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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좋아하는 계절로 단편소설 쓰고가는 스레! (2)
1
비단선인장
2017/12/31 18:38:57
ID : s2k8oZdzPeH
17
11시 반을 조금 넘기고 있는 시간대입니다. 늦은 시간이죠.
문에서 들려오는 쾅쾅거리는 소리가거슬려서 문을 열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몸집 작은 사슴 같은 것이 집안으로 냅다 들어옵니다.
현관 등 아래 비추어보고 나서야, 저는 그것이 어린 여자아이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저기, 너는 누구야? "
" ... "
아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래서 어린아이는 곤란합니다.
마음만 같아선 경찰에 당장 신고를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어렵습니다.
전, 경찰을 대하는 게 굉장히 껄끄럽기 때문입니다.
" ... 하루. 단 하루면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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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단선인장
2017/12/31 18:45:41
ID : s2k8oZdzPeH
0
난데없이 하루 재워달라는 말에 저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당연하게도, 저는 그 말을 잘라내서 거절했습니다.
" 너희 부모님이 찾고 계실 거야. "
" 아뇨. 안 그럴 거예요. "
" 이대로 널 허락도 없이 맡았다가 난 유괴범이 되고 말아. "
" ... "
한 치도 양보 없습니다. 아이는 할 말이 없을 때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저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민합니다. 이 아이를 집에서 내보내고 싶습니다.
아이는 절뚝이면서 제 집안을 돌아다니다, 구석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발목을 보니, 제법 부어올라 있습니다. 뭔가에 세게 부딪힌 걸로 보입니다.
" 너도 알겠지만, 갑자기 남의 집에 쳐들어온다는 건 이상한 일이야. "
" 저도 잘 알아요. "
이 아이는 사람이 할 말을 막히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3
비단선인장
2017/12/31 18:53:41
ID : s2k8oZdzPeH
0
한시간 정도 지나자, 집 바깥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옵니다.
블라인드를 걷어내고 살짝 훔쳐보니, 옆집 부모와 한 남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아이의 부모인 모양입니다. 이대로 문을 열고, 아이를 보여주면 문제 해결이겠죠.
제가 문고리를 잡으려고 손을 뻗자, 아이는 절뚝거리면서 놀라운 속도로 달려옵니다.
사전에 차단하듯 제 손을 붙잡은 아이는 고개를 절레거립니다.
제가 조금 더 힘을 줘서 문고리를 잡자, 아이는 손톱 날을 세우며 더욱 힘을 줍니다.
전 순간 윽 소리를 내며 손을 떨어트렸습니다.
" 안돼요... 제가 알아서 나가겠지만, 지금은 안돼요. "
" ... 우리 집보다, 옆집이 더 좋을 거야. 그 집이 더 안전할 텐데. "
" 옆집은 너무 화목해서 싫어요. "
난감합니다. 마음만 같아선 이대로 문을 억지로라도 열고 싶습니다만, 그랬다간 주변 사람들이 깰지도 모릅니다.
전적으로 저는 주위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아이를 우선 재워두기로 했습니다.
설마 이 아이가 제가 자는 사이 저를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요.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널 재워주기만 할 거야. 다른 건 도와줄 수 없어. "
" 딱히... 뭔가를 바라고 찾아온 게 아니에요. "
" 그리고 나는 좋은 사람도 아냐. "
" 우리 아빠보다는 괜찮은 사람일 것 같아요. "
아이는 다리가 아픈 듯 절면서도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문에서 멀어지자,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주저앉았습니다.
4
비단선인장
2017/12/31 18:56:07
ID : s2k8oZdzPeH
0
*
스레주야. 다른곳에서 쓰고 있었는데, 완결을 마치기 전에 사이트가 날아가버려서.
이대로 버리기에는 아쉽고, 목표가 완결이었던 만큼 조심스레 다른곳에서 연재 해보기로 했어.
하나도 저장 못하고 날아가버려서, 기억에만 의존해서 다시 쓰는중이야.
여러가지로 처음과는 세세한 부분이 다를거라고 생각해. 잘 부탁해.
5
이름없음
2017/12/31 18:58:12
ID : zU0nvjBs7ht
0
스레주 왔구나ㅏㅏㅏ
사이트 불안정해져서 처음밖에 못 봤는데, 이번엔 완결까지 따라갈게
6
이름없음
2018/01/01 11:54:45
ID : cttg2Fg1Cje
0
읭…..스레주. 그 사이트에서 스레주 글 봤어. 환영해.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이름은 계속 달고 쓰려고?
7
비단선인장
2018/01/01 12:03:56
ID : s2k8oZdzPeH
0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놀랐어. 이번에는 꼭 완결 내도록 해볼게.
8
비단선인장
2018/01/01 12:04:37
ID : s2k8oZdzPeH
0
소설을 쓸때만 이름을 달아둘 생각이야.
그 이외 활동은 다 익명으로 하려고 하는데, 혹시 규칙 위반이야?
9
이름없음
2018/01/01 12:08:58
ID : TSNAmMlzSHB
0
인코로 대체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10
비단선인장
2018/01/01 12:14:05
ID : s2k8oZdzPeH
0
" 저기... 아저씨. 진통제 있어요? "
아이는 발을 절뚝거리면서 걸어 다니다, 조심스레 소파 위로 주저앉습니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요. 그제야 아이는 아프다는 듯 미간을 구깁니다.
작게 흘리는 앓는 소리가 거슬립니다. 저는 화장실에 비치된 약상자에서 진통제를 꺼내왔습니다.
" 생각이 빠르네. 진통제도 좋은 선택이지. "
약과 물을 주자, 아이는 거리낌 없이 그것을 삼켰습니다.
저는 아이의 발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습니다.
그 뒤, 탄력 붕대로 아이의 발을 제대로 압박해주기로 했습니다.
아이는 친절에 조금 놀란 눈치입니다. 그런 호의가 아닌데도 말이죠.
11
◆0q41yE1imJQ
2018/01/01 12:27:45
ID : s2k8oZdzPeH
0
탄력 붕대를 감아주면서, 저는 마지막에 한번 붕대를 잡아당겼습니다.
아이는 아프다면서도 발을 빼지 않습니다. 그대로 저는 매듭을 지어주었습니다.
" 내일은 아침 일찍 병원에 갈 거야. "
" ... "
" 널 두고 하는 얘기야. 내일 너를 병원에 데려갈 생각이라고. "
" ... 초면인데 그렇게 잘 챙겨줘도 돼요? "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야 당연히, 약만 먹는다고 발목이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요.
염좌라는 건 놔두었다가 평생 두고 후회하게 됩니다.
" 그리고 널 다시 너희 집에 데려다줄 생각이야. "
" 아이고, 다리가. 다리가-. 병원은 못 가겠어요. "
아이는 국어책 읽듯 어색하게 아프다는 소리를 하면서 자기 다리를 붙잡고 소파 위를 뒹굴고 있습니다.
다친 곳은 발목일 텐데요. 어설프면서도 참 영악합니다.
저는 헛소리 하지 말라면서 이불을 아이에게 집어 던졌습니다.
아이는, 이불 속에서 한참 꼼지락거리다가 얼굴만 이불 밖으로 빼꼼 내밀었습니다.
" ... 나중에 병원비 갚아줘야 해요? "
" 나중에 갚아줘. 나중에. "
아이는 구두쇠 보듯 저를 쳐다보곤 다시 누워버렸습니다.
12
◆0q41yE1imJQ
2018/01/01 12:31:47
ID : s2k8oZdzPeH
0
결국 아이는 내일 병원에 가는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시간이 제법 늦었습니다. 원래, 이 시간대라면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텐데요.
저는 바닥위로 두꺼운 이불을 깔고, 형광등을 껐습니다.
어둡습니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눕습니다.
아이는 어둠이 익숙했던 걸까요. 겁을 먹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침착하게 자리를 잡고 누워버렸습니다.
아이는 조금 고민하다 입을 열었습니다.
" 잘 자요, 아저씨. "
" 너도. "
" 그리고, 오늘 문 열어줘서 고마워요. "
이어지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13
◆0q41yE1imJQ
2018/01/01 12:32:38
ID : s2k8oZdzPeH
0
이렇게 하는거구나. 고마워, 스레더.
인코로 하는편이 훨씬 좋네. 몰랐어.
14
◆0q41yE1imJQ
2018/01/02 14:32:24
ID : s2k8oZdzPeH
0
아침입니다. 기분 좋게 들려오는 기름 튀기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시선을 돌려보니, 아이가 부엌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습니다.
맨발을 바닥 위에서 차박거리면서 걷는 모양이 부지런합니다.
저는, 아이의 뒤에서 뭘 만들고 있는지 물끄러미 봤습니다.
" 오믈렛이라, 누구한테 배운 거야? "
" 동영상에서요. 쉬운 요리정도는 눈으로 배울 수 있어요. "
" 둘이서 먹기에는 양이 좀 적은 것 같은걸. "
아이는 그 말을 듣고는 저를 뒤돌아봅니다.
이윽고 잘 익은 오믈렛을 그릇에 담고, 식탁에 얹어놓습니다.
" 당연하죠. 이건 저 혼자 먹을 양이니까요. "
놀랐습니다. 당연하게도 집주인인 제 몫도 만들 줄 알았습니다.
쉬운 아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15
◆0q41yE1imJQ
2018/01/02 14:37:56
ID : s2k8oZdzPeH
0
" 너에게 집을 내어주는 대가로 내 몫도 만들어줘야겠어. "
" 아저씨가 저를 집에서 내쫓지 않으면, 그 대가로 만들어 드릴게요. "
아이가 보란 듯이 오믈렛을 포크로 한 조각 덜어내서 먹습니다.
먹음직스러워 보입니다. 아이의 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이 영 성가시게 느껴집니다.
저는, 그 대신 숨겨둔 베이컨을 먹기로 했습니다.
냉장고에 숨겨둔 베이컨을 꺼내 들자, 아이가 등 뒤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 뭐야, 있으면 진작 말을 해야죠! "
" 어서 먹기나 해. 병원에 가야 하니까. "
아이는 볼을 부풀립니다. 그러게, 진작 내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게 아이와 첫날부터 티격대면서 늦은 아침을 해결했습니다.
16
◆0q41yE1imJQ
2018/01/02 14:45:19
ID : s2k8oZdzPeH
0
오전 11시 반. 저는 아이를 병원에 데려다주기 위해서 아파트를 나왔습니다.
작은 병원이라면 근처에도 있지만, 아이는 아마 큰 병원으로 가봐야 할 것입니다.
아이는 저를 따라서 제 차로 다가가선, 문을 열고 기겁합니다.
" ... 으. 아저씨. 차 안에서 사는 거예요? "
차 뒷좌석은 옷가지들과 책, 서류 더미와 일회용 식기들로 너저분했습니다.
" 누가 탈 줄 알았다면 미리 치워뒀을거야. "
아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수석으로 옮겨갔습니다. 다행히도, 조수석은 깔끔했습니다.
제가 운전석에 탑승하자, 아이는 글로브박스를 열어 뒤적거렸습니다.
별거 아닌 영수증들과 오래된 CD들이 잔뜩 있습니다.
그중 아이가 골랐던 것은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 아이치고는 현명한 선택입니다.
아이는 CD를 오디오에 집어넣었습니다. 왠지, 가족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 아저씨, 아직 까지 이런 노래를 들어요? "
" 나쁘지 않잖아. "
" 좋지도 않아요. "
그렇게 말하는 아이였지만, 어느새 멜로디를 익혀서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제법 목소리가 밝고 청아합니다. 듣기 좋다고 느꼈습니다.
17
◆0q41yE1imJQ
2018/01/03 12:22:41
ID : 3zVhtjth805
0
15분 정도 차를 몰아서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중앙 로비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왠지 숨이 막힙니다.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대충 아이의 보호자 신분이 되어주고 나서, 아이를 진료실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전, 이곳에 남기로 했습니다.
잠시 숨을 좀 돌려볼까요. 병원 밖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레종 갑을 집어들고 한 개비를 입에 뭅니다.
지퍼 라이터를 꺼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403호씨. 딸이 있었어요? "
" 딸 같은거 아니에요. "
" 친척 같은 건가요, 그럼? "
" 비슷해요. 잠깐만 돌봐주는 거니까. "
이 여자는 건너편 아파트에 살고 있는 미대생입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시간이 우연히 맞아서, 가끔 마주치면서 가십거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저쪽에서는 이쪽을 제 아파트 호수인 403호로 부르고 있어서
저도 저쪽을 그녀의 아파트 호수인 401호로 부르고 있습니다.
" 저기, 잠시 실례할게요. "
그녀가 담배를 입에 물곤 가까이 다가옵니다. 담뱃불을 빌려달라는 거겠죠.
저 역시 거리를 좁혀서, 손을 바람막이 삼아줍니다.
지퍼 라이터의 금속음이 찰캉거립니다.
18
◆0q41yE1imJQ
2018/01/03 12:38:56
ID : 3zVhtjth805
0
401호 씨는 금속음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녀가 손을 뻗길래, 저는 제 지퍼 라이터를 순수히 빌려주었습니다.
연신 찰캉하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 그쪽, 어제랑 비교해서 색이 조금 밝아졌네요. "
" 알기 쉽게 설명해줄래요? "
" 채도가 조금 올라갔다고 해야 할까요. "
저는 401호 씨를 게슴츠레 바라봤습니다.
눈치를 챈 그녀는 저를 바라보며 말을 바꿨습니다.
" 좀 더 다가가기 편해졌다는 뜻이에요. "
" 갑자기 그렇게 바뀌어 보일 리가 있나요. "
" 그쪽 친척. 자주 놀러 오라고 해주세요. 그 아이 덕분에 당신도 한층 보기 좋아 보여요. "
글쎄요. 그 아이를 여러 번 맡아주는 건 사양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그녀는 특유의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전 벽면에 기댄 채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습니다.
담배 연기는, 2m쯤 올라가다 허공에서 흩뿌려지며 사라졌습니다.
19
◆0q41yE1imJQ
2018/01/03 12:53:19
ID : 3zVhtjth805
0
20분정도 저희 둘은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중 401호 는 슬슬 갈 길 가봐야겠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습니다.
손에 약봉지가 여럿 들려있습니다. 저나 401호 씨나, 담배는 끊는 편이 좋겠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듯, 아이는 어느새 제 뒤에 있었습니다. 절뚝거리는 발로 용케 걸어왔습니다.
" 아저씨, 애인이 있었어요? "
어째 아이까지 말썽입니다. 크면, 왠지 401호 씨와 비슷해질 것 같습니다.
저는 아이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어서 헝클어뜨립니다.
악 소리를 내면서 두 손을 휘두르는 아이를 조수석에 태우고서, 전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는 먼저 아파트 단지에 내려두고, 주차하러 갔습니다.
동동거리면서 아이가 차에서 내립니다. 방금까지 아팠던 아이였는데, 회복력이 놀랍습니다.
그리고 한 5분 정도. 차를 주차하고 다시 아이가 있었을 곳으로 돌아오자
아이는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20
◆0q41yE1imJQ
2018/01/03 13:02:47
ID : 3zVhtjth805
0
키가 180 중반 정도로 보이는, 몸집 좋은 남성이 아이에게 성큼 거리며 걸어옵니다.
남자는 아이의 손목을 억세게 낚아챘습니다.
" ...아, 아..! 알았어요. 제 발로 걸을 수 있어요! 잠깐만... 잠깐만요. "
남자는 아이의 말에는 집중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정확히는 누구에게도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그렇게 기어오르던 아이가, 남자에게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재래시장에서 개를 잡던 동네 아저씨가 있었는데, 지금 저 남성은 그 아저씨와 눈빛이 너무도 똑같습니다.
아이가 끌려가듯 걸으면서 고개를 이쪽으로 향했습니다.
딱히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쉬움이나 초조함은 가득했습니다.
어찌 보면 제가 바라던 대로 아이를 떨어트리는 데에 성공하긴 했습니다만, 이건 조금 찜찜합니다.
방금 본 아이의 초조한 표정만큼은 뭉개버리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소리 없이, 입 모양만으로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 언제라도 좋으니까, 오믈렛 만들어줘. '
아이는 그제야 밝아졌습니다. 덩달아, 시선을 느낀 남성이 저를 바라봅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주머니 속 지퍼 라이터를 세게 움켜쥐었습니다.
그러나, 남성은 한번 노려보곤 별생각 없이 계단을 올라가 버렸습니다. 아쉽습니다.
21
◆0q41yE1imJQ
2018/01/04 12:23:29
ID : 3zVhtjth805
0
다시 아침입니다. 공사장의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절 깨웠습니다.
시간을 보니 평소보다 제법 늦게 일어나버린 듯합니다.
저는 서둘러 나갈 준비를 마치고, 쓰레기를 챙겨 들었습니다.
오늘은 쓰레기를 버리기로 아파트 단지에서 정해둔 날입니다.
계단을 내려가다 3층에서 멈춰 섰습니다. 시선을 돌려보니, 유독 한 집이 눈에 띕니다.
문에는 전단지가 잔뜩 붙어있는데, 몇몇 개는 신경질적이게 뜯어져 있습니다.
덤으로, 문 앞에는 배달음식 그릇이 쌓여있습니다. 그중 한 그릇은 반정도, 음식이 남아있었습니다.
평소보다 늦어서인지, 오늘은 쓰레기를 버리면서 401호 씨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대로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려다, 걸음을 바깥으로 돌렸습니다.
오늘은, 동네를 조금 돌아다니기로 하겠습니다.
22
◆0q41yE1imJQ
2018/01/04 12:35:47
ID : 3zVhtjth805
0
먼저 설명하자면, 저희 동네는 도시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 구조 때문인지 건물은 낙후되어있지만, 그만큼 사람 사는 흔적이 깊게 배어있기도 합니다.
동네는 가운데 큰 도로를 기점으로,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작은 길이 여러 갈래로 나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약 20분 정도 걸어가면 초등학교가 나옵니다.
근방에 있는 학교 중 교통이 편한 곳은 이곳뿐이라, 대부분의 아이는 이 초등학교로 가게 됩니다.
저는, 오늘 이 학교를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허가를 받아야 하겠지만, 이번에는 모르는척 하고 조용히 둘러볼 것입니다.
교실이 늘어선 층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의 발표 소리가 작게 울려 퍼집니다.
아이들은 선생의 말소리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거나, 무언가를 야무지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게 조금 그립다고 생각해버렸습니다.
그렇게 걸어가던 중, 유독 눈에 띄는 한 교실에서 멈춰 섰습니다.
구석진 곳에 한 책상만이 비어있습니다. 왠지 한 책상만 조금 이질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아이들도 암묵적으로 ' 저 책상은 없는 자리다. ' 라고 인식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5분 정도, 그 자리를 지켜보다 선생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조용하라는 말을 남기고, 교실을 나왔습니다.
23
◆0q41yE1imJQ
2018/01/04 12:52:32
ID : 3zVhtjth805
0
남선생은 안경을 끼고 있었으며, 체구에 비해서 살집이 좀 있어 보였습니다.
그 선생은 푸근하게 웃으면서 제게 인사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혹시 학부모님이신가요? "
순간 학부모라는 말에 입이 턱 막혔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입니다.
저는 대충 거짓말이 아닌 선에서 돌려 말하기로 했습니다.
" 아뇨. 돌봐주던 여자아이가 있는데, 학교는 잘 다니나 와봤습니다. "
" 친척분이셨군요... 이 학교에서 결석인 여자아이는 한 명뿐이에요. 이제 사흘쯤 되었겠죠. "
사흘. 그 아이가 집에 쳐들어온 그 날부터 지금까지 결석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저는 찜찜한 그 아이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 아이의 부모님도 걱정이 많으시겠죠? "
" 그 아이의 아버지는 매번 웃으시지만, 아이가 자주 아픈 게 걱정이겠죠... "
" 그렇겠죠. "
아이는 몸이 아프다는 것을 이유로 학교를 결석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걸까요.
저는 으레 누구나 하는 형식적인 인사를 마치고, 학교를 나오기로 했습니다.
학교에서 나와 또 10분. 도보로 걸어가서 도착한 곳은 규모가 작은 파출소입니다.
대충 안을 훑어보니 경찰관이 둘 정도 보입니다만, 둘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제가 유리문을 손등으로 두어 번 소리 내 두들겨봐도, 그 둘은 깨어나지 않습니다.
볼 일은 다 봤습니다. 저는 걸음을 옮겨 마지막으로 도서관을 향해 갔습니다.
24
이름없음
2018/01/05 09:54:51
ID : A0mpWmJSJTS
0
재밌게 잘 보고 있어어
여유 될때 계속 부탁해
25
◆0q41yE1imJQ
2018/01/05 10:55:23
ID : 3zVhtjth805
0
고마워. 누군가 봐주고 있다니까 기쁘다.
꾸준히 이어갈게.
26
◆0q41yE1imJQ
2018/01/05 11:20:14
ID : 3zVhtjth805
0
도서관 안은 언제나 그렇듯 조용합니다.
신발이 땅에 닿는 소리마저 시끄럽게 들립니다.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 할머니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전 할머니께 작은 부탁을 했습니다.
이윽고, 할머니는 저보고 따라오라는 듯 먼저 일어나 걸어가셨습니다.
할머니가 향하셨던 곳은 고신문 자료실입니다.
우리 도서관은 예전부터 몇십 년 전부터의 신문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신문이 하루 단위로 체계적이게 보관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중요한 사건 정도는 모두 보존되어있습니다.
저는 늘 익숙하게 했던 대로 움직입니다.
손이 멈춰 섰던 곳은, 몇 년 전 일어났던 방화사건 신문입니다.
새벽, 일가족이 잠들고 있던 집에 방화가 일어나버려서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해버린 사건.
경찰은 이를 원한에 의한 묻지마 방화 정도로 종결시켰습니다.
여기, 제가 경찰들을 대하기 껄끄럽고
사람들과 지내기 곤란해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저는 줄곧 당해오던 가정폭력을 못 이기고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자살 방법은, 방화였습니다.
27
◆0q41yE1imJQ
2018/01/05 11:30:57
ID : 3zVhtjth805
0
조금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저는 그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불이란 것은 사람의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퍼져나갑니다. 불이 번지는 모습은 주변을 잡아먹는다는 인식을 줍니다.
당시의 저는 상당히 곤두서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판단력은 엉망이었죠.
어린 저는 제 방안을 태워버리고 ' 이대로 재가 돼서 죽어버릴 거야. ' 라고 결심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즈음에 불은 이미 온 집안을 다 태우고 있었습니다.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어느새 저는 집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습니다.
두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불타버리셨습니다. 질식사한 후, 그대로 불탔다는 게 정확하겠죠.
딱히, 두 분이 그렇게 되었다는 데에 통쾌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는 남에게 끝까지 폐만 끼쳐버린 것입니다.
그 사건 이후로, 저는 두 번 다시 경찰의 눈을 마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덤으로 남에게 폐를 끼칠까, 사람을 만나는것도 힘들어하는 성격으로 변해버렸습니다.
" 오늘도 감사합니다. "
" 별말씀을. "
저는 읽고 있던 신문을 보기 좋게 접어 다시 돌려놓았습니다.
28
◆0q41yE1imJQ
2018/01/05 11:42:41
ID : 3zVhtjth805
0
그 뒤로는 책을 몇 시간 정도 읽은 후에, 도서관을 빠져나왔습니다.
제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남들처럼 의미를 곱씹는 게 아니라, 단순하게 글자들을 읽는 것입니다.
요컨대 글자들의 배열을 읽는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도서관을 나온 후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안타깝습니다.
편의점에서 목을 축일 것을 사고 돌아가는 중, 계단을 올라가던 저는 혹시나 싶어 3층에서 멈춰 섰습니다.
신경 쓰이는 집의 문 앞에는 배달요리 그릇이 한층 더 쌓여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긴 한 모양입니다.
이만 신경끄기로 하고, 저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대로 일주일 정도, 변함없이 평소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쓰레기를 버리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고. 경찰서도 괜히 한번 흘겨봤습니다.
역시 도서관에 들러서 신문을 들추고, 책을 읽었습니다. 학교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제가 아이를 다시 한 번 만났던 것은 바로 일주일째 되던 날입니다.
그날도 목을 축일 것을 사고 올라오는 저녁이었습니다. 저는 혹시나 싶어서 3층에서 멈춰 섰습니다.
집 문이 열려있었습니다.
29
이름없음
2018/01/05 22:25:53
ID : 0mnxzTVgktt
0
전에 쓰던건 못봤구 뉴레딕에서 처음 읽는데 너무 좋네. 계속 해줘 스레주!
담담하면서도 왠지 동화같은 말투가 마음에 든다
잘 읽고있어
30
이름없음
2018/01/06 00:29:46
ID : nVhAi1hdPbf
0
고맙다.
31
◆0q41yE1imJQ
2018/01/06 12:19:41
ID : s2k8oZdzPeH
0
좋다니까 다행이다. 읽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꾸준히 써서 완결하도록 할게.
이 글을 읽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더 고마워.
32
◆0q41yE1imJQ
2018/01/06 12:34:24
ID : s2k8oZdzPeH
0
집 안은 굉장히 어두웠습니다. 형광등이 빛나고 있긴 했지만, 불빛은 희미했습니다.
거실에서는 텔레비전이 켜져 있고, 바닥은 누리끼리합니다.
벽면에 무언가가 잔뜩 덮인 것 같아 손끝을 대보니 움푹 들어갔습니다. 방음을 노린 걸까요.
거실 구석에서는 병원에 데려다주었던 아이가 혼자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들자, 곧바로 저를 알아봤습니다.
" ... 아저씨. 그때 봤던 아저씨죠? "
헐레벌떡 아이가 달려오길래, 저는 무의식중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춰줬습니다.
아이는 혼자 있는 게 무섭다며, 반쯤 우는 소리로 이런저런 소리를 했습니다.
" 너희... 그러니까, 그때 널 데려간 사람은? "
" 저희 아빠는 밖으로 나가셨어요. 며칠 지나서 돌아오시겠데요. "
" 데려가 달라고 말하지 그랬어. "
" 그게... 아빠가 전화할 때는 보통 소리를 치시거든요. 말을 걸기가 무서워요. "
아이는 옷소매로 얼굴을 정리하면서 또박또박하게 말했습니다.
이후 대충 얘기를 풀어보니, 아이의 아빠는 가끔 성난 듯이 전화를 하는 날이 있고
그럴 때마다 아이를 혼자 두고는 사흘이나 나흘 정도 집을 비운다고 합니다.
" ... 아저씨. 저 이제는 혼자 있는 게 너무 싫어요. 아저씨 집에서 그때처럼, 재워만 주면 안 돼요? "
33
◆0q41yE1imJQ
2018/01/06 12:43:45
ID : s2k8oZdzPeH
0
난감합니다. 하루도 애를 먹었는데, 또 돌봐준다니요.
저는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 ... 너희 아빠는, 언제쯤 돌아오실까? "
" 이번에는... 한 사흘 정도 걸릴 것 같아요. "
" 우리 집은 사흘씩이나 있을 곳이 못돼. 너희 친구 집에 물어보는 건 어떨까. "
아이는 잠깐 말을 흐리는 듯 보였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굳히기에 들어가려다 말았습니다.
아이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 아저씨, 애를 혼자 둘 생각이에요? "
이 아이는 정말 영악합니다. 확실히 애를 혼자 두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니니까요.
하필이면, 그걸 처음 발견한 게 제가 되었습니다. 주변 이웃들도 참 냉정합니다.
이렇게까지 되면 아이를 두고 나가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는 타입도 아닙니다.
" 좋아. 사흘만이야. "
" 예에-. "
" 너희 아빠가 더 일찍 돌아온다면, 난 너를 돌려보낼 거야. "
" 몰라요, 그런 건. 아저씨가 사흘이라고 이미 얘기했잖아요. "
아이는 낙장불입이라며 8비트 게임에서 나올법한 버저음을 입으로 냅니다.
저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우선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34
◆0q41yE1imJQ
2018/01/06 12:53:15
ID : s2k8oZdzPeH
0
집에 들어오자, 아이는 마치 제집인 양 익숙하게 주변을 돌아다닙니다.
테이블에 놓여있는 제가 사온 맥주를 집어 들길래, 저는 아이에게 단호하게 내려놓으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아쉽다는 눈치로 맥주캔을 돌려놓았습니다.
" 에헤, 아저씨 집은 차보다는 깨끗하네요. "
" 식객이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
" 식객이 뭐에요? "
아이는 아직 식객이라는 단어는 모르는 듯 보였습니다. 저는 길게 얘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 코트를 아이가 멋대로 걸쳐 입습니다. 사이즈 차이가 제법 났던 만큼, 소매가 길어 아이의 손이 파묻혀버렸습니다.
저를 보고 코트를 입은 채로 빙빙 돌던 중, 아이의 얼굴 안이 조금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 저기, 잠깐만. "
그리고 아이를 멈춰 세운 저는, 단발머리를 조심스레 들춰봤습니다.
잔 상처가 많습니다. 단발머리 안에 이런 걸 숨겨놓았을 줄 몰랐습니다.
저는 아이를 소파에 앉혀두고, 연고를 가져왔습니다.
" 웬일이야. 먼저 챙겨주네요. "
" 신경이 쓰일 뿐이야. "
" 아하, 제가 신경이 쓰이는거군요? "
35
◆0q41yE1imJQ
2018/01/06 13:03:59
ID : s2k8oZdzP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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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를 바른 손끝이 닿을 때마다 아이는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아프다며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연고를 바르며, 문득 저는 아이에게 물어봤습니다.
" 너 말이야. 그냥 이 얼굴 그대로 파출소에 가서 너희 아빠를 신고하는 건 어때? "
" 미쳤어요? ... 그리고 제가 신고를 안 해봤을리가 없잖아요. "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영악한 아이라면, 분명 신고를 여러 번 해봤을겁니다.
" 이상한 얘기지만, 우리 동네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신뢰하고 있어요. 좋은 사람으로 알고 있거든요. "
" 그때 내가 본 그 남성을? "
" 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동네가 작아서 서로가 알고 있으니까, 신고해도 어째서인지 대충 넘어가 버려요. "
아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마디에서는, 조금 겁을 먹은 아이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 우리 아빠는 신고하면 굉장히 실망해요. 그래서 저는 신고하는 건 관두기로 했어요. "
" 미안. 내 말실수를 용서해줄래? "
" 됐어요. 아저씨가 그렇죠. 뭘. "
아이는 다리를 소파에서 동동거리다, 바로 앞 테이블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다리를 부딪쳤습니다.
윽 소리를 내면서 자기 다리를 붙잡고는 부들거립니다.
왠지,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는 창피한지 얼굴을 붉혔습니다.
36
이름없음
2018/01/06 20:22:56
ID : xDAlBeY4E8k
0
흥미진진하네요 ㅎㅎ
37
◆0q41yE1imJQ
2018/01/07 13:38:54
ID : s2k8oZdzP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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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 저녁 먹었어요? "
" 아니, 아직. "
" 오늘은 제가 대접할게요. 배워둔 요리도 있거든요. "
아이는 제법 자신만만한 듯이 손을 씻으며 말했습니다. 조금 기대해보기로 했습니다.
냉장고를 열어젖힌 아이는 놀란 표정을 보였습니다. 집안과는 다르게 깔끔한 냉장고가 예상 밖이었겠죠.
" 아저씨. 집 안도 이렇게 좀 깔끔하게 관리하면 안 돼요? "
변명삼아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혼자 밥을 해먹는 데에 익숙했던 모양인지, 적당히 끼니는 채울 정도의 저녁을 준비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제법입니다. 저녁은 간단하게 해결했습니다.
38
◆0q41yE1imJQ
2018/01/07 13:42:50
ID : s2k8oZdzPeH
0
잠을 자기 위해서 이불을 펴면서 생각했습니다.
왠지, 이 아이를 이대로 두면 저처럼 되어버릴 것 같다고 말입니다.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심증뿐입니다.
막연하지만 투명한, 형용하기 힘든 감정입니다. 동병상련의 그것과 통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소파에서 잘 준비를 하는 아이를 바라보고 얘기했습니다.
" 저기, 꼬마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줘. "
" 네? "
" 나는, 내일부터 주변 사람들이 너를 인식하게끔 할 생각이야. "
아이는 어안이 벙벙해진 듯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모양이었습니다.
" 그게 저한테 의미가 있나요? "
" 물론. 그래서, 나는 내일 너와 같이 학교에 갈 거야. "
" 너무 갑작스러워요. 그리고... "
아이는 제 모습을 길게 훑어보고 있더니 고개를 도리질했습니다.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잠깐동안 생각하는듯 소리를 내던 아이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39
◆0q41yE1imJQ
2018/01/07 13:50:50
ID : s2k8oZdzPeH
0
" 무엇보다, 지금 아저씨 꼴이 말이 아니잖아요. 이대로는 같이 못가요. "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습니다. 지금 제 몰골은 확실히, 조금 지저분한 편에 속하니까요.
이대로 같이 가면 오히려 주변인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니, 내일 같이 백화점을 가죠. 가서 아저씨 옷도 사고, 제 옷도 사고. "
" 내 옷이랑, 네 옷도 같이? "
" 응. 저 이 옷은 너무 오래 입었어요. 저도 좀 치장을 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 "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한동안 제 눈치를 살폈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아이를 조금 골탕먹이기로 했습니다. 어렵다는 듯이 미간을 구겨봅니다.
곧장 표정을 읽은 아이는 한순간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키득거리면서 손사래를 쳤습니다.
" 푸핫, 농담이었어요. 하지만, 아저씨는 분명히 새 옷을 좀 사야 해요. "
" 농담이었어? 너도 지금 엉망이라서, 조금 준비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아쉽네. "
곧바로 아이는 눈을 밝히면서 제게 득달같이 달려듭니다.
쌤통입니다. 저는 등을 돌린 채로 누워버렸습니다.
아이가 5번째쯤 같은 질문을 하자, 저는 다시 일어나 앉았습니다.
" 그보다 너. 주변 어른들한테 인사는 하는거야? "
" 아뇨... 잘 모르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딱히 필요성을 못 느껴서 인사는 안했어요. "
" 앞으로는 마주치는 어른마다 인사를 하도록 해. 그게 조건이야. "
" 무슨 조건이 그래요? "
" 싫으면 말고. "
다시 돌아눕습니다. 아이는 알았다면서 제 몸을 잡고 마구 흔들었습니다.
40
◆0q41yE1imJQ
2018/01/07 14:02:45
ID : s2k8oZdzPeH
0
결국, 저는 아이 몫의 옷까지 같이 사기로 하고 불을 껐습니다.
앞으로 남은 기간은 어림잡아서 사흘. 아이의 삶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정도의 참견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를 바꿀 수 있다면 만족입니다.
" 저기, 아저씨. 자요? "
불을 끄고 누운 지 30분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제법 피곤합니다.
아이도 그대로 자겠지 싶은 제 기대와는 다르게, 아이는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 저, 누구랑 같이 옷을 사러 가는 건 처음이에요. 제대로 된 기억 상으로는 처음이겠죠. "
" 가끔가다 아빠가 옷을 몇 개 사오면, 그걸 그냥 입었어요. "
" 그래서, 저 지금 두근거려요. 잠이 안 온다니까요. "
아이가 오늘 밤은 말이 많습니다.
내일 제법 오랫동안 돌아다닐 테니 일찍 자두라고 말하려던 찰나였습니다.
" 저, 내일 얌전히 있을게요. 말썽도 안 부리고, 아저씨만 따라 다닐거예요. "
" 성가시게 굴지도 않을 테니까. 부디 마음 바뀌지 말아 주세요. 이건, 아저씨가 자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예요. "
아이는 그 말을 끝으로, 이불을 연신 뒤척입니다. 얼굴을 이불 속에 묻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같이 위로에 서투른 사람은 어설프게 위로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저, 저는 묵묵히 자는 척만 해주었습니다.
41
◆0q41yE1imJQ
2018/01/08 21:06:06
ID : s2k8oZdzPeH
0
오늘 아침은 조금 일찍 일어났습니다.
아이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비몽사몽 한 채로, 머리는 산발이 되어있습니다.
아이가 좋은 아침, 이라고 말하길래, 저도 좋은 아침이라고 받아쳤습니다.
적당히 아침을 해결하고 동네를 나올 때, 403호 씨를 만났습니다.
저는 아이를 세워두고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습니다.
아이는 야속하다는 듯 저를 올려다봤습니다만, 야무지게 인사를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앞으로 아저씨를 잘 부탁드릴게요. "
" 야무진 꼬마 아가씨네. 그렇죠? 403호씨. "
아이가 사족을 달자, 401호 씨도 사족을 달았습니다. 어째, 둘을 보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이의 머리를 북북 헝클어뜨렸습니다. 저희는 이윽고 버스를 타서 조금 먼 백화점으로 향했습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아이나 저나 마음에 드는 옷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 곳은 간만이라, 저는 조금 긴장해 있었습니다.
덩달아서, 아이도 제법 긴장한 모습이었습니다.
" 아저씨답지 않게 굳어있어요. "
" 너도 그래. "
" ...딱히. 사람이 많아서 공기가 탁하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
" 나도 그래. 너랑 같아. "
저희 둘은 용기를 내서,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42
◆0q41yE1imJQ
2018/01/08 21:22:19
ID : s2k8oZdzPeH
0
4층, 아동코너에서 내렸습니다. 저와 아이는 한 바퀴를 죽 돌아다녔습니다.
뜻밖에 아이는 옷 고르는 감각이 제법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색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옷을 보는 눈이 엉망이었기에, 이렇다 할 추천은 해줄 수 없었습니다.
" 아저씨. 이것 좀 봐줄래요. "
아이가 문득 기모로 되어있는 폴라티를 집어선 자신의 몸 위로 걸쳐봅니다.
" ... 음. 괜찮다고 생각해. "
" 이왕이면 좀 더 감상을 들려주세요. "
" 내겐 어려운 요구야. 다만, 챙겨입으니 사람이 좀 달라 보이기는 해. "
" 오, 지금의 저는 좀 괜찮아 보이나 봐요. "
아이는 그대로 옷을 입고는 한 바퀴 돌아봅니다. 역시, 옷이 날개입니다.
저는 그렇게 종이봉투로 옷을 2벌 정도 사서, 다음 아래로 2층 내려갔습니다.
아이가 제 옷을 대신 골라주겠다고 합니다. 아이가 말하길, 제 옷을 보는 눈은 너무 아저씨 같다고 합니다.
정확한 진단을 해서, 들킨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상했습니다.
43
◆0q41yE1imJQ
2018/01/08 21:57:32
ID : s2k8oZdzPeH
0
아이는 제 주변을 빙 둘러보고 나서, 저쪽으로. 라고 고갯짓을 하고는 한쪽 코너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깔끔하게 무늬가 두드러지지 않는 베이지색과 올리브색 니트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갈색 코트를 제 품 안에 들려주고, 저를 탈의실로 밀었습니다.
탈의실에서 니트를 입고 코트를 걸치며 나오자, 아이는 두 손을 모으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조금 호들갑을 떨면서, 아이는 반응했습니다.
" ... 허-. 처음 보는 사람이네요. 저희 아저씨는 어디 간 거죠? "
" 시끄러워. "
" 에헤헤. 조금 시끄러워도 괜찮아요. 오늘같은 날은. "
저는 아이의 입을 얼른 다른 말로 막아버렸습니다. 물론 아이가 말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그대로 옷을 입고 아이와 걸어나오자, 제법 괜찮은 그림이 나왔습니다. 아이도 내심 신나보였습니다.
문득 걸어가다 쇼 윈도에 비친 모습을 보고, 저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제 손을 잡고 걸어가던 아이 역시 걸음을 그칩니다.
" 아저씨. 아저씨? "
쇼 윈도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왠지, 수 없이 봤지만 속해있지는 못했던 그림입니다.
아이나 저나, 서로 그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요.
그렇게 1분 정도 서 있었을 즈음, 아이는 먼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 좋네요-. 이런 그림. "
" 나도 좋다고 생각해. "
아이는 제가 대답할 줄 몰랐던 건지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그런 아이를 데리고 1층으로 데려갔습니다.
오늘 나오기로 한 선택, 제법 괜찮은 선택 같습니다.
44
이름없음
2018/01/10 00:17:08
ID : xwmoFdDuq2J
0
여기까지 읽었는데 재밌다 ㅎㅎ 주인공과 주변 인물(여자아이, 401호 여자)의 대화랑 여자아이의 성격이 특히 마음에 들어. 만약 단편소설집이라도 나오면 사고싶을 것 같네
45
◆0q41yE1imJQ
2018/01/10 00:33:26
ID : s2k8oZdzPeH
0
재미있게 읽어주고 있다니 다행이다.
손 가는대로 쓰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 신경쓰고 있는 부분이야. 마음에 들었다니 기뻐.
46
◆0q41yE1imJQ
2018/01/10 00:36:40
ID : s2k8oZdzPeH
0
1층에서 옷을 사고 나오려던 중. 왠지 아이는 위로 시선을 두고 있습니다.
순간, 묘한 을씨년스러움을 느껴 저도 따라서 올려다 봤습니다.
참고로, 저희 백화점은 가운데가 뚫려있고, 원형으로 타고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즉, 가운데에서는 각 층의 대략적인 구조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 ... 저기, 아저씨. "
" 무슨 일이야. "
저는 사뭇 긴장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긴장을 단번에 깨버렸습니다.
" 저 말이죠. 백화점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
" ... 허. "
허탈한 기분에, 저는 괜히 아이의 머리를 헝클어뜨렸습니다.
아이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악악대며 제 손을 붙잡아 떨어트립니다.
47
◆0q41yE1imJQ
2018/01/10 00:45:04
ID : s2k8oZdzPeH
0
" 지금은 조금 이른 저녁이잖아요. 아마, 사람도 없을 거예요. "
" 그렇다고는 하지만... 흠. "
" 아저씨. 아저씨-. 이번에 이왕 나온 거, 힘 좀 써주세요. "
생각해보면 저런 식사는 저도 오랫동안 바라왔습니다.
아쉽게도 외식 자리에 제가 끼어있는 경우는 없었던 터라, 저는 왠지 오기가 생겼습니다.
' 오냐, 얼마나 기분 좋은지 나도 한번 알아보자. ' 라는 심보였습니다.
저는 왠지 조금 비장한 마음을 품고 식당이 있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아이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엇박자였던 시간 덕분에, 저희는 비교적 여유롭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식당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처음 보는 메뉴들이 즐비해서, 아이는 제법 오래 고민했습니다.
저는, 선뜻 빠네에 담긴 크림 파스타를 골라주었습니다. 제 메뉴는 알리오 올리오입니다.
" ... 아저씨 말을 믿었다가, 맛이 없으면 어쩌죠? "
" 장담할게. 네가 먹어본 파스타 중에서 가장 맛있을거야. "
" 제가 먹어본 건 레토르트 파스타뿐인데. 다 엉망이었어요. "
" 네가 요리를 못 해서 그래. "
아이가 이를 아득바득 물며 두 손을 제게 뻗습니다. 저는 개의치 않고 메뉴를 주문했지요.
이후 애피타이저로 스프와 바게트 조각이 나오고. 20분 후에 메인 요리가 나왔습니다.
아이가 눈을 반짝입니다. 평소의 탁한 눈과는 이미지가 너무도 달랐습니다.
48
◆0q41yE1imJQ
2018/01/10 00:57:23
ID : s2k8oZdzP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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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먹는 내내 조용했습니다. 실은, 제대로 된 파스타는 처음 먹어봐서, 서로를 잠깐 잊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이 자리를 차지해도 위화감은 느끼지 않았습니다. 내심 만족했습니다.
한참 식사를 끝내고 나서, 저희 둘은 숨을 돌렸습니다.
" 자, 자. 아저씨. 중간 점검. "
아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저를 바라봅니다.
퀴즈쇼의 MC 같은 분위기를 뽐내고 있습니다. 이건 제가 도전자가 된 기분입니다.
" 다음 계획은 뭐죠? 아빠가 없는 사흘... 내일부터는 이틀동안 말이예요. "
" 계획이라니. 뭐... "
" ... 설마 집에 가둬놓을 생각은 아니겠죠. "
말은 저렇게 하지만, 아이는 이미 어느 정도 청사진을 그린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다시 봐도 영악합니다. 아이는 아빠가 없는 틈을 타서, 적극적으로 뭔가 해볼 심상인 것 같습니다.
" 뭐. 우선은 내일 너희 학교를 같이 갈 거야. "
" 흐음-. 그리고요? "
" 네가 수업하는 동안 나는 늘 그랬듯이 도서관에 갈 테고. "
" 그리고 절 데리러 오신 후, 동네 큰 마트에 가기로 해요. "
" ..? 거길 왜. "
" 가면 동네 어른들 많잖아요? 아저씨가 인사 자주 하라면서요? "
절대 저런 이유가 아니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유가 마냥 틀리지만은 않습니다.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습니다.
49
◆0q41yE1imJQ
2018/01/10 01:07:55
ID : s2k8oZdzPeH
0
" 조금 더 솔직해져 봐. "
" ... 끙. 솔직히 말하자면 누군가랑 같이 장 보는 게 소원이에요. 저녁을 같이 만드는 것도 소원이고요. "
" 저녁이라면 진작 말하지. 같이 만들 수 있었잖아. "
" 그땐 아저씨가 못 미더웠거든요. "
잘도 저런 말을 툭 툭 뱉어내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그 경계심은 칭찬해 마땅합니다.
아이는 제법 소박한 것들을 소원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가지고 데리러 와준다거나, 서점에 같이 간다거나.
왠지 더 듣고 있다가는 동정심이 솟구치게 될 것 같아, 저는 중간에 말을 끊었습니다.
"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할 거야? "
" 집에 가서 계속 부탁할래요. 아저씨가 못 자게 방해하면서. "
" 너는 영악해. "
" 알아요. 영악하니까 이렇게 잘 자라온거죠. 같이 장 볼 때 맥주 사도 돼요? 아저씨가 마시던 거. "
못하는 소리가 없는 아이의 입에 지퍼를 채워주고,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이가 식당 안에서 여러 번 질문을 할 기미를 보여서 저는 얼른 승낙해 주었습니다.
그나저나 저녁은 곤란한데요. 이쪽도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니까요.
머릿속으로 401호 씨에게 부탁을 해볼까, 고민해봅니다.
50
이름없음
2018/01/10 22:56:05
ID : O5QsktxWja3
0
..재밌다
51
◆0q41yE1imJQ
2018/01/11 21:04:13
ID : s2k8oZdzPeH
0
그대로 저녁을 식당에서 해결한 저희 둘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졌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간다는 건 예상외로 기를 많이 잡아먹는 일이었습니다.
이불을 대충 깔아둔 대로 눕고, 눈을 감았다 뜨니 아침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정대로 아이의 학교에 제가 따라가는 날입니다.
제가 괜찮게 옷을 차려입자, 아이는 혼자 팔짱을 낀 채로 저를 올려다봅니다.
" 괜찮은데요, 아저씨. "
" 비행기 태우지 마. "
아이와 시간에 맞춰서 나오던 길, 저희는 401호씨를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말하기도 전에, 아이가 인사를 했습니다. 401호씨 역시, 같은 인사로 맞아주었습니다.
" 웬일로 차려입었네요. 특히 403호씨는 다른 사람이 되었잖아요. "
" 뭐, 어쩌다 보니. "
" 꼬마 아가씨 덕분이예요. "
" ... 참. 401호씨. 저, 갑작스럽지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
상당히 의외라는 눈치로 401호씨는 저를 봤습니다. 입에 물려던 담배마저 도로 집어넣었을 정도니까요.
왠지, 평소에는 편하던 401호씨가 참 어려운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말끝을 흐리자, 보다 못한 아이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 아저씨가요, 언니에게 요리를 배우겠데요. 저녁쯤에 부른다나. "
저는 아뿔싸 하는 소리를 내면서 아이의 머리를 헝클어트렸습니다. 이런 반응을 해보기는 처음입니다.
그러나 401호씨는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52
◆0q41yE1imJQ
2018/01/11 21:16:36
ID : s2k8oZdzPeH
0
" 오늘은 여유로워요. 공방도 쉬는 날이고. 꼬마 아가씨나 빨리 데려다주시지. "
401호씨는 담뱃갑을 아이 모르게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었습니다.
저는 슬슬 급하겠다 싶어서, 급히 인사를 마치고 아이를 차에 태웁니다.
아이는 조수석에 타고, 절 보면서 짓궂게 웃습니다.
" 어때요, 아저씨. 저 제법 괜찮은 아이 아닌가요. "
" ... 시끄러워. 꼬맹이가 영악하기는. "
키히히 웃는 아이를 태우고서, 저와 아이는 학교로 향했습니다.
학교에 도착하고서 차에서 내리라고 하자, 아이는 왠지 조금 긴장한 눈치였습니다.
어쩌면, 아이에게 누군가와 같이 등교한다는 건 처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영악한 꼬마야. 혹시 겁을 내는 건 아니겠지. "
" ... 전혀. 전혀 그렇지 않아요. "
" 갑시다. 지각하면 다 도루묵이야. "
저는 먼저 내려서 문을 열어젖힙니다. 아이 역시 따라서 내렸습니다.
실제로 이럴 필요까진 없었습니다만, 저는 아이를 데리고 교실 안까지 걸어갔습니다.
아이는 걷는 내내 저를 뒤돌아보면서 이럴 필요는 없다고 쏘아 봤습니다만.
저는 모르는 척했습니다. 아이가 곤란하다는 걸 알아서, 조금 골려주고 싶었습니다.
" 반에 들어가면, 꼭 애들에게 인사를 하도록 해. 큰 소리로. "
" ... 아저씨, 진짜 미쳤어요? "
" 우리 집의 규칙이야.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지. "
53
이름없음
2018/01/11 21:19:13
ID : K6kspcLhAmM
0
너 책 낼 생각 없어?
54
◆0q41yE1imJQ
2018/01/11 21:23:42
ID : s2k8oZdzPeH
0
아이는 교실 문을 열었습니다.
드르륵, 하는 마찰음과 함께 시선이 하나둘 앞문으로 집중됩니다.
아마 아이의 바뀐 모습이 제법 새로웠던 모양입니다.
저는 망설이는 아이의 등을 괜히 손끝으로 찔렀습니다.
망설이던 아이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습니다.
" 에, 음... ... 안녕. "
순간 교실은 정적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이는 큰 실수라도 한 걸까 옷 소매를 만지작거립니다.
그리고 하나 둘 씩 아이의 인사를 받아줍니다.
전부 다 받아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이를 인식한 아이가 제법 생겨났습니다.
" 아저씨... "
" 이제 네가 얘기할 방향은 저쪽이야. 수고해라. "
저는 아이를 툭 밀치고는 교실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대로 잠깐 뒤로 빠져서 지켜보니, 반의 또래 여럿이서 아이에게 몰려갔습니다.
뒤에 있던 사람은 누구냐느니, 새 옷이 괜찮다느니 하는 사소한 얘기입니다.
아이는 꾸준히 입꼬리를 올리면서 이따금 시선을 제게 향했습니다만, 저는 모르는 체하기로 했습니다.
주변에서 얘기하는 또래 아이들 틈에 섞이자, 아이는 몇분 지나지 않아서 긴장을 풀었습니다.
이쯤이면 괜찮겠지, 싶어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저는 반의 담임을 다시 한번 만났습니다.
55
◆0q41yE1imJQ
2018/01/11 21:24:29
ID : s2k8oZdzPeH
0
한번쯤은 내 개인 소설을 책으로 내보고 싶기는 해.
그렇지만, 제대로 글을 써본적이 없어서 우선 스레딕에 투고해보는 중이야.
56
이름없음
2018/01/11 21:26:14
ID : O5QsktxWja3
0
역시 재밌어 ㅎ
57
◆0q41yE1imJQ
2018/01/12 16:43:32
ID : s2k8oZdzPeH
0
꾸준히 읽어주는구나. 고마워.
58
◆0q41yE1imJQ
2018/01/12 16:52:26
ID : s2k8oZdzPeH
0
" 친척분, 또 뵙게 되었네요? "
" 안녕하세요. 선생님. "
저와 선생은 저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선생과의 대화는 별것 없었습니다. 그저, 오늘은 왠지 아이가 유독 밝아 보인다거나 하는 이야기였죠.
별로 중요한 대화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흘려듣던 도중, 제 손에 유인물 한 장이 쥐어졌습니다.
" ... 뭡니까, 이건? "
" 학부모 참관 수업 안내문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께도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연락이 안 되거든요... "
" 친척이 이런 걸 받아도... "
" 아이는 분명 좋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선생은 확신을 하고서 제게 종이를 들려주었습니다.
이번에도 씁쓸한 기억뿐입니다. 제가 원했지만,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던 참관수업.
아이는 실은 제 레플리카인 건 아닐까요. 제가 싫어했던 기억만 따라가고 있습니다.
" 우선은, 잘 보관 해두겠습니다. "
" 네, 꼭 좀 부탁드릴게요. "
이런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은 마냥 웃기만 하고 있습니다.
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학교를 빠져나와서 차에 탔습니다.
무의식중에 유인물을 구겨서 글로브 박스에 넣으려다, 조수석에 조심스레 내려놓았습니다.
59
◆0q41yE1imJQ
2018/01/12 17:01:47
ID : s2k8oZdzPeH
0
저는 그 길로 차를 몰고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할머니께 인사만을 드리고 걸음을 옮기자, 할머니는 놀란 눈치로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 오늘은, 신문은 보지 않는 게냐. "
" 아... 네. 오늘은 보지 않을 생각이에요. "
" 달라졌구나. 많이 컸어. "
사서 할머니의 눈빛은 사람을 투영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안경 너머로 저를 바라보는 순간, 저는 속을 들킨 것만 같았습니다.
이윽고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신 후에야 저는 안심하고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평소 읽기만 하던 소설책을 놔두고 저는 아동심리학 책을 읽었습니다.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아이라는건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어느덧 시계는 오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출발해야, 아이가 길게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책을 넣어두고, 저는 차로 돌아갔습니다.
60
◆0q41yE1imJQ
2018/01/12 17:13:19
ID : s2k8oZdzPeH
0
다행히도 아이들의 하교 시간에 정확히 도착했습니다.
저 멀리서 아이가 또래들과 인사하고는 차를 보면서 뛰어오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눌 사이는 된 모양입니다.
문을 열어젖힌 아이는 조수석에 있는 유인물을 들고, 자리에 앉습니다.
한동안, 정말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저를 바라봤습니다.
" 아저씨, 이건 뭐예요? "
" 너희 선생님이 주시던데. 부모님을 데려오라더군. "
" 또 학교에서 쓸데없는 일을 하네요. "
" 너희 아빠라면, 참관 수업에 오실까? "
" 아뇨. 오지 않을 거예요. "
아이는 신경 쓰지 않는다며 유인물을 다시 접고는 뒷좌석에 팽개쳤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아이, 저는 저. 이미 참견을 하고 있는 저였습니다만, 아이의 부모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아이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부모라는 건 요술처럼 쉽게 할 수 있는 노릇이 아니었습니다.
" 아저씨, 우회전. 장 보고 가야죠? "
" 너희 아빠한테 물어볼까? "
" 묻지 마세요. 저, 아빠나 엄마 같은 거 없어도 괜찮아요. "
" 나도 그랬어. 아빠, 엄마 없어도 살 만해. "
아이는 저를 보곤 뭘 좀 안다면서 키득거리고 있습니다.
저와 아이는 그렇게 마트에 도착할 동안 부모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여놓았습니다.
남들이 뭐라건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들리지도 않았겠지만요.
61
이름없음
2018/01/12 17:22:37
ID : K6kspcLhAmM
0
언제나 잘보구 있어 화이팅!
62
◆0q41yE1imJQ
2018/01/13 15:33:49
ID : s2k8oZdzPeH
0
고마워. 덕분에 꾸준히 이어쓸 수 있었어.
완결까지 달려갈게.
63
◆0q41yE1imJQ
2018/01/13 15:46:58
ID : s2k8oZdzPeH
0
저와 아이는 대형마트에서 내렸습니다.
들어가서 재료를 사기 전, 저는 401호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혹시나 401호씨가 할 줄 모르는 요리의 재료를 사 가면 곤란하니까요. 비교적 쉬운 요리를 부탁할 생각이었습니다.
대화 중에 결정된 요리는 계란찜과 조기구이가 되었습니다.
" 에, 계란판은 당연하고. 당근도 있어야겠죠. 소금 같은 건 집에 있을 테고. "
" 웬만한 것들은 집에 있을 거예요. "
" 참, 감자 전분 잊지 마요. 403호씨는 믿음이 안 가네. 꼬마 아가씨한테도 전해주세요. "
저는 그 말을 그대로 아이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아이는 자기만 믿으라며 으스댑니다.
마트에서 재료를 고르면서도, 근처에 가까이 사는 이웃들에게는 인사를 빼먹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인사를 하고 난 후 이럴 필요까지 있느냐는 눈치였습니다.
그래도, 인사는 중요합니다.
아이와 저는 그곳에서 재료를 고르고, 마트를 크게 한 바퀴 돌았습니다.
아이가 사달라고 하는 게 제법 있었지만, 그때마다 저는 단호하게 거절했죠.
저희가 살 것들을 다 사고 돌아왔을 때, 때마침 계단에서 401호씨를 만났습니다.
같이 올라가던 차에, 우연히 만난 모양입니다.
" 살 것들은 다 사 왔나요? "
제가 봉투를 들어 보이기도 전에, 아이는 감자 전분을 집어 들었습니다.
64
◆0q41yE1imJQ
2018/01/13 15:59:43
ID : s2k8oZdzPeH
0
계단을 올라가던 중, 저와 아이, 그리고 401호씨는 3층에서 멈췄습니다.
당연히 시선이 돌아갔던 곳은 아이의 집입니다.
배달요리 그릇은 치워져 있었지만, 문에 붙은 전단은 그사이 훨씬 늘어있었습니다.
401호씨는 아이의 등을 토닥였습니다.
" 아빠는 아직 안 오셨나 봐. "
" 내일이면 올 거라고 생각해요. 으... 매번 싸워서 돌아오는 거 싫은데. "
401호씨는 그런 아이의 말에도 키득거리고 있습니다. 이윽고 저와 아이는 계단을 따라서 올라갔습니다.
그대로 집에 들어온 저희는 저녁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시간은 조금 이르지만, 문제없습니다.
요리하면서 알게 된 거지만, 아이와 401호씨는 장난기가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재료를 손질할 때마다 이런저런 작은 장난을 쳐서, 하마터면 손이 베일 뻔했죠.
401호씨의 이런저런 조언을 받으면서 저녁을 준비하니,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차려진 저녁상을 두고 셋이서 둘러앉자, 아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저와 401호씨는 기다렸습니다. 왜인지, 둘 다 아이가 가장 먼저 먹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수저를 들고 느릿느릿 계란찜을 퍼 올립니다.
그것을 입에 물고, 삼킨 아이는. 입술을 오물거립니다.
아이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습니다.
조금 당황한 제가 아이의 어깨를 흔들어 혀라도 깨물었느냐고 물어봤지만, 아이는 묵묵부답입니다.
아이는 그저 이런 게 좋다는 말만 떨리는 목소리로 되풀이합니다.
결국, 저희 셋은 5분이 지난 후에야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은 식어도 맛있었습니다.
65
◆0q41yE1imJQ
2018/01/13 16:12:02
ID : s2k8oZdzPeH
0
401호씨는 선뜻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도 조금 더 있어 주었습니다.
아이를 가까이서 보는 건 간만인지, 401호씨는 있는 내내 아이와 붙어있었습니다.
이후 그녀를 마중해주면서, 저와 401호씨는 잠깐 밖에서 담배를 피우기로 했습니다.
" 아-. 좋네요. 진작에 사촌들이랑 놀아줄 걸 그랬어요. "
"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
" 으응, 늦었어요. 집안에는 잘 안 들어가거든요. "
" 그런가요. "
그녀가 담배 연기를 한 움큼 허공으로 뱉어낼 때, 한 박자 늦게 제가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틱 틱 연신 소리를 내보았지만, 지퍼 라이터는 묵묵부답입니다. 가스가 동난 모양입니다.
제가 곤란한 표정을 보이자, 401호씨는 이쪽으로 다가왔습니다.
" 이제야 빚을 갚겠네. 이리 와봐요. "
401호씨는 고개를 기울여 담뱃불을 제게 가까이 내주었습니다.
저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제 담배를 401호씨의 담배 끝에 맞댑니다.
가로등도 희미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눈앞의 작은 불씨 하나뿐입니다.
그렇게 불이 옮겨붙었을 즈음, 저와 401호씨는 동시에 담배를 입에서 떨어트리고 연기를 뱉었습니다.
불씨를 반사하는 401호씨의 눈은 희미한 주홍색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 들어가요. 401호씨. 날이 추운데. "
" 그럴 생각이에요. 나중에도 불러요. 한가하면 도와드릴 테니까. "
저와 401호씨는, 그 말을 인사 삼아서 서로 등을 돌렸습니다.
나오면서 지퍼 라이터를 버릇 삼아 키니, 그제야 불씨가 돌아왔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에, 왠지 얼굴이 후끈해졌습니다.
66
이름없음
2018/01/14 08:49:57
ID : fQlctupQmlf
0
재밌다.. 쭉 이어가줘!
67
◆0q41yE1imJQ
2018/01/14 16:04:47
ID : s2k8oZdzPeH
0
고마워. 꼭 완결할 생각이야.
68
◆0q41yE1imJQ
2018/01/14 16:16:39
ID : s2k8oZdzPeH
0
" 아저씨, 어서 들어와요. "
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아이가 인사를 했습니다.
저 역시, 평범하게 받아쳤습니다.
그대로 아이는 시선을 텔레비전에 고정시킵니다. 저녁까지 잘 먹었는데, 왠지 기운이 없습니다.
저는 냉장고에서 탄산음료가 들어있는 캔을 두 개 꺼내, 아이의 볼에 바싹 붙였습니다.
차가운 감촉이 볼을 매몰차게 때리자, 아이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 ... 윽. 뭐예요, 아저씨. 본인답지 않은 장난을 치고. "
" 그냥. 아무 말도 없길래, 선 채로 잠든 줄 알았어. "
" 그런 건 아니예요. "
그렇구나. 라는 대답을 한 저는 제 몫의 캔을 따고 옆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캔을 열자, 차가운 거품이 손끝을 적셔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티슈를 두어 장 뽑아서 정리하던 도중, 아이는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물론, 시선은 텔레비전을 향해 있습니다.
" 아저씨. 모레 시간 돼요? "
" 아니. 일하러 가야해. "
일하러 간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전, 그 시간이 학부모 참관 수업 일인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 거짓말. 아저씨는 일 잘 안하잖아요. "
" 잡으라면 잡을 수 있어. "
" 안잡을 수도 있어요? "
" 안잡을 수는 있지. "
" 그럼, 잡지 마요. "
안됩니다. 지금 그 말이 나오면 곤란한데요.
69
◆0q41yE1imJQ
2018/01/14 16:23:45
ID : s2k8oZdzPeH
0
" 최근 너랑 지내면서 지출이 잦아졌어. 그 날은 일도 많이 들어와. "
" 일은 언제 끝나는데요? "
" 아침부터 저녁까지. "
" 아이고, 망했다. 그냥 잡지 마요. "
아이는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워선 제 쪽으로 눈을 도로록 굴립니다.
캔을 반쯤 비운 저는 테이블에 올려놓고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왠지,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니, 외나무다리도 아닌데 말이죠.
" 아저씨. "
" 안돼. "
" 뭐가 안돼요..! 그냥, 와주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
" 나는 네 아빠가 아냐. "
" 그건, 저도 알아요. "
왠지, 아이는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뱉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래서 아이는 곤란합니다. 꼭, 제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 이쪽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70
◆0q41yE1imJQ
2018/01/14 16:38:34
ID : s2k8oZdzPeH
0
" 그럼 방법을 바꿀게요. 제가 그날만, 아저씨를 살래요. "
그런 말을 하고는, 아이는 벌떡 일어나 제게 달려들듯 한 기세로 앉습니다.
실은, 아이는 신경 쓰지 않는다면서 내심 마음속에 얹어두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제가 모르는 사이 아이들 앞에서 저를 진짜 아빠라고 거짓말이라도 친 걸까요.
이러나저러나 깨달은 것은, 아이들이 말하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은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 아주 아주 비쌀 거야. "
" 얼마예요, 아저씨는? "
" 나도 잘 몰라. 아무튼, 나는 그 날 일하기로 결심했어. "
" 중간에라도 오면 안 돼요? "
" 그렇게 쉽게 빠질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미안해. "
" ... 그렇구나. "
저는 불쾌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혈관 속이 냉수로 채워진다면 이런 기분일까요.
어쩌면 저는 아이에게 어설픈 호의를 베풀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와 노는 것은 좋지만, 키우는 것은 부담되는 그런 어설픔.
실은 부담을 떠맡는 게 싫어서, 아빠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민하는 저 자신을 정당화하는 건 아닐까요.
제가 문득 시선을 돌려보니, 아이는 여전히 텔레비전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이의 눈은 화면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일렁이고, 반짝입니다. 이따금은 깜빡거립니다.
71
◆0q41yE1imJQ
2018/01/14 16:48:32
ID : s2k8oZdzPeH
0
" 그렇지만, 될 수 있다면 꼭 뺄 거야. 그 날 여건이 된다면 찾아갈게. 3교시였지. "
"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
" 빈말 하는 게 아냐. 정말로. "
저는 텔레비전을 끄고, 아이를 똑바로 마주 봅니다.
정적 속을 울리는 것은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뿐입니다. 아이는 저를 똑바로 마주 보고 묻습니다.
" 정말요? "
" 응, 정말. 멋지게 차려입고 갈 거야. "
" 말뿐이라도 좋네요. "
" 말만 하는게 아니래도. "
" 두 번 울리지 마세요. "
" 한번은 울었어? "
아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립니다.
내일이면 아이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다시 저를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이면 저는 아이의 아빠를 대신해서 참관 수업에 가겠지요.
이 아이는, 저처럼 안 좋은 기억을 억지로 삼키게 두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불을 펼치고, 저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 오늘은 밤늦게 울기 없기야. 마음 바뀌지 않을 테니까. "
" 아저씨, 진짜 짓궂은 거 알아요? "
아이는 민망한 듯 베개를 끌어안은 채로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72
◆0q41yE1imJQ
2018/01/15 17:49:43
ID : s2k8oZdzPeH
0
다음 날 아침입니다. 오늘은, 아이의 아빠가 돌아오는 날입니다.
제가 일어났을 때에도 아이는 여전히 새근거리며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제가 흔들어 깨우자, 아이는 뒤늦게 눈을 뜨고 일어납니다.
" ... 아. 아저씨였구나아. 좋은 아침. "
히죽 웃으며 손을 느리게 들어 올리는 아이.
문득 얼굴 안쪽을 보니, 그때 연고를 발랐던 상처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 응. 좋은 아침. "
아이가 잠에서 얼른 깰 수 있게 저는 찬물을 한 컵 갖다 주었습니다.
그렇게 저와 아이는 얼른 토스트를 구워서 아침을 해결했습니다.
직후, 차로 달려갔습니다. 시간이 조금 아슬아슬합니다.
학교에 도착하자, 아이는 저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 저기, 아저씨. 저 오늘은 데리러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집에 바로 갈 거거든요. "
" 괜찮겠어? "
" 응. 아빠가 올 거예요. 늦으면 괜히 시끄러워질 게 뻔해요. "
" 그래. 나중에도 또 와. ... 참. "
저는 아이의 스마트폰을 받아서, 제 번호를 입력해주었습니다.
남에게 번호를 준 적은 많지 않은데 말이죠. 저는 아저씨, 라는 이름으로 제 번호를 저장시켰습니다.
아이는 그 번호를 받아들고 놀리듯 여러 번 웃습니다.
73
◆0q41yE1imJQ
2018/01/15 18:03:16
ID : s2k8oZdzPeH
0
" 아저씨. 아저씨라-. ... 뭐, 좋아요. 아저씨, 안녕. "
아이는 손을 천천히 흔들어보이며, 제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저는 그런 아이에게 인사를 해주고 학교로 보냅니다.
오늘은 시간이 한가합니다. 아이를 데리러 올 필요도 없으니, 역시 도서관으로 가는게 제일이겠죠.
차를 몰고 가면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겨울의 하늘은 맑음과 흐림, 그 경계에 서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늘을 칠한 장본인이 있다면, 겨울을 칠할때 실수로 팔레트 속 두 색깔을 섞어버렸음이 틀림 없습니다.
도서관에 도착한 그 날은, 왠일로 사서 할머니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안이 노곤하게 따뜻하니, 할머니도 졸음을 이기지 못하셨던 모양이지요.
저는 조용히 머리만으로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시간은 초저녁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책을 읽다가 넋을 잃었던 모양이죠.
저는 책을 제 자리에 돌려놓고, 깨어계신 사서 할머니께 인사를 하며 나왔습니다.
그 길로 집에 들어가기 전, 저는 편의점을 들렀습니다.
그 편의점에서, 저는 아이의 아빠를 만났습니다.
74
◆0q41yE1imJQ
2018/01/15 18:16:09
ID : s2k8oZdzPeH
0
물론, 제대로 된 대화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아이의 아빠였음을 알았던 것도 편의점을 나오고 난 뒤의 일입니다.
편의점에서 목을 축일 것을 사고 있을 때, 그는 먼저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오늘의 그는 긴 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갔던 사흘 동안 그는 씻지도 않은 듯 보였습니다.
손에는 검은 봉투가 여러 개 들려있었고, 그중 한 봉투는 특히 크고 든 것이 많았습니다.
" 저, 손님. 카드 한도가 초과하셨는데요. "
" 다시 한 번 긁어봐. "
점원과 실랑이를 하던 아이의 아빠는 술 대신 라면을 다시 갖다놓음으로써 겨우 계산을 마쳤습니다.
그 길로 나가려던 아이의 아빠는 저와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홧김에 내음이 퍼지는 게 취한 모양입니다.
봉투에 맞은 저는 짧은 고통에 윽 하며 뒤로 물러났습니다.
" ... "
아이의 아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편의점을 빠져나갔습니다. 이것 참 곤란합니다.
차라리, 마주본채로 저는 말이라도 걸어볼걸 그랬습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할 말이 많은데. 저 상태로 집에 들어가는 것부터 저는 반대였으니까요.
제가 계산을 끝내고 다시 차를 타는 동안에도 맞은 부분은 얼얼했습니다.
75
이름없음
2018/01/15 18:58:50
ID : wq1yJPa1a4L
0
재미있어ㅜㅜㅜㅜ
76
◆0q41yE1imJQ
2018/01/16 17:24:18
ID : s2k8oZdzPeH
0
고마워. 끝까지 재미있게 봐줘.
77
◆0q41yE1imJQ
2018/01/16 17:43:51
ID : s2k8oZdzPeH
0
어째 그사이에 하늘은 우중충해져 있습니다.
겨울 하늘은 변덕이 심한 모양입니다. 아침의 맑은 하늘과는 대조적입니다.
날씨도 추워지고, 어쩌면 싸라기눈이 올지도 모릅니다. 찬바람을 맞이하는 볼이 따갑습니다.
저는 차를 주차한 후, 몸을 으슬거리며 차에서 기어 나왔습니다.
아파트의 입구 바로 앞에서, 저는 401호 씨를 만났습니다.
401호 씨는 늦게까지 화방에 있다 돌아온 듯 보였습니다.
" 403호씨. 어디 갔다 와요? "
" 책을 좀 읽다가 왔죠. "
" 그럼 온 김에, 잠깐 얘기나 하다 가요. "
제법 생뚱맞구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습니다만 저는 금방 사정을 이해했습니다.
401호씨가 말하길 본인 집의 전력이 나가버렸던 모양입니다.
자신은 어두운 곳에 혼자 있기 싫은데, 때마침 제가 지나갔던 것이죠.
그래서 잘 되었다, 하며 401호씨는 저를 불렀던 것이었습니다.
" 조금 고백하자면, 최근 당신을 부러워하고 있어요."
401호씨는 평소에도 그렇듯, 비릿한 웃음을 보였습니다.
78
◆0q41yE1imJQ
2018/01/16 17:53:11
ID : s2k8oZdzPeH
0
" 무슨 말씀이신지. "
" 말 그대로예요. 조금 나쁜 버릇이지만, 저는 저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는 낙으로 살거든요. "
401호씨는 벽에 기댄 채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얘기를 합니다.
자신보다 제가 더 불행해 보여서, 당신 덕분에 지금까지 지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래층에 사는 아이를 당신이 돌보는 것을 봤다는 이야기.
둘은 서로 지내면서 분명 무언가 보기 좋게 바뀌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그런 저를 보면서 마음 한구석은 불편했다는 이야기까지.
" 어쩌다 보니, 당신을 조금은 미워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
" 짓궂습니다, 401호씨는. 당사자한테 그런 걸 말하는 건 나쁜 버릇이에요. "
" 그래서 가족들이 저를 싫어하는 모양이네요. 403호씨도 내가 싫어요? "
" 저도 같은 부류라, 딱히 싫지는 않아요. "
" 부디 앞으로도 그렇게만 있어주세요. 이제 403호 씨를 미워하는 건 관둘 생각이니까. 줄곧 둘을 보면서, 덕분에 이쪽도 바뀌게 되었어요. 아이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
그대로 401호 씨는 저를 향해 몸을 숙였습니다. 얼떨결에, 저도 그녀를 따라 했습니다.
저희 둘은, 서로에게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79
◆0q41yE1imJQ
2018/01/16 18:02:22
ID : s2k8oZdzPeH
0
" 그건 그렇고, 403호씨는 이대로 괜찮아요? "
" 네? "
" 아이를 돕는 거 말이에요. 이런 일은 어설프게 시작하면 안 되잖아. "
역시 401호씨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생각하던 고민이 눈앞에 던져지자, 저는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대로 계속 아이가 원할 때에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아이의 삶은 바뀔 수 없습니다.
혹은 아이가 제게 너무 의지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보다 더 의지한다면, 아이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 어떤 식으로든, 저는 아이를 구할 생각이에요. "
" 403호 씨가요? 어떻게 하려고. 신고는 소용 없을 텐데. "
" 그렇다 해도 말이죠. 며칠 지내면서, 저 아이가 참을 수 없게 불쌍하게 느껴지거든요. "
" 단순히 어린애라서? 아니면? "
" 동병상련 같은 거예요. "
저는 주머니에 두 손을 깊이 쑤셔 넣은 채로 한숨을 푹 쉽니다. 추운 날은, 입김이 눈에 훤히 드러납니다.
지금 이대로 꾸준히 아이를 주변에 인식시켜 간다면 괜찮을까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아이에게 관심을 두고, 언젠가 아이의 속사정도 이해하게 된다면.
그땐 아이를 구할 수 있을까요.
80
◆0q41yE1imJQ
2018/01/16 18:15:41
ID : s2k8oZdzPeH
0
" 그때 제가 얘기한 거 있죠. 나중에도 부르라고. 그건 빈말이 아니에요. "
401호씨는 제게 천천히 걸어옵니다.
제가 조금 당황해버리며 뒷걸음을 치려 들자, 401호씨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가볍게 툭 툭 두드렸습니다.
" 그러니 혼자 앓지 않았으면 싶네요. 그 아이는 저도 아끼고 있어요. "
저는 그 말을 듣고서야 뒷걸음 치던 것을 멈추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401호씨가 있다면 조금 더 든든할지도 모릅니다. 억지로 다급하게 하지 않아도 좋겠지요.
천천히, 주변 사람들이 아이에게 익숙해지게만 해도 좋습니다.
" 아-. 저 아저씨 또 들어가네요. 아이가 아빠를 잘 다독여야 할텐데. "
401호씨의 시선은 3층을 향해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시선을 옮겼습니다. 아이의 집 문을 아빠가 비틀거리며 열고 있습니다.
" ... 잠깐만요. "
저는, 조금 기억을 되짚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편의점에서 본 그대로였습니다. 오히려, 조금 더 취한 듯 보였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이의 아빠는 편의점에서 그대로 집까지 걸어온 것 같습니다.
저희가 얘기하는 사이 도착했다는 얘기가 되겠죠. 평소와 복장이 달라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분명, 아이의 아빠와 부딪힐 때 봉투에서는 둔탁함이 느껴졌습니다.
그것이 도구의 일부분이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건 얼얼한 제 손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아이의 아버지가 화가 난다면, 이성을 잡을 수 있을까요?
저번처럼, 아이는 발목이 다치는 것만으로 끝날 수 있을까요?
저는 곧 이어서,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403호씨의 목소리는 급속도로 멀어져만 갑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것만은 안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이 그러합니다.
저는 입술이 바싹 말라갔습니다. 심장이 덜컥이는게 느껴집니다.
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뎌, 무릎을 세게 찧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분명 그때 달려야만 했습니다.
81
◆0q41yE1imJQ
2018/01/17 16:37:04
ID : s2k8oZdzPeH
0
저는 3층에 다다르고, 그제야 숨을 헐떡이며 정돈했습니다.
분명 방금, 아빠가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직까지 아이의 집 안은 조용합니다.
저는 걸음을 소리 나지 않게 옮겨 아이의 집 바로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문은 굳게 닫혀있습니다. 안은 당연하게도 조용합니다.
전날 아이의 집에 들어가 봤을 때, 벽에는 푹신한 자재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습니다.
요컨대 소리가 밖으로 쉽게 새어 나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단 하나의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가 정말로 영악하다면, 제 의도를 눈치채줄 것입니다.
이윽고 주머니가 울립니다.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저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휴대전화에 문자 메시지가 하나 와있습니다. 아이에게서 온 문자입니다.
' 아빠가 오늘따라 이상해요. '
예상대로 입니다. 그가 굉장히 취한 듯 보였던 것은 저만의 착각이 아닌 모양입니다.
저는, 제가 느꼈던 본능에 충실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무례하게 나와야 합니다.
저는 집 문에 귀를 가까이 붙이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숨죽이며 기다리던 중, 귀를 찢어버릴 듯하게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는 그 직후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무래도 반응이 없다 싶어서, 세 번째부터는 주먹으로 강하게 내려쳤습니다.
잠시 잠잠해진후 문이 열립니다. 아이의 아빠가 안전고리를 걸어둔 채로 문을 열었습니다.
안은 조용합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 뭡니까. "
" 뭔가 깨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서 내려왔는데요. "
아이의 아빠는 취한 얼굴로 불편함을 노골적이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82
◆0q41yE1imJQ
2018/01/17 16:52:27
ID : s2k8oZdzPeH
0
" 실수로 떨어트린 겁니다. 들어가 봐도 좋소. "
" 정말 괜찮으세요? 최근 여러 번 들었는데. "
" 그래 봐야 집안일이지. 당신이 참여할 바가 아니잖아. "
그는 어느새 말을 낮추며 제게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그의 당연한 태도를 마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아이가 다친 채로 올라오는 모습을 보기 싫었던 저는, 강수를 뒀습니다.
" 꼬마야. 꼬마야? 잠깐만 나와볼래? "
제가 아이를 부르자, 잠잠하던 안방 문이 슬그머니 열립니다.
아이는, 그 안방에서 얼굴만 내놓고는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불안감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입술을 질근 물고 있는 것까지 보입니다.
이윽고, 아이의 아빠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머리를 벅벅 긁었습니다.
" 잠시만 같이 얘기해주세요. 잠깐이면 됩니다. 찬바람이나 쐬자는 거예요. "
그는 말이 없었고, 여전히 한숨을 쉽니다. 짧은 순간에도 많은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문을 닫더니, 안전고리를 열어젖히는 소리가 문밖으로 들렸습니다.
안심입니다. 잠깐의 대화를 할 여지는 생긴 거겠죠.
그대로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사이 문이 열렸습니다.
직후, 저는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순간 시야가 흐려졌습니다.
무언가에 거세게 잡히며, 마치 지미집에 걸쳐진 카메라마냥 붕 뜨는 느낌을 받습니다.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몸 안 깊숙이 퍼지며, 저는 아이의 집 안으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 오늘로 다 정리하려니까 파리가 꼬이네. 이게 다 애 때문이야. 애. "
제가 들어오자,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립니다.
숨이 턱 끝에서 뱉어지지 못하고 막혔습니다. 야단났습니다.
83
◆0q41yE1imJQ
2018/01/17 17:08:06
ID : s2k8oZdzPeH
0
아빠는 손에 들고 있던 유리 재떨이를 바닥에 떨구었습니다.
흐려진 시야 사이로 재떨이가 흠뻑 붉어진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자세를 갖추기도 전에, 그는 제 복부를 연신 걷어차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숨을 간신히 내뱉으며 웅크립니다. 아이는 어떻게 이런 고통을 홀로 버텼던 걸까요.
아빠를 말리러 오는 아이를 거칠게 밀치고, 그는 제 머리카락을 쥐어 올리며 말을 이어나갑니다.
" 소리가 들려서 온다는 것부터 수상했지. 잘 봐. 방음재가 잔뜩이잖아. "
분명 얼굴은 취해서 시뻘게져 있는데도, 그는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지친 저를 내버려두고, 그는 식탁에 있던, 편의점에서 부딪힌 검은 봉투를 집어 들었습니다.
신문지를 걷어내자, 방금 제련된 듯한 주방용 식칼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순간, 요리도구는 어처구니없는 흉기가 되었습니다.
" 농담이지. 자기 딸을 찌르는 아빠는 아빠 자격 없어. "
" 뭐... 그래. 오늘로 관둘 생각이었어. 저게 모든 걸 말아먹었거든. "
머릿속이 우유를 들이부은 듯 하얘집니다. 손끝과 발끝은 얼음물에 담가버린 것 마냥 차가워집니다.
이런 위협을 느낀 건 살면서 처음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제가 지쳤음을 확인하고, 걸음을 안방으로 돌립니다.
처음부터 오늘 모든 일을 끝장낼 심보였던 겁니다. 아마, 지극히 우발적인 범죄로 뉴스에 보도되겠죠.
저는 남은 힘을 쥐어짜서, 그의 다리를 안으로 당겨, 그를 넘어뜨렸습니다.
이때부터 귀가 먹먹해지고, 시야는 극도로 짧아집니다.
아이를 구하려는 의도와 제가 살고 싶다는 의도가 노이즈처럼 뒤섞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제대로 된 말도 못하고, 그저 아빠를 막는데에만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84
◆0q41yE1imJQ
2018/01/17 17:25:18
ID : s2k8oZdzPeH
0
예상하지 못했던 듯, 아이의 아빠는 넘어졌습니다. 식칼은 30cm 정도 멀어집니다.
그대로 그의 다리를 두 팔로 끌어안은 저는 천천히 몸을 위로 움직입니다.
올라타기에 성공한 저는 아빠의 두 팔을 잡습니다. 요동치는 그는 저보다도 힘이 더 세 보입니다.
아이는 패닉이 온 듯 안절부절 못합니다. 울먹이기까지 하는 아이를 진정시켜야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습니다.
그는 무작정 팔꿈치를 휘두르기 시작했고, 저는 보기 좋게 정면으로 그 팔꿈치를 맞았습니다.
뜨거운 것이 울컥하며 입, 턱을 타고 흐릅니다. 쇠를 핥는 맛이 납니다.
바로 기어가는 그를 발견한 저는, 다시 한 번 몸을 던져 그를 막았습니다.
두 사람의 손이 허우적거립니다. 식칼에 닿을 듯 말 듯 할 때마다, 제 심장은 공포를 꾸역대며 집어삼킵니다.
또다시 떨쳐진 저는 결국 코를 붙잡고 나뒹굴었습니다. 고통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납니다.
" 이젠 다 끝이다. 그러게, 왜 남의 집에 참견을 해서... ... 어? 왜, 사족을 다느냔 말이야. "
제 위로 마운팅을 한 그는 주먹을 제 얼굴에 내리꽂습니다.
말이 끊길 때마다 묵직한 충격이 전해집니다. 무자비합니다. 저는 두 팔로 얼굴을 막기에 급급합니다.
순간, 칼날을 제게 향한 채로 그는 체중을 손잡이에 집중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의 표정이란, 이다지도 추악합니다.
손끝이 부러질 듯 아려오는 것도 모른 채, 칼이 제 몸을 파고드는 것만을 억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 그만두시죠. 더 하면 곤란할 텐데. "
문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 문 앞에는 401호씨가 휴대전화를 든 채로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401호씨의 옷깃을 붙잡은 채로 울고 있었습니다.
언제 집을 빠져나간건지, 영악합니다. 저는 목숨이 놓인 와중에도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85
◆0q41yE1imJQ
2018/01/18 13:43:21
ID : s2k8oZdzPeH
0
401호씨는 칼을 들고 서 있는 그를 보고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었습니다.
경찰에 신고를 하는 401호씨와, 그 옆에서 울먹이는 아이.
저는 칼을 붙잡은 채로 숨을 헐떡이고, 아이의 아빠는 들고 있던 칼을 떨어트리며 말을 잇지 못합니다.
이런 걸 난장판, 아수라장이라고 하는 거겠죠.
" ... 아가. 그만둬. 저, 저 휴대전화를 아빠에게 가져다오. "
그는 제게서 천천히 일어납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아이에게 걸어가며, 그는 방금 과는 전혀 딴판인 목소리로 호소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묵묵부답입니다.
" 어서. 아빠는... 그래, 아빠 말을 듣는 너를 정말 사랑해. "
" ... "
" 자... 빨리. 어서 가져와... 가져오란 말이야. 어서. "
점점 말은 다급해지고, 언성은 높아져만 갑니다.
제게 칼을 들이밀 정도로 저돌적이었던 그가, 지금은 달려들지도 못하고 아이에게만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극도로 당황하면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요.
" 아빠 말을 들어! 어서. 어서 가져오란 말이야... "
" ... 이럴 때에만 아빠인 척하지 마요. "
아이는 한번 윽, 소리를 내면서 울음을 집어삼켰습니다.
소매로 눈가를 세게 꾹 누르면서 얼굴을 정리하고, 그 후에는 아빠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한순간에 정적이 흘렀습니다.
86
◆0q41yE1imJQ
2018/01/18 13:56:02
ID : s2k8oZdzPeH
0
" 나는 너를 사랑해. 지금은... 지금은, 조금 상황이 안 좋을 뿐이야. 상황이 조금만 괜찮아지면 그땐 지금까지 못다 한 사랑을 다 해줄 거야. 그러니까... "
" 관둬요.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아빠한테 그런 거 맡겨둔 적도 없고요. "
남자의 표정은 복잡하게 일그러져갑니다. 주름은 마치 가뭄 속 논밭같이 깊어져 갑니다.
남자가 하려던 말을 잘라버린 아이는 이윽고 참아왔던 말들을 쏟아붓습니다.
그건 우는 것과도 같았고, 애원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 아빠가 날 죽이려고 한 건 이해할게요. 나 때문에 아빠 인생이 망가졌다면서요. 그렇다면 그럴 수 있어요. 나도 나를 망쳐가던 아빠를 죽이고 싶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 아빠랑 있는 건 질렸단 말이에요. 관둬요... ... 관둬. 관두란 말이야. "
아이는 말을 하면서도 울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습니다. 비집어 나오는 눈물이 야속합니다.
" 나는요, 아빠랑 어디를 제대로 가본 적이 없어요. 뭔가 만들어 먹어본 적도 없고요. 아빠는 한 번도 날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죠. 학교 같이 가준 적 있어요? 난 아빠랑 같이 자고 싶었는데, 그것도 결국 한 번도 못했어요. 차에 타서 노래 듣는 것도 하고 싶었어요. 촌스러운 노래? 상관없어요. "
" 아니야. 난... 난 힘들었어... 사람이 힘들다면 조금 놓을 수도 있는 거야. 넌... 넌 몰라. 너는, 아무것도... "
" 알아요! 아빠 때문에 알기 싫었어도, 난 알 수밖에 없었어요. 아빠랑 있었던 근 몇 년보다, 아저씨, 401호 언니랑 지낸 2주가 난 훨씬 좋았어요. 아빠 같은 건, 이제 싫어요... 그러니까 나를 놓아줘요. "
아이는, 스스로 말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아빠에게 사라지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두려워하던 사람한테 드디어 말을 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뭐라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중얼거립니다.
그리고는 덜컥거리며 아이에게 달려들어 갑니다. 마치, 살아있는 목각인형 같습니다.
87
◆0q41yE1imJQ
2018/01/18 14:05:05
ID : s2k8oZdzPeH
0
" 잘했어, 꼬마 아가씨. "
401호씨는 휴대전화를 아이에게 맡기고, 재빠르게 아이의 앞으로 달려갑니다.
한순간 이었습니다.
401호씨가 짧은 기합소리를 넣고 나서, 아이의 아빠는 제 한 뼘 앞에 고꾸라져버렸습니다.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아이의 아빠는 외마디 신음을 흘리다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훗날 듣기로, 401호씨는 실제로 합기도를 오랫동안 배웠던 모양입니다.
" ... 저기, 우리 아빠는 죽은 거예요? "
" 아니. 거꾸로 엎어졌다고 죽지는 않아. "
" 아빠가 이걸로 언니를 고소하면요? "
" 정당방위라고 얼버무릴 생각이야. 저기, 흉기도 있잖아. "
401호씨는 어깨를 두어 번 돌리면서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대로 쭈그려 앉아서 눈높이를 맞추고, 항상 그랬듯이 비릿한 웃음일 보입니다.
" 제정신이 아니네요, 403호씨. 맘에 안 든다고 남의 집에 쳐들어가는 게 어디 있어요? "
" 쳐들어갔다기보다는... 그보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
" 당신 뒤를 따라갔어요. 지금까지 403호 씨가 뛰는 모습은 처음 봤거든. "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저도 정신이 나갔던 모양입니다.
아이는 아빠가 기절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제게 달려옵니다.
내일은 중요한 날인데, 아이에게 피를 묻힐 수는 없죠. 피가 묻지 않게 조심해서 다독여주었습니다.
88
◆0q41yE1imJQ
2018/01/18 14:12:52
ID : s2k8oZdzPeH
0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습니다.
경찰이 신고를 듣고 왔을 때, 집안이나 저나 아이의 아빠나. 모든 것은 엉망이었습니다.
경찰은 연기인지 진심인지, 이런 사정일 줄 꿈에도 몰랐다고 합니다.
당연히 아이의 아빠는 우선으로 체포되었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살인 미수가 유력하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이웃들을 제지하느라, 경찰들이 몇 명 더 오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저와 401호씨, 그리고 주변 이웃들은 경찰의 추가적인 조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선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저런 집에서 잘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이는 거의 강제적으로 저를 소파에 앉혀두고, 밴드와 연고 등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아프다며 호소해도 아이는 꿋꿋하게 연고를 바릅니다. 짓궂습니다.
" ... 아저씨한테 이런 짓을 하다니. 다시는 아빠한테 안 갈 거예요. "
" 그게 좋겠다. "
아이는 밴드를 다 붙이고 나서, 한숨을 푹 쉽니다.
초조한 듯 보입니다.
" ... 저기. 아저씨. 저는 앞으로 어떻게 돼요? "
아이한테는 이런 상황이 처음일 것입니다. 어떻게 될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겠죠.
89
◆0q41yE1imJQ
2018/01/18 14:18:45
ID : s2k8oZdzPeH
0
" ... 잘 들어, 꼬마야. 앞으로 너는 혼자서 많은 것을 하게 될 거야. "
" ... "
아이는 알고 있다는 듯 끄덕이고 있었지만, 기분은 편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 그렇지만, 주변에 나도 있고, 401호씨도 있어. 최소한, 두 사람은 네가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게 하지는 않을 거야. 대신 너도 바뀌어야 해. 좀 더 주변 사람들한테 도움을 구해도 좋아. 억지로 혼자 다 해결하려고 들지 않아도 좋다고. "
" ... 응. "
" 그럼 잘까. 내일 학교는 쉬어도 좋겠지만, 일단 내가 피곤해. "
" 싫어. 아저씨가 오는 날이잖아요. 꼭 학교에 갈 거예요. "
저는 아이를 토닥이고서 이불을 깔았습니다.
항상 그랬듯, 아이는 소파에, 저는 바닥에서 잠을 청합니다.
" 잘 자요, 아저씨. "
" 응. 잘 자. "
90
이름없음
2018/01/18 17:42:12
ID : QrdXzaq0raq
0
ㄴㅐ가 왜 지금 이걸 봤을까...!
좀더 이야기 나온뒤에 후다닥 보면 다음을 기다리며 '궁금해ㅔㅔㅔ!!' 할 일 없을텐데!
으으으... 다음이 너무 궁금해라!
91
◆0q41yE1imJQ
2018/01/19 16:17:17
ID : s2k8oZdzPeH
0
이제 다 끝나가. 조금만 더 기다려줘.
92
◆0q41yE1imJQ
2018/01/19 16:22:37
ID : s2k8oZdzPeH
0
근처에서 뒤척이는 소리와 아침 새소리가 섞여 들려옵니다.
아침입니다. 어제 그런 소란이 있고서도, 아침은 늘 똑같습니다.
뒤척이던 소리의 정체는 아이였습니다. 제가 일어나자 아이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 좋은 아침. "
" ... 아저씨도 좋은 아침. "
아이는 눈을 두 손으로 비비며 기지개를 쭉 켰습니다.
" 아저씨, 나 오늘 악몽을 꿨어요. "
" 무슨 악몽. "
" 아저씨가 죽을 뻔한 꿈이요. 401호 언니가 그걸 구해줬어요. "
" 그래, 악몽일 만도 하네. "
" 우리 아빠는, 경찰에 잡혀간 거 맞죠? "
" 응. 그러니 악몽 같은 건 잊어버려. "
저는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시작합니다.
아이는 그제야 아침을 실감합니다. 창문에 앉아있는 새들을 보며 입으로만 웃다, 화장실로 걸어갑니다.
세수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93
◆0q41yE1imJQ
2018/01/19 16:29:53
ID : s2k8oZdzPeH
0
이후, 저는 항상 그랬듯, 아이를 데리고 내려갔습니다.
이번에도 아이는 3층에 멈춰 섰습니다. 그렇지만, 걸어가서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아? "
" 상관없어요. 저 집에는 연연하지 않을 거니까. "
차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평소처럼 돌아왔습니다.
학교 앞에서 내리기 전, 아이는 제게 신신당부했습니다.
" ... 아저씨. 오늘 정말 올 수 있어요? 저번에도 확답이 아니라, 올 수 있게끔 노력하겠다고 했잖아요. "
" 최대한 노력해볼게. "
" 어른들은 원래 그런 식으로 말해요? "
" 응. 우리는 틀리거나 잘못되는 걸 두려워해. 그래서 확답은 하지 않지. "
" 으이구. 3교시에 시작해요. 올 수 있다면 꼭. "
아이는 기대한다는 말을 남기고 학교로 총총 뛰어갔습니다. 또래 친구 둘 틈에 섞여서, 같이 걸어갑니다.
보기 좋다고 느꼈습니다.
오늘은 도서관에 가지 않고, 집에서 준비를 끝마친 후 학교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제가 차를 세울 즈음, 외투를 걸친채로 돌아오는 401호씨가 멀리 보입니다.
아마, 경찰과 추가적인 조사를 하고 오는 길인 모양입니다.
94
◆0q41yE1imJQ
2018/01/19 16:38:09
ID : s2k8oZdzPeH
0
" 403호씨 좋은 아침. 웬일이예요, 도서관에 가지 않고. "
" 좀 뒤에 학교에 다시 가봐야 해요. 학부모 참관 일이거든요. "
" 외출도 잘 안 하는 403호씨가요? 별일이네. 그런데 말이죠. "
401호씨는 어깨를 으쓱이곤 제 머리카락 끝은 엄지와 검지로 잡습니다.
제가 문제 있느냐는 듯이 그녀를 내려다보자, 그녀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깁니다. 너무합니다.
" 설마 이 머리로 학교에 가려고요? 덥수룩한 것도 있고... 밴드야 떼어내면 된다지만. "
" 아. ...미용실에 가면 해결되지 않을까요. "
" 내가 잘라줄게요. 대신, 나도 데려가 줘요. "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보는 저를 향해서 401호씨는 실실 웃습니다.
본인의 머리도 직접 잘랐다며 손가락으로 집게 모양을 만드는 401호씨. 확실히 그렇다면 실력은 좋은 편이겠죠.
저는 그녀까지 데려갔다가 혹시 일이 복잡해질 것을 염려했지만, 이내 관두기로 했습니다.
그녀 역시 아이, 그리고 저를 지켜주는 데에 큰 공헌을 해주었으니까요. 함께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 괜찮아요? 나를 집에 들여놓아도. "
" 괜찮아요. 수틀리면 403호씨도 어제처럼 엎어버릴 거니까. "
401호씨는 저를 집안에 들이며 반 진심으로 그런 농담을 말했습니다.
95
◆0q41yE1imJQ
2018/01/19 16:51:41
ID : s2k8oZdzPeH
0
부엌에 있던 의자를 전신 거울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저는 401호씨를 거들어서, 의자 아래에 넓은 반경으로 신문지를 깔아놓습니다.
그리고 저는 의자에 앉고, 401호씨는 커트보를 제게 둘러놓습니다.
머리 위로 분무기를 이용해서 물을 뿌리고, 대충 견적을 잡는 눈치입니다.
제법, 미용실 분위기가 납니다.
" 그냥 짧게 다듬을게요. 괜찮죠? "
" 부탁합니다. "
401호씨는 천천히 머리를 손보다, 조금씩 다듬어가기 시작합니다.
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져 갑니다.
조금씩 홀가분해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직 마음속에는 응어리진 것이 남아있습니다.
앞으로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나 자신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 저기, 401호씨. "
" 응. "
" 아직 시간은 조금 남아있으니까요. 고민을 털어놔도 괜찮을까요. "
" 물론. "
401호씨는 시선은 거울 속 제 머리에 향한 채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녀라면, 제 마지막 남은 의문을 해결해줄지도 모릅니다.
" 제가 아이를 돌봐도 괜찮을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
" 듣고 있어요. "
" 저는,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
" 허. 당신 악질이군요. "
401호씨는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계속 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였습니다.
96
이름없음
2018/01/19 17:29:52
ID : O5QsktxWja3
0
재밌어...!
완결나면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 꼭 완결내줘.
97
이름없음
2018/01/19 19:16:33
ID : imFfO647zdT
0
진짜 재밌다 아이랑 아저씨 401호 나이대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돼?
98
◆0q41yE1imJQ
2018/01/20 09:36:34
ID : s2k8oZdzPeH
0
재미있게 봐줘서 고마워. 꼭 완결 내도록 할게.
잘 봐주는 사람이 있다니 기뻐.
아이는 초등학생, 아저씨는 아저씨라고 불리는만큼 나이에 비해서 얼굴이 삭았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겠지. 401호씨는 20대 초반. 자세히 정하고 쓰지는 않았어.
99
◆0q41yE1imJQ
2018/01/20 10:05:50
ID : s2k8oZdzPeH
0
제 어린 기억은 냄새가 납니다. 그것도 심각한 악취가.
가정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괴롭습니다.
집에 들어올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씻고, 방안으로 기어들어가서 잠을 잘 때 마저도.
상처를 곪게 만들고도 남을 독한 시선을 계속해서 받습니다. 그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저는 제가 태어나버린 것을 속으로 여러 번 곱씹으며 후회했습니다. 탄생을 막는 스위치가 있다면 전력으로 누르고 싶었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하면서도 속으로는 누군가 나를 도와주기를 바랐지만, 그것을 말로 꺼낼 수는 없었습니다.
도움을 청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 그렇게 나를 목 조르던 사람들을 몰아내고.
계속해서 주변의 의식적이게 느껴지는 인식과 도움을 받고. 나 자신을 익숙하지 않은 내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그렇게 도움을 받고 나면 앞으로는 잘해야만 한다는 부담과 압박감을 받는 것.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그런 모든 것들을 감수하는 일이었습니다. 제게 그런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저는 마법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들이 해결되기를 바랐습니다. 저 나름은 버틸 대로 버티다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찾은 유일한 마법은 분신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401호씨에게 저를 지금까지 괴롭히는 기억과 제 방화에 관한 이야기를 설명했습니다. 시간은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401호씨는 머리를 거의 다 다듬어가며 말을 이어주었습니다.
" 흐응. 대범한데요. 이런 걸 제게 얘기하고. ...뭐, 법에 대해서 문외한인 제가 얘기해보자면 둘 다 악질이네요. 403호씨나, 그 부모님이나. "
" 맞아요. 둘 다 엄청난 악질이죠. "
100
◆0q41yE1imJQ
2018/01/20 10:13:52
ID : s2k8oZdzPeH
0
" 그래서 아이를 돌보는 게 괴로워요.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훔쳐보는 기분이 드니까. 마치, 아이를 돌보는게 잘못에 대한 후회나 자기 위안 같은 심정으로 하는 건 아니냐고 말하는 것 같아요. "
" 403호씨. 아이를 키울 돈은 있어요? "
" 그 정도는 있어요. "
" 아이를 돌보는 동안 어땠어요? "
" 난... 조금 놀랐어요. 내가 주변을 이렇게까지 신경 쓸 수 있나 하고. 기쁘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이 덕분에 배운 것도 많아요. "
" 왜 아이를 구하려고 했어요? "
" 아이만큼은 나 같은 길을 밟지 않기를 바랐어요. 제가 겪었던 것들이랑 너무 똑같았거든. 뭔가 신호라도 받은 듯 몸이 움직였어요. "
" 그렇구나. "
401호씨는 마지막으로 남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습니다.
손으로 부드럽게 머리를 털어내고 나서 만족스럽다는 듯 403호씨는 웃습니다.
" ... 401호씨. 내가 아이를 돕는 게 가능할까요? 나 같은 사람이 말이예요. "
101
◆0q41yE1imJQ
2018/01/20 10:30:27
ID : s2k8oZdzPeH
0
401호씨는 장갑을 벗고, 손끝으로 자신의 턱을 규칙적이게 두드렸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듯 천장을 쳐다보다, 거울 속 저를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 확실히 당신은 살인자네요. 그렇지만, 당신 부모들이 당신을 먼저 죽여버렸으니까, 둘 다 쌤통이에요. 저는 사람을 죽인 당신이 앞으로도 평생 괴로워했으면 좋겠어. 그 죄책감을 열심히 곱씹어주세요. "
" 부정할 수 없어요. "
" 그렇지만, 그게 아이의 불행을 방관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는 않아요. 이건 제 생각인데, 아이는 이대로면 아마 시설로 보내지거나, 아이의 엄마 혹은 친척에게 보내질 거예요. 어느 쪽이든 아이에게는 불행하겠죠. "
" 차라리 그편이 아이에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도 가족에게 맡겨지는 편이... "
" 보이지도 않는 핏줄에 연연하지 마요. 엄마나 친천, 연락할 수 있었다면 진작 연락해서 아이를 구했을 거예요. 모성애를 얕보면 안 되거든요. 그리고, 아이는 당신이랑 지낼 때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어요. 이기적이게 얘기한다면 당신도 아이가 필요하잖아요. 그 덕분에 바뀔 수 있었으니까. "
" 난, 난... "
401호씨는 커트보를 정리하며 제 어깨를 두드립니다. 그녀는 입으로 스스로 짜잔,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 누구나 죄를 짓고 살아가요.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남을 도우면서 삶에 충실 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죠. 당신이 잘못한 건 평생 가슴에 간직하세요. 어제 그 아빠나 당신의 부모처럼 변해버리면 용서치 않을 거예요. "
" ... "
" 이상, 401호씨의 판결이었습니다. 살인자의 살인을 묵인하다니. 소감은? "
" 엉망이지만, 덕분에 홀가분해졌어요. "
저는 401호씨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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