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1/09/10 22:44:01 ID : 2txU0nBgphu 1
내가 친구를 처음 집으로 데리고 온 날. 엄마는 그 친구가 돌아가자마자 내게 말씀하셨다. 그 애한테 정을 너무 주지 마. 하지만 나는 착하고 친절하고 햇살처럼 웃는 내 친구가 몹시도 좋아서 그 날 이후에도 종종 그 친구를 우리집에 데리고 놀러 왔다. 일 년이 지나고 그 친구와 교실이 갈라졌을 때도 나는 그 애를 처음처럼 사랑했다. 하지만 이제 반이 다르다는 이유로 친구는 나와 같이 밥도 먹지 않았고 집에 같이 가지도 않았고 더이상 우리집에 놀러오지도 않았다. 나는 새 교실의 녹색 칠판 옆에 있는 새학기라는 글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새학기. 새 친구를 사귀어요! 그 글자가 너무나도 공포스럽게 느껴졌었다. 모두가 새 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모두가 새로 사귄 친구와 함께 웃고 있었다. 나는 아홉살이 되어서 처음으로 외로움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2 이름없음 2021/09/10 22:51:53 ID : 2txU0nBgphu 0
엄마는 울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갓 아홉살의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몸이 멀어도 마음만은 멀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다만 그걸 당연하게 해내는 이들은 아주 적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어린 내게는 너무 어려운 말이었지만 나는 그제야 엄마의 너른 등을 베개삼아 펑펑 울었다. 엄마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엄마는 자기의 마음을 이유없이 당연하게 내어주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사랑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종종 내게 '너는 나를 닮았어.' 라고 말씀하셨다. 그건 칭찬이나 자랑스러움이 묻어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걱정이었다. 어쩌다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닮아버린 어린 막내딸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었다.
3 이름없음 2021/09/10 23:07:24 ID : 2txU0nBgphu 0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고, 엄마의 예쁜 얼굴에 더는 가릴 수 없는 주름을 발견한 오늘. 나는 문득 아홉살의 그 날을 떠올려본다. 엄마가 그동안 내게 끊임없이 내준 사랑들을 생각해본다. 그 날 이후 수없이 떠나보낸 일 년짜리 친구들과 그래도 이삼년은 함께 지내본 친구들과 십년이 지나도 나와 함께해주고 있는 친구 한 명을 떠올려본다.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은 꽤 쉬웠고 제법 복잡했고 정말 괴로웠고... 너무 즐거웠다. 나는 가슴이 미어지게 외로웠던 때. 나와 함께해준 친절한 적막과 상냥한 어둠과 눈물로 축축한 이불보마저도 사랑했다. 엄마도 그랬다. 내가 아주아주 어렸을 때 찢어지게 가난한 이 집안에서 이가 빠진 찻잔에 담긴 밍밍한 커피와 함께 막 태어난 내 입양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날.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엄마를 멍하니 보던 나를 사랑해버렸다고 했다. 힘없이 주먹쥔 자그마한 손과 새빨간 이마와 어색하게 눈을 꿈뻑여보는 나를 사랑하고 말았다고 했다.
4 이름없음 2021/09/10 23:22:24 ID : 2txU0nBgphu 0
사랑은 무엇일까. 정이란 건 마음이란 건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이것들은 가슴 속에서 예고도 감각도 없이 몸집을 부풀린다. 그러나 사랑을, 정을, 마음을 내어줄 이가 떠나면 뒤늦게 알리는 것이다. 나 이만큼 자랐다고. 내가 이만큼이나 커졌다고. 그렇게 나는 속절없이 그 감정에 휩쓸리고 만다. 고통과 괴로움. 후회와 죄책감. 자기혐오와 슬픔과 잠시 함께한다. 엄마도 그랬다. 나를 입양하지 않기로 결정한 날. 죄책감과 자기혐오와 괴로움과 함께 밤을 지새웠더랬다. 그러니 나는 이제 안다. 이건 정많은 자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등가교환이라고 했던가. 사랑은 준 만큼 되돌아온다. 인연과 헤어진 날. 울며불며 괴로워하는 것은 물론 괴롭지만, 이제 두렵지는 않다. 나는 하다하다 나의 약점마저 사랑하고야 말았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나를 보며 그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 것처럼.
5 이름없음 2021/09/10 23:32:08 ID : 2txU0nBgphu 0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게 되는 게 두려웠다고 말했다.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기분의 사랑이었다고 했다. 잘 모르는 것은 보통 무서우니까. 하지만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언젠가 아빠처럼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를 만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 참 낭만적인 말이다. 누누히 들었듯 나는 엄마를 닮았으니까. 나중에 마음을 내어주기 두려울 정도의 사랑을 만나면 또다시 이 말을 떠올려보지 않을까. 아홉살의 그 날에게서 답을 찾으려 들지 않을까. 그래도 엄마는 걱정하는 투로 내게 늘 정을 주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 또한 정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제 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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