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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46rBtjvCr 2019/05/28 22:36:21 ID : B81jAja66qj
인간은 인생이라는 과정을 거쳐 죽음이라는 결과를 맞이한다. 그것은 인간의 운명, 나아가서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의 운명이기도 하다. "퉤..." 비릿한 피가 식도를 넘어 혀끝에 닿자 소년은 그것을 침과 함께 뱉어냈다. 물론 뱉어내기가 무섭게 다시 차오르기에 딱히 의미 없는 행동일지 몰라도 피가 찬 상태로는 말을 할 수가 없기에 어쩔 수 없었다. "거기.. 서있는 아저씨..." 소년이 자신을 보고 아저씨라 부르자 그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이 새끼가? 야 인마 내가 좀 삭아 보여서 그렇지 나이는.." 평소의 소년이라면 난생처음 보는 그에게 부탁 같은 것을 할리 없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부탁 좀... 들어주세요.." "무슨 부탁?"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소년의 부탁이란 것이 뭔지 대충 예상을 한 모양이다. "설마 살려달라는 건 아니지? 곧 있으면 넌 죽어" 그건 소년도 잘 알고 있다. 벌써 눈앞이 흐릿해진 것을 보고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정상이 아님을 알았으니깐. "나 대신에... 저 아이 좀 구해주세요.." "뭐?" 소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는 되물었다. "설마 지금 쟤를 구해달라는 소리냐?" 그러면서 남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어느 남자아이였다. 그도 소년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나 그와 소년의 차이라면 소년 쪽이 그나마 상태가 양호하다는 점이다. 그만큼 아이 쪽의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소년이 죽어가는 것치고는 겉모습은 멀쩡한 반면에 아이의 몸은 온통 새파란 멍 자국과 찢어진 상처들로 가득했다. 호흡 또한 금방이라도 멎을 것처럼 불규칙했다. "... 너 마음은 알겠는데 쟤도 이미 늦었어"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그의 말대로다. 차라리 소년을 살리면 살렸지, 아이는 이미 죽음의 문턱에 발을 하나 걸친 상태였다. "부탁드립니다!... 우욱.." 그럼에도 소년은 피를 토하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자신도 죽어가는 처지면서도 어째서 그렇게 저 아이를 살려달라는 것인지 남자는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네 목숨은 상관없는 거냐?" "..." 지금 소년에게 살고 싶지 않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살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죽더라도 아이가 산다면 그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가 돼있었다. "좋아, 까짓것 한번 해....." 이제는 귀까지 고장 난 모양인지 그의 입만 뻐끔 거리며 움직일 뿐, 더 이상 소리가 전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까스로 그의 승낙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맙.."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소년의 심장이 완전히 정지했다. 다만 그의 얼굴은 더 이상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았다. 작은 미소가 띠어져 있을 뿐이다.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꼬맹아" 어째서인지 남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소년을 보며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lA46rBtjvCr 2019/05/30 01:48:28 ID : B81jAja66qj
소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남자는 무심한 얼굴로 작게 읊조렸다. "보고 있는 거 아니깐 빨리 나와" 그의 주변엔 대화할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음에도 그는 마치 누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레 행동했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대화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 그냥 너네 보스 불러. 그게 더 빠르겠다" 그가 누구와 대화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행동이 불러온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웬일로 나를 부른 거야?" 순간적으로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이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단순히 멈춘 것뿐만 아니라 하늘을 날고 있던 새부터, 소년의 입가에 맺혀있다 떨어지는 핏방울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고정돼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었으나 남자는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매번 이러면 안 피곤합니까?" "어쩔 수 없지" 분명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어느 순간 한 여성이 서있었다. 주름 하나 없는 깔끔한 검은 양복과 그에 어울리는 반듯하게 매어진 넥타이,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를 살며시 가려주는 작은 안경까지 누가 보더라도 그녀를 평범한 회사원이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애초에 나를 불러내지 않았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에이~ 괜히 그런다 또"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자 그는 최대한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살갑게 대했다. 소년이 남긴 유언과도 같은 부탁, 그리고 나아가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는 그녀의 능력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물론 이 자리에 나타나는 것조차 미지수였기에 도박이나 마찬가지인 수였으나 다행히도 그녀는 그의 부름에 응해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녀가 자신의 힘을 빌려줄지가 관건이다. "그래서 왜 부른...설마 쟤들 때문이니?"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바닥에 누워있는 소년과 아이를 보자마자 단번에 자신을 불러낸 그의 취지를 알아챘다. "그래서 부른 거지? 저 두 사람을 다시 살려내라고?" 그녀의 말대로 이미 죽은 소년과 아이를 되살리기 위해 그녀를 불러냈다. 사실 그녀가 두 사람의 시신을 보고 한 번에 알아차린 것도 과거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죽은 사람은 함부로 살릴 수도 없고, 살려서도 안돼' 그도 당시에는 워낙 간절했던 만큼 끈질기게 굴었지만 결국 그녀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이라고 힘을 빌려줄지 의문이기는 해도 그녀 말고 이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 그로써는 최선의 선택인 것이다.
◆lA46rBtjvCr 2019/05/31 05:01:01 ID : B81jAja66qj
"비록 어린아이들이긴 해도 이게 그들의 운명이야"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간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살며시 아이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조심스레 움직이는 그녀의 손길은 마치 갓난 아기를 보살피는 부모의 모습처럼 보일 만큼 상냥하고 따스했다. "글쎄, 과연 걔들의 운명이 거기까지일까?" "그게 무슨... 어라?" 그러나 그의 한마디가 모든것을 바꾸어 놓았다. 어딘가 슬픈 빛이 감돌던 그녀의 안색이 갑자기 급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헛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는 은은한 살기마저 담겨있었다. 아까까지와는 180도 다른 그녀의 모습이었음에도 그는 당황한다거나 놀라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뭘?" 그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그녀의 살기는 점점 더 진해졌다. 마치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듯한 노골적인 살의에도 이대로 물러선다면 모든 게 허탕인것을 알기에 그는 굴하지 않고 오히려 강수를 두었다. "아하, 아이들의 운명을 읽었나 보군" "... 그래,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이들은 이 자리에서 죽어서는 안되는 운명이야" 운명은 신들조차 감히 끊을 수 없는 사슬과도 같은 것, 하물며 인간이라면 이것을 거스르기는커녕 본인의 마음대로 볼 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있어 운명이라는 것은 절대적이며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명령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운명이 두 사람은 아직 죽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제대로 묻도록 하마"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살기가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엄청난 압박감이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몸이 으깨지기라도 할 것 같은 감각에 그는 멀어지려는 의식을 최대한 붙잡으려 노력했다. "크으.. 이거 무서워서 대답을 할 수나 있겠나 원" "김현수, 네가 이들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나?"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분노를 나타내는듯한 검은 아지랑이가 그녀와 그녀의 주변을 검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계획은커녕 본인 목숨부터 위험해질 노릇이니 그로써는 우선 그녀를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진정해, 내가 무슨 수로 저 둘의 운명을 바꾸냐? 그것도 네 눈을 속이면서" "...." 다행히 현수의 말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곁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아지랑이들이 점점 사그라들어갔다. 게다가 얼음장같이 차갑던 분위기도 많이 누그러들었겠다 현수는 이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부탁할게" 이때 그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해 보였다. "헬라, 저 둘을 되살려줘" "... 좋아" 결국 짧은 고민 끝에 헬라는 현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운명이 그들의 편인 이상, 제아무리 죽음의 여신인 그녀라 할지라도 그들을 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lA46rBtjvCr 2019/06/02 04:17:22 ID : B81jAja66qj
"... 그리고 앞으로는 날 불러내지 말고 내 아이들한테 말해주겠어?" "네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의 시건방진 태도가 별로 내키지 않기는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일, 아이와 소년을 한데 모아 눕힌 뒤 그녀는 사계에 있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수족이자 자식인 로트와 라티에게 두 사람의 영혼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 그렇게 됐으니깐 빨리 오렴" 그리고 10초 정도가 지났을 즈음, 현수와 헬라의 앞에 거대한 문이 불쑥 솟아올랐다. 거대한 저택에나 어울릴법한 검은색 바탕에 섬세한 붉은색의 조각들이 빼곡하게 박혀있는 멋들어진 문이었다. 게다가 관리도 제대로 했는지 녹이 슬거나 색이 바랜 곳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먼지 하나 없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철문에 어울리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서서히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그틈으로 적어도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고통에 울부짖는듯한 끔찍한 소리가 전해져왔다. 죄를 지은 영혼들을 벌하는것이 사계에서 로트와 라티가 맡은 임무이니 어찌보면 그들이 나온 곳으로부터 저런 소리가 나는게 당연한걸지도 모른다. "어머니 말씀하신 영혼들을 가져왔습니다" 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둘은 즉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갖추었다. 그에비해 현수는 태연하게 헬라의 앞에 앉은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애들이 참 예의가 바르네" "에휴...내가 그렇게 하지말라고 말려도 계속 저런다니깐?" 헬라는 질렸다는 듯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푹 내쉬더니 로트와 라티가 가져온 영혼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아이와 소년에게 영혼을 집어넣을 준비를 시작했다. "어머니" "으, 응? 왜 그러니" 평소에 로트와 라티는 굉장히 과묵하다. 그런 성격에다 평소에는 바빠서 얼굴도 몇 번 보지 못하니 이런 식으로 로트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 그녀로써는 굉장히 낯설게 느껴진 것이다. "어째서 이들을 살리시는 겁니까" "..." 로트의 표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지금 이 상황과 어머니인 헬라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거 신들이 찾아와 도움을 청했을 때는 질서를 어지럽힐 수 없다는 이유로 그들을 돌려보냈던 그녀가 어째서 지금은 인간 따위를 그것도 2명씩이나 살리려 하는 것인지 로트와 라티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이것이 이들의 운명이다" "하지만..!" 반박하려는 로트를 무시할 작정인지 영혼을 주입하는 것에만 집중한 헬라는 이후로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로트도 대답은 나중으로 미루자며 라티와 함께 자신의 집인 사계로 돌아갔다.
◆lA46rBtjvCr 2019/06/03 04:03:26 ID : B81jAja66qj
"다 됐어" "캬.." 과연 신의 이름에 걸맞은 완벽한 솜씨라는 생각이 안 들래야 안 들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결과물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생기 하나 없던 두 사람의 시체는 어느샌가 불긋한 혈색이 돌아옴과 동시에 미약하긴 해도 규칙적인 리듬으로 호흡을 하고 있었다. 죽음 그 자체인 헬라이기에 가능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으나 정작 그녀는 어딘가 불만스러운듯했다. "..." "무슨 문제라도 있냐?" 이제 와서 뭐가 잘못된 줄 알고 현수는 내심 떨리는 마음으로 물었으나 다행히 헬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뚱해 보였다. 엄지손톱을 깨물며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뭔가를 알아챘는지 다짜고짜 현수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헬라의 체구가 현수보다는 작기에 그가 올려다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아래로 끌려왔다. "너... 내 동생이랑 무슨 짓을 한 거냐?" "호오, 거기까지 알아낸 거야? 역시 너답네" 현수는 웬만하면 시치미를 뗄 생각이었으나 확신에 가득 찬 헬라의 눈빛을 보고 섣부른 거짓말은 되려 그녀의 화만 부추길 것이라 판단,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세한 건 직접 듣는 게 좋을 거야" 헬라의 손에서 힘이 서서히 풀리자 현수는 자신을 붙잡고 있던 작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준 뒤 새하얀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네 동생도 딱히 반대는 안 하던걸?" 결국 헬라는 사계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뚱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대신 문으로 걸어들어가기 직전, 현수를 향해 작지만 힘이 실린 한마디를 내뱉었다. "...조심해라" 은은한 협박의 의미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의 계획을 걱정해준 것인지는 헬라 본인만이 알 것이다. 이제 그녀도 떠났겠다 우선 현수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숨만 쉬고 있는 두 사람을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옮겨놓았다. "... 여기는?" 소년이 눈을 뜬 곳은 구름 위의 천국도, 유황불이 치솟는 지옥도 아닌 고급스러워 보이는 커다란 방의 침대 위였다. 뭘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온몸으로 느껴지는 침대의 푹신함은 소년이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차원이 다른 편안함을 선사해주었다. 물론 침대뿐만 아니라 배치돼있는 가구부터 시작해서 벽에 붙어있는 벽지까지 방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곳에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누워있는 것인지 소년은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으음..." "우왁!!" 갑작스레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란 소년은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자, 잘못했어요!" "너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소리가 난 이불을 들추자 그곳엔 어느 어린 남자아이가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구하려 했던 바로 그 아이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대충이나마 감이 잡힐 때 즈음 여러 개의 문들 중 하나가 열리며 현수가 방안으로 걸어들어왔다.
◆lA46rBtjvCr 2019/06/04 03:37:04 ID : B81jAja66qj
"일어났냐 꼬맹이들아" 소년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뭐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 질문을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소년은 멍한 얼굴로 그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년과 아이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자 현수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는듯한 표정을 짓더니 문밖에서 작은 손수레를 끌고 왔다. 뭔가 싶었으나 이내 방안은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찼다. 수레 위에 놓여있는 접시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은 소년은 여태껏 맡아보지 못한 독특하고 이국적인 냄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구해왔으니 식기 전에 들 먹어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소년의 입엔 침이 잔뜩 고여있었다. 현수가 들어오건 말건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던 아이조차 접시에 시선이 고정돼있을 정도로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현수가 접시를 건네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거의 그것을 마시다시피 할 정도로 뱃속에 집어넣었다. 고소하고 담백한 맛과 부드럽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수프와 비슷한 농도, 씹으면 오도독하고 쫄깃한 식감을 내는 독특한 재료가 어우러져 최고의 맛을 내고 있었다. "... 이게 무슨 음식이죠?" 결국 소년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질문은 이 굉장한 음식에 대한 것이었다. 도저히 묻지 않고서는 넘어 걸 수가 없을 정도로 그의 뇌리에 단단히 각인된 맛, 이름을 알아내 언젠가는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었기에 물은 것이다. "전복죽이라는 건데 여기서는 못 구할 텐데?" 역시나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인 걸로 봐서는 꽤나 먼 나라의 음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소년은 잠시나마 아쉬워했다.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우선 제쳐두고 가장 중요한 질문을 꺼냈다. "어떻게 제가 살아있는 거죠?" "내가 살려냈으니깐"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과 거짓말을 하는 것 중에서 현수는 후자를 택했다. 헬라의 이야기를 꺼내봤자 이야기만 길어질 테고 그의 머릿속도 복잡해질 테니 굳이 사실대로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야기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란 것이다. "그나저나 통성명도 안 했네 내 이름은 현수야,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저는 리프에요" 그러나 리프의 옆에 있는 아이는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비록 아까보다는 몸의 떨림이 줄어들었긴 해도 여전히 상태가 썩 좋아 보이는 편은 아니었기에 현수도 무리해서 이름을 묻지는 않았다. "그럼 형은 신을 모시는 사제이신가요?" "아니, 굳이 따지자면 마법사?" 어느 신을 믿는지에 따라 다르지만 리프가 말하는 사제란 보통 생명의 여신인 이둔을 숭배하는 자들을 뜻한다. 생명의 여신답게 그녀가 내리는 가호 또한 생명에 관련된 치유나 축복 같은 게 대다수였고 이에 많은 나라들이 앞다퉈 그녀의 신전을 세워 수많은 사제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 탓에 사제하면 상처를 낫게 해주고 신의 은총을 내린다는 이미지가 리프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저는 분명히 죽은 줄만 알았는데..." "... 그럴뻔했지" 현수의 생각보다 리프의 감은 날카로웠다. 그가 어렴풋이 자신의 죽음을 기억해낼뻔하자 현수는 티가 안 나도록 슬며시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근데 너 가족들은 어디 있냐?" "네? 그건..." 아무래도 현수의 질문이 리프의 상처를 자극한 모양인지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현수는 위로의 말을 전했다. "미안하다" 잠시 후 마음을 추스른 리프는 고갤 들어 조심스레 조금 오래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lA46rBtjvCr 2019/06/05 23:06:47 ID : B81jAja66qj
자신이 지금껏 겪었던 온갖 불행들과 고난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리프였지만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리프의 뺨을 적시며 그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현수는 오히려 그의 모습이 지극히 정상이라 생각했다. 남들에게 리프와 비슷한 인생을 살아보라고 한다면 대부분은 못한다고 즉답할 것이다. 그만큼 힘들고 괴로운 삶을 리프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악착같이 버텼다는 것이다. "... 멋진 사람이구나 네 누나는" 그리고 그가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대에는 그녀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현수의 입에서 솔직한 감탄의 말이 나올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 덕에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 감사합니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자식들을 노예상에 팔아넘긴다는 지극히 절망적이고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차가운 지하실의 냉기도, 목에 채워진 쇠사슬의 속박도 그녀가 리프의 귀에 속삭이는 희망의 빛을 꺾지는 못했다. "누나가 없었더라면 저는 아마도 진작에 죽었겠죠" 그의 말대로 희망을 잃지 않고 기회를 엿보던 남매는 감시가 느슨해진 순간을 틈타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때 리프가 용기를 내지 못했더라면 두 사람의 탈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리 잘 도망친다고 한들 아이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턱밑까지 좇아온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그의 누나는 큰 결심을 하게 됐다. '내가 저 사람들을 유인할 테니깐 그 틈에 도망쳐' '뭐?? 싫어! 누나도 나랑 같이 도망쳐야지!' 어리긴 해도 리프는 그녀가 말하는 유인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울면서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매달리는 리프를 그녀는 상냥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은 리프가 아주 어렸을 적에 느꼈던 어머니의 손길과 비슷했다. '리프, 부탁이야... 너라도 도망 쳐줘..' '어디로 도망친 거야!' 성난 남성의 커다란 고함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자 그녀는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도망칠 시간마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으로 리프를 밀쳐낸 뒤 스스로 숨어있던 곳에서 뛰쳐나갔다. '흐흐.. 이망할 년이 감히 도망을 쳤겠다?' 두 팔과 다리는 나뭇가지처럼 떨리며 오금이 저려왔고, 뱃속은 이후에 벌어질 일을 상상하자 저절로 울렁거렸으며,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수백 번도 넘게 들었다. '누나..' '쉿!'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동생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다른 무엇보다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그들을 좇아온 이들에겐 그 모습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잠시 후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타격 음이 그녀를 중심으로 울려 퍼졌다. '크윽...' '동생은 어디로 빼돌렸지?' 뺨이 찢어지는 듯한 격통에도 그녀는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오히려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비웃기까지 했다. '그걸 말할 리가 없잖아 멍청아!' 결국 그녀가 의도한 대로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고 그녀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곳곳에 시퍼런 멍은 물론이고 뼈에 금이 가거나 부러진 곳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탓에 그녀는 도중에 의식을 잃고 말았다. '쳇.. 동생 새끼는 내버려 둬! 이 년만 데리고 돌아간다!' 그의 어깨에 업힌 채 끌려가는 그녀를 보고도 리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기력한 자신을 탓하는 동시에 원망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용기가 있었더라면, 내가 조금이라도 강했더라면, 둘이서 덤볐더라면 어쩌면 도망칠수있지 않았을까하는 후회가 물밀듯 몰려왔으나 이미 그녀는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저꼬맹이를 도운거냐? 그때 네누나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라도 든거야?" "...아마도요" 당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과 도움이 필요한 그녀를 돕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트라우마의 형태로 새겨지게 되었고 그것을 자극한 것이 바로 옆에 있는 이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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