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2/03/14 22:18:29 ID : O03Cqo5dO3u 0
제곧내 봄이 오면 우울해진다. 사실 거짓말이다. 당신은 우울하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말을 걸면 말 걸지 말라며 날을 세웠고 말을 걸지 않으면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 하나 없다며 징징거렸다. 나는 당신이 몹시도 싫었다. 그저 당신을 사랑해서, 사랑하니까, 이딴 별 거 없는 이유들로 당신이 내게 하는 모든 감정 소모를 스스로 정당화시켰다. 당신을 사랑해서, 사랑하니까. 이런 보잘것 없는 이유를 내세웠다.
2 이름없음 2022/03/14 22:21:59 ID : O03Cqo5dO3u 0
말을 내뱉으면 다니까. 날이 선 말들은 바로 잊어버리면 그만이야. 그런데 날 선 말들에 베여버린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시간 나면 병문안이라도 오시지. 너는 기억 못해도 우린 이곳에 고였으니까.
3 이름없음 2022/03/14 22:34:39 ID : O03Cqo5dO3u 0
"존나 애매하네." 나는 옥상 끄트머리에 구겨져서 네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너는 인상을 잠시 찌푸렸다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눈가를 좁히다가 나를 보고는 이내 얼굴을 돌렸다. 우리는 일주일 전 함께 죽기로 결정했다. 그날 이후로 학교 옥상을 들락날락 거리고 있는 것이다. 뛰어내리는 거. 그거 하나를 못해서 계속 이곳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살기에는 애매한 행복과 죽기에는 애매한 불행을 안고 해 지는 오늘을 등지고 조용히 서 있었다. 너무 캄캄해지기 전에 죽던지 살던지 해야할텐데. 나는 너를 곁눈질로 바라본다. 네가 나를 돌아본다. 무슨 표정인지 잘 모르겠다. 우는 건지 화내는 건지. "떡볶이 먹을래...?" 아. 오늘도 실패다.
4 이름없음 2022/03/14 22:59:03 ID : O03Cqo5dO3u 0
남자는 아주 오래전 평화로웠을 지구를 떠올려본다. 풍부한 자원과 푸른 바다와 생명으로 넘쳐났을 대지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 위로 떨어진 검은 폭탄과 산산조각이 난 생명들을 덧그려본다. 모래가 뒤덮은 죽음의 땅 속에서 남자는 살아남았다. 유령이 돼서. 이것을 살아남았다고 칭하기에는 무언가 문제가 있다. 다만 남자는 지금 이 곳에 서 있고(비록 두 다리가 약간 흐릿하긴 할지라도) 종말이 내려앉은 이 행성의 역사를 되새기고 있었다. 살아있을 때 목숨처럼 여겼던 더블배럴샷건과 볼품없는 안전모가 남자의 앞에 떨어져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잡을 수는 없었다. 남자는 허탈한 마음에 그냥 죽은 모습 그대로 그렇게 널부러져 있었다. 해가 천번을 지고 달이 천번을 떠도 남자는 변하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천한번 째 달이 지던 어느 날, 망부석처럼 누워있는 남자의 앞에 머리가 새빨간 악마가 나타났다. 그는 작은 깃발을 꽂고는 남자가 뭐라 부르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악마가 꽂고 간 깃발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지옥, 2666년 완공.> 남자는 다시 그 자리에 널부러져 이제는 새빨갛기만 한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우린 전부 놀아나고 있던 거야... 놀아나고 있던 거라고... 남자의 중얼거리는 소리는 어디에도 닿지 않고 이제는 지옥이 된 땅으로 스며들었다.
5 이름없음 2022/03/14 23:18:33 ID : O03Cqo5dO3u 0
한나는 양을 몰고 감자를 먹는다. 그게 한나의 유일한 일거리이자 소박한 행복이었다. 한나는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일어서서 양털을 정리한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자는 게 한나의 소명이었다. 이 지역의 귀족이 교회에게 파문당한지 한달이 지나자 한나와 영지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할 일을 가지고 소소하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귀족 영애 몇몇은 수치를 못이겨 자진했고 남은 귀족들은 더 이상 한나와 영지 사람들에게 세금징수를 빙자한 억울한 삥 뜯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양과 감자밖에 없는 볼품없는 영지에 새 가문이 들어선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나의 일상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한나는 비스듬한 산등성이에 누워 양들이 먹는 것을 바라봤다. 숨 쉬는 건 축복이고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은 신이 우릴 굽어살피신다는 증거야.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대로 한나는 사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다. 양떼들 너머로 마을의 과부들이 줄줄이 묶인 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나는 그것 또한 멍하니 바라보았다. 맨 끝에는 자그마한 감자밭을 일구며 아버지와 함께 살던 한나 또래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여자아이는 아버지를 여읜지 하루가 채 안되었다. 그녀들이 가지런히 묶인 채 한나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할아버지는 요새 어딘가 편찮으시다. 목소리도 예전같지 않으시다. 한나는 고작 열 한살이다. 한나는 고작 열 한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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