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2/02/01 02:08:56 ID : 3DAqrBta2mk 0
설정 아직 다 남아있고 도입부부터 갈아엎어서 리메이크하려던 글인데 막상 중학교 때 원고 읽어보니까 생각보다 그 시절 감성이 나쁘지 않데. 차라리 이 초기 원고에 구멍난 곳 때우고 문장을 다듬어서 이어가볼까 고민중. 참고로 리메이크본은 이제 첫 문장 뗐음. 초본 올려볼 테니까 레더들이 보고 의견내주길 바랍니다아.
2 이름없음 2022/02/01 02:12:11 ID : 3DAqrBta2mk 0
-간밤에 세상이 부스러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일정한 시간 간격 같은 것도 없이 신경질적으로 울려퍼지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가물가물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보니 목조 방문이 간헐적으로 덜컹거리고 있었고 경첩은 드드드 소리를 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일전부터 약간 헐거운 기색을 보였던 문 손잡이는 어찌나 격렬하게 흔들리는지 곧 문에서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이 지경까지 왔다는 것은 문 밖에 선 사람이 분명 머리끝까지 신경질이 났을 것이라는 기정사실화 된 가정의 충분한 근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바로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문을 두드리고 있던 사람이 휘청, 하고 쓰러지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넘어지려나 싶어 지켜보니 넘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중심을 잡는 게 보였다. 문을 두드리는 데 얼마나 많은 체중을 실었나가 여실히 보이는 동시에 약간 희극적이기까지 한 장면이다. 하지만 별로 우습지는 않았다. 넘어졌더라면 조금은 그랬을 수도 있지만.  문짝을 부서져라 두드린 장본인이자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 그 인물은 굳이 의심할 필요도 없는 내 전속 시녀다. 그녀는 곧 자세를 바로하고 몸을 곧추세웠다. 그 과정에서 얼핏 그녀의 손이 눈에 띄었는데, 벌겋게 부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리고 세게 문을 두드렸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이 이른 새벽에 다짜고짜 찾아온 그녀도 그녀지만, 그 이전에 내가 재깍 일어나 문을 열어줬더라면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그리고 그녀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다. 건조하기 그지없는 무표정. 그것이 그녀가 가진 표정의 전부인 것처럼만 보인다. 사실 그녀가 넘어질 뻔한 것도 어찌 보면 내 책임이랄 수 있고, 그러기에 나를 질책하자면 그럴 구실이야 얼마든지 있건만.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화난 기색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가끔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을 때마다 새삼 느끼는 사실인데, 어디 출신이건 간에 시녀 혹은 시종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순간적인 감정 조절에 참 능숙한 듯싶다.   "J 님."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시녀가 나를 불렀다. 기계음도 아니건만 그 음성에는 높낮이도 감정도 없다.  "예?"  "황녀전하와 황태자전하께오서 귀환하신다고 합니다."  ".......예........?"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멀쩡한 새벽에 손까지 부어 가며 이 사달을 내나요. 그리고, 그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말도 안 돼. 두 분 다 Ben 아카데미에 계신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지금 돌아올 수 있어요?” 그녀는 그저 어깨나 으쓱할 뿐이었다. 본인도 모른다는 건지 내게 알려줄 의사가 없다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한 달쯤 후에나 오신다고 하더군요. 예기치 않은 일에 지금 황성 전체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렇군요.” 좀 전에 당황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나는 가볍게 수긍했다. 좀 전의 소식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고 황성이 뒤집혔다는 것은 그 소식에 당연히 이어져야 할 매우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그 소식이 내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에 그러한 경향이 더 컸다. 물론 좀 의외긴 하지만. “얘기는 다 끝난 것 같네요. 그만 가 보셔도 좋습니다." “그럼.” 시녀는 허리를 숙이더니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가는 것과 방문을 닫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방이 남에게 보이기 민망스러울 정도로 너저분했다. 커튼을 걷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나 본인도 잠옷 차림이었다. 모든 걸 제쳐두고 방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몸에 힘이 없기는 했지만 방 청소쯤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원칙상으로는 이 방을 정리하는 것이 내가 아닌 하녀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임시일지라도 이 방의 주인이 나인 이상 이 방은 그러한 원칙의 예외가 된다. 그래서 가장 먼저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순간 엄청난 햇빛이 급작스럽게 방 안쪽으로 쏟아졌다. 갑자기 과한 햇살을. 생각했던 만큼 이른 시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눈을 뜰 때만도 짙게 푸르스름했던 하늘이 하얗게 바래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동이 트기 직전이었나 보다. 물안개가 짙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데...어째서. 목에 무엇이 걸리기라도 한 듯 기분이 답답해졌고, 동시에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한숨이었다. 여기는 대제국 A이다. 여기는 그의 수도 B이다. 이곳은 A의 황성인 Ad이다. 그리고 나는 몸을 의탁한다는 명목 하에, 이유도 모르고 이곳에 억류되어 있다.
3 이름없음 2022/02/01 02:14:38 ID : 3DAqrBta2mk 0
(인명, 지명 이니셜로 바꿀까 했는데 귀찮네 하하 그냥 이대로 올리겠슴) 가출을 했었다. 단순히 집을 나가 며칠씩 외박하다가 돌아가는 것에 그치는 수준이 아닌, 애초에 내 나라 자체를 뜨는 그런 가출을 했었다. 목적지도 정처도 없었다. 그저 무작정 집을 떠났고, 모국을 떠났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그저 그 나라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다. 모든 것을 잊고서. 그러기에 내가 떠나리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내 가족에게는 물론이고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불가피하게도 그 나라의 한 사람에게는 그것을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사람과 내가 그다지 자주 마주치지도 않았고 서로 그다지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으며 그 사람이 내게 큰 존재가 되지 못했고 나 역시 그 사람에게 큰 존재로 인식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과 나의 가장 큰 연결고리는, 유대감이나 친밀감 같은 어떤 감정이 아닌, 그 사람이 내게 준 모종의 도움이었다. 그 정도로, 이런 식으로 말하기에는 조금 미안하지만, 내게 무의미한 사람이었다.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떠난 여행이다. 내가 떠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유일한 사람은 내게 어떠한 의미도 되어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만큼 떠나는 발걸음은 서글펐고, 우울했으며, 또한 외로웠다. 애시당초 떠날 계획조차도 미리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의 친구나 가족들 중 어느 누군가가 나를 알아줬으면, 나를 잡아줬으면, 나를 찾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그런 욕심을 부리기도 했었다. 그때의 나의 이기심이란 그랬다. 나는 다이안 출신이다. 다이안. 그런 식으로 열흘 가량을 길에 쏟아 나라 끝에 도달했다. 애초에 다이안은 굉장히 작은 나라였다. 그랬기에 나라 정중앙에 있는 수도에서 출발해 타국과 인접해 있는 국경 지대까지 걸어가는 데 기껏해야 열흘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쉬엄쉬엄 가면서 놀기까지 했는데. 물론 가끔씩 걷는 데 염증을 느끼면 자전거를 타기도 했고(다이안에서 제일 크게 활성화된 공공기관이 자전거 대여소였다) 마차를 타기도 했지만. 국경 지대라고는 했지만 그 분위기는 국경 지대라는 이름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느슨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전시 상황도 아니었고 타국에서 쳐들어올 이유도 가능성도 없다시피 하는 이 판국에, 뭐 하러 굳이 삼엄한 경계태세를 유지하느냐 말이다.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솔직히 말해 다이안은 아까도 말했듯이 지극히 작은 나라였던 데다가 지리적 요충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부유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타국에서 쳐들어올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건 좀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인데, 타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이안을 정복하는 것은 쓸데없는 짐짝을 사서 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인 것이었다. 어차피 다이안을 정복해 봤자 얻는 이득이라고는 영토가 아주 조금 넓어지는 것뿐이고, 다이안을 관리하느라 보는 손해 나태함과 안일함의 표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던 그들의 태도 덕분이었는지 나는 별 절차 같은 것도 없이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환영할 일이었다. 신분 세탁을 했기 때문에, 타국에서야 상관없지만 최소한 다이안에서만큼은 자세히 신원 검사를 하게 되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마냥 그것에 대해 희희낙락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은, 고인 물이 썩어 가고 있는 것이 버젓이 눈앞에 보인 탓이었다. 내 여정의 초반은 매끄럽고 순조로웠다. 다만 어디까지나‘초반’에만. 다이안을 막 나온 내가 제일 먼저 방문한 국가는 소르헨이라는 나라로, 다이안보다 네 배는 큰 왕국이었다. 또한 굉장히 부유한 나라이기도 했다. 상업특성화 국가였으니까. 그곳의 수도는 카나바로, 세계 6대 상업 도시 중의 하나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카나바에는 대규모 상가가 일고여덟 개 정도 있는데 각각의 상가마다 크고 작은 상점들이 약 이천 가구 가량으로 조밀하게 들어차 있다고, 더구나 그 상가들은 소르헨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카나바와 그 주변 위성 도시에 밀집되어 있다고 했다. 아무리 세계 6대 상업 도시 중에 하나라고 해도 그렇지, 수도권에만 해도 그렇게 많은 상점들이 있는데 상업특성화 국가인 소르헨 전체에는 얼마나 많은 상점들이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대륙 상권의 15%정도는 이 왕국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나는 소르헨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기로 했다. 명색이 상업특성화 국가인데, 그 얼마나 복잡할 것이냐 말이다. 대신 그 바로 옆 국가인 베나세프트로 가기로 했다. 베나세프트는 그 이름만 대도 대륙 전체가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교육 국가였으므로 적막하리만치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내게는 안성맞춤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가지 번거로운 것은, 내가 소르헨을 통과하여 베나세프트에 가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카나바에 들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르헨 출국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또한 소르헨에서 베나세프트로 바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 바로 카나바에 설립된 대륙횡단행 기차였기 때문이었다. 썩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다이안과 소르헨이 인접해 있는 국경에서 카나바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카나바는 역시나 예상대로 복잡한데다가 번잡스럽기 그지없었다. 본격적인 상가 쪽으로는 애초에 향하지도 않았건만 당장에 기차역 코앞에서만 해도 쉴새없이 호객행위를 해 대는 상인들로 북적거렸던 것이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없던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으니 말이야 다 했지 뭔가. 덕분에 나는 애초에 세워 두었던 내 나름의 짤막한 여행 계획까지 수정해야 했다. 원래 나는 여독이나 풀 겸 카나바에서 며칠 정도 머물며 책이나 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것도 곤란할 것 같았다. 카나바에 한시라도 더 오래 머무르는 것은 여독을 푸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만 쌓는 꼴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대륙횡단행 기차표를 끊었다. 표 시간대를 보자니 시기상조였던 것인지 그 시각에서 약 일고여덟 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빠른 기차라고 해도 대륙횡단이라는 것이 단시간에 가능할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일반적으로 기다리는 데 길게는 아흐레에서 열흘 정도까지 걸리기도 했고, 그것을 각오하고 있기도 했건만. 하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애매하기도 했다.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면 여관을 한 군데 잡아 놓고 며칠간 그곳에 틀어박혀 있으면 된다지만, 일곱 내지 여덟 시간이라는 것은 여관을 잡고 머무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동시에 상가를 돌아다니며 허비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기차 시간이 될 때까지 역 근처 도서관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오전 열 시부터 일고여덟 시간 동안 눈치 보지 않고 쉴 수 있는 곳은 내가 생각하기에 도서관 한 군데뿐이었다. 그리고 근처 도서관엘 가는 길에, 그 모든 일의 원흉을 만났던 것이다. 처음에는 녀석이 그다지 크게 위협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그 누가 봐도 녀석의 모습은 순진스러운 어린 소년의 그것이었을 뿐이었으니까. 올리브색 고수머리를 한 녀석은 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턱시도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그저 제 부모의 취향이려니 하고 무심히 넘겼었더랬다. 녀석은 길 복판에 서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녀석을 지나치려 했건만 녀석은 연고도 없이 내 옷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녀석의 통통하고 발그레한 뺨과 말랑말랑해 보이는 흰 피부, 둥글둥글 큼지막한 눈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녀석을 귀엽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어지간한, 특히 모성애 혹은 부성애가 강한 사람이었더라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만약 녀석이 잡은 것이 내가 아니라 그런 류의 사람이었더라면, 그들은 녀석이 자신을 붙잡았을 때 간이라도 다 빼 줄 것처럼 굴었을 것이다. 그러나 녀석에게는 안 된 일이었지만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었다. 어린아이라는 것은 항상 내게 성가신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귀여운 아이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녀석들이 나와 말을 섞거나 그 이상의 접촉을 한다면 그것은 매우 달갑잖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때문에 녀석이 나를 붙잡았을 때 나는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녀석의 손을 뿌리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왜요, 주드?” 녀석이 다이안 사람이 아니리라는 것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다이안 인과는 외양도 달랐을 뿐더러, 다이안 자체가 원체 작고 그만큼 인구수도 적다 보니 타지에서 다이안 인을 만난다는 것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일이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내 말을 이해했다.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한 말은 다이안 어가 아니라 대륙공용어였으니까. 이 긴 이름을 가진 언어에도 제 나름대로 별 것 아닌 사연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일단은 이 언어가 만들어진 지 약 300년가량 됐다는 것과, 이 언어의 정식 명칭이 '피츠크'라는 것 정도만 알아두고 넘어가자. 어쨌든 그 순간 중요했던 것은, 녀석이 나의 짜증에도 상관없이 내게 제 용건을 토로했다는 것이니까. “시드, 나 좀 도와줘.” “네?” “나, 길 잃어버렸어. 아는 형이랑 놀러 왔는데 어쩌다 보니 떨어지게 됐어. 나 형한테 좀 데려다 줘.” 그런 걸 왜 나한테 부탁하나요,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강하게 들었다. 왜 하필 난데요. 나도 이 지역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이 지역 지리를 몰라서 지도 보고 다니는 형편이에요. 그러니 내게 그런 것 부탁하지 말아요. . 속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에 녀석은 어느 사이 내 손을 붙들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 손을 뿌리치리라는 생각으로 녀석을 똑바로 쳐다봤지만, 결국 나는 그 생각을 행동으로 이행할 수 없었다. 녀석의 눈. 녀석의 눈은 평범한 사람의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흔한 흑갈색의 눈이었다. 그러나 그것에서는 묘하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기시감에, 그 순간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것은 절대로 대여섯 살 정도 된(녀석의 외관으로 보았을 때 녀석의 나이는 딱 그 정도로 느껴졌다) 어린아이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녀석이 평범한 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 것도 그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동시에 절대로 녀석의 말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공포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말 그대로 그것은 녀석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녀석이 누군지는 몰라도, 녀석의 말을 거절했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두려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만큼의 이성도 추스르지 못한 채로, 나는 어느새 녀석의 손을 잡은 그 자세 그대로 녀석이 제 형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있는 걸로 추정되는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손을 빼고 싶었다. 손을 빼고 녀석의 시야 바깥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녀석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은 녀석의 손에 붙들려 있는 내 손을 매개체로 나 자신이 위협받는 듯한 느낌을 받게 했다. 녀석에게 손이 잡혀 있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섬뜩한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녀석의 손이 끔찍한 흉기라도 되는 마냥. 그러나 내 마음대로 그 손을 놓는 것도 곤란했다. 손을 놓는 순간 녀석에게 진짜로 공격받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무시하고 함부로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녀석에게 잡힌 손에 땀이 찼다. 녀석은 그런 나를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내 이름은 웨이드 베숀이야.” 가던 길에 녀석은 뜬금없이 묻지도 않은 제 이름을 밝혔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통성명도 없이 그저 이리 가 보자, 저리 가자 명령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무감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당신 이름 따위 궁금하지 않아요. 그 때의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빨리 녀석의 형이라는 남자를 찾아서 녀석을 내게서 될 수 있는 한 멀리 떼어 놓는 일이었다. 녀석은 그걸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다시금 키득키득 웃었다. 다시 한 번 소름이 오싹 끼쳤다. 내가 무슨 정신으로 녀석을 제 형이라는 사람에게 데려다 주는 일을 마쳤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웨이드 녀석에 대한 공포에 질려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마지막에 녀석이 아는 형이라고 소개했던 그 남자가 자신을‘네다 렘크러스’라는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는 것뿐. 내가 알 게 뭔가 싶었다. 허겁지겁 인사를 마친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베나세프트 행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그 순간만큼 고마운 적이 없었다.
4 이름없음 2022/02/01 02:15:33 ID : 3DAqrBta2mk 0
그 이후로 베나세프트에 도착하기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정말 아무 일도. 무난하게 도서관에 도착했고 무탈하게 기차에 탔으며 아무 일 없이 베나세프트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게 정상인 게 분명한데, 나는 오히려 그것이 불안했다. 폭풍전야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비단 그것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 불안감이나 예감이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내 예감은 다시 한 번 그 정확성을 내게 실감시켰다. 베나세프트에 도착한 직후 나는 여관을 하나 잡아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 봤자 큰 슈트케이스 하나에 옷과 각종 생필품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여비에서 그치는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가방을 열고 옷가지들 몇 벌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당황했다. 그 이유인 즉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목걸이가 내 슈트케이스 안에 얌전히 모셔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건 꽤나 비싸 보였다. 백금인지 은인지 모를 체인과 테두리 장식 한가운데에 직경이 1인치 가량은 되어 보이는 코발트블루 빛 사파이어가 달려 있었으니까. 사파이어와 테두리 장식 사이에는 여섯 개의 다이아몬드가 자기 자랑이라도 하는 듯 반짝반짝 발광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황망한 기분으로 그 목걸이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테두리 장식 세공이 언뜻 봐도 매우 정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뭘까. 이런 게 왜 내 가방 안에…. 잠시 동안 고민하기는 했지만 나는 이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신분 세탁 이전의 나는 다이안 내에서만큼은 나름 거부의 딸이었으므로, 짐을 꾸리다가 우연히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책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나는 그 목걸이를 다이안 내에서 짐을 풀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좀 더 유의해야 했다. 그랬더라면 며칠 후에 내가 머물고 있던 여관에 난입한 병사들에 의해 끌려가게 되는 일은 없었으리라. 그들은 나를 도둑년이라고 부르며, 몇 주째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가더니 꼴좋다고 조롱했다. 도둑 따위에게 예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그들의 말에 그 목걸이가 내 집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목걸이는 장물이었다. 그들에게 해명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곧 포기했다. 내가 훔친 것이 아니라고 말해 봤자 그들이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들의 태도로 봐서는 내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해명을 한다 해도 도통 들어 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저항하는 대신 끌려가는 동안 그 목걸이가 어떤 경로로 내 수중에 들어왔는지를 생각했다. 분명 다이안 내에서는 한 번도 그 목걸이를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소르헨에서도, 기차에서도. 내가 그것을 처음 본 곳은 베나세프트 수도에 있는(기차는 국가 외곽을 거치지 않고 수도에서 수도로만 직행했다) 한 여관의 객실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목걸이가 내 슈트케이스 안에 들어온 걸까? 내 슈트케이스에 누가 손댄 적도 없고 내가 직접 그걸 내 짐 속에 넣은 적은 더더욱 없으니.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모르겠어. 어찌 된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후회가 되었다. 그런 목걸이 따위, 왜 계속 가지고 있었는지. 그래 봤자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 것을. 차라리 진작에 처분해 버릴 것을. 내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랬더라면 이런 식으로 도둑 누명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그랬더라면 혐의는 받지 않았겠지만 내가 진짜 도둑이 되었겠지. 내 것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물건을 내 임의로 처분하다니. 생각을 너무 깊게 한 걸까? 스스로 내 생각의 늪에 빠져 이유 없는 딜레마에 휩싸이는 나를 발견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내 팔을 붙들어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는 병사들에게서 어떤 정보라도 캐내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그들은 대답 없이 그저 나를 비웃었다. “어떻게 날 찾았나요?” 그들은 그 질문에는 반응했다. 그들의 대답은 나를 더 효과적으로 조롱하기 위해서나 나온 듯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원하던 정보는 확실히 얻었으니까. “멍청한 계집애 같으니. 목걸이에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건 추호도 몰랐지? “뭐라고요?” 위치 추적 마법. 마법. 마법…. 마법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단어는 결단코 아니었고 생소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상황이 조금 특이한 상황인지라 그런 것이고 일반인들에게는 꽤나 생소한 단어일 것임이 확실했다. “마법이라니요? 지금 저랑 장난하시자는 거예요?” “네가 알 만한 일이 아냐. 입 닥치고 따라오기나 해.” 그래서 나는 입을 닥치고 도로 생각에 잠겼다. 마법. 그 단어를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채 열세 달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내가 열여섯 살이었던 그 봄날의 시점에서. 마법은 없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모두가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그 때의 1년 전까지만 해도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1년 전에 진짜 마법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내게 말해 줬다. 내게 마법이라는 것을 보여 줬다. 진짜 마법을 보면서도 나는 그것이 영 먼 일인 양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내게 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일 자체가 마법이다.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약 천육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나 마법사들이 적지는 않았다. 허나 현존하는 마법사가 없는(대외적으로만 그렇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것은, 천육백 년 전에 있었던 마법사 대반란 기간 동안에 수많은 마법사들이 학살당해서이다. 반란이 어째서 일어났고 그것이 어떻게 진압되었는가 하는 등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정확히는 국가가, 아니 대륙 전체의 권력자들이 그것을 덮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그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로나, 별 시답잖은 삼류 전설로나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실재했던 역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미 알아보기에도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일이고 전설 따위에 매달려 모든 것을 캐어보려는 역사가도 고고학자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그런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마법사 대반란인지 뭔지, 별 같잖은 동화에 뭐하러 신경을 쓰겠느냐는 것이다. 이미 세상에 문명이란 것이 제법 발달한 이 시점에서, 애들이나 좋아할 소재인 마법 따위는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이며, 마법사 대반란 따위도 그저 옛사람들의 초자연현상이나 초능력에 대한 동경심이 만들어 낸 전설의 한 조각 정도로만 여기는 것이다.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는 멍청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런 이 시점에 도대체 어떻게, 물론 어마어마하게 비싸긴 하지만 결국엔 한낱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 목걸이에 마법이 걸려 있는 걸까. ……사실 내가 할 생각은 아니지만. 내가 입을 다물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에 병사 둘은 목적지에 도달한 듯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도 어떤 여관으로 보였으나, 내가 묵고 있던 여관과는 질이 달랐다.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꽤나 화려했다는 것만 알아두길. 그들이 나를 끌고 간 곳은 크림슨 색 머리의 중년 사내 앞이었다. 그는 마른 체구에 피부가 창백하고 혈색이 좋지 않았으며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태도나 옷차림을 보아하니, 평민은 아닌 듯했다. 그 말인 즉슨 그는 귀족이었다는 말이었다. 그는 왠지 모르게 실내에서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그 모자를 집어던졌다. 모자에 맞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다른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크림슨. 지나치게 익숙한 색이었다. 오심이 치밀어 오르는 동시에 속에서 일렁이는 불안감이 덫처럼 발목을 죄어 오는 듯. 불안감의 수렁에 깊이 가라앉는 듯. 기억 속의 잔상이 목을 틀어쥐는 듯.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전신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를 반복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가 귀족이라는 것은 상관없었다. 도둑 누명을 쓴 것도 상관없었다. 그 남자가 내게 한 모욕적인 행동도 상관없었다. 그 남자가 가진 머리카락 색이 나는 그 순간 너무나도 두려웠고 불쾌했다. 내가 하얗게 굳어져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는 병사들에게서 목걸이를 받아 들고 그것을 제 옆에 있던 시종에게 건넨 뒤에 내게로 다가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 따귀를 후려갈겼다. 머리 꼭대기부터 찬물을 뒤집어쓰는 것 같았다. 한낱 평민일 뿐인 데다가 도둑으로까지 몰린 이 상황에서 내가 할 행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개를 쳐들어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실 의도치는 않은 행동이었다. 본능에 가까웠다. 남자의 관자놀이 근처에 핏대가 서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도둑년!” 남자가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이 목걸이와 나를 확인하자마자 그 반동으로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귀족 대 평민의 대면이라 하더라도 귀족으로서 함부로 입에 올릴 만한 단어가 아니었다. “그 목걸이가 몇 티유인지나 알아?” 알려나 주고 물었으면 억울함이나마 덜했으려니 싶었다. 당연하게도 모른다. 내가 알 이유도 방법도 없다. 다만 굉장히 비싸리라고 막연하게나마 짐작한 것이 전부다. 철컥,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차가운 금속성 물체가 이마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장전된 리볼버 권총이었다. “자그마치 150만 티유다! 어때. 거물이지? 이렇게 잡혀서 아깝지? 아쉽지? 당장 팔아치우기만 했어도 지금 이렇지는 않았을 테지? 멍청한 년 같으니, 넌 물건을 잘못 고른 거야! 어디서 감히! 감히, 감히........” 150만 티유. 무서울 정도의 금액이었다. 고작 목걸이 하나에 저런 사치라니, 어떻게. 남자가 저렇게 분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비싼 목걸이를 도둑맞았으니.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완전히 채웠다. 지금으로선 내가 범인으로 간주되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남자의 얼굴은 시뻘게져 있었고 손끝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게 시급한 문제는 앞으로의 일보다 당장 남자가 한 번 더 날릴 것만 같은 따귀를 피하는 일 같았다. 아니면 방아쇠를 건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을 잘 살피다가 다음 순간 날아올 총탄을 피하는 일이거나. 마지막 순간에 남자가 이성을 되찾은 것이 내 뺨에나 이마에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나를 추궁했다. “목적을 말해.” “…목적이라니 무슨?” “.” 무엇을, 같은 의미를 내포하는 질문을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굳이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어째서인지 별안간 내 머리를 겨냥한 리볼버가 그렇게 두렵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정말 내게 무서운 것은 남자의 분위기에 가까웠다. 차분히 해명을 시도했다. “제가 훔친 게 아닙니다.” 남자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는 무감하게 그것을 보았다. “다시 한 번 묻겠어. 어디서, 왜 훔쳤지?” “제가 훔친 게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무슨 이유로 그걸 훔쳤겠습니까? 제게도 웬만한 액세서리를 살 만큼의 금전은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꾸미는 것과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제 옷차림으로 증명이 될 텐데요.” 남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내 목을 눌러 죽이고 싶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 와중에 방문 하나가 열렸다. 어지간해서는 눈에 잘 띄지 않을 위치에 있는 방문이었다. 열린 방문 사이로,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애 하나가 걸어 나왔다. 여자애는 내 앞에서 나와 언쟁을 벌이고 있던 남자와 똑같은 크림슨 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으며 피부색이 희었다. 여자애는 남자의 딸인 듯했으나, 오히려 제 아버지보다 더 건강이 좋아 보였다. 오만한 표정의 그녀는 그러나 자신을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옥신각신하고 있던 나와 남자의 태도에 기분이 좀 상한 듯했다. 여자애는 나와 남자 곁으로 다가왔다. 표정은 여전히 오만했으나 나는 그것으로 인해 외려 여자애가 나보다 더 어리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오만한 표정과 거만한 시선, 그것이 그 여자애의 본질적인 성품의 표현이 아니라 그저 어린애의 치기로만 느껴진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여자애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예의 그 거만하고 나른한 시선으로 나를 훑어보았고,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미리 말했듯이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나보다는 작았다. 여자애는 내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알고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나를 그곳까지 끌고 온 병사를 시켜 내 무릎을 꿇렸다. 그 때까지도 나는 남자를 대면하여 서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순순히 꿇려 줬다. 무릎 꿇리기 같은 것 한두 번 당해 본 일도 아니었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굳이 체력을 소모해 가며 반항할 생각도 없었다. 여자애는 나의 순응을 보고 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여태껏 나 같은 반응을 보인 사람이 없었던가 싶었다. 여자애는 내게 물었다. “네 옷차림이 어떻다는 말이지?” 방에서 나와 남자의 대화를 듣다가 나오기라도 한 듯한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보시죠. 제가 지금 겉으로 드러나게 입고 있는 옷은 블라우스와 회색 플레어스커트, 검은 재킷이 전부입니다. 아무리 봐도 화려한 옷은 아니지요. 그리고 제 슈트케이스를 뒤져 봐도 이런 옷만 나올 겁니다. 저는 이런 단순한 디자인의 무채색 옷이 아니면 입지 않습니다. 제가 화려한 옷을 좋아하는 성격이라면 굳이 이런 단순한 옷만 골라 입진 않겠죠. 하지만 이 옷들은 당신들 생각만큼 싼값은 아닙니다. 벌 당 적어도 100 티유는 넘죠. 실용성과 내구성을 충분히 고려한 옷인데다가 재질이 좋기 때문입니다. 튼튼하고 몸에 잘 맞으면서도 너무 거칠지 않은 옷이에요. 제 목에 걸린 이 검정 리본은 공단 리본입니다. 재킷은 린넨 천 재질이고요. 이것보다 싼 가격에도 훨씬 화려한 옷은 많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옷을 고른 이유는, 제가 실용성을 중시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비싼 옷을 살 만큼의 금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 2만 티유 정도 되는 돈이죠. 정 제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제 지갑도 뒤져 보시죠. 전 돈이 충분히 많고, 그 돈은 당신들 목걸이를 처분해서 나온 돈이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당신들은 제게서 목걸이를 되찾았으니까요.” “구변 하나는 좋구나. 그럼 이것도 증명할 수 있겠네. 넌 어떻게 그 목걸이를 손에 넣은 거지?” 나의 장황한 대답을 팔짱까지 끼고 듣던 여자애는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슬프게도, 나는 그것에 대해 답을 할 수는 없었다. 나 자신도 그 목걸이가 어디서 내 수중에 굴러들어왔는지 몰랐으니까. 대답 대신 나는 한숨을 쉬었다. 부녀(추정하기로는)가 죽이 척척 맞아서 나를 도둑으로 모는구나. 이럴 때 그럴 듯한 거짓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유감이었다. 물론 그만한 거짓말을 한다 해도 그들이 믿어 주리라는 보장도 없었지만. 내가 침묵을 지키자 여자애는 기고만장해지기라도 한 것인지 거기에 몇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네가 아까 한 말도 믿지 못하겠어. 네가 돈이 많다고 그랬니? 혹여 그게 네가 상습범이어서 그런 건 아니고? 여태껏 귀족들의 비싼 물건만 훔쳐다가 처분해서 번 돈은 아니냐는 말이야.” “아?” 그녀는 자신이 쓴 되도 않는 소설에 스스로 심취한 듯했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세상에, 어떻게 그래도 제법 품위 있는 교육을 받았을 것이 분명한 귀족 영애에게서 나온 발상이 저리도 조악한 것일 수 있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진 나는 비교적 올바른 이성과 지식을 갖고 있으리라 판단되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맥이 탁 풀리면서 체념했다. 남자는 여자애의 말이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의심이 가득한 눈길이 매우 심상찮았다. 부녀관계인 것이 확실했다. 리볼버가 내 이마를 떠나간 것 외에는 하나도 좋을 것이 없었다. “여태까지 조잡한 것들만 수시로 훔쳐대다가 이번에 큰 거 하나 물어서 횡재했다 생각했지?” 여자애가 제 말에 또 덧붙였다. 남자가 내게 분노할 때 마구잡이로 쏘아대던 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소리였다. 그 뒤의 일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진행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걸이를 매우 안전하게 갈무리했고 그들에게 완전히 도둑으로 인식된 나는 감옥에 가게 되는 대신에 그들의 저택에서 하녀 겸 시녀로 살게 되었다(어쩌다가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솔직히 기억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아마도 여자애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안다). 그들이 내게 제시한 급여는 월간 700 티유. 연봉으로 치자면 16800 티유 되는 돈이었다. 목걸이는 이미 돌려받았지만 그것이 내 자의로 그런 것이 아니기에 내가 목걸이 값을 충당하게 될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연간 16800 티유씩으로 150만 티유를 충당하려면 약 892년을 일해야 했다. 죽어서까지 빚더미를 끌어안고 죽어야 한다, 그런 뜻이었다. 그것도 내가 앞으로 80년을 더 산다고 가정했을 때, 약 812년씩이나 더. 그런 고로 나는 무급으로, 평생 동안, 저 혼자 머릿속에서 삼류 소설을 쓰는 데 여념이 없고 거만한데다가 독선적이기까지 한 여자애의 시중을 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허드렛일까지 겸하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거액의 가치를 지닌 목걸이 도둑으로 잡혔음에도 감방에 가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분명 관대한 처분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런 목걸이 내가 훔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건 분명 불법이었다. 끔찍했다. “변호사를 불러 주세요!” 기가 막힌 내가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부르짖었다. 물론, 입 속에서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평민과 귀족이 시비가 붙었을 때 변호사라는 것은 없다. 결론은 무조건‘평민이 나쁘다’였다. 도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시비가 붙은 귀족 본인들의 대다수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희귀한 경우지만, 몇몇 양심 없는 귀족들은 무조건 본인이 옳다는 둥 스스로를 세뇌시키기도 했다). 그래도 귀족들은 평민들을 그렇게 잡아다가 부려먹었다. 전 세계 어디서나 흔히 자행되는 일이다. 설령 외국인이라고 해도 예외가 되지는 못한다. 그 평민과 귀족 출신 국가의 국력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지는 경우도 몇몇 있었다고 풍문으로 들은 일은 있지만, 그러한 경우는 자기세뇌귀족의 경우보다도 더 희귀하다. 그렇기에 거기에 걸린 평민만 불운하다 판명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5 이름없음 2022/02/01 02:16:18 ID : 3DAqrBta2mk 0
그런데 그것이 그랬다, 그 첫 번째 근거는 남자가 소유한 저택의 분위기였다. 나는 귀족가의 저택이 그렇게 조용하고 차분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음, 사실.......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내게 얘기해주지 않았기에 그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그랬다. 어쨌든 그렇기에 저택 내는 정말이지 정적의 결정체였으며,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우울한 분위기 따위 내가 알 게 뭐냐. 그저 조용한 것이 좋았다.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근거는 바로 여자애였다. 여자애는 내 예상보다 어리지 않았다. 당시에 내가 열여섯 살이었고, 여자애가 열네 살이었으니 나와 두 살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정신 연령 역시 약간의 조잡스런 공상만 제외한다면 그녀 나이 또래의 것에 걸맞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하이엘 카파멜라 엘제드. 예상대로 남자의 딸이었으며, 남자는 대제국 아젤라이다의 변방인 엘제드의 영주인 동시에 남작이라는 신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분명 높은 신분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귀족은 귀족이라는 것인지. 남자는 자신의 신분에 미묘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자긍심을 하이엘에게 그대로 물려줬던 것이다. 하이엘의 성격이 독선적이고 거만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하이엘에게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성격이나 태도에 큰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더하여 그녀는 머리도 꽤 좋았다. 하이엘은 체스를 제법 할 줄 알았고 (그래도 나를 이긴 적은 없었다) 정원 관리에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독선적인 점만 뺀다면, 그녀는 그다지 나쁜 상전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좋아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친근할 수 없었다. 분명 그녀의 심성이 패악하거나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히 오만하고 독선적인 기질을 보였지만, 그것의 일부는 천성이라 치부하더라도, 사실 그 정도의 독선과 오만은 대부분의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녀를 대하는 것이 아주 지루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오만함과 독선적임을 보지 못 한 척 듣지 못 한 척 넘어가며 그녀와 친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와 내가 같이 지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그녀는 점점 내게 이유도 모를 어떤 기묘한 친근감을 느끼는 듯했지만, 나는 그런 그녀에게 웃어주지 않았다. 구태여 그럴 생각도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그 곳에서 1년을 살았다. 처음 엘제드에 도착했을 때 내 나이 열여섯 살이었고 현재에 열여덟 살이니, 내 열일곱의 새해는 그곳에서 맞이한 셈이었다. 그 즈음 하이엘은 내게 황당무계한 소식을 명령처럼 던졌다. “제안, 너 벨로르트에 가게 됐어.” 예? 반문하기도 전에, 모든 일은 이루어졌다. 실감은 느렸으나 실행은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짐은 모두 내가 처음에 끌고 다니던 슈트케이스에 정리되어 있었으며, 나를 기차역까지 바래 줄 마차 역시 엘제드의 성문 앞에 준비되어 있었다. “하이엘,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기차역에서 그렇게 물은 내게 하이엘은 이렇게 답했다. “제안, 네가 그 성에 가고 싶다면 너는 그 성에 가도 좋아. 하지만 네가 그 성에 가고 싶지 않더라도 너는 그 성에 가야 해. 그러니 그 성에 가는 것을 네가 원하는 것으로 만들어.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야.” 나의 명목상의 주인인 하이엘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녀 나름대로 내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충고였겠지만 나는 오히려 마음을 상했다. 그녀의 독선적임을 항의하고 싶은 나의 감정과는 반대로 나는 나의 한숨마저 삼켜야 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그녀를 좋아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공기는 쌀쌀했으며 날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흐릿했다. 기차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덜컹, 하는 금속음을 내며, 기차는 느리게 움직였다. {Agellida} 근 2년 그리고 1년 전의 짧은 과거를 차례로 곱씹으며,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마지막 책을 책상 위쪽 벽에 붙어 있던 선반 책꽂이에 꽂았다. 썩 좋은 기억이 아니었던 탓인지 기분 역시 그다지 좋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것의 원인은 비단 기분 나쁜 기억에 대한 불쾌감뿐만이 아니라 전날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과, 그 밤에 잠든 이후로 꾼 지독한 악몽까지 겹친 복합적인 요인이었다. 꿈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느낌은 확연하게 잔상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가위눌림과도 같았으며, 지독하게 불길하고 오싹한 느낌이었다. 언뜻 총구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상한 일이었다. 흔히 꿈에서 보았던 것이 기억나는 경우는, 그것이 아주 유별난 것이거나 꽤나 인상적인 것일 때에나 있는 일인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하물며 총 그 자체도 아닌 총구라니. 총구라는 것은 절대로 유별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그것이 내 꿈에서 그렇게 인상이 깊은 것이었더란 말인가. 나는 모르겠다. 아무것도. 그저, 그저 어쩐지 또다시 불길함을 느꼈을 뿐이다. 헌데 이것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지난 2년간 엘제드와 벨로르트에서 지내는 동안은 한 번도 이러한 불길함 내지 불안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이엘의 목걸이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기 직전에 느낀 불안감이 바로 내가 마지막으로 느꼈던 불길함이었다. 그러나 그 때와 지금을 동류로 볼 수는 없다.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금 내가 느끼는 불길함에 비하면 그 때의 그것은 아주 미약한 것이었다. 검푸르고 질척한, 알 수 없는 것이 온 몸을 뒤덮는 느낌. 온 몸이, 특히 뒤통수가 차게 식는 그런……. 젠장. 앞으로 무슨 일이 내게 닥쳐올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그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 정도일 뿐이다. 그것도 지독하게. 언제나 그랬다. 나는 내게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인지, 나쁜 일이 있을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감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는 못했다. 몇몇 사람들이 내게 말한 일이 있었다.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지 나쁜 일이 있을지를 아는 것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라고. 나는 그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이 말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예감이라는 것이 좋은 일 쪽이라면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기대감을 가지고 내게 있을 좋은 일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무언가 잘못된다고 해도 최악으로 다가오는 그것은 그저 내가 느끼는 약간의 실망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쁜 일 쪽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언가 내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걸 알게 되면 불안감이 생긴다. 더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마련할 수 없다. 그러니, 그러한 경우에도 내게는 최대한 몸을 사리며 그 상황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알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좋지 않은 일이 내게 생기리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기분, 더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무력감을 느끼는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그리고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며 내가 할 권리를 할당받은 일은 얼마나 되는가. 또한 할 만한 일에는 무엇이 있는지. 서재로 내려가 책을 읽는 것 따위는 질리도록 해 봤다. 서재에서 내가 읽은 책들은 전부 최소 대여섯 번씩은 반복해서 읽힌 것들이었다. 그 외에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은 하나같이 허가받지 못한 것들뿐이었다. 1년간 갇혀 살다시피 하며 제일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독서뿐이었으니 그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책 읽는 것이 질리자 나는 정원 관리에 나섰다. 엘제드에서 했던 것처럼 체스나 카드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런 것의 맞상대가 되어 줄 사람이 없었다. 벨로르트에 머무는 사람들 중 나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방을 출입하는 유일한 사람인 나의 전속 시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저 상부의 명령이 있을 때마다 내 방을 들락거려 이런저런 소식이나 배급품 비슷한 물건들을 전해 줄 뿐이었다. 그것이 섭섭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애초에 황성이라는 화려한 겉껍데기에 뒤덮인 유혈사태 없는 전쟁터에서 인간의 온정이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더하여 나는 정에 목말라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다만 불행한 것은 이곳이 지나치게 무료하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기에, 잠깐의 외출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나는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지루함에 못 이겨 미쳐 버려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 정원 관리도 오래 하지는 못했다. 아드클리사의 정원은 무척이나 크고 넓었으며, 그에 못지않게 솜씨 좋은 일류 정원사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의 손을 거쳐 간 정원은 지상 낙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흐드러지게 핀 꽃들과 여리고 푸른 관상수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평생 식사와 정원 관리만을 번갈아서 반복해온 사람들만이 낼 수 있을 법한 솜씨였다. 그들이 손을 댄 곳에는 내가 더 이상 손댈 만한 곳이 없었으며, 설령 손을 그들이 미처 다듬지 못한 자리에 내가 손을 댄다고 해도 내가 다듬은 관상수들은 그들이 손댄 것에 비하면 항상 흉하게 두드러졌기에 어쩐지 민폐를 끼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정원 관리를 관두고서는 기어이 하녀들이 하는 허드렛일에 돌입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둘 수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것마저 하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필경 이미 질리도록 읽은 책을 끝도 없이 다시 읽으며 시간을 죽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한 일이었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6 이름없음 2022/02/01 02:16:52 ID : 3DAqrBta2mk 0
귀하게 자란 몸이 아니었기에 허드렛일이라는 것이 그다지 내게 익숙지 못한 일인 것은 아니었다. 하녀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다시피 하며 겪은 각종 잡역의 고됨은 명백한 나의 자발적 불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료하게 시간만 죽일 바에야 차라리 힘든 것이 나았다. 잡일을 하다 보면 지루함 같은 것 따위는 느낄 틈조차 없었다. 하녀들은 그것에 대해 불편해하지 않았다. 명색이 상전일 뿐 나는 절대로 그들에게 상전 같은 상전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와중에도 가끔씩 권태를 느꼈다. 영양가도 없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죽이거나 허드렛일을 하려고 다이안에서 멀기만 한 타국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무엇을 바라고 집을 나온 것인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바라던 것이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아드클리사 황성 내에서의 나의 생활에는 기약도 없었고 특별한 지시도 없었다. 평생 이렇게 성 안에 갇혀 지내야 하는 건가 하는 두려움은 가끔가끔 나를 덮쳤고,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끔찍했다. 그럴수록 나는 잡일에 열중했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그런 것,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어느 정도는 적중했다. 머리를 비우고 하루 종일 일을 하다 보면 육체적으로 매우 피곤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화위복의 상황으로 좋지 않은 생각 따위는 떨쳐 버리고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여전히 그것은 이따금씩 나를 잠식했지만 그 횟수는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의미 없는 노동으로 인해 그러나 덕분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기를 며칠, 그리고 어느 날 나의 시녀가 꽤나 오랜만에 나를 찾아왔다. “제안 님.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입니다. 지금 이 시각 이후로, 하녀들이 하는 잡일을 당장 그만두시라고 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내게 반문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인사를 꾸벅 한 뒤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분명 명목상으로는 내가 그녀의 상전이었고 그녀의 태도는 충분히 상전에게 무례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실질적으로는 내가 그녀보다 윗선에 있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에 있는데다가 그런 작은 일을 인해 징계를 내릴 성정이 아님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 이전에 내가 그녀에게 징계를 내릴 권리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대상 모를 분노가 치밀었다.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내가 할 만한 일을 마련해 주지도 않고서, 하물며 잠깐의 외출조차 허락해 주지 않으면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일조차 그만두라니. 그것도 상부에서 그런 명령을... 도대체 어째서. 그저 방 안에 틀어박혀서 그렇게 시간을 죽여 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라는 것인지. 도대체 내게 왜. 질문할 권리도 주지 않고서, 대답도 해 주지 않고서, 어째서 나를 이렇게 가두어 두는 것인지. 그 때에는 그런 분노와 의문이 섞인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내 머릿속을 미친 듯이 헤집어놓아 나를 혼란스럽게 했었다. 그 날 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미친 듯이 그것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다음 날, 베개에는 실밥이 터진 구석 하나 없었다. 화풀이조차도 마음 놓고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제는 내가 하루를 살아가는 것인지 죽어가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무감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무뎌진 것이다. 이런 것에까지 익숙해지니, 무뎌진 것이다. 이제는 이런 식으로 갇혀 있는 것에 대한 어떠한 회한도 분노도 없다. 그런 것은 모두 버렸다. 오히려 아까 바깥 상가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약간의 질시가 울컥 치솟은 것이 더 우스운 일이었다. 아직까지도 바깥에 대한 그리움의 잔여물이 남아 있었다니. 솔직히 가끔은 내가 정말로 살아 있는 인간이 맞는 것인가 하는 회의마저 든다. 손을 들어 본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다. 몇 달간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결과다. 이대로,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가는 것일까. 감상적인 기분과 자조적인 기분이 반반씩 섞여 묘한 기분을 이뤘다. 그것들은 천천히, 그러나 동시에 깊이 내 머릿속에 든 온갖 생각 사이를 파고들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나는 잠깐 동안 바닥에 누울까 고민하다 그저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방문을 열었다. 식사할 시간이었다. {Agellida} 아젤라이다의 음식들은 거의 대부분이 지나치다 느껴질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먹다 보면 혀가 아릴 정도로. 어떤 것은 너무 짰고 어떤 것은 입에도 대기 싫을 정도로 달았으며 또 어떤 것은 먹다 보면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질 만큼 썼다. 엘제드에서 1년, 그리고 벨로르트에서 1년 도합 2년을 아젤라이다에서 살았으니 이제는 적응할 때도 되었건만 나는 당최 아젤라이다의 식습관 문화에는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런 자극적인 음식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아젤라이다 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것은 물론 나도 납득할 수 있다시피, 아젤라이다 인들이 그런 음식에 익숙해 있으며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내가 음식을 대개 싱겁게 먹는 편인 다이안 인들 사이에서 자라서 그렇다는 것과, 천성적으로 자극적인 음식을 반기지 않았던 나의 미각에 의한 것이었다. 오늘도 나는 접시를 완전히 비우지 못했다. 원치 않은 일이었다. 아젤라이다에서 내가 포만감을 느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러한 경우는 손에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키만 컸다 뿐이지 살집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마른 체구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 내 꼴은 아마도 해골에다가 엷은 살을 대충 펴 바른 뒤 그 위에 푸석푸석한 회색 가발을 얹어 놓은 듯한 모양새일 것이다. 피골이 상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최근에 들어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이지 지겹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모든 것에 대한 의욕도 없고 기운도 없다. 식사를 마쳤건만 오히려 몸은 더 피로해진 느낌이었다. 다시 내 방까지 올라갈 일이 걱정이었다. 잘 만큼 자고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피곤한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다시 잠을 청할 도리밖에 없었다. 최근 나의 일상은 이런 피폐함까지 느껴지는 건조한 일과가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그런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누군가의 일상은 그 누군가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으로 다가오겠지. 다른 누군가의 일상은 그저 덧없이 흘러가는 지겨운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또 어딘가에서 흘러가듯 있을 누군가의 일상은, 그것이 그-혹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든 간에……. 어쨌든 온전히 자신의 일상으로 다가오겠지. 일상이라는 것은 그렇지.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축복받은 것이든, 지겨운 것이든, 고통스러운 것이든 결과적으로는 전부 그것을 겪는 사람의 몫이겠지. 그러나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이 과연 내게도 해당되는 말일까. 나의 일상이 온전히 나의 것이 맞는 걸까. 어릴 적부터 가끔 그런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나의 일상을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 우습고 하잘것없으며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내게는 그랬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짜증이 올라왔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생각으로 인하여 그다지 좋지 않았던 나의 유년기를 연상한 것이 그 원인일지도. 애초부터 그렇게 좋다고 말할 수 없었던 기분이 최악까지 치달았다. 그런데…… 아, 이런. 진짜로 속이 좋지 않다. 창자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복도를 다 가로질러 마침내 도착한 탑 계단이 마구 일렁거렸다. 끔찍한 복통과 어지럼증이 겹쳐졌다. 금방 쓰러지기라도 할 듯이. 최근 들어 자주 겪는 일이었다. 그러나 계단 앞에서 이런 증상을 겪는 일은 없었다. 곤란했다. 도저히 계단을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오르다가 혹 발이라도 헛디디면 1층에 되돌아갈 때까지 그대로 구르고 또 굴러야 하는 독특하고 위험하며 또 가파른 나선형 계단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상태로 저 계단을 올라간다는 것은 자살시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꽤나 고통스러울. 결국 나는 내가 지나왔던 복도를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든 가서 진정한 다음에 방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어쩌자고 정원으로 뛰쳐나온 것인지는 굳이 물을 필요 없었다. 반쯤 기다시피 해서 되돌아간 복도 끝에는 식당으로 향하는 문과 정원으로 향하는 문 두 가지 외에는 길도 없었고 계단도 없었다. 그리고 식당으로 향하는 문보다 정원으로 향하는 문이 비교적 더 가까운 데 있었던 것뿐이다. 팔로 하복부를 감싼 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러다 보니 낮은 벤치가 나왔다. 정원을 감상하던 사람들더러 이따금씩 쉬어 가라고 황실에서 설치해 놓은 것이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속이 도통 가라앉지를 않았다. 아프고 역겨웠다. 정원 내의 풍경이 어느 순간부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해진 것이었다. 암전. 악을 쓰고 싶어졌다.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금방 미치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황성에서 함부로 소란을 피울 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몸을 푹 수그리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양손으로 벤치 끝을 잡아뜯었다. 그렇게 나 혼자만의 조용한 발악을 하다가 그만 벤치 위에 고꾸라진 것이 마지막 기억인 것으로 안다. “......?” 기절한 것인지 잠든 것인지, 눈을 뜨고 보니 온 몸이 축축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통증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으나 굉장히 추웠다. 얼마나 오래간 이 빗속에서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그것이 비로 인한 것인지 그 동안 흐른 시간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빗속에서 그렇게 넋을 놓은 상태로 있을 수 있었는지 역시 의문이었다. 추측할 수 있는 바로는, ‘비가 내가 정신을 차릴 만큼 굵게 내리지 않았다가, 지금에야 막 빗줄기가 굵어진 탓에 내가 의식을 차린 것이다’정도였다. 그리고 그 추측은 아마도 거의 사실에 가까울 것이었다. 잠깐 동안 생각해 보니 벤치가 나무 그늘 밑에 있었음에도 내 옷과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보아, 아무래도 그 상태는 꽤나 오래 지속된 것으로 느껴졌다. 저체온증으로 실신하지 않은 것이 가상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굳이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바로 성내로 돌아갔다. 가뜩이나 춥거늘, 무엇 하러 그 빗속에 주저앉아 있겠는가. 이슐린티마 탑 꼭대기 3층 밑에 위치한 내 방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직후, 나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기에 걸렸다. 그것도 지독한 몸살감기에. 엿새 동안이나 방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물 한 모금 제대로 삼키기 힘들었으며, 침대를 벗어나는 움직임이 전신에 큰 부담을 줄 정도였다. 식사는 매 끼니 때마다 방으로 지급되었다. 그것은 묽은 죽이었다. 코가 막혀서 맛을 거의 느끼지 못한 탓인지 덕인지, 어쨌든 나는 그것만큼은 간만에 그럭저럭 먹을 수 있었다. 엿새가 지나자 몸 상태는 거동에 큰 제약이 없을 만큼 안정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후 나흘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하릴없이 창 밖 하늘과 방 천장을 쳐다보았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허감, 분명 나는 침대에 누워 있음에도 그 어떤 무한한 공간 내의 어느 한 지점에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열흘 뒤에 처음 그 방을 나왔지만 거기에도 물론 특별한 계기랄 만한 건 없었다. 말 그대로 무심결에 나온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 채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로, 습관적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 비척비척 걸어나왔다. 머리에는 아직 미열이 남아 있었으며, 두통 역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성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내가 혼절하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이름없음 2022/02/01 02:17:27 ID : 3DAqrBta2mk 0
2. 나와 관계없는 일이다 빈말로도 어둡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위는 그러나 고요히 침잠해 있었다. 모든 것이 미동도 없이 잠잠했으며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었다. 굳이 덧붙이자면 바깥에서 부는 바람에 그저 몸을 맡기고 흔들리는 식물들 정도나 될까. 완전히 혼자였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으며 무섬증까지 일었다.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황성 내는 결코 고요해서는 안 되는 장소였다. 하물며 지금은 한낮이었다. 날씨마저 절로 어딘가 놀러 가고 싶을 정도로 좋은. 왜지? 어째서 아무도 보이질 않는 거지? 중심을 완전히 잡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충동적으로 탑을 내려갔다. 계단 난간을 필사적으로 잡은 채였다. 누구라도 있어야 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아무도 없었다, 이런 황당한 전개. 현실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 신음인지 감탄사일지 비탄일지 혹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일는지 모를 단말마의 소리가 입에서 나직하게 터져 나왔다. 차라리 내려오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다. 그만큼 눈앞에 펼쳐진 식당의 풍경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음식물의 파편이 아직 남아 있는 접시들이 바닥 군데군데에 불규칙적으로 깨어져 있었으며 포크와 나이프 그리고 드물게는 스푼 몇몇 개가 식탁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그 상태가 며칠 동안이나 지속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식당 전체에는 조금 역한 냄새마저 흘렀다. 흡사 음식물이 담긴 접시를 옮기던 사람과 식탁에 앉아 식사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접시와 포크 그리고 나이프를 떨어뜨리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아. 순간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오히려 이렇다면? 어느 날, 내가 잠든 사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다면. 정말 그런 것일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건 왜? 그리고 어떻게? 말도 안 돼. 혼란에 혼란이 겹쳐졌다. 싫었다.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원래 사람이 차고 넘쳤던 넓은 공간에 혼자 남겨지는 것까지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그만 내가 섰던 자리에 주저앉았다. 앞으로 약 닷새 후면 황실의 후계자들이 도착한다. 그리고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사실이지만, 이제 황성에 남은 것이라고는 나 하나뿐이다. 나도 그냥 이대로 훌쩍 떠나 버릴까. 사실 내 책임도 아닌 것을. 왜 이곳에 남겨진 것이 나 하나뿐인지를 고민해 봤자, 내게 돌아오는 이득도 없는 것을. 이곳에 돌아올 황녀와 황태자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들이 이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미쳐 날뛰건 말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몸을 떨었다. 이 순간 내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황실 후계자 남매가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할까, 아니면 아까 생각했던 대로 한시바삐 떠나는 편이 나을까. 문득, 뇌리 사이로 어떤 이름이 스쳐지나갔다. 그 이름에 나는 저주와 원망을 퍼부었다. 웨이드......, 그 망할 자식, 죽여 버리고 싶었다. {Agellida} 이슐린티마에서 무료하게 보낸 시간이 13개월이 되어 갈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반년 간 아드클리사 바깥으로는 걸음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즈음의 나는 내게 탐독이 허가된 책을 삼킬 듯이 읽고 또 읽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서재 소파에 하루 종일 몸을 맡겼다가, 서재 이용 시간이 끝날 때에서야 내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연 직후, 기절할 듯 놀랐다. 내 침대에 웨이드가 앉아 엇박자로 발을 까딱이고 있었다. 녀석은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간만이야, 시드.” “웨이드 씨.......? 그쪽이, 어떻게 여길?” 웨이드는 나의 추궁이나 다름없는 질문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녀석은 딴소리를 했다. “왜, 이번에는 주드라고 부르질 않아? 그쪽이라는 호칭보다는 주드가 더 듣기 좋은데 말야. 훨씬 부드럽고 편하잖아.” 나는 대답 대신 웨이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 무슨 뜬금없는 말인지. 녀석의 의중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 내가 먼저 슬쩍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녀석의 입가에 걸린 초승달의 양쪽 끝부분이 치켜 올라가는 것이 곁눈질로 보였다. 나는 녀석이 싫었다. 처음에는 녀석이 어린아이라는 점이 싫었고 그런 주제에 내게 말을 걸었다는 것이 싫었으며 이후에는 녀석만 보면 공포에 질리게 되는 것이 싫었다. 더하여 녀석의 의미심장한 행동 역시 싫었다.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설마 자길 다시 주드라고 불러 달라는 말을 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주드. 신분 고하와 남녀를 막론하고 지칭되는 대상이 지칭하는 대상보다 손아래일 경우에 쓰는 호칭이다. 흔히 잘 모르는 사람을 부를 때 쓰이는 호칭이다. 그러나,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 호칭의 기본적 원칙은‘손아래’. 웨이드는 절대로 나보다 어리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일 따름이다. “그쪽이 제게 ‘주드’라는 호칭으로 불릴 만한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오히려 제 쪽에서 시드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해야 할 형편일 텐데요.” 참고로 말해 두자면,‘시드’는‘주드’와 비슷한 양상의 호칭이다. 다만 ‘손아래’라는 단어가 ‘손위’로 바뀔 뿐이지. “어쭈........” 웨이드는 팔짱을 끼는가 싶더니 침대 옆 벽에 기댔다. 녀석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바보는 아니었군. 어쩐지 전번에도 눈치 챈 것은 같았지만.” 몸이 굳었다. 이 녀석, 대체 뭐 하는 녀석일까. “하지만 그렇게 똑똑한 것도 아냐. 이제 와서야 확신을 한 것부터가 그렇지. 일곱 살짜리 아이가 그 정도의 언어 수준을 구사하는 것도, 미아가 된 주제에 울지도 않고 남에게 자기 형을 찾아 달라고 하는 영악함이 그 애에게 있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설령 내가 천재 일곱 살이라고 가정해 봐도 이상한 점은 남아 있지. 이 머리색, 딱 봐도 염색한 거잖아? 세상에 선천적으로 올리브색 머리를 가진 사람이 어디 있어. 그리고 정상적인 부모가, 고작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이런 이상한 색으로 염색을 시키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정상적인 일곱 살짜리 아이는 아니야. 눈치가 있든가, 머리가 있든가 한 사람은 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걸 확신했을 거야. 그리고 말이지, 내가 네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고 널 찾아왔을 것 같아? 설령 네가 어디 있는지 알 방법이 있다고 해도, 여기까지는 대체 어떻게 온 걸까? 네다의 도움을 받았을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나 혼자 여기까지 오기는 어려운 일이야. 그런 요인들을 다 배제하고서, 그저 내 외관이 꼬마 모습이니까 나는 그저 귀여운 어린아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그건 바보 멍청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웨이드가 보통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챌 만한 요소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내가 녀석의 정체가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 그런 요인이 아니라 녀석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느껴진 기시감 탓이었음을 녀석이 알면 녀석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녀석은 입꼬리를 올린 그대로 말을 이었는데, 그럼에도 발음이 정확했다.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리고 그걸 입 밖에 낸 것도 절대로 현명한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지. 패를 내보이는 것만큼 한심한 짓도 없을 뿐더러....... 결국에는 미친년 취급밖에 받지 못할 게 뻔하지 않아? 이봐, 상식적으로 생각을 좀 해 봐. 아무리 내가 그렇게 수상한 점이 많다고 해도 결국에 내 모습은 7살짜리 아이에 지나지 않아. 어떻게 내가 아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어? 수상해도 미심쩍어도 의심스러워도 입 밖에 꺼내지 말고 그저 담아 두는 수밖에.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 내가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그 누가 믿어 주겠냐고.” “방금 전에, 당신을 어린아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멍청이라고 말한 것은 당신이에요.” “세상에는 멍청이가 너무 많아.” 너무 깔끔하니까 외려 허무해지는 답변이었다. 가만 보면 우월의식이 묻어나는 대답이기도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기도 했을 뿐더러 말을 하면 할수록 웨이드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는 기분이 든 탓에 더 이상 녀석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웨이드는 그런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벌어지는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어쩐지 대답을 바라지는 않는 것 같은 질문이었다. “그래서, 넌 왜 내게 대놓고 그런 말을 한 거지?” 녀석이 대답을 바라는 기색을 보였더라면 나는 무척 곤란해졌을 것이다. 녀석은 이미‘내게 대놓고 네가 어린아이가 아니다’라고 한 사람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바 있다. ‘내가 현명치 못해서 그렇다’같은 대답을 바라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러나 웨이드는 자문자답 형식으로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왜 그랬는지 알아. 내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지?” “뭐라고요!” 기분을 상한 것은 둘째 치고 말문이 막혔다. 녀석이 대놓고 그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그런 이유 때문에 웨이드에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어떻게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로 내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웨이드에게 다른 호칭을 요구했었나? 아니. 어쩌면 내심으로는 그런 마음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 것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웨이드, 녀석은 내 정곡을 찔렀다. 녀석의 말이 맞든 맞지 않든 간에, 녀석이 내 자존심을 북북 긁어 놓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변명해 보았다. “뻔히 다 알면서도 속이 비쳐 보이는 가식을 당신과 떨기 싫었을 뿐이에요.” “핑계 없는 무덤 없지. 거짓말인 게 뻔히 보이는데?” 웨이드는 느긋하게 답했다. 빙글거리는 웃음이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그 작태에 별안간 열이 올랐다. “아무래도 좋아요. 나가 줘요. 아무리 임시라도 여기는 내 방이에요. 당신이 들어올 만한 자리는 아니라고요.” 내 목소리가 내 생각보다 훨씬 담담하게 나온 것에 나는 스스로 약간 놀랐다. 웨이드는 말이 없다. 초승달이 그믐달로 기우는 것이 보였다. “성질이 급해, 주드.” 소년의 모습을 한 성인 남성이 고개를 쳐든다. 순진해 보이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본다. 녀석은 다시 나를 주드라고 불렀다. 한 대 치고 싶은 마음과 두려움이 제멋대로 섞여서 속을 들썩였다. “나는 아직 내 용건도 말하지 않았어.” “그 용건이라는 게 뭔데요.” “주드. 어쩌다가 이곳에 발이 묶이게 되었지?”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녀석은 내가 이슐린티마에 억류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녀석은 지금 내게 그 경위를 묻고 있다. 나는 그 내막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경위에 대해서야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저 웨이드 녀석 역시 그 경위를 알고 있는 것 같다. 알고서도 내게 묻는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녀석은 내막도.......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으로 굳어진 손을 움켜쥐었다. 녀석의 웃는 눈이 재차 내게 묻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내 급소에 뭐라도 꽂아 버릴 법한 눈길이었다. ‘어쩌다가 이곳에 발이 묶이게 되었지?’ 어쩌다가, 라고 묻는다면, 역시 근본적인 이유는 그 빌어먹을 목걸이 때문이겠지. 보고 있자면 입이 절로 벌어질 만큼 예쁘고, 가격을 듣자면 벌린 입을 동굴 입구로 만들다가 자칫 턱이 빠질 만큼 비싼, 그 잘난 목걸이. 스스로 듣기에도 고저 없는 목소리로 웨이드에게 그동안의 상황을 설명했다. 목걸이 도둑이라는 누명을 쓴 것, 엘제드 성에서 1년간을 시녀로 산 것, 이유도 모른 채 벨로르트로 오게 된 것, 이슐린티마에서 반년 간 억류되어 있었던 것. 웨이드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럴 거면 왜 굳이 물어봤나 싶기도 했다. 재미도 없고 해 봤자 입만 아플 얘기를 그래도 시키기에 기껏 해 줬더니 태도가 꼴같잖았다.
8 이름없음 2022/02/01 02:22:01 ID : 3DAqrBta2mk 0
여까지 쓰고 끊겼네 3만 5천자 ㅋㅋㅋㅋ 끝 ㅋㅋㅋㅋ 이야 저세상 끈기 멋지다 n(n>5)년 전 나자신(사실 내가 기억하기로 좀 더 이어갔는데 컴퓨터가 고장나면서 저기 이후 파일이 날아갔고 그래서 의욕 뚝떨어져서 한동안 때려쳤었음) 살아온 세월이 있는 만큼 이거 쓸 때보다 문장력은 상승했다마는 한참 판타지 장르 자체에 애정 가졌을 때 쓴 글이라 이때 감성을 그냥 통째로 폐기하기가 쬐매 아깝네...? 근데 사실 그냥 그 옛날옛적 내 새끼라 내 눈에만 그래 보이는 걸수도 있자너 레더들이 읽어보고 판단해주면 고마울 것 같아 나 믿는다 집단지성
9 이름없음 2022/02/01 02:25:58 ID : 3DAqrBta2mk 0
+)원고에 구멍뚫렸거나 오류가 난 이유: 그때 퇴고한답시고 설정 갈아엎고 문단 갈아엎고 지우고 새로 쓰고 이랬던 부분이 한두 부분이 아님. 근데 이 상태쯤에서 뒤 파일 날아가서 빡종함 ㅋㅋㅋ
10 이름없음 2022/02/01 02:45:03 ID : i2rbwlijeJW 0
뭐야 잘썼자나
11 이름없음 2022/02/01 05:09:18 ID : ZeHDthfaldC 0
되게 잘 썼는데?? 문장력 진짜 좋음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묘사가 너무 많고 전개가 느리다는 거? 중요한 장면에 디테일을 넣는 건 당연한데 읽다 보면 한 장면을 너무 질질 끄는 느낌이 들어 세계관 설명도 그렇고 서술이 많아서 나처럼 성격 급한 사람들은 좀 넘기면서 읽게 되는 듯
12 이름없음 2022/02/01 22:06:34 ID : zXy0pU444Y6 0
좋은데..? 개인적으로 내 취향의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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