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0/09/30 17:29:24 ID : mE5WnXwIFg5 0
한 레스에 한 문단씩. 새해, 크리마스라고 꼭 눈이 내리라는 법은 없지. 하지만 미치도록 추운 것은 사실이다. 전날 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아닌 좁쌀같은 싸락눈이 바람과 함께 휘날렸다. 새벽 6시, X가 그 이른 시각에 무릎을 끌어앉고 차디찬 마룻바닥에 앉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껍지 않은 담요를 여미고 하얀 구름만 막막히 낀 하늘을 바라보는 X의 눈엔 생기가 없었다.
2 이름없음 2020/09/30 17:33:35 ID : mE5WnXwIFg5 0
눈이 시릴 정도로 오래 멍을 때리던 X가 앞마당에 닭이 푸드덕 거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정신이 없던 건지, 손이며 발이며 꽁꽁 얼 때 동안 밖에 앉아있었다. 빨갛게 얼어버린 손을 후후 불고 정리하지 않았던 이불에 털썩 몸을 뉘였다. 좁아터진 시골집에 침대는 사치였기에, 바닥에 이불만 깔고 자는 X. 바닥의 딱딱함에 곡소리를 내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3 이름없음 2020/09/30 17:34:19 ID : mE5WnXwIFg5 0
X는 어제 자신이 J에게 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내가 그토록 그 아이를 좋아했구나, 생각해 보니 정말 오랜 시간이었구나. 열 네살 때부터 지금까지면 벌써 6년이다. 중학생 그 어린 마음에 좋아하던 걸 성인이 될 때까지 오래토록. 말을 제대로 하진 못 했다. 하지만 그정도면 충분히 마음이 전달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답은 짧은 두 음절의 사과였다.
4 이름없음 2020/09/30 17:34:49 ID : mE5WnXwIFg5 0
뭐가 문제였을 까, 너무 오랜시간동안 잡아 두어서일까. 심했던 장난들 때문일까. 아니면 J은 정말, 오직 우정이라는 이름의 감정 뿐이었을까. X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살살 뒤로 젖혔다. 눈물을 말리려 했는데 오히려 옆으로 흘러버렸다. 머리카락과 이불은 X의 소금끼를 머금은 수분으로 젖어갔다. 혹여 부엌에서 밥을 하시는 할머니가 들을까 조용히 성질을 부리며 울어버렸다.
5 이름없음 2020/09/30 17:39:17 ID : mE5WnXwIFg5 0
붉게 상기 된 H의 얼굴이 예뻤다. 장미꽃을 액체로 만들어 얼굴에 흩뿌려 놓은 듯한 H의 뺨이, 온 우주의 별을 갈아 넣은 듯한 H의 눈동자가, 천사가 오밀조밀 심어주었을 H의 치아까지. 아름다웠다. 탐하고 싶었다. 평생 내 옆에 두고 나 혼자만, 내게만 종속 된 존재이길 바랬다. 하지만 그럴 순 없겠지. 그는 만인의 연인이며 사람들 앞에 섬으로 빛나는 사람이니까. H가 행복하길 바랬다. 그래서 H를 가두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을 가슴 속 깊이 어딘가에 가둬버렸다.
6 이름없음 2020/09/30 17:43:14 ID : mE5WnXwIFg5 0
파리하게 떨리는 S의 입술. 경멸을 담은 눈동자가 나를 향해있다. 당장 눈빛만 보면 나를 죽일 것 같은데, 눈가에는 왜 눈물이 고여있을 까. 무슨 말을 못 하고, 버벅버벅 입을 열려는 시도만 하는 S가 안쓰럽고 사랑스러웠다. 이내 입을 꾹 다물고 바특이 이를 갈며 주먹을 말아쥔 S가 고개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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