냐고 여쭤보니까 아버지가 애지중지하시던 상자라고, 절대 버리지도 보지도 말하고 하시기에 여지껏 가지고 있던 거라고 하셨지. 증조할아버지가 누구랑 결혼하셨다고 했지?
27 ◆du2oFio1xu5 2020/03/11 22:00:18 ID : pQk8mNy1DyZ 0
뭔가 구린내가 나는거야. 일본인 여성이랑 결혼함, 연구자(고학력), 사진을 들춰보니 넓은 한옥임, 할머니 남자 형제들은 물론이고 할머니도 당시치고 나름 받은 유산... 어어어 시발 이거 친일파 아닌가요??
28 ◆du2oFio1xu5 2020/03/11 22:02:25 ID : pQk8mNy1DyZ 0
시발 뭐지? 싶어서 할머니를 모셔와서 함께 읽어보기로 했다. 대부분 연구자료 아니면 동료들과 찍은 사진이었지만 군복을 입은 사람과 찍은 사진이 있네 망했어요~~
29 ◆du2oFio1xu5 2020/03/11 22:03:55 ID : pQk8mNy1DyZ 0
그렇게 꾸준히 들춰보다가 유일하게 증조할아버지 이름이 아닌 논문을 하나 발견했다. 이거네.
30 ◆du2oFio1xu5 2020/03/11 22:06:02 ID : pQk8mNy1DyZ 0
논문은 농업 관련 내용이었음. 할머니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시고... 그냥 대충 종자 연구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고민을 좀 했지 이걸 세상에 알려야 하나. 근데 알리면 그걸 본인에게 돌려주는 게 아니잖아. 법적인 과정 절차 거치면 한참 걸릴 거라고. 이래저래 생각하다 결국 고인의 의견을 따르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그날밤은 정리하고 논문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31 이름없음 2020/03/11 22:06:27 ID : 42IHA445byG 0
그럼 증조할아버지도 친일파였다는거야??
32 ◆du2oFio1xu5 2020/03/11 22:07:42 ID : pQk8mNy1DyZ 0
당신 논문 맞냐고 여쭤보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여쭤보고. 어쩌다 죽었냐고 또 여쭤보고. 일단 그분은 독립운동을 몰래 하고 계셨던 수많은 의인들 중 한 분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33 ◆du2oFio1xu5 2020/03/11 22:08:17 ID : pQk8mNy1DyZ 0
증조할아버지도가 아니라 증조할아버지가 친일파였음. 증조할머니는 평범한 일본 집안이었대.
34 ◆du2oFio1xu5 2020/03/11 22:09:07 ID : pQk8mNy1DyZ 0
근데 친일파 인성이 어디 가겠냐. 상사가 논문을 훔친거지 권력으로. 인성 쓰레기 인정합니다...
35 ◆du2oFio1xu5 2020/03/11 22:10:07 ID : pQk8mNy1DyZ 0
꼴에 죄책감이라도 들었는지 논문을 가지고는 있었나보다. 다행히 돌려드릴 게 남아있었지. 십자가 깨진 건 그냥 우연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나한테 올 수 있었지만.
36 이름없음 2020/03/11 22:10:28 ID : 42IHA445byG 0
아 그렇구나..
37 ◆du2oFio1xu5 2020/03/11 22:11:46 ID : pQk8mNy1DyZ 0
그러다 독립운동 하던 사실을 들키고, 이래저래 사정이 생겨 집안도 어려워져 결국 자살을 택하신 거. 여러모로 안타까운 사연이었지만 나는 세상에 진실이 밝혀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태우는 건 그렇지 않냐고 설득했다.
38 ◆du2oFio1xu5 2020/03/11 22:13:54 ID : pQk8mNy1DyZ 0
그분은 그러면 사본이라도 태워달라고 하셨고, 원본은 내가 어떻게든 해명하는 데 쓰기로 했어. 사실 과학자로서는 본인의 업적이 밝혀지는 게 억울하지 않잖아? 다음날은 한참 걸어가 도서관에 가서 몇십페이지를 복사했다. 조금 눈치보였음...
39 ◆du2oFio1xu5 2020/03/11 22:16:03 ID : pQk8mNy1DyZ 0
사본을 태우고, 원본은 정말 어쩔까 고민하다 일단 아버지 친구분한테 들고가기로 했다. 그분은 그날밤에 작별하게 되었어. 첫인상은 안 좋았지만 작별은 슬펐다.
40 ◆du2oFio1xu5 2020/03/11 22:17:29 ID : pQk8mNy1DyZ 0
사촌이랑 놀기로 한 건 취소... 주말에 바로 집으로 갔지. 일단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기로 했어. 박사학위까지 따신 분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
41 ◆du2oFio1xu5 2020/03/11 22:21:47 ID : pQk8mNy1DyZ 0
이후 이야기는 좀 길기도 하고 난 잘 몰라서 패스하고, 논문은 원래 이름을 찾았다. 다행히 그분 이름을 올릴 수 있었어. 당시 시대가 시대라 아예 자료 자체가 소실된 모양이더라고. 인용도 조금 됐다. 해피엔딩~ 지금은 증조할아버지 친일파 목록에 등록하려고 노력중
42 ◆du2oFio1xu5 2020/03/11 22:24:33 ID : pQk8mNy1DyZ 0
이야기 끝! 사건이라면 사건이지만 내가 의외로 회복탄력성이 좋아서 기억이 실제와 좀 차이가 날 수도 있으니까 관용의 정신 부탁한다. 논문 이름이라던가 그런건 미안해. 나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돼가지고... 상자 속 내용물도 찍어 올리고 싶은데 이미 친일파라고 증명하려고 다 자료를 보냈다.
43 이름없음 2020/03/11 22:31:15 ID : Hvba1a8qrz9 0
대단하네...보통 자기 조상중에 친일파가 있다고하면 숨기기 급급할텐데. 좋은일 했구나 스레주!
44 이름없음 2020/03/11 22:33:37 ID : pQk8mNy1DyZ 0
내가 친일파인 게 아니기도 하고, 어찌됐건 진실이 중요하니까! 재산까지 있었으면 다 팔아먹어 기부했을텐데 아쉽게도 할머니 직통 재산은 끽해야 고급 혼수였고 대부분 사라졌어... 남의 집안에 기부하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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