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2021/07/01 06:33:50 ID : aldyE7fe458 4
비 오는 나라의 사람들은 슬퍼도 울지 못해. 그곳은 이미 눈물보다 깊은 빗물에 잠겨서 자칫하면 맑음 나라의 사람들에게 들킬지도 모르거든. 까마득한 옛날에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 무섭지 않았다. 맑은 눈을 동그랗게 반짝이며 엄마의 품 속에 파고들면, 엄마는 긴 밤 내내 비 오는 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니까. 이마를 간지럽히는 엄마의 머리카락을 베고, 이야기를 이불 삼아 한참을 누워있다 보면 나는 어느새 비 오는 나라에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 간 밤에 겪은 모험담을 이야기해주면, 엄마는 재미없는 내 이야기를 웃으며 들어주었다. 그때는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몰랐다. 아직도 가끔 비 오는 나라의 꿈을 꾸지만 지금은 그게 꿈인 줄 안다. 지독한 현실의 악취가 나지 않으니까. 이제 나는 잠들지 못하는 밤이 두렵다.
2 반응자유피드백자유 2021/07/01 06:49:19 ID : aldyE7fe458 0
"출석번호 부르겠습니다." 눈가에 먹구름을 잔뜩 이끌고 간 학교의 풍경은 정말이지 한결같았다. 필통에 쌓인 샤프심과 먼지, 교과서 사이에 베인 종이냄새, 복도를 메우는 소음들. 교실은 잘 포장된 정신병원이나 다름 없었다. "대답은 크게! 안들리면 지각처리한다." 저기, 교탁 앞에 서서 소리치는 사람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좀 있다 매점 고?" "니가 사는 거?" 그리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실없는 소리나 해대는 이 정신병자들은 전부 환자다. 물론, 나 역시 그 정신병자에 포함된다. 내 병명은 아마도 '불평불만' 이겠지. "환자번호 10319 진구름" "네." 나는 눈을 감고 내 팔에 꽂힌 링거를 상상한다. 혈관을 뚫고 들어오는 약물은 곧 전신으로 퍼져 머릿속을 멍하게 만들겠지. 그리고 그 약의 이름은 '체념' 이다. 나는 이 약을 매일 아침 온 몸에 쑤셔 넣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항상 체념이 부족하다.
3 그때그때떠오르는대로적음 2021/07/01 07:00:16 ID : aldyE7fe458 0
부족한 체념은 어쩔 수 없으니 대신 '무관심'을 복용해야 한다. 교실의 숨 막히는 일상을 무시한 채 턱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면, 장마철의 어둑어둑한 하늘이 나를 반긴다. "너 구름이네 엄마 어떻게 죽었는지 아냐?" "아, 그 접시에 코박고 죽은 여자?" 곧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먹구름이 창밖에도 있고, 내 눈 아래에도 있었다. 무관심은 오늘따라 약발이 듣지 않았다. "아니라던데? 미쳐서 횡단보도 앞 물웅덩이에 대가리 처박고 죽었대." "미친. 뭔 민폐냐? 엄마랑 딸이랑 똑 닮았네." 횡단보도 앞 물웅덩이. 나는 그 웅덩이를 안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밟고 서서 움푹 팬 곳에 비가 오면 생기는 물웅덩이. 자전거가 지나가면 그 옆에 서있던 사람의 바짓단을 적시는 게 고작인 작고 얕은 웅덩이다.
4 모순점지적환영 2021/07/01 07:14:17 ID : aldyE7fe458 0
아무리 듣지 않으려 해도 들리는 그 비웃음 섞인 조롱은 아쉽게도 모두 사실이었다. 엄마는 억수같이 비가 오던 날, 우산도 내팽개치고 우악스럽게 그 웅덩이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더니 그대로 익사했다. 자살이었다. "아, 밥맛 떨어진다. 매점이나 가자." "소세지빵 아침에 가면 싸게 준대." 저 오만하고 비열한 이들의 잠깐 스쳐갈 화젯거리로 전락해버린 엄마의 죽음은 때때로 내게 꿈속의 이야기같이 느껴진다. 엄마가 들려주던 이야기처럼. 현실 같지 않으면서도 곁에 맴도는. 엄마는 냉장고에 메모장을 찢어 붙인 유서 같지도 않은 유서를 남겼다. 엄마가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엄마의 장례식 내내 비가 내렸고, 기어이 장례식장 근처의 주차장이 물에 잠기고 말았다. 그리고 엄마가 원하던 대로 바다에 유골을 뿌렸다. 그때도 비가 내려 젖은 손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던 엄마의 뼛가루가 기억에 남는다. "또 비가 내리려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릴 만큼, 하늘은 지치지도 않고 비를 뿌렸다.
5 이름없음 2021/07/15 10:21:31 ID : aldyE7fe458 0
"...여기서 필자는 이 지하세계에 관해..." 저 멀리 천둥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고, 공기가 습하게 피부에 달라붙을 때. 교실은 온통 사각사각하는 펜 소리와 칠판에 부딪히는 선생님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다음 페이지는, 진구름? 읽어볼까." 멍하니 교과서를 쳐다보다가 들린 내 이름에, 나는 짜증이 밀려왔다. 이 선생은 가만 보면 나를 참 좋아한단 말이야. "소나기가 내리면 나를 찾아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사라진 목소리는 깊은 호수 저편으로..." 나는 담담하게 글을 읽으며 최대한 꼿꼿하게 서있으려 노력했다. 등 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나 날아오는 쓰레기는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글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글이 아니라 그림을 읽는 느낌. 머릿속이 물에 젖은 솜으로 그득하게 찬 느낌. "...그래서 나는 소나기를 기다린다." "네, 잘했습니다. 이렇게 김유로 작가의 '소나기'를 다 읽었습니다." 의자에 앉자 어김없이 종이를 뭉친 쓰레기들이 느껴졌다. 때문에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저 견디는 게 고작인 가련한 몸뚱이 때문에.
6 이름없음 2021/07/15 10:32:36 ID : aldyE7fe458 0
"구름이는 이 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뭐라고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뛰쳐나간 한 마디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 또 놀림거리가 되겠지. "김유로 작가의 소나기. 어떻게 평가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 일개 학생인 제가 평가하기에는 아까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어 선생은 나의 버릇없는 반문에도 웃으며 대답했다. 과연, 선생도 서비스직이라더니. 나는 최대한 정석 같은 대답을 하려 노력했다. "그런가요. 뭐, 그럴 수도 있죠." 내 대답을 들은 국어선생은 어깨를 으쓱이며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칠판에 '감상문'이라는 글자를 휘갈겨 쓰고는 저번 시간에 걷어간 국어 공책을 교탁 위에서 정리했다. "아 미친... 또 감상문?" "질린다, 진짜." 아이들은 저마다 싫은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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