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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제목: 소설 (모두 평가랑 비평 해줘!! 부탁할게!!!) (4)
망자가 끄는 수레
78년 1월
제국의 겨울은 북부 연합의 겨울에 비하면 정말 따뜻한 편이다. 그중에서도 남동쪽의 벨스파드 해안과 밀접한 지역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없다. 학자들은 그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들을 내놓았지만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도 명확한 해답은 없었다.
이 벨스파드 해안을 통해 크고 작은 섬들이 모여 있는 리븐델 제도로 향할 수 있다. 물론 그 외의 다른 길로도 가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벨스파드 해안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면 굉장히 거센 물길을 뚫어야 한다. 돌파하려면 시간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손해가 막심하기에 제국에서 리븐델 제도로 향하는 항구를 운용하는 곳은 딱 두 도시 뿐이다.
대륙의 남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라레히르란 이름의 도시와 그보다 북쪽에 있는 칼소르란 도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리고 밝은 금발이 인상적인 남자는 칼소르 시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남자는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바다와 인접해 있음에도 바다냄새가 나지 않는 신기한 바람이었다. 그는 겨울임에도 춥지 않고 시원한 바람이 자신의 머리를 흔들자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남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이 때문에 바람에 산들거리는 머리카락을 낡은 가죽끈으로 묶었다.
머리를 묶고 도시의 풍경을 기분 좋게 둘러보던 남자의 눈에 칼소르 시의 시계탑이 눈에 들어왔다.
제국과 북부 연합이 휴전을 맺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시계탑이었다. 놀랍게도 긴 시간이 흘렀지만 시계탑은 고장 나지 않고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남자는 볼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칼소르 시에 왔을 때가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저 시계탑은 공사를 하네 마네하며 사람들끼리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제국 신민들이 서로 나뉘어 갈등을 겪었다. 겨우 주춧돌만 마련해 놓은 상황에서 공사는 진척이 없었고, 앞으로도 완공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나와 찾은 칼소르 시의 시계탑은 훌륭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남자는 시계탑의 높이에 휘파람을 불었다. 그가 아는 한 저 시계탑의 높이에 비할 정도로 높은 건물은 제국 수도의 황제가 머무는 황궁과 서쪽의 교황이 머무는 대성당뿐이다. 물론 그 면적은 비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황궁과 대성당처럼 높다는 것에서 제국과 북부 연합의 휴전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는지 알 수 있다.
제국이 시계탑을 세워 휴전을 기리는 것과 비슷하게 북부 연합에도 저런 건축물이 있다. 다만 그들은 휴전을 유약한 지도자가 겁먹어 제국에 굴복한 패배로 생각했기에 저토록 평화로운 분위기의 물건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들은 부러진 창과 깨친 방패를 세워 그날을 기억한다.
남자는 시계탑의 가까이 다가갔다. 멀리서 봤을 때는 이제 막 오후가 된 태양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났지만 사실은 새하얀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남자는 시계탑을 이루는 새하얀 돌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따뜻했다. 그는 시계탑을 세우는 데 쓴 이 돌들이 제국 남부에서만 나는 귀한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는 시계탑을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새삼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는 시계탑을 뒤로하고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주점을 찾아 들어갔다.
밖에서 보던 낡은 모습과는 달리 안은 제법 고즈넉했다. 남자는 그 이유를 전체적으로 낡은 가구들이 만드는 고전적인 향수와 새로 들여온 물건들의 세련됨이 만들어내는 조화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반기는 종업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잠시 후 남자는 창가 근처에 삐딱하게 턱을 괸 채 한손으로 신문을 펼쳐 보고 있던 사내 곁으로 가 앉았다.
사내의 인상착의는 알 수 없었다. 신문이 그의 상체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신문을 펼치고 있는 왼손은 볼 수 있었다. 사내의 왼손은 고된 노동의 흔적인지 굉장히 투박했지만 꾸준히 관리를 받는 것인지 손톱은 떼 낀 곳 없이 정말 깔끔했다. 금발의 남자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남자는 간단한 먹거리와 마실 걸 주문했다. 종업원이 떠나자 남자는 신문을 보고 있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가 가게를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사내가 신문을 넘기는 소리는 유난히도 뚜렷하게 들린다. 남자는 신문의 뒷면에 적힌 기사들을 읽어보았다.
중요도나 화제성이 떨어지는 기사들은 으레 뒷면에 가 있기 마련이다. 남자도 그것을 유념하며 별 생각 없이 기사를 훑고 있었다. 그러나 왜 뒷면에 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기사를 발견한 남자는 크고 맑은 눈을 한층 더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휴전선에서의 분쟁? 이건 굉장히 큰 일 아닌가요? 어쩌면 전쟁이 다시 터질 수도 있는데…….”
남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차분하고 고왔다. 중후함은 떨어져 사내들 특유의 중저음은 느껴지지 않는다. 허나 딱 그의 얼굴에서 나올 법한 목소리와 활기가 가득했기에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그에 반해 신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사내의 목소리는 무척 낮았으며 무거웠고 무서우리만치 건조했다.
“전쟁이 멈춘 지 얼마나 됐지?”
남자는 잊을 수 없는 그 기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칠십 년이죠.”
사내가 신문 한쪽을 넘겼다.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싸움은 셀 수도 없었다는 것도 기억하겠지.”
남자는 사내가 말하는 바를 깨닫고 편치 않은 얼굴을 해보였다.
“그러니 이제 와서 저러는 거야 다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말이시죠?”
“그러니 중요하지 않은 제일 뒷면에 있는 것이고.”
남자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떠올랐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그것을 한 번에 내뱉었다. 그가 탄식하듯 말했다.
“애석하네요.”
사내가 신문을 들고 있던 왼손 집게손가락을 엄지손가락에 걸쳤다가 살짝 튕겨 신문을 때렸다.
“잊는다는 건 축복이다. 겪지 않은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 경우에는 축복이지. 물론 잊지도 못하고 상상이 아닌 들이닥친 현실이었던 너에겐 그들이 잊고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에 애석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지.”
남자는 허리를 곧게 폈다. 그가 대답이 없자 신문 뒤의 사내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제의 아침을 밝힌 해와 오늘의 아침에 떠오른 해는 같게 보여도 같은 점을 찾기 어렵다. 그리고 그 차이점을 구분할 수 있는 건 소수뿐이지. 예로 네가 왕들의 머리를 수도 없이 날리고 다녔던 전설적인 암살자이자 왕시해자라는 걸 기억하는 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 기껏해야 권력에서 밀려나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한 채 다 늙어 기억마저 오락가락하는 골방구석의 노인들뿐이지.”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이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내뱉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 게 아니었다. 저 사내가 자신을 ‘전설적인’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여가며 놀리고 있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재미없어요, 하인켈 님.”
“밀데트. 웃자고 꺼낸 얘기가 아니다. 반성하라는 의미지.”
하인켈은 아직 다 읽은 건 아니었지만 슬슬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신문을 내려놓았다. 그제야 밀데트는 하인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인켈의 첫인상은 멋있지만 무섭다는 말 말고 다른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건조하지만 그만큼 중후한 목소리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대로의 얼굴이었다.
굉장히 굵은 선은 어떤 풍파가 다가와도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깊게 뿌리내린 나무를 보는 듯했다. 넓게 벌어진 어깨와 입고 있는 반팔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군살 없이 다부진 근육질의 육체는 정말 사내다웠다. 또한 약간 그을린 피부는 그보다 건강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튼튼해보였다.
더해 그의 예리한 서슬처럼 날카로운 눈매는 굶주린 맹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과 팔, 목선 사이사이로 드러난 선명하고 흉측한 흉터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마치 긴 시간 살아남아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맹수가 서 있는 듯하다.
창가에서 스며드는 햇빛이 하인켈의 얼굴 전반을 비추고 있다. 빛을 받고 있음에도 어둡게 빛나는 탁한 금발은 어딘지 우울하게 느껴졌다. 허나 불을 형상화해 박아놓은 것처럼 이글거리는 시뻘건 두 눈은 마주보는 그 어떤 이라도 입을 다물게 만들 정도로 뜨겁다. 밀데트는 군인처럼 짧게 자른 머리가 저토록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인켈의 오른쪽 광대를 지나 턱까지 이어진 흉터가 꿈틀거린다.
“한가하게 푸념이나 늘어놓자고 찾아온 건 아닐 테지.”
밀데트는 하인켈의 말에서 굉장한 압박감을 느꼈다. 하인켈은 별 생각 없이 평소처럼 직설적으로 말한 것이지만 그를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한 두려움을 심어준다. 밀데트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말을 되뇌며 헛기침했다.
“아, 어딜 좀 가려하는데 제가 가진 힘으로는 한계가 있어서요.”
하인켈은 주문한 음식과 음료를 받고 있는 밀데트를 빤히 쳐다봤다. 평범하게 돼지고기를 튀기고 약간의 야채를 곁들인 음식과 탄산수였다. 낡은 주점에서 나오리라 예상하기 힘든 튀김요리다. 밀데트는 나이프와 포크를 능숙하게 다루며 고기를 잘라갔다. 밀데트는 서민들에게서 보기 힘든 귀족의 품위가 베어 있었다. 하인켈이 말했다.
“그런데 왜 날 찾아왔지? 네가 가지 못하는 곳이면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거라 생각되진 않는데.”
썬 고기를 입에 넣은 밀데트는 말을 하기 위해 최대한 고기를 빠르게 씹었다. 굉장히 품격을 깎아내릴 것 같은 행동에도 밀데트는 기품을 잃지 않았다. 입을 비우고 냅킨으로 입가마저 닦은 밀데트가 말했다.
“하인켈 님. 본인을 너무 낮추시는 거 아닌가요?”
“난 사실을 말했다.”
무뚝뚝한 하인켈을 보며 밀데트는 빙긋 웃었다. 밀데트가 하인켈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길잡이들의 도움이 없으면 정말 찾을 수조차 없는 곳이라서요…….”
“그러면 그 녀석이 길잡이들을 양성하는 ‘망자가 끄는 수레’ 여관으로 가면 되겠군.”
“하하……, 저 그게…….”
하인켈은 밀데트가 말을 망설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신문을 읽으며 마시기 위해 주문했던 싸구려 럼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그 녀석이 직접 훈련시킨 길잡이로도 갈 수 없는 곳이라면 정말로 내 관할 밖이군. 그래서?”
“흠흠. 그래서 그 길잡이들의 우두머리이자, 하인켈 님의 친구 분의 소재를 좀 알고 싶다는 거죠.”
하인켈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누구보고 친구라는 거냐.”
“그렇게 아닌 척하셔도 두 분이 굉장히 친밀하다는 건 알만 한 사람이면 다 안다구요.”
“흥. 누가 있다고.”
밀데트는 잠시 생각했다. 하인켈은 됐으니 하지 말란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밀데트는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플랑드웰이 있죠! 그리고 또, 음……. 어, 쿼드리치?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이 둘 뿐인데, 시간을 조금 더 주신다면 한 명 정도는 더…….”
“그만.”
하인켈의 짜증 가득한 목소리에 밀데트는 짓궂게 웃어보였다.
“절 놀린 대가를 치르시는 겁니다.”
그러자 하인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말했다.
“밀데트. 내가 말하기 전엔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셨죠.”
“그럼 네가 지금 그럴 처지가 아니란 걸 이해하지 못했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지?”
“윽…….”
밀데트는 신이 나 떠들었던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는 다시금 헛기침을 했다. 이번엔 정말 조심하자고 다짐하며 하인켈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하인켈은 따스한 빛이 들어오는 창가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을 말이 없이 밖을 바라보던 하인켈이 말했다.
“이런 ‘정보’는 골방구석의 늙은이인 내가 아니라 네가 취급해야하는 거 아닌가?”
탄산수로 목을 축이던 밀데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정보를 사고 팔긴 하지만, 저라고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하는 게 순리 아닐까요.”
“네가 모르는 건 이 세상에 없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대체 제가 하인켈 님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정말 짓궂으시네! 그런 이상한 소리는 또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네 생각엔 어딜 거 같나?”
밀데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뻔하다. 제국의 어디에나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눈과 귀라 불리는 집단이다. 그들은 제국의 사소한 일들까지도 수집하고, 필요한 이에게 그것들을 금전적 가치를 매겨 판매한다. 그들은 비교적 최근에 생겼지만 황실의 정보장교가 운용하는 군부대와 견줄 정도로 확실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밀데트가 이 분야에선 압도적일 정도로 뛰어났지만 슬슬 그들의 머릿수와 행동력에 밀리고 있다. 밀데트는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으며 고기를 마저 썰었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하인켈은 별 말 없이 싸구려 술로 목을 축였다. 그는 내려놓았던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하지 않고 서로의 일에 집중했다. 밀데트는 먹었고, 하인켈은 읽었다. 얼마 후 식사를 마친 밀데트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튼 아렌 님의 소재를 알고 싶습니다만…….”
“얻고 싶은 게 있으면 그만한 값을 치르는 게 순리지.”
“……또, 또! 이번엔 대체 어떤 이상한 걸 시키려고 그러세요, 정말!”
“마음껏 불만을 토로하도록. 그래봐야 변하는 건 없을 테니.”
밀데트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탄산수가 든 잔을 붙잡았다. 거의 들이 붓는 수준으로 내용물을 비운 밀데트는 잔을 내려놓았다. 하인켈은 먼젓번처럼 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올 것이다. 그리고 밀데트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것을 따를 것이다. 그는 답답함에 끼고 있던 황금색 반지를 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하인켈은 밀데트의 반지를 슬쩍 쳐다보았다. 하인켈이 말했다.
“잘 쓰고 있나보군.”
“두 분 덕이죠.”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밀데트가 인상을 쓰며 “끄응…….” 신음을 흘렸다.
“오히려 그런 말씀이 더 부담돼요. 그냥 ‘역시 우리 덕이지!’라고 해주시면 안 돼요?”
하인켈의 시뻘건 눈이 밀데트를 노려보았다. 밀데트는 그 시선에 놀라 움찔했다. 밀데트는 그의 시선을 피하려고 고개를 떨궜다. 하인켈이 밀데트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부담가지라고 하는 소리다. 잊지 말라는 뜻이고, 또 다시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지.”
“끙…….”
“그리고 미안하지만 언제까지고 너와 잡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은 없다.”
밀데트는 아까 전에 하인켈이 밖을 바라봤던 걸 떠올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은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들 머리 위로 내리쬐는 따스한 햇빛과 춥지 않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우울함을 거두고 마음속에 평화를 가져다주고 있다. 밀데트가 말했다.
“손님이라도 오나 보네요.”
“내키지 않지만.”
“그럼 하인켈 님은 어떤 거라면 제 값을 치를 수 있다고 보시나요?”
“세계수의 과실. 혹은 검은 뱀의 독.”
밀데트는 잔뜩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었다. 불가능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가능하다. 그래서 더 심란했다. 밀데트는 만지작거리던 반지를 도로 꼈다.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만 어떻게든 해결할 수는 있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 또 그러시네! 전부 다 하인켈 님 손바닥 위에 있는 거잖아요! 절 왜 못 괴롭혀서 난리신지 모르겠네요, 진짜!”
“시간이 넉넉하진 않을 텐데. 얼마 안 있어서 검은 뱀은 잠에서 깰 것이고, 세계수는 그 아름다움을 감출 테니.”
밀데트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둘 다 가져오면, 혹시 모를 다음번 부탁은 아무 조건 없이 들어주실 거예요?”
“둘 다? 널 높게 평가하지만 확실하게 못 할 거라 장담하지.”
“하면요?”
“들어주지.”
“지, 진짜요? 자, 잠깐! 어디까지 들어주실 거예요?”
“원하는 건 뭐든지.”
“관할 밖은요?”
“이번에는 허용해주지.”
“약속하셨어요. 말 바꾸시면 안 돼요! 진짜로! 진짜!”
한도를 넘는 기쁨과 악이 섞인 말을 남기고 밀데트가 사라졌다. 하인켈은 신문의 마지막 면을 보기 위해 곱게 접어 뒤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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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써볼 게요! 잘 부탁해요!
혼자가 된 하인켈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남을 괴롭히는 취미는 없지만 밀데트는 예외다. 밀데트는 남이라기에는 너무 가까운 사이다. 하인켈은 이제 다 읽어버린 신문을 덮었다. 신문을 탁자 위에 대충 던져놓은 그는 싸구려 술이 든 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토록 귀찮게 했으니, 이 정도는 골려 줘야지.’
하인켈은 탁자 위에 대충 던져 놓은 신문을 바라보았다. 밀데트가 읽었던 ‘휴전선, 다시 한 번 피비린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였다. 하인켈은 잔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그는 몸을 기울여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최근 십여 년은 북부 연합과 제국이 별다른 충돌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북부 연합과 제국의 병사들이 각자의 진영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칠십 년이란 세월은 서로가 가진 증오의 감정을 무디게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 시대를 겪었던 젊은이들은 황혼기에 접어들어 대부분이 생을 마감했다. 리븐델 제도를 통해 옆 대륙의 새로운 약재와 기술이 들어와 발달한 의료기술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이들이었기에 수명이 길지 않았다. 이젠 정말 그때를 추억삼아 얘기할 수 있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머지않아 황혼이 깃들 것이다.
현재의 군인들은 전쟁을 겪었던 세대와 달리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뚫지 않는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징병되는지 의아해할 뿐이다.
우연히 순찰을 돌다 만났다 해도 같이 끌려왔을 뿐인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며 말없이 인사를 나누고 제 갈 길을 간다. 그게 이 시대의 군인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양측의 군인들은 서로를 죽일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건,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특정한 누군가의 소행이라는 말이 된다.
하인켈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이간질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몇몇 존재들이 그려진다.
욕망의 기사. 지성을 가진 존재들에게만 있는 욕망을 힘의 원천으로 삼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욕망만을 위해 움직인다. 그 결과가 무엇을 불러오든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건 셋이다. 고통, 전쟁, 탐욕의 기사. 파괴의 기사도 정말 유력한 후보이지만, 그녀는 지금 이 세상에는 없다.
‘의도적으로 앎을 감추려니 힘이 드는군.’
시계탑의 시계가 오후 세 시가 가까워오는 걸 알린다. 하인켈은 시계탑에서 시작된 선율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인켈은 욕망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 시계탑이 만들어진 이유도 평화라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다만 배덕의 주(柱)에 속한 욕망의 기사들처럼 그 힘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비록 깨끗하기만 한 세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봐줄 만한 세상이다. 하인켈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렇다고 그들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해서도 안 된다. 하인켈이 나설 수 있을 때는 오직 보이지 않는 손들이 세계를 어긋나게 했을 때뿐이다. 하인켈은 보기 드문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귀찮은 제한을 뒀어.’
시계탑에서 다시금 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세 시다. 하인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약속 시간이 되었다. 밖을 살피던 하인켈은 시계탑에서부터 주점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을 주시했다.
대체 얼마나 오래 관리를 하지 않은 건지 먼지투성이에 곰팡이가 잔뜩 낀 로브를 후드까지 깊게 눌러 쓴 사람이었다. 그가 걸어올 때마다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코를 막고 쳐다보거나 손가락질을 한다. 원래는 새까만 색이었을 로브는 먼지와 곰팡이 때문에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빛이 바래 있었다.
다리를 다친 건지 절뚝거리고 있다. 하인켈은 그가 중개인이 말했던 자신의 손님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하인켈이 술을 마셨다. 마중 나가는 건 의뢰에 없었기에 하인켈은 그가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 후 하인켈은 바로 앞까지 도달한 의뢰인을 살폈다.
멀리서 봤을 때도 그랬지만 그는 굉장히 지쳐 있었다. 그런 심경을 대변하듯 숨소리는 거칠고 몸은 떨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역겨운 냄새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리고 곳곳에서 불평이 들어왔는지 곧 얼굴을 구긴 종업원이 다가왔다. 하인켈은 종업원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죄송합니다, 손님. 금방 내쫓겠습니다.”
하인켈은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종업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종업원은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얼굴로 마주했다. 그러자 하인켈은 품속에서 순금으로 된 주화를 꺼냈다. 제국은 성공적인 화폐개혁 덕에 지폐와 동전을 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화폐로 사용하던 은과 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하인켈은 제국의 귀족들이나 사용하는 금화를 무려 다섯 개나 종업원에게 던져주었다. 종업원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하인켈을 바라보았다. 하인켈이 말했다.
“술과 음식을 돌릴 정도면 충분하겠지.”
눈치가 빨랐던 종업원은 하인켈이 ‘그러니 애들보고 이쪽 신경 끄고 입 닥치게 해라’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종업원은 당황하면서도 일단 금화를 이빨로 깨물어보는 현명한 판단을 했다. 그리고 금화가 진짜라는 것에 깜짝 놀랐다.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처럼 곳곳에 흉터가 있고 그을린 피부와 엄청난 근육질의 몸 때문에 평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층이라 생각했던 남자였다. 헌데 그가 꺼낸 귀족들의 화폐를 보고 시선이 달라졌다.
그을린 피부는 건강하다는 반증이며, 근육질의 몸은 어마어마한 시간을 단련에 힘쓴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는 허리가 땅에 닿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대충 상황을 정리한 하인켈은 여전히 앉지 않고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하인켈은 깊게 눌러쓴 후드 사이사이로 드러난 다 뜯겨져나가고 피고름이 즐비한 얼굴과 냄새를 통해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를 자세히 살핀 하인켈은 로브에 잔뜩 핀 곰팡이들이 대부분 죽었다는 걸 발견했다.
‘지독한 썩은내. 곰팡이마저 죽어가고 있다. 인간은 물론 그 거인들마저도 살아 있을 수 없는 상태.’
하인켈은 그가 저주에 걸렸다고 확신했다. 그것도 감히 풀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빈틈이 없는 강력한 저주다. 풀어 줄 수는 있지만 그러진 않을 것이다.
삶은 자비롭지 않다.
그가 힘겹게 자리에 앉았다. 허나 입을 열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무엇을 원하는지는 중개인에게 들어 알고 있지만 의뢰인 본인의 입을 통해 들어야만 일이 성립된다. 하인켈은 그를 조금 더 여유를 갖고 관찰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띤 건 입술과 손톱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위아래 할 것 없이 겉을 덮는 표피가 전부 뜯겨나가 있었다. 뭔가가 닿기만 해도 엄청난 고통이 일 것인데 그는 통달한 것인지 아무렇지 않아 했다.
탁자 위에 올라온 오른손의 손톱은 전부 뽑혀 있었다. 문제는 그 뽑힌 손톱들이 하나도 아물지 않았다. 새로운 손톱이 난 흔적도 없었다. 거기에 더해 못을 박아놓았던 것처럼 살벌한 구멍이 뚫려 있다. 피부는 다 뜯겨나갔다. 선홍빛 근육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파먹고 알을 까는 있는 붉은 줄무늬가 있는 새까만 벌레가 보인다.
만신창이다.
반대 손은 붕대에 감겨 있었다. 저렇게 만신창이가 된 손도 붕대로 감지 않았는데, 왼손은 붕대로 칭칭 감고 있다. 얼마나 심한 모습일지, 무슨 일을 당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다만 굵기가 다른 것을 보면 가죽을 벗기고 왼손의 근육을 발라냈을 거란 걸 추측할 수 있었다.
하인켈은 마구잡이가 아니라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였다는 걸 느꼈다. 이토록 잔악한 짓을 벌였지만, 하인켈은 복수나 증오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을 느꼈다. 사랑해서 천천히 완벽하게 망가뜨린 것이다.
하인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저분하게 자란 탁한 금색에 가까운 아주 연한 갈색 머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을 주목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굴 피부는 꽤 남아 있었다. 말 그대로 꽤 남아 있었다. 피고름과 문드러진 얼굴 사이사이에 약간씩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들을 한데 모으면 정말로 ‘꽤’ 남아 있었다.
한참 그를 관찰하던 하인켈은 시선을 가슴팍으로 옮기고 나서야 그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걸 알게 됐다.
고문. 여자는 고문을 당했다. 그것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문을 저 가녀린 몸으로 겪었다. 그럼에도 죽지 않았다.
‘죽지 못했다는 게 옳겠군.’
정말 악랄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인켈은 저 여자를 저렇게 망가뜨린 범인을 손쉽게 유추해냈다. 저런 미친 짓을 할 만한 이는 세상에 몇 없다. 더해 넘칠 정도의 ‘사랑’이 느껴질 정도의 고문이라면 뻔하다. 거기다 굳이 살려두는 걸 보면 다른 이는 절대 생각할 수 없다.
관찰이 끝났다.
그녀의 계속된 침묵에 익숙해진 하인켈은 창밖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안팎에서 들려오는 사람들과 예년보다 줄어든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던 하인켈의 귓가에 새로운 소리가 끼어들었다. 굉장히 쉬고 갈라져 본래의 음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생명, 생명수…….”
굉장히 웅얼거리고 더듬어 알아듣기 힘들었다. 하인켈은 그 이유를 여자의 혀와 목에서 찾았다. 입이 벌어지는 잠깐 사이 보인 혀는, 없었다. 아니, 있었다. 원래 길이의 아주 조금뿐이지만 있긴 있었다. 그리고 목에는 불로 지진 흔적이 남아 있다. 하인켈은 부정했다. 불로 지진 게 아니다.
저건 들이 부은 거다. 그것도 쇳물에 준하는 것을.
하인켈은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는 인내란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에게 시간이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 그렇기에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에 애석해하지 않는다. 하인켈은 마시려고 들어 올린 잔에 술이 텅 비었다는 걸 발견했다. 하인켈은 고개를 돌렸다. 재차 술을 주문하려 했지만 종업원들은 모두 바빠 보였다.
그가 준 금화로 내온 술과 음식으로 떠나려는 손님들을 악착같이 붙잡는 이들을 보며 하인켈은 잔을 내려놓았다.
“주, 죽은 사, 사람……, 살리, 살리는 새, 생명수……, 필요……해.”
하인켈이 여자를 쳐다봤다. 그가 말했다.
“뭘 말하려는지 안다. 날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 신화나 전설에 기대고자 하는 이들이니.”
하인켈의 말이 길어지자 여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입술을 뜯어 버릴 것처럼 세게 물었고, 피가 났다. 하인켈은 계속된 고통에 여자의 몸보다 정신 쪽이 먼저 굴복하기 시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자는 붕대에 감긴 손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그리고 악착같이 그것을 씹어대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왼손은 근육이 없는 게 맞았다. 얼마 없는 이빨로 물어뜯는 손에서 까드득 소리가 난다. 하인켈은 여자의 자해가 어디까지 갈지 지켜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의미도 없고 생산성도 결여된 짓을 굳이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원만하게 대화를 이어가려면 여자의 망가진 정신을 조금이나마 돌려놓을 필요성이 있었다. 하인켈은 속으로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스스로에게 투덜거렸다.
하인켈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세 번 두드렸다. 평범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여자의 흐트러진 정신은 점차 제자리를 되찾아갔다. 입술에서 흐르는 피가 붕대를 적시고도 남아 턱 밑으로 흐르던 여자가 자해를 멈추고 하인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인켈이 말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 덕분에 내키지 않는 일은 하는군. 이제 들을 수 있겠지. 난 너희의 개인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헌데 널 계속 묶어두면 내키지 않은 일을 또 해야 할 것 같으니 빠르게 일을 끝내도록 하겠다. 네가 찾는 생명수는 어떤 섬에 있다. 그러나 그 섬은 평범한 방법으로 갈 수 없지. 그곳에 가려면 특별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이란 연월일시분초의 모든 걸 말한다. 원래는 다른 이름이나, 모두가 입을 모아 그곳을 엘레아노르라 칭하기 시작했기에 나 또한 빠른 설명을 위해 그리 부른다.”
하인켈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중개인으로부터 들었던 여자의 요구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답변을 해주었다. 하인켈은 ‘정확’하게 물어본 것에만 답했다. 그 외에는 발설할 필요가 없었기에 냉정하게도 입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에겐 정직한 맺음이었지만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인켈은 그녀가 고대하던 것의 일부만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붕대로 감아놓은 왼손을 주먹 쥐었다.
“뭐……, 뭐하는……, 거지?”
“요구받은 것을 모두 말했다. 잘못된 것은 없다.”
“내가……, 내가 아, 알고……. 주, 중요하, 한 게 빠, 빠졌……잖아. 어, 어디로……, 가야…….”
하인켈의 시뻘건 눈이 여자를 주시했다. 그저 바라본 것뿐이지만 여자는 옥죄어오는 공포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에겐 듣지 않겠지만, 생명수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그녀는 어차피 죽지 못한다. 다시 죽지 않아서 다시 살아날 수도 없다. 설령 이 남자가 자신을 죽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좋다.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한마디 하려던 하인켈은 생각을 바꿨다. 그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접었다. 그러고는 그렇게 접은 손가락들을 차례대로 부드럽게 움켜쥐듯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말없이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던 하인켈은 정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글레브스 엘로이지, 예르하 네일, 자트라스.”
여자는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느닷없는 기침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하인켈은 주점 사람들이 더 참지 못하고 다시 쳐다볼 정도로 거친 기침을 토해내는 여자를 지켜보며 말했다.
“모두 엘레아노르에 가본 이들이다. 성공한 이들은 외에도 제법 있지만 현재 살아 있는 건 이 셋이 전부다.”
하인켈은 입을 틀어막은 손 사이로 시꺼먼 핏물과 살점을 토해내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펙시스 산맥, 펠포시드 시, 파하르 미궁. 최근 그들의 마지막 행보가 있던 곳이다. ……오늘은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을 많이 하는군.”
하인켈은 신문을 곱게 접어 들었다. 그는 여자를 내버려둔 채 자리를 떴다. 하인켈이 주점을 떠나 인파에 섞여 사라져갈 때까지 여자의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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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기다 쭉 쓰면 되낭
ㅇㅇ 스레딕은 일반적인 사이트의 게시글 형식과 달라서 그게 더 좋음
일단 레스가 많이 달려있으면 스레주가 열심히 쓴다는 걸 알 수 있고
한 번 달 때마다 갱신되므로 묻힐 걱정은 없고
특정 작성자만의 게시글 찾기 기능이 없으니까 한 스레 안에 몰아 작성하는게
더 편하지
눈을 떴을 때 로제 이르칼라 브리지트 힐브렌은 썩은내가 코를 찌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그게 자신의 몸에서 나는 건지 아니면 부득이하게 자리를 잡게 된 이 쓰레기장에서 나는 건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토록 몸을 망가뜨려놓고도 후각은 남겨둔 사내를 저주했다.
로제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코와 입을 통해 들어와 기도를 넘어가는 그 잠깐이 너무 괴롭다. 맡는 것만으로 기도와 폐에 곰팡이가 슬 것 같은 썩은내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은 계속된 고문으로 만신창이였다. 그리고 그건 몸 안쪽도 예외는 아니었다.
로제는 북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나라는 땅도 좁았고, 굉장히 가난했다. 그럼에도 다른 북부 측에서 로제의 나라를 긴 시간 점령하지 못했다. 그들이 섣불리 공격하지 못한 건 로제가 태어난 작은 나라, 아슬레아가 뛰어난 전사들의 땅이기 때문이다.
아슬레아는 왕이라 부를 수 있는 대족장을 제외한 모두가 평등에 가까운 굉장히 이상적인 나라였다. 그들은 다른 국가에 비해 굉장히 험한 토지를 갖고 있어 제대로 된 농경작을 하기 어려웠다. 자급자족을 할 수 없는 땅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약탈뿐이었다. 허나 주변에는 하나같이 거대한 왕국들뿐이다. 결국 그들은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진 백성들을 훈련시켜 용병으로 타국에 파는 결정을 내렸다.
북부인의 전체적인 신체능력은 남부의 제국인보다 우월하다. 그런 북부인들 중에서도 아슬레아인은 특별히 더 강력한 신체적 능력을 타고난다. 작은 나라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크고, 강하다. 처음에는 아슬레아를 소국이라 업신여기던 자들은 그들의 용병들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강함에 점차 매료되었다.
단체는 물론이고 개개인마저 압도적일 정도로 강하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 명의 아슬레아 용병이 열 명의 다른 북부의 군인을 죽일 수 있다. 이런 아슬레아의 용병들은 단체로 활동할 때와 개개인일 때의 전술이 달랐다.
대표적으로 여럿이 모여 참전할 때는 그 유명한 아슬레아식 방진이 주가 됐다. 특유의 신체능력과 대방패를 십분 활용해 만들어내는 방진은 하나의 성벽이었다. 전쟁에서 보병은 주가 되지만 그렇게 파괴력이 크진 않다. 그것이 일반적이다. 허나 이들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들어 부딪치는 기병의 충격량까지도 버텨버리는 정신 나간 신체로 그 상식을 뒤엎었다.
그렇게 세워진 방진을 유지한 채 열세인 상황에서도 점차 앞으로 밀고 나가는 모습은 산이 움직이는 듯했다. 이들이 아슬레아식 방진을 이루고 일반적인 창보다도 더 긴 창을 앞세워 전진할 때는 그 웅장함에 모두가 몸서리쳤다.
그들의 방진을 사람들은 ‘산걸음’이라 부르며 치를 떨었다.
이토록 대방패와 장창을 중심으로 하는 수비적인 단체전술에 비해 개개인은 굉장히 공격적인 전술을 택했다.
혼자서 열 명이 넘는 병사들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고 튼튼한 방패 하나만 있다면 말과 정면승부를 해도 버티는 강철 같은 내구성을 가진 몸을 활용하는 것이다. 체력 또한 평범한 사람과 궤를 달리하기에 이들은 최전선의 선두에서 길을 열거나 적의 진지를 단신으로 습격하곤 했다.
특이한 점은 그들은 오직 단체전술을 사용할 때만 방패를 들었다. 혼자서 전투에 참가할 때는 방패와 창 대신, 장창과 단창, 혹은 단창을 쥐는 손에 장검을 들곤 했다. 장검과 단창이라곤 하나 그들의 평균 2미터를 가볍게 웃도는 몸에 비해서 짧다는 뜻이다. 제국인이 든다면 장창과 장검이 되어버린다.
한때는 약소국이었던 베아루드는 일찍이 옆 나라 아슬레아의 용병들로부터 전수받은 그들의 훈련법을 통해 병력을 길렀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북부에서 가장 뛰어나고 강력한 군대를 가진 강대국이 되었다.
베아루드는 당시 아슬레아의 유일한 우방이었다. 또한 그들을 침략하지 않은 유일한 북부 왕국이자 그들을 도왔던 이들이다. 베아루드의 사람들은 아슬레아의 전사로서의 삶을 존경해마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베아루드의 군인들은 아슬레아의 살인적인 훈련을 통해 길러진다. 그들의 신체능력과 자부심은 북부와 제국의 그 어느 군대도 따라올 수 없다.
베아루드는 모병제임에도 남자, 여자, 노인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군대에 몸을 담는다. 베아루드만이 유일하게 아슬레아의 위명에 견줄 수 있는 나라다.
제국과의 전쟁이 한참일 때, 제국이 가장 두려워한 존재들이 바로 북부의 창이라 불리는 베아루드의 군인들이었다.
베아루드를 제외한 북부의 모든 국가가 아슬레아를 차지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그중 가장 많은 방법으로 사용했던 게 돈이었다. 허나 그들은 재물에 흔들리지 않았다. 억하심정으로 전쟁을 일으킨 나라는 좁은 골목길을 맡은 열 명의 아슬레아인이 군대의 진격 자체를 막아버리는 전투력을 보고 질려버렸다.
아슬레아인들은 전쟁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그들을 계승한 베아루드도 마찬가지다. 저항하지도 못하는 이들을 짓밟는 건 명예롭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과 함께 전장에 선 이들은 굉장히 불만을 토로한다. 그들의 앞에서 마을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겁탈하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전쟁과 전투의 승리 후에는 전리품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병사들에게는 금품과 여자를 취하는 것이 전리품으로 여겨진다. 허나 아슬레아와 베아루드의 전사와 군인들에겐 전쟁의 승리 자체가 전리품이다. 그들은 절대 저항하지도 못하는 이들을 유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건 아니다.
전투의 패배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불명예가 아니다. 아슬레아와 베아루드의 패배는 경험이며, 전쟁의 승리를 위한 초석이다.
때문에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전쟁에 나서 죽었을 때 그 대상이 아슬레아와 베아루드의 병사들이라면 사별을 겪은 이들마저 명예로운 죽음을 맞았을 거라 납득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소중한 사람을 죽였지만, 그토록 명예로운 이들이기에 그들의 지배에 불만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이나 자신에게 고통을 겪게 하는 건 크나큰 불명예로 여긴다. 자신이 죽인 이들이 찾아와 고통을 호소할 때, 그것을 해소할 방법이 자신의 죽음뿐이라면 자살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렇게 목숨을 끊은 이들은 아슬레아와 베아루드의 영웅으로 역사에 남는다.
로제는 그런 아슬레아의 가장 강한 전사이자 용병인, 대족장의 딸이었다.
기본적인 남녀의 차이 때문에 대족장의 피가 흐름에도 로제가 최강의 전사가 될 수는 없었다. 다만 당시 최강의 전사는 피를 물려준 그녀의 아버지였기에 그러했을 뿐이다. 로제는 자신의 아버지를 제외하면 당대 최고의 전사였음에 모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로제는 아슬레아인의 특유의 강인함과 그중에서도 유별날 정도로 강했던 아버지의 피, 거기에 아슬레아의 여자들만이 갖는 특별한 신체가 어우러졌다. 더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전사로서의 뛰어난 후각은 전투의 전문가들마저 한수 접어줄 정도로 전투에서 굉장한 활약을 하게 해줬다.
로제는 차기 대족장이었으며, 최고의 전사이자, 뛰어난 용병이었고, 전쟁의 여신이었다.
아슬레아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과 성인일 때, 두 개의 이름을 갖는다. 로제의 어릴 때 이름은 ‘델리아’였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는 지금처럼 긴 이름을 새겼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에 한 가지 불만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이들은 그녀를 ‘로델’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로제는 로델이란 애칭을 좋아하지 않았다. 로제와 델리아의 앞 글자를 따서 지어진 애칭은 언제까지고 사람들이 자신을 어린애로 취급하는 느낌을 받아서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로제란 이름보다도 ‘이르칼라’로 불러주길 원했다.
아슬레아는 잊힌 신들을 모시는 사당이 곳곳에 있다. 그리고 성인이 된 그들은 부모가 지어주는 이름, 전사의 이름 그리고 신들의 이름을 빌려온다.
로제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 브리지트는 전사로서의 이름이다. 마지막으로 ‘이르칼라’는 신화 속 여신의 이름이다. 이르칼라 여신은 로제가 가장 좋아하던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고 그렇게 되고자 마음먹었던 존재다. 첫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오자 그녀의 부모가 이르칼라라 불러주었을 때 로제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올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로제는 신이 아닌 인간이었고, 현실은 여신의 이야기처럼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북부의 가장 강력한 전사들의 땅, 아슬레아는 멸망했다. 이제 그들이 머물던 자리에 남은 것이라곤 ‘끝도 없이 욕망을 갈망하는 괴물들’이 저지른 참상의 흔적뿐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남부의 수많은 왕들의 목을 베고 그들의 땅을 먹으며 힘을 기르던 제국이 전쟁을 일으켰다.
로제는 움직일 때마다 찾아오는 미쳐버릴 것만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힘을 내보려는 처사였지만 역효과였다. 그녀의 잇몸 안에는 ‘고통’이 특별이 넣어둔 새로운 이빨들이 신경을 압박하고 있었다. 쓰레기장을 거닐며 고통에 잠깐 기절한 사이 겨우 진정된 치통을 다시 불러온 것이다.
몸 전체가 아우성치는 고통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로제의 의지를 꺾는다. 겨우 몸이 진정되었다 싶으면 기억이 몸을 꺾는다. 성인이 된 후로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그러나 욕망의 기사이며 그중에서도 악질인 배덕의 주, ‘고통의 기사’에게 붙잡힌 후로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다.
쓰레기장의 쓰레기들 사이에서 로제는 더 참지 못하고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시원해야할 터인 울음마저 고통을 갖고 온다. 눈물샘을 찢어버리며 쇠구슬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 이 기억과 고통을 긴 시간 겪었기에 더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소망에 불과했다.
죽고 싶다. 차라리 죽고 싶다. 더 견딜 수가 없다. 죽고 싶다.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놓고 죽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조차 없다.
‘고통’은 너무나도 철저하게 로제를 짓밟았다. 그리고 이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조차 없는 저주를 새겼다. 충분히 가지고 논 것인지,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모른다. 허나 긴 시간 그의 노리개로 살아지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새긴 몸과 마음을 잠식한 고통은 지금까지도 남아 로제를 괴롭힌다.
죽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봤다. 하지만 ‘욕망의 기사’가 공을 들여 걸어놓은 저주는 로제의 희망을 제대로 유린했다. 명예로운 삶과 영광스러운 죽음을 원하는 아슬레아의 사람에게 ‘고통’은 최악의 치욕를 안겨준 것이다.
그녀가 고통 속에서 다시금 천천히 심호흡했다. 신경을 짓누르는 제멋대로 자란 이빨들 때문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겁고, 아프다. 썩어가는 몸은 계속해서 정신을 잃게 만들고, 그 냄새는 이성을 깨부순다. 고통으로 점철된 기억은 정신을 오염시키고 삶의 의지를 꺾는다.
‘그래도…….’
로제는 악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다. 결국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가 됐을 때 로제는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었다. 로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걸을 때마다 반대로 꺾여 있는 무릎과 거기서 또 반대로 돌아가 있는 왼쪽 다리를 당장이라도 잘라버리고 싶다.
삶이 고통스럽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이 고통만이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그녀가 두르고 있는 로브자락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과거엔 비오는 날을 가장 좋아했다. 그런 날이면 동생과 함께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허나 그토록 좋아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던 날씨가 이젠 증오스럽기까지 하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무섭도록 기괴한 소리를 내는 천둥이 치던 날 ‘고통’이 찾아왔다.
로제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점차 그나마 성한 눈꺼풀이 남은 왼쪽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로제는 스스로 왼쪽 눈을 찔렀다.
손가락은 안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로제는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피범벅이 된 손으로 벽을 짚었다. 눈 따위 터지든 말든 상관없다. 이 저주는 너무나도 강력하다. 내일 이 시간이면 그가 저주를 걸었던 그때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생명수를……, 찾아야 한다. 로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인켈이 언급한 이름들을 되뇌었다.
‘글레브스 엘로이지, 예르하 네일, 자트라스……. 그리고 엘레아노르.’
78년 3월
로제는 가파른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 그녀는 몸과 마음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정도로 경이로운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거인이 있었다.
고개를 뒤로 한참 젖혀야만 그 등판을 볼 수가 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대지는 비명을 내지르는 것처럼 울린다.
로제가 어렸을 때, 그녀의 할아버지는 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 거인들은 하나하나가 걸어 다니는 산처럼 묘사됐다. 이르칼라 여신의 이야기 다음으로 좋아했던 것이 삶과 죽음이 서로에게 의지하게 된 것과 거인들의 이야기였다.
그녀가 자라고, 사회에 나가기 시작했을 땐 산과 같다는 거인들의 모습은 전설이니 당연히 과장이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용병으로서 세계를 떠돌던 그녀가 가장 만나고 싶던 존재들이기도 했다.
로제가 아는 모든 이야기 속의 거인들은 오래 전에 신들의 분노를 사 사라졌다고 마무리된다. 그들을 만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면 유물이라도 발견할 수 있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이야기 속의 존재가 있었다. 로제의 키는 아슬레아인 치고는 왜소하다 할 수 있는 편이지만 타 국가의 여자들에 비하면 굉장히 큰 축에 속한다. 허나 이 거인은 그런 로제를 일고여덟 명 세워둔 것보다 훨씬 컸다. 최소 13미터 이상의 거대한 키와 몸집은 가히 옛 사람들에게 ‘산’이라 불릴 만했다.
로제는 멸종했다 들어온 거인의 존재 말고도 여러 가지에 놀랐다. 돌과 금속의 피부로 이루어졌다 들었건만, 저 거인은 아무리 봐도 사람 같은 피부에 덮여 있었다. 거기다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정말 깔끔한 복장이었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 자로 잰 것처럼 거인의 몸에 딱 맞는 옷이다.
로제가 당황하는 사이 거인은 걸음을 멈추고 휘파람을 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인이 가까운 거리에(로제가 보기엔 엄청 먼 거리였다)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외투를 걸치고 있었지만 엄청난 근육질의 몸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활짝 펴진 손은 작은 집 정도는 움켜쥐어 부술 수 있을 것 같다. 거인의 손이 나무를 붙잡았다.
거인은 별 힘을 들이지 않고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렸다. 마치 사람이 잡초를 뽑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나무를 뽑아낸 거인은 뿌리의 흙을 바람을 불어 대충 털어내고 어깨에 걸쳤다. 그것으로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주변을 살피던 거인이 등을 돌렸다.
천천히(로제가 보기엔 전력으로 달려야 속도를 맞출 수 있는 보폭이었다) 걸어가던 거인이 멈춰 섰다. 로제는 서늘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거인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제는 긴장했다. 이야기 속의 거인들은 하나같이 흉포했기에 이 거인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근육을 발라내고 살점이 썩어 떨어짐에도 신경과 힘줄을 억지로 이어놔 단순한 움직임 정도는 취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붕대에 감겨 뼈만 남은 모습을 감추고 있는 왼손 집게손가락에는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고통’이 그녀의 왼손에 특별히 공을 들인 건 이 반지를 빼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반지는 손가락과 하나가 된 것처럼 빼낼 수 없었다.
거인은 무기도 없는 쪼끄마한 인간이 표출하는 경계 서린 적의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땅으로 건너오기 전부터 그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는 존재는 동족을 제외하면 지극히 적었다. 처음 이곳으로 넘어왔을 때 제국의 인간들이 그를 토벌하고자 몰려든 적이 있다. 하지만 개미떼처럼 몰려든 인간들을 거인의 특별한 능력과 뽑아낸 나무 하나로 쓸어버려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제국은 몇 번의 도전 끝에 토벌을 포기했다. 그들은 거인을 죽이기 힘들다 판단하고 북부와의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거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선제공격까지 해 심기를 거스르고, 자신들을 돕지도 않는 거인을 그대로 놔두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제국은 거인에게 굉장한 편의를 주는 대신 그들을 공격하지 말라 부탁했다.
애초에 이런 쪼끄마한 것들을 상대로는 흥도 나지 않고, 잡아봐야 별다른 이득도 없기에 거인은 그 제안을 승낙했다. 이토록 강인한 존재이기에 지금 로제의 행동이 정말 우습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떻게 대처할까 고민하던 거인은 로제의 왼손에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모여드는 걸 보고 눈을 빛냈다. 거인은 흥미를 느끼곤 들고 있던 나무를 내려놓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로제는 자신의 왼손에 있던 반지의 힘을 사용했다.
거인은 로제를 중심으로 기다란 검은 가시들이 하나둘 생겨나는 모습에 집중했다. 하나하나의 크기는 로제의 팔 길이 정도였다. 거인에겐 작은 가시 정도의 크기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그 숫자가 로제의 주변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라곤 하나 거인의 두꺼운 피부를 뚫지는 못할 것이다. 허나 거인은 경계했다.
아마 겪어보지 못했다면 별 것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물건과 저 반지에서 느껴지는 힘이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저 물건은 동족들을 제외하면 파괴불가라 여긴 피부를 뚫고 들어와 거인의 안일함을 벗겨낸 ‘전설’들 중 하나다.
그 힘을 빌려올 때마다 사용자에게 대가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힘에 한 번이라도 손을 댔다면 끝없이 소유자를 갉아먹는다. 대중적인 전설 속에 등장하는 무구가 칼의 형태이기에 ‘마검’이라 불리는 물건들이다.
분명 거인의 몸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무기이지만 그건 싸움을 시작 했을 때의 이야기다. 거인은 로제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가 뒤로 슬쩍 물러서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제국의 공용어를 사용해 말했다.
“내 집에 멋대로 들어온 건 그쪽이야. 보다시피 싸울 생각은 없지만, 계속 그렇게 위협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거인은 평범하게 말했다. 그러나 로제에겐 정말 큰 소리였다. 로제는 그 성량 때문에 거인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걸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 그나마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로제는 검은 가시들을 치웠다. 이런 곳에서 괜한 고통에 신음하며 대가를 치를 필요도 없거니와 그런다고 해서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그 대신 격한 기침이 튀어나왔다.
거인은 썩은 살덩이와 검은 핏물을 토해내는 로제를 안쓰럽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닥이 검게 물들 정도의 살점과 피를 토해냈다. 거인은 진정된 것처럼 보이는 로제를 지켜보며 자신이 뽑고 내려놓았던 나무 위에 걸터앉았다. 거인이 말했다.
“그게 네 마검의 대가야? 아니면 지속처형인가?”
로제는 깜짝 놀라 거인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그녀를 대신해 거인이 말했다.
“어떻게 아냐고?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싶은데. 나처럼 몸으로 겪은 사람이 없지는 않을 거고.”
로제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말했다.
“대, 대가가……, 아냐…….”
“아니라고? 그건 또 흥미로운데…….”
거인은 입술을 오므리고 비쭉 내밀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뭔가를 더 묻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꿔 허리춤에 매고 있던 작은 주머니(사람 열댓 명은 들어갈 것처럼 보였다)를 열어 뒤적이기 시작했다.
“흐음……. 꼬맹이가 여기 둔 거 같았는데…….”
한참 주머니를 뒤지던 거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하. 찾았다.” 거인은 주머니에서 로제의 머리통만한 구슬 형태의 물건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반으로 쪼개 로제에게 건넸다. 거인은 뒷걸음질 치는 로제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놀라지 마. 이건 우리 부족의 전사들이 전투에 나갈 때면 사제들이 하나씩 주는 약이야. 상처가 낫거나 하는 용도는 아니고, 고통을 줄여주는 약이지. 지금 네 모습을 보니 필요해보여서. 한 알만 먹어도 우리가 고통을 잊을 정도이긴 한데, 너희한테는 얼마나 먹어야 적당할지 잘 모르겠다. 이럴 때 그놈이 없다는 게 좀 아쉽네. 일단 약간만 떼서 먹어봐. 괜찮다 싶으면 하나 줄게.”
로제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저주를 안고 살아온 지 긴 시간이 흘렀다. 당시에는 물론 시대가 변한 최근까지도 저주를 없애기 위한 모든 것을 다 시도했다. 하지만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고통만이라도 줄이고자 진통제건 뭐건 닥치는 대로 써봤지만 썩어버린 위는 본래의 기능을 잃었다.
설령 위가 소화시킬 수 있다 해도 위와 내장을 잇는 그 틈이 끊겨 있다. 거기에 내장도 썩은 지 오래다. 로제의 몸 안은 ‘고통’이 집어넣은 벌레들의 안식처가 된 지 오래다. 이 모든 장기가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상태라 해도 ‘고통’이 제멋대로 뜯고 이어버린 핏줄 때문에 제대로 된 효과를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안……, 안 돼……. 소, 소용 없…….”
거인은 눈썹을 긁적였다. 그는 반으로 쪼개 내밀었던 약을 멋쩍게 회수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거인은 밝게 웃으며 다시금 약을 슬쩍 내밀며 말했다.
“그게 대가가 아니면, 어……, 저주 같은 거지? 어쩌다 그런 건진 몰라도 ‘욕망의 기사’들이 건 게 아니라면 이걸로 괜찮을…….”
“그, 그, 놈……!”
로제는 울컥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거인이 말하는 욕망의 기사이자 ‘고통의 기사’는 혀를 차근차근 잘라 아주 작은 조각만 남겨놓았다. 그리고 죽지 못하고 영원히 썩어가면서도 모든 걸 기억해야하는 저주를 걸었다. 그럼에도 모자랐는지 죽지 않는다는 걸 이용해 온갖 역겨운 짓으로 몸과 정신을 망가뜨려갔다.
거인은 무너지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로제를 보며 다시금 눈썹을 긁적였다.
‘하필이면 최악 중에 최악한테 걸렸나보네. 몸이 썩는 걸 보면, 부패나 공포인 것도 같고……. 저 난도질 된 모습을 보면 고통이나 쾌락이 한 짓 같기도……. 어쨌든 정말 그것들이 저주를 건 거라면 방법이 없는데…….’
거인은 진통제를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욕망의 기사들이 건 저주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깰 수 없다. 신화와 전설을 오가는 물건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 아니면 같은 욕망의 기사들만이 풀어줄 수 있다. 물론 그중에서도 배덕의 주(柱)가 손을 댄 거라면 반대항인 질서의 루(樓)나, 중립인 천칭의 좌(座)가 필요하다.
거인은 고민했다. 저 작은 여자에게 줄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위험하다. 너무 위험하다.
물리적인 게 아니라 저 작은 여자의 정신이 위험하다. 저 여자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같은 욕망의 기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욕망의 기사에게 난도질당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과연 옳을까?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저 정신에 그들의 도움을 받으라고 요청하면, 간신히 붙들고 있는 것마저 깨질 것이다.
욕망의 기사들은 최악의 존재이지만, 그들이 전부 죄악에 물든 건 아니다. 욕망은 제멋대로이다. 선한, 악한 혹은 그들 사이에 머무는 욕망.
‘증오’, ‘파괴’, ‘공포’, ‘절망’, ‘고통’, ‘진실’, ‘비굴’과 같은 최악의 괴물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격의 존재들도 있다.
‘질서’와 ‘기율’, ‘심판’과 ‘거짓’ 그리고 ‘구원’, ‘행복’, ‘정의(情意)’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말 그대로 선하다. 타인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돕고 함께 나아간다.
중립에 속하는 ‘용기’이자 ‘분노’, ‘순결’, ‘평등’, ‘질투’, ‘신념’, ‘정의(定義)’, ‘비탄’ 등의 존재도 있다. 이들은 중립에 속해 있으나 중도를 지킨다는 뜻은 아니다. 언제든지 배덕의 길에 설 수 있으며, 반대로 규율을 바로잡으려 들 수도 있다. 예컨대 잠재적 아군, 혹은 폭탄이다.
문제는 지금 괴물들에게 갈가리 찢겨나간 여자에게 ‘같은 괴물이지만 그래도 좋은 괴물이 있다’고 설명하며 받아들이기를 기대하는 건 야속한 짓이 분명하다. 거인은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너한테 걸린 저주, 풀 수 있어.”
결국 그는 입을 열었다.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같은 욕망의 기사들이 풀어주는 거야.”
오른쪽 눈꺼풀이 위아래로 뜯겨나가 안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던 로제의 눈에 증오와 공포 그리고 고통이 서렸다. 거인은 자신을 노려보는 로제의 눈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읽었다. 그는 최대한 로제를 진정시키려 했다.
“잠시, 내 말을 들어봐! 이해하기 어렵다는 거 알아. 그래도 걔들 중엔 정의…….”
“뭘! 뭐, 뭘……! 뭘……, 아, 알아!”
거인은 가슴이 아팠다. 저토록 작은 존재가 두려움에 질려 떨고 있는 게 모두 스스로의 탓 같았다. 거인은 로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로제는 떨리는 두 손을 내려다보며 울었다.
말을 하고 싶은데, 지금 이 감정을 토해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로제는 밀려오는 고통과 슬픔에 신음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절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다. 그녀는 정신적인 비명을 내질렀다.
거인은 시꺼먼 피웅덩이 속에서 기절한 로제를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아서 차마 손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실수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걸 알면서도 저 작은 존재를 위로해줄 수조차 없다. 거인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막힌 듯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언제 오냐 엘로이지……,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카빈 씨…….”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 있는 청년은 이마를 짚었다. 청년은 얼핏 보면 여자라 착각할 정도로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또 특이하게도 사막 여우같은 긴 귀를 가지고 있었다. 청년은 제국의 성인 인간 남성들의 평균적인 키였다. 거기에 깡말랐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왜소한 체구가 도드라진다. 그는 마른 몸을 감추려 크고 통이 넓은 옷가지를 입고 있었다.
이마를 짚고 있는 청년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거인, 텔레마이트 빈스 카빈은 자신의 눈썹을 긁적였다. 카빈은 여전히 기절해 있는 로제와 사막 요정인 글레브스 엘로이지를 번갈아 쳐다보곤 고개를 돌렸다. 카빈의 반응에 엘로이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로이지는 소매를 걷어 붙였다. 드러난 앙상한 팔은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약간의 무게가 있는 물건을 들려면 안간힘을 써야할 것처럼 마른 팔은 로제의 앙상한 몸을 거뜬히 들어올렸다. 엘로이지는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았다. 그가 카빈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그냥 놔두면 어쩝니까? 집에 약 있는데 그거라도 가져와서 뿌리셨어야죠.”
엘로이지의 투덜거림에 카빈은 딴청을 피웠다. “내가 뭘 아나…….” 엘로이지는 윽박지르듯 카빈을 째려봤다. 카빈이 시선을 피했다.
엘로이지는 카빈의 곁으로 가 그의 신발을 발로 찼다. 살살 차면 느낌도 없을 것이기에 있는 힘껏 때렸다. 효과가 있었다. 카빈은 강철 같은 그의 몸을 때려 뼈에 금이 가는 듯한 충격을 받아 신음을 흘리는 엘로이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킥킥 웃더니 손을 내밀어 엘로이지가 올라 탈 수 있게끔 해주었다. 울상을 지은 엘로이지가 그의 손을 밟고 올라섰다.
엘로이지는 교각 같은 카빈의 어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카빈은 앉아 있던 나무를 주워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빈이 출발하자 엘로이지가 말했다.
“상태를 보니, 카빈 씨도 아시겠지만 욕망의 기사들의 짓이네요.”
“그놈들은 어디에서나 깽판을 치고 다닌단 말이지…….”
엘로이지는 조심스럽게 로제의 곰팡이 낀 로브를 들춰보았다. 생각보다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장 먼저 뭐부터 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엘로이지가 치료법을 고심하며 답했다.
“그렇지만 모두 안 좋기만 한 건 아니잖아요. 질서도 계시고, 정의도, 신실도……. 그분들 같은 욕망의 기사들이 주도권을 쥐어야할 텐데……. 참, 지식도 이분들과 같은 선인가요?”
엘로이지의 물음에 카빈은 팍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실실 웃는 얼굴에 혹하지 마. 고통 못지않은 개새끼니까.”
“카빈 씨……, 우리 고운 말만 쓰기로 했잖아요.”
카빈은 잔뜩 얼굴을 구긴 채 바닥에 침을 뱉었다. 엘로이지는 뾰로통한 얼굴을 해보였다. 카빈은 울창한 숲속에 숨어 있는 그들의 거처를 주시했다. 카빈은 저물어가는 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식……. 고통도 만만찮지만 개인적으로 지식 그놈이 가장 정상이 아니야. 미쳤어. 살다 살다 그런 건 처음 봤다고 말 했잖아. 내가 그놈이 한 짓을 보고 헛구역질이 나왔다니까? 최소한 고통은 자기가 삶과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진 않아. 스스로 신이라 생각하진 않는다고. 적어도 저번에 봤을 때는 스스로도 자기가 미친놈이라는 걸 잘 알았어. 근데 지식 그놈은 정반대라는 거지.
너희 시간으로 한 4, 50년 전인가? 우리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때 비탄한테 천칭의 좌를 내주고 갈 곳을 잃은 뒤로 미쳐 날뛰고 있잖아. 배덕도, 규율도, 천칭도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야. 일이 터지면 규율이 배덕이나 천칭을 줘 팰 수가 없다고. 배덕은 모르는 일로 일관하고 천칭은 애초에 신경을 안 쓰고, 그러니 규율만 죽 쓰는 거지.
그렇다고 작정하고 지식을 조지러 가면 배덕이랑 천칭에서 가만히 있겠냐고. 규율이 뭉치는 순간 배덕도 소집될 거고, 당연히 명목상 중립인 천칭도 모이겠지.”
“그렇게 되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죠.”
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욕망의 기사 두셋이 싸우기만 해도 난리가 나는데 21명? 거기다 그 욕망의 기사 중에서도 최강인 놈들을 따라 그 밑의 수많은 찌꺼기들이 따라붙겠지. 허이구. 만약 그런 날이 오면 재빨리 짐 싸서 튀는 게 최선이야.”
“카빈 씨가 가서 다 제압할 수는 없나요?”
카빈은 어깨 위에 앉은 엘로이지를 보려 고개를 뒤로 땡겼다. 엘로이지는 카빈의 찌그러진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카빈이 말했다.
“야, 넌 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거냐? 내가 전지전능하기라도 해?”
“거인이요!”
“거인이 무슨 무적인 줄 아나……. 우리 할아버지……, 아니 하다못해 우리 아빠 정도는 돼야 그런 깽판을 수습할 수 있어. 난 그놈들 셋이 달라붙는 것도 솔직히 장담 못해. 누나는 한쪽 파벌을 박살낼 수야 있겠지만 스물이 넘는 수는 감당 못해.”
엘로이지는 침묵했다. 카빈은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빈이 말을 이었다.
“답은 플랑드웰이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놈들 머리를 다 깨버리는 거지.”
“플랑드웰?”
카빈은 그새 까먹은 엘로이지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그, 왜 접때 그놈 있잖아. 짜리몽땅한 망치 들고 갑옷 입고 다니던 놈.”
“아, 아아……, 아? 근데 그 분은…….”
“편식을 안 하지. 너도 봤다시피 걸리기만 하면 규율이고 배덕이고 천칭이고 상관없이 곤죽을 만드는 놈이니……. 장담컨대 플랑드웰이 우리 누나보다 세. 내 생각에 그놈은 거의 반신이라고 봐. 마검의 대가도 지속처형도 견뎌내는 정신 나간 반신. 어떻게 그런 놈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네. 신들은 옛날 옛적에 우리 영감들이랑 싸우다가 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의 말을 경청하던 엘로이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태양빛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카빈의 말에서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엘로이지가 말했다.
“전 신들께서 아직 우리를 굽어살피신다 들었는데…….”
“야, 우린 그 당시에 신들이랑 싸웠던 영감이랑 할매들이 아직도 살아 있어. 와전된 전설을 믿을래, 아니면 살아 있는 전설을 믿을래?”
“하지만 인간들도 신들께서 아직 살아 있다고 하던데…….”
“걔들은 좀 이상하더라. 여기랑 저 위쪽이랑 또 다르잖아. 여기는 뭔 유일신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나 지껄여대고, 위는 신들이 거인들을 다 조졌다고 하질 않나. 어떻게 하면 얘기가 그렇게 이상하게 전해지는지 몰라.”
엘로이지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을 부정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뺏긴 기분을 맛봐야 했다. 굉장히 우울한 얼굴로 자신의 어깨에 앉아 있는 엘로이지를 보며 카빈이 헛기침을 했다.
“뭐, 아무튼. 가서 내가 할 거 있냐?”
엘로이지는 손으로 햇빛을 가렸다. 그는 눈꺼풀이 없어 눈을 감지 못하는 로제를 생각해 자신의 소매로 얼굴을 가려주었다. 엘로이지는 곰곰이 생각했다. 집에 있는 약재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지금 당장 카빈이 할 일은 없다. 엘로이지가 말했다.
“음. 그러지 않으셔도 되겠네요.”
“그래? 집에 뭐 없다고 하지 않았나?”
“웬만한 건 다 있는데 몇 개가 비어요.”
“지금 인간들 수도까지 가서 황제한테 달라고 하면 다 줄 건데, 갔다 와?”
“아뇨, 아뇨. 어차피 가지도 못하시잖아요. 인간들은 본인들은 그렇게 잘 지키지도 않으면서 맹세나 약속을 강요하곤 하잖아요. 그리고 가도 못 얻으실 거예요. 없는 게 얼어붙은 불꽃이랑 녹슨 소금이거든요.”
카빈은 고개를 살짝 돌려 엘로이지를 쳐다보았다. 마침 엘로이지도 카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엘로이지는 빙긋 웃어주었다. 카빈은 그가 말한 재료들을 곱씹으며 말했다.
“맞네. 가도 못 구하는 것들이네. 둘 다 지금은 못 구하는데……, 어쩌게?”
“얼어붙은 불꽃은 구할 수 있어요. 베르엘 씨는 언제나 여유분을 조금씩 남겨놓으시거든요. 거기다 오늘 오신다고도 하셨구요. 녹슨 소금은……, 글쎄요. 있으면 좋겠지만, 없을 수도 있겠네요. 베르엘 씨라면 대체품 정도는 갖고 계시지 않을까 해요.”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거처 가까이 도착했다. 카빈은 엘로이지를 땅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베르엘? 처음 듣는데, 뭐하는 작자야?”
카빈은 그 덩치 때문에 거처로 들어오려면 빙 돌아와야 했다. 그가 눈앞의 수풀을 가로지른다면 엘로이지가 공을 들여 만든 보호막이 깨진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으려 없는 재료로 간신히 만든 보호막이 깨진다면 엘로이지의 피가 거꾸로 솟을 것이다.
엘로이지가 뛰어난 약사이긴 하지만 마법까지 조예가 깊은 건 아니었다. 설령 그랬다 한들 거인의 움직임에 부하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마법은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건 없으니까. 엘로이지가 말했다.
“밀수업자예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엘로이지를 보며 카빈은 눈을 살며시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보면 네가 나보다 여기에 한 백 년은 일찍 온 사람 같아. 분명 같이 넘어왔는데 소외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엘로이지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 백 년이, 거인들의 백 년인가요? 아니면 우리들의 백 년인가요?”
“으이구, 인마! 서리나무의 열 번째 떨림이면, 장수하는 너희들도 간단간당할 건데 설마 그랬겠냐? 당연히 너희 백 년이지. 너 있던 사막 요정 장로가 인간들 나이로 한 천 몇 살 된다며? 우리들 기준으론 애기라고 말해줬잖아. 당장 내가 너희 나이로 한……, 4, 5천 년은 살았다니까?”
엘로이지는 로제를 잠시 꽃밭에 내려놓았다. 거처로 들어가기 전에 응급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돌아다니며 종을 알 수 없는 하얀 꽃잎을 가진 꽃들을 꺾기 시작했다. 엘로이지가 말했다.
“카빈 씨가 해주는 이야기는 언제나 재밌어요.”
“왜?”
“정말 모르세요?”
카빈은 나무를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그는 진짜 모르겠다는 얼굴로 엘로이지를 바라보았다. 엘로이지는 피식 웃고 말했다.
“우리들도 그렇고, 다른 요정들도 장수하잖아요? 그런 우리들도 카빈 씨 같은 거인들을 신화와 전설로만 알아왔어요. 여러분들은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서 거인들은 정말 신화 속의 존재예요. 이 땅을 일군 존재들로도 알려져 있으니까요.”
“아, 그거? 돌이랑 철로 되어 있고 덩치는 산만한데다 바다도 가로지르는 사람들? 그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지 우리가 아닌데?”
엘로이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우린 그 사람들이 카빈 씨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허. 그래? 이것 참. 영감님들이랑 같이 봐준다니 쑥스럽네.”
카빈은 입가에 주먹을 가져갔다. 미소를 감추기 위함이었지만 너무 큰 덩치 때문에 카빈의 미소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모습에 엘로이지는 환하게 웃었다. 선조들처럼 여겨진다는 말에 굉장히 기뻐한 카빈은 어떻게든 들뜬 마음을 감추려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나 이제 크기 시작 했는데……, 언제쯤 할아버지 정도가 되려나? 아무튼 너흰 우리 아빠 보면 진짜 까무러치겠구만? 진짜 엄청 큰데. 아, 내가 나중에 저 산 하나 옮기는 거 보여줄까? 누나가 내 나이 때 하는 걸 보긴 했는데, 난 누나보다 작으니까 좀 힘들겠지만 가능은 할 거 같은데?”
“어휴, 정말. 됐어요. 가끔 보면 어린애 같다니까.”
엘로이지의 일침에 카빈은 산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슬며시 접었다. 그는 굉장히 토라진 얼굴로 일어섰다. 투덜거리며 빙 돌아가는 카빈을 향해 엘로이지가 소리쳤다.
“아! 베르엘 씨가 달이 걸릴 때 온다고 하셨거든요! 아마 자정 조금 넘어서 올 거예요! 이상한 사람 아니니까, 그러니까 막 짜부라뜨리시면 안 돼요! 아셨죠?”
카빈은 뚱한 얼굴로 손을 깍지 껴 머리 뒤로 넘겼다.
“내가 똥오줌 구분 못하는 애새끼인 줄 아나.”
짐칸에 천막을 씌워놓은 마차 한 대가 숲속을 달리고 있다. 달이 뜨지 않은 밤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숲속을 나아간다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다. 거기다 마차에는 불빛을 내는 그 어떤 물건도 달려 있지 않았다. 더해 짐칸을 덮은 천막과 마차 모두 아주 까만 재질로 이루어져 어둠에 완벽하게 동화되고 있었다.
마차의 바퀴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마차를 끌고 있는 것들에게서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나뭇가지가 스치면 나야할 소리도 없다. 오직 침묵 속에서 마차는 달리고 있다. 어두운 숲을 가로지르는 마차는 실재하지 않는 허상인 양 아주 작은 소리도 내지 않는다.
마치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막힘없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던 마차가 멈춰 섰다. 관성의 영향을 받지도 않는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멈춰버렸다. 마차를 모는 이가 두려운 것인지, 마차를 끄는 것들이 두려운 것인지 숲은 침묵했다.
풀벌레 소리도 흔한 야행성 동물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침묵을 유지하던 어둠 속에서 소리가 났다. 마차의 마부석에서 난 소리였다. 이윽고 작은 불빛이 일렁거렸다.
성냥불이었다. 성냥은 고풍스러운 붉은 빛으로 물든 해포석 파이프에 불을 옮겼다. 굉장히 묵직해 보이는 파이프였다. 하지만 그것을 들고 있는 이는 무겁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며 템퍼로 담뱃잎을 눌러 불씨를 고루 옮겼다. 성냥이 충분히 할 일을 마쳤다 생각되자 그는 들이마신 연기를 내뱉어 성냥불을 껐다.
연기가 올라오는 성냥을 대충 땅에 버린 사내는 칸막이에 등을 기대고 두 명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마부석에. 다리를 뻗었다. 최대한 넓게 만들어졌지만 그래도 굉장히 비좁은 건 마찬가지였다. 다리를 뻗었으나 반대쪽 칸막이에 다리가 걸려 쭉 필 수 없다. 불편한 상황임에도 사내는 만족하며 진득하게 담배를 태웠다.
담뱃잎을 많이 채워두었기에 삼십 분이 지나서야 파이프를 타고 씁쓸한 연기가 올라왔다. 사내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자세를 바로하고 약간의 시간을 더 투자해 담뱃잎을 완전히 태웠다.
담뱃재를 템퍼로 긁어낸 사내는 파이프를 작은 주머니에 싸 품속에 넣었다. 그는 옆자리에 놓아둔 물건의 상태를 확인하고 고삐를 쥐었다. 그는 수풀 사이로 보이는 작은 불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빛이 주변을 환하게 비췄다. 사내는 어둠이 드리운 숲과 불빛의 경계에 마차를 세우고 땅에 내려왔다. 그는 목가적인 꽃밭을 자랑하는 오두막을 향해 걸으며 말했다.
“당신이 그 거인이군. 텔스 카빈, 맞나?”
어둠 속에서 산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던 카빈은 눈을 떠 사내를 바라보았다. 밤에 동화된 것처럼 보이는 후드가 달린 검고 긴 외투를 걸친 남자였다. 문제는 어떻게 된 것인지 거인의 눈으로도 외투와 후드 안쪽에 있는 걸 볼 수가 없었다. 후드를 쓰고 있는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몸 쪽도 마찬가지다. 외투 밖으로 튀어나온 손 정도는 보여야 이치에 맞을 것인데, 그것마저도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신비함을 느끼며 카빈은 사내를 살폈다. 하지만 볼 수 없는 것을 오래 관찰한다고 많은 걸 알아낼 수는 없었다.
카빈은 그가 제국의 인간 남성 평균보다는 조금 큰 신장을 가졌고, 곧은 걸음걸이로 보건데 자기 관리를 허투루 하는 사람은 아니란 것 정도만 알아낼 수 있었다. 카빈은 하품을 하고 말했다.
“너는 베르엘이라는 밀수업자고.”
“그렇지. 그 꼬맹이는 안에 있나?”
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엘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베르엘의 몸을 가리고 있던 짙은 어둠이 모두 사라졌다. 후드 아래에 있던 건 파란 머리를 가진 조각 같은 생김새의 사내였다. 카빈은 머리카락이 파랗다는 것에 주목했다.
파란 머리카락을 가진 이는 본 적이 없다. 염색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 허나 저 덤덤한 모습을 보건데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베르엘은 머리를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뒷머리는 외투 안쪽에 들어가 있어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꽁지머리를 길러 묶고 있었다.
새하얀 눈동자로 주변을 살피는 베르엘은 마치 맹금류의 짐승 같았다. 카빈은 베르엘도 평범한 인간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베르엘이 오두막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오두막 안에서는 온갖 냄새와 향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비위가 좋은 사람이라도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지저분하게 섞인 냄새다. 그 중심에서 엘로이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베르엘은 굳이 깨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문을 닫고 돌아섰다.
베르엘은 파이프를 집어넣은 반대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마찬가지로 성냥불을 담배연기로 끄고 대충 던져버리는 베르엘을 보며 카빈이 피식 웃었다.
“비위가 좋은 편은 아닌가봐?”
“후각이 오래 전에 맛이 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해서 놀랬을 뿐이다. 민감한 건 여전하군. 썩은내는 참아줄 만한데, 이 향수 같은 건 옛날부터 도저히 감당이 안 돼.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넘어 아프다.”
칭얼거리는 투로 말하면서도 베르엘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카빈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겨울처럼 차가운 기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베르엘은 그새 담배 하나를 다 태우고 새로운 걸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나?”
카빈은 손을 깍지 껴 머리 뒤로 넘겼다. 베르엘은 거인이 팔을 들어 올리며 근처에 있던 나무 몇 개를 그대로 꺾어버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상당한 담력을 요구하는 모습임에도 베르엘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카빈이 말하길 기다렸다.
카빈은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할까 고민하다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있었던 일부터 쭉 나열하기 시작했다. 굉장히 쓸데없는 이야기들까지 한 무더기로 내뱉어 설명해주는 것에 짜증을 느낄 법도 했다. 허나 베르엘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카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베르엘은 꽁초를 떨어뜨려 발로 밟았다. 그가 카빈의 이야기를 들으며 떨어뜨린 꽁초만 해도 일곱 개였다. 카빈은 그가 어마어마한 애연가, 속된 말로 꼴초라는 걸 짐작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베르엘은 새로운 담배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욕망의 기사에, 마검이라…….”
카빈은 베르엘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으나 이제는 확실해졌다. 베르엘의 주변으로 사정없이 뻗는 저 ‘차가움’은 단언컨대 마검의 힘이다. 전설 속에서나 듣던 물건을 이 땅에 와선 자주 만난다. 우스운 일이라 생각하며 카빈이 말했다.
“하루에 두 명이나 만나는 걸 보면, 생각보단 흔한 물건인가봐?”
“설마. 네 운이 엄청 좋거나, 나쁜 거겠지. 다 숙주가 있는 마검인데다 그 숙주가 널 적대하지 않는 걸 보면 전자라고 봐도 좋고.”
“숙주? 어지간히도 그거 싫어하나보네.”
베르엘은 웃으려고 했다. 허탈한 심정을 공유하려는 가장 쉬운 표현법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몸과 마음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베르엘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는 얼굴로 카빈을 올려다보았다.
“최악이지. 자의로 이 쓰레기 같은 걸 얻었다 해도 욕을 퍼붓지 않고 배길 수는 없지. 타의로 얻게 됐다면 두 말 할 것도 없고.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은 마검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기생충처럼 붙어 살 수밖에 없는 개 허접쓰레기들이지. 다른 신화, 전설 속 물건들처럼 고상함이란 찾아볼 수조차 없어.
쓸데없이 힘 조절은 안 되지, 어처구니없이 대가는 크지, 안 써도 지속처형으로 사람을 갉아먹지. 좋은 거라곤 찾아볼 수도 없어.
저 여자의 마검이 어떤 식으로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있는지는 몰라도, 삶의 의지를 꺾어버릴 정도라는 건 장담해. 하나로도 욕이 절로 튀어나오는데 거기에 ‘고통’의 고문을 겪고, 그놈이 건 저주까지 안고서도 움직일 의지가 있는 걸 보니 정신력은 나 따위와 비교도 불허하는군. 내 처지가 저랬다면 분명 진즉에 포기했겠지. 엄두도 못 냈을 거다.”
카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 듣는 내가 짜증이 날 정도로 싫어하는군.’
베르엘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다. 그의 말을 빌려 ‘숙주’로서 마검의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것부터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과는 별개로 수많은 사선을 넘어왔을 것으로 예상되는 베르엘이 로제의 상태를 듣고 바로 손을 놔버렸다는 건 주목할 만하다.
‘그것보다 의외인 걸. 저 여자가 그리 대단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계속 그를 쳐다보고 있던 베르엘이 말을 이었다.
“내가 들은 소문으론, 거기 거인 양반은 욕망의 기사들 중 하나를 완전히 짜부라뜨렸다고 들었는데. 상대도 안 됐다고 말이지. 싸워본 소감 같은 걸 들어볼 수 있을까?”
카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르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베르엘은 어떻게 알았는지 묻는 카빈의 얼굴을 보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 밀수업이라는 걸 하다보면, 실체가 있는 물건뿐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것도 옮겨주게 되지. 예를 들자면, 정보 혹은 영혼 같은 거 말이야.”
카빈은 깜짝 놀랐다. 소문을 사고 판다는 건 인간들에게 흔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허나 ‘영혼’이라니?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도 분분한 것을 옮긴다? 믿기 어렵다. 카빈은 베르엘이 말이 진실인지 그렇지 않은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그는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말했다.
“영혼? 일단 그걸 볼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차치하고서라도 밀수라는 게 그렇게 오묘한 일이었나?”
“그럴 리가. 밀수는 한낱 범죄다. 한탕 크게 하려는 배운 거 없고 우둔한 나 같은 놈팡이나 할법한 일이지. 영혼은 내 소관이 아니야. 내가 영혼을 옮겨줄 수 있는 건 저 친구들 때문이지.”
베르엘이 자신의 마차를 가리켰다. 카빈은 베르엘이 가리키는 게 마차를 끌고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카빈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게 뭔데?”
“미안하지만 허락 없이는 발설할 수 없다.”
“누구 허락?”
베르엘은 카빈을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퍽 길게 느껴지는 침묵과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서 카빈은 베르엘이 ‘말 할 수 없다니까?’라고 하고 있다 추측했다. 카빈은 콧등을 긁적이고 말했다.
“근데 나에 대한 건 누구한테 들은 거야?”
“예전에 왕시해자가 네 이야기를 값으로 치러서 알고 있다.”
카빈은 밀데트의 모습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아, 그 작자? 언제부턴지는 몰라도 그때 곁에 있긴 했지. 좀 묘한 인간이긴 했어. 눈치도 못 채게 왔다가 사라졌다가, 여기 있다가 저기 있다가, 난리도 아니었지.”
“예전엔 북부처럼 제국도 여러 왕국으로 쪼개져 있었지. 그 왕국의 왕들의 머리를 수도 없이 날리고 제국이란 하나의 이름으로 귀결시킨 지대한 공을 세운 남자다. 흥. 웃긴 놈이지.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그 난리를 피다니.”
“으잉? 그건 또 재밌어 보이는 이야기인데……, 해줄 거냐?”
“어림도 없지. 난 장사치다. 값을 치러라, 거인.”
“염병하네. 이러다 공기에도 값을 매기겠다?”
“그럴 날이 온다면 반드시 해야겠지. 참, 밀데트는 왕시해자라는 거창한 이름 전에는 ‘기적의 밀데트’라고 불리곤 했다는 거 알고 있나? 사실 지금도 밀데트란 남자를 수식하는 데 ‘기적’이라는 단어 말고 더 걸맞은 건 없고.”
“헹. 또 값이니 뭐니 하면서 도중에 끊을라고?”
“이건 값을 매겨도 똥값이니 적당히 비싼 건 빼고 얘기해주지.”
“난리 났네. 하여튼 돈 가지고 장난치는 놈 중에 제대로 된 놈 없다더니.”
카빈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반응을 지켜보며 베르엘 또한 같이 웃으려 했다. 그리고 안 된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눈꼬리 끝에 걸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치우며 카빈이 말했다.
“그래, 기적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유가 뭐야?”
“놈은 기적을 일으키니까.”
“구체적으로?”
“너무 많아서 따로 뭐라 말하기도 좀 그렇군. 그래……. 그게 좋겠네. 밀데트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지. 예를 들자면, 세계와 세계의 경계를 무시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가능하지. 이해하기 어려운가?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흠. 그래. 작게는 멀리서 손도 안 대고 사과가 껍질을 벗도록 할 수 있다. 깎는 게 아니라, 벗도록 시킬 수 있지. 크게는 칼로 공간을 가를 수도 있고 원한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말 그대로 ‘기적’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는 남자다. 물론 큰 힘을 쓸 때마다 굉장히 많은 걸 대가로 주는 듯하지만.”
“허! 그렇게 대단한 양반이었다고? 근데 대가라고? 마검인 거야?”
“아쉽게도 마검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기적’이란 힘을 담아놓은 건 밀데트의 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뭔 소리야?”
“형태가 정해진 게 없어. 그리고 그 기적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밀데트 자체의 ‘근원’이 기적이기 때문이지.”
“하하하하하! 네가 어렵게 말하는 건지, 내가 멍청한 건지!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값을 매겨도 똥값이라고 한 거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나 비싸지,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도 못하는 정보니. 거기다 이런 건 대부분 필요한 놈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고. 나는 이쯤이면 됐고, 너는? 재밌는 얘기는 언제쯤 해줄 거지?”
카빈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다가 베르엘을 슬쩍 바라보았다. 베르엘은 앞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고 있었다. 카빈이 말했다.
“넌 장사치니까 하는 말인데…….”
“물물교환이라면 환영이지.”
“혹시 술 같은 건 없냐?”
“거인들의 술이라면 당연히 없지. 아무리 내가 이것저것 구해준다고 해도 바랄 걸 바라. 그걸 구하려면 너희 세계까지 가야하는데, 왕시해자도 아니고 내가 그럴 능력은 없지.”
“아니, 아니. 그냥 아무 술. 뭐든 좋으니 목 좀 축이고 싶어서. 깨끗한 시냇물만 마시는 것도 이제 질렸거든.”
베르엘은 마지막 연기를 뱉고 꽁초만 남은 담배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오늘은 엘로이지만을 고려했지, 거인에 대한 건 상정하지 않았어. 다음에는 괜찮은 걸로 하나 구해놓지. 얘기는 그때 가서 듣는 걸로 해야겠군. 오늘은 저 코흘리개 상대를 해줘야 하니.”
베르엘이 엄지손가락으로 오두막을 가리켰다. 그러자 카빈은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동시에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죄송해요, 베르엘 씨. 많이 기다리셨죠?”
베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엘로이지는 돌려 말하지 않는 베르엘의 화법에 당황하면서도 멋쩍게 웃었다. 애써 무안함을 피해가려는 엘로이지를 향해 베르엘이 말했다.
“하지만 제법 유익한 시간을 보내서 네게 지각에 대한 쓴 소리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네가 주문했던 물품을 모두 가져왔다. 확인 해봐도 좋아.”
엘로이지는 희소식에 방긋 웃으며 베르엘에게 다가갔다. 베르엘은 오두막을 슬쩍 쳐다보곤 시선을 엘로이지에게 고정했다. 베르엘이 말을 이었다.
“네가 하는 일이니 분명 어설픈 상황이 벌어질 거라 예상해서 하는 말이지만, 더 필요한 건?”
“아! 얼어붙은 불꽃이랑 녹슨 소금을 좀…….”
엘로이지는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보니 베르엘에게 물건 값을 치를 만한 게 없다. 엘로이지는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베르엘이 냉정하게 말했다.
“둘 다 재고는 있지. 문제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거다.”
카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장사치답군.”
“돈으로 값을 치른다면 양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 금화 세 닢은 받을 거다. 교환을 원한다면 동력핵 하나 정도로 바꿔주지.”
“윽……. 동력핵 말고 다른 건 안 될까요? 예전처럼 여행하고 있는 게 아니라, 동력핵 구하는 게 쉽지 않아서요. 매번 죽을 고비 넘겨가며 미궁을 돌아다니기도 좀…….”
엘로이지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베르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베르엘은 차가운 얼굴로 엘로이지를 마주보는 것으로 굉장한 압박을 가했다. 저 얼어붙은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다. 베르엘이 말했다.
“목록을 제시해.”
엘로이지는 빠르게 집 안에 남은 재료들의 목록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동력핵과 비견되거나 베르엘이 관심을 가질만한 혹은 주로 구하던 물건들을 최대한 간추려 말했다.
“일단 콩 조금 있구요, 라크마할의 핏덩이랑 눈의 거울 하나 있네요.”
“콩? 콩이라면, 사막 요정들의 그건가?”
“네! 다섯 개 있어요.”
베르엘이 손을 입에 집어넣어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를 듣고 베르엘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방을 비추던 불빛이 점차 기세를 잃었다. 짙은 어둠을 몰고 온 베르엘의 마차를 끄는 ‘무언가’는 사막 요정과 거인의 월등한 시력으로도 볼 수 없었다. 베르엘은 마차의 짐칸으로 들어갔다.
놀랍도록 조용했다. 흔한 올빼미의 울음소리도, 바람에 흩날리는 나무들의 춤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카빈은 저 마차를 끄는 무언가가 뭐일지 생각해봤다.
거인족 중에서도 신화와 전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부족 출신인 카빈의 지식으로도 도대체 저게 뭔지 추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베르엘을 알고 지냈던 엘로이지도 마찬가지였다.
이 땅에 온 지 백 년이 다 되어간다. 베르엘을 알고 지낸 건 약 3, 40년이다. 엘로이지와 베르엘이 만났을 당시에도 그는 저 보이지 않는 뭔가가 끄는 마차를 타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저게 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건 같았다.
잠시 후 베르엘이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그는 오른쪽 어깨에 작은 상자를 얹고, 왼손에는 보따리를 하나 들고 있었다. 베르엘은 엘로이지에게 다가와 상자를 내려놓고 보따리를 건네주며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너희 사막 요정들에겐 아무 가치도 없는 물건이 우리에겐 굉장한 값어치를 지닌 물건이기도 하다고 말했잖아. 가능하다면 그걸 대신 받겠다고도 했고.”
엘로이지는 배시시 웃으며 베르엘이 한손으로 건네주는 보따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허리가 기울어질 정도로 무겁다는 것에 식겁하며 베르엘을 쳐다보았다. 베르엘은 담배를 물었다. 그는 낑낑대며 보따리를 짊어지는 엘로이지를 보며 말했다.
“늘 골방에 처박혀 있지만 말고 나와서 운동을 해. 그래야 그 빈약한 몸도 건강해질 거 아니냐?”
엘로이지는 상당히 어이가 없었다. 일반적인 인간을 기준으로 할 때 엘로이지의 몸은 저체중에 가깝다. 허나 살이 없어 드러난 마른 근육 때문에 굉장히 허약해보이지만, 엘로이지는 인간에 비해 굉장히 힘이 세다.
사막 요정들은 전체적으로 마른 체형이지만 다른 요정들에 비해 힘이 세고, 체력도 좋다. 엘로이지가 종족 내에서 강한 축에 속하는 건 아니지만 인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센 건 맞다. 그런 그가 힘겹게 들어 올릴 정도로 무거운 걸 한 팔로 드는 인간이 어처구니없이 강한 것이지 절대 그가 약한 게 아니다.
“저기……, 베르엘 씨. 이건 운동으로 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웅얼거리듯 말하는 엘로이지를 쳐다보며 카빈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인간은 요정들에 비해 근력도 형편없다던데, 그런 인간이 한 팔로 드는 걸 넌 뭐 하루 종일 낑낑대며 붙잡고 있냐?”
“아니, 저기 카빈 씨. 이거 이상해요. 이거 무게가 좀……. 진짜 말이 안 되는데…….”
베르엘은 담배연기를 하늘을 향해 내뱉었다. 그가 달이 없는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까짓 게 뭐 얼마나 무겁다고. 평소에 운동을 해. 늘 힘든 건 저 거인한테 시키고 넌 손가락만 까닥까닥하니 타고난 몸도 제대로 못 쓰는 거 아니냐. 타고난 거에서 그칠 게 아니라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면 손가락 하나로도 들었겠지. 난 고작 인간임에도 꾸준히 단련한 덕에 요정인 너와 비견될 힘을 얻은 게 보이지? 내가 너였다면 그 몸을 가지고 밀수 같은 벌어먹고 살기 힘든 직업이 아니라 떼돈을 벌 수 있는 다른 길을 선택했을 거다. 멍청아. 이건 운동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내 몸을 지키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기에 하는 말이다.”
“지당하신 말씀. 단순한 장사치가 아니라 육체의 미학도 아는 전사 중의 전사였구만, 당신? 마음에 드는 걸?”
“하하……, 저 여러분? 아니, 이게 무거운 거고 베르엘 씨가 힘이 이상하게 센 거지 제가 절대 약하고 어쩌고 하는…….”
“이 밀수라는 게……, 생각보다 험한 일이라서 말이지. 여기저기서 싸울 일이 많아. 그때마다 이걸 휘두르고 다녔다면 난 진즉에 시체가 돼 있었을 거고.”
“여, 여러분? 저기 제 말 좀…….”
베르엘은 오른손의 소매를 슬쩍 걷어 올렸다. 그의 팔에는 기이하게 생긴 하얀색 문신이 가득했다. 문신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신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의 겨울이 문신에 붙잡혀 그의 팔에 갇혀버린 듯했다. 베르엘은 소매를 덮었다. 그가 말했다.
“사는 데 미련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진해서 죽는 건 굉장히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말이지. 내 몸을 단련해서 나 하나 지킬 수 있다면 괜히 사자 같은 멍청한 동물처럼 안 살아도 되잖아. 안 그래? 좋은 스승도 있겠다, 이제 너도 운동이라는 걸 해봐. 매번 만날 때마다 너희 종족에서 가장 뛰어난 요정의 영웅담만 늘어놓으면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둥의 말만 하지 말고.”
카빈은 큰 소리로 웃고 엘로이지를 쳐다보았다. 그는 말보다 웃음이 먼저 튀어나와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카빈은 숨넘어갈 것처럼 웃다가 겨우 진정하고 말했다.
“야, 야. 엘로이지. 넌 뭐 만나는 사람마다 그, 루벤가드인가 뭔가 하는 애 얘기를 하는 거냐? 너도 참 대단하다, 대단해. 이정도로 아무런 대가없이 헌신하는데 루벤가드가 널 안 데리고 다녔다는 게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야.”
“흠? 너한테도 했나? 이것 참. 내가 보기에 이 정도면 거의 사랑이지 싶은데.”
“으하하핫! 사랑이란다, 사랑! 역시 장사꾼이라 그런지 보는 눈이 있어!”
“이 일이 또 눈칫밥을 잘 먹어야 하거든.”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엘로이지를 놀려댔다. 엘로이지는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헛기침을 했다. 두 사람을 더 쳐다봤다간 열불이 터질 것 같던 그는 보따리를 메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잡고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보따리를 내려놓고 나오는 엘로이지는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베르엘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꿍시렁꿍시렁, 꿍시렁꿍시렁. 상자 들 수는 있나? 아니지, 우리 엘로이지는 연약해서 무거운 걸 들 수 있을 리가. 루벤가드라는 요정이라도 밀수해야 하나?”
입을 막은 채 웃음을 참고 있던 카빈은 결국 폭소를 터트렸다. 엘로이지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씩씩거리며 상자로 손을 옮겼다. 놀랍게도 상자는 정말 무거웠다. 상자를 들지 못해 낑낑대던 엘로이지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두 사람의 시선을 쭈그린 채 상자에 머리를 박는 것으로 피했다.
‘얄궂다…….’
“저런. 힘겨워 보이는데, 괜찮나? 그런데 도와주고 싶어도 난 요정보다 근력이 떨어지는 인간이라 너도 무거워하는 걸 들긴 어려울 것 같은데.”
“으아아아악! 진짜! 진짜! 진짜로! 그만 놀려요!”
엘로이지가 시뻘개진 얼굴을 들며 소리치자 카빈은 웃음 때문에 광대가 아픈 걸 넘어 숨을 쉬기 어려운 수준까지 다다랐다. 베르엘은 여전히 차갑게 굳은 얼굴로 엘로이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슬그머니 손을 들어 한쪽 입꼬리에 갖다 댔다. 그리고 천천히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베르엘의 행동에 엘로이지는 거품을 무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짜증을 냈다.
“우아악! 재수 없어!”
베르엘은 웃느라 말할 수 없는 카빈을 대신해 한마디 던져주었다.
“고운 말 전도사께서, 그런 못된 말을 쓰다니. 이거 의외군.”
엘로이지 괴롭히기는 한동안 계속됐다. 결국 제풀에 지쳐 쓰러진 엘로이지를 대신해 베르엘은 상자를 들어 오두막에 갖다놓았다. 베르엘은 땀에 흠뻑 젖은 엘로이지를 쳐다보다가 담배를 물며 말했다.
“지금 내가 넘긴 물건의 값은 콩 두 개면 된다. 노동력 제공에 대한 값은 따로 받지 않도록 하지.”
엘로이지는 토라진 얼굴로 말했다.
“감사하네요. 정. 말. 감사합니다, 베르엘 씨. 금방 갖고 올 테니 거기서 팔굽혀펴기나 하시던가요.”
“많이 화났나보네.”
씩씩거리며 집으로 들어간 엘로이지가 구시렁대며 나왔다. 베르엘과 카빈은 저러다 입이 코보다 더 튀어나오는 거 아니냔 생각을 공유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놀랍게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빈은 피식 웃었고 베르엘은 표정 변화 없이 엘로이지를 쳐다봤다. 베르엘은 엘로이지가 건넨 새까만 구슬 모양의 보석을 품속에 넣었다. 거래가 끝났다. 더 머물 이유가 없어진 베르엘은 마차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다음에도 좋은 거래가 되길.”
“네, 네. 언제나 정. 말. 감사합니다요.”
“잘 가고, 다음엔 당신 술이랑 내 얘기를 교환하는 거 잊지 말고.”
금세 마차에 올라탄 베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후드를 눌러썼다. 그러자 다시금 어둠이 그의 몸을 가렸다. 베르엘이 고삐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는 출발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카빈과 엘로이지가 의문을 표하려 했을 때 베르엘이 말문을 열었다.
“네가 저 여자를 도와주려는 건 보나마나 순수한 선의겠지. 넌 인간들의 지저분한 탐욕과 거리가 머니까. 그러니 처음 보는 사람을 도우려 예정에도 없던 얼어붙은 불꽃과 녹슨 소금에 대금을 지불한 것이고.
너의 그런 점을 난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그래서 걱정이 돼. 네가 베푸는 대가 없는 선의는 정말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어. 다만 너의 선의가 언제나 네게 좋은 방향으로만 돌아오지는 않을 때가 있을 거다. 난 인간이기에, 나와 같은 인간들의 습성을 잘 안다. 네가 아니라고 해도, 난 인간들을 믿으란 말을 해줄 수는 없다. 언제 너의 뒤통수를 갈길지 모르는 게 인간들이다.
저 거인 친구가 있어 크게 해가 되진 않으리라 생각한다만, 그래도 조심해라. 욕망의 기사는 자신의 장난감에 손대는 걸 손가락 빨면서 구경만 하고 있을 놈들이 아니야. 더욱이 저 여자의 상태를 보건데 ‘고통’의 짓이라는 게 확정적이지. 수많은 쓰레기들의 욕망이 그들을 욕망의 기사로 이끌지. ‘고통’은, ‘지식’과 함께 그중에서도 최악이다.
그 많은 욕망의 기사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도 두런두런 잘 지내는 편이지. 허나 ‘고통’은 그중에서도 ‘지식’과 함께 모든 욕망의 기사들이 적대하는, 정말 몇 안 되는 문제아다. 심지어 고통이 속한 배덕의 주마저 고통을 꺼려해. 그럼에도 그놈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건, 그만큼 강하다는 반증이다.
몇 번 거래를 한 적이 있어서 그놈의 습성은 대충 안다. 흠……. 잘 안다고 말해도 되겠지. 그런 내가 보기에 저 여자는 ‘고통’이 특별히 점찍은 존재야. 상태만 봐도 고통이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지.
그러니 지금까지 살려두고 계속해서 괴롭히는 거다. 네가 저 여자에게 걸린 저주를 건드리는 순간 ‘고통’은 그걸 알고 반응할 거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결국 너와 저 여자를 찾아낼 것이고. 넌 거인 친구의 도움으로 안전하겠지만 저 여자는……, 지금까지보다 더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베르엘이 말을 멈췄다. 그는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어둠에 가려져 베르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엘로이지는 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베르엘이 말을 이었다.
“지금껏 저 고통을 안고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을 해낸 거나 마찬가지다. 진즉에 망가져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아. 아니, 그랬어야 해. 저 여자는 생물이 맨정신으로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한계를 넘어섰거든. 지금 저 여자의 정신이 남아 있는 건, 저주 때문이 아니라 마검의 대가 때문일 거다.
너흰 알 수 없겠지만 마검들은 서로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다. 물론 이놈들의 대화는 숙주들에게만 들리지. 이놈들도 성향이 각기 달라서 내 것처럼 평소에는 입 꾹 닥치고 있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아닌 것들도 있다. 내 마검은 저 여자의 마검과 인연이 깊은지 아까 안에 들어갔다 나온 뒤로 닥치고 있으라 해도 주저리주저리 듣고 싶지도 않은 얘기를 많이도 떠들더군.
저 여자의 것은 ‘욕망’이다. 대가와 처형에 대해서는 물어도 입 꾹 닥치고 아무 말 안 해줘서 몰라. 쓸모없는 놈. 다만 추측컨대 대가는 욕망의 발현 혹은 제거 아니면……, 예상하기도 어렵군. 아무튼 그쯤 되겠지. 말만 들으면 별 것 아닌 대가처럼 들리겠지. 하지만 뭐가 됐든 너희 둘의 상상을 초월한다고는 단언할 수 있다.
이 마검 놈들은 생각보다 깐깐하고 쪼잔한데 쓸데없이 정직해서 반드시 대가를 받아 가야만 직성이 풀린다. 저 고통 속에서도 여자가 버티고 있는 건, 마검이 대가를 치를 수 있도록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정신을 유지하게 해주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아, 최근에 뭔가가 간섭한 흔적이 있긴 하더군.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뭐 아리송한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저 여자의 왼손은 이미 봤겠지? 그건 고통이 마검을 빼내려고 온갖 술수를 부리다가 결국 포기한 결과다. 놈에겐 마검이 없었으니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지. 그 때문에 실망도 많이 했을 거고.
마검의 숙주들은 다른 마검을 쥘 수 있다. 설령 그게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물론 대가를 대신 치르는 것도 가능하고. 반대로 마검이 없는 존재는 마검 쪽에서 원하지 않는 이상 손을 댈 수 없다.
왜 이런 얘기를 하냐고? 밀데트가 놈이 얼마 전에 마검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다. 이미 무력에 있어서는 세계에서 따라올 존재가 없는 것들인데 굳이 마검에 손댈 필요가 없지. 대가와 처형에 고생하고 싶어하는 변태가 아니라면. 그런데도 손을 댔다. 무슨 뜻인지는, 잘 알 거라 믿는다.
그러니 너의 선의를 베풀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해봐라. 네가 저 여자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저 여자를 더 끔찍한 절망으로 밀어 넣지 않으려면 그저 지켜보는 게 현명할 수도 있다.”
베르엘은 엘로이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인 뒤 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베르엘의 마차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시약을 만들고 있던 엘로이지는 하품을 했다. 그는 시약을 만들던 그릇을 내려놓고 눈을 비볐다. 한계가 찾아왔다. 아무리 인간보다 체력이 좋다 한들 피로를 느끼지 않는 건 아니다. 슬슬 잠을 자야할 것 같았다. 엘로이지가 기지개를 켰다.
산책이라도 하려고 밖으로 나가려던 엘로이지의 귀가 쫑긋거렸다. 침대가 없어 바닥에 눕혀놓은 로제가 움찔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엘로이지는 등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로이지는 화들짝 놀랐다. 느닷없이 로제가 격한 발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발작을 진정시키려 작은 찬장에 넣어두었던 향초를 꺼냈다. 급히 등불을 열어 불을 붙인 그는 향초를 로제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로제의 발작이 진정되자 엘로이지는 식은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모래가 담긴 작은 그릇에 향초를 꼽았다. 연기가 점차 집안 곳곳에 가 닿기 시작한다. 엘로이지는 향초에 취하기 전에 밖에 나가기로 했다.
문을 열기 무섭게 자는 줄 알았던 카빈이 말을 걸어왔다.
“잠 좀 자자.”
“깜……짝아. 안 주무셨어요?”
“내 귀가 너보다 좋은데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아하하…….”
“아무튼 쟤는 또 저러냐?”
“네. 계속 저러는데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카빈은 팔짱을 꼈다. 그는 바닥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는 엘로이지를 바라보았다. 카빈은 슬며시 콧등을 긁적이며 말했다.
“네가 ‘고통’이 건 저주를 거스르려고 해서 그런 거 아니야?”
엘로이지는 자괴감을 느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으…….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그래도 그건 아니에요. 확실히. 모든 저주와 축복에는 파고들 틈이 있기 마련이죠. 저 같은 약제사나 연금술사, 마법사 같은 부류는 충분히 그 틈을 건들 수 있어요. 이런 류의 지식이 있다면 의사들도 가능하구요. 해제하는 건 무리라도 우회해서 속이는 것뿐이라면 사실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요. 카빈 씨도 원리만 알면 금세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일단 난 네가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데 뭘 금세 해 하긴. 아무튼 네가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 거란 소리지?”
“적어도요. 제 생각엔 정신적인 문제 같아요.”
“예를 들어?”
엘로이지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아까 계속 이상한 소리가 나서 잠깐 옷을 벗겨봤거든요. 근데……, 아애 어떻게 생겼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얼굴은 물론이고 몸도……. 몸이 그 지경인데 정신 쪽은 어떻게 됐을지…….”
카빈은 오두막을 돌아보았다. 카빈이 말했다.
“그래서 그 소리는 뭐였는데?”
“벌레들이었어요.”
“벌레? 무슨?”
“저도 처음 보는 벌레들이었어요. 형태는 바퀴벌레 같은 해충 쪽을 많이 닮았지만 빛을 봐도, 제가 다가가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정상적인 생물은 아니에요. 아무튼 그 벌레들이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개중에는 손바닥만 한 것도 있었는데…….”
카빈은 징그럽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가끔 몸에 올라타는 동물들도 짜증나는데 보이지도 않는 인간 세상의 벌레들이 몸을 기어 다닌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는다. 카빈은 몸을 부르르 떨곤 옷 이곳저곳을 털기 시작했다. 엘로이지는 그런 카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다 잡긴 했는데, 카빈 씨가 좀 봐주실래요?”
“으, 난 벌레라면 딱 질색이야. 진짜 싫어. 그걸 왜 나한테 보여준다는 거냐?”
“다른 게 아니라, 이게 아무래도 욕망의 기사들의 힘 같거든요.”
카빈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지고 와봐.”
엘로이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그는 죽은 벌레가 가득 담긴 큰 대야를 하나 가지고 나왔다. 카빈은 대야를 들고 벌레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광택 없는 검은색 벌레들이다. 형태는 엘로이지가 말한 것처럼 해충을 닮았으나 몸 곳곳에 붉은 선이 보인다. 이 벌레들에게서 순수한 악의가 느껴진다. 카빈은 대야에 담겨 있던 벌레들을 왼손바닥에 쏟았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내려쳤다.
시꺼먼 안개가 흩뿌려졌다. 그 속에서 누군가가 웃고 있다. 스산하다. 엘로이지의 귀에도 똑똑히 들린 그 웃음소리는 기쁨에 절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웃음에는 짜증과 분노가 가득했다. 카빈은 검은 안개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짜부라뜨렸다.
“카빈 씨, 지금…….”
카빈은 얼굴을 구겼다.
“나도 ‘거짓’한테 들은 거지만 욕망의 기사들은 몇 가지 권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스스로의 욕망을 쪼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거야. 욕망의 기사들의 존재의의인 욕망을 쪼개 만들어내는 거라 사실상 그놈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지. 그걸 죽이게 되면 당사자에게 굉장한 압박을 주게 되고.
이 권리를 이용해 만드는 생명체는 각기 다른 형태를 가져. 그 욕망의 기사의 내면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인 걸로. 다른 모습으로는 못 만든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이 역겨운 벌레들은 ‘고통’의 창조물이고.”
“그럼……, 아까 그 웃음소리가…….”
“창조자인 ‘고통’이 처 웃는 소리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단 소리야. 아주 역겨운 새끼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벌레라……. 저 여자를 만난 순간부터 우리도 그놈의 표적이 됐다고 보면 돼. 물론 그쪽도 대가리 깨지기 싫으면 이쪽으로 쉽게 찾아오지는 못하겠지. 찾아오는 날은 날 잡을 준비가 됐다는 말일 테고.”
엘로이지는 손을 모아 얼굴에 가져다댔다. 카빈은 울기 직전의 엘로이지를 쳐다보았다. 상태를 보건데 일이 심각해진 걸 본인 탓으로 돌리고 있는 듯했다. 카빈이 말했다.
“야, 야. 왜 그렇게 심각해? 얘들은 걱정 안 해도 돼. 정 불안하다 싶으면 그, 그, 그, ……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 아무튼 걔들 박살내고 다니는 그놈한테 연락하면 되지.”
“플랑드웰 씨요?”
“어! 맞아. 걔!”
엘로이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짜증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정면을 쳐다보았다. 요정들처럼 청각뿐만 아니라 오감 전부가 발달한 거인이 아니어도 엘로이지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속이 타들어가는 엘로이지를 보며 카빈은 헛기침을 했다. 그는 화제를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카빈이 말했다.
“아, 걱정하지 마! 욕망의 기사 둘 정도면 나도 감당할 수 있어. 셋 이상이 어려운 거지. 거기다 플랑드웰 그놈은 얼마 전에 배덕 쪽에서 다구리 놨는데 전부 다 죽였잖아.”
“……분명 이번에 세상에 나갔다 온 건 저인데, 저는 금시초문인데요.”
“아?”
카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냐, 아냐. 저번에 ‘거짓’한테 들었어. 배덕의 일곱 명 말고 그 밑에 애들이 플랑드웰 다구리 놨다가 전멸했다는 거.”
엘로이지는 뭔 소리냐고 한 마디 하려다가 눈을 크게 떴다. 들은 적이 있다. 여덟 명의 욕망의 기사가 플랑드웰에게 덤벼들었고, 그대로 몰살당했다. 그 후로 힘의 균형이 단번에 기울었다. 덕분에 배덕의 주는 규율의 루에 밀려 굉장히 긴 시간 몇몇을 제외하곤 조용히 지내고 있다. 문제는 그 사건은 제국이 세워지고 얼마 안 되서 벌어진 일이다. 엘로이지는 새삼 거인의 시간감각에 당황했다.
사막 요정들의 수명은 천 살 전후이다. 그런 그들에게도 70년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다. 헌데 거인들은 그보다 더 오래 산다. 당장 ‘어린’ 카빈만 해도 사막 요정 다섯 명을 합한 만큼의 시간을 살고 있다. 이토록 긴 시간을 사는 이들에게 70년이란 찰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엘로이지가 말했다.
“카빈 씨. 그거 70년도 더 된 얘기예요.”
“거 봐 얼마 안 됐네.”
“카빈 씨에게는 얼마 안 됐을지 몰라도 70년 새 욕망의 기사들이 엄청 늘어서 균형은 다시 맞는 상태예요…….”
카빈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엘로이지를 바라보았다.
“걔들……, 뭐 공장에서 찍어 내냐? 아니 무슨 잠깐 사이에 일고여덟 마리가 다시 생겨? 미친 거 아냐?”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엘로이지는 카빈의 말에 공감했다.
“사람의 욕망이란 어느 시대, 어느 때건 강렬하니까요.”
“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 놈이면 나 하나 상대할 수가 있는데 그런 놈들이 줄줄이 땅콩 식으로 늘어나는 건 너무 부조리한 거 아닌가?”
놀라며 말하는 카빈을 향해 엘로이지는 피식 웃어주었다.
“설마요. 그때 이후로 태어난 욕망의 기사들은 약해요. 저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요. 카빈 씨라면 전부 다 이기겠죠. 이제야 욕망의 덩어리가 생기긴 시작한 존재들과, 이미 응어리져 있던 괴물들이 다른 건 당연한 거죠.”
카빈은 손으로 입을 붙잡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리가 있다. 그는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 엘로이지를 바라봤다.
“됐고, 그런 양산품 같은 놈들은 신경 끄자고. 지금은 저 여자애를 돕는데 최선을 다하는 게 어때?”
“으아으아으아아아! 그게 문제라구요! 뭘 더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감이 안 잡혀요.”
씩씩거리는 엘로이지의 모습에 카빈은 콧등을 긁적였다. 그는 엘로이지가 애써 무시하고 있던 존재를 꺼내보기로 했다.
“누나한테 부탁해보는 건?”
“그것……도 고려해보긴 했는데…….”
“했는데?”
“아……. 하. 안 그래도 이제야 행복이란 걸 알아가는 누님한테 괜한 부담 주고 싶진 않아서요. 거기다가 쫄래쫄래 가서 도와달라고 하면, 아벨……, 아니지 오로한 씨가 또 희생하실까봐……. 괜히 잘 지내는 둘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 싶어서요. 무엇보다 누님이 욕망의 기사들이랑 얽히는 것도 원하지 않고.”
카빈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콧바람을 내쉬었다.
“하여튼 누나라면 껌벅 죽지, 죽어. 너 같은 애를 부르는 말이 인간들 말로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엘로이지는 허탈하게 웃었다.
“다행스럽게도 저도 기억이 안 나네요. 근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따라 웃으려고 미소를 지었던 카빈이 느닷없이 정색했다. 그는 엘로이지를 쌀쌀맞게 쳐다봤다. 자주 볼 수 없는 모습에 당황한 엘로이지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지긋이 그를 쳐다보던 카빈이 말했다.
“가만 보면 넌 남들 도와주는데 이골이 났어. 어쩔 땐 호구 같기도 하단 말이야. 아니지. 호구 맞지. 아무튼 의문인 점은, 왜 난 안 도와주냐는 거지.”
“아하……하. 글, 쎄요?”
카빈의 눈치를 보며 엘로이지는 뺨을 긁적였다. 카빈은 딴청피우는 엘로이지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다행히도 그 충동은 쉽게 억눌러졌다. 엘로이지는 카빈과 같은 거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아주 크게 작용했다. 만약 그가 꿀밤을 때렸으면 엘로이지의 머리는 목구멍을 짓이기고 들어가거나 몸에서 떨어져 저 멀리 날아가 나뒹굴 것이다.
사막의 요정들은 육체적 능력에 있어서는 인간들과 궤를 달리할 정도로 뛰어난 종족이다. 하지만 거인들에겐 손가락 튕기기 한 방으로도 몸을 반으로 갈라버리거나 박살낼 수도 있는 약한 존재다. 카빈은 눈을 게슴츠레 떠 엘로이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는 콧구멍을 파며 말했다.
“하긴. 내가 널 돕는다고 나선 거니 날 안 도와준다고 불평할 그건 아니지. 여기저기 못 돌아다니는 날 대신해 움직여주는 걸로 만족해.”
푸념처럼 늘어놓는 카빈을 올려다보며 엘로이지는 미소를 지었다. 엘로이지는 시선을 돌려 어두운 숲을 바라봤다. 그는 카빈과 함께했던 여행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웃음을 참았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카빈이 없었다면 엘로이지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
카빈은 처음 본 종족이자 말도 통하지 않던 엘로이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에 대해 물을 때면 카빈은 한결같이 이곳으로 와서 처음 본 사람이라 도왔다 말한다.
많은 이들이 엘로이지에게 착하다거나 호구란 소리를 한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순수한 선의로 사람들을 돕는데 무슨 의미가 있냐고도 한다.
‘순수한 선의…….’
아니다. 엘로이지가 그들을 돕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이 거인처럼 되고 싶어 한다.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뻗는 걸 주저하지도 않는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거인이 되고자 해서다.
엘로이지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카빈에게 받은 것을 갚으려면 그가 숙원을 이루는 데 아낌없는 도움을 줘도 모자라다. 하지만 카빈이 숙원을 이루고 나면 엘로이지의 곁을 떠날 것이다. 숙원은 카빈을 이 세계에 붙잡아두는 단 하나의 사슬이다.
숙원을 이루고 난 거인은 더 이상 세계를 감탄하며 돌아다닐 이유도, 필요도, 목적도, 목표도 사라진다. 엘로이지는 카빈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에 그를 붙들고 있다.
아무것도 없이 홀로 사막을 거닐던 엘로이지에게 손을 뻗어준 건 카빈이 유일하다. 엘로이지는 그때 거인의 손을 붙잡으며 맹세했다. 이 손을 절대 놓지 않겠노라고.
“휴……, 잠깐 나와 있었더니 춥네요. 다시 들어가 봐야겠어요.”
엘로이지의 말에 카빈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곧 엘로이지가 사막 태생이라 그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득 카빈은 턱을 괴었다.
‘사막도 밤 되면 춥지 않나? ……안 춥나? ……아닌가? ……흠. 하긴 더운 데 산다고 더위를 못 느끼는 것도 아니니까.’
오두막 안으로 들어온 엘로이지는 일어나 있는 로제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금세 정신을 차린 그는 로제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굉장히 멍했다.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조차 않는 로제를 보며 엘로이지는 불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뭔가를 실수하진 않았는지 되새기며 엘로이지는 천천히 로제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숙녀 분? 제 말이 들리시나요?”
로제는 엘로이지가 바로 앞에 다가왔음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엘로이지가 그녀의 코앞에서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혹시 제 말이 들리지…….”
엘로이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로제가 고개를 들었다. 엘로이지는 순간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은 고문과 악행의 흔적들 사이로 눈물이 흐르고 있다. 눈가를 타고 흐르는 투명한 눈물에 붉은 선이 그어진다. 이윽고 더는 눈물이라고 보기 힘든 핏줄기가 얼굴을 적셔간다.
엘로이지는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사막의 요정들은 상대방의 기억을 엿볼 수 있는 힘이 있다. 엘로이지는 사막 요정들이 ‘마음의 눈’이라 부르는 능력 때문에 강제적으로 로제의 기억을 들여다봐야 했다.
모든 사막 요정이라면 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다루는 건 쉽지 않다. 어린 사막 요정들은 제멋대로 발동되는 마음의 눈에 굉장히 고생을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것을 제어하기 위해 긴 시간 체계적인 수련을 한다.
사막 요정들이 어른이라 부르는 나이 많은 요정들은 이 마음의 눈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다. 상대방의 마음속에서 필요한 것만을 골라 읽어내기도, 대상에게 자신의 기억을 투영할 수도 있다. 허나 그들이 마음의 눈을 사용할 때는 예기치 않게 고향땅을 벗어났을 때나 침략자에 맞설 때뿐이다.
평화로운 시기에 어른들은 스스로가 마음의 눈을 닫는다. 어린 사막 요정들이 자신의 기억을 의도치 않게 엿봐 상처받는 걸 막기 위함이다.
엘로이지는 사막 요정 중에서도 굉장히 젊은 축에 속한다. 그리고 이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다루기 전에 고향을 떠나 인간들의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다행히도 그가 청년이라 불러줄 수 있을 정도의 연배였기에 때때로 인간들의 기억을 엿봐도 상처받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 기억을 유용하게 쓰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기억의 끝에서 엘로이지는 눈을 떴다. 그는 스스로의 손으로 목을 조르고 있었다. 엘로이지는 황급히 정신을 다잡았다. 간신히 목을 조르는 손아귀에서 힘을 뺀 그는 자신의 입에 로제의 붕대 감긴 손이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엘로이지는 그녀가 혀를 깨물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엘로이지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창백한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그는 익사하기 직전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거친 숨을 내뱉었다. 엘로이지는 떨리는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한참을 흐느끼던 엘로이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오두막 문을 열고 자신을 바라보며 무어라 소리치고 있는 카빈이 보였다.
“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카빈은 금방이라도 오두막의 지붕을 뜯어낼 기세였다. 엘로이지는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대충 닦으며 답했다.
“괜찮……, 괜찮아요…….”
“……다 죽어가는 상판으로 괜찮다고 하면 참 설득력 있다. 무슨 일이야? 왜 갑자기 발작하고 자살하려고 해? 너 쟤 아니었으면 죽었어.”
엘로이지는 또다시 왈칵 쏟아지려는 울음을 참았다. 그가 심호흡을 하고 로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게 거인들의 언어를 빌렸다.
“이 분의 기억을……, 잠깐 봤어요.”
“……그래서?”
“고통……, 고통이 이분에게 저지른 짓들을요.”
카빈은 표정을 굳혔다. 이쪽 땅으로 넘어오기 전, 엘로이지와도 만나기 전에 욕망의 기사 중 하나인 고통이 휩쓸고 지나간 땅을 본 적이 있다. 그 날의 풍경은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제법 참혹한 모습을 많이 봐왔다 자부하지만, 그 날의 기억은 도저히 묻어버릴 수가 없다. 고통의 기사는, 그가 지금껏 알아온 존재들 중 지식의 기사와 함께 단연 최악이다.
거인들 중에서 어린 그는 전쟁에 나서본 적이 없다. 언제나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설령 나섰다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막말로 정말 하늘에 닿을 것처럼 거대한 존재들의 싸움에 카빈처럼 작은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죽었을 때 인간들이 말하는 대륙이 만들어질 정도로 거대한 이들의 싸움. 그 싸움이 끝나면, 카빈은 언제나 그곳을 찾아갔다.
전쟁에 따라오는 참혹함은 거인이나, 인간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고통의 기사가 저지른 짓은 그런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명예도, 영광도 욕망의 하나다. 고통도, 욕망의 하나다. 허나 다함께 명예를 쟁취하고 타인의 영광을 지켜보는 것과 오직 순수하게 내가 아닌 다른 대상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카빈은 떨고 있는 엘로이지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참혹함에 익숙해졌다 생각한 그도 고통의 기사가 남긴 흔적을 보고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모르고, 그 참혹함마저 닿지 않은 엘로이지에겐 견디기 힘들 것이다.
눈앞의 젊은 청년은 분쟁이란 없는 고귀한 사막 요정들의 삶을 살았다. 그들의 삶은 이상향에 가까울 정도로 우아하다. 그들은 ‘마음의 눈’이라는 특수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성품 자체가 고아한 존재이기에 서로를 시기하지 않는다.
타인을 시기하지 않기에 갈등이 없고, 제3자에 의한 침략이 아닌 이상 전쟁도, 전투도, 싸움도 없다. 인간들의 세상에 백 년이란 시간을 머물렀지만 그래도 엘로이지는 사막 요정이다. 아무리 그들의 삶에 물들었다 한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토록 고아한 성품이 조금이나마 흔들렸을지언정 바뀌진 않았다.
“……솔직히, 말로만 들었죠. ……그들이 위험하다는 걸요. 제가 직접 본 욕망의 기사는 몇 있지만 그들 대부분, 카빈 씨와 겨뤘던 ‘영광의 기사’처럼 천칭과 규율에 속했죠.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싸움에 미쳐 있었죠. 강한 이와 영광스러운 싸움 끝에 죽음을 맞는 게 욕망이라니……. 선도 악도 아니라 천칭의 세력권이 들어 있었고……. 그렇다고 배덕에 속한 욕망의 기사를 보지 못한 건 아니에요. 배덕의 주에 속해 있지만, 그 힘을 휘두르는 이의 본질이 천칭에 가까운 파괴. 그분만을 봤었죠. 그래서 안일했어요. 전……, 이건……, 이건 정말……. 기억을 잠깐 본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잠시 말을 끊은 엘로이지가 미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는 지우고 싶어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을 저주했다. 웃음이 멎었다. 엘로이지가 로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 사람한테 저주를 걸고 나서 제일 처음 한 짓이 뭔지 아세요? 그 미친 새끼는 입을 찢어놓고 그대로 녹인 금을 들이 부었다고요! 하하하하하! 그런데 죽을 수가 없지! 그 고통을 느끼면서도 죽을 수가 없어! 죽질 못해서! 이 사람은 그 긴 시간을…… 죽지 못해서……, 살았어요. 이건 아무것도 아닐 고통 속에서! ‘내 사랑스런 여신께 어울리는 황금으로 짜낸 옷’이라고? 미친 새끼!”
참다못한 카빈은 오두막의 지붕을 뜯어냈다. 그는 정신을 놓고 소리치고 있는 엘로이지를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카빈은 지붕을 덮었다. 고작 단편적인 기억이 엘로이지의 정신을 망가뜨려간다. 카빈은 앞섶을 부여잡고 덜덜 덜고 있는 엘로이지를 흔들었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를 향해 카빈이 말했다.
“정신 차려.”
“어떻게요! 어떻게 이 끔찍한……!”
카빈은 도저히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거인이 가진 특별한 힘을 썼다.
고무된 투기를 사방으로 쏘아 보낸다.
거인들끼리는 단순히 인사에 불과한 힘이다. 하지만 사용한 거인의 기백보다 약한 다른 모든 생물들을 기절시킬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갖고 있다. 그나마 작은 카빈이기에 단순히 기절하는 것으로 끝났을 뿐이다. 카빈보다 더 큰 거인이 쓴다면 그 여파는 전혀 다를 것이다. 최소한 그의 누나 정도의 거인만 되어도 기절하는 게 아니라 전부 사망에 이르리라.
거인들에겐 ‘고무된 정신’이라 불리는 기술로 엘로이지를 기절시킨 카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두막의 지붕을 다시 열었다. 거품을 물고 눈을 뒤집은 엘로이지를 오두막 안에 넣었다. 손을 빼내던 카빈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있던 로제마저 기절한 걸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숙원을 위해 동족의 곁을 떠난 후로는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거인들에겐 인사나 마찬가지지만 이곳의 생물들은 기절, 심한 경우에는 죽기도 했기 때문이다. 엘로이지와 동행한 뒤로는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고무된 정신은 거인을 중심으로 전 방위로 뻗어나간다. 깊게 파고 든다면 원하는 대상에게만 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충분히 거인들 사이에서도 통할 무기가 된다. 허나 이걸 제어해서 피해를 주느니 그저 평범한 주먹질을 갈기는 게 낫다. 보통의 주먹질이 단련한 ‘고무된 정신’ 보다도 몇 배나 더 강력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거인들의 전사들은 이것을 단련하지 않는다. 격식을 차리는 것도 아닌 평범한 인사를 연습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고무된 정신’을 다루는 데 관심을 가지는 건 카빈의 누나 같은 학자들뿐이다.
카빈도 방금 전까지는 정말 쓸데없다고 생각했다. 작은 생물들을 상대할 때 훌륭한 제압기라는 것에 이견은 없다. 하지만 원하지도 않는 사람까지 기절시키는 건 문제다. 카빈은 나란히 기절한 두 사람을 보며 콧등을 긁적였다.
“누나가 가르쳐준다고 할 때 좀 배워둘 걸.”
뭐가 됐든 날뛰던 엘로이지는 재웠다. 남은 관심사는 엘로이지가 깨어났을 때 과연 평소와 같을지 아니면 여전히 맛이 가 있을 지에 대한 것이다. 카빈은 두 사람을 살펴보다가 다시금 오두막의 지붕을 덮었다.
‘만약 엘로이지가 여전히 맛이 가 있는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 기절시켜야 하나? 근데 시간차가 있다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연속으로 쏴버리면, 엘로이지가 버틸까? 딴 건 몰라도 작은 애들한테는 상당한 과부하가 걸리는 거 같던데…….’
카빈은 산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 손을 깍지 껴 머리 뒤로 넘겼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승달이 반쯤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엘로이지 따라서 여기저기 다니며 인연이나 만들어 둘 걸 그랬나 싶기도 해. 이런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할 지인이 하나도 없다는 건 굉장히 위험하잖아. 일단 쟤가 일어났을 때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면, 쏘는 건 보류하기로 하고……. 거짓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여기서 볼렌드라까지 내가 가도 꽤 먼데 그때까지 버티려나……. 아니지, 아니야. 최근에 심판이 이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으니 걔를 먼저 찾아가보는 게 나을지도.’
바람이 분다. 카빈은 을씨년스러운 바람이라 생각했다. 달을 가린 구름이 점차 떠나가고, 초승달은 완전해진 몸으로 희미한 달빛을 뿌린다.
“생명수요?”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이지는 신음을 흘리며 카빈을 쳐다보았다. 카빈은 곁으로 다가오는 새들을 쫓아내느라 엘로이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엘로이지는 로제가 원하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 또한 한때 그것을 찾아 헤맸고, 심지어 손에 넣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지금 로제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지금 엘레아노르 섬에는 갈 수 없다. 그곳은 특별한 장소와 시간이 맞아 떨어질 때만 찾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 엘로이지는 섬을 방문한 이후로 매일 그 시간과 장소를 기록하고 있다. 언젠가 생명수가 필요할 날이 또 찾아올지 모른다는 강박증에 가까운 마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 오늘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불규칙적으로 시간과 장소가 달라져 쉽게 찾을 수 없는 섬. 허나 이 섬에도 규칙적인 게 하나 있다. 바로 그곳에 가기 위한 다리가 놓이는 시간이다. 신기루처럼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먼 곳에 나타나는 엘레아노르는 날개가 없는 생물은 다가가지 못한다. 그래서 이 다리가 필요하다.
오늘 새벽, 엘로이지는 종족의 특성 때문에 원치 않았던 로제의 기억을 엿봤다. ‘고통의 기사’가 로제라는 한 사람에게 저지른 악행. 치가 떨릴 정도로 잔인하고 괴기스러우며 악랄했다. 두려움이 엘로이지를 좀먹어갔다.
점차 미쳐가던 그는 카빈의 도움으로 잠시나마 악몽 같은 기억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정갈한 투기 탓인지 엘로이지는 깨어난 후에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로제의 기억을 떠올려도 새벽과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했다.
엘로이지는 얼어붙은 불꽃과 녹슨 소금으로 로제의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을 상당히 줄여주었다. 다만 고통을 최대한 억제한 것뿐이지 그 원천을 차단한 게 아니다. 지금 당장은 별 문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저주의 모체가 되는 ‘고통의 기사’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베르엘의 조언처럼 로제는 더 큰 절망을 맛볼 것이다. 잠시 억누른 고통은 배가 되어 돌아올 것이고, 그 충격은 엘로이지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엘로이지가 로제의 고통을 줄여주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몸에 한해서다. 로제가 느끼고 있고, 엘로이지도 느꼈던 정신적 고통은 지금도 남아 있다. 무슨 수를 써도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베르엘은 그녀가 마검의 영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했다. 지금 엘로이지로서는 손 쓸 방법이 없다.
어떻게든 붙들고 있는 이성의 끈마저 아주 작은 자극에도 놓을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 ‘당신이 원하는 건 앞으로 십여 년 후에나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어떻게 될까? 더욱이 그것으론 당신이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면…….
엘로이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그는 황급히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그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슬피 울린다. 로제가 엘로이지를 보며 벗겨진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는 목이 막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고통’이 심어놓은 벌레들은 엘로이지가 모두 떼어냈다. 평소처럼 그것들이 타고 올라와 막힌 건 아니란 뜻이다. 로제는 울고 있는 사람에게 건네야 할 위로의 말을 잊어버렸다.
긴 시간 썩어가는 몸과 역겨운 냄새는 로제를 핍박 받게 만들었다. 강인하고 자신감 넘치던 여전사는 그들의 멸시를 견디지 못해 오래도록 숨어 지내야 했다. 사회에서 결여된 채로 고통으로 점철된 긴 시간은 행복했던 기억을 점차 잊어갔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녀에게서 말을 앗아갔다.
눈물을 닦아낸 엘로이지는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눈물 때문에 붉게 상기된 얼굴은 애처롭게 보인다. 코를 훌쩍인 엘로이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네. 제가 그 생명수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엘로이지는 고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로제의 얼굴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기대’를 발견했다. 일그러진 얼굴에 드러나는 그 기대감에 엘로이지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말을 할 수가 없다.
망설여진다. 카빈의 전례도 있기에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면 카빈처럼 가슴 찢어질 정도의 자괴감을 느끼게 될 거니까. 그리고 카빈과는 달리 그녀의 기억을 보고 잠시라도 고통을 공유했던 엘로이지라면 스스로 버틸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숙고 끝에 엘로이지는 결정을 내렸다. 그가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몇 가지 아셔야 할 게 있어요.”
로제는 엘로이지에게 집중했다. 지금껏 자신을 괴롭히던 고통이 무척 줄어들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맑았다. 엘로이지가 심호흡을 했다. 거짓으로 지금 당장을 모면한다 해도 언젠가 그 자괴감은 엘로이지의 목을 움켜쥘 것이다. 허나 거짓으로 그녀를 기만한다면, 그 끝에서 이 여자가 느낄 절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거짓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언제나 옳지 않다. 그러나 옳지 않은 진실이라고 거짓으로 포장해버리는 건 나 편하자고 이 사람을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엘로이지는 그럴 수 없다. 오로한 아벨이라는 사람에게, 텔레마이트 빈스 카빈에게 그렇게 구원받았으니까.
“많이 괴로우실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래도 아셔야 해요. 엘레아노르로 가기 위해선 십년이 넘는 시간이 더 필요해요.”
로제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건 엘로이지가 가장 크게 우려하던 상황이다. 오히려 그녀가 날뛰어 준다면 소모된 감정만큼 정신이 무너지는 걸 방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침묵은 위험하다. 엘로이지는 입이 바싹 말라 침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목을 축이려 억지로 침을 삼키듯 행동했다.
“시……, 십……년.”
로제는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사막 요정이라는 남자와 거인은 모두가 꺼려하며 멸시하던 그녀를 도와줬다. 아무런 이유도 없고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이들은 전사답지 않은 여리고 착한 마음을 가졌던 그녀의 동생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믿을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로제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새, 생명수……. 죽은, 사, 사람……도, 살, 살릴…….”
엘로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살릴 수 있어요. 제 누나도, 그렇게 살렸으니까요. 하지만…… 생명수로는 당신께 걸린 저주와 몸을…….”
엘로이지가 말끝을 흐렸다. 로제가 고개를 내저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말을 하길 기다렸다.
“내……, 동생…….”
엘로이지는 입을 틀어막은 채 벌떡 일어섰다. 그는 황급히 카빈에게 달려갔다. 손가락을 새들의 쉼터로 내주고 있던 카빈은 다가오는 엘로이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카빈의 곁에서 엘로이지는 더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고통을 겪고, 그 속에 살면서도 이미 죽은 동생을 살리기 위해 생명수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녀의 생각 속에 자기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 카빈은 흐느끼는 엘로이지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말할 상황이 아닌 듯했기에 대신 말을 하기로 했다.
“미안해. 내가 대신 얘기할 게. 얘가 엘레아노르로 가려면 십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건 사실이야. 그게 위험 없는 정석적인 방법이고.”
로제는 카빈을 올려다보았다. 산을 넘어 빛을 비추는 태양은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아주 아름다운 금빛으로 물들였다. 카빈은 그 빛이 로제의 일그러진 얼굴마저 비춰준다는 것에 불쾌함을 느꼈다.
이 세계는 빛을 선하다, 어둠을 악하다 표현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들의 말이 사실일까? 카빈은 단호하게 아니라 말할 수 있다. 빛은 모든 걸 비추고 끄집어낸다. 그 사람이 정말 감추고자 하는 아픔까지 뜯어내듯 꺼내와 세상에 전시한다. 로제에겐 빛이 악이다. 어둠만이 상처 가득한 그녀를 보듬고 숨겨줄 수 있다. 카빈이 말했다.
“하지만 그게 엘레아노르가 십년 후에만 나타난다는 뜻은 아니야. 엘레아노르는 날개 달린 것들이 아니면 갈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에 나타나. 배로도 갈 수 없지. 여길 가려면 나처럼 거인이거나 ‘다리’가 생기는 걸 기다려야해. 이 십년이란 건 그 다리가 나타나는 시간이야.
세상에 꼭 바른 길만 있으리란 법은 없어. 도시나 마을에 샛길이 없는 걸 찾아보는 게 힘들지. 이것도 마찬가지야. 얘는 도저히 답을 찾지 못해서 다리가 내려오는 시간만을 기다려서 들어갔어. 그런 뒤에야 우린 다른 길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지.”
카빈은 슬쩍 몸을 돌려 로제에게 향하는 햇빛을 가로막았다. 눈을 아프게 하는 빛이 사라지고 카빈의 그림자가 로제를 덮었다.
“예르하 네일. 그리고 자트라스라 불리는 뿔 달린 사람. 인간들은 그들을 마족이라 부른다 하더라고. 이 두 사람이 그 길을 알아. 하지만 예르하는 워낙 사회와의 접촉을 꺼리고 숨어 지내기에 좀처럼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워. 자트라스는 오래 전 인간들에게 마족이 패하면서 세상 깊은 곳으로 물러났어.
다른 마족들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자트라스는 나쁜 애는 아니야. 네가 걔한테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면 널 반드시 도와줄 거야. 문제는 마족들의 세계로 가는 문은 미궁에 있어. 파하르 미궁이라는 곳이지. 가능하다면 널 직접 돕고 싶지만 우린 지금 인간들과 나눈 약속 때문에 여길 뜰 수가 없어. 설령 그게 아니라 해도 파하르 미궁에는 안 갔을 거야.
나는 너무 커서 못 들어가고, 엘로이지는 그곳을 지키는 가장 약한 마족도 못 이기니까. 네 상태를 보면, 너도 거길 무사히 지나갈 수 없을 거야.”
카빈은 며칠 전 로제에게 줄 진통제를 꺼냈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지금부터 인간들의 수도로 가. 방금 말했지만 인간들이랑 한 약속 때문에 데려다 줄 수는 없어. 수도로 가면 길잡이들을 찾아. 그 길잡이들에게 ‘망자가 끄는 수레’라는 여관을 찾아달라고 해. 그리고 여관의 사람들에게 예르하 혹은 자트라스를 찾고 있다고 말해. 걔들이 길잡이들 중에서는 최고야.
왜 이런 복잡한 방법을 쓰냐면, 망자가 끄는 수레라는 곳은 일반적으로 찾을 수 없어서 그래. 얘들이 있는 장소는 인간들의 수도지만, 공간이 달라. 이 ‘망자가 끄는 수레’는 수면에 비친 세계, 혹은 그림자 세계, 또 다른 말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란 곳에 세워져 있거든.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어.
또 걔들은 돈을 받지 않아. 이상한 걸 달라고 해. 그런데 뭘 요구하든 아마 이거면 충분할 거야. ……잠깐만.”
카빈은 주머니를 뒤지다가 포기했다. 그는 이제야 울음을 그쳐가는 엘로이지를 붙잡아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깜짝 놀라는 엘로이지를 향해 카빈이 말했다.
“그만 짜고 거기서 그거나 찾아봐. 네가 저번에 정리한다고 다 쑤셔 박았으니 찾아내는 것도 네 일이야.”
엘로이지는 주머니 속에서 한참을 기어 다녔다. 그 끝에서 카빈이 말한 물건을 찾은 그는 카빈에게 소리쳤다. 카빈은 주머니를 땅에 내려놓았다. 낑낑대며 빠져나오는 엘로이지의 모습은 어딘지 우스꽝스러웠다. 엘로이지는 쏟아지려는 울음을 참고서 로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정교한 해골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카빈 씨의 말에 덧붙일 게 있어요. 망자가 끄는 수레는 일반적인 사람은 찾아낼 수가 없어요. 그건 길잡이들이라고 한들 크게 다르지 않죠. 수도에서 ‘짐승 한 마리’라는 식당을 찾아보세요. 거긴 길잡이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에요.
그런데 가게에 가서 찾는다고 해도 망자가 끄는 수레의 길잡이들은 없을 거예요. 아니, 있는데 나서지 않을 거예요. 그쪽 소속의 길잡이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걸 정말 꺼려해요. 그러니 가게에 가서 이 목걸이를 보여주세요. 그러면 분명 길잡이들 중 한 사람이 늦든 빠르든 당신을 찾아올 거예요. 그 사람이 망자가 끄는 수레의 길잡입니다.”
엘로이지는 몸이 불편한 그녀를 대신해 목걸이를 대신 품에 넣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수납공간이 하나도 없었다.
로제는 썩어가던 로브가 아니라 엘로이지가 내어 준 새 로브를 입고 있었다. 옷을 내어주고 싶었지만 로제의 몸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결국 구석진 곳에 있던 로브를 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것이 흔한 주머니 하나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엘로이지는 로제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며 말했다.
“불편하시겠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이 목걸이는 제가 예전에 ‘벨로소르’라는 망자가 끄는 수레의 길잡이에게 받은 물건이에요. 무슨 대가를 원하든 이 목걸이를 대신 받는 걸로 부탁을 들어줘야만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이 목걸이를 내민 대상이 만족할 때까지 길안내를 해줘야한다는 것도.”
로제가 목줄을 왼손으로 만지려했다. 하지만 그녀의 왼손은 섬세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오른손으로 목줄은 만지며 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이지가 떨리는 손으로 로제의 왼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닿은 발걸음 끝에, 생명의 호수가 당신을 반기길…….”
78년 5월
“참나. 대체 뭐가 다르다고 그렇게들 빨아주는지 모르겠네.”
짙은 갈색 머리의 사내가 신경질을 내며 술잔을 들이켰다. 어찌나 독한 술인지 사내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도 냄새가 전해졌다. 남자는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에 인상을 썼다. 그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녹인 치즈를 얹은 구운 소시지를 집어먹었다.
포크와 나이프가 있음에도 굳이 손을 선택해 먹는 모습은 그리 우아하지는 않았다. 굉장히 원초적이다.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지 않는 남자를 보며 사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식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손을 사용해 먹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내가 물었다.
“넌 늘 왜 그렇게 손으로 처먹냐? 더럽게.”
사내의 물음에 개인적으로 가져온 땅콩버터의 뚜껑을 열고 손으로 퍼 빵에 바르던 루덴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친한 친구이자 같은 일에 종사하는 말란을 보며 치즈와 소시지의 기름, 땅콩버터가 섞여 번들거리는 손을 빨아먹고 답했다.
“손이 편하니까.”
말란은 역겹다는 얼굴로 루덴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루덴은 코웃음치곤 빵을 접어 먹기 시작했다. 말란은 대화의 흐름이 끊기자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아무튼,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지 모르겠네.”
그러자 루덴은 빵을 우물거리며 굉장히 뚱한 얼굴로 말란을 쳐다보았다. 말란은 루덴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경멸에 가까운 감정을 보고 인상을 썼다.
“뭐? 왜 그렇게 쳐다봐?”
퉁명스러운 말란의 말에 루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덴은 언쟁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쓸데없이 힘을 빼는 건 낭비다. 더욱이 며칠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다. 루덴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넘어가기 위해 루덴은 설렁설렁 손을 흔들어보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말란의 구시렁거림에 진절머리를 내며 말했다.
“야. 내가 밥 먹으러 왔지 니 새끼 꼬장 들으러 온 거냐? 지랄병 좀 그만하고 곱게 처마시고 가라, 어? 대낮부터 술 처먹고 나한테 지랄하지 말고.”
더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는 루덴의 모습은 굉장히 사나웠다. 말란은 위협적인 모습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루덴은 길게 자란 검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루덴은 조용해진 말란을 지켜보다가 스프를 떠먹기 위해 수저를 들었다. 스프가 입 가까이 다가왔을 때 말란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새끼야, 넌 빡치지도 않냐. 걔들 때문에 너도 며칠 만에 밥다운 밥을 먹는 거 아냐?”
“화난다.”
“그렇지?”
자신에게 공감해주는 루덴의 모습에 말란은 굉장히 들떴다. 허나 이어진 루덴의 말은 말란을 굉장히 당혹스럽게 했다.
“너 때문에. 한 번만 더 지랄병하면 그땐 네 술잔으로 대가리 깨버린다.”
말란은 입을 벌린 채 루덴을 쳐다보았다. 루덴은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로 소금과 후추를 뿌려 구운 돼지고기를 집어 먹었다. 말란은 뚱한 얼굴로 루덴을 쳐다보았다. 말란이 말했다.
“설마, 너도 그 망자의 수렌가 염병인가 하는 놈들이 더 낫다고 생각하냐?”
루덴은 인상을 쓰며 말란을 마주보았다. 루덴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루덴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거의 내팽개치듯 스프를 뜬 숟가락을 내려놓은 그가 말했다.
“일단 망자의 수레가 아니라 망자가 끄는 수레야. 쯧. 길잡이란 새끼들이 하나같이 그놈의 망자가 끄는 수레, 망자가 끄는 수레……. 아주 입에 달고 살아. 틈만 나면 걔들을 씹어대는데 가만 보면 이게 좆같아서 씹어대는 건지, 바람난 애인처럼 애증으로 씹어대는 건지 이해가 안 가네.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새끼들도 다 똑같아. 그놈의 망자가 끄는 수레 놈들이 오늘도 일거리를 어쩌고저쩌고. 우리가 시발 일 못 구하는 게 걔들 탓이냐? 아니잖아. 그놈의 돈 때문이지.
솔직히 말해줘? 당연히 걔들이 낫지, 등신아. 우리처럼 가끔 재수 없는 날 도적떼를 만나기를 하냐, 뭘 하냐? 뭔 짓을 하는지 몰라도 걔들이 도적 만났단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 거기다 손님들 평가? 이런 병신! 당연히 걔들이 낫지! 걔들은 돈을 안 받잖아!
우리처럼 거리에 따라 돈을 더 달라고 하냐, 아니면 위험수당을 추가로 받냐? 아니지 씨발! 걔들은 돈을 안 받는다고! 뭐 이상한 걸 달라고 한다는데, 일단 돈을 안 받는다고. 거기서 이미 평가가 수직상승해. 거기다 뭔 마법을 쓰는지 같은 거리도 정신 나간 속도로 주파하는데 당연히 우리보다 나을 수밖에 없지.
또 걔들은 우리가 애새끼일 때부터, 아니 그 한참 전부터 터줏대감이었는데 당연히 뭘 해도 우리보다 낫겠지! 넌 대체 뭘 보고 우리가 걔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나 나나 이 일을 시작한 지 고작 몇 년인데! 알아들었으면 제에발 신사답게 행동해. 신사. 등신아.”
루덴은 제발 말란이 알아 듣길 바라며 잔뜩 짜증을 담아 거의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그러자 말란은 루덴의 말을 되뇌다가 곧 시무룩한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의기소침해진 말란이 어딘지 안쓰러웠다. 하지만 루덴은 그를 위로하지는 않았다. 지금 위로했다간 또 벌떡 기분 좋아져 귀찮게 할 게 분명했다.
‘이 새끼는 진짜 좋은 놈인데, 술만 처먹으면 똥멍청이가 되니…….’
“지는 아가리에 걸레는 한 서른 개는 처물고 있는 새끼가 무슨 신사…….”
“뭐랬냐?”
“아무 말도 안 했어.”
술잔을 비운 말란은 힘없이 늘어진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란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간다……. 밥, 맛있게 먹고. 다음에 보자.”
“갈 데도 없는 놈이 가긴 어딜 가? 너 돈도 없어서 그리 좋아하는 창관도 못 가잖아. 어디 뭐 쓰레기장이라도 가냐? 돈 주우러?”
“일 간다, 일! 새끼야.”
루덴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니 이 시발……. 일이 없던 것도 아니고, 있던 새끼가 대낮부터 술 처먹고 나한테 지랄한 거야? 그리고 넌 일 간다는 새끼가 뭐하자고 여기서 죽치고 앉아 술이나 퍼 마시고 있었냐?”
“출발하려면 시간이 좀 남아서 그랬다, 왜!”
“지랄하네……. 꺼져 이 새끼야.”
루덴은 투덜거리며 멀어져가는 말란의 등판을 쏘아보았다. “어휴, 등신.” 루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란이 떠나고 조용한 점심식사 시간을 마저 만끽할 수 있게 된 루덴은 만족스럽게 접시 위의 고기를 하나둘 치워갔다. 루덴과 말란의 애증어린 다툼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던 여자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말란이 앉아 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깔았다. 신문을 펴려던 루덴은 불청객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넌 또 왜?”
“야, 니들 보면 꼭 살 맞대고 사는 부부 같다?”
“……뭐? 이런 씨발! 넌 또 왜 와서 갑자기 개소리야? 제발 할 일 없으면 네 인생에 시간을 투자하세요. 한 대 처 맞기 전에 개소리 말고 아가리 좀 닥치고 있고.”
“허허, 여보세요 아저씨. 그게 누나한테 할 소린가요?”
“누나가 누나다워야 누나 취급을 해주지. 그리고 자꾸 고까운 소리로 화를 돋우려는 거면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을 거다. 정말 잘 통하는 상태라 잘못하면 진짜 한 대 맞는다.”
“예, 예. 잘 알아들었구요.”
루덴은 능청맞은 유미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최소한 식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기를 바라며 루덴은 스프를 향해 수저를 들이밀었다.
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덴을 더 짜증나게 했다. 루덴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루덴은 목이 턱 막힌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는 유미를 바라보았다. 저 골치 아플 정도로 신경을 거스르는 시선을 치워야 밥이 넘어갈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뭐, 왜?”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있잖아. 이건 내가 주워들은 얘긴데…….”
“망자가 끄는 수레에서 날 영입하러 오지 않았냐고?”
유미는 눈을 빛내며 루덴을 쳐다봤다. 루덴은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주물렀다.
“아니, 너희 진짜 할 일 없어? 뭔 지나가는 놈들마다 다 물어봐? ……아, 말란은 안 그랬네. 다시 보니 선녀 같네. 아니야. 아니라고! 좀!”
“뭐? 야, 내가 들은 바로는…….”
“당사자의 말보다 소문이 더 믿음직하다? 그것 참, 언제부터 이 업계가 이렇게 신사의 품격을 내다버린 건지. 설령 그쪽에서 연락을 해왔더라도 돈을 안 받고 일하는 건 내 적성이 아니야. 신사다운 모습을 유지하는 데는 품성뿐만 아니라 돈도 필요해.”
“그놈의 신사, 신사. 아가리에 걸레를 물고 있는 시점에서 신사랑 거리가 한참 멀죠? 그리고 평민인 네가 아무리 개지랄을 해도 귀족도 아닌데 누가 알아줘?”
“남들 시선에 뭘 그렇게 민감하게 구는지……. 내가 하고 싶고, 그렇게 되고자 해서 하는 거지 누구 보라고 하는 게 아니야. 아시겠어요, 누나?”
“네 똥 굵다.”
루덴은 이제 정말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얼굴로 유미를 바라보았다. 유미는 지친 얼굴로 손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식사를 마무리하려던 루덴은 식당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려니 하고 구운 고기를 자르지도 않고 그대로 들어 씹어 먹었다. 그러던 중 느닷없이 코를 찌르는 악취에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루덴은 아직 많이 남은 음식들을 바라봤다.
루덴은 문득 한 조각 남은 고기를 먹으려다가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고기를 내려놓았다. 이 냄새의 근원이 무엇인지 몰라도 확실하게 식욕을 거두는데 성공했다. 루덴은 오늘 하루에만 악재가 겹친다고 생각했다. 그는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두리번거렸다. 가능하다면 방해받은 점심에 대한 보상도 요구할 생각이었다.
가게를 두리번거리던 루덴은 깜짝 놀랐다. 떠들썩했던 가게는 어느새 한 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루덴 못지않게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루덴은 이토록 유쾌하지 않은 내새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냄새는 활짝 열린 가게 문에서부터 봄바람을 타고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턱에는 말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더럽거나 지저분하다 보기에는 어려운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 서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쓴데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루덴은 가게의 문을 붙잡고 선 왼손이 붕대에 감겨 있는 걸 봤다. 몸에 맞지 않는 큰 치수의 로브였기에 오른손은 소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따.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상태에서 그가 말했다.
“기, 길잡……, 이. 마, 망자가 끄, 끄는…….”
굉장히 작고 웅얼거려 알아듣기 힘들었다. 가래 끓는 소리가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는 아무래도 남자 같았다. 루덴은 점점 심해지는 냄새에 더 참지 못하고 코를 막았다.
방금 전 말로 미루어 볼 때 저 사람은 길잡이들을 찾으러 왔다. 루덴은 망자가 끄는 수레를 찾는 이에게 흥미를 잃었다. 물론 냄새 때문에 완전히 관심을 끄기는 어려웠다.
하루에도 저렇게 몇 번씩 망자가 끄는 수레의 길잡이들을 찾는 사람들이 오곤 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망자가 끄는 수레의 길잡이들을 만나지 못했다. 루덴은 저 사람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망자가 끄는 수레의 길잡이들은 정말 유명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을 본 적이 없다. 루덴은 피식 웃었다. 당연하다. 그들은 나서서 자신이 그곳의 일원이라 밝히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가 원하는 대상에게 알게 모르게 다가간다. 그게 아니라면 어딘지 알 수 없는 망자가 끄는 수레라는 곳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루덴은 지갑을 꺼내 식탁에 팁을 내려놓았다.
점차 사방에서 비난과 욕설이 하나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내 가게에 있는 모든 손님이 소리를 높였다. 로브를 입은 사람은 힘겹게 목에 걸린 뭔가를 꺼내려 했다. 허나 그들의 강도 높은 힐난에 그의 손이 멈췄다. 잠시 행동을 멈췄던 그는 굉장히 당황한 듯 다시금 목 언저리에 붕대가 감긴 왼손을 가져갔다.
루덴은 왼손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섬세함과 거리가 먼 목각인형 같은 움직임이다. 그 또한 실수를 깨달았는지 뒤늦게 오른손을 목 가까이 가져갔다.
루덴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드러났던 오른손의 끔찍한 모습에 놀랐다. 그가 흥미를 느낄 즈음 웬만한 범죄자들은 우습게 때려눕힐 것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식당 주인이 그의 모습을 가렸다. 루덴은 언제 봐도 타인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발트겐의 덩치는 위압적이라고 생각했다.
가게의 주인이자, 요리사인 발트겐은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저희 가게에 방문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곳 ‘짐승 한 마리’는 가게 주인이자 요리사인 저, 발트겐 슈리마가 운용하고 있는 식당입니다. 저는 이곳을 어떤 손님이 되었든 최대한 즐겁고 맛있는 식사를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차렸습니다. 그렇기에 가능하다면 차별 없는 대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제 가게의 방침과 소신대로라면 손님 또한 정중히 모셔야 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외람되게도 현재 손님에게서 나는 좋지 않은 냄새로 다른 많은 분들이 식사를 방해받으셨습니다.
분명 굉장한 실례입니다. 허나 가능하시다면 부디 지금은 발걸음을 돌려주시고, 오후 아홉 시가 넘어 찾아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발트겐의 말엔 그 어떤 경멸도 혐오도 담겨있지 않다. 오히려 그를 손님으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굉장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로브의 사내는 무언가를 말하려 하다가 고개를 더 깊이 떨궜다. 발트겐은 제대로 된 손님으로 받지 못한 그에게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그 대신이라 하기에는 부족하다 생각합니다만, 길잡이들을 찾으시는 듯해 그들에게 대신 말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전할 말씀 있으신가요?”
역한 냄새 때문에 금방이라도 식당을 떠나려던 이들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 발트겐을 바라보았다. 그의 언변은 식당 안의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중 발트겐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섰다. 그가 손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망자가 끄는 수레의 길잡이들 계십니까? 혹은 그쪽으로 가는 길을 아는 길잡이들은?”
대답은 없었다. 발트겐이 말을 이었다.
“의뢰로 찾아오셨다고 하니, 방금 언급한 두 부류에 속하신 분들 중 관심이 있으시다면 방금 전 분을 찾아가 주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지체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문에서 비켜서자 그와 함께 서 있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루덴은 제법 들뜬 마음으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점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발트겐의 신사다운 모습을 봐서 즐거웠다. 그의 발걸음은 수많은 인파가 바글거리는 거리를 막힘없이 나아갔다. 곧 쇠와 기름 냄새, 불의 열기가 느껴지는 대장간에 멈춰선 그는 머리가 벗겨진 구리빛 피부의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은 한창 때의 젊은이들 못지않게 굉장히 탄탄한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상의를 벗어 드러난 그의 어깨와 팔을 잇는 삼각근만 해도 루덴의 머리 반쪽만 했다. 그는 모루 앞의 투박한 의자에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그는 모루 위에 놓인 망치를 바라보며 허리를 두드리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영감!”
“애새끼 싸가지 하고는. 벨로소르한테 덜 맞은 게지?”
“아이고, 형님! 그 악마 새……, 크흠. 벨로소르 형 얘기는 왜 또 꺼내십니까? 이 아우가 맡겼던 갑옷 상태 좀 보러 왔습니다요.”
“누가 너 따위 새끼 형님이야? 그리고 갑옷이랑 칼을 그래 개박살을 내놓고 이틀도 안 돼서 찾아오면, 뭐 고쳐놓을 줄 알았냐? 이 개놈새끼가 칼은 아예 뿌러먹었더만? 욕 처먹을 거 생각해서 나 없을 때 맡기고 간 게지? 이런 옘병할 놈. 갑옷은 네 심장이고 칼은 네 팔인데, 아주 몸을 개박살을 내놨어 그려! 벨로소르가 그런 기본적인 걸 안 가르쳐줬을 리는 없을 테지. 암. 그놈이 어떤 놈인데. 그럼 전적으로 네놈 문제라는 건데……. 그냥 나가 뒈져버리지 그러냐?”
루덴은 눈웃음을 짓고 손을 싹싹 빌며 노인 앞에 섰다.
“아이고, 형님! 왜 또 그러십니까! 이번에 일이 조금 힘들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요. 그래도 다행히 세기의 명장, 모루와 망치의 신! 이스미르 님께서 만들어주신 갑옷과 무기 덕분에 이 아우 비루한 목숨 연장했습니다요.”
“아가리에는 꿀을 처발라놨냐? 아주그냥 그놈의 쎄빠닥은!”
“헤헤……. 아무튼 형님, 어떻게 제 장비들은 언제쯤 고쳐지는지 여쭤도 됩니까요?”
이스미르는 가까이 와보라는 손짓을 했다. 루덴은 이스미르에게 슬쩍 다가갔다. 이스미르는 한번 더 가까이 와보라고 손짓했다.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이스미르는 루덴의 구레나룻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아, 아! 아!”
“당분간은 얼씬도 말어. 벨로소르 그놈 오면 다 일러바치기 전에. 알았냐?”
“아, 형님……. 제발 그 형한테는 좀…….”
“그렇게 벨로소르가 무서우냐?”
“……굉장히?”
“그래? 그럼 모루에 잠깐 대가리만 얹어 놔봐라.”
루덴은 구레나룻을 잡힌 상태에서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왜요? 망치로 제 대가리 깨게요?”
“그래 이 새끼야!”
이스미르는 잡고 있던 구레나룻을 집어던지듯 홱 놓아버렸다. 루덴은 울상을 지은 채 이스미르에게 붙잡혔던 곳을 문질렀다.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루덴을 보며 이스미르가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이번엔 또 뭘 만났냐? 흉갑이 아주 내려앉은 걸 보면 뭐 공성추 같은 걸로 얻어맞았냐?”
“뭐, 비슷해요.”
“비슷해? 욕망의 기사라도 만난 게야?”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묻는 이스미르를 향해 루덴은 빙긋 웃었다.
“형님 실력을 의심하는 것도, 폄하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랬으면 죽었죠. 판탈라브 미궁을 돌다가 석상한테 얻어맞았어요. 의뢰인 말로는 고대 수호자라던데요. 동력핵으로 움직이는. 하여튼 고고학자 씹새끼들. 아는 척, 고상한 척 다 하면서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이것저것 처 건드리기나 하고 똥은 씨발 내가 다 치우고. 어휴 시발.”
이스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루에 대고 곰방대를 부딪쳐 담뱃재를 털어냈다.
“칼도 그놈이 깨먹은 거고?”
“아뇨. 칼은 제가 미숙해서 깨먹은 거고요. 뭔 지랄을 해도 동력핵까지 칼이 안 닿아서 좀 무리하게 힘을 줬더니 보시다시피.”
루덴은 이스미르를 향해 오른손을 내보였다. 겉보기에는 찰과상 하나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스미르는 그 상태를 알아보고 혀를 찼다.
“손만?”
“오른쪽 전부요.”
“돌아가면 벨로소르가 아니라 라일한테 뒤지게 맞겠구만.”
루덴은 땅이 꺼질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없길 바라야죠.”
“벨로소르는 당분간 없을 게다. 북부 에렌할까지 갔거든. 라일 그놈은 워낙 신출귀몰하니 있을 수도 있고.”
“형님은 복귀 안 하세요? 형들이 맨날 투덜거리던데 영감탱이만 있으면 좀 더 한가할 거라고.”
“염병하네. 못 해. 늙었어.”
“어이가 없네. 맨손으로 소 대가리 잡아 뽑는 인간을 표현하는 말로 늙었다는 단어는 정말 안 어울리는데요?”
“염병하고……. 암만 그래봐야 현역으로 뛰는 그놈들 넷만 하겠어?”
“그 형들이 좀 특이한 건데…….”
“됐고 나 죽을 때나 데리러 와.”
“데리고 가는 건 저희 소관이 아닌데요. 그리고 굉장히 실례되는 말이지만, 대체 형님은 언제 죽으신데요?”
이스미르는 루덴을 한 대 쥐어박으려 했다. 하지만 루덴이 한 발 빨리 피했다. 이스미르는 침을 뱉을까 고민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직 데려갈 마음이 없으신가보지. 하기사 토르솔도 얼마 전에 데리고 가셨으니, 내 차례는 멀었을 거다.”
이스미르는 곰방대에 담뱃잎을 채워 넣었다. 불을 붙이던 그는 문득 모루 위에 걸터앉아 있는 루덴을 건드렸다. 루덴이 자신을 바라보자 이스미르는 손가락으로 거리를 가리켰다. 이스미르가 말했다.
“아는 사람이냐? 아까부터 너 찾는 거 같은데.”
루덴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이내 끄덕였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거리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람은 유미였다.
이스미르의 대장간은 유미의 코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앞에 있는 그들을 보면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 전부가 이스미르와 그의 대장간 그리고 루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루덴은 기지개를 켜고 모루에서 내려왔다.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요, 형님.”
“평생 오지 마라.”
루덴은 피식 웃고 대장간을 떠났다. 그는 곧장 사방을 살펴보고 있는 유미의 뒤로 가 섰다. 그러고 잠깐 멈춰 서 있다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뭐하냐?”
“아 씹! 깜짝아! 너 뭐야? 안 보이던데 어디 갔었어?”
“나? 요 앞에.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근데 날 왜 찾아?”
“누나가 동생 찾는데 이유가 필요하니?”
루덴은 자신보다 한참 작은 유미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말했다.
“야, 꼬맹아. 너 돈 떨어졌냐? 미리 말해두는데, 난 절대 너한테는 돈 안 빌려준다. 아니 그 전에 빌린 거나 다 갚지?”
“누구보고 꼬마래? 이 누님이 너보다 두 살이나 많다는 걸 또 잊었나본데 다시 말해줄까?”
“쥐방울만 한 게 무슨 개소리야? 헛소리 그만하고 갈 길 가쇼. 오늘 아는 형 가게 갔다가 이것저것 해야 해서 바쁘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아는 형? 누구? 잘생겼어?”
루덴은 ‘닥치고 좀 꺼져’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장간 다음으로 가려 했던 행선지는 아는 형의 가게다. 그리고 그 가게가 루덴의 거처다. 또 그 형은 슬슬 결혼을 생각할 나이다. 거기다 제법 잘생겼다. 참 놀랍게도 유미는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 잘생기기만 하면 성격이야 아무런 상관없다고 말하고는 했다. 두 사람을 이어주면 루덴은 유미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아는 형의 의사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루덴은 자유로워지는 것만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길잡이 일을 여자 몸으로 이토록 길게 해온 사람도 유미 말곤 없지. 다들 손님이랑 눈 맞기 일쑤였으니……. 남자들이야 여자 손님이 잘 없는 것도 없거니와 눈 맞기도 전에 거리에서 칼 맞고 비명횡사하는 게 일상이니 뭐.’
길잡이들의 일은 굉장히 힘들다. 돈을 두둑하게 벌긴 하지만, 일이 있을 때 이야기다. 더욱이 돈 좋아하는 루덴마저 틈만 나면 때려 치고 싶다고 투덜거리곤 할 정도로 피곤하다. 어디가 됐든 한 번 나서면 아무리 익숙해졌더라도 몸살은 기본이고 다리가 벌에 쏘인 것처럼 부어 움직이기도 힘들다. 더욱이 의뢰인의 경호까지 전담해야하기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다.
‘보통은 마약으로 해결하지.’
마땅한 명칭이 없어 마약이라 부르긴 하나 진짜 그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약제사나 연금술사들에게 돈이나 재료를 주고 그에 준하는 성능의 약품을 만드는 것이다. 길잡이들마다 제조 방식이 다 다르다. 허나 긴 시간 잠을 안 자도 활동할 수 있게끔 해주는 ‘살리마’라는 꽃은 전부 들어간다.
잠을 안 자도 버티긴 하나 어디까지나 활동만 할 수 있게 몸과 정신을 억지로 깨어있게 하는 것이기에 후폭풍이 상당한 편이다.
가까운 거리면 마약을 복용할 필요도 없고 굉장히 쾌적하게 일을 마칠 수 있다. 허나 보통 길잡이들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다. 그것도 빠르고, 안전하고, 정확하게.
정확하게 목표지까지 가는 건 모든 길잡이들이 갖고 있는 소양이다. 다만 안전하고 빠르게 의뢰인을 보내는 건 마약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계속된 복용의 끝에는 폐인이 된다는 것에서 진짜 마약과 다를 바 없다.
상대적으로 신체적인 능력이 좋은 남자들도 폐인이 되기 십상이다. 그보다 처지는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미는 길잡이를 굉장히 긴 시간 해왔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거기다 능력은 길잡이들 중에 손에 꼽고.’
루덴은 다시금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솔직히, 잘생기긴 했지.”
“억! 진짜?”
“내가 여자였으면 바로 결혼하자 했을 걸.”
“……아니지. 생각해보니 네 심미안은 전적으로 나랑 안 맞는데.”
루덴은 유미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얼굴은 온갖 의심과 경계로 가득했다. 유미는 머리가 하나 반 차이가 나는 루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껏 네가 그런 말한 사람들 하나같이 개판이었잖아. 어떻게 믿냐?”
“허? 어이가 없네. 다들 신사답게 품격 있는 사람들이었구만 무슨? 네가 좋다고 하는 놈들 보면 무슨 기생오라비처럼 생겨가지고 비실비실한 놈들뿐이잖아!”
“야. 지랄 좀 하지 마. 그렇다고 하나같이 발트겐 같은 놈들만 소개해주는 너도 정상은 아니야. 개새야.”
“아니, 누나! 뭔 제비 같이 생긴 놈들보다 남자답고 얼마나 좋아? 근육 빵빵하지, 신사답지! 제비들이랑 비교대상이 아니야.”
“하……. 다름이라는 걸 받아들여라, 좀.”
“난 굉장히 신사적인 심미안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노망난 애늙은이 꼰대겠지, 병신아.”
티격태격하며 한참을 걸어가던 그들은 어느덧 작은 여관 앞에 다다랐다. 유미는 어디선가 본 듯하면서도 처음 보는 건물을 의아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유미는 길잡이다. 그것도 루덴이 인정할 정도로 굉장히 뛰어나다. 그리고 길잡이는 거리가 멀든 가깝든, 생소한 곳이든, 의뢰인이 정확하기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든 뭐든 길을 안내해야한다.
그렇기에 그녀와 같은 길잡이들은 매일 같이 지도와 눈싸움을 하며 독도법을 공부하고 온갖 서적들을 뒤적인다. 뿐만 아니라 한 번 지나온 길을 잊지 않으려면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이 필요하다. 루덴은 전자에 속한 것에 취약한 면을 보인다. 허나 유미는 그 두 개가 완벽하게 조합된 길잡이다.
그러니까 고작 제국의 수도, 그것도 그녀가 사는 지역에 모르는 건물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유미는 여러 생각이 떠다니는 얼굴로 루덴을 바라보았다. 허나 루덴은 마침 가게 밖으로 나온 큰 키의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피곤한 눈을 비비며 담배를 문 사내는 콧수염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양 끝이 위로 솟은 초승달 모양의 콧수염은 꾸준한 관리 덕분에 부드러웠다. 그는 자신의 다갈색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랄로프 형!”
성냥을 찾던 랄로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성냥을 찾은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몇 번 내뿜던 그는 가까이 다가온 루덴을 향해 말했다.
“팔자 좋네, 대낮부터 애인이랑 돌아다니고. 그러다 벨로소르한테 걸리면 된통 깨진다.”
“누가? 내가? 얘랑?”
“초면에 굉장히 무례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데 저 콧수염이 네가 말한 그 형이냐?”
랄로프는 생각보다 더 격한 부정적인 반응들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랄로프는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에 연기를 들이키다가 사례가 들려 기침을 시작했다. 안 그래도 숙취 때문에 깨질 것 같던 머리가 진짜 깨지는 듯한 느낌에 기겁하며 랄로프는 뒤늦게 상황을 수습했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루덴, 목소리 좀 낮춰줄래?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아무튼 그쪽 분은 이 멍청한 놈이랑 무슨 관계기에 여기까지 오셨소?”
유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는 뜸을 들이다 말했다.
“어……. 그러네. 어쩌다보니?”
랄로프는 부드러운 얼굴로 눈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굉장히 사나운 얼굴로 루덴을 쏘아보았다. 유미는 랄로프의 바보 같은 콧수염과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에서 제법 순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허나 지금 랄로프의 모습은 그녀가 보아 온 그 어떤 사람보다도 무서웠다. 그녀는 루덴을 바라보았다. 그 또한 겁에 질려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아니……, 다른 게 아니고…….”
“아니고?”
“그게…….”
“그게?”
“……죄송해요.”
“뭐가 죄송한데?”
유미는 금방이라도 루덴이 울음을 터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모습에 호기심이 생길 법도 했지만 루덴을 쏘아보는 랄로프의 모습이 너무 무서워서 그녀 또한 경직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형.”
“뭐가 죄송한지 말을 해. 일단 듣고 나서 내 기분에 따라 널 할디르가 지린 이불 속에 처박아버리던지, 내 손으로 팔다리를 부러뜨리든지 할 거니까.”
유미는 랄로프가 정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긴 했지만 루덴이 이렇게까지 기를 펴지 못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제국의 귀족에게도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할 말 다 하던 루덴 답지 않다. 유미는 랄로프를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랄로프는 전체적으로 제국인이 아니라 북부인을 연상케 했다. 북부인의 전반적인 특징, 탄탄한 근육질의 몸, 그리고 그 중량과 힘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는 두꺼운 골격과 큰 키가 두드러진다.
북부인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몸과 날렵한 선은 굉장히 야성적이었다. 그 야성적임을 강조하는 듯 매서운 눈매와 끝이 휘어진 눈썹은 눈 밑의 짙은 그림자와 더해져 굉장히 위압적이다.
유미의 관찰이 끝나갈 즈음 랄로프는 루덴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랄로프는 제국에서 보기 드문 2미터를 넘는 신체에서 나오는 힘을 이용해 루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딴에는 살살한 것이지만 루덴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랄로프가 꽁초를 버리며 말했다.
“넌 할디르의 오줌 지린 이불 행이다. 들어가.”
“아……, 제발…….”
“여기서 손 들고 서 있을래, 아니면 오줌싸개 이불이나 빨래.”
“이불 빨개요…….”
“가서 3층 청소도 해라. 그 양반 안 들어온 지 삼 년이 넘어서 먼지가 한 가득일 거다.”
루덴은 시무룩하게 늘어진 채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가 문을 반쯤 열었을 때 랄로프는 느닷없이 루덴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루덴이 화들짝 놀라 랄로프를 바라보았다. 랄로프는 가게 안을 슬쩍 쳐다보곤 루덴을 밖에 세웠다.
“깜박했다. 손님 있다. 그냥 손 들고 서 있어.”
“아…….”
울상을 지은 채 루덴은 두 팔을 머리 높이 들었다. 랄로프는 유미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처럼 오셨으니 간단한 음료라도 드시겠소?”
유미는 다시 순하디 순한 얼굴로 돌아온 랄로프를 멋쩍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랄로프는 그녀를 건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창고로 안내했다.
밝은 밖과 달리 여관의 안은 무척 어두웠다. 그래도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밖에서 랄로프가 루덴을 혼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는 손등을 위로하고 손가락 사이에 귀족의 금화를 끼워 손가락 사이사이로 넘기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조금 시끄러워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칙칙하기만 해선 우울할 뿐이니까요. 우리 중 누구도 그런 분위기를 선호하지는 않기도 하고요.”
굉장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어진 상대의 목소리는 기괴했다.
“신경 쓰지 않네.”
마치 동굴에서 말하는 것처럼 굉장히 울리는 소리였다. 굉장히 음침하고 사악한 느낌이 물씬 풍기기까지 한다. 금화를 가지고 놀던 남자가 집게와 가운데손가락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그는 그것을 탁자에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그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금화를 지켜보았다.
“당신들도 돈을 가지고 다니긴 하는군. 관심이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남자는 귀족들의 화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젠 이런 것에 눈이 멀지 않죠. 다만 필요해서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삶에 돈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요.”
남자는 상대방의 반응을 기대하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였다. 이후 그들은 침묵했다. 남자는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금화를 붙잡아 다시금 회전력을 불어넣었다. 남자가 말했다.
“그래서, 찾는 이가 누굽니까?”
“아직 말 할 수는 없네. 눈치 챌 테니까.”
“이상한 기시감이군요. 아까도 똑같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러니 다시 묻겠습니다. 그럼 왜 찾아오셨습니까? 아무리 우리들이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개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대화가 끊겼다. 남자는 턱을 어루만졌다. 일을 맡기러 찾아와놓고 상대방에 대한 걸 일체 공유하지 않으려 한다. 굉장히 역정을 낼 법한 상황이지만 남자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상대에 대한 걸 공유하는 순간 혹은 그에 준하는 걸 입 밖에 내는 순간 상대가 알아차릴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그 정도로 파급력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기적의 밀데트? 밀데트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높지. 그에 대한 걸 입 밖에 내기라도 하면 바로 알아챌 테니. 하지만 아닐 거야. 밀데트는 누가 찾는다고 피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혹시 반신 플랑드웰? 어림도 없지. 만나려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데다가 애초에 그쪽은 언제나 이들을 쫓고 있고, 맞닥뜨리면 반드시 도망가야 하니까. 거기다 플랑드웰은 밀데트 같은 능력이 없어. 있었다면 진즉에 이들 전체를 도륙했겠지.
그럼 누굴까……? 새벽의 칼? 그럴…… 듯하지만, 글쎄……. 자일리아프도 그런 능력은 없지. 이쪽도 소재를 찾기 힘들지만 굳이 우리를 찾아올 정도로 꼭꼭 숨어 있는 건 아니고. 혹시 저주의 묘비 아르펠? ……방방곡곡 자기 위치를 알려대는 남자를? 아니면 어스름 꽃 알트레아?
제법 추측하는 재미가 있는 걸. 아! 베르엘일지도 모르겠어. 그 사람의 얼음이라면 얼리지 못할 게 없을 테니. 좀 무리한다면 태양을 가릴 수도 있을 정도니. 그런데…… 베르엘은 누가 찾는다면 곧장 좋은 거 없나 하고 오곤 하는 사람이니…….
쿼드리치? 그 미치광이 영감은……, 아니겠군. 제이나? 거짓이 딱 붙어 있어서 찾는다면 바로 알아낼 것이고, 아무리 이 사람이라 한들 다가가기 어렵긴 하겠지. 하지만 거짓이 그토록 대단하다지만 이 사람이면 그 정도 방해는 거뜬할 거고, 무엇보다 굳이 내가 필요한가?’
남자는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여긴 남자는 아직도 멈추지 않고 돌고 있는 금화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던 중 로브의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예르하 네일.”
남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방을 쳐다봤다. 뜻밖의 이름이 나올 거라 예상했지만 이건 예상을 한참 넘어섰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의뢰인이 말하기를 주저한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가 내뱉은 이름은 세상에 단 둘 밖에 없는 현자 중 하나다.
많은 길잡이들이 예르하 네일과 또 다른 한 명의 현자를 찾으려다가 포기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느낄 수 있다.
누가 자신을 찾는지, 누가 자신을 언급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듣고, 느낀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전해지는 현자들은 언제나 수많은 이들에게 쫓긴다. 그렇기에 길잡이들마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꽁꽁 숨어버렸다. 심지어 그 밀데트마저 현자들을 찾는 걸 포기했을 정도다. 이 의뢰인은 그토록 장막에 가려진 이들 중 한 사람을 찾고자 한다.
라일은 정말 오래간만에 흥미를 느꼈다. 재미있다. 누구도 찾아낸 적 없는 현자.
‘누구도? 그건 조금 잘못 됐지. 지금까지 현자를 만난 사람은 제법 많아. 다만 의도적으로 찾으려 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나지 않지. 우연이라면 현자 또한 그 만남을 피하지는 않았어.’
그저 평소처럼 지나가듯 사람들의 입에 자신의 신상에 대한 것이 오른 것이라면 현자는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의뢰인은 평범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현자에게 위해를 끼칠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존재다. 남자는 굉장히 흥미롭다는 얼굴로 의뢰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의외군요.”
“덕분에 나도 상당히 곤란한 처지가 되었네. 조심스레 접근하려 했지만, 보기 좋게 내가 찾고 있다고 광고를 하고 말았네. 내가 찾는다는 걸 알게 됐으니 지금부턴 필사적으로 숨으려 할 것인데, 당신이 내 의뢰를 받지 않는다 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어.”
“걱정 마십쇼. 이름까지 물어봤다는 건 거절할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남자는 씩 웃으며 힘이 빠져 쓰러지려하는 금화를 집게손가락으로 눌렀다. 탁 소리와 함께 창문을 가리던 커튼이 전부 젖혔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드는 사내를 주시했다.
달 없는 밤하늘처럼 새까만 로브의 색감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후드 안쪽으로 보여야 할 사람의 얼굴은 없었다. 사람의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오직 검붉은 어둠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어둠은 질량을 가진 무언가처럼 후드 안쪽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안개처럼 보일 저 ‘검붉은 것’을 갖고 있는 존재는 제법 많다. 그리고 다들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육체의 한 면을 먹고 그 자리에 눌러 앉는다. 저건 오직 욕망에 굴복한 삶을 사는 이들만 갖고 있다.
배덕의 주, 천칭의 좌, 규율의 루. 모든 욕망의 기사들만의 상징이자, 저주다.
욕망의 기사가 말했다.
“아……, 그것 참 당신들에게서 나는 코를 간질이는 향만큼 달콤한 말이로군. 여기까지 오는 위험을 감수한 보람이 있어. 그렇다면 잘 부탁하지, 라일 아쉬칸디. 나를 부디 현자의 곁으로 안내해주게.”
라일은 검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웃었다. 상대방의 만족감이 넘칠 정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라일은 라일락 같은 보랏빛 눈동자로 욕망의 기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원래 큰형님을 뵈러 온 건데, 저로 만족하십니까?”
“그분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지. 아니지…… 우리 같은 존재들에게 국한된 이야기로군.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네. 벨로소르나 가로우가 있기를 고대하며 왔었지. 그들이라면 날 현자의 그림자라도 밟게 해주었을 테니.”
“그런데 도착해보니 형만 한 아우 없다고, 제가 있었군요.”
“그렇지.”
“랄로프한테 같이 가자고 하진 않으셨습니까? 오히려 현자를 쫓는데 있어서는 저보다 랄로프가 더 뛰어날 텐데요.”
“우문이군.”
“하하! 예, 우문이죠. 랄로프는 비번이니까요. 아무튼 서로 횡재했군요. 마침 저도 정비가 끝나 새 일거리를 찾아 나가볼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우연도 흔치 않죠. 어째 운수가 제법 좋을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마음이 맞는 건 흔치 않은 일이지. 또한 좋은 징조이기도 하고. 아……, 이것 참.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군.”
라일은 빙긋 웃었다. 그는 당신들은 심장 대신 그 안에 다른 것이 들어 있지 않느냐고 되묻지는 않았다. 그에 대해 언급하는 건 굉장히 무례한 짓이다. 더욱이 그들의 심장 대신 들어 있는 것은 베르엘에게 플랑드웰을 중개해주며 진절머리 나도록 보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형체를 가진 것들. 라일은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현자를 찾는 건 제 일이죠, 그렇담 그 뒤에 무슨 일을 하실 건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길잡이들이 의뢰인에게 이유를 묻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지.”
“아, 물론 대답하기 싫으시면 침묵하셔도 됩니다. 괜한 호기심으로 일을 그르치는 건 많이 봐 왔죠. 제가 그 선례를 밟고 싶진 않군요.”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네. 그러니 즐거움은 뒤로 미뤄주지 않겠나?”
“그러도록 하죠.”
“그럼, 언제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지? 아……, 재촉하는 것처럼 들린다면 부디 그런 게 아니라고 알아줬으면 하네.”
“알고 있습니다. 일은……, 빠를수록 좋겠군요. 늦을수록 현자를 찾긴 어려워질 테니. 잠시 기다리시겠습니까? 필요한 거 몇 가지만 가지고 오도록 하죠.”
“아, 고맙네.”
“그럼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데솔런트.”
데솔런트라 불린 욕망의 기사는 라일을 한참 쳐다보았다. 라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니네. 이름으로 불려본 게 참 오랜만이라서.”
“아, 참. 그럼……, 익숙한 걸로 불러드리는 게 낫겠군요. 배덕의 주? 욕망의 기사? 뭐가 더 편하십니까?”
수많은 욕망의 기사들이 있다. 그들 중 사악하기 그지없는 성향을 가진 이들, 단언컨대 최악이라 부를 수 있는 욕망의 기사 일곱 명을 배덕의 주라 부른다.
규율의 루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배덕의 주. 그 안에서도 데솔런트는 반대쪽의 질서처럼 사악한 욕망을 가진 모든 기사들의 정점이다.
“증오.”
한적한 모습을 찾기 힘들던 낮과 달리 수도의 밤은 무척 한산했다. 빛이 없었다면 을씨년스러웠을 것이다. 다행히도 제국의 수도를 상징하듯 빼곡하게 들어찬 건물들에서는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더해 거리에는 가로등이 수놓아져 밝지 않은 곳보다 어두운 곳을 찾는 게 빠를 정도였다.
다른 때라면 제국의 수도, 아페프라드에는 늦은 밤에도 사람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다만 최근 사람들이 연달아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들 다음 희생양이 되는 걸 원치 않았기에 해가 지고 밤이 깊어오면 자연스럽게 집에서 나오지 않게 됐다.
그렇게 잠잠해지는 듯했던 살인사건은 수도의 바로 옆 도시, 리아프라드에서 다시금 시작됐다. 긴 시간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소극적으로 대처할만 한 사항을 넘어섰다 판단한 황제는 수도를 포함한 인근 12개의 대도시에 통금령을 내렸다. 또한 제국의 정규군과 귀족들의 기사단을 적극 파견해 최고 수준의 경계태세를 취했다.
흉흉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범죄 조직들은 밤에도 활동했다. 허나 이 통금령 이후로 12개의 도시 전부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일말의 틈조차 내주지 않았다. 시민들은 무장경찰과 제국의 정규군, 귀족의 기사단에게 잡혀 끌려가 송장이 되느니 가족들과 밤을 보내는 걸 택했다.
정규군과 기사단이 경계를 서고 경찰들이 수색을 한다. 제국은 수도를 떠들썩하게 한 살인범을 잡기 위해 어마어마한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다. 허나 살인범 또한 위기감을 느끼고 깊이 숨어버렸기에 진척은 없었다.
오랜 시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로제는 이러한 소식에 굉장히 무관심했다. 아니, 무관심이 아니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는 게 정확하다. 로제는 조심스럽게 왼팔을 움직여보았다. 여전히 고통이 느껴진다. 그리고 여전히 섬세하게 움직일 수가 없다.
뼈와 신경만을 남기고 발라낸 팔은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 고통 받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 ‘저주’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달군 쇠로 지지는 듯한 감각은 엘로이지의 도움으로 수많은 바늘이 찌르는 듯한 느낌으로 변했다.
확실히 몸 구석구석의 고통은 줄어들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지고 죽고 싶단 생각으로 가득한 나날이었다. 마침내 그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일시적이라 해도 충분히 기뻐해야할 상황이다. 하지만 로제는 아무것도 변한 건 없다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증언했듯, 이 저주는 풀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설령 욕망의 기사들이 저주를 풀어준다 해도 그녀의 망가진 육체와 깨져버린 마음이 과거로 돌아가진 않는다. 저주가 풀리면 로제는 그 자리에서 죽을 뿐이다.
설령 모든 해악에서 벗어난다 한들 고통의 기사는 다시금 그녀를 찾아오리라.
진즉에 끝났어야할 목숨을 여기까지 연장해준 저주가 증오스럽다. 허나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 이 덕분에 어떻게든 살아 세계를 돌며 생명수의 존재를 알게 됐다.
가능하다면 살해당한 모든 아슬레아의 사람들에게 쓰고 싶다. 하지만 그날 아슬레아를 습격한 욕망의 기사들은 모든 사람들을 뼛가루조차 남기지 않았다. 로제에게 남은 건 동생의 두개골뿐이다. 나머지 신체는 고통의 기사가 그녀의 정신을 완전히 박살내기 위한 제물로 쓰였다.
동생은 산채로 토막난 채 돼지우리에 던져졌다.
그 날이 저주에 걸린 날이다.
아직도 그 남자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잊히지가 않는다. 로제는 뒷골목의 쓰레기장에서 몸을 웅크린 채 두려움에 떨었다. 몸이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분명 쉼 없이 토악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잠시라도 그 날이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망가진 몸은 오직 고통과 공포만을 더한다.
“제발, 좀! 이 미친 잡종새끼야! 말 좀 들어!”
쓰레기장 근처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가 내린 통금은 오후 10시 이후다. 그렇기에 지금 사람이 돌아다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로제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수도뿐만 아니라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천대받고 멸시 받던 기억 때문에 잔뜩 움츠린 채 쓰레기 속에 몸을 파묻었다. 그녀는 발트겐이 오라 했던 아홉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며 사람이 떠나길 바랐다. 그러나 목소리는 점차 가까워져왔다.
“에이, 씨발. 너 대체 왜 이래? 뭐가 문제야? 이 새끼야, 말 좀 해! 평소에는 닥치고 있으래도 뚫린 입이라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던 새끼가 대체 왜 입 꾹 닥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냐? 하. 아무리 너랑 나랑……. 야, 야! 그만 가! 씨발, 진짜! 어디야 여긴 또? 아니 씨……. 쓰레기장이잖아 염병할 새끼야! 이미 늦어서 다 털어갔을 건데 뭐 하러 왔어!”
로제는 귀를 막았다. 오른손은 그나마 살점이 붙어 있어 소리를 막아 줬지만 왼손은 아니었다. 그녀는 조용한 저녁에 시끄럽게 울려대는 저 소리가 너무 싫었다.
“……이쯤 했으면 왜 이러는지 제발 설명 좀 해줄래?”
로제는 어느덧 목소리 말고도 몇 개의 소리가 더 들린다는 걸 깨달았다. 하나는 말과 같은 동물의 발굽 소리였고, 하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바퀴가 잘 정비된 도로를 구르는 소리였다. 로제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어둡고 온갖 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는 이곳에서 숨어 있는 사람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허나 불안했기에 로제는 자신을 가려줄 것을 찾아 주변을 살폈다.
“휴. 난 모르겠다. 갈 테니까 알아서 볼 일 보고 와라.”
순간 비명 소리로 착각할법한 소리가 들렸다.
“끼에에에엑! 끄어어어억!”
로제는 소리가 쓰레기장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쓰레기장의 입구 쪽에서 말 한 마리와 사람 한 명을 발견했다. 허나 자세히 보니 다 크지 않은 말인지 제법 체구가 작았다.
“……깜……, 짝이야. 입 꾹 닥치고 있다가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뭐. 뭐 어쩌라고? 네가 그렇게 노려보면 뭐! 눈깔을 확 그냥!”
말로 추정되는 동물이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까처럼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사람은 그 동물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 대칠 것처럼 손을 들어올렸다.
“이 새끼가……, 확 그냥! 아니면 뒈진다 진짜.”
또 다시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사람이 자신의 이마를 퍽 소리 나도록 때렸다.
“시발. 맞네, 참. 왜 이러고 있으면 기억에 하자가 생기는지 모르겠네. 노망? 이 새끼가 뒤질라고. 팍 씨!”
이번에는 비명 같은 소리 대신 평범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는 투덜거리며 횃불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주변이 밝아졌다. 그제야 로제는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발이 인상적인 큰 키의 사내가 수레를 끌고 있었다. 그 곁에 흰 털을 가진 노새가 있었다. 그들은 머리와 털색 때문에 늙었다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사내는 투덜거리며 담배를 꺼내 물고 횃불로 불을 붙였다. 사내는 불이 옮겨 붙지 않게 조심하며 쓰레기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 손엔 횃불을 들고, 다른 손엔 담배를 쥔 채 한참 쓰레기장을 뒤지던 사내가 한탄하듯 말했다.
“야, 그냥 랜턴 살까? 생각보다 쓰레기장에서 쏠쏠하게 건지는 거 같은데 이러다가 불이라도 옮겨 붙으면 완전 좆 되는 거잖아. 그날로 우리 북부로 튀어야 돼.”
사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점차 로제가 숨어 있는 곳으로 나가오기 시작했다. 사내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혼잣말을 했다.
“아니……. 범죄자 하나 때문에 설마 전쟁이라도 나겠냐? 뭐? 다, 당연히 방화에 희생될 생명은 신경 쓰지. 아, 고려한다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쥐새끼마냥 살금살금 하는 거 아냐? 랜턴으로 바꾸자는 게 괜한 소리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기름 값? ……열심히 일 해야지. 뭐? 아니 시발, 야! 한 끼만 줄여도 충분……. 네가 그렇게 고급진 걸 처먹으니까 항상 지갑이 비지 이 잡종새끼야! 제발 그놈의 입맛 좀 어떻게 해봐! ……알아, 안다고. 아니 그렇다고 풀떼기 못 먹냐? 맨날 고기만 처먹지 말고 풀 좀 아가리에 집어 넣어봐 제발! ……싫으면 뭐 어쩔 건데? ……야, 야!”
쓰레기를 뒤지던 사내는 벌떡 일어나 노새를 쳐다봤다. 노새는 콧김을 한 번 내뿜어주곤 고개를 홱 돌렸다. 사내는 노새를 향해 횃불을 집어던지려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간신히 붙잡았다. 사내는 입술을 꽉 깨물고 부릅뜬 눈으로 노새에게 삿대질했다.
“너……, 자꾸 그렇게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나도 방법이 있다. 어때? 이제 좀 위기감이 들지? 솔직히 내가 궂은일은 다 하니까 랜턴은 양보하자, 응? 아, 처먹는 양을 줄이라고! 그거 다 처먹어서 어디다 쓰게? 쓸데도 없잖아. 기호식품?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아무튼 너 당분간 풀이나 뜯어. 알겠냐? ……아니 씹……. 알았어. 나도 담배 줄일 게.”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시 쓰레기장을 뒤졌다.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녔지만 원하는 걸 찾지 못한 사내는 곧게 서서 찌뿌듯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사내는 허리를 두드리며 횃불로 주변을 비췄다. 사내는 자빠지는 걸 방지하려고 발밑을 꼼꼼히 살피며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야, 없는데? 여기 맞아?”
“끼에에엑! 끄어어어억!”
“어우, 염병할 놈. 알았어, 알았다고. 에휴. 뭐한다고 저런 개새끼가 따라간다고 할 때 ‘응, 꺼져’라고 한 마디 못 했냐 등신아. 그냥 콱 도축장에 팔아버릴까? ……그럼 개지랄할 테니 그건 안 되겠네.”
사내는 쓰레기들 사이에 껴있는 사람의 발을 발견했다. 순간 흠칫했지만 이내 핏 웃고 눈을 비볐다.
“이젠 헛것이 다 보이네. 이게 다 저 미친 새끼 때문이라니까. 틈만 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뜯으니 쯧……. 이러다 진짜 정신병 걸리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러면 어떡하지? 흠……, 어차피 이 생활도 슬슬 막바지라 이제 돌아가야 하는데 정신병 걸려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지도 몰라.”
사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횃불을 가까이 끌어온 순간 로제와 눈을 마주쳤다. 사내의 푸른 눈과 로제의 붉은 눈이 맞닿았을 때, 사내는 소리 질렀다.
“엄마야!”
황급히 도망치려던 사내는 당황한 탓에 뭔가에 다리가 걸려 단말마와 함께 볼품없이 나자빠졌다. 넘어지며 턱을 세게 부딪쳤기에 사내는 기절했다. 그러나 놀랍도록 뛰어난 회복력을 통해 금세 정신을 차렸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떠올리기도 전에 그의 귓가에는 노새 특유의 비명 같은 울음이 들려왔다.
“끄아아악!”
“……그래. 놀려라, 놀려. 내 턱주가리 또 깨졌다.”
사내가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아직 띵한 머리와 흐릿한 눈으로 쓰레기장에 옮겨 붙은 불을 바라보았다. 자빠지면서 횃불을 놓친데다가 잠깐 기절한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변에 보이는 물건을 전부 집어던졌다.
“으악! 씨발!”
그리고 후회했다. 당황한 탓에 오히려 불에 땔감만 주게 된 꼴이었다. 사내는 점점 커지는 불길을 어떻게든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뒤늦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 불길에 집어던지곤 마구 짓밟았다. 허나 첫 조치를 잘못 취한 덕에 상당히 몸집이 불어난 불은 고작 외투 하나로 감당할 수 없었다.
더는 방법이 없다. 사내는 커져가는 불길을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부득이하게 벌어진 일이라지만 이 결과는 빼도 박도 못하는 범죄자 신세다. 몇 번 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이 불이 쓰레기장을 전부 태워버린다면, 그 크기는 정말 거대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법에 의해 단순 방화가 아니라 살인을 가정한 범죄가 된다. 그는 생각했다. 이대로 제국 병사들에게 끌려가 감옥에 갇히느냐, 아니면 도주하느냐. 사내는 이딴 생각을 한 자신을 정말 멍청이라고 여겼다. 그는 고민도 않고 쓰레기 더미 속의 로제에게 다가가 말했다.
“수, 수, 수, 순전히 제, 제 잘못이긴 하지, 하지만, 여기……, 여기 계시면 위험합니다. 어서 도망치시…….”
불길이 번지며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어쩔 줄 몰라 말을 더듬던 사내는 그 불빛을 통해 로제의 가려진 얼굴을 보았다. 로제는 사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에게선 흔한 혐오, 경멸의 시선이 아닌 정말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너……, 어떻게 살아 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두방정을 떨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아닌 듯 굉장히 진중한 얼굴이었다. 사내는 로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로제는 이 남자를 모른다. 허나 그는 그녀를 아는 듯했다.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던 사내는 이내 로제의 얼굴에 떨리는 손을 갖다 댔다.
사내가 말했다. 그러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듣는 언어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처럼 노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인정하마. 이쯤 되면 안 할 수가 없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사내가 그녀의 왼손을 붙잡았다. 로제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로제는 그에게 떨어지라고 말하려 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불길 때문에 점점 등이 뜨거워진다. 로제의 상태를 살피던 사내는 점차 다가오는 불길을 슬쩍 곁눈질했다. 사나운 기세로 덩치를 불려가는 저 불길은 곧 이 쓰레기장을 전부 먹어치울 것이다. 사내 자신도 휩쓸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불길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한시가 바쁜 상황에서 사내는 로제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제 실수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불 끄는 게 힘들 거 같아서 도망치렵니다. 저랑 같이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쩌실래요? 같이 가실래요?”
어차피 불에 타버려도 죽지 않는다. 거절하는 게 옳다. 로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끔찍한 몰골의 로제의 모습에 눈을 찌푸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카빈과 엘로이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인지 왼손을 붙잡고 있는 남자의 손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이 따스함은 분명 착각이다. 피부도 없고, 근육도 없으며 오직 뼈와 고통만을 전달하는 신경이 남아 있는 손으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오직 고통만이…….
따뜻하다.
로제는 손으로부터 느껴지는 훈훈함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온기는 그녀가 매일 같이 그리던 것이다. 그 따스함이 독하게 굳어버린 마음을 두드린다.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그런 그녀의 주변 쓰레기들을 치웠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로제를 두 팔로 안았다.
부서질 것처럼 약하고, 기형적으로 가볍다. 분명 부패한 냄새가 올라올 터인데 사내는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는다. 그는 불길을 가로질러 노새와 수레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수레에 로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노새가 울었다. 이번엔 평범한 말들의 울음소리였다. 사내는 피식 웃었다.
“아가리 해, 아가리.”
수레에서 내려온 사내는 가만히 앉아 있는 노새를 째려봤다. 그는 노새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노새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사내가 불길을 향해 턱짓했다. 노새는 거친 콧김을 내뿜고 어딘가로 걸어가 버렸다. 사내는 노새의 뒷모습을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쏘아본 뒤 로제를 태운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단다! 어서 밥을 내 오거라!”
저녁 아홉 시가 되어 가게를 정리하고 있던 ‘짐승 한 마리’의 주인 발트겐 슈리마는 환하게 웃으며 들어온 손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이를 먹어 하얗게 센 듯한 백발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허나 그런 하얀 머리와 달리 사내는 젊었다. 발트겐처럼 서른 초반의 한창 때의 사내로 보였다.
그는 칙칙한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탁한 색상인데 눈 밑의 그림자와 어우러져 초췌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굉장히 의욕 없는 사람처럼 눈썹이 눈과 한참을 떨어져 있었다. 발트겐은 사내의 눈을 보며 얼마 전 자신이 냉동고에서 꺼내놓고 깜박해 썩어버린 동태 눈깔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사내의 얼굴과 몸 곳곳에 묻은 검댕이 그러한 효과를 더했다.
눈을 제외한 얼굴의 다른 부분은 사내다움이 풍긴다. 눈만 가려놓고 보면 참 매력적인 남자이나 그놈의 눈깔이 매력을 전부 까먹는다. 발트겐은 사내를 전체적으로 살폈다.
발트겐보단 작지만 제국인 치고는 큰 키를 가졌다. 북부인에 가깝지만 2미터를 넘기진 않는다. 늘어진 티 아래로 보이는 피부는 하얀색에 가까웠다. 그러나 드러난 얼굴과 팔 같은 곳은 살짝 그을려 누런색을 띤다.
사내의 몸은 굉장히 다부졌다. 어깨는 발트겐만큼 넓었고, 늘어진 티 사이로 갑옷처럼 단련된 대흉근이 보인다. 드러난 팔은 긴 시간 단련에 힘쓴 사람처럼 두껍고 멋들어지게 갈라져 있었다.
발트겐은 사내의 얼굴을 가리켰다. 사내는 자신의 얼굴에 손을 갖다 문대본 뒤 그것을 눈앞에 갖다 댔다. 그의 손에 검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사내는 멋쩍게 웃고는 검댕을 닦아내려 티를 붙잡아 올렸다.
발트겐은 사내의 복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사내의 복근은 좌우대칭이 완벽하게 맞았으며, 그 크기도 일정했다. 옷으로 검댕을 닦느라 슬쩍 드러난 갈비뼈를 보호하는 외복사근의 모습 또한 우아할 정도였다.
저토록 완벽한 근육의 모습을 본 건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발트겐이 본 그들은 모두 병장기를 다루는 사람이었으나, 저 사내는 아니었다. 그의 손은 굳은살이 깊게 박혔으나 병장기에 의한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퍽 지저분했고 손가락 끝이 조금씩 갈라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병장기를 다루는 사람이 아닌,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발트겐은 식탁을 닦던 행주를 내려놓았다. 그는 인상과 달리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외상값부터 청산해주시겠습니까?”
얼굴에 묻은 검댕을 문질러 잔뜩 번진 백발의 사내가 배시시 웃었다. 그는 발트겐에게 작은 주머니를 던져주었다. 발트겐은 주머니를 열어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발트겐은 주머니를 식탁에 내려놓고 사내를 관찰했다. 발트겐은 기껏 다 치워놓은 자리로 가 떼를 묻히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불의 축제는 멀었는데, 어디서 불꽃놀이라도 하고 계셨습니까?”
사내는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그럴 일이 좀…….”
“옷은 또 어디다 팔아먹으셨습니까?”
“불 끈다고 설레발치다가 홀랑 태워먹었지!”
발랄하게 말하는 사내를 보며 발트겐은 한심하다는 투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내저었다. 사내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뭐여, 왜 그런 반응이지?”
“선생님을 보면 이런 반응을 보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체통이라는 걸 가지시면 안 됩니까?”
“……얘가 또 왜 이런데?”
발트겐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가 말했다.
“이번엔 어딥니까?”
“저쪽 밑에 쓰레기장 큰 거 하나 있지? 거기.”
“규모는요?”
“나 사형수 될지도 몰라.”
사내의 말에 발트겐이 눈을 부릅떴다. 살벌한 시선에 사내는 몸을 움츠렸다. 발트겐이 단호하게 말했다.
“선생님. 아무리 제 은인이시지만, 그렇다고 사형수를 숨겨줄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만약의 상황이 발생한다면 전 단언컨대 선생님을 제국에 넘길 겁니다.”
제법 충격을 받았는지 사내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 하자 발트겐이 말을 끊었다.
“저번에도 한 번 숨겨드렸잖습니까. 더는 안 됩니다.”
으름장을 놓은 발트겐은 가게 한쪽 구석에 메달아 놓은 시계를 쳐다봤다. 그는 내려놓은 주머니를 품속에 넣고 행주를 들어 식탁을 마저 닦았다. 발트겐이 말했다.
“손님이 곧 오실 겁니다. 그러니 외상값을 내지도 않는 손놈께서는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아, 왜 그래! 우리 사이가 고작 그 정도는 아니잖아, 응? 그리고 손님이라면 내가 데리고 온 거 같은데?”
발트겐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는 입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발트겐은 짧게 콧바람을 내쉬고 문 앞에 서 있는 로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점심에 봤을 때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다만 어째서인지 머리를 아프게 할 정도였던 썩은내가 나지 않는다. 발트겐은 의아해 했다. 그는 백발의 사내를 곁눈질했다.
사내는 피곤한 듯 식탁에 엎드려 있었다. 발트겐은 매번 그럴듯한 우연을 가장하는 사내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다시 로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발트겐이 말했다.
“저희 식당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수를 위함이었다고는 하나 손님께 매우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제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에 손님께서 용서해주신다면 앞으로와 같은 시간에는 오로지 손님께서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전히 아가리는 열었다 하면 청산유수여. 아무리 기름칠하고 광 내봐야 장사 방해되니 오지 말라는 말인데. 안 그래?”
발트겐은 식탁에 엎드려 있는 사내를 째려봤다. 마음 같아서는 외상만 해대는 저 사내를 가게 밖으로 집어 던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저 사내는 감히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일을 해주고 있다. 발트겐에게 중요하지만 저 사내에게는 그저 귀찮은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단 한 번의 불평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한 대 치고 싶은 건 변함없다. 발트겐이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하고 계신 건 단순한 훼방이자 스스로를 낮추는 일이라 제가 누누이 말하지 않습니까.”
“아휴, 제가 뭘 아나요? 이 못난 놈은 그저 번지르르한 말 속에는 언제나 비수가 들어 있다는 걸 알아주십사, 해서 그런 것뿐입니다요.”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식탁에 머리를 박고 있어 그의 이마와 코끝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발트겐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 푸른 눈동자에는 서늘함이 감돌고 있었다. 발트겐은 그 시선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발트겐은 손에서 식은땀이 흐르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발트겐이 변명하려 했을 때 사내는 빙긋 웃었다. 그는 두 손을 활짝 펴 공손하게 로제를 가리켰다. 더는 할 말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발트겐은 침을 삼키고 그의 뜻대로 로제에게 집중했다.
로제는 백발의 사내와 발트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친한 듯하면서 굉장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어투 때문인지 전반적인 대화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건 발트겐이 아닌 사내 쪽이었다. 그들의 짧은 대화가 끝나자 로제는 엘로이지와 카빈에게 받았던 해골 목걸이를 꺼냈다. 발트겐은 생전 처음 보는 목걸이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로제가 말했다.
“예, 예르하 네이, 네일. 차, 찾아. 길, 길잡이, 들……, 마, 망자가 끄, 끄는 수레, 길잡이……가 아, 안다, 고…….”
발트겐은 그녀의 말을 정리했다. 그녀는 예르하 네일을 찾고 있다. 그를 위해 길잡이를 필요로 한다. 그중에서도 최고라 일컫는 망자가 끄는 수레의 길잡이들을 원한다. 그리고 이 해골 목걸이는 돈을 받지 않는 그들에게 지불할 물건일 것이다. 발트겐은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손님, 망자가 끄는 수레의 길잡이를 찾으신다면 저 선생께 물어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로제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왜 날 보냐는 투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길잡이는 아닙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일이 많은 선생이라 그들에 대한 걸 혹시 알고 있…….”
“나도 모르는데?”
두 사람은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내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채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아니, 길잡이들도 모른다며? 근데 그런 걸 수레나 끌면서 물건 옮겨주고, 쓰레기 주워서 연금술사랑 고물상에 팔아서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이 알긴 뭘 알아?”
“가끔 물건도 훔치시는 건 왜 빼먹습니까?”
“야 뭘 훔쳐! 잠깐 빌리는 거라니까? 아, 아무튼! 발트겐, 넌 정말 이상할 정도로 날 높게 평가한다?”
“……정말이십니까, 선생님?”
“뭘 그렇게 쳐다봐?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야, 인마. 내가 널 위해서 북부를 들락날락 하고 있지만, 그거랑 내가 뭔 상관이여? 북부에 일이 많아서 겸사겸사 네 일도 공짜 밥 먹으면서 대신 처리해주는 거지. 막말로 나 말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이런 특별취급도 솔직히 좋긴 하네. 엣헴.”
사내는 만족한 듯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입꼬리를 감추려 주먹을 들어 입을 막았다. 잔뜩 기뻐하는 얼굴로 헛기침을 한 사내는 씰룩거리는 입을 붙잡으며 말했다.
“엣헴. 발트겐이 이렇게까지 날 띄워주는데 이거 또 모른 척 할 수만은 없지! 꼭 그 망자……, 어쩌고 하는 살벌한 애들한테 맡겨야만 하는 게 아니라면 내가 대신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사람 하나 찾는 거야 일도 아니지!”
사내는 푸른 눈으로 로제를 주시했다. 슬며시 눈웃음을 짓는 그 모습은 여우같았다. 로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흠칫 놀라며 멈췄다. 이 남자의 도움을 받는 건 좋지만 보수로 줘야할 돈이 한푼도 없다. 그에 대해 설명하려 로제가 입을 열었다.
“뭐야, 혹시 돈 없어요?”
로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상관없는데? 요즘 시대에 돈이야 없는 게 당연한 거고. 날 보쇼! 한 푼도 없어서 밥도 맨날 여기서 빌어먹는다니까요?”
사내는 발트겐을 가리켰다.
“가끔 물건을 훔칩니다.”
“헤헷.”
발트겐은 고개를 젓고 청소를 이어 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런 발트겐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가 로제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받겠단 말은 절대 아닙니다?”
“이, 이거……. 이거 말고 주, 줄게 어, 없어.”
로제는 해골 목걸이를 내밀었다. 사내는 목걸이의 디자인이 혐오스럽단 표정을 지었다.
“으……, 그딴 거 가지고 다니면 재수털립니다. 가급적 빨리 버리십쇼. 요즘 세상에 무슨 사람 대가리를 장식으로 해놓나 몰라. 새끼들 저런 거 들고 다니다가 재수털려야 정신을 차리지. 아무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뭐, 뭘 워, 원해?”
“나는…….”
사내는 말하려는 듯 손을 들어 집게손가락을 피고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나 그 자세 그대로 얼굴을 찌푸린 채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생각해보니 딱히 뭐 없네? 나중에 필요한 거 생기면 그때 하나 달라고 하죠. 이 정도면 거래할 마음이 있으실까?”
로제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남자와는 그리 긴 시간 함께하지 않을 거야. 예르하 네일을 찾아내면 거기서 이 남자의 일은 끝나지. 빚은……, 남겠지만 글쎄. 엘레아노르 섬과 생명수의 존재만 알리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지금 저렇게 두루뭉술하게 나와도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물건을 탐내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어.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망자가 끄는 수레의 길잡이들을 만날 거란 보장도 없어. 그쪽도 내 상태를 보면 거절할 가능성이 높다고 봐. 다른 길잡이들은……, 날 호의적으로 대하진 않을 테니. 목적을 알 수는 없어도 지금은 이보다 더한 대안을 찾기는 어려워 보여.’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이제 당신은 내 손님이니 먼저 자기소개를 해야겠네. 난 리페프론트. 성은 따로 없고 말했다시피 쓰레기장을 뒤져 고물을 주워 팝니다. 원래는 인력거를 끌었지만 쓰레기장 돌아다니는 게 종일 사람 태워주는 거보다 잘 번다는 걸 깨닫고 때려쳤습니다. 퍄하! 그냥 고철 좀 주워서 그 연금술사 양반들한테 갖다 주면 돈을 더 줘! ……흠흠. 아, 아까 봤겠지만 저 밖에 있는 쌍놈은 그냥 잡종새끼라고 부르십쇼. 말 안 들으면 궁댕이 좀 발로 까주시고. 내 소개는 이쯤이면 된 것 같고, 당신은?”
“……로제.”
“반가워요, 로제. 당신은 지금 당장 출발했으면 하겠지만, 제가 너무 피곤해서 그건 힘들 거 같고……. 내일 아침 일찍 가는 걸로 하죠. 잠자리는 발트겐이 내줄 거예요. 내말 맞지?”
청소도구들을 정리하고 있던 발트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한테 선택지는 있는 겁니까, 선생님?”
“내준다네요. 제가 쓰던 방을 안내해 줄 거예요. 거기서 편히 쉬시면 됩니다.”
“나……는, 자, 잠을…….”
“괜찮습니다.”
리페프론트는 아직까지도 입구에 서 들어오지 않던 로제에게 다가갔다. 리페프론트는 후드 사이로 흘러내린 아침햇살을 머금은 듯한 연한 갈색 머리를 슬쩍 건드렸다.
“제 침대가 꽤 고급이라, 잠이 잘 올 겁니다.”
밝게 웃으며 로제를 지나친 리페프론트는 어두운 거리로 나아가며 말했다.
“역시 밤공기기 신선하고 좋네요.”
수도는 아침 해가 뜨기 전부터 굉장히 분주했다. 통금령 때문에 제때 신문을 배달하지 못한 배달부들이 바쁘게 뛰어다닌다. 신문사에서 고용된 길잡이들은 배달부들을 최적화 된 길로 안내해 시간 절약을 돕는다.
도시 곳곳에서는 빵을 굽고 스프를 끓이는 구수한 냄새가 퍼지고 있다. 그 사이에 고기 냄새도 섞여 맡는 이로 하여금 허기를 돋운다. 이 냄새들을 맡을 수 있는 건 새벽부터 일을 나가는 사람이 있는 집이거나 장사를 준비하는 식당들이다. 그리고 그 식당들 중 ‘짐승 한 마리’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는 가게는 벌써부터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발트겐은 겉만 살짝 익힌 소고기를 잼을 바른 빵에 얹어 먹고 있는 리페프론트를 쳐다봤다. 리페프론트는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는 사람처럼 굉장히 우울해보였다. 보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밥맛이 뚝 떨어지게끔 한다. 발트겐은 스프를 떠먹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의 행동에 똥 씹는 것처럼 얼굴을 구기며 밥을 먹던 리페프론트가 말했다.
“웬일이냐 밥을 다 남기고?”
그러자 발트겐은 리페프론트를 슬쩍 쳐다봤다.
“제가 잠시 먹는 걸 멈췄다고 해서 그게 밥을 남기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로 물을 마시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개소리도 정성껏.”
발트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내밀었다. 빵과 고기를 잔뜩 베어 우물거리던 리페르론트는 편지를 쥐려다가 자신의 손이 더럽다는 걸 깨달았다. 대충 바지 밑단에 기름과 빵가루를 닦은 리페프론트가 편지를 들었다. 그 모습에 발트겐이 한마디 했다.
“청소 다 해놨습니다.”
“어차피 더 더러워질 건데 뭐.”
수신인도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은 편지였다. 리페프론트가 말했다.
“이건 또 어디로 보내는 건데?”
“북부 타르네일 왕국입니다.”
“돌았냐?”
리페프론트가 던지듯 편지를 내려놓았다. 제국의 국경을 넘어 북부연합까지 올라가는 건 미친 짓이다. 긴 휴전 동안 적대적 감정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전쟁 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인이 북부로 올라가는 것도 힘들지만, 갔다고 해도 돌아올 거라는 보장이 없다. 북부에서 잡히는 그날 사형이다.
리페프론트는 발트겐 때문에 자주 북부를 들락날락거렸다. 본인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위험한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트겐의 부탁을 들어주었던 건 개인적인 용무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나라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르네일 왕국은 다르다.
제국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페안 공국과 함께 언제나 신경이 날카롭고 무척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제국의 발리아르 공작령, 솔스타힐과 북부의 철의 여인 알레리아 공작부인의 페안 공국 그리고 타르네일 왕국은 휴전선을 눈앞에 두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페안 공국은 서쪽 끝의 해안을 따라 줄 왕국으로 밀입국 할 수 있다. 줄 왕국이 서쪽 해안을 맡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페안은 발호른과 라스타크 못지않게 육군이 강세이나 해군 쪽은 병력이 없다시피 하다. 지리적인 위치도 있지만 무엇보다 줄의 해군이 너무 강력해 서쪽 바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페안과 라스타크가 얼마 남지도 않은 줄의 영토를 마저 밀어버리지 못한 건 그 어마어마한 해군과 본토가 섬이라는 것 때문이다.
타르네일은 상황이 다르다. 페안처럼 땅으로 다가갈 수 없다는 건 같지만 이쪽은 베아루드, 에렌할처럼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 또한 강세다. 물론 에렌할과 ‘끝없는 해전’으로 백 년을 넘게 싸우며 한창 때보다 약해지긴 했다. 허나 그 전쟁 통에 타르네일은 에렌할의 강력한 화포에 맞서 ‘전함’을 건조하는 막강한 기술이 발전했다. 더해 에렌할과의 압도적인 화력차를 뒤집기 위해 성장한 ‘전함’을 통한 ‘전술과 전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에렌할과의 전쟁은 제국의 공격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허나 그 제국과의 전쟁이 휴전이란 이름으로 접어든 지 10여 년이 넘었을 때 그들은 다시금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 후로 60년이 지난 지금 타르네일과 에렌할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그렇기에 바다와 땅 모두 경계도가 최고조이다. 지금 타르네일 왕국에 가라는 건 자살하라는 뜻이다. 확신컨대 국경에서 잡힌다. 리페프론트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요즘 자꾸 친한 척 한다 했더니 이런 정신 나간 짓거리를 시키려고 작업한 거였네? 예라이 염병할 새끼야. 나처럼 쓰레기나 뒤지고 다니는 놈한테 시킬 짓이냐, 이게? 꼴뵈기 싫으면 그냥 나가 뒤지라고 하든가. 진짜 죽이려고 하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선생님은 뭐가 됐든 잘 가시지 않으십니까.”
“뭐가 됐든 잘 간다고 목숨이 오락가락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닌데요, 씹새야.”
발트겐은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편지에 손을 얹고 리페프론트에게 쓱 밀었다. 찐 감자를 으적으적 씹어 먹던 리페프론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편지를 집었다. 리페프론트가 붉은 인주를 녹여 봉인한 편지를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왜 이걸 나한테 시키는지 이유나 알자. 네 가게에는 길잡이 놈들 쎄고 쎘잖아.”
발트겐은 땅콩버터를 빵에 바르며 답했다.
“예. 길잡이들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이 들릅니다. 믿을 만한 이들이 없을 뿐입니다.”
리페프론트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발트겐이 손대지 않은 닭고기를 가리켰다. 발트겐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페프론트는 보는 사람의 식욕이 달아날 정도로 정말 맛없게 고기를 먹었다. 발트겐은 저렇게 세상 맛 없다는 얼굴로 먹지만 엄청나게 먹어대는 것을 재능이라 봐야하는지 깊이 생각했다.
으적으적 씹지만 작은 부스러기도 흘리지 않고 먹던 리페프론트가 말했다.
“사람 앞에 믿을만하다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는 게 용하다, 용해. 그런데 대체 넌 어딜 봐서 날 믿을 만하다고 보는 거야? 아, 물론 네가 어처구니없는 개소리를 해서 짜증이 나 괜히 심술부리는 건 아니야. 알지?”
“아무래도 잔뜩 짜증이 나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
“에이, 아니라니까요.”
“그럼 그렇다고 알고 있겠습니다. ……믿을만하냐 물으신 것, 저는 그렇다고 답하겠습니다.”
리페프론트는 오늘따라 발트겐이 보여주는 다양한 표정에 제법 흥미를 느꼈다. 발트겐은 언제나 답답할 정도로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다. 더해 표정에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여 사람보다는 인형이나 기계 같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발트겐은 감정도 표정도 풍부한 남자다. 다만 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민감한 사람이 적을 뿐이다. 리페프론트는 ‘짐승 한 마리’에 오는 사람들 중 유이하게 그게 가능한 사람이다. 리페프론트는 옥수수알과 녹인 치즈를 섞어 만든 음식을 수저로 떠먹으며 말했다.
“너도 참 웃긴 놈이야. 로제를 대할 때 변했다는 게 느껴지긴 했지만, 이 정도면 아직 봐줄 만한 부분인 거 같아. 좋아. 이건 내가 맡지.”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어디로 누구한테 가야는 지 알려줘 봐.”
“작은 어촌입니다. ‘팔스프레가 영지의 거질리두’라고 합니다. 그곳의 촌장이……, 아마 주아르일 겁니다. 그 사람에게 ‘레나 브릭스턴’에 대해 물어보시면 해야 할 일을 알려 줄 겁니다.”
리페프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너 명이 달려들어도 남길 정도의 음식을 다 먹고서도 배가 차지 않아 입맛을 다셨다. 결국 남은 양은 물로 채우기로 했다. 상당한 양의 물을 마신 리페프론트는 물통을 내려놓았다. 그는 편지를 품속에 집어넣고 말했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먼저 뭐냐 아마도는?”
“몇 해 전에 여든을 넘긴 노인이라, 타계했을 수도 있기에 그랬습니다.”
“아……. 그건…….”
리페프론트는 이마를 긁적였다. 그리고 잠시 후 피식 웃고 말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되겠네. 다음으로, 뭔데 네가 북부 지역을 그렇게 잘 아냐? 밥 만든다고 바빠서 돌아다니지도 않…….”
“예상하셨다시피, 길잡이들 덕입니다.”
리페프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고개를 돌린 리페프론트는 아침 해가 떠올랐다는 걸 알게 되었다. 리페프론트는 뻐근한 몸을 풀며 말했다.
“가긴 가겠지만, 선약이 있어서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몰라. 혹시라도 그 사이에 촌장이 죽으면 내 방식대로 찾아서 알아서 할 게.”
“알겠습니다. ……참, 아침 일찍 출발한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발트겐의 물음에 리페프론트는 두 눈을 깜박였다. 그는 며칠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눈 밑이 그늘져 있었다. 그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응? 아, 그랬지. 지금 출발해야 예르하라는 양반이 움직이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만날 테니까.”
“그럼 내려가서 일행 분을 깨워오겠습니다. 시간을 지키지 않을 사람은 아닌 듯했는데……. 생각보다 잠이 많은 사람인가 봅니다.”
발트겐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리페프론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내비 둬.”
발트겐은 무척 당혹스러운 얼굴로 리페프론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사실 확인을 위해 여쭙겠습니다. 제가 지금 내버려두란 말을 들은 게 확실합니까?”
리페프론트는 발트겐이 그 작은 눈을 크게 떠 자신을 쏘아보는 게 상당히 위협적이라는 걸 인정했다. 리페프론트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콧바람을 내뱉었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전 선생님께서 시간에 민감하다는 걸 압니다. 시간에 대한 약속을 했을 때 상대가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됐든 온갖 쌍욕과 함께 거래건 뭐건 다 취소하시지 않습니까. 지금껏 단 한 번도 예외를 두거나 배려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단순히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는 말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니, 자세한 설명을 해주실 수 있다면 부디.”
“뭘 그렇게 거창하게 씨부려? 일반적으로 그렇긴 한데……. 음……. 애 상태를 봐라. 개판이잖아. 좀 늦을 수도 있지.”
발트겐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리페프론트를 쳐다보았다. 리페프론트는 발트겐의 시선이 제법 아니꼬웠다. 발트겐이 말했다.
“일을 맡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혹시 면식이 있는 분입니까?”
“아니? 전혀. 오늘……, 어제 처음 본 사인데.”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길잡이들 일은 길잡이들 일로 남겨두시는 분이 굳이 그들의 일을 도맡으신 것만 해도……. 거기다 망자가 끄는 수레의 길잡이들을 왜 모르신다고 하신 겁니까? 그곳까지 가는 길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또 굳이 가명을 댈 필요가 있으셨습니까? 물론 선생님이 가명을 대시는 일이야 흔합니다만…….”
리페프론트는 피식 웃곤 발트겐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가리 해, 아가리.”
말문이 막힌 발트겐을 뒤로하고 리페프론트가 가게를 나섰다.
*
늦은 오후가 돼서야 로제는 눈을 떴다. 일어났다는 걸 자각했음에도 그녀는 한동안 침대에서 몸을 비비적거렸다. 풍성한 짐승의 털처럼 보드라운 침대 시트와 이불, 베게의 감촉이 너무 좋았다. 몸을 새우처럼 말고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로제는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로제는 당황하며 오른손으로 침대보를 만졌다. 손바닥을 스치는 털이 느껴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몸은 고통 말고 다른 건 느낄 수 없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로제는 책상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리페프론트를 쳐다봤다. 의자는 침대 쪽으로 등받이를 향하고 있어 리페프론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로제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끼는 고통이 아닌 감각에 낯섦과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리페프론트가 책을 덮었다. 그는 낡은 책들이 제멋대로 꽂혀 있는 책장에 책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의자를 엉덩이에 붙인 채 슬쩍 들어 로제를 바라볼 수 있게 위치를 바꿨다. 리페프론트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책상에 가볍게 내려쳤다. 그는 빠져나온 담배를 물고 책상의 촛불로 불을 붙였다.
“벌써 오후입니다, 아가씨. 잠자리가 편했는지 정말 깊게도 자셨네. 아무튼 일어났으니 이제 출발합시다. 많이 늦어서 시간이 더 걸리겠네. 준비되면 나와요.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랍니다.”
리페프론트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뒤 계단을 통해 영업 중인 ‘짐승 한 마리’로 올라갔다. 그가 나간 뒤 로제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내가 잠을 잤다고? 기절한 게 아니라? ……말도 안 돼……! 이게 대체…….’
로제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리페프론트가 죄 없는 노새의 궁둥이를 사정없이 발로 차고 지하로 내려왔다. 그는 멍하니 있는 로제를 째려보며 말했다.
“시간 없다니까? 언제까지 꾸물댈 거요?”
로제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로제의 굼뜬 모습을 의미심장한 얼굴로 지켜보던 리페프론트가 다가왔다. 그는 평소에는 쉬지도 않고 놀리는 입을 여는 대신 그냥 두 팔로 로제를 안았다.
석양이 지고 세상이 점차 어둠에 싸여간다. 야행성 동물이 아닌 이상 모든 것들이 잠을 청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허나 안락하고 포근한 밤은 역설적이게도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로제는 사방에서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방금 전까지 머물던 곳이자 제국 수도를 둘러싼 11개의 대도시 중 하나, 팔테프라드다.
들볶는 리페프론트를 따라 허겁지겁 짐승 한 마리 식당을 떠났다. 로제는 리페프론트가 서두르기에 말이라도 탈 줄 알았다. 그러나 일분일초가 급하다는 듯 행동했던 리페프론트는 황당하게도 그들이 처음 만났던 쓰레기장에서처럼 로제를 수레에 태웠다.
그들은 먼 거리를 가야한다. 말이 있다면 좋지만 없는데 새로 한 필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액수도 부담이 된다. 식당에서 밥도 외상으로 먹는 리페프론트가 그런 돈이 있을 리가 없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지구력이 뛰어난 노새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닌다.
걸어서 가는 건 부담 될 정도로 먼 거리라면 그들은 수레에 타고 노새에게 끌게 하는 건 현명한 게 아니라 당연한 선택이다. 그래서 로제가 보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리페프론트는 인간과 비할 수 없는 지구력을 가진 멀쩡한 노새를 내버려 두고 자기가 수레를 끌고 있었다. 정작 수레를 끌 것이라 생각된 노새는 풀을 한 움큼 입에 물고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로제는 이 상황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그녀뿐이란 사실에 조금 충격 받았다. 리페프론트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휘파람에 콧노래까지 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요 며칠 자꾸 이상한 일이 생겨 싱숭생숭하던 로제와는 정반대였다.
결국 흥을 주체하지 못한 리페프론트는 노래의 가사를 입 밖에 내기 시작했다. 굉장히 기쁘게 흥얼거리는 것과 달리 가사는 무척 슬펐다.
그 무엇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살아가던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받고 변해간다. 무감정하던 그가 행복함을 깨닫고 밝게 웃지만 결국 그를 도와준 이가 죽어 슬퍼한다. 그는 이러한 아픔과 행복을 알려 준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내용이었다.
리페프론트가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음정과 박자가 완전히 엉망인 사람은 아니었다. 로제는 제법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흥얼거리던 중 리페프론트가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말했다.
“아, 참. 야, 너 대체 플랑한테 뭘 빌려 준 거냐? 뭘 줬가니 빌려준 건데 애가 그렇게 좋아해?”
로제는 리페프론트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리페프론트의 말에 로제가 이해할만 한 내용은 없었다. 그녀가 의아해하는 순간 뒤따라오던 노새가 울기 시작했다.
“끄워어어억! 끼에에에!”
여전히 비명소리 같았고, 소름끼쳤다. 그러자 리페프론트의 눈과 멀리 떨어져 있던 눈썹이 바짝 붙었다.
“뭐? 뭘 줘? 이게 진짜 처맞고 싶나…….”
“끄에엑!”
“그걸 지금 말이라고……. 빌려 줄 게 따로 있지 새끼야! 너 저번에도 베르엘이랑 내기했다가 어떻게 됐는지 그새 까먹었냐? 대가리 돌이야? 니 두개골 안에 뇌 대신 사리 들었냐? 넌 진짜 돌아가면 보자.”
“푸르륵……!”
“퍄하! 뭐? 뭐, 어쩔 거냐고? 퍄! 진짜 이 속담이라는 게 야무지다, 야무져. 어딜 방귀 뀐 놈이 성을 내? 똥구멍 찢어줄까, 이 씹새야? 어? 팍 씨! 이거 오냐오냐 해줬더니 정신을 못 차리네? 너 한 번만 더 나 몰래 일 벌여 놔라, 진짜. 뒤져. 아니 시발 뒤지는 걸로 안 끝나, 알겠냐?”
“끼에엑……. 끼엑.”
리페프론트의 눈이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눈꺼풀 안쪽으로 올라갔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넌 씨발! 벌써 네 번이나 어쩔 수 없었어! 대체 얼마나 더 어쩔 수 없어야 만족할래! 라다가스트가 너처럼 하다가 나한테 얼마나 깨졌는지 봐놓고도 그러냐! 네가 자꾸 그따위로 나오면 내가 뭐가 돼? 어? 나중에 그놈이 이 일로 너한테 진짜 개지랄을 해도 난 모르는 일이다, 알겠냐? 니가 싼 똥이니까 니가 치워 병신새끼야.”
“푸르륵! 끼에엑!”
“아가리, 아가리! 아가리 해! 확 찢어버리기 전에!”
“끼에에엑…….”
“아가리 하라니까? 라다가스트 조질 때 로데스트가 끼어들던? 씨발 확 그냥! 넌 한 번 크게 털릴 때 됐어.”
“푸르륵…….”
“어쩌라고? 네가 싼 똥인데.”
“끄에에엑!”
“엣헴! 갑자기 그렇게 저자세로 나와도 어! 마! 내가 봐줄 거 같아? 엣헴. 정 네 마음이 그렇다면, 어서 끌거라!”
노새가 서럽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반해 리페프론트는 오랫동안 쌓여온 체증이 싹 씻겨 내려간 듯 후련해보였다. 노새는 빠르게 걸어가더니 이내 선두에 섰다. 노새의 힘없는 모습을 지켜보는 리페프론트의 입은 귀에 걸릴 것처럼 올라가 있었다. 리페프론트가 노새의 볼기짝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그러곤 로제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잠시 자리 좀 바꿀게요.”
리페프론트가 수레 손잡이를 놓고 빠져나오자 노새가 그 앞에 섰다. 리페프론트는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노새와 수레를 연결했다. 리페프론트가 노새의 볼기를 발로 찼다. 노새는 슬피 울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리페프론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수레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왔다. 문득 리페프론트가 로제를 바라보았다. 로제는 리페프론트를 마주보았다.
“제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요?”
리페프론트는 느닷없이 한 마디를 던지곤 빙긋 웃었다. 그러나 로제는 고개를 내저었다. 듣기 싫다는 뜻이 명확했다. 리페프론트는 삐진 것처럼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한동안 노새의 발굽, 수레바퀴, 리페프론트의 발소리만이 어두워지는 세상의 적막을 지워갔다.
로제는 이 침묵이 너무 무서웠다. 모든 게 조용해질 때면, 그녀는 안도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고통이 찾아와 늘 새로운 방법으로 몸과 정신을 유린했다. 그럼에도 로제는 침묵을 거부할 수 없다. 이 두려운 침묵 속에서만 아픈 기억 속에 침잠한 동생과 가족들을 그리워할 수 있다.
“예전에 꾀죄죄한 꼬맹이를 만난 적이 있어요.”
침묵을 답답하게 여기다 못한 리페프론트가 입을 열었다. 로제는 안도와 아쉬움 그리고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로제는 그런 스스로에게 놀랐다. 긴 시간 이런 복잡한 감정을 느껴본 건 처음이었다. 엘로이지의 도움이 있은 뒤로 이상한 일이 많아졌다. 로제는 어느새 담배를 입에 문 채 연기를 내뱉는 리페프론트를 쳐다봤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리페프론트는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음, 아마 십……, 한 십이 년 전일 거예요. 저 북쪽에 있는 밀람이라는 마을을 저 멍청한 잡종새끼랑 거닐 때였죠. 왜 그런 곳을 갔었냐구요? 젠장, 하필 그때 저기 어디냐 요 밑에 있는 페드키아에서 도둑질……이 아니라 뭘 좀 잠깐 빌리다가 걸려서 쫓기는 중이었거든요. 새끼들이 좀 집요해서 계속 쫓아오기에 북부 연합으로 도망쳤죠. 저 염병할 잡종 새끼만 아니었어도 안 걸리는 건데……. 니가 그때 똥마렵다고 지랄만 안 했어도 새끼야!
……아무튼 현상금 지금도 남아 있을 걸요? 페드키아 가면 전 바로 범죄자랍니다. 껄껄! 뭘 훔쳤냐구요? 요만한……. 아니 안 훔쳤는데요? 잠깐 빌린 거지. 별 건 아니고 요만한 빨간 돌덩이였는데 뭐가 그리 중요한지 막 금고에 넣어두고 난리법석을 아주그냥. 그래서 슬쩍 빌렸죠.”
리페프론트는 주먹을 쥐어보였다. 로제는 어이가 없었다.
‘저만한 보석을 훔쳤다고? 생각이 없는…….’
“잠깐 빌려서 빚 좀 갚고 다시 돌려놓으려 했는데, 새끼들 융통성도 없지. 그거 하나를 못 본 척을 못해요, 쯧쯧. 아무튼 그래서 북부로 갔죠. 뭐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그 밀람이란 마을에 들렸는데 도적들이 덮쳐서 쑥대밭이 된 후였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저를 보고 도적인 줄 알더군요. 이것 참, 어딜 봐서 내가 도적처럼 보이는지…….”
리페프론트는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로 턱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여러 각도로 얼굴을 움직였다.
“끼에엑! 끄워에엑!”
“또, 또. 새끼 그새를 못 참고 아가리 또 열지?”
“끄워어…….”
“너도 할디르랑 똑같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것을 꼭 그놈의 조동아리로 매를 벌지. 아, 할디르가 그때 주운 꼬맹이 이름입니다. 마을 상태가 워낙 개판이기에 밥을 얻어먹고 자시고 할 거 없이 빨리 뜨려고 했거든요. 뭐 마을 사람들도 우리 같은 외부인을 별로 내켜하지도 않았고, 더 머물다간 저 성질머리 박살난 잡종새끼는 분명 맛대가리 없는 노새고기가 됐을 테니까요.
아무튼 저놈이랑 쉬엄쉬엄 마을 한 바퀴 돌고 떠날 준비 하고 있을 때였죠. 큼지막한 소나무 밑에서 담배 하나 물고, 저놈은 맛난 과일 먹고 있는데 아 글쎄 웬 쪼끄만 거지새끼가 쪼르르 오는 거 있죠? 돈이라도 훔쳐가려고 왔나 해서 일단 때리고 봤는데, 막 자기를 데리고 가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쨌냐구요? 당연히 거절했죠! 아니, 아직 결혼도 못했는데 애 딸린 남자란 소릴 들으면 어떤 여자가 좋아라 하겠어요? 지랄 말고 당장 꺼지라 했죠! 으디서, 쥐방울만 한 게!
그랬는데 얘가 어쨌는지 아세요? 아, 그때 생각하니까 웃겨 죽겠네. 그리고 한 몇 시간 있다가 출발했어요. 쟤가 이제 수레를 끌고 전 이렇게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레에서 밑바닥에서 뭐가 쿵 하고 떨어지는 겁니다. 진짜 처음에 뭔 귀신이나 벌렌 줄 알고 깜짝 놀래가지고 뒤로 자빠졌거든요, 그때.”
로제는 단 한 번의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리페프론트는 정말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그때의 기억 때문에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덩달아 노새도 울음소리를 냈다. 리페프론트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고 말했다.
“아, 광대야……. 죄송합니다, 우리만 웃어서. 아무튼 그래가지고 일단 물어봤죠. 대체 어떻게 수레 밑에 붙어 있었냐? 아니 그러니까 할디르가 이러는 겁니다. ‘양 끝에 있는 틈에 밧줄을 묶고 그 안에 들어갔어요.’ 라고! 녀석, 용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참……. 뭐, 애가 간절해 보이기도 했고, 좀 재밌어 보이기도 해서 데리고 가기로 했죠. 그런데 제 일이 조금 지저분하잖아요? 쓰레기장 들락날락거리고 고물상 새끼들이랑 맨날 언성 높이면서 돈 더 받아내려고 용을 쓰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애들한테는 좋은 환경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제 집에 갖다 놨습니다.
엥? 쓰레기장이나 뒤지고 다니는 거지새끼가 웬 집이냐구요? 허허. 저 이래봬도 잘나가던 인력거꾼인데요? 인력거 할 때 무서운 귀족 아저씨들 운 좋게 몇 번 도와준 적 있거든요. 그중에 맘씨 정말 고운 아저씨가 집을 줬죠. 나 거지 아냐, 왜이래?
집도 있는데 왜 거지꼴로 사냐구요? 그게……, 지금 제 집에는 갈 곳 없는 멍청이들이 여럿 눌러 앉아서요. 집주인은 분명 난데, 왠지 들어가기 어렵다고 해야하나? 거기다가 어느새 지들 멋대로 1층을 선술집 비슷하게 꾸며놨더라고요. 한 마디 해주려 했는데, 음……. 생각보다 예뻐서 봐주고 있죠. 로제 씨도 보면 깜짝 놀랄 걸요? 진짜 예쁘게 꾸며놨다니까요? 어떻게 된 게 사내새끼들이 여자들 못지않게 꾸미는 걸 좋아하는지 몰라.”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 같던 리페프론트는 노새의 울음소리에 말을 멈췄다.
“끄에에엑!”
“응? 왜?”
“끼에에엑! 끄워어어억!”
“아, 그래? 귀찮게 됐네. 그럼 요 앞에서 한숨 자고 가자.”
리페프론트는 여기저기서 땔감을 구해 모닥불을 만들었다. 수레를 끌던 노새가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리페프론트는 담배를 물고 모닥불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열기가 얼굴을 태울 것같다. 리페프론트는 연기를 깊게 빨며 모닥불에서 멀어졌다. 리페프론트는 담배 연기를 하늘로 내뱉은 뒤 수레에서 내리지 않은 로제를 바라보았다.
“끄에에엑!”
노새의 울음소리에 리페프론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로제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놀랍게도.”
지금까지의 경박함은 온데간데없는 목소리였다. 낮게 깔리고, 중후하다.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꾸워어억?”
“그래. 네가 이렇게 될 거라 말했지. 난 기대하지 않았고.”
“끼에엑! 푸르륵!”
리페프론트가 얼굴을 구겼다. 그는 평소의 경박함을 되찾았다.
“야, 야. 개소리 할 거면 절로 가서 풀이나 뜯어.”
리페프론트는 신경질적으로 노새의 궁둥이를 발로 찼다. 하지만 노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푸르륵! 끄엑!”
턱을 괸 채 입을 다물고 있던 리페프론트는 퍽 스산한 얼굴로 노새를 노려보았다.
“왜?”
“끼이히힝!”
“똥꼬 헌다, 헐어. 쓸데없는 잡소리 빼고 요점만 말 해.”
“끼에엑!”
“내가? 어이가 없네.”
“푸르릉! 끼에!”
“그거랑 뭔 상관이여? 전혀 상관없지 않냐? 그리고 니들이 하도 지랄을 해대서 이렇게 주기적으로 자리 비우잖아. 씨이벌, 내가 거지새끼도 아니고 내 집 놔두고 돌아갈 때 눈치를 봐야해! 말이 되냐? 어처구니가 없네.”
“푸르륵!”
“야, 야! 헛바람 넣지 마. 뒤진다, 진짜. 너 애들 관리 똑바로 해. 걔들보고 자리 벗어나면 전부 연대책임 물어서 조질 거니까 알아서 처신 잘 하라 해라.”
“끼힝…….”
“얘기가 또 왜 그렇게 돼? 가만, 이 새끼 그냥 나 놀려먹으려는 거 아냐?”
“끼에에엑! 끼엑! 끄워어어!”
리페프론트는 거의 발작에 가까운 노새의 울음소리에 귀를 막았다.
“……아, 알아 인마. 새끼 장난 좀 칠까 했더니 역정을 내내……. 근데 네 말대로면 내가 결국 반쪽이라 벌어진 일이란 거 아냐?”
“끄헹? 끄엥?”
“……아니 그 말 아니야? 내가 빡대가린가?”
노새는 한숨을 내쉬었다.
“끄에에엑!”
리페프론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는 로제를 슬쩍 바라보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리페프론트가 노새의 궁둥이를 발로 찼다. 예상치 못했기에 노새는 깜짝 놀랐다. 리페프론트가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니까, 일단 더 꺼내지마. 아가리 처닫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노새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새는 슬쩍 일어나 풀을 뜯으러 갔다.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던 리페프론트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로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쉬지 않고 연기를 뿜어대는 리페프론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친 사람 같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와 노새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웃긴 소리라고 넘겨짚기에는 노새의 반응이 너무 사람 같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아무리 살펴봐도 노새와 대화할 수 있는 거 말고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남자였다. 마검과 같은 전설 속의 물건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가 갖고 있는 물건이라고는 걸치고 있는 허름한 옷가지와 담배 그리고 이 수레뿐이다. 문득 로제는 저 노새가 그런 쪽이 아닌가 추측했다. 그녀는 리페프론트가 아닌 노새를 살펴봤다.
노새의 귀가 움직였다. 노새는 로제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로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노새의 갈색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말로는 다 표현해낼 수 없는 깊고 어두운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했을 때 그녀가 가진 마검은 긴 침묵을 깼다.
쳐다보지 마라. 저것을 알려 하지 마라. 저곳으로 가려 하지 마라. 넌 대가를 다 치루지 못했다. 감히 넘으려 하지 말고, 감히 가 닿을 것이라 여기지 마라. 넌 그럴 수 없다. 그래선 안 된다. 저곳에 가선 안 된다. 저곳을 쳐다봐서도, 알려 해서도 안 된다. 그에 대한 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난 종으로서 널 섬길 것이다. 그러니 대가를 치르며 그에 걸맞은 격을 새길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라.
로제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마검은 지금까지 단 두 번만 말을 걸어왔다. 마검의 숙주가 되었을 때 한 번, 고통의 기사가 아슬레아를 습격하기 직전에 한 번. 첫 번째는 반갑다는 인사말이었고, 두 번째는 대비하라는 경고였다. 정말 딱 두 마디였다.
반갑다.
대비해라.
하지만 이번엔 놀랍도록 길게 말했다. 그리고 마검이 엄청나게 다급하고, 경계하며, 두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저게 뭔데?’
하지만 마검은 침묵했다. 로제는 짜증이 났다. 노새는 그런 로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콧방귀를 내쉬곤 다시금 풀을 뜯었다. 그러던 노새가 느닷없이 울기 시작했다. 조용히 담배를 피고 있던 리페프론트는 피식 웃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로제를 바라보았다. 로제는 슬그머니 리페프론트의 시선을 피했다. 로제를 쳐다보며 리페프론트가 말했다.
“저 놈이 뭔지 궁금해요?”
로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그가 또 주절주절 떠들어주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리페프론트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 이거 참.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으음……, 흐음……. 발레포드부터 할까? 음……, 그럼 너무 길어지는데…….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 잡종새끼는 그냥 노새입니다. 어디더라? 무슨 유적지에서 발견했는데 다리 다친 걸 도와줬더니 내내 따라오더랍니다. 저렇게 아가리를 쉬지 않고 놀리는 건……, 저도 모르죠. 저놈 성격이 저래 지랄 맞은 걸 내 탓을 하면 안 되지.
저놈 말은……, 글쎄요. 그냥 어느새 들리기 시작했는데? 궁금해 하는 사람들한테 이러저러 하다는 걸 알려주면 하나 같이 똑같은 반응을 보여주는 것도 굉장히 재밌긴 하죠. 보통 ‘고놈 영물일세!’라고 합니다.”
리페프론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선 채로 똥을 싸는 노새를 향해 돌멩이를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이 씨발, 영물은 무슨! 영물이 다 얼어 뒤졌냐!”
“끄워어억!”
“아가리 해, 아가리! 이 요물 새끼야!”
한동안 노새와 투닥거리던 리페프론트는 굉장히 지친 얼굴로 수레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수레바퀴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충분히 진정되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소릴 들을 때마다 저는 ‘저 잡종은 요물이지 영물이 아니다’라고 반박합니다. 방금도 저 꼬라지를 보면 감이 잡히지 않아요? 별 것 아닌 거 같다구요? 당신이 저 새끼가 술, 고기를 처먹는 모습을 못 봐서 그래요. 보면 그런 말 쏙 들어갈 겁니다. 쓸데없이 입만 고급이라 식비는 더럽게 들지……. 아무튼 영물 같은 건 절대 아닐 겁니다.”
말을 마친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내 물이 들어 있는 작은 통을 발견했다. 모닥불 근처였기에 리페프론트는 그곳까지 걸어갔다. 물통을 들고 온 리페프론트는 로제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그녀가 고개를 젓자 리페프론트는 물을 마셨다. 입가에 흐르는 물을 닦고 마개를 닫았다. 리페프론트는 깊어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허허, 이거 뭐라도 먹어야지 싶은데…….”
*
동이 트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을 무렵 수레에 쭈그리고 있던 로제가 눈을 떴다. 로제는 이번에도 잠을 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굉장히 경계했다. 고통의 기사가 망가뜨린 후로 로제는 단 한 번도 자의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오직 고통을 더 견딜 수 없을 때가 되어 기절하는 순간만이 유일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수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 꺼졌는지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닥불이 보인다.
식어가는 모닥불 앞에 리페프론트가 앉아 있었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떨군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자세 그대로였다. 로제는 리페프론트가 자고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리페프론트는 굉장히 피곤해보였다. 그를 처음 만난 쓰레기장에서는 몰랐지만 짐승 한 마리에서 본 그의 얼굴은 며칠은 잠을 설친 사람 같았다. 그건 로제가 잠들기 전에 보았던 모습이기도 했다.
미처 사라지지 않은 겨울이 떠나기를 아쉬워하는 봄을 붙잡아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북부의 혹한에 익숙한 로제에게는 선선함과 따뜻함의 사이라 느껴질 미지근한 온도였다. 하지만 제국인들이 밖에 나갈 때 따뜻하게 걸치곤 하는 날씨다. 로제가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는 줄 알았던 리페프론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인기척에 로제가 리페프론트를 바라보았다.
고통의 기사가 순수한 악의를 담아 찔러 구멍 난 심장에 서늘함이 들어온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서늘함이다. 인간을 기준으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왔지만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감각이고, 느낌이다. 로제는 이 정체불명의 서늘함이 움직이는 시체처럼 흐느적거리는 리페프론트에게서 다가온다는 걸 부정하기 어려웠다.
축 처진 채 일어서 있는 리페프론트는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형술사들의 실에 꿰인 인형 같았다. 누군가가 시체에 실을 연결해놓고 조종하는 듯했다.
스산하다. 로제는 리페프론트의 노새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상할 대로 상한 눈과 동트기 전의 짙은 어둠이 만나 노새의 모습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안 보이는 것뿐이었지만 로제는 이상하게도 지금 근처에 노새가 없을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심장을 메우던 서늘함과 얼어붙게 만들던 스산함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리페프론트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더니 담이 온 어깨와 옆구리를 붙잡고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주저앉아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는 리페프론트의 곁으로 노새가 다가왔다. 노새는 한심하다는 듯 콧김을 내뿜었다. 리페프론트가 악을 쓰며 노새의 콧등을 때렸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로제는 언덕너머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을 등지고 서 있는 리페프론트를 주시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딘지 어설프고 바보 같은 인상이 가득하다. 어둠이 걷히고 빛이 그를 주시한다. 하지만 리페프론트는 여전히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는 노새와 함께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로제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로제는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햇빛에 삼켜진 리페프론트와 노새에게서 공허함만이 느껴진다. 저곳에 서 있음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기괴함. 로제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저 둘을 더 살펴보려 했다. 그러나 리페프론트가 불쑥 등을 돌려 로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보처럼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로제? 아침만 먹고 바로 출발하죠.”
그림자가 점점 짧아지기 시작해 정오가 되었다. 한참을 말없이 수레를 끌고 가던 리페프론트는 노새의 울음소리에 혀를 찼다.
“툴툴대지마. 아가리를 확 그냥 찢어버릴라니까.”
리페프론트는 노새를 한 대 칠 것처럼 주먹 쥐었다. 리페프론트의 썩은 동태 같은 눈깔은 노새에게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노새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똥이 마렵지 않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리페프론트는 수레 뒤로 멀찍이 자리 잡는 노새를 보며 인상을 썼다.
“내가 진짜 저딴 걸 왜 데리고 다닐까…….”
“끼이이힝!”
“놈……, 뭐? 놈팡이? 이 새끼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주인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리페프론트와 노새의 투닥거림은 한동안 계속됐다. 로제는 노새를 향해 온갖 험한 말을 쏟아내며 수레를 끄는 리페프론트와 노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전히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 의아해하는 건 로제 한 사람뿐이었다.
그들의 투닥거림이 멈추고 조금 있다 리페프론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노새도 노새답지 않은 울음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그의 노래에 장단을 맞추는 듯했다.
이 둘은 특이하다. 노새는 수레를 끌지 않고 사람은 수레에 타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놀랍도록 불평도 불만도 없다. 로제는 뒤따라오는 노새를 슬쩍 쳐다봤다.
‘사람 같은 노새…….’
이어서 수레를 끄는 리페프론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뒷모습뿐이지만 강건함이 느껴진다. 넓은 어깨는 그 느낌을 더하고, 부풀린다. 그의 하얗게 센 백발은 늙은이 같으면서도 신비함을 자아낸다. 로제는 아직 눈꺼풀이 남아 있던 반대쪽 눈은 닫은 채 고개를 떨구고 로브의 후드로 한쪽 눈을 가렸다.
‘엘로이지는 고통을 줄여줬지. 긴 시간 나를 괴롭혀 온 것에게서 숨통을 틔게 해줬어. 삶보다도 더한 것을 빚진 은인. 하지만 완전히 없애준 건 아니었지.’
로제는 왼손을 주먹 쥐었다.
‘……아프지 않아.’
엘로이지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고통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고통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다. 망가진 몸은 여전하다. 로제는 어느새 담배를 물고 연기를 뱉어대는 리페프론트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엘로이지의 약초가 급작스럽게 강해진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상황을 되돌아보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을 잤을 때부터다. 깨닫는 게 늦었지만 아마 그 순간부터 고통이 사라졌을 것이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사라져서 눈치 채지 못했다.
‘그 긴 시간……, 이 고통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어. 무슨 짓을 해도. 그런데 어떻게? 왜? 이해…… 할 수가 없어. ……이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이 저 사내가 아니라 나한테 있는 거라면? 이제 정말 죽을 때가 돼서 그런 거라면…….’
설령 그렇더라도 고통의 기사가 이토록 쉽게 놓아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더더욱 저 남자나 노새한테 뭔가가 있다는 말이겠지. 지금으로서는 서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 말고 이렇다 할 특이점은 보이지 않아. ……더 지켜봐야겠지. 지금은……, 생명수에 집중하자. 다른 데 한눈 팔아서는 안 돼.’
로제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동생을 살리기 위해선 생명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죽은 이를 되살린다.’ 같은 물건은 전설 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녀가 아는 ‘죽음’은 그의 영역에 간섭하는 걸 극도로 꺼린다. 불사의 신화와 전설은 많을지언정 죽은 이를 살리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생명수. 그 외에 죽음으로부터 삶의 세계로 되돌릴 수 있는 건 없다.
왜 그런 예외를 둔 것인지는 모른다. 로제의 할아버지가 해준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 그 전의 일이나 그 후의 이야기를 알고 있던 사람은 없었다.
“아무 말도 안 하려니 입이 좀 근질근질하네.”
리페프론트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괜히 기분마저 들뜨게 될 정도로 화창한 날씨다. 해는 그리 뜨겁지 않고, 바람은 따스한 듯하면서 선선하다. 그는 수레를 끌던 한손을 떼 입가를 매만졌다.
“이런 날엔 어디 조용한 데 앉아서 술 한 잔 하는 게 딱인데…….”
그의 혼잣말에 뒤따라오던 노새가 답했다.
“끼에에에엑!”
“아가리를 쉬지 않고 놀리는 내가 네 말대로 충분히 짜증날 법해. 인정해. 가끔 나도 내가 조잘조잘 떠드는 걸 발견하면 좀 역할 때도 있으니까. 충분히 이해해.”
“끄에에엑!”
리페프론트가 얼굴을 구겼다. 그는 잠시 수레를 멈출 생각까지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잔뜩 핏발 선 얼굴로 리페프론트가 말했다.
“다 좋아.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허구한날, 사사건건, 틈만 나면! 어떻게든 날 엿먹여보려고 악을 쓰고, 용을 쓰고, 개지랄을 하고, 염병을 떨고! 게거품을 무는 너 같은 개 잡종 호로새끼한테는 듣고 싶지 않아! 알겠냐!”
“푸후.”
“이런 씹새끼가…….”
리페프론트는 더 참지 못하고 뒤돌았다. 그의 얼굴은 지금껏 봐온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정말 화가 난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레는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었다. 그저 등으로 수레를 미는 간단한 행동이었지만 놀랍게도 나아가는 속도는 손으로 밀 때와 다를 게 없었다. 거기에 자세를 바꾸었음에도 약간의 흔들림조차 없다.
일련의 모습에 충분히 놀란 로제는 뒤늦게 둘의 상태를 살폈다. 리페프론트는 노새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지만 노새는 일상인 듯 태평했다. 물론 미간을 잔뜩 좁히고 부리부리한 눈매로 리페프론트를 쏘아보고 있긴 했다.
별 것 아닌 다툼이었지만 로제는 제법 많은 걸 알아냈다. 저 둘에게 이런 다툼은 일상이다. 비약하자면 이런 정도는 다툼에 속하지도 않는다.
노새의 반응으로 미루어봤을 때 리페프론트는 정말 화가 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저토록 ‘화가 났다’라는 걸 강조하는 얼굴과 행동은 그저 짜증의 표출일 뿐이다. 그녀의 예상대로 리페프론트와 노새는 눈싸움을 주고받다가 다시 서로가 하던 일로 돌아갔다.
리페프론트는 수레를 끌었고 노새는 말없이 뒤따랐다. 이윽고 참다 못한 리페프론트는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침묵은 그리 값지지 않은 것 같아.”
“끄워어.”
“너도 아가리 근질거리는 걸 보면, 어쩌면 우린 굉장한 인연일지도 몰라.”
“푸후, 끼에엑.”
“뭘 얼마나 들어, 듣기는. 오늘이 처음인데.”
“푸르륵! 끼에엑!”
“노망까지는 너무 갔고. 요즘 기력이 좀 쇠해서 그런 거겠지.”
“끄워어어억! 끄에엑!”
“떽!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이다간 그 잘난 혓바닥 잘리는 수가 있어요. 그 일은 내 알아 할 거니 넌 그만 아가리 닫으세요. 똥내 나니까.”
“푸! 푸르륵!”
“……허허, 이 새끼는 맨날 뾰족한 것만 먹나? 왤케 잘 쑤시지?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거기까지 해라. 아프다.”
“끄에에에엑! 끼에에엑!”
“……아, 한다고. 알았다고.”
리페프론트는 투덜거리면서도 별다른 반박을 하진 않았다. 로제는 노새와 그가 무슨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리페프론트가 자신을 쳐다보는 걸 볼 때 화제가 넘어왔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리페프론트가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말 안 해줬네. 우리는 여기서 남쪽으로 사나흘 쯤 걸리는 큰 도시로 갈 거예요. 페드키아라고…….”
리페프론트는 말하다 말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식겁했다.
“아, 씨. 생각해보니 아직 거기 현상금 남은 거 같은데……. 아무튼 페드키아라고 들어본 적 있으신가?”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의문을 가졌다. 제국의 수도, 아페프라드에서 란데셀리암 공작령인 페드키아까지는 말이 쉬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려야 보름에서 스무 날 정도 걸린다. 지도상으로는 두 도시가 굉장히 가깝게 보여도 대륙이 너무 크기 때문에 실질적 거리는 엄청나다. 이까짓 조그만 수레와 그걸 끄는 인간과 노새의 걸음으로는 절대 사흘 안에 도착할 수 없다. 로제는 질문하고 싶었다. 뭔 소리하냐고. 그렇게 입을 연 순간 깨달았다.
어느새 성벽도, 그 바깥의 수많은 농장과 풍차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방금 전만 해도 도로 위였건만 지금은 숲속에 있다. 길조차 없는 험한 산속에서 수레가 미동조차 않고 굴러가고 있다.
‘이게 대체……?’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그러든 말든 리페프론트는 말을 이었다.
“가본 적 없으신가? 페드키아는 제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공작령 중 하납니다. 모르면 간첩이라던데, 혹시? 흠흠. 장난이고. 아무튼 다른 도시들에 비해 노래와 그림, 글, 춤과 같은 예술과 문화로 유명하죠. 제국에서 유행하는 물건들은 전부 페드키아가 원산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거기서 한 번 떴다 하면 전국적으로 바람이 부니까요.
페드키아가 그런 문화 중심지가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건 하나죠. 란셀 공작가의 핏줄이 노는 걸 좋아해서죠. 그 사람들 보시면 놀랄 걸요? 귀족보다는 우리 같은 평민에 가깝거든요. 북부 나라들 중엔……, 음. 흠. 베아루드? 거기 귀족들 정도면 비빌 수 있겠네. 물론 싸움 잘하고 남들 잘 챙겨주는 베아루드 귀족 같진 않고, 그냥 노는 걸 좋아하는…… 뭐랄까……, 돈 뿌리기 좋아하는…….”
“끼에엑?”
“그래, 한량! 졸부 같다고 할 수도 있으려나? 심심하면 시장이나 저잣거리 같은 데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돈 뿌리고 같이 놀다가 슬쩍 사라지거든요. 웃긴 양반들이야. 웃긴 건 번화가보다는 시골 쪽에 자주 나타나죠.
참, 이 양반들 또 웃긴 게 있지. 란셀 공작가는 원래 란데셀리암이거든요? 근데 이렇게 부르면 싫어해요.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친구처럼 편하게 란셀이라 부르죠. 본인들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 거기다가 귀족들이 란셀이라 부르면 그 자리에서 쌍욕 박는 것도 유명하답니다. 란셀 가 차남이 자신을 발견하고 인사하러 온 귀족들한테 ‘어디 백성들한테 세금 받아 처먹는 밥버러지들이 탱자탱자 처 놀러다녀?’라고 한 건 유명하죠. 신문에도 나왔는데. 그런 지도 처 놀고 있었지. 하여튼 웃기는 놈들이야.”
리페프론트는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문득 로제는 먹거리도 마실 것도 들고 다니지 않으면서 대체 담배는 얼마나 챙겨둔 것인지 궁금했다. 당장 어제만 해도 3, 40개는 넘게 태웠다. 그녀는 의문을 뒤로한 채 이어지는 리페프론트의 이야기를 들었다.
“란셀 애들이 왜 이러냐면, 이게 또 이야기하지면 긴데. 옛날 옛적에……, 한 이백 년 됐나? 아무튼 한 몇 백 년 전에 발라하르 아사르 트리디번 발테제 란데셀리암이란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당시 동부와 남부에 굉장한 영향력을 끼치던 페세르키아라는 나라의 왕족이었죠. 그의 형은 왕이었고요.
당시 페세르키아는 태평성대와는 거리가 먼 나라였죠. 왕인 발데히르는 굉장히 유능한 왕이었지만 귀족들이 지랄이었거든요. 그는 늘 발라하르가 곁에서 자기를 도와주길 원했는데, 발라하르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죠. 아까 말했다시피 얘들은 노는 걸 좋아하거든요. 발데히르가 도와달란 것도 자기가 놀 때 대신 업무 좀 봐달란 소리였고요. 덤으로 귀족들 견제도 좀 하고.
아무튼 발라하르는 매일매일 사치스럽게 놀았죠. 고급 와인으로 분수를 만들지 않나 바닥을 비싼 고기로 깔아놓질 않나 난리도 아니었습니다요. 그렇게 사치스럽게 살던 어느 날 발라하르는 파티장에 가던 중 마차가 고장이 나요. 마침 근처에 작은 마을이 있어서 도움을 받았죠. 헌데 고치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무료했던 발라하르는 마을을 둘러보다가 이들도 축제 준비를 하고 있단 걸 알게 되죠. 노는 거라면 환장하는 양반이라 마을 축제에도 끼어들죠. 그리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게 놀아요.
귀족들의 파티처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맛은 전혀 없음에도 그에 지지 않을 만큼 즐겁고 재미있는 축제였죠. 축제의 끝물에 마차는 고쳐졌고, 발라하르는 파티장으로 갑니다. 그리고 인생 처음으로 노는 데 지쳐버립니다.
그의 파티에 오는 사람들은 전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발라하르도 모른 게 아니라 애써 무시하고 있었죠. 그러다 문득 오기 전에 신나게 놀았던 마을 축제를 떠올립니다. 이후로 발라하르는 귀족들의 파티를 제끼고 먹을 거 마실 거 바리바리 싸 들고 축제가 열리는 마을을 찾아다닙니다.
재밌었죠. 귀족들은 늘 한결 같거든요. 파티를 열어도 매번 똑같죠. 하지만 백성들의 축제는 달랐어요.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마을마다 그 맛이 달랐거든요. 놀랍게도 발라하르는 그저 놀았을 뿐인데 백성들의 왕에 대한 지지도는 점점 올라갔죠. 왕이자 형인 발데히르는 숨이 트였지만 반대급부로 귀족들은 열이 받는 거죠. 그래서 귀족들은 한참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칼을 빼들죠. 바로 왕을…….”
“끼에엑! 끄에워에에엑!”
두 사람은 노새를 쳐다보았다. 노새는 부루퉁한(로제가 보기에) 얼굴로 두 사람을 마주 보았다. 리페프론트가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뭐? 왜?”
“꾸워어어어! 끼에에엑!”
“헐. 왜?”
“끄에에!”
“아니, 왜?”
노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꾸 되묻는 리페프론트에게 대답해주기도 귀찮아졌는지 어딘가를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리페프론트는 미간을 좁힌 채 눈썹을 엄지손가락으로 긁적였다. 한참 그쪽을 쳐다보던 리페프론트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잡담할 시간이 없겠네요. 페드키아가 아니라 솔스타힐로 가려면 지금부터 속도 좀 내야겠는데……. 이거 참…….”
그 말을 끝으로 리페프론트는 입을 다물고 수레를 돌렸다. 리페프론트는 잠시 멈춰 하늘을 올려다보고 북쪽으로 길을 잡았다.
78년 9월
로제는 옷이 떨리기 시작하자 고개를 들었다. 옷을 흔들던 바람은 로제의 머리카락도 건드렸다. 그녀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바람이 몸을 감싸는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다시금 ‘살아 있다’는 걸 느끼며 로제가 숨을 들이마셨다. 비록 오래전과는 달리 몸이 만신창이가 됐지만 지금은 이 바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로제는 감을 수 없는 눈을 후드로 가리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끼어 있었지만 제법 화창한 날씨였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굉장히 불만에 가득 찬 말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이러고 뺑이만 치려는 거야, 대체? 하여튼 저 양반만 믿으면 언제나 이 꼬라지가 된다니까. 내가 그렇게 흔적을 지우고 다닌다고 말을 해도 귓등으로도 듣는 척을 안 하더니 이런 개고생을 하고 있지. 의도적으로 뭘 피하고 있다니까 말을 씨발…….”
익숙하지 않은 소리였다. 로제는 눈을 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사람 대신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풀을 뜯고 있는 노새가 있었다. 노새는 로제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를 마주보았다. 노새가 풀을 질겅거렸다. 그리고 잔뜩 볼멘소리로 말했다.
“신부 너도 그리 생각하지?”
노새는 한숨을 내쉬었다.
“듣지도 못하는 양반한테 뭔 말을 하겠냐…….”
다시금 풀을 씹는데 집중하는 노새를 보며 로제는 한쪽 눈을 깜박거렸다. 노새는 애꿎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계기라고 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 그들은 지난 4개월간 제국의 각지를 돌아다녔을 뿐이다. 로제가 처음으로 지겹게 듣던 노새의 울음소리가 울음소리가 아닌 다른 걸로 들린 건 저번 달 부터였다. 그때부터 노새의 울음소리에 느닷없이 옹알이 같은 것이 섞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드디어 귀도 맛이 갔다 생각해 대수롭잖게 여겼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또렷한 단어가 되기 시작하자 그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옹알이는 점차 말이 되어갔다. 그리고 일주일 전부터 마침내 노새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로제는 이 사실에 대해 리페프론트에게 말해야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다물고 있었다.
로제는 노새의 말이 들리게 된 후로 리페프론트가 말하던 중간중간 짜증내고 화내는 것에 굉장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노새는 틈만 나면 끼어들어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빈정댔다. 그저 듣고 있을 뿐인 로제도 은근히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노새의 말이 들린 후로 로제는 리페프론트가 굉장한 인격자이자 인내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성격 좋은 사람이라도 시도 때도 없이 말하는 중간중간 끼어들어 신랄하게 빈정거리는 존재가 곁에 있다면 화를 참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다가 인내심의 한계가 오면 분명 노새의 주둥이를 후려쳤으리라. 이런 노새와 함께하며 웬만하면 말로 역정을 내는 걸로 끝내는 리페프론트는 참 좋은 사람이 확실하다.
처음 만났을 때 리페프론트는 노새를 요물이라 칭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아무래도 영물과는 거리가 먼 생물이었다.
노새의 말이 들리게 된 이후로 분석한 결과 리페프론트와 노새의 대화 아닌 대화는 정해진 순서가 있다. 먼저 리페프론트가 언제나처럼 혼잣말을 한다. 그 대상은 로제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많다. 그러면 이제 노새가 끼어들어 빈정댄다. 리페프론트는 최대한 무시하고 말을 잇는다. 놀랍게도 전혀 개의치 않아하며 노새가 또 빈정댄다. 이걸 한두 번 반복하면 더 참지 못한 리페프론트가 역정을 낸다.
처음에는 노새가 정말 못됐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보다보니 리페프론트가 화를 내며 보여주는 모습이 너무 재밌었다.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로제는 본인이 웃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나 리페프론트가 화를 내는 식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보통은 아무리 리페프론트가 역정을 내더라도 노새는 코웃음 친다. 하지만 몇 개의 문장이 리페프론트의 입 밖으로 나오면 노새는 바로 꼬리를 내리고 만다.
무슨 말이냐면, 리페프론트가 노새에게 ‘너 지금 어디 있어?’ 라던가 ‘왜 자꾸 도망가?’와 비슷한 뜻을 가진 말이 나오는 순간 노새는 기겁을 하고 잘못했다고 빈다. 이때 노새는 리페프론트에게 절대 반말을 쓰지 않으며 그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진다.
노새는 평소에 리페프론트를 부를 때 친구처럼 야 혹은 너라 한다. 허나 이때만은 리페프론트를 ‘군주님’이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한다. 이외에도 이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으면 재미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노새가 타인을 부를 때는 이름이 아닌 자신만의 호칭을 붙인다. 그 호칭에는 외형적 특징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한다. 노새가 로제를 부르는 호칭은 신부다. 로제는 노새가 왜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빡빡이’라든가 ‘처 맞을 새끼’라든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는 말뼉다구 같은 버러지 새끼’라 불리는 것보다 낫긴 하다.
“뭐 하는데 이제 와?”
노새가 잔뜩 짜증을 냈다. 그러자 터덜터덜 걸어오던 리페프론트는 노새의 부리부리한 눈길을 피했다.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닫는 리페프론트를 향해 노새가 씹던 풀을 뱉었다. 리페프론트는 화들짝 놀라 피하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리페프론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침과 풀로 범벅이 된 얼굴을 쓸었다. 노새가 말했다.
“퍄! 대. 단. 하십니다! 이번엔 확실하시다더니 여느 때와 다름이 전. 혀. 없군요! 당신의 그 한결같음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네요! 그 예르하인가 뭔지 하는 양반은 어디 있습니까? 아! 호주머니에 넣어 오셨구나? 씨발, 사람이 호주머니에 들어가기도 하는구나? 퍄하! 내가 그걸 몰랐네! 빨리 꺼내서 그 예르하인가 뭔가 좀 보여줘 봐. 질질 끌린 일 끝내고 집이나 가게. 이 개새끼야.”
리페프론트는 정말 억울하다는 얼굴로 웅얼거렸다.
“아니……, 그게……”
“정말……, 개탄스럽다. 내가 대놓고 낚는 거 같다고 느낌 이상하니 로겐으로 가자 했냐, 안 했냐? 어? 아, 참! 그랬더니 위대한 병신새끼께서 뭐랬더라? ‘어디서 똥오줌도 못 가리는 금붕어 대가리 잡종 새끼가 훈수 두냐’라고 했었지? 응. 지는. 지는 대놓고 낚시질 하는 거를 덥석 물었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병신아. 딱 보니 로겐으로 뺑뺑이 돌았고만. 자, 이제 누가 금붕어 대가리 잡종 새끼냐? 병신 새끼야.”
로제가 본 리페프론트는 형언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로제는 리페프론트가 노새를 때려죽이고 싶은 건지, 실수한 본인의 머리를 깨고 싶은 건지 쉽게 추측할 수 없었다. 이후 노새와 리페프론트는 제법 길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로제는 그들과 함께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기에 저들이 지금 할 말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다.
리페프론트는 이번 실수를 무마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고, 노새는 그런 리페프론트를 쏘아붙일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꽤 긴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리페프론트는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 노새가 핏 웃었다. 그리고 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수레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수레를 끌 준비를 하는 노새를 보며 리페프론트가 말했다.
“아이구,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허탕이네요. 하하, 이것 참. 제가 이런 실수는 잘 안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마가 꼈나 자꾸 빗나가네요. 하하하! 하지만 걱정마시죠. 빠른 시일 내에 그 예르하 네일이란 사람과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리페프론트는 장담한다는 뜻으로 엄지를 척 내밀었다. 그러자 노새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지랄 똥 싸네 병신.”
로제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망설였다. 한참 로제가 반응이 없자 리페프론트는 스스로도 무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멋쩍게 헛기침을 하고 손을 털었다. 리페프론트는 슬그머니 노새 곁으로 가 수레와 노새를 연결했다. 노새는 그를 째려보고 걸음을 옮겼다. 그에 맞춰 리페프론트는 수레 뒤편에서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따라왔다.
“고, 고마워……, 요.”
리페프론트와 노새는 동시에 멈춰 섰다. 그리고 서로를 쳐다봤다. 리페프론트가 노새에게 턱짓했다. ‘니가 그랬냐?’ 노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아닌데? 아니 생각을 좀 해라. 내가 너한테 고맙단 소릴 왜 해. 병신아.’ 리페프론트는 로제를 쳐다봤다. 노새는 구조상 불가능했기에 안쓰럽게 고개를 꺾기 시작했다.
리페프론트는 로제가 그를 만난 후로 눈을 가장 크게 뜨고 있었다. 로제는 그 모습이 굉장히 부담스러웠기에 시선을 피했다. 리페프론트는 먼지가 들어간 사람처럼 눈을 깜박이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어……, 저……, 어…… 혹시……. 혹시…… 지금 대답해주신 겁니까?”
로제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리페프론트와 노새는 또 다시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둘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리페프론트는 배를 붙잡으며 한참을 웃었다.
분명히 같이 웃기 시작했지만 노새의 웃음은 금방 멈췄다. 하지만 리페프론트의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가만히 듣고 있던 노새는 슬슬 짜증을 느꼈다. 로제는 영문을 몰라 당황할 뿐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노새가 욕지거리를 퍼부으려 했을 때 간신히 진정한 리페프론트가 말했다.
“우리 함께한 지 시간이 좀 흘렀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대답해주신 거 압니까? 이야, 이것 참! 생각보다 더 달콤하네. 난 내가 말이 많다고는 생각 안 하거든요?”
“지랄하네. 아가리에서 무슨 무너진 댐처럼 단어들이 줄줄 세는데 그걸 말이라고…….”
“아가리 해, 아가리. ……아무튼. 근데 매번 수레에 손님을 태울 때마다 다들 말이 너무 많다고 불평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는 말이 좀 많다는 걸 인정할까 싶기도 했죠. 근데 로제 당신은 제가 태운 손님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 저랑 같이 있었거든요?”
“다들 저 웃기지도 않는 조동아리에 질려서 먼저 떠난 거지. 내가 손님이었으면 당장 벽돌로 대가리 후려쳤어. 강냉이 다 뽑았다.”
“……아가리를 그냥 확! 입 닥치고 있어 새끼야. 닦지도 않아서 냄새는 더럽게 나는 게 뭐 잘났다고.”
“지는.”
“새끼가 진짜……. ……아무튼 그랬는데 아무 말도 안 해서 내가 말을 너무 적게 해서 지루한 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지 뭡니까!”
“야. 거 지랄 좀 그만 해라. 벌써 씨발 네 달이나 허탕 쳐서 드디어 신부가 참다참다 도저히 못 참아서 빡돈 거겠지. 네놈의 병신 같은 아가리가 그 분노에 기하급수적인 빡침을 곁들였을 거고. 생각을 해라 이 빡대가리 새끼야. 하긴 대가리에 든 게 없는데 생각은 무슨 생각. 그냥 나가 뒤지십쇼.”
“일루와. 일루 와, 이 개새끼야! 어쭈? 어쭈?”
노새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핏대 선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다가오는 리페프론트를 피해 허겁지겁 달아나려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 행동을 가당찮게 여긴 리페프론트는 단숨에 노새를 앞질렀다. 리페프론트는 노새를 향해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수많은 전투와 전쟁 속에 살아온 로제가 아니라 어린애가 봐도 지금 리페프론트가 주먹을 잘 쓴다는 평을 내리긴 어려웠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싸움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휘두르는 볼품없는 주먹질이었다. 주먹도 제대로 쥐지 않았고, 휘두를 때 허리와 힘을 합하지도 않는다. 리페프론트는 정말 팔이 달렸다는 이유 하나로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분노에 찬 인간의 주먹이 노새에게 한 대도 맞지 않았다는 건 제법 놀랄만한 일이었다. 노새가 뛰어난 건지, 아니면 리페프론트가 생각보다도 허접한 건지 저울재고 있을 때 로제는 이 행위들이 걸어가면서 이루어졌다는 것에 가산점을 줬다. 노새는 앞으로 나아가며 주먹을 피했고 리페프론트는 뒷걸음질 치며 주먹을 날렸다.
“으아아악! 뒤져! 뒤져! 뒤져 이 잡종 새끼야!”
“퍄! 어디 그렇게 느려서 스치기나 하겠어? 좀 더 힘을 내보라고!”
“으아아아아아아악!”
“어림도 없지! 싸움도 못하는 게 어딜 감히! 나가 뒤져, 병신아! 뭐? 야, 야야! 야야야! 잠깐! 야! 다리는 반칙이지! 야!”
“꺼져! 싸움에 반칙이 어디 있어, 개새야! 뒤져 그냥!”
“아, 아! 악! 아이…… 개새끼가 진짜! 야 이, 씨발! 야! 목줄 풀어! 풀어 개새끼야!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풀어!”
“그걸 왜 풀어? 내가 병신이냐? 그냥 곱게 처맞고 뒤져! 칠라고? 칠라고? 쳐 봐! 쳐 보라고! 다리도 짧은 게 어딜!”
“야, 씨발 물면 되지 네까짓 거 상대로 다리를 왜 써?”
“동네 똥개만도 못한 아가리 힘 가지고 되겠냐? 해 봐! 해 봐, 새끼야!”
“못 할 줄 아냐? 들어와, 들어와!”
어릴 때 아슬레아의 어른들이 입에서 침이 질질 흐르며 눈이 새빨갛게 충혈 된 들개들을 조심하라고 했다. 안 그래도 질이 나쁜 들개들에 광견병이 걸려 그런 것이니 될 수 있으면 피하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로제는 듣기만 했지 광견병에 걸린 개들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오늘 광견병에 걸린 개들이 왜 무섭다고들 하는지 알 수 있게 됐다. 더욱이 사람과 노새도 그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로제는 게거품을 물고 투닥거리는 둘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노새나 그 주인이나…….’
노새와 리페프론트의 다툼은 피칠갑을 한 사람들의 곁을 지나칠 때가 돼서야 끝이 났다. 그들은 제법 우스꽝스런 모습(리페프론트는 얼굴이 침 범벅이 된 채 군데군데 멍들어 있었고 노새의 귀를 뽑을 것처럼 잡아당겼다. 노새는 팅팅 부은 얼굴로 악착같이 리페프론트의 멱살을 물고 있었다.)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로제는 리페프론트와 노새가 싸우는 걸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살폈다. 스무 명이 조금 넘는 그들의 행색은 전쟁터에서 쉽게 볼 수 있던 피난민 같았다. 하지만 전쟁은 아닐 것이다. 북부 연합과 제국의 싸움은 멈춘 지 오래 되었다.
작은 짐마차 몇 대에는 옅게 패인 칼자국과 부러진 화살들이 꽂혀 있었다. 사람들의 옷가지에는 피가 꺼멓게 굳어 있다. 크게 다친 사람도 눈에 띠었다. 이러한 사실로 유추해볼 때 로제는 그들이 도적이나 산적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무엇보다도 그리 생각한 이유는 칼자국과 화살이 남은 짐마차 때문이었다.
북부와 제국의 군인들은 다루는 장비나 사용하는 전술 등이 제법 다르다. 허나 그들은 훈련된 병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명령을 따라야한다. 그리고 군인들은 ‘생존자를 남기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거기다 저 짐마차에 남은 흔적들은 병장기에 서툰 이들이 남긴 것이다. 체계적으로 훈련 받은 병사들의 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개개인의 무력의 차이가 있지만 군인들은 의미 없는 곳에 창칼을 휘둘러 체력을 낭비하지 않는다. 궁수들은 일이 끝나면 화살을 회수한다. 회수하는 중에 부러뜨리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 않는다.
그렇담 용병들의 짓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럴 리 없다. 로제와 같은 아슬레아 출신의 용병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용병’들은 몸으로 돈을 번다. 그들은 비명횡사하기 싫어 스스로를 단련하는 걸 멈추지 않는다. 위아래의 군인들이 어디 하나가 모자란 수많은 창이 모여 단 하나의 완벽한 창이 된다면, 용병들은 그 자체로 날 선 창이다. 다만 군인들의 결속력과 파괴력에 비해 한참 뒤떨어질 뿐이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군인과 용병에 속한 사람들이 습격했다면 짐마차의 상처가 옅게 날 리도 없으며 부러진 화살 같은 게 남을 리도 없다. 시대가 변했어도 군인들은 군자금을 아끼기 위해 그것마저도 회수해오라 시킬 것이고, 용병들은 애초에 배고픈 직업이다. 남은 건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도적떼뿐이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않고, 소모되는 병장기의 회수에도 목매지 않는다. 화살이 필요하면 훔치고 빼앗으면 된다. 물론 이런 도적들 중엔 전직 군인이나 용병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정말 큰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닌 이상 그들은 어딜 가나 먹고 살 수 있다. 굳이 위험하고 용병보다 수입이 팍팍한 도적들과 함께하진 않으리라.
‘줄의 해적들은……, 예외로 쳐야겠지. 그 막강한 해군을 이루고 있는 게 해적이었으니까. 왕도 해적이고. 지금은……, 글쎄. 어떻게 변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지침이 바뀌면 그에 때라 바뀌어야하는 게 군대이니 뭐가 어떻든 많이도 변했겠지.’
로제는 리페프론트와 노새를 돌아봤다. 마침 리페프론트가 노새를 쳐다보자 노새는 그를 살포시 땅에 내려놓았다. 리페프론트는 얼굴의 침을 대충 닦아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행색들이 말이 아닌데 무슨 일 있습니까?”
그들은 다가오는 리페프론트를 보곤 경계했다. 로제는 저러다가 피난민 쪽에서 칼을 빼어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긴장했다. 허나 그들은 생각보다도 더 만신창이인 리페프론트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로제는 그들의 경계심이 낮아지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리페프론트가 무장하지 않았다는 게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켰을 것이다.
피난민들은 리페프론트를 조금 살폈다. 그 결과 그가 가지고 있는 거라곤 노새 한 마리와 수레 한 대 그리고 거기에 타 있는 장애인 한 사람 뿐이라는 걸 알고 경계를 완전히 풀었다. 그들의 대표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당신의 몰골도 제법 봐줄만 하구려. 그쪽은 무슨 일 있었소?”
그의 말대로 리페프론트의 행색은 정말 꼴사나웠다. 거의 열흘을 씻지 못해 머리는 떡 져 있었다. 옷은 먼지가 가득했고 땟자국이 선명했다. 거기에 눈살 찌푸려질 정도의 악취까지 났다. 사내는 도저히 못 봐줄 정도로 안쓰러운 리페프론트에게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리페프론트가 마른입에 고인 침을 삼키고 굽실거렸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하, 이거 참. 덕분에 며칠 만에 물을 입에 댑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잠시만요.”
리페프론트는 후다닥 수레로 뛰어갔다. 그는 가장 먼저 로제에게 물을 권했다. 로제는 어차피 죽지도 않고 먹어봐야 허기는 계속 느끼는 몸에 물을 마실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리페프론트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노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상을 팍 쓴 채 노새의 입을 벌려 물을 쏟아 부었다. 마지막으로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마시고 다시 사내에게 뛰어갔다. 리페프론트가가 바보처럼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거 혹시 다 마시면 안 됐던 겁니까?”
“아니오. 물은 충분히 있소. 그것보다 당신이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군.”
“하하,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아, 참. 전 리페프론트라고 합니다.”
“반갑소, 리페프론트. 난 리히스테요.”
“반갑습니다, 리히스테. 아,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제 아내가 많이 아파서요. 여보! 괜찮아? 하하. 아내를 고쳐줄 의사든 마법사든 뭐든 닥치는 대로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돈은 진즉에 떨어져서 여기저기 신세를 지고 있지만요.”
“그거……, 참……. 안 되셨소.”
리히스테는 로제를 슥 쳐다보고 시선을 돌렸다. 그는 리페프론트를 저지경이 된 부인을 위해 힘쓰는 자상한 남편으로 인식했다. 리히스테는 코가 찡해 한번 훌쩍였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요 앞 케레번이란 마을에서 왔소.”
“아, 어릴 때 잠시 들른 적 있습니다. 아버지가 행상이셨거든요. 케레번의 비단이 제법 유명하다죠?”
“유명했었지. 지금은 그저 페허요. 며칠 전에 도적놈들이 습격해왔지. 우리는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고. 아마 우리 마을에 가죽을 팔러 왔던 저 사냥꾼 형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죽었을 거요.”
“아이고, 이런…….”
리페프론트는 리히스테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잿가루 같은 회색 머리카락과 듬직한 등을 가진 사내였다. 리페프론트는 어딘지 익숙한 뒤통수에 미간을 좁혔다. 때마침 리히스테가 그를 불렀다.
“투스터 형님. 잠시 괜찮으십니까?”
“그래.”
투스터라 불린 중년의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리페프론트와 투스터는 눈을 마주쳤다. 아는 얼굴이었기에 리페프론트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투스터 또한 간만에 보는 익숙한 얼굴에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팔카스.”
“오랜만이네, 투스터.”
“아는 사이였습니까?”
지저분한 회색 머리칼을 정리해 뒤로 묶으며 투스터가 말했다.
“예전에 다쳤을 때 저분 집에서 신세를 진 적이 있네.”
투스터가 리페프론트를 슬쩍 쳐다봤다. 리페프론트는 피식 웃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곰이었나 뭐였나 모르겠는데 크게 다쳐서 우리 집 앞에 쓰러져 있었죠. 그때 우리 여보가 잘 돌봐줬었는데. 지금은 반대가 됐네.”
“아, 사모님이 다치셨습니까? 이런, 정말 큰일이군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거 약재라도 들고 찾아가야…….”
“저 수레에 타고 있어.”
“……리히스테 바쁜 와중에 미안하네만 잠시 둘만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예, 당연하죠. 형님.”
투스터는 급히 수레 앞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곁으로 온 리페프론트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투스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투스터가 수레에 타고 있는 로제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투스터 로직헤윙 메트론미스트라고 합니다. 이름이 좀 긴 편이니 편하게 투스터라 부르시면 됩니다.”
빙긋 웃은 투스터는 곁으로 다가온 리페프론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뭡니까?”
“뭐가?”
의아해하는 리페프론트를 주시하며 투스터가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는 로제를 슬쩍 쳐다보고 리페프론트의 어깨를 붙잡았다. 투스터는 그대로 리페프론트를 수레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당황하는 리페프론트를 향해 투스터가 말했다.
“여기서 만난 것도 굉장한 우연입니다만, 당신의 수레에 누가 타고 있다는 걸 본 게 너무 놀라워서 말이 안 나옵니다. 누굽니까?”
“손님인데?”
“손님이요?”
“뭘 일일이 놀라고 있어? 내가 손님 받는 거 처음 봐?”
“처음은 아닙니다만, 저 수레에 누군가를 태우는 걸 처음 봅니다. 누가 손만 대도 역정을 내셨잖습니까?”
“야, 야. 상태를 봐라. 걷지도 못하게 생겼는데 수레라도 안 태우면 온종일 걸어도 모자라.”
투스터의 얼굴 가득한 주름이 한층 더 짙어졌다. 거의 쏘아보듯 쳐다보고 있는 투스터를 향해 리페프론트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뭐여,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아닙니다. 혹시 저 젊을 때 기억하십니까?”
“너 몇 살인데 지금?”
“쉰입니다.”
“미쳤다고 기억하냐? 30대라고 해도 20년 전이고 20대라고 해도 30년 전인데?”
“그럼 알트레아라는 마족은 기억하십니까?”
“아, 기억해.”
“허허, 이것 참. 그래놓고도 손님이 몸이 조금 불편하다고 수레에 태운다는 소리가 나옵니까?”
“왜? 내가 뭐랬는데?”
투스터는 인상을 썼다. 그는 됐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투스터는 리페프론트가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한다는 걸 안다.
‘꼭 본인한테 불리하거나 귀찮으면 모른다고 하지.’
뚱한 얼굴로 서 있는 리페프론트를 보며 투스터가 말했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뭘 어쩐 일이야. 일 때문에 케레번 가려고 했지.”
“케레번은 리히스테가 어떻게 됐는지 말했잖습니까. 도적놈들이 와서 다 털어갔습니다.”
“그것도 좀 웃기지. 네가 있는데 어떻게 도적 따위한테 털려?”
“나이를 먹었잖습니까. 나이.”
“그까짓 나이 좀 먹었다고 일렬로 세워놓고 화살 쏘면 대여섯 명 대가리에 구멍 내던 힘이랑 날아가던 새 눈알도 뚫던 실력이 어디 가냐? 개소리 그만하고. 왜 그랬어?”
“나이 먹어서 그렇다니까 그러시네. 인간은 생각보다 늙으면 힘을 못 씁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요.”
“이 새끼 또 나쁜 버릇 나왔지.”
“나이 먹어서 그렇다니까요.”
“나이는 개뿔.”
“아무튼 이번에 찾는 건 뭡니까? 물건이나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사람?”
“이 새끼 말 돌리는 거 봐라? 대답 안 할 거야?”
“대답해주시면 합니다.”
“흠. 사람 맞아. 예르하 네일.”
투스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누굽니까, 그건 또?”
“몰라. 손님이 찾고 있으니까 찾는 거지. 자, 이제 네 차례야. 대답해. 왜 사람들 죽게 놔뒀어?”
“리히스테! 우리도 그만 출발하자!”
“이 새끼가?”
“하하, 또 속으십니까?”
투스터는 총총걸음으로 리페프론트에게서 멀어졌다. 리페프론트는 어이가 없어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떠날 준비를 하는 투스터 일행을 바라보았다. 짐마차와 일행이 출발하자 가장 뒷줄에 선 투스터가 리페프론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리페프론트는 얼굴을 구겼다.
리페프론트는 구시렁거리며 수레로 돌아왔다. 노새는 쌍욕을 퍼붓고 있는 리페프론트를 비웃었다.
“야, 너 또 속았냐?”
“저 새끼 아주그냥 남 속이고 등쳐먹는 데는 이골이 난 새끼야. 대체 누가 저렇게 버릇없게 키웠냐?”
“너요, 너.”
리페프론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노새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수레 뒤편에 섰다. 노새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말했다.
“그래서 뭐래?”
“도적이 몰려와서 요 앞마을 싹 조졌단다.”
“그래서?”
리페프론트는 노새를 쳐다봤다. 노새는 한쪽 눈을 찌푸렸다. 리페프론트가 말했다.
“그래서, 뭐? 눈을 왜 그렇게 뜨냐? 눈깔 파줘?”
“어쩔 거냐고 이제, 병신아. 눈깔은 네 눈깔이나 처 파내시고. 켈바르, 케레번, 아이마르로 가려던 거 아니야? 케레번에서 막혔으니 길 수정해야지.”
“……사실 고민 중.”
노새는 콧방귀를 뀌었다.
“고민 같은 소리 하네. 당장 꺾어. 무슨 싸움도 못하는 게 도적들이 득시글거릴 게 뻔한 길로 가려고 해? 돌았냐? 그러다 죽어 이 병신아.”
리페프론트는 떡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몇 번 긁다보니 간지러워서 계속 긁었다. 노새는 무척 못마땅한 얼굴로 잡초를 뜯었다. “맛대가리 없는 거 봐라.” 한참 머리를 긁던 리페프론트는 몇 가닥 빠진 머리카락이 붙은 손을 쳐다보았다. 바람을 불었지만 기름진 머리카락은 날아가지 않았다. 짜증을 내며 손을 털어 머리카락을 떼어낸 그가 중얼거렸다.
“하, 씨……. 로겐으로 갈 걸…….”
“내가 뭐랬……! 에휴. 말을 말자.”
윽박지르려던 노새는 갑자기 힘이 빠졌다. 노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새가 머리를 세게 털고 말했다.
“어차피 늦었어. 간다면 뺑 돌아도 아이마르로 가야해. 로겐 쪽은 이미 글렀어. 돌아가는 것만 한 세월이야. 난 아싸리 쭉 우회해야지 싶다.”
“아이마르까지? 어디로? 케레번이 도적 습격 받았으면 나머지라고 안전할 거 같진 않은데?”
“방고브. 살라마리 쪽으로.”
“야, 그건 너무 돌아가잖아…….”
“그러면? 볼렌드라라도 경유할까? 그쪽으로 가는 게 훨씬 빠른데?”
리페프론트는 고민했다. 그는 로제를 슬쩍 쳐다봤다. 그녀의 붉은 눈은 리페프론트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리페프론트는 헛기침을 하곤 노새에게 다가갔다. 그는 노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러다가 우리 폐급으로 오인 받겠어!”
그러자 노새는 눈을 까뒤집을 정도의 경기를 일으켰다. 잠시 후에야 진정한 노새는 깊고 답답함이 느껴지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후. 우리 폐급 맞아. 사람 하나를 지금 몇 달째 못 찾아서 이러고 있냐? 그냥 다른 애들이 일하게 놔뒀으면 좀 좋아? 길잡이들한테 맡겼으면 진즉에 찾아냈겠다, 등신아. 그리고 내가 시발 팔자에도 없는 사람 찾기 한다고 할 때부터 이렇게 될 거 알아봤어. 대체 뭐한다고 이런 개 헛짓거리를…….”
노새는 자신의 귓가에 있던 리페프론트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리페프론트는 급작스런 공격에 손도 못 써보고 나가떨어졌다. 허우적거리며 일어선 리페프론트는 코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노새가 말했다.
“염병 그만하고 오기나 해. 방고브로 간다. 그리고 네가 끌어. 멍청한 새끼야.”
땅을 보며 수레를 끌던 리페프론트는 깊게 패여 물웅덩이가 고인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는 입술을 비쭉 내밀고 뒤를 돌아보았다. 수레는 조잡한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쫄딱 젖은 노새가 구시렁거리며 따라오고 있다.
몇 시간 전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두 사람과 한 마리에게 상당한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리페프론트는 허겁지겁 비를 피할 곳을 찾았지만 방고브까지 가는 길은 ‘발파다드’라는 이름의 넓은 평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곳곳에 듬성듬성 자라 있는 나무들의 밑은 비를 피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빗발은 무척 거셌다. 숲이라도 이 비를 다 막을 순 없다. 몇 그루씩 박혀 있는 나무로는 거센 빗줄기를 줄여주지도 못한다. 리페프론트와 노새는 젖어가며 평원을 뛰어다녔고, 간신히 수레를 덮을 수 있는 낡은 천 쪼가리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로제는 더 젖지 않았지만 노새와 리페프론트는 쫄딱 젖었다. 지금은 더 젖을 것도 없어 온 몸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리페프론트는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건 젖은 게 아니라 물에 담긴 거네.”
리페프론트는 입술을 내밀고 말했다.
“야, 바꾸자.”
“내가 왜?”
“아, 좀 끌어봐. 손도 없는 게. 비 피할 데나 막아줄 거 찾아올라니까.”
노새는 투덜거리면서도 리페프론트를 대신해 수레를 끌었다. 리페프론트는 수레를 덮은 천을 들춰 웅크리고 있던 로제에게 말했다.
“잠깐 비 피할 데를 찾고 올라니까, 심심해도 저거랑 당분간 같이 놀아줘요. 안 그런 척해도 외로움을 못 견디는 새끼라 한 번씩 꼬리 쓰다듬어주면 좋아할 겁니다!”
“누가! 헛소리 그만하고 당장 꺼져!”
“저 봐, 부끄러워서 저런다니까?”
“지랄 말고 빨리 꺼져 그냥!”
“끄끄끅, 끄흑! 아무튼 갔다 옵니다!”
리페프론트는 싱그럽다는 말의 정확히 반대말처럼 웃으며 허겁지겁 노새와 수레를 앞질러 뛰어갔다. 둘만 남게 되자 노새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입이 근질거린다는 걸 깨달았다. 노새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거센 빗줄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노새는 푹푹 주저앉는 무른 땅에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로제는 멈출 생각을 않는 노새의 욕과 거센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녀는 임시방편으로 덮어놓은 천 쪼가리를 뚫고 빗물이 센다는 걸 알았다. 어차피 충분히 젖었고 감기 같은 게 걸리지도 않을 몸이었기에 답답한 천을 치워버렸다.
뜯겨 나가고 피고름 투서이인 얼굴에 빗물이 닿는다. 아프다. 차갑다. 그리고 시원하다. 로제는 한쪽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없어 감을 수 없는 반대쪽 눈은 손으로 후드를 붙잡아 가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비가 쏟아진다.
로제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그리고 싫어하게 됐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다시금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됐다.
아직 원하던 걸 이루진 못했다. 허나 그 때가 오면 반드시 비가 오는 날을 여느 때처럼 사랑해 마지않을 것이다.
“비 오는 날 진짜 혐오스러워. 시발 거, 털은 젖지, 땅은 질척거리지, 습하지, 끈적거리지, 춥지, 비 온 다음 날은 뒤지게 덥지, 모기는 들끓지! 염병!”
반대로 노새는 아주아주 싫어했다. 노새의 분노에 로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난……, 좋아해.”
“다 좋은데 내가 진짜 불만인 게 너랑 나랑 이 비라는 거에 대해 의견이 무척 갈린다는 거야. 이건 소스를 부어 먹느냐, 찍어 먹느냐 같은 차이야. 그래서 차마 널 욕하기도 좀 그래.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딴 날을 좋아하는 건 이해를 못 하겠어. 너도 지금 젖어가지고 짜증나는 거 아냐? 짜증 안 나? 씨발 어떻게 짜증이 안 날 수가 있……?”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노새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어디에도 리페프론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노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노새가 말했다.
“벌써 왔냐? 어딨어?”
“아, 아직 안 와, 왔어.”
“아, 그래? 그럴 거 같더라. 하여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꼴을 본 적이 없어.”
궁금증이 해결된 노새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리고 정확히 두 걸음을 내딛고 화들짝 놀라며 억지로 몸을 틀어 로제를 바라보았다. 그와 수레를 연결하고 있는 가죽 끈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팽팽해졌다. 노새가 소리쳤다.
“으악! 너, 너 뭐야? 너 내 말 알아들어? 들려? 왜? 어떻게? 아니, 왜!”
대꾸하려던 로제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노새의 ‘왜’와 ‘어떻게’라는 물음에 해당하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한참을 망설이던 로제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그 모습에 노새는 정말 당황했다. 순식간에 노새의 눈 밑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사람처럼 붙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신음을 흘리고 노새가 말했다.
“언제부터?”
로제는 집게손가락을 펴보였다. 노새가 뒷걸음질을 멈췄다.
‘하루? 한 주? 한 달? 으음……. 흐음……. 음……. 암만 생각해도 그 사이에 크게 실수한 건 없어 보이는데……. 그건 그렇고 내 말이 왜 들리는 거지? 지금까지 어떤 놈들도 못 들었는데……. 나 없을 때 군주님이……. 아니지. 지금은 그럴 수가 없지. 가능했어도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리도 없으실 테고. 그럼 굉장히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건데…….’
노새는 입매를 비틀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그와는 별개로 로제는 그 얼굴이 굉장히 얄밉다고 느꼈다. 노새가 귀를 몇 번 쫑긋거리더니 깊게 들이마신 숨을 내뱉었다. 노새는 등을 돌렸다. 그가 수레를 끌며 말했다.
“뭐……, 꽤 놀라운 일이긴 하네. 지금까지 없던 일이라 조금 당황스러운 면도 없잖아 있고. 그런데 뭐 나쁘지는 않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이서만 떠들다 보면 말이 끊길 때도 있으니까. 말 통하는 사람이 늘면 좋지. 아무튼 이렇게 된 거 정식으로 인사하지. 난 리페프론트야.”
로제는 눈을 깜박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노새는 자신을 ‘리페프론트’라 소개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리페프론트는 지금 어딘가에서 홀로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노새는 왜 자신을 리페프론트라 소개한 걸까. 로제는 혼자 고민하기보다 공유하는 것이 의문의 해결에 더 도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두, 둘……. 이름, 이 가, 같아?”
그러자 노새는 한쪽 눈을 찌푸렸다.
“어……, 둘? 뭐야, 먼저 썼나? 그럼 난 레샤바레프. 아니다 너무 기니까 그냥 ‘발바르’라고 불러.”
노새는 슬쩍 로제를 돌아봤다. 그녀가 굉장히 혼란스러운 듯하자 노새는 설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노새는 눈으로 들어오는 빗물에 짜증을 내며 말했다.
“리페프론트든 발바르든 레샤바레프든 뭐든 중요한 건 아냐. 신부 네가 편한 쪽으로 불러. 우리한테 이름이라는 건 있으나 마나 하거든. 딱히 신경 쓰는 편도 아니고. 불러주는 놈 마음이야.”
“……왜?”
“왜냐고? 그, 글쎄? 그렇게 물어보는 놈이 없었……. 하긴 다들 내 말을 못 들으니 설명한 적도 없긴 하네. 흠……. 이걸 말해도 되나…….”
노새는 고민했다. 잠시 후 노새가 입을 열었다.
“혼나기 싫어서 자세히 말은 못하는데, 뭐 예정대로라면 신부 너도 언젠가 알게 될 일이고 그때 가서 네가 날 도와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말해주는 거야. 알겠지? 나중에 나 꼭 도와줘야해? 나 그 멍청한 새대가리 꼴 나는 거 절대절대 사절이야. 알겠지? 진짜 꼭 도와주는 거다?
흠, 흠. 우리도 사실 너희가 말하는 이름이라는 게 있어. 리페프론트니 뭐니 대충 둘러댈 때 쓰는 게 아니라 진짜 이름 말야. 그런데 그걸 너희에게 말해줄 방법이 없어. 당신들께서는 ‘우리’를 보지 못하니까요. 뭐, 당신이라면 ‘우리’를 보는 게 언젠가 가능할 거라 보고 있습니다. 꼭 그렇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기도 하죠. 적어도 저는 말입니다.”
“…….”
“내가 지금 딱 네 얼굴을 보고 읽은 생각이 있지. ‘이 병신 새끼가 대체 뭐라는 거지?’라고. 맞지? 몰라도 돼. 이해 못해도 되고.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정리하자면, 우리는 이름이 없다. 그러니 편한 대로 불러라. 끝. 캬, 좋았다. 정리 완벽했다.”
노새는 정말 야무진 마무리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추켜세웠다. 그런 노새를 보며 로제는 입을 다물었다.
묘하다. 노새는 그냥 노새였지만, 말하던 중간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의 노새처럼 빈정거리는 게 아닌, 굉장히 정중하고 자상했다. 어딘지 포근함마저 느껴지는 따뜻함 끝에서 다시 특유의 빈정거림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누굴까? 아니 무얼까? 확실한 건 절대 평범한 노새와 사람은 아니다.
하품을 하며 빗물을 마시던 노새는 저 멀리서 리페프론트의 모습을 발견했다. 리페프론트는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좋은 거라도 발견했다고 생각한 노새가 리페프론트의 복귀를 알리려 입을 열었다.
“야! 이 병신 새끼야! 돌리라고, 돌려! 튀라고!”
악을 쓰며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로제는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노새 또한 의아해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로제는 그 이유를 아예 몰랐고, 노새는 리페프론트의 뒤로 보이는 것들의 정체를 몰라서였다. 이윽고 노새는 그것들이 말을 타고 무장한 인간이라는 걸 발견하자마자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씨발! 병신이!”
수레부터 리페프론트까지의 거리는 제법 멀었다. 하지만 사람의 다리로는 제법 먼 거리라도 말을 탔다면 가깝다고 단언할 수 있다. 노새는 안 그래도 태생의 차이로 말보다 느린데 수레까지 끌며 대체 어떻게 저들을 따돌려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행히도 말을 탄 쪽에서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도망칠 수 있는 확률은 높았다.
도망치는 데 집중하던 노새는 언제부턴가 수레 뒤쪽에서 새까만 기운이 흘러나오는 걸 깨달았다. 노새는 다급하게 외쳤다.
“야, 야! 너 아무것도 할 생각 하지 마! 일단 도망갈 거야!”
마검의 힘을 빌려 상황을 정리하려던 로제는 그 힘을 거둬들였다. 이게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노새의 외침에는 굉장한 강제력이 있었다.
정신없이 달리는 노새가 끄는 수레에 타 있던 로제는 문득 색다른 빗소리가 들린다는 걸 깨달았다. 거센 빗줄기 때문에 온갖 잡음이 묻혔지만 이 소리만은 제법 크게 들렸기에 눈치 챌 수 있었다.
펑퍼짐한 옷가지에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다.
“안녕하시오?”
느닷없이 노새가 급정지를 시도했다. 놀랍게도 관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지 수레는 미동도 않았기에 로제는 멈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노새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흐억! 이 새낀 또 여기 왜 있어? 오늘 무슨 날이야? 멍청한 새끼들만 줄줄이 땅콩 식으로 계속 만나네? 그래도 너 잘 만났다! 가서 저거 정리 좀 해!”
“와하하하하! 뭐라는 거요? 누누이 말하는데, 난 당신 말을 못 듣는단 말이요! 와하하하! 나 참! 이 노친네야, 아직도 변한 게 없어서 정말 기쁘오! 와하하하!”
“염병 그만해에에에!”
저 멀리 보이는 리페프론트와 그를 뒤따라오는 인영에 집중하던 로제는 노새와 다른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노새의 앞에는 비와 흙탕물에 잔뜩 젖은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광대들이나 걸칠 우스꽝스런 색감과 생김새를 가진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챙이 넓은 고깔모자에 빗물이 잔뜩 고여 있다. 노인은 손가락으로 모자를 튕겨 고인 빗물을 대충 털어냈다. 그가 회색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로제를 향해 웃어 주었다.
로제는 노새의 말을 노인에게 전해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노새가 한 발 빨리 대응했다.
“이런 염병할 놈의 새끼 진짜! 저길 봐! 저길 보라고!”
노인은 콧김을 내뿜으며 바닥을 쿵쿵 찍어대는 노새와 멍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로제를 번갈아봤다. 노인은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에 턱을 꽂고 고개를 이상한 각도로 꺾었다. 그가 로제에게 물었다.
“헌데 유세리아 님은 어디 계시오? 아, 지금은 이 이름을 안 쓰나? 아무튼 이 수레 주인은 어디 있는지 아시오?”
“저 뒤에 있잖아 이 개 빡대가리 새끼야! 야! 아오, 씨발!”
“와하하하! 들리진 않아도 이게 인연이 오래 되었다보니, 노새 당신이 하는 말이 어느 정도는 들리오! 나의 아름다운 근육을 칭찬한 거 아니오? 하하하!”
“바빠 죽겠는데 염병하네, 이 씹새끼 증말! 넌 씨발 그 뇌까지 근육인 대가리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어! 대머리 새끼야!”
호탕하게 웃던 노인은 문득 로제를 쳐다보곤 입을 크게 벌렸다. 그는 헛기침을 하곤 고깔모자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웠다. 로제는 옆머리만 간신히 남아 있는 노인의 벗겨진 머리를 쳐다봤다. 노인이 방긋 웃으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거 초면에 실례했소. 내 소개부터 했어야 하는 것을……. 나는…….”
“야! 왜 가다 멈추고 지랄이야! 튀라고!”
저 멀리서 들리는 리페프론트의 외침에 노인이 수레 뒤로 시선을 옮겼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노인은 목을 길게 빼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리고 폭소를 터트렸다.
“와하하하하하! 이거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난리구만! 그리운 옛날 생각이 나는데!”
“지랄 말고 제발 좀 빨리 가서 좀!”
“허허, 욘석들. 열정을 갖고 사는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노친네 죽이면 큰일 난단다. 이 할애비가, 대마법사의 맛 좀 살짝쿵 보여줘야겠구나!”
노인이 어깨를 돌리며 수레를 지나쳤다.
비를 피할 곳을 찾던 리페프론트는 아직 여름임에도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앞을 보기도 힘든 빗줄기 속을 뚫고 한참을 헤맸다. 그러던 중 수레로부터 제법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큰 동굴을 발견했다.
큰 동굴은 생각보다 위험이 많다. 저토록 사람이 여럿 들어가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것들은 특히나 그렇다. 하지만 당장 얼어 죽을 것 같은데 그런 이성적인 생각을 할 리가 없다. 리페프론트도 비를 피할 곳을 찾자마자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동굴 내부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여기서 이상함을 느꼈어야 한다. 그러나 리페프론트는 그저 비를 피하려던 여행자들이겠거니 생각하며 동굴 깊숙이 들어갔다. 이내 그리 깊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젖은 옷을 말리고 불에 고기를 구워먹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하려던 리페프론트는 그들 뒤로 피와 멍투성이인 나체의 여자들을 발견했다. 그녀들 중 아직 정신이 있던 이들은 리페프론트의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그 즈음 그는 위험한 장소라는 걸 직감했다. 여자들이 소리치기 전에, 저들이 눈치 채기 전에 슬그머니 왔던 길로 돌아 나가려 했다. 그리도 놀랍도록 재수가 없었는지 저들의 일행과 딱 마주쳤다.
“응? 넌 뭐……?”
“우아아아아오아아으가아악!”
너무 놀란 나머지 리페프론트는 괴성을 내뱉고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한 번도 싸움이란 걸 해본 적 없는 몸이었지만 타고난 힘이 장사였다. 그의 주먹에 맞은 이는 이빨이 우수수 부러져나가며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제멋대로 흔들리는 눈의 초점을 간신히 맞춰 기절한 사내를 바라봤다.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곧바로 리페프론트의 괴성에 내부의 다른 인원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그들이 들고 있는 피가 덜 닦인 병장기의 모습에 리페프론트는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팅팅 부은 주먹을 붙들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리페프론트는 인근 도적들의 소굴에서 빠져나왔다. 분노한 도적들을 그 뒤를 줄줄이 뒤쫓는다는 것만 빼면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리페프론트를 말을 타고 뒤쫓던 도적 무리의 행동대장, 메이브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비가 와서 말들의 움직임이 굼뜨다지만 고작 뛰는 인간 하나를 못 잡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진흙 바닥에 영향을 받는 건 저 인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메이브는 혀를 찼다. 상황이 상황이었다면 저런 인간쯤은 무시해도 된다. 하지만 요 며칠 계속된 ‘전리품 사냥’으로 라그리엘라와 볼렌드라 전역에서 대규모 토벌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본거지를 염탐하고 가려는 자를 살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자가 두 공작령에서 보낸 정찰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쫓아도 쫓아도 좁혀지지 않을 것 같던 거리가 점차 좁혀지기 시작했다. 메이브는 오늘 충분히 달려 지쳤을 애마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며 더욱 속도를 올렸다.
거의 다 따라잡았을 때 메이브는 리페프론트가 앞을 보며 뭐라 소리치는 걸 들었다. 리페프론트를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에는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는 수레 한 대가 보였다. 메이브는 이들이 정찰대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뒤따라오던 도적에게 손을 내밀며 외쳤다.
“창!”
도적은 들고 있던 창을 던져주었다. 이렇게 비바람이 거세게 불고 말을 타고 달리는 와중에도 정확하게 메이브에게 창을 던져주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메이브는 창을 빙글 돌리고 던질 준비를 했다.
‘바람이 너무 쎈데……. 맞추는 것도 장담하기 어렵겠어.’
최대한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맞출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가 창을 던졌다. 창은 거친 비바람에 궤도가 틀어졌지만 다행히도 표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명중이 확실했던 순간, 어느새 리페프론트의 등 뒤로 나타난 우스꽝스러운 복장과 고깔모자를 쓴 노인이 그것을 붙잡았다. 메이브가 당황해 고삐를 잡아당겼다.
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그를 뒤따라오던 도적 무리도 급하게 제동을 걸었다. 메이브는 당황하며 주변을 살폈다. 리페프론트는 도망가고 있었지만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뒤따라오던 도적들이 메이브를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메이브의 안장에 쪼그려 앉아 있는 고깔모자를 쓴 노인이었다.
“대장! 뒤에!”
도적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자 노인은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아이코! 숙녀 분들은 안 계시네? 이잉……, 쯧. 자, 신사 여러분! 여기 세기의 대마법사의 등장이올시다! 와하하하!”
노인은 벌떡 일어서며 두 팔을 하늘 높이 추켜세웠다. 기이한 노인의 행동에 도적들은 잠시 어이가 없어 그를 쳐다보았다. 허나 메이브는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노인을 떨어뜨리기 위해 등자에서 발을 뺐다. 메이브는 안장을 팔로 붙잡고 그대로 몸 전체를 들어 올렸다. 메이브는 물구나무 선 자세에서 한쪽 팔을 떼 무게중심을 옮겼다. 거기서 그대로 노인의 목을 발뒤꿈치로 내려찍으며 안장에서 떨어졌다. 이 모든 게 한 동작이었다.
“꽥!”
노인과 메이브는 볼품없이 나가떨어졌다. 메이브는 바로 몸을 굴러 노인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도적들은 노인에게 창칼을 집어던졌다.
진흙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던 메이브는 순간 다리의 고통에 무릎을 꿇었다. 느낌이 이상하다. 이건 다리가 부러졌을 때나 느끼던 고통이다. 메이브가 이를 악물었다.
‘개소리! 평범하게 친 것도 아니고, 강철도 찌그러뜨릴 정도로 충분히 강화했…….’
“끄응…….”
노인이 진흙으로 뒤덮인 몸을 일으켰다. 분명 벌집이 되었어야할 노인의 몸은 멀쩡했다. 그저 그 우스꽝스런 옷에 상처가 좀 났을 뿐이다. 당황하는 도적들 틈에서 노인이 밝게 웃었다.
“노인공경이 아니라, 노인공격이로군! ……노인공격? ……노인.”
그러더니 난데없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노인이 행복한 얼굴로 도적들이 던진 창 하나를 붙잡았다. 그 순간 메이브는 노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몸서리쳤다.
고깔모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홍채 없는 회갈색 동공과 붉고 희끗희끗한 혈관이 도드라진 검은 눈자위가 메이브를 내려다봤다. 웃고 있는 입과 달리 어지러울 정도의 살의가 깃들어 있다.
노인이 창을 붕붕 돌렸다. 이윽고 유리잔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노인은 창대를 어깨에 끼고 팔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리페프론트를 뒤따라오던 일곱 명의 도적과 일곱 필의 말은 세는 게 벅찰 정도의 고깃덩이가 되어 흩뿌려졌다. 노인이 허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자, 이 대마법사 쿼드리치의 실력은 자알 보셨습니까, 신사 여러분?”
노인은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는 수염에 묻은 진흙을 털며 리페프론트에게 다가갔다. 리페프론트는 미끄러져 구른 탓에 도저히 봐줄 수 있는 몰골이 아니었다. 쿼드리치는 며칠 굶은 거지도 그에게 먹을 걸 나눠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입에 들어간 진흙을 뱉어내는 리페프론트에게 쿼드리치가 손을 내밀었다.
“이야, 이것 참!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렇지요?”
“……에휴.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내 머리가 저기 굴러다니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소름끼쳐.”
“으잉? 내 말은 그게 아닌데…….”
쿼드리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진흙을 털어내는 리페프론트를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노새가 수레를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쿼드리치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노새는 주변에 널브러진 핏덩이들을 보며 안도했다.
리페프론트와 노새, 도적들마저 쿼드리치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허나 로제는 그 움직임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저 무위는 인간의 경지가 아니다.
진흙을 대충 털어낸 리페프론트가 일어났다. 심한 몰골이었지만 거센 빗줄기 때문에 진흙은 금방 씻겨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심호흡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페프론트가 고깔모자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쿼드리치에게 물었다.
“도와준 건 고마운데, 너 같은 사기꾼이 여기서 왜 알짱거리냐?”
“사, 사기꾼이라니! 거 말이 심한 거 아니오? 이 나는 지고의 대마법사, 쿼드리치! 절대 사기꾼처럼 격 떨어지는 인간말종이 아니란 말이오!”
“무슨 마법도 못 쓰는 게 대마법사야, 무식한 새끼야.”
“마법이라면 쓰고 있소만?”
쿼드리치는 광대 복장의 소매를 걷었다. 펑퍼짐한 옷이었기에 어깨까지 접는 게 가능했다. 쿼드리치는 안 그래도 근육질인 팔에 힘을 줬다. 근육들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렸다. 쿼드리치의 징그러울 정도로 커다란 근육질의 팔은 리페프론트의 머리만 했다. 쿼드리치는 자신의 이두에 가볍게 입맞춤하곤 리페프론트를 바라봤다. 리페프론트는 여든은 넘어 보이는 쿼드리치의 비정상적으로 건강한 몸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염병하네. 옛날도 아니고 힘만 주구장창 키운 새끼가 무슨 놈의 마법사? 씨발 니 팔뚝을 봐라, 이 새끼야. 그걸로 치면 사람 대가리 함몰이야, 알아?”
“와하하하! 아, 진정한 마법이란 곧 이 몸! 과 마음! 이라는 걸 깨달은 것뿐이오. 대리석 조각처럼 갈라진 이 아름다운 신체,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이야말로! 진정한 마법이지! 암! 에잉, 쯧쯧. 요즘 마법 좀 쓴다는 놈들 보면 허약해 빠져가지곤……. 자고로 마법이란 말이지!”
“아가리 해, 이 꼰대새끼야.”
리페프론트는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쿼드리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리고 후회했다. 쿼드리치의 머리는 너무 단단했다. 손을 감싸 쥔 채 고통에 신음하는 리페프론트를 보며 쿼드리치는 신명나게 웃었다.
“봤소? 이게 마법! 이란 것이야!”
“씨발. 물건 사라지는 마법 보여준다면서 손으로 종이처럼 짜부라뜨리는 미친 새끼가 무슨…….”
“허허허. 그건 마법이 아니고 힘자랑이오만?”
“아, 개소리 그만 처 하고 왜 여기서 알짱거리냐고?”
리페프론트가 윽박지르자 쿼드리치는 울상을 지었다. 그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거요?”
“그 쌍판 보기 싫어서 그런다, 왜?”
“……힝.”
“……힝? 어후, 이걸 줘 팰 수도 없고 진짜!”
리페프론트는 쿼드리치를 한 대 칠 것처럼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곧 때려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걸 깨닫고 천천히 팔을 내렸다.
“서커스 공연으로 안 그래도 바쁜 새끼가 이런 곳에서 탱자탱자 비 처 맞고 놀고 있으니, 너 같은 새끼랑 같이 일한다고 개고생 하고 있을 놈들이 불쌍해서 그런다, 돌대가리 광대 놈아.”
쿼드리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다 젖은 옷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리페프론트는 도망치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노새를 바라봤다. 노새는 헥헥거리며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리페프론트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넌 또 왜 그 모양이냐?”
순간 로제는 노새의 이마에서 ‘툭’ 소리가 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뭐? 왜 그 모양? 몰라서 묻냐? 야 이 병신새끼야. 저 도적들 네가 끌고 온 거잖아! 하마터면 다 죽을 뻔했는데 뭘 잘했다고 목석마냥 처 서 있냐? 뭘 잘했다고 서 있냐고, 어?”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지. 한 번의 실수로 윽박지르는 건 참 못된 짓이야. 그러니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마. 난 관대하니까.”
“하여튼 시발 아가리 뚫려 있다는 게 지껄이는 수준 보면 짐승만도 못해, 어째? 확, 씨발! 됐고, 쟤는 여기 왜 왔데? 얼마 전에 라그리엘라에서 공연한다고 안 했나?”
“낸들 아냐? 야! 노인네! 너 왜 왔냐고!”
“아, 거 되게 떽떽대네. 좀 기다려 보쇼. 노친네 인내심이라곤……, 쯧쯧.”
“누구보고 노친네라는 거야, 이 영감탱이가!”
품속을 뒤지던 쿼드리치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쿼드리치는 추운 날씨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떨곤 혀를 찼다. 뭔가를 말하려던 쿼드리치는 수레에 타고 있는 로제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쿼드리치는 고깔모자를 푹 눌러 쓰며 말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못 보던 광경일세……? 내가 아는 한 저 수레에 산 사람을 태우는 걸 본적이 없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무슨 바람이 분 거요? 아니면 저……, 숙녀분에게 특별한 거라도 있나?”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물음에나 답하쇼, 제발.”
“에잉, 쯧쯧. 옛다.”
“옛다? 미쳤지 이게?”
“와하하하!”
쿼드리치는 다 젖은 종이 한 장을 휙 던졌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종이는 리페프론트에게 가지도 못하고 찢어져 땅에 처박혔다. 진흙 속에 떨어진 종이는 굵은 빗방울에 맞아 원래 모습을 알아 볼 수 없게 망가졌다. 로제를 포함한 세 사람과 한 마리의 시선이 종이에 고정되었다.
빗소리만이 들린다. 그 외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 게슴츠레한 눈의 리페프론트와 노새가 고개를 돌려 쿼드리치를 쏘아봤다. 쿼드리치는 지금 이 서늘함이 날씨 때문만은 아닐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슬며시 리페프론트와 노새를 쳐다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는 로제도 슬쩍 돌아봤다.
결국 그들의 질타 어린 시선(로제는 멍했다)을 견디지 못한 쿼드리치가 입을 열었다.
“보, 볼렌트라에서 순회공연이 있…….”
리페프론트가 쿼드리치를 후려쳤다. 그리고 땡땡 부운 주먹을 감싸 쥐며 발을 굴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노새는 경멸을 담아 쳐다봤다. 멍이 든 손을 탈탈 털며 리페프론트가 소리쳤다.
“야 이 개새끼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됐을 거 아냐! 뭔데! 대제 뭐 중요한 거라고 뜸을 처 들이고 지랄이야, 지랄은! 어휴! 진짜 이걸 그냥!”
“와, 와하하하……. 이, 이게 바로 마, 마법이오!”
“아가리, 아가리! 그놈의 아가리를 씨발!”
리페프론트는 있는 힘껏 쿼드리치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고통을 호소했고 다시 때리기를 반복했다. 그 상황에서 쿼드리치는 호쾌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노새가 말했다.
“저런 머저리들 신경 쓰지 마. 가능하면 쳐다보지도 마. 똑같이 바보 돼. 지지야, 지지.”
로제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나아가다 운 좋게 버려진 폐가를 발견한 일행은 잠시 그곳에 머물며 비를 피하고 있었다.
“나는 쿼드리치라고 하오! 세계 제일의 마법사이며 위대한 현자이고 커다란 서커스단을 이끄는 훌륭한 단장이기도 하지!”
“야, 저 염병할 병신은 왜 데리고 왔어?”
“야, 얘가 너보고 좆같은 쌍판 치우고 그 똥내 나는 아가리 싸물고 가능하면 저 돌덩이에 대가리 처박고 뒤지라는데.”
쿼드리치는 수레를 끄는 노새와 뒤따라오는 리페프론트를 번갈아 쳐다봤다. 로제는 어떻게 하면 7어절짜리 문장이 한 다리를 거치자 그 두 배가 넘는 문장이 되는지 궁금했다. 쿼드리치가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불어 넣었다.
로제는 쿼드리치가 합류한 뒤로 툭하면 노새와 리페프론트에게 심할 정도로 괴롭힘 당하는 모습을 지겹도록 봐왔다. 무려 합류한 지 한 시간이 안 됐는데 ‘지겹다’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쿼드리치는 애써 저 둘을 무시하며 로제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오만, 그대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소?”
“뭔데 내 손님한테 잘난 듯이 치근덕대고 있냐? 아가리 처 싸물고 제발 갈 길 가라니까?”
“말로 해서 알아들을 새끼였으면 저러고 있겠냐? 저 새끼가 저러고 얼굴에 철판 깔고 다니는 건 순전히 네 잘못이야. 이젠 인정해.”
“아, 거 왜 자꾸 끼어드쇼? 거기 들러리 양반 입 좀 다무쇼! 그리고 노새 너도! 비명 소리 같아서 소름끼친단 말이야!”
셋은 한동안 말싸움을 이어갔다.
계속 이런 식이었다. 쿼드리치가 로제에게 말을 걸면 리페프론트와 노새는 기다렸다는 듯 맹렬하게 반응한다. 로제 입장에선 화가 날 법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노새와 리페프론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토록 거슬렸건만 이젠 저들의 만담을 지켜보고 있는 게 즐겁다.
로제는 투닥거리는 셋을 보다 문득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하며 표정을 굳혔다.
이런 상태가 되기 전에도 감정이 풍부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무뚝뚝하다거나 웃으란 소리를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웃고 떠들 수 있던 건 오직 가족 앞에서 뿐이었다. 스스로도 왜 타인에게 무뚝뚝한지 알지 못했다. 더욱이 지금껏 단 한 번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미소를 짓거나 웃어본 적이 없다.
“와하하하하! 이 노친네가 드디어 노망이 났군!”
“액면가만 봐도 틀니 끼고 다닐 것처럼 생긴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이 머저리 새끼야. 머리털에 갈 영양분까지 뇌 대신 들어 있는 근육에 몰려 빡빡이 된 걸론 모자랐냐? 근육대가리 새끼야, 생각은 하고 사냐?”
“허? 생긴 걸로 트집 잡으시겠다? 그럼 어디…….”
리페프론트가 쿼드리치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러자 쿼드리치는 정말 억울하단 얼굴로 빽 소리 질렀다.
“아니, 말도 다 안 했는데!”
“네가 할 말이야 뻔하지, 빡대가리야. 내 손님한테 그만 건들거리고 예르하 네일의 소재나 아는 대로 불어. 모른다고 하기만 해. 혓바닥을 잘라가지고 들개 먹이로…….”
“예르하? 현자 말이오?”
리페프론트는 싸한 얼굴로 쿼드리치를 쳐다봤다. 쿼드리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런 리페프론트를 마주봤다. 현자라는 말에 움찔한 건 비단 리페프론트만이 아니었다. 노새가 풀을 뜯다가 깜짝 놀라 말했다.
“현자? 그 현자? 베르텐게랑 하나 더 있다고 듣긴 했는데, 예르하란 놈이 현자라고?”
당연히 노새의 말을 듣지 못하는 쿼드리치는 손으로 노새를 가리켰다. 해석 좀 해주라는 뜻이었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리페프론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쿼드리치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몰랐던 거요? 노친네 정신머리 없긴! 하기사 현자라는 걸 알았으면 그렇게 대놓고 이름을 입에 달고 다니진 않았겠지.”
노새는 허탈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이렇게 헤맬 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일이 꼬이나 했다.”
“허허허, 뭐라 하는데 알아 듣질 못하니 원. 아무튼 알아서 현자보고 잘 피해 다니라고 광고를 하고 있었구만? 쯧쯧, 노친네 누군지도 몰랐으면 조심 좀 하지.”
리페프론트가 이마를 퍽 소리 나도록 짚었다. 그는 애꿎은 돌부리를 걷어찼다. 안타깝게도 리페프론트의 신발은 신발의 모양새만 갖추고 있었다. 신발보단 발싸개란 말이 어울릴 물건은 그 충격을 제대로 완화시켜주지 못했다. 리페프론트는 발을 붙잡고 뒹굴뒹굴 굴렀다. 노새가 귀를 축 늘어뜨렸다.
“에이, 시발 거. 큰일 났네.”
쿼드리치가 큰 소리로 웃었다. 리페프론트는 처마를 벗어나 비가 쏟아지는 땅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철푸덕 소리와 함께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빽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쿼드리치는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는 리페프론트를 재밌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노새는 한심함을 담아 말했다.
“머저리 새끼. 아, 신부. 넌 네가 찾는 사람이 현자라는 거 알고 있었어?”
로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노새는 로제를 볼 수 없는 자세였다. 로제는 말로 답하려 했으나 노새가 먼저 말했다.
“하긴, 그렇겠지. 현자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로제는 당황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노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리페프론트의 광란을 지켜보다 질린 쿼드리치가 마침 그들을 쳐다봤다. 쿼드리치는 굉장히 놀란 얼굴로 로제에게 물었다.
“이럴 수가? 숙녀분은 저 노새의 말이 들리는 거요?”
“괜히 답해주지 않아도 돼. 저놈은 무시하는 게 상책이야.”
“허허……. 저 주인처럼 잔뜩 꼬인 심성을 가진 노새라면 분명 내 험담을 늘어놓고 대답하지 말라고 했을 것 같은데, 혹시?”
쿼드리치는 기대에 부푼 채 로제를 주시했다. 로제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망설이다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쿼드리치가 피식 웃었다. 답은 충분할 정도로 얻었다. 쿼드리치가 말했다.
“뭐가 됐든, 좋은 소식이 있소. 그대가 찾는 현자는 어제까지만 해도 볼렌드라에 있었소.”
“뭐? 진짜야? 아……, 못 듣지. 세상 쓸모없는 새끼. 야! 거기서 지랄 그만하고 빨리 이쪽으로 와!”
“아, 걱정 마시오. 내 대마법사라 하지 않았소? 현자들의 수준 낮은 색적 능력으론 날 감지할 수 없소.”
“저건 사실이야. 저놈은 플랑이랑 유이하게 현자들의 탐색에 걸리지 않거든. 그렇다고 대마법사 같이 고상한 건 아니고, 그냥……. 음……. 그냥 질 낮은 광대지.”
“노새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걸 보니 또 내 험담인가? 아니면 나의 위대함을 알아봐 칭송하려는 거려나? 와하하하! 아무튼 예르하는 볼렌드라에 있었소. 정확한 위치까지는 안타깝지만 나도 모르오. 허나 다른 현자인 베르텐게라면 잘 알고 있소. 지금……, 어디보자……. 그렇지! 욘석 또 여기 있구나. 베아루드에 있군. 어떻게…… 베르텐게에 대해 더 말해드리면 되겠소?”
“베아루드? 확 씨! 처 맞을라고. 넌 볼렌드라 가면 땡인데 베아루드에 있는 새끼 소재 알아서 뭐하게? 가서 또 뺑뺑이 처 돌다가 어디로 갈 줄 알고? 이게 진짜…….”
“와하하하! 뭐라는 거요! 와하하하!”
로제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느닷없이 필요한 정보를 준 건 고맙지만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허나 노새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노새가 인상을 썼다.
“흥. 이 개자식……. 우릴 도와줄 때부터 짐작은 했는데 이건 너무 노골적이네. 사는 데 미련도 없는 놈이……. 이봐, 신부. 미안한데 말 좀 전해줄래? ‘유예’ 한 마디면 돼.”
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 유예.”
그러자 쿼드리치는 빙긋 웃었다. 지금까지처럼 호탕하고 쾌활한 면은 전혀 없는 미소였다. 로제는 그의 얼굴에서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었다. 쿼드리치는 제풀에 지쳐 숨을 헐떡거리던 리페프론트의 뒷목을 붙잡고 질질 끌고 왔다. 리페프론트가 지친 눈으로 쿼드리치를 올려봤다. 쿼드리치가 말했다.
“시간 좀 걸릴 거 같소.”
쿼드리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던 리페프론트는 잔뜩 웅크리고 있는 노새를 쳐다봤다. 노새는 귀를 접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잠시 후 리페프론트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리페프론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렷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불같이 화를 냈다.
“넌 씨발 나한테 반쪽이니 뭐니 어쩌니 그딴 말 할 자격이 없다, 이 씨방새야! 생각해보니 거의 대부분 너 때문이잖아! 야이, 씹……. 개……! 하……. 가서 보자.”
“와하하하하! 혼났군, 혼났어!”
시끄럽게 웃어대는 쿼드리치를 향해 리페프론트가 윽박질렀다.
“아가리 해, 아가리! 이 광대 새끼야! 당장 끌고 가서 처박아 버리기 전에!”
쿼드리치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의 두 눈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그리고 입술을 오므린 채 주먹을 가져다 댔다. 더해 숨까지 참았다. 리페프론트는 재빨리 노새의 머리를 쥐어박고 돌아와 쿼드리치를 발로 찼다. 쿼드리치는 멀쩡했고 리페프론트는 정강이를 붙잡고 신음했다. 리페프론트가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근데 뭔 얘기 했냐?”
“아, 예르하가 볼렌드라에 있다는 거요.”
“뭐 진짜? 이런 씨발, 그걸 왜 이제 말해?”
“듣기도 전에 광란의 퍼덕임을 펼친 건 노친네, 당신이오.”
“에이, 씹. 나머지는?”
“베르텐게는 베아루드에 있지.”
“베……, 뭐? 집어쳐 새끼야. 말도 안 되게 머네. 그래서 예르하가 뭐?”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고, 당분간 떠나지 않을 거요. 자세한 위치는 모르고.”
“뭐야, 왜 그렇게 확신해?”
“와하하하! 그럴 이유가 있소!”
“새끼 또 뜸들이지? 그런데 왜 볼렌드라에 있는 거냐? 현자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평소엔 사람 없는 데서 지내는 자연인들 아냐?”
“평소엔, 말이지.”
쿼드리치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끝맺었다. 리페프론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쫓냐? 우리 말고?”
“물론. 그것도 어마어마한 놈이지.”
“팍, 씨! 뜸들이지 말고 말 해. 누군데?”
쿼드리치는 로제를 바라봤다. 그는 리페프론트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리페프론트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쿼드리치를 따라 기세가 꺾이지 않은 빗속으로 걸어갔다. 적당히 멀어졌다 생각한 쿼드리치가 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증오가 현자를 찾고 있소.”
리페프론트는 말문이 막혔다. 배덕의 주, 그중에서도 가장 고강한 욕망이 같은 인물을 목표로 한다. 리페프론트는 쿼드리치를 째려봤다.
“너도 현자잖아. 가서 대신 희생해.”
“와하하하하! 와하하하하하하! 제법 웃겼소! 와하하하하하하! 끄끆, 끄흐흑! 하, 정말 농담 하나는 예전부터 끝내주는군! ……어, 진심인 거요?”
“이 상황에 장난치게 생겼냐? 목 위에 달고 있는 건 대가리가 아니라 진짜 장식품이냐, 정신머가리 없는 새끼야?”
“쯧쯧쯧. 현자 자리를 소중한 제자에게 내준지가 언젠데 뭔 소릴 하는 거요? 진짜 노망났소?”
“너야말로 뭔 소리하냐? 치매야? 아직 네가 살아 있는데 뭔 소리해? 윗세대가 죽어야 현자 계승이 온전…….”
리페프론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자조했다.
“치매는 나였군.”
그 모습에 쿼드리치는 껄껄 웃었다.
“노친네, 노망난 게 맞는 게지. 현자 나부랭이 체페드는 죽었소. 나는 대마법사 쿼드리치요. 이미 오래 전 현자의 직무를 내려놓았으니 증오도 나를 찾지 않는 게요. 뭐, 나와 다르칼이 지금도 현자였다면 증오도 손 쓸 방법이 없었겠지. 세계의 도서관에 손을 뻗은 늙은이와 이제 그곳으로 가는 길을 밝히는 등불을 집은 젊은이의 차이는 크니. 손가락 빨며 다음 세대를 기약하는 증오의 모습이라……, 그것 참 희극이로군.”
“……그럼 베르텐게도 쫒기는 거야?”
쿼드리치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아니오.”
“왜?”
“다르칼이 가지고 있던 ‘현자의 서고’ 때문이지.”
“그건 또 뭐야?”
“현자만이 가진, 일종의 특혜요. 음. 특권이라 하는 게 맞겠군. 무슨 권리가 주어지는 아무도 모르오. 타인에게 말하지 않으니 더더욱 오리무중이고. 내 특권이야 잘 아시지 않소. 그러니 당신과 이렇게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는 게고.”
“아……, 그게? 참 별 볼 일 없는 걸 특권으로 받았네.”
“와하하하하! 당신이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요! ‘태양’마저 당신이 말하는 그 별 볼 일 없는 특권을 가진 이 나를 부러워하지 않았소!”
리페프론트는 코를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또 그렇긴 하네.”
“아무튼, 증오는 현자를 찾고 있고, 그 현자는 볼렌드라에 숨어 있소.”
리페프론트는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더 깊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도 모자랄 텐데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작령에 숨는다. 거기다 아무리 인구가 적어도 국경을 책임지는 솔스타힐의 수도, 솔스타힐에만 최소 몇 백만이 상주한다. 후방 중에서도 끄트머리인 볼렌드라는 그 몇 배는 더 바글바글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등잔 밑이 어둡다는 판단 하에 내린 결정은 아니다. 망자가 끄는 수레의 길잡이들이라면 충분히 찾아낼 테니. 리페프론트는 현자가 볼렌드라에 숨은 이유를 몇 가지 추측했다. 그리고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이유를 입 밖으로 냈다.
“플랑드웰이 볼렌드라에 있나보네.”
쿼드리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신께선 볼렌드라에 거처가 있고 사냥감의 위치가 확정되지 않으면 웬만해선 움직이지 않지. 욕망의 기사로부터 쫓긴다면 가장 안전한 곳은 이 세상의 가장 깊은 곳도, 가장 높은 곳도 아니오. 바로 플랑드웰의 곁뿐이지. 물론 현자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쓸 자애로운 반신이 아니니, 잠잠해질 때까진 몸을 숨기겠지만.”
“그래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페프론트가 뜬금없이 물었다. 쿼드리치는 전혀 ‘그래서’라는 말이 나올 상황이 아니라 당황했다.
“뭐가 그래서요?”
“너 볼렌드라에 공연 있다며.”
쿼드리치는 피식 웃었다. 리페프론트는 같이 갈 거냐고 묻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동행을 싫어하는 남자가 같이 갈 거냐고 묻는다. 쿼드리치는 자신의 내준 정보가 리페프론트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걸 알았다. 쿼드리치가 말했다.
“언젠 허락 구하는 거 봤소? 싫다 해도 그럴 거였소.”
과거 남부는 북부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왕들의 시대였다. 볼키하 공작가는 당시 남서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왕족이었다. 왕국의 이름은 볼렌드라. 지금의 볼렌드라 시의 전신이다. 하지만 왕시해자의 난동으로 남부는 수많은 왕들이 암살당했다. 볼키하 왕국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왕이 죽었으니 세자가 그 자리에 오르면 된다. 하지만 왕이 죽고 세자가 그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소란이 일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아주 약간의 혼란을 틈타 지금은 제국이라 불리는 아페프라드 왕국이 시기 적절하게 침공했다.
볼렌드라는 남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여섯 개의 강대한 국가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북부의 페안 공국과 남부의 아페프라드 왕국을 동시에 상대하던 솔스타힐 왕국 못지않은 국력을 가졌었다. 솔스타힐 왕국이 특유의 기병을 통해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하다면 볼렌드라는 대성벽을 낀 방어에 능했다.
볼렌드라는 지금껏 단 한 번을 제외하면 외세의 침략을 당한 적이 없다. 아니, 침략을 시도한 국가는 많았으나 모두 대성벽을 넘지 못하고 사라졌다. 왕시해자가 아니었다면 아페프라드 왕국도 그 전철을 밟았으리라. 볼렌드라는 혼란스러운 내정을 수습하느라 대응이 늦었고, 아페프라드의 대군은 성벽을 넘었다.
제국으로 통일된 후 황제는 다른 약소국들처럼 현재의 다섯 공작들을 모두 숙청하고자 했다. 허나 그럴 수가 없었다. 다섯 왕국은 혼란스러운 와중 아페프라드에게 당해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허나 그들을 완전히 수족으로 넣기엔 아페프라드도 시간에 쫓겼다.
왕시해자가 마련해준 시간은 턱없이 짧았고, 그 안에 모든 남부를 점령해야 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초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같은 중부에서 패권을 다투던 페드키아를 점령함과 동시에 그들의 군대를 동원해 서쪽의 라그리엘라와 남동쪽의 미스텔리아, 남서의 볼렌드라를 동시에 친다. 그중 상대적으로 가까운 라그리엘라에 최정예를 투입한다. 볼렌드라와 미스텔리아에는 일부의 병력만 보내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한다.
이 상황에서 가장 위협적인 건 북쪽의 솔스타힐이었으나 그들은 아페프라드가 아래쪽에서 깽판을 놓는 와중에 페안과 전력으로 맞붙는다는 선택을 했다. 덩치가 불어난 아페프라드는 엄청난 위협이지만, 그들에겐 눈앞의 숙적이 더 중요했다.
이렇게 서쪽의 라그리엘라를 최대한 단시간에 함락시킨다. 그리고 볼렌드라에 약간의 추가병력을 동원한 뒤 모든 전력을 미스텔리아로 보낸다. 이러한 선택은 대성벽에서 지지부진하게 시간이 끌리면 전쟁의 진선미를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다.
힘, 승리, 빠른 종전.
이미 페드키아를 먹은 순간 힘은 차고 넘치며, 라그리엘라까지 규합한 이상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다. 허나 볼렌드라에 집중하는 순간 빠른 종전은 물건너간다. 그래서 지리적으로 먼 미스텔리아를 먼저 쳤다. 무슨 짓을 해도 볼렌드라의 대성벽에서 시간이 잡아먹힌다.
그렇다면 볼렌드라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먹고 그 전력을 때려 박아 성벽을 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이후 마지막으로 페안과 전쟁에 미쳐 있는 솔스타힐을 친다. 그리고 황제는 이 말도 안 되는 정복전쟁을 실천했고, 성공했다.
다만 이토록 급진적인 확장을 해 나가며 점령한 나라의 군부를 온전히 다루기 위해선 그들의 지휘체계를 남겨야만 했다. 이후 남부가 제국으로 귀결되었을 때 황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전력을 보존한 전 왕족들이었다.
이들을 대놓고 죽일 수는 없다. 그랬다간 간신히 누르고 있는 불만이 반란이란 이름으로 튀어나올 테니까. 그렇다고 암살할 수도 없다. 가장 큰 이유는 그만한 실력자가 없다는 거다. 왕시해자가 너무나도 특이한 경우인 거지 암살당한 왕들의 경호가 미흡했던 게 아니다. 하는 수 없이 황제는 그들을 살려두었다. 그리고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를 느꼈다.
북부와의 전쟁. 이 덕분에 제국은 혼란스런 정세를 수습했다. 모든 불만의 화살을 북부 측에 떠넘긴 것이다. 효과적이었으나 다섯 공작들의 불만은 여전했다. 다만 공공의 적을 상대해야하는 전시 상황이기에 입을 닫고 있을 뿐.
이러한 내력을 가진 볼키하 공작가는 위대한 모험가들이며, 뛰어난 탐험가들이고, 솜씨 좋은 사냥꾼들이었다. 그의 영지는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모험하는 열정을 가진 이들을 우대한다. 그렇기에 비단 볼렌드라의 수도 볼렌드라 뿐만 아니라 가장 외진 도시와 마을마저 그런 류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볼렌드라 어디에서고 용병, 모험가, 사냥꾼들을 볼 수 있다. 길거리를 걷다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그런 직업에 종사한다. 그러나 해질녘의 어둑어둑한 거리를 걷고 있는 칼빈 예테르란 남자는 저 셋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모험과 탐험에 대한 열정 같은 건 없으며 사냥감에 대한 존중도 없다. 그는 굉장한 기분파이며 사람을 죽이는 것에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희열을 느끼는 쾌락 살인마다. 이런 칼빈의 직업은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암살자다.
단정하게 기른 적갈색 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졌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 고운 선을 가진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칼빈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잠시 멈춰 섰다. 정리를 끝내고 칼빈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칼빈은 그림자가 드리운 건물 사이사이를 나아갔다. 그러던 중 어느 사내와 어깨를 부딪쳤다. 그 사내는 피하려 했으나 칼빈이 의도적으로 어깨를 갖다 댄 것에 가깝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칼빈이 아닌 사내의 얼굴에는 문신이 있었다. 딱 봤을 때 타오르는 불이라 느낄 생김새의 문신이었다. 칼빈은 이런 문신을 새긴 이들을 잘 알고 있다.
볼렌드라 전역에서 활동하는 ‘살아있는 불길’의 범죄자들이 몸에 새기는 것이다. 이들이 유통하는 마약은 ‘불씨’라고 불리며 그 의존성은 웬만한 마약과 비교를 불허한다. 불씨는 순식간에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지만 극상의 쾌락 또한 선사하기에 한 번 손대면 헤어 나올 수 없다. 수제 마약을 달고 살아 웬만한 것엔 내성이 생긴 길잡이들도 폐인으로 만들 정도다. 이렇기에 볼키하 공작이 눈에 불을 켜고 이들을 쫓고 있다.
볼키하 공작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불길은 아직도 볼렌드라에서 활동한다. 몇 번의 ‘대청소’를 겪은 지금은 기세가 한 풀 꺾이긴 했으나 불씨는 계속 공급되고 있었다. 대청소의 나날에서도 살아있는 불길의 우두머리가 죽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비단 우두머리뿐만 아니라 주요 간부인 타오르는 손과 식어버린 다리들이 건재하다.
더욱이 볼렌드라의 외진 도시인 이곳 ‘가이스힐’엔 대청소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칼빈은 관찰을 마쳤다. 상대방도 관찰을 마치고 칼빈을 무시한 채 마저 목적지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칼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이, 깡패.”
카랑카랑하면서 쇠끼리 부딪쳤을 때 나는 듯한 목소리였다. 굉장히 높고 날카롭다. 듣는 것만으로 경각심을 불어 일으킨다. 사내가 우뚝 멈춰 천천히 돌아섰다. 제법 공포감을 심어주는 모습이었다. 사내의 얼굴 문신이 꿈틀거렸다. 칼빈이 말했다.
“사람 어깨를 치고 갔으면 냉큼 달려와서 ‘죄송합니다’라고 해야지.”
“뭐?”
“니 애미가 그런 것도 안 가르쳐주디?”
사내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사내는 저딴 주제도 모르는 양아치를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라 생각했다. 세상의 무서움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알려줄 것이다. 지금은 바삐 회의장에 도착하는 게 우선이다. 사내가 눈을 떴다. 그 순간 칼빈이 던진 단검이 사내의 턱을 반으로 쪼갰다.
피가 튀고 비명 소리가 뒤따른다.
칼빈은 익살스런 걸음걸이로 피를 흩뿌리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칼빈이 사내의 머리칼을 붙잡고 거칠게 추켜세웠다. 칼빈은 건조한 얼굴로 사내를 찬찬히 뜯어봤다. 인상착의는 확실하다. 칼빈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꾹 누르고 오른쪽으로 밀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칼빈이 입술에서 손을 뗐다. 그가 사내의 윗입술을 붙잡아 올렸다. 왼쪽 위 송곳니가 부러져 있었다. 칼빈이 얼굴을 폈다.
“타오르는 손, 서 브라프서드. 전직 기사 나으리가 이젠 범죄자라……. 난 널 죽이라고 고용된 암살자다.”
브라프서드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이 크게 떠졌다. 칼빈은 싱긋 웃고 말을 이었다.
“의뢰인이 굉장히 요구사항이 많더군? 그래서 지금부터 네 얼굴가죽과 성기를 가져가야겠다. 죽이란 소리는 없었으니 안심하라고.”
칼빈은 턱에 꽂혀 있던 피로 물든 단검을 사정없이 빼냈다. 브라프서드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칼빈의 목을 움켜쥐었다. 칼빈은 강한 아귀힘에도 아랑곳 않고 그의 얼굴에 칼날을 갖다 댔다. 그리고 익숙한 손길로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브라프서드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악착같이 칼빈을 공격했다. 하지만 칼빈은 그의 공격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예술품을 만드는 사람처럼 한 땀 한 땀 조심스럽게 칼질하고 과격하게 가죽을 벗겨갔다.
산채로 얼굴 가죽을 벗겨내는 통에 주변은 온통 피가 튀어 있었다. 칼빈 또한 잔뜩 피를 뒤집어썼다. 칼빈은 가죽을 벗기는 중에 죽어버린 브라프서드의 머리에 단검을 꽂았다. 신경을 건드렸는지 몸뚱이가 움찔거린다.
칼빈은 벗겨낸 얼굴가죽을 자신의 얼굴에 덮어 썼다. 산채로 벗겨내 피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놀랍게도 상처는 없었다. 칼빈은 벌어진 턱 쪽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브라프서드의 아랫도리를 쳐다보았다. 그는 쾌락 살인마이지 동성애자는 아니다. 하물며 이상성욕도 없다. 칼빈은 가죽을 벗길 때와는 달리 굉장히 우울한 얼굴로 브라프서드의 성기를 잘라냈다.
“칼빈 예테르! 아름다운 화풍을 가진 화가이자 절륜한 실력의 공예가! 그의 작품은 언제나 날 설레게 하지!”
성기를 자르고 그 감촉에 식겁한 칼빈은 시체에 앉아 있었다. 그 즈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소리였다. 칼빈은 그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하! 제법 어울리는데?”
그 남자는 딱 제국인하면 떠오르는 모든 신체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일루미네스 공작령, 미스텔리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밝은 금발이 인상적이다. 그의 눈 또한 그 지역에서 흔한 창창한 푸른빛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칼빈의 주의를 끄는 건 부드러운 매력이 흘러넘치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칼빈은 다가오는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질리지도 않나? 그만 좀 따라오지 그래?”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으며 시체를 쳐다봤다. 중요 부위가 피투성이인 걸 본 남자가 기겁하며 말했다.
“네게도 이런 취향이 있을 줄은…….”
칼빈은 머리에 꽂혀 있던 단검을 집어던졌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고, 정확했다. 허나 남자는 날아오는 단검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슬쩍 틀어 피했다. 그리고 목표로 했던 머리를 지나친 단검의 손잡이를 어렵지 않게 붙잡았다.
“킥킥……. 이봐, 내가 널 좋아해서 좀 따라다니긴 했지만 최소한 오늘은 널 쫓아 온 게 아니라구? 개인적인 일 때문에 온 건데 마침 우연히도 네가 있었던 것뿐이지.”
남자는 입을 가린 채 웃으며 단검을 칼빈에게 던져주었다. 칼빈은 똥 씹은 표정으로 단검을 다시 머리에 박아 넣고 남자를 노려봤다.
“어련하실까.”
전혀 믿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남자는 억울하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이봐, 이봐. 정말이야. 사족으로 사실 난 별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끌려왔다고. 안 그래도 내 여신님이 자꾸 내 손에서 벗어나려 하셔서 착잡한데, 여러 일들이 겹쳐서 복잡한 상황이라구. 내 일도 벅찬데 어쩔 수 없이 온 거야.”
남자는 믿어달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하아……, 참. 우린 평소에 간섭하지도 않고, 뭐 시킬 게 있으면 먼저 물어보고 그쪽 요구사항을 들어준 다음에 시키고 그러거든? 굉장히 민주적이란 말이야. 그런데 다른 놈들은 다 들어줘놓고 나만 처 맞기 싫으면 오라는 거 있지? 에휴. 왜 맨날 나만 못살게 구는지 몰라.”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는 느긋하게 걸어와 칼빈에게 비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칼빈은 콧바람을 내뿜었다. 굉장한 불만이 담겨 있었다.
“안 그래도 비좁은데 왜 와서 앉으려고 하는 건지, 이유나 알자.”
“오래 걸었거든.”
“…….”
남자는 잔뜩 피곤한 얼굴로 다리를 두드렸다. “에궁, 에궁.” 칼빈은 대꾸하는 걸 포기했다. 그는 상당한 짜증을 느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남자는 입을 가린 채 키득키득 웃더니 시체를 발로 짓밟았다.
남자는 시체의 가죽 없는 얼굴을 찌그러뜨릴 것처럼 힘을 줬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저 짓누르는 것만으로 사람의 머리를 부술 수 없다. 그런데 남자의 발은 머리통을 깨부쉈다. 그는 박살난 머리에서 흐르는 피와 뇌수를 무시한 채 그것들로 범벅이 된 단검을 집었다.
칼빈은 이럴 거면 왜 비키라 한 거냐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그가 이마를 퍽 소리 나게 붙잡았다. 절척거리는 단검을 묘기를 부리듯 가지고 놀던 남자가 말했다.
“너 일 때문에 여기 온 거지?”
“보면 모르냐? 일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번거롭게 하지도 않았어. 보자마자 목을 땄겠지.”
으르렁거리는 칼빈을 보며 남자는 키득키득 웃었다.
“너랑 난 비슷하면서 참 많이 달라. 안 그래?”
“다르다는 걸 안다면 그만 들러붙지 그래?”
남자는 입을 가린 채 웃었다.
“그건 안 될 소리지. 넌 무조건 우리 쪽이거든. 더욱이 최근 태어난 얼뜨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잠재력이 숨어 있기도 하고. 이대로 흐르는 대로 놔뒀다가 죽어버리면 아깝지. 아까워. 넌 네 재능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칼빈은 뚱한 얼굴을 해보였다. 인간은 죽는다. 그것이 순리다. 칼빈은 자신이 생물을 죽이는 데 희열을 느끼는 정신병자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허나 그의 본질은 악한 인간이지 괴물이 아니다. 이 즐거움 또한 삶이 유한하기에 가치 있고, 이토록 재미있는 것이다. 불사 속에서는 급히 시들어버릴 꽃이다. 칼빈은 남자를 쳐다봤다.
“재미없어. 안 죽는다는 건.”
“킥킥킥! 아직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럴 뿐이라니까? 속는 셈 치고 우리와 함께하자!”
“엔쉬케일.”
금발의 남자, 엔쉬케일은 밝은 얼굴로 칼빈을 바라봤다. 그는 칼빈에게서 긍정적인 답이 나올 거라 믿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그에게 칼빈은 가운데손가락을 들었다.
“엿 먹어라.”
엔쉬케일은 눈을 깜박거렸다. 칼빈은 쓰고 있던 얼굴 가죽에 손을 가져갔다. 굳은 피 때문에 잘 떨어지지 않아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칼빈은 얼굴 가죽을 시체에 얹었다. 그는 품속에서 파란 액체가 든 병을 꺼냈다. 얼굴 가죽에 그 액체를 뿌리고 곱게 접어 품속에 넣었다. 아직도 눈을 깜박이고 있는 엔쉬케일에게 칼빈이 말했다.
“끝이 정해진 삶을 사는 생명의 욕망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거다. 추악한 것도, 선하며 고결한 것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도 모두. 끝이 정해져 있는 삶이기에 그러한 것들을 추구할 가치가 있지. 그 끝에 가 닿을 수 없기에 비로소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거다. 난 너희 같은 불사의 삶을 혐오한다. 머저리 같은 새끼야.”
칼빈은 엔쉬케일을 내버려둔 채 골목길을 걸어갔다. 멍하니 서 있던 엔쉬케일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아, 나의 여신님. 나만의 여신님……! 아리따운 당신을 다시 뵐 때가 너무나도 기다려지네요!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아요!”
점차 커지는 미소에 엔쉬케일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일만 끝나면, 당장 그대를 만나러 가지요. 나의 여신님.”
그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귀까지 찢어진 입 안에는 ‘검붉은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로제는 시끄럽게 떠드는 두 사람과 한 마리를 보는 것에 슬슬 지쳤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구름에 가려진 하늘을 등진 채 서 있는 거대한 성벽에 흥미를 가졌다. 로제는 긴 시간 제국을 떠돌았지만 볼렌드라에 와 본 적은 없다. 소문으로는 들어 봤으나 보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저 성벽은 ‘볼렌드라’가 아니다. 볼키하 공작령의 이름이자 수도 볼렌드라에는 성벽이 없다.
저건 공작령 전체를 모두 감싸고 있는 대성벽, 레시아크라. 왕국 아페프라드가 솔스타힐을 제외한 모든 국가를 점령하고도 저 성벽을 뚫기 위해 엄청난 수의 병사들을 갈아 넣어야 했단 건 너무 유명한 일화다. 그날의 경험이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는지 제국의 초대 황제는 치부나 다름없는 이야기를 역사책으로 펴냈다.
일행과 쿼드리치가 만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로제는 볼렌드라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쿼드리치가 정식으로 합류하고 얼마 안 가 리페프론트와 쿼드리치는 볼렌드라에 대한 주제로 말싸움을 시작했다. 정말 별 것도 아닌 걸로 죽기살기로 싸우는 모습은 정말 꼴불견이었다.
듣다 지친 로제는 볼렌드라가 어떤 곳이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한 번도 지지 않고 말싸움을 하던 두 사람과 가만히 짜증을 표출하던 노새까지 합세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셋의 이야기는 과했다. 너무 과했다. 그 와중에 웃겼던 건 입만 열면 열정적으로 싸우던 셋이 그 열정을 모두 설명에 쏟아 부었단 것이다. 그들은 너무 죽이 잘 맞았다. 한 사람이 말하다 끊기거나 미흡한 부분을 다음 사람이 설명한다. 그가 설명을 잘 못하거나 빼먹은 건 다시 마지막 사람 혹은 한 마리가 잇는다.
처음에는 그들의 말싸움을 보기 싫어 화제를 돌리려 했던 로제가 감화될 정도였다. 설명도 조리 있게 잘 하고 싸우지도 않기에 만족했다. 문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떠들고 있다는 거다. 벌써 이틀이 넘었다. 비는 그쳤지만 저들의 입은 닫힐 줄 몰랐다. 로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이게 또 이 역사를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지! 캬! 뭐부터 시작할지 벌써부터 설레! 역시 이야기에는 소통이지, 암!”
“십분 공감하는 바요! 와하하하하! 나는 바덴펠의 반란으로 운을 떼는 게 좋을 것 같소만?”
“그것도 좋은데 푸른 불 전쟁은 어때? 이 반란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대성벽 건축의 시발점인데!”
“캬! 푸른 불! 그거 좋지!”
“크으……! 푸른 불 전쟁? 역시 노새 당신은 뭘 좀 아는구려!”
그리고 언제부턴가 질문자인 로제는 상관 않고 자기들끼리 흥분하며 얘기를 하고 있다. 로제는 손바닥을 부딪치며 행복하게 웃는 두 사람과 폴짝폴짝 뛰는 한 마리를 주시했다. 몸만 멀쩡했어도 셋 다 한 대씩 쥐어박았을지도 모른다.
바보처럼 웃고 떠드는 일행을 잠시 지켜봤을 뿐인데 어느새 대성벽의 끄트머리를 보려면 고개를 잔뜩 뒤로 젖여야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로제는 멀리선 보이지 않았던 대성벽 주위의 운하를 눈여겨보았다.
‘해자……, 맞지? 좀……, 많이 크지만…….’
보통 성이라면 해자였겠지만 대성벽 주위에는 운하가 흐르고 있었다. 그 운하 같은 해자를 바라보던 로제는 저기에 어느 정도 몸집이 있는 배를 띄워도 운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좀 더 자세히 살피던 로제는 대성벽이 그 운하의 아래까지 깊숙이 박혀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살펴볼수록 인상적인 모습에 감탄했다.
‘하긴……. 일반적인 성이랑 같은 구조였다면 이렇게 깎아낸 지반이 저 성벽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겠지. 두께만 해도 웬만한 성벽의 두세 배 같은데. 휴……. 우리가 쓰던 공성병기로도 무너뜨리는 건 고사하고 외벽에 구멍도 못 뚫겠는 걸? 저걸 대체 어떻게 공략한 걸까? 공성탑으로 넘었나? 아무래도 그게 맞는 거 같은 데…….’
로제는 성벽 끄트머리에 보이는 거대한 발리스타들을 찾아냈다. 성벽과 같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어 발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저 크기로 봐선 공성탑을 노리고 만든 발리스타……. 성벽 곳곳에 교각으로 받치고 있는 도로 같은 저것들은 암만 봐도 발리스타의 이동경로. 웬만한 공성탑이면 저런 무지막지한 걸로 쏘면 두 개는 관통되겠네. 그리고 저 사이사이에 거대한 돌덩이들……, 뭔가 했는데 이제야 알겠어. 발리스타로 관통한 공성탑들 사이에 떨어뜨려 쓰러뜨리는 거네. 그런데 한 번 쓰러뜨리면 두 번은 안 될 텐데? 저 무거운 것들을 옮기는 데도 시간이 걸릴 거고. 바로바로 충전할 수가 있을까?’
로제가 수성과 공성 전략을 짜고 있을 즈음 운하를 끼고 이동하던 일행은 넓고 긴 다리를 마주했다. 기병들이 일렬로 늘어섰을 때 최대 2, 30기는 설 수 있을 정도였다. 길이 또한 운하를 넘어야할 정도니 어마어마했다. 일행이 그 다리에 섰을 때, 그들은 무척 작아 보였다. 리페프론트가 다리를 가리키며 소스라쳤다.
“저게 바로 푸른 불 전쟁에서 크게 데인 정복왕 라오도스의 뒤를 이은 건축왕 레시아크라가 만든 열여섯 개의 다리! 레서블 슈라프테! 아, 레서블 슈라프테는 옛 볼렌드라 말로 세상으로 나가는 교두보란 뜻입니다! 요즘 볼렌드라 사람들은 교류의 다리라고 부른다더군요.”
“크으……! 이 웅장함! 역시 올 때마다 이 늙은이 가슴을 벅차게 하는군!”
“진짜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어떻게 이딴 걸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엔 군인들 갈아 넣었어, 이거.”
“내 생각도 같소.”
“이 다리를 건너려 하면 올려버리면 그만, 성벽을 넘으려 해도 이 해자랑 저 높이가 문제! 지금껏 시도한 용감한 놈은 많지만 성공한 건 단 한 놈 뿐이지!”
“이걸 시도한 건 용감한 게 아니라 대가리가 처 무식한 거지.”
“용감한 게 아니라 무식한 거요. 나 정도 되는 대마법사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
“너희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그런데 해낸 순간 그건 멍청이고 빡대가리가 아니라 영웅이지.”
“맞아.”
“맞소.”
셋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서로를 슬쩍 쳐다봤다. 그리고 큰 소리로 서로를 가리키며 웃기 시작했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놀라고, 기뻐했다. 로제는 진짜 정말로 저들을 한 대씩 때리고 싶었다.
일행은 다리를 지나 활짝 열린 성문까지 다가갔다. 그러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무장한 병사가 다가오며 말했다.
“정지. 통행증을 확인하겠다.”
리페프론트와 쿼드리치는 서로를 쳐다봤다. 노새도 황당해하며 병사를 쳐다봤다. 당황하는 리페프론트를 대신해 쿼드리치가 되물었다.
“뭔 통행증 말이오?”
그러자 병사는 인상을 팍 썼다. 그는 일행을 살폈다. 아무래도 집도 없이 떠도는 거지들 같았다. 병사는 이들이 왜 요 앞 네 갈래 길의 마을에서 통행증을 구하지 않았는지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 마을에서도 이들이 거지란 걸 알고 말도 안 붙였으리라. 병사가 짜증을 냈다.
“당연히 볼렌드라 출입 통행증이지. 너희 반응을 보면 없는 게 확실하네. 그럼 못 들어와. 그러니 더 귀찮게 말고 저리 꺼져.”
가만히 병사의 말을 듣던 리페프론트와 노새는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통과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쿼드리치만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점차 붉게 달아오르는 쿼드리치의 얼굴을 보며 리페프론트가 황급히 그를 말렸다.
“야, 야! 진정, 진정해!”
“아니 근데 언제 봤다고 어린놈의 새끼가 반말 찍찍 싸대고 지랄이야? 어? 야 이 버릇없는 새끼야! 느그 애미 애비가 그리 가르치디? 어? 이런 개 싹퉁바가지 없는 호로새끼를 봤나! 야! 이 씨발새야! 너 일루와. 일루 와 이 새끼야!”
“자, 잠! 야, 진정해, 진정! 아휴, 미안해요! 이 영감 성격이 좀 고약해서…….”
“아, 비키쇼!”
쿼드리치는 거칠게 리페프론트를 밀쳤다. 리페프론트는 저항도 못해보고 볼품없이 나가 떨어졌다. 리페프론트는 그대로 땅을 몇 바퀴나 굴렀다.
쿼드리치는 핏발 선 눈으로 병사에게 다가갔다. 병사는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쿼드리치와 맞서려 했으나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병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가오는 쿼드리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너 나 알아? 어? 아냐고!”
쿼드리치는 외관에 맞지 않게 엄청 기골이 장대했다. 거기다 소매를 걷어붙이자 드러난 핏줄이 도드라진 무지막지한 근육은 역전의 용사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더해 열이 뻗쳐 고깔모자를 벗고 눈을 드러낸 쿼드리치의 중압감은 어마어마했다. 그의 눈을 본 병사는 몸이 얼어버렸다. 쿼드리치는 덜덜 떨고 있는 병사를 향해 때릴 것처럼 손을 번쩍 치켜들며 눈을 부릅떴다.
“이런 개 버러지 같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개 호로새끼가 어디 벌써부터 반말이나 찍찍 싸대고 처 자빠졌어! 니가 경비지 씨발 경비 대장이야? 니가 이쪽 책임자라도 돼? 어? 개 버러지 같은 새끼가 내가 누군 줄 알고 어디서 반말을 찍찍하고 지랄이야! 내가 니 새끼 현조부보다 나이가 많아! 알아? 야! 네 사수 데려와! 데려와 새끼야!”
“그……, 그……, 사, 사수…….”
“대가리 깨지기 싫으면 잔말 말고 불러 오라고 새끼야!”
노새는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쿼드리치와 그런 쿼드리치한테 밀쳐져 날아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리페프론트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노새가 턱으로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꼰대고, 저건 병신이야. 맨날 나대다가 줘 터지기나 하고 쯧쯧……. 이봐, 신부. 들어가려면 시간 좀 걸릴 거 같은데 뭐 듣고 싶은 이야기 없어?”
“토……, 통행, 통행, 증. 피, 필요, 해?”
“통행증? 아니? 얼마 전만 해도 그런 거 없었어. 거기다 볼키하 공작은 그렇게 쩨쩨한 놈이 아니야. 돈이 없는 놈도 아니고. 아마 통행증을 요구하는 건 이 일대의 범죄자들이겠지. 다른 큰 도시들도 그렇지만 중심부에 비해 이런 외곽 지역은 상대적으로 치안이 약하잖아? 그러니 공권력보단 범죄자들의 힘이 조금 강한 편이지. 그렇다고 대놓고 공권력을 씹으면 불타는 정의 같은 볼키하 공작이 가만 놔둘 리가 없어. 그러니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식으로 범죄자들이랑 여기 윗선이랑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겠지.
꼬락서니를 보니 아까 요 앞마을에 얼굴에 문신 있는 깡패들이 뭘 팔던데 그게 통행증이었나보네. 우린 꼴이 거지라 건드리지도 않은 거 같아.”
노새는 하품을 했다. 로제는 쿼드리치에게 시선을 돌렸다. 쿼드리치는 부사수를 한손으로 번쩍 들어 다리 밖으로 집어던질 것처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랴부랴 달려와 사태를 수습하는 사수를 윽박지르고 있었다.
‘무장한 사람을 한손으로 가볍게 들었다……. 아무리 적게 나가도 150, 200파운드는 나갈 거 같은데……. 나도 자주 하던 짓이지만, 저 몸에서 나오는 힘은 거의 우리나라 사람 같은 걸? 얼마 전에 창 쓰는 모습을 보면 나보단 근력이 강한 편이고. 남부인이 저렇게 센 건 처음 봐.’
“힘만 무식하게 쎈 놈…….”
리페프론트가 머리를 흔들며 일어났다. 그는 바닥에 몇 번 굴러 여기저기가 까져 있었다. 리페프론트가 흐르는 피를 대충 닦고 담배를 물었다. 문득 로제는 엄청난 골초이던 리페프론트가 최근에 담배 피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성냥을 찾는 리페프론트를 향해 노새가 말했다.
“뭐여? 최근 통 입에 안 물어서 끊은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 로제 때문에 자제하고 있던 거지.”
“하긴 사람이 변하면 뒤지지.”
“새낀 말을 해도 꼭…….”
“근데 대체 언제부터 네가 주변사람을 신경 썼냐? 담배 좀 끄라고, 끄라고 그렇게 지랄을 해도 면상에 대고 연기나 뻑뻑 뿜어대던 새끼가 무슨…….”
“아가리 해, 아가리. 이거만 태우고 들어갈 거니까 준비해.”
“준비? 뭔 준비? 통행증 없으면 안 보내줄 거 같은데 뭔 수로? 아, 다른 길로 가자고?”
“씨발 뭐하러 뺑 돌아? 이게 통행증이다 새끼야.”
성질을 내며 리페프론트는 주먹만 한 돌덩이를 치켜들었다. 노새는 인상을 팍 쓰며 혀를 찼다. 그리고 노새가 느끼는 감정을 로제도 느끼고 있었다. 로제는 곧 기절당할 병사들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조용히 넘어가나 했다…….’
쿼드리치를 만나기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여럿 있었다. 유사한 이유로 경비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도저히 답이 없다고 판단한 리페프론트는 어딘가에서 벽돌을 들고 왔다.
그는 그대로 돈을 가져왔다는 말로 경비들을 꾀어냈고, “이게 니 새끼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돈이다 새끼들아!”라며 벽돌로 머리를 후려쳤다. 얼마나 쎄게 후려쳤던지 경비들의 투구는 완전히 찌그러졌었다.
‘농담 아니고 사람이 머리가 붙은 채로 전원 끊긴 기계처럼 픽 하고 쓰러지는 건 전장에서도 못 봤는데…….’
그렇게 잘 마무리되나 싶었지만 리페프론트가 제대로 확인을 안 하는 바람에 한 명이 기절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동안 쫓겨 다니는 신세였다. 리페프론트는 이를 으드득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노새가 깨부술 것처럼 돌덩이를 움켜쥔 리페프론트의 손을 보다 말했다.
“좀 우아한 방법은 없냐?”
“이게 우아한 방법이다.”
리페프론트가 비장한 얼굴로 쿼드리치와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쿼드리치를 말리는 척 하며 자연스럽게 뒤로 돌았다.
그리고 섬뜩한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고위 귀족들이 다스리는 중앙에 비해 인구도 적고 치안도 좋지 않으나 도시라는 틀에 속한만큼 길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분주한 거리를 둘러보며 걷던 리페프론트는 무척 놀랐다. 그가 이곳 가이스힐에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와 정말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노새 또한 휘둥그레진 눈으로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돌아보며 말했다.
“이야……. 언제 이렇게 사람 냄새로 가득한 땅이 됐데?”
“그러게 말이다. 저번에 왔을 때는 마을이었는데, 이젠 도시가 다 됐네.”
그러자 가만히 뒤따라오던 쿼드리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대체 마지막으로 와본 게 언제요?”
“어……. 꽤 됐지.”
“나 참. 여기저기 쏘다닌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네. 여기뿐만 아니라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시골 마을들은 거의 다 이런 모습일 거요. 휴전했던 당시야 전쟁으로 인구가 쓸려나갔으니 텅 빈 게 당연하잖소? 그 후로 대체 몇 년이 지났다고 생각하는 거요? 노친네 정신없기는.”
“허허……. 그때는 여기저기 돌아다닐 일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그럴 일이 없었으니까.”
“쯧쯧, 노친네. 거 골방구석에 처박혀 있지만 말고 세상 좀 돌아다니는 게 어떻소?”
“이 새끼는 말을 해도……. 누가 골방구석에 처박혀 있어? 하루하루 살려고 열심히 돌아다닌다, 새끼야.”
“와하하하! 그런 거 말고! 여행을 좀 다녀보란 말이오. 맨날맨날 쓰레기장 뒤지지 말고.”
“돈이 없는데 여행 같은 소리 하네. 그리고 이 땅은 다 돌아다녀서 구석구석 모르는 데가 없는데 어디로 여행을 가?”
“노친네, 당신 옆 대륙이 발견된 건 알고나 있소?”
리페프론트가 쿼드리치를 쳐다봤다. 그는 무척 놀랐다는 투로 말했다.
“엥? 벌써?”
“……하긴 모를 리가 없지. 그리 오래 된 건 아니고, 한 3, 40년 됐소.”
“이야, 벌써 그렇게 됐단 말이야? 바다가 개판이라 난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만, 상대적으로 리븐델 제도 인근 바다는 얌전하잖소.”
“그쪽 바다는 걔가 잡고 있으니까 그렇지. 근데 그래도 힘들 텐데? 자고 있다곤 해도 바다에 그놈만 사는 것도 아니니까.”
“이 노친네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군?”
“뭘 또 몰라 내가?”
쿼드리치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고개를 내저었다. 리페프론트는 잔뜩 얼굴을 구긴 채 쿼드리치를 노려봤다. 리페프론트가 짜증을 냈다.
“거 그만 좀 뜸 들여라 염병할 새끼야.”
“와하하! 여전히 흥미로운 반응일세.”
“콱 그냥!”
“지금도 사정없이 서로 치고 받는 데가 어디오?”
“에렌할이랑 타르네일이지.”
“걔들은 무한히 나오는 금광이라도 있소?”
“없지.”
“그럼 전쟁 자금은 어디서 나오는 거요? 마법이라도 부리오?”
“지들 알아서 하겠지. 내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냐?”
“에잉, 쯧쯧. 동부 해안을 꽉 잡고 있는 게 누구요?”
“수수께끼처럼 염병하지 말고 본론을 말해. 아가리 확 찢어버리기 전에.”
쿼드리치는 리페프론트가 받아주지 않자 시무룩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가 고깔모자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타르네일이 전함을 팔고 있소. 에렌할은 화포를 팔고 있고.”
리페프론트는 예상 외였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목 언저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어디다? 남부에?”
“남부, 리븐델, 옆 대륙. 전부.”
“미친. 휴전인데 남부에 무기랑 배를 판다고?”
“휴전이지만, 사실상 종전 아니오? 그러니 에렌할과 타르네일은 좀 더 서로에게 집중하는 것이고.”
“야, 그러면 걔들 전쟁은 어떻게 해? 무기랑 배 다 팔아먹으면 뭘로 싸우냐?”
“이런 멍청한 노인네 같으니.”
“죽는다, 너.”
“전쟁은 뭐 쉬지도 않고 맨날 싸우는 게 아니잖소. 한번 고착 상태 들어가면 어느 쪽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으니 전선이 세워지는 거고. 에렌할과 타르네일은 전쟁 중이지만 그 모든 전투가 총력전이 아니라는 걸 아직도 모르오? 다음 전투를 위해 물자를 비축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그리고 당연히 무기와 배를 만들다보면 여분이 생길 것이고, 그것을 자국 내에서 처리하기에는 부적합하니 교역을 하는 것이지. 멍청한 노친네야.”
“다 좋으니 그 멍청한 좀 빼줘.”
“멍청한 영감. 멍청한 노인네. 멍청한 노친네. 멍청한 놈.”
“새끼가 진짜…….”
쿼드리치는 큰 소리로 웃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보았지만 일행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을 웃던 쿼드리치가 눈물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남은 타르네일의 전함이 남부의 동부 해안에 팔려나갔고, 미스텔리아와 아페프라드는 그 전함을 사들여 리븐델 제도와 교류하고 있잖소. 안 그래도 억센 북부의 바다를 가로지르던 그 크고 튼튼한 전함을 보유하게 됐으나 싸울 일은 없으니, 위험한 바다로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도 나오는 것이고. 그렇다보니 옆 대륙의 존재조차 발견해낸 것이지. 지금이야 리븐델 인근 해안을 통해 상호교류만 가능할 뿐이지만 조금 더 선박 건조 능력이 발전한다면 다른 곳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하오.”
“그리고 에렌할의 무기들도 있으니 배의 내구력을 믿고 바다의 위험 생물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그렇소. 어마어마하게 넓은 미지의 땅과 생물.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고개를 돌려보겠지. 그런 곳으로 여행이나 좀 갔다 오시오. 그 썩은 머리에 바람도 넣어줄 겸.”
일리 있다는 투로 듣고 있던 리페프론트는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쿼드리치의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그러는 넌 왜 안 가고 여기서 이러고 빌어먹고 있냐? 그렇게 지식이니 지혜니 진리니 뭐니 노래를 부르더니 노망났냐? 이 새끼도 슬슬 뒤질 때가 됐는데.”
“와하하하! 진리는 이 몸! 에 깃드는 거요!”
“지랄하네. 가서 팔굽혀펴기나 해 새끼야.”
“하하하하!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오! 아, 그리고 내 장례식은 그리 멀지 않았으니 준비해도 괜찮을 거요.”
리페프론트와 노새는 동시에 쿼드리치를 쳐다봤다. 쿼드리치는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리페프론트가 한탄하듯 말했다.
“뒤질라면 아직도 한참을 남은 새끼가 무슨 놈의 장례식…….”
노새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리페프론트는 노새를 향해 ‘신발’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거적데기나 다름없는 물건을 벗어 집어 던졌다.
“뭘 처 고개를 끄덕이고 있냐, 이 씹새야!”
노새는 귀가 축 늘어진 채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리페프론트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뭘 잘했다고 아가리 비쭉 처 내밀어? 이 새끼를 그냥!”
“와하하하하! 또 혼났군! 혼났어!”
쿼드리치는 신명나게 웃었고 리페프론트는 씩씩 거리며 집어 던졌던 신발을 찾아왔다. 그가 신발을 신고 있을 즈음 웃음을 멈춘 쿼드리치가 말했다.
“뭐……, 그렇긴 한데 몇 가지 일만 마무리하면 이제 미련은 없소. 그러니 다음에 볼 때는 내 장례식일 거요. 왜, 막상 끝이라니 좀 아쉽소?”
쿼드리치는 익살스럽게 웃었다. 리페프론트는 코웃음 쳤고, 노새는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노새가 말했다.
“제발 좀 죽지 그러냐.”
“에헤이. 야, 인마.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재수털려. 제발 좀 지랄 그만하고 영원불멸하게 해달라고 빌어야지.”
“허허……. 이 미친 노친네가 정말……. 아무튼 이쯤에서 난 공연 준비나 하러 가봐야겠소.”
“응, 꺼져.”
“이제야 간다고? 허이구. 일찍 좀 가지 그랬냐?”
“거 섭섭하게 잘 가라는 좋은 말 놔두고 꺼져가 뭐요, 꺼져가. 노새는 또 뭐라는 거요?”
“꺼지래.”
쿼드리치는 잔뜩 삐진 듯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리페프론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쿼드리치의 주둥이를 톡 때렸다.
“다 늙어가지고 어디서 앙탈이야?”
“쳇.”
쿼드리치는 표정을 풀고 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소. 아, 당신께서도 내 장례식에 와 주실 거라 믿소.”
“거 새끼 재수 없게 말하는 본새하고는. 뭉그적거리지 말고 당장 꺼져.”
쿼드리치는 키득키득 웃으며 일행을 앞질러 걸어갔다. 한참을 앞서가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일행을 돌아봤다. 그는 금화가 가득 찬 가죽 주머니를 리페프론트에게 던져줬다. 리페프론트는 그 묵직함에 깜짝 놀랐다. 리페프론트는 이게 뭐냐는 얼굴로 쿼드리치를 쳐다봤다. 쿼드리치가 환하게 웃었다.
“노잣돈이오.”
“노잣돈을 나한테 왜 줘, 등신아.”
“잘 부탁한단 뜻이오.”
리페프론트와 노새는 잠시 그 자리에 멈췄다. 그들은 쿼드리치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쿼드리치가 사라진 후에야 리페프론트는 주머니를 빙글 돌리며 말했다.
“새끼, 귀찮게 하기는.”
리페프론트가 수레에 금화 주머니를 실었다. 그는 로제를 향해 말했다.
“쉬지도 않고 긴 시간 돌아다녔으니, 어디 묵을 곳을 좀 찾아야겠네요.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여기서 꺾으면 여관 같은 게 제법 있었거든요?”
노새는 리페프론트가 말하기도 전에 방향을 틀었다. 리페프론트보다 먼저 나아가던 노새는 골목길을 나서자 보이는 풍경에 감탄했다. 뒤따라 온 리페프론트는 전혀 다르게 변화한 거리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리페프론트는 신축 건물들이 늘어선 상가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야, 2층짜리 건물도 있네? 유령마을 같던 가이스힐이 이렇게 변한 거면 볼렌드라는 아페프라드만큼 변했겠는데? 정말 그새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변했데…….”
“놀랍긴 해. 매번 볼 때마다 휙휙 달라지잖아. 무튼 여관은 있냐? 내 숙식까지 제공해주는 곳으로 찾아봐.”
“야, 설마 그때처럼 마구간 하나 없겠냐? 이렇게 발전했는데?”
노새는 리페프론트의 말에 공감하려 했다. 하지만 발굽이 무겁다는 걸 깨닫고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지금껏 받았던 새롭다는 인식이 옛날로 되돌아갔다. 노새가 질퍽거리는 진흙 바닥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씨발. 내가 이래서 볼렌드라를 싫어했어.”
“갑자기 지랄이야, 왜.”
“바닥을 봐!”
“바닥? 바닥이……, 여전하네.”
리페프론트는 신발과 바지 밑단에 적나라하게 들러붙은 진흙덩어리를 털어내려 허리를 숙였다. 다시 허리를 폈을 때 리페프론트의 눈은 지금껏 놓쳤던 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국의 수도나 그에 인접한 대도시들과 달리 도로는 여전히 진흙길이었고, 그리 드물지 않게 동물들의 배설물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인식하지 못했을 때는 나지 않던 오물 냄새가 난다. 더욱이 향수와 섞여 아주 고약했다.
리페프론트의 눈이 엄청난 속도로 활기를 잃었다.
“……취소. 여전하다. 이 병신 같은 곳은.”
“이 새끼들 이래서 건물을 높게 세운 거네!”
“염병 그만하고 여관이나 찾자……, 힘 빠진다. 갑자기 막 피로가 쏟아지네.”
리페프론트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노새는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진흙의 감촉에 온갖 쌍욕을 퍼부었다. 그들 사이에서 로제는 누군가 자신을 보고 손가락질할까봐 잔뜩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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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인지 아닌지는 네 결정이고
조각들을 모아낸다면
그런거 하자 약간 괴담속에 갇힌 릴레이 소설
📚창소판 명예의 전당 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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