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0/04/28 23:42:21 ID : JU1vhhs7hAl 0
어릴 적 바닷가에 간 적이 있다. 사람들은 시끄러웠고 여름의 바닷가는 후덥지근한 짠내로 가득 차 있었으며, 사방에 조금은 끈쩍하고 찝질한 상태의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욕하고 싸우고 울고 담배를 피우고, 저기 있는 저 아이는 왜 홀로 모래를 파고 있을까 거기엔 담배꽁초가 있을 텐데 더러운데, 그리고 내 뒤의 횟집에서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흐려지고 있었다. 홀로 모래사장에서 노는 아이를 바라보면서도, 그 아이가 내 또래인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진 않았다. 가까이 가면 무언가가 깨질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여름날 밤바다의 공기는 흥겹고도 불안정했다. 어질어질하게 무더운 열대야를 가르면서 바닷가로 다가가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가오는 파도가 보였다. 모래사장 밖에서 보니 바다는 검고 끈적한 액체처럼, 마치 피처럼 밀려오고 밀려갔다. 짜고 비린 냄새가 얼굴 주변을 감싸안고 나에게 속삭였다. 저게 너의 바다야, 앞으로 익숙한 너의 바다가 될 거야.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었지만 앞으로 내 삶에서 종종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는 걸, 그날 본 바다가 익숙한 나의 바다가 될 거라는 걸 그때의 나는 어렴풋이 직감했다.
2 이름없음 2020/04/28 23:45:45 ID : JU1vhhs7hAl 0
혼자 돌아다닐 때에 느끼는 자유로움은 불안을 기반으로 한다. 자유를 누린다는 일은 언제든지 혼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즉 언제든 홀로 헤메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홀로 모르는 길을 돌아다니며 헤메다 보면 예상치 못하게 아름다운 겹벚꽃과 우연히 마주쳐 급작스레 친해지는 친구를 만날 때도 있었지만, 결국 길을 잃고 어둡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익숙하게 아는 길보다는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가보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마침내 우리는 모두 홀로 걷는 모르는 길에 마주치게 될 테니까. 언젠가는 홀로 걸어가야 하는 긴 터널이 나오게 된다는 게 삶이라는 걸 지금은 알고 있으니까.
3 이름없음 2020/04/28 23:52:45 ID : JU1vhhs7hAl 0
쇠락하는 곳은 아름답다. 망가진 곳, 폐허,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이 눈부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도 내 유년 시절의 경험때문일 것이다. 사회로부터 점점 뒤쳐지는, 지금은 쓰지 않는 삐삐처럼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그 결말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났으니까. 누군가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테지만 결국 그 순간 그 자리에 존재했던 그 사람들의 현재는 아무도 모르는 안개 저편에 감춰지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다시 새로운 것이... 어쩌면 낙오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부터밖에 당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건물과 길은 남아도 그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익숙한 바다, 익숙한 나의 바다에 가면 다시 그들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과거의 창고에서 짜고 무더운 공기를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4 이름없음 2020/04/28 23:53:45 ID : JU1vhhs7hAl 0
보라색은 저물어가는 색이고 그래서 마치 나와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예쁘게 핀 제비꽃을 보고,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5 이름없음 2020/04/28 23:56:15 ID : JU1vhhs7hAl 0
집에 생화를 사다 놓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시위에 가깝다. 나는 꽃이 싱싱하고 아름다울 때보다, 결국 줄기가 잘렸다는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시들어갈 때 더 아름답게 보인다. 아무리 아름답게 피어 있어도 줄기가 잘려있는 꽃은 시드는 거야. 아무리 물을 갈아줘도 다시 필 수는 없고, 지금이 그 꽃에게 남은 시간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이미 죽어있는데 죽어있지 않은 척, 나는 피어있는 척 하는 그 생생함이 처절하게 바스라질 때가 내가 꽃을 보며 가장 위로를 받을 때이다.
6 이름없음 2020/04/28 23:58:01 ID : JU1vhhs7hAl 0
우울은 아주 안정된 상태라고 한다. 익숙한 나의 바다는 익숙한 나의 지옥이기도 하다. 항상 내가 찾아서 기어들어가는, 아주 익숙하고 편안한 지옥. 내가 나를 위해 만든 감옥. 그 안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열쇠를 던지고, 꺼내달라고 울부짖는 것도 나다. 문을 열어주면 다시 기어들어갈 거면서. 행복하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가장 스스로를 증오한다.
7 이름없음 2020/04/29 00:01:49 ID : JU1vhhs7hAl 0
나를 나아지고 싶게 만드는 사람들을 나는 사랑했고 그러나 스스로는 나아지지 못했고, 결국 나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을 나의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후회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 그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인간관계의 핵심이다.
8 이름없음 2020/04/29 00:04:18 ID : JU1vhhs7hAl 0
비대한 자의식과 조그마한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것은 마치 닭으로 태어나 타조알을 낳는 일과 같다. 그냥 안에 품고 있다가 어느 순간 그걸 낳지 못해 죽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낳지 않을 수 없는, 낳으려는 욕망을 멈출 수가 없는 그런 거. 그러니까 익명의 공간에 익명의 글을 싸지르면서 공허한 혼잣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마치 고장난 녹음기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혐오로 가득찬 말들을 끝없이 변주하여 동어반복하면서.
9 이름없음 2020/04/29 00:08:40 ID : JU1vhhs7hAl 0
인생을 론도처럼 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산 대가를 마지막 악장에서 치르게 될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지. 익숙한 학대와 익숙한 혐오를 찾아 헤메면서 반복하는 게 습관인 주제에 행복 같은 걸 입에 올리면 안 된다는 것도. 그래서 나는 이 곡을 내가 원할 때에 아무렇게나 끊어버릴 거야. 마치 장엄한 교향곡을 연주하다가 갑작스레 지휘자가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곡이 중지되듯이, 나는 마지막 악장이 오는 걸 기다리지 않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10 이름없음 2020/04/29 00:17:01 ID : JU1vhhs7hAl 0
무언가를 알고 나면 절대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폭력의 기억은 몸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각인되고, 내가 스쳐지나갔던 순간이 거대한 복선으로 밝혀지며 잊히지 않는 무언가가 된다. 사랑도 그런 것들 중 하나다. 인생이 뒤바뀌는 경험. 그 전과는 전혀 다른, 그 전엔 어떻게 살았던 건지 생각도 나지 않게 되는 변화. 다만 그 변화가 항상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는 걸 언제나 잘 기억해야 한다. 모든 처음은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칼날이 되니까, 항상 조심해야 한다.
11 이름없음 2020/04/29 00:38:59 ID : JU1vhhs7hAl 0
무언가에 정을 주는 행위가 이렇게까지 위험할 줄 몰랐다고 한다면 멍청한 걸까.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게 얼마만큼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를 교과서를 볼 시절엔 몰랐다. 그 작은 온기가 사람을 얼마나 위로하고 또 얼마나 절망하게 할지.
12 이름없음 2020/04/29 00:46:53 ID : JU1vhhs7hAl 0
깨끗함에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가 더럽다고 생각되어서일 확률이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항상 소독용 에탄올로 주변을 닦았다. 그리고 이제는 가만히 누워서 며칠을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주변에 쓰레기를 쌓아두기도 한다. 물론 정방향으로 논리가 성립한다고 해서 그 역이 항상 옳은 건 아니지만, 만약 주변을 깨끗이 하는 게 스스로의 더러움에 의한 부작용이라면 주변이 더러워도 참을 수 있는 건 스스로를 깨끗하다고 믿어서라고도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지금 더 깨끗한 사람이다. 강박증에서 우울증으로 옮겨왔다거나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픈 사람인 건 절대 아니고.
13 이름없음 2020/04/29 00:50:05 ID : JU1vhhs7hAl 0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개소리를 믿던 때도 있었다니까. 진짜로. 나는 생각하니까 고로 존재한다는, 그런 말을 믿던 때가 있었다고. 뇌를 이루는 뉴런들에서 옮겨지는 전기신호의 총합이 각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 저 가로등 불빛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것과도 비슷한 논의였던 것 같기도 하고.
14 이름없음 2020/04/29 00:55:40 ID : JU1vhhs7hAl 0
나를 죽일 수 없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에서 알려지지 않은 점은 거의 죽을 뻔하면서 남은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고통은 영혼에 새겨지고(물론 영혼을 그다지 믿지는 않지만, 어떠한 유기적 정신체의 총합을 그냥 영혼이라고 친다면.) 죽지 않았기 때문에 흉터가 남겨진다. 그 흉터는 다른 부분에 비해서 더 연약하고 아플 것이고 어쩌면 다른 사람은 그 흉터를 보고 동정하거나 혹은 일부러 그곳을 공격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 그 흉터를 볼 때마다, 죽을 만큼 아팠던 그 기억이 생각날 것이다. 그러고도 죽지 못해 또다른 흉터를 새겨가며 살아온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15 이름없음 2020/04/29 01:01:14 ID : JU1vhhs7hAl 0
혼자서 새벽에 이런 걸 쓰고 있는 사람과는 가능하면 어울리지 말 것... 이라고 쓰면서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있다. 그러니까 새벽에 뜬금없이 뭐해? 라거나 잘지내? 라고 물어보는 사람을 주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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