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오싹한 느낌은 영감이 있는 사람들만 느껴져? (5)
2.죽여버릴거야 (11)
3.사람이 몸도 약해지고 정신도 약해졌을 때 보이는 건 (2)
4.이사할 때마다 생기는 이상한 현상들. (17)
5.딥웹에서 활동했었습니다. (42)
6.. (6)
7.다이스로 점치는 스레 (1000)
8.무거운 시 (163)
9.문자스킬 저주 이거 진짜 효과 있는거야? (21)
10.강령술 해본다는 스레 특 (13)
11.엑소시스트 표지사진을 저장했는데 (3)
12.야 야 나 큰일 난 것 같음 (50)
13.나만 이런거냐? 이 미친건? (5)
14.자아 이탈? (14)
15.이건 그냥 타이밍이 딱딱 맞은 우연일까? 아니면 꿈 때문일까? (13)
16.이게 헛것을 보는건지 진짜 뭘 보는건지 모르겠는데 (6)
17.11/15일 새벽 3시 57분 스레를 닫다 (200)
18.그 강에 뭔가가 있어. (354)
19.꿈에 친구가 죽었어 (9)
20.유명한 연예인이 죽는 꿈을 꿨어 (28)
1
◆2pTO6Y3B9fQ
2020/02/22 06:28:51
ID : 3Wi04Mpfbwo
9
도서판에 적을까 괴담판에 적을까 고민했어. 왠지 섬뜩한 느낌을 주는 시도 있고, 우울한 시도 있고.. 괴담이라는 단어엔 안맞는 스레인건 맞아ㅠㅠ 미리 미안해. 그렇지만 왠지 괴담판에 자주 들어오는 레더들 중에는 나처럼 이런 시들을 흥미롭게 읽을 사람이 있을거같아서 여기에 적어보려 해. 그리고 시에 대해서 서로 어떤 해석을 했는지 얘기 나눠 보는 것도 좋을거같고. 시라는 건 알면 알수록 해석하기 힘든 것도 있더라.
102
이름없음
2020/03/02 12:50:30
ID : zTSMlu65eY2
0
ㅂㄱㅇㅇ
103
◆2pTO6Y3B9fQ
2020/03/04 04:11:07
ID : 3Wi04Mpfbwo
0
고마엉! 덕분에 쓸맛난다 ㅎㅎㅎ
104
◆2pTO6Y3B9fQ
2020/03/04 04:14:32
ID : 3Wi04Mpfbwo
0
나무는 왜 서 있어야 하고 새들은 하늘을 날아야 하는지
날마다 해와 달을 깨우고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지
그 힘이 왜
없어도 좋은 우리를 여기 있게 하고
아침이면 눈꺼풀을 열게 하는지
해달은 왜 물에 떠 해초를 감고 잠자는지, 털도 없는 톡토기는 어떻게 영하 70도의 혹한을 견디는지, 피파개구리는 왜 혀가 없는지, 오리너구리는 어떻게 알을 낳게 됐는지
이 작은 가슴에 어떻게 바다와 사막이 함께 출렁이고
사랑은 늘 폭탄을 감추고 있는지
헛된 꿈들은 사라지지 않는지
왜? 왜? 왜?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휘몰아치는 질문의 소용돌이 속을
우리는 걸어간다 우리는
비늘들이 얼굴을 뒤덮어도 응답처럼
지느러미가 돋아나도
우는 대신 웃는 표정으로
전동균, 이토록 적막한
105
◆2pTO6Y3B9fQ
2020/03/04 04:19:59
ID : 3Wi04Mpfbwo
0
내 애인은 우울을 앓고 있다.
우울이란 글자는 참 가벼워 보이는데 사실 너무도 힘든 단어다
함께 웃으며 걷다가도 갑자기 길 한복판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하고 무슨 이유인지 자기도 모르겠다며 나를 앞에 앉혀둔 채로 몇시간씩 침묵 하기도 했다
그런 너를 도와주기 위해 나도 무던히 노력했다
부모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는 너를 대신해 심리치료를 예약해주고 필요하면 커플 상담치료도 찾아다녔다.
상담으론 많이 부족해서 같이 손을 잡고 병원에 가 우울증 치료제도 타왔다.약먹는 걸 유난히 싫어하는 너를 아기보듯 달래며 약을 먹였다.
버텨왔고 앞으로도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내가 집안 사정으로 세 달정도 외국에 나가 있다 돌아왔을 땐 그 믿음은 박살 나있었다.
매일 밤 페이스 타임을 하며 상태가 꽤 좋아진 것 같다고 약도 매일 같이 챙겨먹는다고 했던 너.
살이 빠진 것 같다는 내 질문에 요즘 아침마다 운동을 한다고 하던 너.
집에 돌아와보니 세 달 전 약이 그대로있었다. 내가 그렇게 까지 노력했는데 이게 네가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냐고 화를 내자
너는 그 큰 덩치로 울먹이면서 화내지말아달라고 매달렸다.
산만한 덩치에 눈썹이 새빨게 지도록 울면서 버리지말아달라고 어린 아이처럼 애원했다.
손목엔 흉터와 딱지들이 덕지덕지 눌러 붙어 진물이 났다.
속상함과 화가 치밀어 어지럽고 토할 지경이었다.
3년 전 술자리에서 남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주위를 겉돌던 너
나는 왜인지 그런 너에게 너무도 강렬하게 끌렸다.
남들과 다른 것 같아 슬프다고, 스스로가 굉장히 위선적이고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너의 말에
나는 그 우울이란 늪에 충분히 뛰어들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3년을 그속을 헤맸다.
이제는 나도 잠식될 것 같아 두렵다. 무거운 족쇄를 차고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익명, 연세대학교 대나무숲 中
106
◆2pTO6Y3B9fQ
2020/03/04 04:22:00
ID : 3Wi04Mpfbwo
0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장정일, 지하 인간
107
◆2pTO6Y3B9fQ
2020/03/04 04:26:24
ID : 3Wi04Mpfbwo
0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좇는 거지?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中
108
◆2pTO6Y3B9fQ
2020/03/04 04:29:34
ID : 3Wi04Mpfbwo
0
감정은 언제나 이성을 짓밟아 버리는 경향이 있다.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하면 모든 것이 광기로 흐르기 쉽다.
발타사르 그라시안
109
◆2pTO6Y3B9fQ
2020/03/04 04:33:28
ID : 3Wi04Mpfbwo
0
조엘은 맨 처음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지웠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자신의 실수로 헤어진 직후 클레멘타인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이미 조엘에 대한 기억을 지운 뒤다.
‘전 클레멘타인인데, 조엘에 대한 기억을 지울래요.’
자신과의 기억, 더 나아가 추억까지 전부 지웠다는 사실에 맨 처음엔 아파하다가 괴로워하다가 끝내는 분노한다. 그 소심하기 짝 없는 조엘이 마치 클레멘타인처럼 충동적으로 라쿠나를 찾아간다. 그곳은 기억을 지워주는 병원이다. 클레멘타인 또한 이곳에서 조엘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
그저 자고 일어나면 모든 기억이 지워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기억을 지우는 과정은 그가 자는 동안 그 모든 기억들을 한 번씩 답습하는 일이었다. 그가 자는 동안 뇌에 특정한 자극을 하면 그는 그와 클레멘타인의 기억 속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활성화된 뇌의 어느 지점을 외부에서 자극하여 없앤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클레멘타인의 모든 기억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시작하게 된다. 매일이 다툼의 연속이고, 그녀와 지루한 나날들의 연속이다. 모든 기억 속에서 그녀는 언성을 높이고 있고, 그는 지겨워하고 있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그녀는 순간 돌변한다. 내성적인 조엘과 충동적인 클레멘타인. 서로의 그 매력에 끌려서 만남을 시작했으나, 이제 그것은 서로 감당하기 힘든 짐이다. 기억을 지우기 잘 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기억을 지울수록, 과거로 돌아갈수록 좋았던 기억들이 보인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미소 짓고 있거나 행복해하고 있다.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추억들 투성이다. 설령 괴로운 기억들 조차도 전부 남아서 아파할지라도, 이 기억들만 남아있다면 괜찮을 것 같을 만큼. 그는 지워지는 기억 속에서 소리친다.
‘멈출래요. 기억을 지우지 않을래요. 그게 안 된다면 이 기억만이라도 남겨주세요.’
기억 속에서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바깥에 닿을 리가 없다. 기억은 계속해서 지워진다. 그래서 그는 기억을 지키기 위해 기억을 숨긴다. 자신과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다른 기억 틈바구니에 끼워 넣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모든 기억들은 지워질 처지에 놓인다. 거의 모든 기억들이 지워지고 조엘이 클레멘타인과 처음 만난 날만의 기억이 남게 된다. 그 기억 속에서 더 이상 조엘은 발악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기억들이 전부 지워질 것을 알기에.
처음 만나던 날의 클레멘타인이 자신의 옆에 와서 앉는다. 그리고 그날의 모습으로 그날의 대화를 이어간다. 꼭 사랑에 빠지던 순간처럼. 그리고 말한다.
‘이 기억도 곧 지워질 거야.’
“알아.”
‘어떡해?’
“즐겨야지.”
그는 더 이상 지워지는 기억을 피하지 않는다. 한 순간이라도 더 클레멘타인과의 이 기억 속에서 그녀를 만끽하고자 한다. 자신의 모든 것들을 인정한다.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인정한다.
조엘의 마음에, 꼭 영화의 제목처럼, 티없는 마음의 햇살이 비춘다.
기억 속 클레멘타인도 드디어 그걸 알았는지 기적처럼 그에게 한 조각의 기억을 남겨준다.
‘몬토크에서 만나.’
책 <너는 사랑을 잘못 배웠다> 中
110
◆2pTO6Y3B9fQ
2020/03/06 02:45:05
ID : 3Wi04Mpfbwo
0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날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111
◆2pTO6Y3B9fQ
2020/03/06 02:46:47
ID : 3Wi04Mpfbwo
0
여기 죽은 나무가 있다
누군가 소리쳐서 뒤돌아보니
그곳에 내가 쓰러져 있었다
물을 주면 살아날지도 몰라
누군가 다가가서 흔들어 본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잎을 버리고
죽을 뿐이다
류시화,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112
이름없음
2020/03/06 02:52:09
ID : zTSMlu65eY2
0
와씨 눈물난다ㅠㅜ
113
◆2pTO6Y3B9fQ
2020/03/06 04:29:08
ID : 3Wi04Mpfbwo
0

114
◆2pTO6Y3B9fQ
2020/03/06 04:29:47
ID : 3Wi04Mpfbwo
0
이번 글도 읽으면 눈물 날거야ㅠㅠ 코로나19 조심해! 마스크 꼭꼭!
115
◆2pTO6Y3B9fQ
2020/03/06 04:31:07
ID : 3Wi04Mpfbwo
0
2019년 12월 21일
여행에서 돌아와 내가 심어두었던 토마토가 하나 익어있는 걸 발견했다. 주머니에 넣고 본가에 있는 엄마 아빠에게 맛보여드리려 했다. 집에는 엄마만 있었다. 나는 보물이라도 바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꺼내 엄마에게 보여드렸다. 엄마의 첫 반응 : 뭐니? 니가 심었어? 됐다 됐다, 나 독살 당하기 싫다고.
2019년 12월 23일
5년 전, 웨이보(트위터 비슷)로 알게 된 한 친구가 동영상 하나를 보내줬는데, 여기 나오는 여자가 나랑 무척 닮았단다. 몇 장 캡처해서 부모님 보여드리니까, 다들 너 아니냐고 그러는 거다. 정면으로 보면 다른데, 옆 얼굴은 진짜 비슷했다. 나는 그때 매우 흥분했다. 결국 이렇게 도플갱어를 만나게 되는구나!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당연히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방송인이니까 나 따위야 뭐…
2020년 1월 6일
초딩 1학년 때 신화서점에서 우연히 산동문예출판사에서 펴낸, 와키 야마토가 그린 <원씨물어>(겐지모노가타리)를 발견했었다. 당시 가격이 280위안이었다. 너무 비싸서 아빠는 절대 사주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만화 아닌가. 그래서 난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빠랑 이 얘기를 하게 됐을 때, 필요하다면 사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다시 갔을 땐 이미 없었고, 시중에 파는 건 4컷만화뿐이었다. 생각날 때마다 아쉽다.
2020년 1월 19일
하이난 해산물시장에서 채 5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으로서, 갑자기 조금씩, 약간은 긴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116
◆2pTO6Y3B9fQ
2020/03/06 04:32:35
ID : 3Wi04Mpfbwo
0
2020년 1월 20일
어제 약국에서 마스크를 사려 했는데, 그냥 보통 마스크밖에 없어서 짜증나 포기해버렸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선, 보통 마스크라도 괜찮겠지, 못 쓸 것도 아니잖아 하는 생각에 다시 갔다. 그것도 이미 없었다…
마스크: 어제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더니, 오늘은 니가 나한테 매달리네, 흥.
2020년 1월 21일
어제 약국에서 우선은 65위안짜리 보통 마스크를 사고, 오늘은 타오바오에서 400위안짜리 마스크를 주문했다. 하지만 제대로 배송을 할려는지 알 길이 없다. 오후에는 광구(光谷)에 있는 친구가 그쪽 약국에 마스크가 아직 있다고 해서, 결국엔 밤에 강 건너까지 찾아가 360위안짜리 마스크를 더 샀다. 평상시라면, 나는 정말 이런 일들을 멸시했을 거다. 너무 호들갑 떨지 말라면서. 하지만 문제는 지금이다. 엄마가 열이 난다… 닥친 것이다…
2020년 1월 23일
도시가 닫혔다. 너무 무섭다. 누가 우릴 구해줄 수 있을까. 엄마는 갈수록 안좋아진다.
2020년 1월 23일
리트윗해주신 이웃들, 다들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사실 지금 무슨 희망이 보인다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보건 역량이 딸리고 병원에서도 제대로 대처방안을 내놓기 어려운 게 사실이니까요. 병원에서 경로를 알 수 없는 병균에 옮느니, 집이 어쩌면 더 안전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바라는 건 의학을 아는 분이 계셔서, 집에서 어떤 약을 쓰면 좋은지 가르쳐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병원에서 처방하는 거는 오셀타미비어(항바이러스제), 연화청온(감기약)정도였어요.
117
◆2pTO6Y3B9fQ
2020/03/06 04:33:37
ID : 3Wi04Mpfbwo
0
2020년 1월 24일
가슴이 좀 답답하다. 분명 너무 긴장한 탓일 것이다, 분명히. 긴장 금지, 긴장 금지, 누군가 꼭 우릴 구해줄 것. … 이겠지?
2020년 1월 24일
엄마 입원 수속 중이다. 희망이 좀 생기면서도 걱정 또한 커진다. 일단은 의료 수급과 설비가 매우 부족한 상태라, 엄마가 입원 후에 제대로 케어받지 못할까 두렵다. 일선 의료진은 이미 전력을 다하고 있고 그들의 힘은 한계에 부딪쳤다. 친구의 병원에선 다들 바닥에 쓰러져 자도 새삼스럽게 보질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론 뒷편에서 전염이 대폭발할까 또한 두렵다. 지금 비입원 병동에서는 침상 확보가 훨씬 어렵고 치료 받기가 너무너무 힘들다! 이러나저러나…
2020년 1월 24일
차에서 잠시 아빠를 흘깃 보곤, 다시 쳐다보질 못했다. 아빠가 저렇게 늙고 피폐해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이미 마음을 내려놓았다는 걸 안다.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빠도 알고 있다. 어디 불편하지는 않으시냐고 하니, 인후가 좀 불편하고, 약간 열도 나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오후에 기다리는 동안 아빠가 직접 전화를 걸어보았고, 의사가 약을 먹으라 했단다. 아빠는 요 며칠동안 낮이든 밤이든 제대로 잠을 못 잤다.
2020년 1월 25일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니 자정이 다 되었다. 12시 되기 전에 서둘러 쓰레기를 치웠다. 집은 엉망진창이다. 평소에도 나는 게으름뱅이였는데, 거기다 지금은… 예전 춘련(설에 붙여놓는 글귀)이 여전히 벽에 붙어있는데, 떼어내야 하는 걸까? 그냥 한번에 집 청소하고 자면 되지 않을까, 설이라고 뭐 다를 게 있냐고 친구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정초에는 바닥 쓸면 안되고 쓰레기 버리면 안된다고 친구는 말했었다. 나는 그런 관습을 확실히 잘 몰랐다. 전에는 전부 아빠가 했으니까…
2020년 1월 25일
어젯밤부터 엄마가 메시지에 답장이 없다. 오늘 다시 보내도 보질 않는다. 아빠가 좀 전에 전화를 했는데 응답이 없다. 다시 무너진다.
2020년 1월 26일
엄마가 전화를 했다. 병원 측에서 금은담 병원으로 옮긴다고 했다. 좋은 소식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2020년 1월 26일
병원에 전화를 걸어 간호사에게 언제 병원을 옮기는지 물었지만, 하나를 물어도 셋을 모른다…. 딴 건 괜찮다. 그저 호흡곤란에 제대로 대처 못할까봐 걱정이다.
2020년 1월 26일
엄마같은 사람이 아직도 많지만 병원에선 수습 불가다. 보고 있는 나도 남 일 같지 않다. 도와줄 순 없지만 그들도 꼭 치료를 받길 바란다. 사망자 수가 더 이상 늘지 않기를 바란다. 더는 안된다.
118
◆2pTO6Y3B9fQ
2020/03/06 04:35:14
ID : 3Wi04Mpfbwo
0
2020년 1월 27일
간호사가 엄마에게 전원(轉院)하라고 말한 적이 없단다. 그럼 엄마가 병원 옮길 것 같다는 얘기는 왜 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엄마는 지금 혈중산소농도가 아주 안 좋다. 전원 못하면 어떡하나.
2020년 1월 27일
아빠가 CT를 찍었고, 양쪽 폐가 모두 감염됐다.
2020년 1월 28일
엄마가 갔다. 좋아요든 뭐든 누르지마세요 답장안해요.
2020년 1월 29일
위에 말한 거 때문에 오해가 있는 거 같아 죄송합니다. 저는 현재로선 심한 증상은 없지만, 아빠를 모시고 여기저기 병원들을 다니느라 자기 방어력이 많이 떨어진 거 같습니다. 좀 절망스럽습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다들 절 기억해 주었으면 하네요. 아빠는 지금 고열증세가 있고, 호흡은 아직 괜찮아요. 오늘 병원들 돌며 다시 CT 찍어보려 합니다. 아빠가 입원하는 게 무척이나 두렵고, 또 입원 못할까봐 무섭습니다.
2020년 1월 29일
아빠 CT 찍는 거 기다리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길가에 쭈그려 앉아 멍하니 있었다. 내 일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이다. 수없이 화살이 쏟아져 심장에 박혀도 이보단 나으리라. 하지만 나는 어쨌든 아빠를 지켜야 한다.
119
◆2pTO6Y3B9fQ
2020/03/06 04:37:18
ID : 3Wi04Mpfbwo
0

120
◆2pTO6Y3B9fQ
2020/03/06 04:39:33
ID : 3Wi04Mpfb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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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2pTO6Y3B9fQ
2020/03/06 04:40:32
ID : 3Wi04Mpfbwo
0
2020년 2월 3일 23:27
오늘 부모님 집에 들렀다. 서랍 속에서 재작년 설에 우리 가족 4명이 찍은 사진을 꺼내왔는데, 그걸 비옷 주머니에 넣었다. 결국은 돌아와서는 까먹고, 비옷을 벗어선 통에 넣고 끓는 물로 소독했다. 좀전에 갑자기 떠올라, 사진을 망쳐버렸다고 생각했다. 사진이 훼손되면 우리집도 희망이 없어지는 듯한 느낌이 퍼뜩 들었다. 다행이 오늘 과기부에서 데톨이 효과가 없다는 말을 듣고, 끓는 물로 바꿨지… 다행이 끓는 물로만 해서… 사진은 괜찮았다. 손상되지 않았다. 데톨로 소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아빠는 꼭 좋아지셔야 된다, 사진 속에 더는 사람이 줄어선 안된다.
2020년 2월 4일
엄마가 꿈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꿈 속에서 나는 계속 엄마를 찾아다녔다. 여기저기에 "엄마 보셨어요?" 하고 묻고 다녔다. 엄마는 아빠가 병이 난지 아실까, 나는 계속 엄마를 찾는다…
2020년 2월 5일 20:45
살려주세요, 저도 어제부터 열이 나요. 오늘 아침 병원에서 연락이 와 아빠가 위급하다며 와서 사인을 해달라고 했어요. 반나절 아빠를 돌봤는데 혈중산소농도가 6에서 4.50밖에 안돼요. 90 이하는 중증이라고요. 이미 아빠는 위중해요. 아빠 안심시키려 병원 옮겨보겠다고 말하니, 냉큼 앉아서 가방을 싸시는 거에요.
가방 싸면서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고 해요!!!
하느님!!! 연락했던 병원들은 다 안 받는다고 한다구요!!!!
아빠가 아이처럼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고 재촉해요!!!!!
난 아빠를 구할 능력이 없는 쓰레기라구요!!!!!
제발 누가 와서 우리 아빠 좀 구해줘요!!!!!
저는 세상에 무릎 꿇고 비는 것밖에 못해요!!!!!
2020년 2월 5일 21:11
인민일보에 보도된 방법은 다 해봤어요. 한 분이 제게 전화를 해서 산소공급기를 제공하겠다고 하셨어요. 정말 감사드리지만 그건 소용이 없습니다. 아빠에겐 구원이 필요해요. 입원까지 해놓고선 더 나은 치료를 바라다니, 이런 시기엔 사치 아니냐고 욕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 두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무릎 꿇고 빌어요. 의료 시설을 독차지 하겠다는 게 아니라 사람 목숨 살리겠다는 거에요. 우리 아빠라구요. 엄마는 (사망자) 숫자에도 못 들어갔는데, 아빠를 그 숫자 하나로 만들어버릴 순 없어요. 병원에선 어제 검사를 했는데 확진 결과까진 5일이 필요하대요. 도대체 뭣땜에 이리 오래 걸리는지 알 수가 없어요! 지금 와선 확진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 없어요, 폐가 다 하애졌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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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pTO6Y3B9fQ
2020/03/06 04:40:55
ID : 3Wi04Mpfbwo
0
2020년 2월 6일
하늘이시여. 사람들을 구해주세요. 우리 아빠도 구해주세요.
2020년 2월 6일
전에 도움 바란다는 메시지는 지웠습니다. 오늘 배터리가 떨어질 때까지 전화를 해봤는데, 99%는 도움이 안됐습니다. 방법이 없다는 게 팩트에요. 저도 지쳤습니다. 병원에서 아빠 간호하며 무수한 전화를 받았는데, 처음에는 희망이 있는 거 같았어요. 뒤로 갈수록 절망만 더해 갔습니다. 됐어요. 인정해야겠죠. 우리를 구할 사람은 없어요. 아빠, 우리 불쌍한 아빠. 방법이 없어요. 거기 가거든 제가 잘 모시면 안될까요.
2020년 2월 7일
99%의 소식 때문에 가장 중요한 소식 하나가 묻혔습니다. 원저얼 선생과 그의 단체가 저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아빠가 오늘 밤을 이겨내길 바래요. 아빠 직장 동료분들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연락하시며 방법을 찾고 계세요. 원저얼 선생도 힘써 저희를 돕고 있고요. 이번 생에 저에게 소망 하나만 허락된다면, 그리고 실현만 된다면, 저는 다시는 소원을 빌지 않겠습니다. 아빠를 구해주세요.
2020년 2월 7일
호흡곤란은 죽음의 길로써는 너무나 잔인하다.
엄마, 이젠 아빠를 데려가줘요. 하늘에서 마음껏 숨쉴 수 있도록. 저는 걱정 마세요. 오늘 아빠에게 말했어요. 꼭 제 모습을, 제 목소리를 기억해달라고. 어렸을 적에 말씀하셨잖아요. 만약 저 잃어버리면 몸에 있는 자국으로 찾을 수 있다고. 다시 절 보시게 되면, 꼭 저 알아보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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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pTO6Y3B9fQ
2020/03/06 04:42:30
ID : 3Wi04Mpfbwo
0
2020년 2월 8일 03:13
아빠, 나 아빠 잃어버렸어. 엄마 찾아가. 그리고 기다려줘. 같이 집에 가자.
2020년 2월 8일 11:51
두렵다. 나도 감염됐다.
2020년 2월 9일
어제 갑자기 전신에 힘이 없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정신이 멍해 그저 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음모드를 해놓았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자고 있는 동안 이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다들 감사드려요.
저는 살고 싶습니다. 누가 살고 싶지 않겠어요. 눈앞이 보이고, 귀에 소리가 들리고,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악수와 포옹도 아직 있는데, 왜 안 그러겠어요. 아빠 엄마가 떠날 때, 마치 마음에 박힌 화살들도 다 뽑혀나간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두려움과 무력감도 함께요. 저는 살고 싶습니다.
2020년 2월 9일
오후엔 마음이 황량한 느낌이 강했고, 전화벨까지 계속 울려대서, 사실 그 이후 줄곧 잠에 들지를 못했다.
이틀 동안 더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매우 두렵다. 나는 운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게 두렵고, 내가 남편까지 연루시킬까봐 또한 두렵다. 이 병은 너무나 무섭다. 사람들은 고립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한다. 그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가장 친한 사람의 손조차 잡고 있을 수 없고, 포옹 하나조차 얻지 못한다. 이런 두려움 속에서 외부의 정신적 도움은 모두 구원이 되질 못한다. 오직 자신만이 맞서고, 타협하고, 그리고 자신만이 극복해내야 한다.
나는 스스로 밥을 먹어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먹어야 한다. 그래야 나는 살 수 있으니까. 나는 스스로에게 가장 나쁜 결과를 상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뇌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을 남겨야 한다. 나는 살고 싶다는. 나는 스스로에게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감정도 좋은 약이라면, 나는 살기 위해 스스로를 웃게 만들어야 한다.
피망은 친구에게 돌봐달라고 말해 두었다.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좀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반드시 피망을 다시 받아올 것이다.
나는 살고 싶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샤오항은 16일에 사망했다고 전해져.. 다들 코로나19 조심 또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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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0/08/11 01:36:12
ID : XwIGpWjh84M
0
안녕 스레주라고 부르면 되나? 아무튼 안녕
나 스레주가 올려둔 시들 정말 좋아해 이 스레를 발견한 건 이 시들이 올라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3월 중순 쯤이었어.
내가 이런 어두운 시들을 좋아해. 사람들이 날 보고 오글거린다거나 중2병이니 뭐니 해도 난 이런 시들을 좋아하는 걸 멈출 수가 없어.
우울에 빠져살았던 나는 어렵게 스스로 헤쳐 나왔지만 가끔 다시 우울에 빠질 때가 있고 주저앉을 때가 있거든 그러면 종종 이 스레가 기억나서 들어오길 지금까지 그게 이어졌네.
올려줘서 정말 고마워. 잘 보고 있어 :)
스레주한텐 언젠가 한 번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 벼르고 있었는데 마지막 스레을 올린 지 꽤 됐네.
계속 올려달라고 부탁하기엔 너무 염치가 없으니 그냥 올린 글을 두라고만 하고 싶네. 그냥 계속 두어 줘. 내가 지금까지 찾아오고 있어.
다시 한 번 어렵게 모은 시들 이렇게 풀어줘서 고마워.
125
이름없음
2020/10/08 08:53:09
ID : 63Xy3PeNxRD
0
레주야 개인적으로 두근두근문예부의 시도 좋았는데 괜찮다면 올려도 될까 !!? •_•
126
이름없음
2020/10/08 12:42:01
ID : Ai6Y60oFimJ
0
나 '독수리는 난다' 좋아해!
127
이름없음
2020/10/12 13:36:53
ID : NwL9jAqo3Pa
0
이거 엄청 슬퍼ㅠ 페북에서 봤었는데
128
이름없음
2020/11/16 20:46:24
ID : K6qpcIGnzPf
0
갱신
129
이름없음
2020/11/17 00:52:34
ID : 3Wi04Mpfbwo
0
모야모야... 나 스레주인데 나도 오랜만에 들어왔다ㅠㅠ 감동이야 나 우울증있었을때 하나하나 읽고 눈물흘리구 그랬었어..ㅎㅎ 지금 정말 많이 괜찮아졌거든! 내 기 받아가!! 좋아해줘서 고마워 ㅎㅎ
130
이름없음
2020/11/17 00:54:04
ID : 3Wi04Mpfb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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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 무슨 시 인지 잘 모르겠는데 나는 우울하고 무거운 느낌의 시면 상관없어!
131
이름없음
2020/11/17 01:00:08
ID : 3Wi04Mpfbwo
0
다시 틈틈이 올려볼게!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었구나 몰랐어ㅜㅜ
이 스레가 위로가 되어서 다행이야 내가 도움을 준 거 같아서 너무 행복해
132
이름없음
2020/11/17 01:00:21
ID : 3Wi04Mpfbwo
0
놈은
가슴속에 칼날 하나 감추고 있다
누군가 달려들면 내려칠 칼날을
놈은 날마다 칼날을 간다
날이 시퍼렇게 서도록
나를 보호해 줄 건 이것뿐이라며
갈고 또 간다
그러다가도
정작 휘둘러야 될 때가 되면
정말 휘둘러야 하는데
차마 차마 망설이다가
제 가슴이나 후비며
자상이나 입히는
써보지 못하는 칼날 하나
숨기고 산다
이길원, 자화상
133
이름없음
2020/11/17 01:02:37
ID : 3Wi04Mpfbwo
0
너무 많은 공장들
너무 많은 음식
너무 많은 맥주
너무 많은 담배
너무 많은 철학
너무 많은 주장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공간
너무나 부족한 나무
너무 많은 경찰
너무 많은 컴퓨터
너무 많은 가전제품
너무 많은 돼지고기
회색 슬레이트 지붕들 아래
너무 많은 커피
너무 많은 담배 연기
너무 많은 종교
너무 많은 욕심
너무 많은 양복
너무 많은 서류
너무 많은 잡지
지하철에 탄 너무 많은
피곤한 얼굴들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사과나무
너무나 부족한 잣나무
너무 많은 살인
너무 많은 학생 폭력
너무 많은 돈
너무 많은 가난
너무 많은 금속 물질
너무 많은 비만
너무 많은 헛소리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침묵
알렌 긴스버그, 너무 많은 것들
134
이름없음
2020/11/17 01:03:37
ID : 3Wi04Mpfb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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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있을 때
너는 아무생각 말고 푹,
쉬어야 낫는다
그래야 한다며 조언한다
이제부터 아무생각 안하기를 생각한다
어쩌다 내게 온 질문들이
한낮에도 어지럽게 시선을 맞춘다
가느다란 호흡과 유일해진 몸으로
어둠을 지나는 동안,
하나씩
다치지 않게 도려내는 법을 찾아본다
나에게 길들여진 생각의 모서리가
그동안 골똘하게 삐뚤어져 있다
아프지 않으면 곧 용서해야 되는 생각,
뿌리가 없는데 잔가지가 무성하다
아무생각 안해야 한다는 순간이
짧게 끊어서 오기도 한다
새가 없는 숲을 지난 것도 같다
나와 관련 없는 열매를 먹은 것 같다
셀 수 없는 시간들이 쉽게 휘어진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너도 무심히 사라진다
머릿속이 사막처럼 자꾸 언덕을 바꾼다
식은땀이 흐르는데 달달하다
아무생각 안하기는 도대체 어떻게 하나?
아무생각 안하기가
방 안에서 흘러넘치는 동안
오래 된 심장 쪽으로
혼잣말들이 비스듬히 넘어진다
강성애, 아무생각 안 하기는 어떻게 하나
135
이름없음
2020/11/17 01:07:54
ID : 3Wi04Mpfbwo
0
당신 아팠던 게 생각나 나 혼자 당신 다 살아내던 게 당신은 목구멍 가득 달을 삼키고 잠들었잖아 입을 벌리면 쏟아지던 달빛 잊지 못해 피보다 붉고 진한 손바닥 갈라진 손금 위로 생활도 막다른 길을 가려고 했지 그랬겠지 차라리 죽어서 시월 밖으로 나서려고 했겠지 뚝 뚝 끊어지던 시월 낙엽처럼 떨어져 바닥을 쓰는 생활 그게 어디 쉬운가 당신 그림자 덮고 돌아 누우면 달빛 스미던 간이 침대 이제 그만 자자 나는 벽을 붙들었어 가지마 가지마 우리 같이 살아 나는 꿈속에서 자주 창을 깼는데 시퍼렇게 시뻘겋게 흐드러지는 유리창 몇 번씩 손목을 긋는 거기 불쑥 들어오지 말란 말야 하나님 아버지 달이 점점 부풀어요 어쩌죠 당신이 못 살아도 나는 살아 당신이 있어 내가 있고 당신이 없고 내가 없고 그것 다르지 않듯이 그리고 묻겠지 당신은 누구고 나는 또 누구냐고 우리는 모두 무엇이냐고
유진목, 시월 병동
136
이름없음
2020/11/17 01:12:12
ID : 3Wi04Mpfbwo
0
팔십 넘어 혼자 살고 있는 한 노인이 말했다
나이 들으니 이제는 고독사가 걱정이라고
그러자 귀가 어두운 다른 노인이 물었다
그게 어디 있는 절이냐고
그 절에 가고 싶다
정희성, 두 노인
137
이름없음
2020/11/17 01:15:26
ID : 3Wi04Mpfbwo
0
애인에게선 나비 냄새가 났다
날개뼈를 긁어 주면 애인은 애벌레처럼 왼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온다. 나는 침묵했고 애인은 나비가 되고 싶다는 말을 주문 걸듯 반복했다. 나비처럼 말하고 나비처럼 울고 나비처럼 속상해하며 눈에 띄게 말라 갔다. 며칠씩이나 누에잠을 자고 의식이 있을 때도 최소한의 물만 마시고 이따금 냉소 띤 얼굴로 자신의 손목을 깨물어 달라고 했다.
나비의 피가 흐를 것 같아
필사적으로 나비가 되고 있는 애인의 몸부림에 대해 기록하지 않기로 결심한 그 하루조차 우리는 연대한 적이 없었다.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의 두 번째 문장처럼 우리는 겨우겨우 서로를 정다워했을 뿐. 애인은 이제 나비처럼 나비 숨을 쉬는데 (나만 다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아프도록) 그것이 흉기가 되어 나를 조롱하고 아예 나비가 되어 가는데 (나비가 된 애인을 간섭해서는 안 되는 일) 내가 구사할 줄 아는 모든 말을 잃어버린 나는 괴로워하는 법도 모르는데 (나의 혀는 점점 굳어 가는데) 차라리 당신이,
한 계절도 채 다 살지 못하기를
파괴되기를
김하늘, 나비, 숨
138
이름없음
2020/11/17 01:20:54
ID : 3Wi04Mpfbwo
0
곱추 여자가 빗자루 몽둥이를 바싹 쥐고
절름발이 남편의 못 쓰는 다리를 후리고 있다
나가 뒈져, 이 씨앙놈의 새끼야
이런 비엉-신이 육갑 떨구 자빠졌네
만취한 그 남자
흙 묻은 목발을 들어 여자의 휜 등을 친다
부부는 서로를 오래 때리다
무너져 서럽게도 운다
아침에 그 여자 들쳐 업고 약수 뜨러 가고
저녁이면 가늘고 짧은 다리 수고했다 주물러도
돌아서 미어지며 눈물이 번지는 인생
붉은 눈을 서로 피하며
멍을 핧아줄 저 상처들을
목발로 몽둥이로 후려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어렵고 독한 것인가?
김중, 사랑
139
이름없음
2020/11/17 01:23:14
ID : 3Wi04Mpfbwo
0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병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홀합니다
이름 모를 꽃과 새들 나무와 숲들 병든 세계에 끌려 헤매다보면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곤 합니다
가만, 땅에 엎드려 귀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지난 번 보내주신 약 꾸러미 신문 한 다발 잘 받아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소식 주지 마십시오
병이 깊은 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병든 세계를 헤매다보면
어느덧 사람들 속에 가 있게 될 것이니까요
송찬호,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140
이름없음
2020/11/17 01:24:49
ID : 3Wi04Mpfbwo
0
가벼운 교통 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미터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 입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오규원, 죽고 난 뒤의 팬티
141
이름없음
2020/11/17 01:26:28
ID : 3Wi04Mpfbwo
0
그냥 떠나가십시오.
떠나려고 굳이 준비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당신은 끝까지 가혹합니다.
떠남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니고
떠나려고 준비하는 그대를 보는 것이
괴로운 것을.
올 때도 그냥 왔듯이
갈 때도 그냥 떠나가십시오.
이정하, 떠날 준비
142
이름없음
2020/11/17 01:28:37
ID : 3Wi04Mpfbwo
0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 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외로운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 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었으나
내 개의 꼬리는 어떡할까 생각한다
이운진, 슬픈 환생
143
이름없음
2020/11/17 01:31:13
ID : 3Wi04Mpfbwo
0
어느날 귀가해보니 방에 시체가 있었어요 나는 시체와 밥을 먹고 주말 연속극을 보고 같은 이불에서 잤어요 난 시체에게 잘 해줬어요 혼자 있으면 외로울까봐 너무 늦지 않으려 노력했고 갈아입힐 옷도 샀지요 그때는 행복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시체는 썩기 시작했어요 얼굴에 진물이 흐르고 입에서 검붉은 피가 나오기 시작했지요 집주인에게 들키면 쫓겨날 판이었어요 그래서 큰 가방을 사서 시체를 넣었어요 시체가 너무 컸기 때문에 토막을 냈지요 그게 전부에요 누군가 내 방에 두고 간 시체를 가방에 넣어 쓰레기장에 버린 거에요 이게 죄라면 이 세상에 누가 결백한가요 집에 시체 하나쯤 없는 자가 어딨어요
전윤호, 토막살인사건
144
이름없음
2020/11/17 01:37:38
ID : 3Wi04Mpfbwo
0
나는 거지
아니다
교정을 배회하는 프티부르주아
아니다
자는 인간, 아니다
지금은 알고 싶지 않다
가방 하나 칼 한 자루
어제는 인문관 근처에서
오늘은 학군단 컨테이너 뒤에서 쑥을 캤다
때때로 버찌도 따고 모과나무 열매를 향해 돌은 던진다
그러다가 새들을 날려 보낸다
몇 해 전 글 잘 쓰던 소설가가 부임해왔지만 그는 곧
교수 자리에 안착해 소설 따윈 잊어버렸다
백내장으로 눈먼 언어학 교수는 식후에
여학생 둘의 팔짱을 끼고 매일 운동장을 세 바퀴 돈다
나는 내 시를 혐오하는 동료들과 장난을 치고
자기 시간을 빼앗았다고 내게 누명을 씌운 선배 강사와 농담을 한다
나는 일주일에 예닐곱 시간 단순노동을 하고
시간제로 임시직으로 조합도 정년도 없이 살게 될 것이다
제도에 반항하는 척
난 얽매이지 않아 자유로워 스스로를 위무한다
다단계냐 주유소 아르바이트냐 이게 문제예요
취직자리를 부탁하는 네 눈을 바라보며
나는 캘리포니아 건포도로 내 힘을 도왔고
네 슬픔의 자리를 경배했을 뿐
우리는 짧은 인사를 위해 느린 노래를 들었다
새들이 벌건 하늘을 저리 날아다니는 건 둥지가 어지러워 저러는 건 아닐텐데
나는 프티부르주아 새끼들과 연합하여
문학
아니다
문학 비슷한 걸로 심포지엄
아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릴 지껄였다
확실한 건 늙은 개털들에게 대가리를 주억거리는 개년이 되었다는 거다
그러니 내게 물어보지 마라
졸업해서 뭐합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꼭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김이듬, 저물녘 조언
145
이름없음
2020/11/17 01:42:34
ID : 3Wi04Mpfbwo
0
부디 당신의 못생긴 얼굴이나 악행 혹은 형편없는 문장력 같은 것에 절망하지 마시고, 귀하만이 가지고 있는 쓸쓸함을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다자이 오사무
146
이름없음
2020/11/18 00:05:35
ID : JRvgY4GpXBB
0
스크랩하고 보고있어 너무 좋다!
147
이름없음
2020/11/18 01:14:18
ID : KZfRyNBBs1h
0
허락하에 두근두근 문예부 시 올려볼게!!@,@
햇빛에게
아침에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너의 모습에
난 마치 네가 날 그리워했다는 느낌을 받아.
날 침대에서 일으키려 이마에 입 맞추고
나로 하여금 눈에서 졸림을 비벼내게 해.
나와서 너랑 같이 놀자고 불러주는 거니?
아님 먹구름 가득한 날은 바라지 말자고 믿어주는 거니?
위를 바라본다. 하늘은 파랗다.
비밀이구나, 그래도 난 너를 믿어.
너만 아니었다면, 평생 잠 잘 수 있을 텐데.
화난 건 아니지만...
아침밥이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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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0/11/18 01:14:44
ID : KZfRyNBBs1h
0
병들
쿠키 병을 따듯 난 머리를 연다.
내가 꿈을 숨기는 비밀장소.
햇빛 공 몇 개가 새끼고양이 여럿이 꿈틀대듯 서로 비벼댄다.
엄지와 검지로 공 하나를 뽑아낸다.
따뜻하고 따끔하다.
하지만 낭비할 시간이 없다! 보관하려고 병 속에 공을 넣었다.
그리고 그 병을 다른 병들과 함께 선반 위에 놓는다.
행복한 생각, 행복한 생각, 병 속에 든 행복한 생각이 한 줄로 놓여있다.
모아 놓은 병들은 친구를 만들어준다.
각 병은 보상으로의 별빛을 놓아준다.
친구가 조금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이 병들은 항상 기분을 좋게 해준다.
밤이면 밤마다 꿈은 늘고
친구면 친구마다 병은 늘어난다
깊숙이 더 깊숙이 내 손가락을 뻗어
동굴을 탐험하듯, 구석과 구멍속 비밀을 찾는다.
파고, 파고
긁어내고 긁어내고
병뚜껑 위 먼지를 불어낸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것 같다.
내 빈 선반을 채우기엔 병이 턱없이 모자라고
내 친구들은 내 잠긴 대문 사이로 들여다본다.
마침내 끝났다. 난 문을 열고, 친구들이 들어온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걸까? 내 병이 그렇게 가지고 싶은 걸까?
나는 신나서 병을 하나하나씩 선반에서 꺼내
모든 친구에게 하나씩 나눠준다.
모든 병을.
근데 하나하나 내 손을 떠날 때마다, 내 발 사이의 타일로 병이 떨어진다.
행복한 생각, 행복한 생각, 조각난 행복한 생각이 바닥을 덮는다.
내 친구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웃지 않는 내 친구들을 위한.
걔들은 소리를 지르고, 모종의 이유로 도망친다.
들리는 건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
내 머릿속에.
149
이름없음
2020/11/18 01:15:21
ID : KZfRyNBBs1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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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는 난다
원숭이는 올라탄다
귀뚜라미는 뛴다
말은 경쟁한다
부엉이는 찾는다
치타는 달린다
독수리는 난다
사람은 시도한다
그런데 그게 다야
150
이름없음
2020/11/18 01:15:52
ID : KZfRyNBBs1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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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는 거미를 좋아해
내가 에이미에 대해 뭘 들었는지 알아?
걔가 거미를 좋아한대.
징그럽고 털 나고 더러운 거미를!
그래서 내가 걔랑 친구를 안 해.
에이미는 노래할 때 목소리가 예뻐.
걔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랑 노래를 부르는 걸 들어본 적이 있어.
걔가 후렴을 노래할 때, 내 심장은 리듬에 따라 콩닥거릴 거야.
근데 걔는 거미를 좋아하잖아.
그래서 내가 걔랑 친구를 안 해.
언제는 내가 크게 다리를 다쳤던 적이 있어.
에이미는 날 부축해서 양호실에 데려다줬어.
난 걔가 날 못 만지게 했어.
걔는 거미를 좋아하니까, 걔 손도 더러울 거 아냐.
그래서 내가 개랑 친구를 안 해.
에이미는 친구가 많아.
맨날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고 있더라구.
아마 거미 얘기 하고 있던 걸 거야.
걔 친구들도 거미를 좋아하게 되면 어떡해?
그래서 내가 걔랑 친구를 안 해.
걔가 다른 취미를 가져도 상관없어.
걔가 이걸 비밀로 해도 상관없어.
그게 다른 사람한테 해가 안 가도 상관없어.
더러워.
걔는 더러워.
세상은 거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더 좋아질거야.
모두한테 말하겠어.
151
이름없음
2020/11/18 01:16:22
ID : KZfRyNBBs1h
0
네 해변이 되어줄게
너의 마음은 공포와 문제로 가득해
그게 몇 년 동안 너의 꿈을 막고 있었겠지
그래서 오늘 너와 가고 싶은 특별한 곳이 있어
해변에 가자.
지평선 너머 펼쳐지는 해변
멋진 빛 아래 빛나는 바다
네 마음속 벽은 녹아내릴 거야
햇빛 아래
내가 너의 걱정을 씻는 해변이 되어줄게
매일을 상상하며 쉴 수 있는 해변이 되어줄게
내가 너의 심장을 뛰게 하는 해변이 되어줄게
오래전에 떠났다고 생각했던 그런 곳이 되어줄게.
무거운 생각들은 모래더미에 묻어두고
햇살에 목욕하고 내 손을 잡아
불안감 따위는 바다에 씻어
네가 빛나는 걸 보여줘.
네 기억들은 발자국 속에 묻어두고
내 바람에 네 돛을 맡겨봐
그러곤 네가 왜 멋진 사람인지를 떠올려봐
네 입술을 내 입술에 맞출 때.
내가 너의 걱정을 씻는 해변이 되어줄게
매일을 상상하며 쉴 수 있는 해변이 되어줄게
내가 너의 심장을 뛰게 하는 해변이 되어줄게
오래전에 떠났다고 생각했던 그런 곳이 되어줄게.
하지만 내가 네 곁에 있게 해 준다면
너만의 해변, 너만의 피난처가 되게 해 준다면
너는 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될 거야.
152
이름없음
2020/11/18 01:16:44
ID : KZfRyNBBs1h
0
너 때문이야
내일도 나와 함께라면 날은 밝겠지
하지만 오늘이 어둡다면, 난 아래를 볼 수밖에 없어.
그래도 난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어
네가 날 바라봐주기 때문이야.
내가 말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난 소리 크게 외쳐!
하지만 내 진정한 감정은 나오질 않아.
그래도 내 말에 감정이 덜 빌 수 있는건
네가 내 말을 들어주기 때문이야.
뭔가 내 위에 있을 땐, 난 하늘에 손이 닿으랴 뻗어.
하지만 내가 작게 느껴질 때면, 얼마 못 가.
그래도 내가 선 모습이 크다고 느껴지는 건
네가 내 옆에 앉아주기 때문이야.
난 나 자신을 내 모든 마음을 다해 믿어.
근데 그 마음이 온통 찢겨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도 내가 나 자신을 더 믿을 수 있는 건
네가 날 믿어주기 때문이야.
내 펜은 항상 내 감정을 시험대에 올려놔.
내 글쓰기가 좋은 건 아니지만, 내 최선은 최선이야.
그래도 내 시에 감정이 더 담길 수 있는 건
네가 날 생각해주기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153
이름없음
2020/11/18 01:18:25
ID : KZfRyNBBs1h
0
빛 아래 유령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흐린 호박빛 아래 빛난다.
유영하며.
저건가보다.
세월의 힘을 이겨낸 마지막 하나 남은 가로등.
미래의 색, 역겨운 청록색으로 창백하게 바뀔 마지막 가로등
난 유영한다. 차분하게 과거에 살면서 현재의 공기를 마신다.
가로등이 깜빡인다.
나도 깜빡여준다.
154
이름없음
2020/11/18 01:18:40
ID : KZfRyNBBs1h
0
너구리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간식으로 먹으려고 빵을 자르던, 밤이 죽어갈 그때,
창문 밖에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너구리를 발견했다.
그때라고 생각한다, 사람으로서는 평범하지 않은 취향을 발견한 것은.
나는 너구리에게 빵 한 조각을 주었다, 결과가 어떠리라는 걸 잠재 중에 알면서도.
먹이를 준 너구리는 항상 돌아올거라는걸 알면서도.
유혹적으로 아름다운 내 칼날은 증상.
빵은 내 배고픈 호기심.
너구리는 충동이다.
달이 매일 밤 커져가고, 내 칼날을 더 빛나게 한다.
내 친구인 너구리의 눈도 더 빛나게 하는 그 달빛.
나는 신선하고 부드러운 내 빵을 자르고, 너구리는 더 신이 난다.
새로이 만족한 동물에게 내 감정이 비춰지는것일지도 모르겠다.
너구리가 날 따라온다.
서로 더 친해졌다고 할 수 있겠지.
너구리는 갈수록 배고파하고, 그 횟수도 잦아지니, 빵이 언제나 필요해진다.
칼질할 때마다 너구리는 신이 난다.
피의 재촉.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난 빵을 자른다.
그리고 나를 먹인다.
155
이름없음
2020/11/18 01:18:56
ID : KZfRyNBBs1h
0
해변
백만년이라는 경이로운 세월의 결과.
지구의 자궁이 무질서하게 지표면을 만나는 곳.
깨끗하고 푸른 하늘 아래, 행복이 끝없이 펼쳐진...
하지만 회색 두루마리 구름 밑에선, 끝없는 수수께끼.
세상에서 가장 길을 잃기 쉬운 곳임에도
모든 것들을 찾을 수 있는 곳.
모래가 젖은 곳에만 모래성을 쌓을 수 있지만
모래가 젖었다는 건,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라는 것.
이미 끝났다는 걸 인정할 때까지 성 아랫부분을 핥기만 할까?
아니면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걸 앗아가 버릴까?
파도가 만드는 거품이 내 발목까지 오는 곳.
내 발가락이 모래를 파고드는 곳에 선다.
바다의 짠 바람에 치유된다.
바람은 상냥하면서도, 강력하다.
거품 덩굴손에 유혹되어 발이 궁극의 경계선까지 발이 빠지자,
난 몸을 돌려, 내 평화가 바닷물에 침식되도록 내버려 두고.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 육지로 영원히 돌아간다.
156
이름없음
2020/11/18 01:19:35
ID : KZfRyNBBs1h
0
빛 아래 유령 2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흐린 호박 빛 아래 빛난다.
유영하며.
저 멀리에는, 청록색 빛이 깜빡인다.
어떤 외로워 보이는 형체가 길을 건너며 섬뜩한 빛의 진로를 방해한다.
내 가슴은 뛴다. 형체는 커진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나는 내 우산을 열어 그 그림자로 날 가시성으로부터 막아보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가 가로등 앞에 선다. 난 놀라서 짧은 비명을 삼키고 우산을 떨어뜨린다.
빛이 깜빡인다. 내 심장은 뛴다. 그는 팔을 든다.
시간이 멈췄다.
움직이라고는 호박색 빛이 그가 뻗은 팔에 깜빡이는 것뿐이다.
내 심장이 뛰는 속도에 맞춰서 빛도 깜빡거린다.
이 금지된 감정에 굴복하라고 괴롭히는 것처럼.
유령이 온기를 느낀다던가, 들어본 적 있어?
괜히 이해하려 들지 않고, 난 웃는다.
이해라는 건 과대평가다.
난 그의 손을 만진다. 깜빡임이 멈춘다.
유령들은 청록색이고, 내 심장은 호박색이다.
157
이름없음
2020/11/18 01:20:22
ID : KZfRyNBBs1h
0
수레바퀴
도는 수레바퀴. 돌아가는 악셀. 끊임없이 계속되는. 볼트 머리. 직선 기어박스. 떨어지는 하늘. 일곱 개의 신성한 말뚝.
정박하여있는 배. 이세계로 가는 포털. 굵은 끈에 묶인 얇은 끈. 찢겨진 마구. 곡선 기어박스.
커져가는 우주.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로 흘러가는 시간. 신의 존재. 탁 트인 곳에서 하는 수영.
물에 빠져가는. 피로 쓴 기도. 시간을 먹는 뱀들과 사람의 눈으로 쓰인 기도.
모든 사람의 눈을 꿰는 실. 신성한 말뚝의 만화경. 기하급수적 기어박스.
터져가는 별들의 하늘. 신이 존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신. 육차원에서 도는 수레바퀴.
사십 개의 톱니바퀴와 똑딱거리는 시계. 행성이 한 번 자전할 때마다 일 초가 지나가는 시계.
이세계에 정박되어 있는 배의 존재. 시계로 쓰인 만화경의 피. 사십 개의
톱니바퀴가 있는 하늘을 잇는 시간을 먹는 기도와 탁 트인 곳에 넘쳐나는 열린 눈.
숨 쉬는 기어박스. 숨 쉬는 볼트 머리. 숨 쉬는 배. 숨 쉬는 포털. 숨 쉬는 뱀.
숨 쉬는 신. 숨 쉬는 피. 숨 쉬는 신성한 말뚝들.
숨 쉬는 눈. 숨 쉬는 시간. 숨 쉬는 기도. 숨 쉬는 하늘. 숨 쉬는 수레바퀴.
158
이름없음
2020/11/18 01:23:45
ID : KZfRyNBBs1h
0
벽틈
나였을 리가 없어.
봐, 빛의 방향이 다르잖아.
시끄러운 이웃이었을까? 화난 남자친구였을까? 알 턱이 없지. 집에 없었으니까.
무슨 단서라도 있을까? 안을 들여다본다.
안돼! 보이지 않아. 마치 장님이 된것처럼 비틀거린다, 햇빛에 노출된 필름처럼.
하지만 너무 늦었다. 내 망막에.
이미 의미 없는 잔상이 영구적으로 그을려버렸다.
그냥 작은 구멍이었을 뿐인데. 그렇게 밝은 것도 아니었는데.
너무 깊었다.
모든 것을 향해 뻗어 나간 그 구멍.
무한한 선택지의 구멍.
난 깨달았다. 난 들여다보고 있었음이 아닌
내다보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는 반대쪽에서 들여다보고 있었음을.
159
이름없음
2020/11/18 01:24:02
ID : KZfRyNBBs1h
0
벽틈 (2회차)
하지만 그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혼란스러워져서, 난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내 타버린 눈은 색을 볼 수 없었다.
이 방에 누군가 있는 건가? 혹시 말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종이 위에 쓰인 시들,
미치도록 빠르게 휘갈기는 소리가 내 귀에 장난을 치는 걸까?
방이 구겨지더니
내게로 좁혀온다.
내가 마시는 공기는 내 폐까지 가기 전에 없어지고 만다.
당황스럽다. 분명히 나갈 방법이 있을 거야.
저기 있잖아. 그도 저기 있잖아.
두려움을 삼키고, 난 펜을 놀린다.
160
이름없음
2020/11/18 01:25:20
ID : KZfRyNBBs1h
0
저장해 줘
색이, 멈추지 않는다.
밝고, 아름다운 색들
번쩍이는, 늘어나는, 날카로운
빨강, 초록, 파랑
끊임없이 계속되는
의미 없는
소음의
불협화음
소음이, 멈추지 않는다.
난폭하고, 귀에 거슬리는 파형들
찍찍대는, 긁어대는, 날카로운
사인, 코사인, 탄젠트
회전판에 칠판을 올려놓고 재생하는 듯
피자빵 위에 비닐을 올려놓고 재생하는 듯
끝없이 계속되는
의미 없는
시
날 불러와 줘
161
이름없음
2020/11/18 01:26:30
ID : KZfRyNBBs1h
0
저장해 줘(2회차)
밝고, 아름다ㅇ 색들
번쩍 는, 늘 나는, 날카로운
빨강, 초록, 파랑
임없이 계속되는
의미없는
소음의
불헙하음
소음이,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
난 하고, 귀에 거 리는 형들
찍 대는, 긁어 는, 날카로운
사인, 코사인, 탄젠트
회전판에 칠 을 올려놓고 재 하는 듯
숨 쉬고 있는 흉곽에 칼을 꽂 듯
없이 속되는
의 없는
시
걜 지워
162
이름없음
2020/11/18 01:28:14
ID : KZfRyNBBs1h
0
전지무능아가씨
지구를 떠돌아다니던 한 아가씨에 대한 오랜 동화가 있었다.
모든 것을 아는 아가씨.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찾아낸 아가씨,
모든 의미,
모든 이유,
모두가 원했던 그것.
그리고 내가 있다,
깃털 하나
하늘에 표류되어, 기류의 희생양이 된다.
매일 매일, 난 찾는다.
작은 희망을 찾아다닌다, 그런 전설 따윈 없다는 걸 알면서.
근데 아무것도 소용이 없고,
다른 사람 모두가 등을 돌렸을 땐,
황혼의 물든 하늘에 희미한 마지막 별 하나처럼, 남은 건 전설 하나뿐이다.
그러다가 그 날엔, 바람이 멈추는 그 날엔.
난 떨어지겠지.
난 떨어지고, 떨어지고, 더 떨어지겠지.
깃털처럼 부드럽게.
마른 깃털 하나, 감정 없이.
그런데 누군가 엄지와 검지로 날 잡아준다.
아름다운 아가씨의 손이다.
그 눈빛의 깊이는 끝이 없었다.
모든 것을 아는 그 아가씨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안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텅 빈 목소리로 답을 한다.
"난 모든 것에 답을 찾았어.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아무 의미도 없어.
아무 이유도 없어.
우리가 원했던 건 불가능일 뿐이야.
난 네 전설이 아냐.
네 전설은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날 다시 공중에 띄운다, 난 돌풍에 몸을 맡긴다.
163
이름없음
2020/11/18 01:29:21
ID : KZfRyNBBs1h
0
행복한 결말
손에 펜을 들어야, 내가 나 됨을 느낀다.
나의 단 하나뿐인 사랑이 나에게 용기를 준다.
함께, 이 무너지는 세계를 분해하고
우리의 판타지 소설을 써 내려가자.
그녀가 펜을 써 내려가자, 잃어버린 것들은 그녀의 길을 찾는다.
무한한 선택지의 세계에서, 특별한 날이 올 날을 기다리자.
애초에
끝이 항상 좋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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