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언제 들어도 아파트 옥상의 금속 문은 열리는 소리가 을씨년스럽습니다. 그 묵직한 소리에는 도저히 정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장담하건대, 아무도 이 소리는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을 열자, 제 시야에는 제법 낡은 철창과 누군가 남색 물통을 엎지른 것처럼 까맣게 칠해진 밤하늘이 보였습니다. 역시 작업을 하다 머리가 막힐 때에는 밤하늘과 독대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밤하늘은, 늘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의식중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버렸습니다. 제 눈앞의 시야가 흐려져 갔습니다. 흉한 세상은 뿌옇게 볼 때 특히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그대로 밤 11시의 정서에 취한 채로 벤치에 편히 늘어지듯 앉았습니다. 여름 밤바람은 여전히 후덥지근했습니다.
  • " 할아버지는 잘 계시더라. " " 잊지 않았네. 고마워. " " 어, 응. 그럭저럭. ... 아, 맞아... 너, 혹시 쉘 실버스타인이라고 알아? " "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작가잖아. " " 거꾸로 총을 쏜 사자 라프카디오. 이런 책도 기억해? " 녀석은 잠깐 팔짱을 낀 채 고민하는 듯하다 알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알 사람은 알만한 동화인 모양이었습니다. 줄거리도 아이가 말한 것과 얼추 비슷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 동화에 빠진 거야? " " 그냥 주변에서 누가 읽길래. 나도 읽어볼까 생각 중이야. " " 동심이 부족했구나. 다 읽으면 나도 좀 빌려줘. " " 퇴원하면 빌려줄게. " " 의욕이 솟구치는걸. " 녀석은 빈약한 팔을 접어 올렸습니다. 근육 같은 건 쏙 빠져버렸을 텐데요. 그래도 제가 기다렸던 반응을 녀석이 적절히 보여줬던 터라 녀석이 죽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 ' 너, 예전이랑 제법 달라진 것 같아. ' 지하철 안에서 잠들려던 순간, 머릿속을 맴돌던 그 말이 확 떠올랐습니다. 병원을 나오려 할 때 녀석이 제 등에 던진 질문입니다. 저는 녀석이 오글거리는 질문을 갑자기 던져서 제법 머쓱했습니다. " 사람이 앓기 시작하면 안 하던 말도 하고 그래? " " 그런가 봐. " " 너도 그래. 좀 바뀌었어. 병실 들어오면서. 소독약 냄새가 사람을 바꾸는 모양이지. " " 너도 집에서 잘 때 소독약을 옆에 놓아두고 그래? " " 아니. 가끔 혼자 술을 찾기는 해. " " 궁상맞다. 알코올이 문제구나. " 계속해서 그 대화가 리플레이 되기만 합니다. 보통, 저런 질문은 제가 자주 하고는 했습니다. 역할이 조금 바뀌었달지, 아무튼 사람은 아프면 기가 죽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심심해서 잡생각이 늘어난 걸까. 갈 때 MP3라도 하나 던져줄 것을 그랬습니다. 기차의 창문에는 한순간에 어둠이 밀려옵니다. 21세기를 뛰는 철마는 먼지 낀 터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 역 소리와 함께 익숙한 풍경이 창문 너머로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면서 제가 살던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오갈 때마다 실감하는 거지만, 역시 가깝지 않은 거리입니다. 분명 녀석을 병문안 가는 것은 제가 좋아서 하는 것인데, 이상하게 다녀오면 머릿속에 먹구름이 낍니다. 기분 나쁘지는 않지만, 확실히 골치 아픈 먹구름. 장기를 둘 때 장군을 당한 기분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불쾌함을 걷어내려고 온종일 방 안에 틀어박힌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생각하는 법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벌써 저녁이 되었습니다. 저는 옷을 좀 더 얇고 편한 맨투맨으로 갈아입고,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웬일인지 오늘은 아이가 저보다 먼저 나와 있었습니다. 아이는 두 눈 가득 머금은 검은 호수에 도시를 담다, 시선을 돌렸습니다. 노골적이지 않을 정도로 낄낄대는 아이는 입가에서 뭉게구름을 뱉었습니다. " 지각이에요. " " 지각대장은 항상 너였는데. 슬슬 긴장해야겠네. " " 아. 장난해요? "
  • 저희 둘은 난간에 기댄 채로 말이 없었습니다. 연기를 내뿜는 순간이 어느새 서로 같아져 있었습니다.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나서 꽁초를 양철통에 집어넣고는 옥상의 낡은 벤치에 주저앉았습니다. 페인트가 다 벗겨져 가는데도 여전히 다시 칠해지지 않고 있는 벤치. 보기 좋으라고 칠해졌던 페인트가 벗겨지고서야 벤치는 비로소 자신의 본질이 나무였음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투박한 벤치에서 화사한 색깔이 남아있는 부분은 구석구석 흔적 뿐입니다. 새삼 어떠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나름 같이 지내면서 정이 붙은 벤치입니다. 좋은 벤치는 좋은 그대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 생각이 많아보인다. 그쪽. " " 용하구나, 너. " " 저번에 제가 나쁜 버릇 있다고 얘기했나요. " " 얘기했었지. 지금 보니까, 진짜 나쁜 버릇인 것 같아. " " 맞아요. 혹시 제가 싫어졌나요. " " 아니. 아직은. " " 그렇구나. " 아이는 가벼운 걸음을 걸으며 제게서 조금 거리를 두고 벤치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 학원때문에 힘든데 덕분에 꾸역꾸역 버티고있어 정말 고마워 오늘도 잘봤어
  • >>106 자주 찾아와주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 " 그래서.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 건가요. " " 글쎄. " 제가 무표정으로 말없이 바라보자, 아이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바라보는 순간에도 저는 생각 중이었습니다. 어떻게 말을 열어야 자연스럽게 제 고민을 해소할 수 있을까. 아이는 꽁초의 마지막 연기를 제 얼굴에 뱉었습니다. 저는 코앞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물러섰습니다. " 고약해. " " 그쪽이 또 넋을 놓고 있길래, 정신 좀 차리라는 뜻에서 해본 거예요. " " 빛이 바래가는 걸 지켜봐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 " 네? " 아이는 이런 질문은 생각하지 못했던 건지 멈췄습니다. 손에서는 꽁초가 떨어졌습니다. 외마디 앗하는 소리와 함께 꽁초를 다시 주워서, 아이는 꽁초를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습니다. 던지는 실력이 제법 좋습니다. 명중했습니다.
  • " 빛이 바래가는걸 지켜본다니. 무슨 뜻이에요? " " 그런 경험 있잖아. 내가 알던 무언가가 낡아가거나, 바뀌는 경험. " " 응. " " 보통 그런 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바뀌어서, 난 그런 순간을 싫어하지는 않았거든. " " ... 보기보다 진지한 구석이 있네요. " 아이는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고, 두 발을 오므려 모았습니다. 말없이 두 팔로 다리를 모아서 제 말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제 막혀있던 말문이 트였습니다. " 그런데 오늘 그 순간을 봐버렸단 말야. 바뀌어가는 그... 과정을 말야. " " 정떨어졌어요? " " 아니. 그렇지만 앞으로 바뀔 것을 생각하니 조금 마주 보기 힘들어졌어. " 그것은 매정했습니다. 기억을 가공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했습니다. 기억 속 무언가가 예전보다 바래져 있다면 그저 ' 그땐 그랬었지. ' 라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억을 가공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남아있는 아련한 맛을 남겨둘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래져 가는 것을 중간에서 보는 순간 의미는 퇴색됩니다. 불안감이 가공을 막아섭니다. 그 순간부터 바래져 가는 것은, 추억이 되지 못하고 그저 낡아가는 무언가가 될 뿐입니다. 제 동경의 말로는 정해졌습니다.
  • 와..마지막 말 멋있네
  • " 체념의 마법이 필요한 순간. " " 뭐? " " 체념해버려요. " 저는 어이가 없어 허, 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그 말을 부정해버렸습니다. 저는 허무주의를 옹호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 ... 됐다. 너무 무거운 말을 꺼냈어. " " 나는 그걸로 꽤 여러 번 극복했는데. " 손사래를 치는 제 손을 아이가 깍지끼듯 맞잡고,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저를 주시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저는 순식간에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손에 힘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 바꿀 수 없거나, 바꿀 생각이 없다면 그냥 포기하세요. 그런 거 없어도 살아가는 데 별 지장 없어요. 정말로. " " 미안한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 " 바보같기는.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요. " 아이는 벤치에서 일어나며 맞잡은 손에 힘을 줬습니다. 그대로 아이는 체중을 뒤로 실었습니다. 이대로 넘어질 작정인 모양입니다. 저는 끌려가듯 일어서며 맞잡은 팔을 급히 제 쪽으로 잡아당겼습니다.
  • 어색하게 잡아당겨진 아이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습니다. " ... 흐. 놓을까 봐 솔직히 조금 쫄았어요. " " 본능적으로 잡은 거야. 다치는 걸 방관하는 어른은 나쁜 어른이니까. " " 바로 지금 같은 거란 말이에요. " 아이가 잡은 손에 신호를 줘서, 저는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서로 약속하지도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한 큐에 이루어졌습니다. " 눈앞의 저처럼 그게 위태로워질 때, 당신 본능이 반응한다면 잡아당기겠죠. 중요한 무언가는 그때 구해줘도 늦지 않아요. " " 내가 잡아당기지 않으면? " " 넘어지겠죠 뭘. 그런데 넘어져도 괜찮아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요. " " 비유가 억지스러워. " " 그러게요. 그쪽이 좋아하는 걸 밀쳤으면 좀 아귀가 맞았을 텐데. 그래도 반은 들어맞았죠? " 이 정도도 이해 못 하면 바보 어른이라며, 아이는 손을 놓고 그대로 양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습니다. 아이의 체념이란 건 이런 의미인 모양입니다. 지금부터 체념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해야 할까요. 그럼, 빛이 다 바랠 즈음에는 의지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까요.
  • 기다릴겡
  • 5-1. 이후, 한 달 정도 시간이 지났습니다. 먼저, 아이와 일종의 부탁을 주고받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서로 부탁할 때마다 이건 어디까지나 부탁이다, 라고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순간,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습니다. 들어보니 아이가 메시지를 보내놓았습니다. ' 그쪽 집에 있는 기타로 연습 좀 해도 돼요? ' ' 부탁하는 거야? ' ' 응. 부탁할게요. ' 저는 이내 마음대로 하라며 짧게 답했습니다. 읽음 표시가 사라지고, 아이는 정중하게 감사의 표시를 했습니다. 여기서도 드러났지만, 두 번째로 아이가 집에 놀러 오는 경우가 좀 잦아졌습니다.
  • 딱히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는 조금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렇게나 첨예하게 사람을 경계하는 인상이었던 아이가 이리 쉽게 벽을 허물었다는 점에 놀란 것입니다. 한번은 왜 자주 집에 찾아오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답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 그냥. 이쪽 집에 있는 게 편해요. ' 집에 혼자 있으면서 자기 집이 불편하다니. 저는 의아했습니다. 외로움을 탈 성격은 절대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래저래 깊게 캐묻기는 성가시고, 저도 가끔 적적하지 않아서 좋으니 긴말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라진 점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제 앞에 앉아있던 의사는 읽고 있던 진단서를 넘기다 짧게 숨을 내쉬었습니다. " 음주와 흡연을 절대적으로 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본인께서는 간 경변이 진단되었습니다. " 그렇구나, 라고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를 수긍해버렸습니다.
  • 병원을 나오고 나서야 시야가 탁 트였습니다. 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날씨는 어느덧 서늘해졌습니다. 의사는 앞으로 몇 번의 검사를 더 할 것이며, 간 경변은 진행을 늦출 뿐 완치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뭔가 묘해졌습니다. 후회된다거나 슬픈 것은 아니지만, 밀물처럼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저는 문득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더 이상 녀석은 문안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이렇게 가끔 몇 분 정도 전화만 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 웬일이야. 나한테 전화를 해주고. " " 저번 주에도 했잖아. 나 이제부터 의사가 술 끊으라고 하더라. " " 그러게 담배랑 술 좀 끊지. " " 그럴걸 그랬나봐. 아직은 실감이 잘 안나네. " " 그렇겠지. "
  • >>113 기다려줘서 너무 고마워. 앞으로도 꾸준히 써볼게.
  • 볼때마다 생각하는데 글 잘써서 부러워ㅜ
  • 잘보고있어 글 너무 예쁘다 자주 들를게
  • >>118 좋게 봐줘서 기쁘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고마워. >>119 예쁘다는 칭찬 고마워. 앞으로도 자주 봐준다니 더 신경써서 써볼게.
  • 저는 아파트로 돌아가면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지금 제 앞에 닥칠 감정을 미리 이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 너, 처음 병원에서 진단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어? " " 나? 글쎄... " 잠깐의 짧은 침묵. 뒤척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습니다. " 살짝 쫓기는 기분은 들더라. " " 시간에? " " 나 자신한테. 나는 평소대로 지내고 싶은데, 계속 마음 한구석에서 달리라고 재촉하는 거야. 안 해본걸 빨리해보라고. " " 맞는 말 같은데. " " 나는 솔직히, 그러기 싫었거든. 그건 내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거잖아. " 그렇게 즐기는 건 싫다. 녀석은 그 말로 자신의 기분을 정리했습니다. 녀석은 팔자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상황도 팔자라며 금방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체념, 팔자처럼 자기 위안을 위한 방법들을 배워나가야 했습니다.
  •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어깨 위로 차가운 것이 툭 떨어졌습니다. 하늘을 보니 여름이 끝난 줄 알았는데 또 우중충해져 있습니다. 비가 오려는 모양입니다. 우산도 없던지라 저는 좀 더 걸음의 보폭을 넓게 잡았습니다. " 그럼 네 말은, 평소대로 지내야 한다는 뜻이구나. " " 응. 평소대로.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쭉 살아갔어.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 " 내 평소 대로가 뭔지 잘 모르겠어. " " 하고 싶은걸 뚝심 있게 하면 되잖아. 그런 건 네가 나보다 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 " 내가? " 순간 녀석은 희미하게나마 낄낄 웃었습니다. 마치, 자기만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 " 몇 년째 오디션 연습 중인 거. 그런 건 뚝심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 " " 너무해. 그런 말을 꺼내다니. " " 나는 그럼 쉬어볼게. 휴대전화가 너무 무거워. " " 미라가 되어버린 거야? " " 그럴지도 몰라. 그럼 안녕. " 전화는 그렇게 끊겼습니다. 아파트로 들어가기 전에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비를 약간 맞은 채로 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안경에 물방울이 져 있습니다. 안경닦이가 없어 옷으로 연거푸 안경을 닦아냈지만, 결국 물기를 깔끔하게 걷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아파트 계단을 올라서 복도 모퉁이를 돌려던 찰나, 저는 못 보던 아주머니와 부딪혔습니다. 얼핏 볼 때 나이는 30 후반, 내지 40 초반으로 보였습니다.
  • 이렇다 할 말을 할 틈도 없이 그 아주머니는 제게 죄송하다는 말을 두어 번 하고는 급히 내려갔습니다. 딱히 죄지은 것도 아닌데. 아주머니가 내려간 후에, 저는 조용한 계단을 향해 죄송하다고 말을 했습니다. 다시 복도로 나와보니 아이가 문을 열고는 빼꼼 이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 설마 기다린 거야? " " 아니거든요. 복도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싸움이라도 난 건가 해서요. " " 그렇게 세게 부딪힌 적 없어. 기타 연습은. " " 아. Rylynn 연습했어요. 느리게 하면 조금은 칠 수 있게 됐다. " 자랑스럽다는 듯이 아이가 손가락으로 브이 표시를 만들었습니다. 들어가서 확인해보자며 제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는 안된다며 고개를 도리질했습니다. 제대로 칠 정도로 노력해서 절 놀라게 해주겠다고 아이는 그랬습니다. 제가 없을 때 연습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 모양입니다. 아이는 정중하게 제게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이번에는 저도 아이에게 정중하게 인사했습니다. 의외의 반응에 아이는 조금 놀라서 멀뚱거리다 얼른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 5-2.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저는 그대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차가운 바닥. 켜지지 않은 불. 어두운 이불 속에 갇힌 기분이었습니다. 그 아늑한 답답함이 좋아서, 이대로 있기로 했습니다. 최근, 엄마는 제가 사는 곳을 알아낸 모양입니다. 처음 집을 찾아왔을 때, 그 날은 잠에서 깬 채로 새벽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건만 저는 온종일 방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오기로 끝까지 버티고 버티다 눈이 짙게 충혈된 후에야 아침에 잠들 수 있었습니다. 작은 노크 세 번. 그 소리를 다시 듣는 게 싫어서 저는 최근 집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그 사람은 기타 연습을 하러 가고 싶다는 제 말에 흔쾌히 응해주었습니다. 연습을 하는 게 맞긴 하니, 마냥 핑계는 아니었습니다.
  • 불현듯 도망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두운 거실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가 저를 보채고 있었습니다. 직접 대면해서 제발 이러지 말아 달라고 말을 하면 어떨까요. 과연 그 상황에서 제가 겁먹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엄마의 말 몇 마디에 홀려버려 엄마를 따라가지는 않을까요. 최근 제 일상은 모든 것이 불투명해졌습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 어른들은, 이런 일에 꿈쩍도 안 하던데. " 앞으로 엄마는 몇 번이나 더 저를 찾아올까요. 아예 어딘가에서 제가 나올 때까지 지켜보지는 않을까요. 불안감을 가득 머금은 풍선처럼, 제 기분은 위험할 정도로 허공에 떠 있었습니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서 불안합니다. 언제 떨어져 버릴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바람이 빠져 가라앉을 것을 알면서도 불안감과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결국 윽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작은 일에 너무 상처받으면 안 되는데. 벽에 기댄 채로 머리를 벽에 연거푸 들이받다 저는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채로 몸은 절로 웅크려졌습니다. 이대로 주민등록번호처럼 말소되었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 그 순간, 똑똑 문 두드려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숨이 막혔습니다. 차에 치여버린 사슴처럼 불규칙한 숨을 뱉었습니다. 가슴을 부여잡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했습니다. " 악보 놓고 갔잖아. " 익숙한 목소리였습니다. 현관문의 렌즈로 확인해보니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제야 긴 숨을 내뱉었습니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잠깐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고 욕실로 향했습니다. 불을 켜보니, 처음 보는 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헝클어진 머리. 충혈된 눈. 누군가 붓을 들고 두려움을 갈아 넣은 먹을 제 얼굴에 칠해버린 모양입니다. 세수를 하면서 저를 되돌리는데 시간이 몇 분 걸렸습니다.
  • 적당히 정돈을 끝내고 문을 열자, 그 사람은 악보를 건네려다 멈칫했습니다. 왜 악보를 주지 않고 버티는가. 설마 여기서도 부탁이니 뭐니 얘기를 하려는 건가. 저는 조금 인상을 구겼습니다. " 형광등은 저번에 갈지 않았나? " " 그냥. 꺼뒀어요. 자려던 참이었거든요. " " 어두운 걸 무서워한다며. " " 잘 때는 참고 자요. " 거짓말입니다. 저는 여전히 어두운 것을 무서워합니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어서 잠깐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 정말이야? " 그는 그의 것과 똑같은 제 악보를 돌돌 말아 제 머리를 툭 쳤습니다. 맞은 부위를 괜히 손으로 문대면서 저는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 " 아무튼, 그렇다니까요. " 제가 재빠르게 악보를 잡아채가도 그는 선뜻 악보를 내어줬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려던 참이었습니다. " 불 켜도 될까. 보는 내가 다 어두워지네. " " ...아, 아뇨. 지금은 조금 그래요. " " 집안 꼴이 엉망인가? 저번에 보니 이상할 정도로 깔끔했는데. " " 그런 건 아닌데... " 제가 말끝을 흐리자, 그는 저와 눈높이를 맞추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사람은 어른치고 가까이 다가와도 퍽 무섭지 않았습니다. " 최근 나에 대한 네 태도가 바뀌었다는 거 알고 있지. 좋은 뜻으로. " 저는 그 말을 깊게 해석하지도 않고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또 그는 넋 놓고 있습니다. 가끔 있을 때처럼, 제 얼굴을 유심하게 바라봅니다. 얼른 아무 말이나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어색함에 저는 신고 있던 슬리퍼를 바닥에 질질 끌었습니다. "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아? " " 감이... 안 잡히는데요. " " 얼굴 때문이라면 불 켜도 괜찮은데. 그것보다, 불을 꺼도 울었던 얼굴은 충분히 보이거든. " " . " " 걱정 있어? " 엄마가 찾아올까 봐. 그래서 엄마를 대면해야 할까 봐 무서워요. 엄마와 대화를 나눌까 봐 무서워요. 엄마를 따라갈까 봐 무서워요. 엄마를 두려워하는 제가 무서워요. 이대로 영원히 혼자만 남게 될까 봐 무서워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서워요. 용기가 없어서 무서워요. 가족이라는 단어 때문에 피하게만 하는 죄책감이 무서워요. 그런 말들을 모두 억지로 삼켰습니다. 역한 비눗물을 삼키는 것처럼 버겁습니다. 말들을 삼키는 순간 눈시울이 찡해졌습니다. 괜히 창피하고 짜증만 납니다. 눈가 끝이 자꾸만 욱신거립니다. 저는 주먹을 옴팡지게 쥐고서 눈 끝을 계속 꾹 눌러댔습니다.
  • " 그쪽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 " 맞아. 누구라도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렇기는 한데. " 그 사람은 투박한 손으로 제 눈가를 지분댔습니다. 갈라진 굳은살들이 제법 거칠었습니다. 저는 최대한 터져 나오는 소리를 참아냈습니다. " 네가 해결할 때까지 도망치는 걸 조금 도와줄 수는 있지. " " ... 이렇게 울기만 하는데. 제가 어떻게 해결해요. " " 뭔가를 해결하고 싶어서 우는 건 아니니까. 우는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 저렇게 말한 데에는 어느 정도 따끔한 말을 듣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제 예상과는 다른 말에, 또 너무나 맞는 말에 저는 분해졌습니다. 얼굴을 퍽 받아치듯 묻어버렸습니다. 옷가지를 꽉 붙잡고 터지기 일보 직전이던 마음속을 게워내기 시작했습니다. 파키라 씨도, 그 사람도 말이 없었습니다.
  • 6-1. 또다시 아침입니다. 예외 없이 아침은 돌아왔습니다. 어제 같은 일이 있었으면 밤에 자리를 양보해줄 만도 하건만, 부지런한 건 알아줘야 합니다. 어제, 아이에게서 사정을 얼추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전해 들은 내용으로 사정을 구성해보면 이러합니다. 현재 아이는 부모와는 따로 사는 중이며, 아버지 쪽과는 연락이 아예 닿지 않고 있다는 모양입니다. 그의 모친이 큰 병을 앓게 된 순간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나빠졌고, 모친은 종교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사정을 풀어나갔는데, 조심스럽게 생각하자면 부친은 모친과 아이를 강도 높게 학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학대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아이가 안쓰러웠습니다. 이후 어쩌다 할머니 손에 거두어져서 집에서 빠져나온 후, 사별하고 나서부터는 혼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그의 모친이 주변에서 가끔 보이기 시작하더니, 한 달 전부터는 집에 찾아온다고 얘기합니다.
  • 사정은 들은 후, 아이에게 계속 집에서 연습해도 좋다고 얘기했습니다. 조금 생각해보면, 이런 사정을 듣고 집에 오면 안 된다고 못을 박는 것도 제법 매정합니다. 아이는 반쯤은 감정에 복받쳐 얘기한 것이지만, 또 반쯤은 도움을 청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 지금은 고객님께서 통화할 수 없으니... " 녀석과는 통화가 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조언을 구해볼 만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녀석은 중환자가 된 것입니다. 다음번에 통화가 될 때는 직접 찾아가도 될지 물어보자고 생각하며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토마토와 달걀, 그 외 잡다한 채소가 다수입니다. 이것들을 대충 볶아먹으면 되겠습니다. 물을 냄비에 담아 뜨겁게 데우면서 토마토를 씻기 시작했습니다.
  • " 저기요. 그쪽. " " ... 허흐. " 순간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토마토에 칼집을 내던 저는 칼을 내려놓았습니다. 요란하게 덜컹 소리가 났습니다. 다행히도 베인 손가락은 없었습니다. " ... 허흐가 뭐예요. 허흐가. 푸하핫..! " " 올 때는 물어보고 오기로 하지 않았어? 어제 그렇게 울더니, 컨디션은 나아진 모양이네. " " 아... ... 그, 그거에 관해서 얘기하러 온 거예요. 갑자기 들어온 건 죄송합니다. " 저는 토마토에 칼집을 작게 내서 냄비에 거꾸로 얹어두었습니다. 잠깐 짬이 나자 손을 대충 수건에 닦고 꾸벅 숙인 아이의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 " 너무 공손하게 사과하지 않아도 돼. " " 습관이 몸에 베어버렸어요. ... 아니, 하려던 말은 따로 있어요. 그쪽, 수족관 좋아하나요? " "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 제법 뜬금없는 말이었습니다. 수족관을 좋아하느냐니.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보니 저는 수족관은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틀에 박힌 지극히 평범한 길만 걸어갔습니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이렇다 할 무언가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녀석을 동경한 나머지 억지로 제 몸을 망가뜨렸던 건, 그러한 저 자신에 대한 반발일지도 모릅니다. " 어쩌다 얻은 티켓이 두 장 있는데,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 " 부탁하는 거야? " " 부탁합니다. 저 수족관을 한번 가보고 싶어요. " " 그럼 냉장고에서 달걀 좀 두 개 정도 꺼내줄래. " " 저 아침 안 먹었는데. " " 세 개. "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대파 아랫부분, 마늘을 잘게 썰어 넣었습니다. 아이는 어느 정도 눈치가 있었습니다. 어느새 달걀을 풀어서 섞고 있었습니다.
  • " 오늘 날씨, 오후에 비가 올 수도 있데요. " 아이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일기예보를 보며 말했습니다. 지금 날씨는 이렇게 화창한데. 날씨의 변덕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다 먹은 식기를 싱크대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여러 번 울렸습니다. " 그럼 저는 준비하고, 우산 좀 챙겨올게요. " " 어, 응. 그래. " 아이가 나가고, 저는 우선 설거지 거리를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현관문 앞에서 이어폰을 귀에 꼽고 있었습니다.
  • 차가 주차된 곳으로 내려가면서 아이는 말이 없었습니다. 이따금 흥얼거릴 뿐이었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질문하자, 아이는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습니다. " 무슨 노래 들어? " " 그레고리오. 후루카와 본점이 불렀어요. " " 후루카와 본점.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걸. " 문을 열고 자동차 시트에 자리를 잡자, 아이는 선뜻 뺐던 이어폰 한쪽을 제게 쥐여주었습니다. 그쪽도 빠지게 될 거라면서 아이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였습니다. 노래의 가사는 느리게, 그래서 마음속에 천천히 와 닿았습니다. 언제 들어도 부담이 없을 사근사근한 노래입니다. 순간 읽을 줄 아는 문장이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순간 그 노래에 빠져버렸습니다. " 이게 사랑이야, 그레고리오. " " ... ... 헤. 일본어도 알아요? " " 조금. " 아이는 순간 멈칫했습니다.
  • 수족관은 생각 이상으로 무척 거대했습니다. 이른 시간에 왔음에도 줄이 길어서, 저희 둘은 조금 기다려야 했습니다. 티켓을 교환하기 위해 기다리면서, 저는 이상한 점을 느꼈습니다. 아이는 같은 노래를 내내 듣고 있었습니다. 그것에 익숙해져서 저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같은 노래를 계속 듣는 거 지루하지 않아? " " ... 아. 바꿔줄까요? " " 아니. 그런 건 상관없는데, 궁금해졌거든. " " 아아. 뭐, 그냥. 좋잖아요. 한 노래에 익숙해지는 거. 저는 금방 싫증 나지 않고 계속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좋다고 생각해요. " " 무언가에 싫증 내지 않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 " 좋아는 하되, 빠지지만 않으면 돼요. " " 어려운데, 그건. 이러나저러나 결국 거리감이라는 게 남게 되잖아. " " 그게 우리가 슬퍼하는 이유 아닐까요. " 대화가 산으로 가는데도 묘하게 성립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오묘한 대화 속에서 차례가 저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티켓을 확인한 담당자는 손목에 묶을 수 있는 질긴 재질의 팔찌를 건네주었습니다.
  • 아쿠아리움 내부는 넓고 어두웠습니다. 특히 빛이 많지 않아서, 얼핏 보면 새벽 바닷속에 잠긴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굵고 투명한 유리창만을 경계로 아쿠아리움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유유자적하는 물고기들과 흐름 없는 물.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곳은 바다처럼 아름다웠습니다. 환경이 아름답다기보다, 은은히 떠다니는 물고기 그 자체를 아름답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아쿠아리움의 중앙으로 나오자, 매우 큰 원통형의 수족관이 보였습니다. " 어째서 상어는 저기 있는 물고기들을 안 잡아먹어요? " 문득, 아이는 수족관에서 같이 헤엄치는 상어와 작은 관상용 물고기 여럿을 가리켰습니다. 이상하게도 상어는 작은 물고기들을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서로 사이가 좋아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뭔가 부조리를 느꼈지만, 이런 광경 자체를 처음 봤던지라 그럴듯한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 " 저기 있는 물고기를 잡아먹을 이유도 없잖아? " " 배가 고프잖아요. " " 조련사들이 밥을 주겠지. " " 조련사들이 밥을 주지 않으면 잡아먹겠네요. " " 그렇겠지. 상어는 조금 외로워지겠지만. " 그렇구나. 라며 아이는 납득하고 통로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터널 형식의 통로는 유리로 감싸져 있었고, 그 위로는 푸른 물과 크기가 큰 물고기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습니다. 통행자들을 우려한 것인지 터널의 바닥에는 조명이 장치되어 있었습니다. 푸른 물과 밝은 빛이 만들어내는 그라데이션은 참 보기 좋았습니다. " 천천히 가. " " 얼른 가서 보고 싶잖아요. 처음 오는 건데. " " 그래서 천천히 가자는 거야. 오랫동안 있고 싶어서 그래. " " ... 아, 그래요? " 아이는 제 쪽으로 걸어와서, 발걸음을 맞추었습니다.
  • " 그쪽은 왜 진작 수족관에 가보지 않았어요? " " 너는? " "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는 거 아니에요. " 아이는 불만족스럽다며 바로 옆에서 어깨를 부딪쳤습니다. 한걸음 밀려나며 조금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바라봤습니다만, 아이의 표정이 더 짙어서 이내 기색을 거두었습니다. " 기회가 없었거든. " " 만들 수 있잖아요. 부모님께 졸라서 가자고 하거나. " " 나는 두 분이랑은 간극이 깊었어. 두 분 맞벌이 하셨거든. 늘 형이랑 비교돼서, 같이 있는 날에도 말 꺼내기가 쉽지 않았고. " " 미안해요. 역린을 건드렸나요? " " 네 역린도 건드릴 예정이니까 괜찮아. " 아이는 수긍한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제 다음 말을 재촉했습니다.
  • '아이'랑 '나'랑 연인 관계야?아님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는 거야?
  • >>142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좋아하는 감정은 어느정도 생기는 중.
  • 쓰라린 기억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조금 먼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흐리멍덩한 기억. 먼지를 걷어내고 해상도를 조금씩 올려갑니다. 초점이 맞춰지면서, 눈앞의 페언트를 흘린 듯한 추상적인 형상은 조금씩 선명해져 갑니다. 두 손을 들어 보입니다. 어린 두 손은 아스팔트 바닥에 긁혀 피가 납니다. " ... 빨리 따라와. " 어머니는 빠른 보폭의 걸음으로 멀찍하게 먼저 걸어갑니다. 저런 보폭을 아이가 따라잡을 수 없다는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이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그 날 저녁, 어머니는 저를 바닥에 밀쳐 내팽개쳤습니다. 어머니와 저 사이의 간극은 약 5m 정도였습니다.
  • 항상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저와 있을 때면 형과 함께 있을 때와 온도가 사뭇 달랐습니다. 어렸을 적의 저는 그런 두 가지 모습 중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피곤한 것이다. 그런데 형이 집에서 의젓한 모습을 보이니 그 피곤이 풀리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저는 그러한 일종의 위안을 스스로 학습했습니다. 형은 무척이나, 전형적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외향적이고, 활발하고. 때로는 사람들의 눈치를 볼 줄도 알았습니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온다거나, 이런저런 멋진 얘기들도 꺼낼 줄 알았던 형은 집안의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그러한 반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에, 늘 비교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부모님이 제게 거는 기대치도 낮았습니다. 그럼 그렇지, 라는 말로 저는 제게 닥칠 위험과 우울을 조심스레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형의 조명을 위해 음지에서 조용히 기생하는 삶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딱히 노력에 대한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 어느 날 문득, 저와 형 단둘이 있는 틈을 타서 저는 형에게 어떠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고등학생이고 형이 대학생일 때의 일일 것입니다. 질문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답은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 너 자신에게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돼. " " ...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형. " " 나도 잘은 몰라. 엄마가 좋아할 만한 아들을 흉내 내는 거지. " 어머니가 돌아오시자, 형은 귀신같이 밝은 인상으로 어머니의 짐을 거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형의 모습마저 칭찬하며 저를 없는 사람처럼 슥 지나갔습니다. 형을 따라 해야 할까. 따라 하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 제대로 된 해답도 듣지 못해서, 오히려 그 답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정확히 1년 하고 4개월, 형은 뺑소니를 당했습니다. 구급차로 이송되는 도중 형은 숨을 거두었고, 저는 장례식을 치르느라 학교를 오랜 기간 쉬었습니다.
  • 이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서글프게 며칠 밤낮을 울고 계시던 어머니의 옆에서 저는 주저앉았습니다. 그런 제 옆에서 어머니는 불투명한 발음으로 형의 인간다운 모습을 하나하나 부르짖었습니다. 그것은 찬가에 가까웠을지도 모릅니다. " ... 미안해, 엄마. " " 너는 모를 거야. 너희 형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난 네가 형의 반만이라도 따라가기를 바랐었어. " " 앞으로는 달라질게. ... 정말이야. 노력할 테니까. " " 아무것도 아닌 양 말하지 마라. " 순간,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이어지던 무언가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양복을 입은 채로 저는 장례식장을 빠져나왔습니다. 이 주 정도 뒤, 저는 학교에 돌아왔습니다. 같은 반 녀석들은 딱히 의식하지 않는 척했지만, 이미 저와 녀석들 사이에는 묘한 거리감이 생겨있었습니다. 악의 없이 조심한다는 것이 그러한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졸업하고서 한동안 아르바이트를 구했습니다. 아버지와 홀로 상의한 끝에, 집에서 독립해 자취방을 얻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의 지원마저 끊고 완전한 독립에 성공한 것이 지금입니다.
  • 재밌다! 스레주 연휴 잘 보내고 와 ㅎㅎ
  • 맨첨부터 보다가 레스 안달았던얘인데 이번에 몰입하다가 조금 울컥했어, 추석 잘보내!
  • >>148 재미있다고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 스레더도 즐거운 연휴 보내. >>149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말을 들어서 기분 좋다. 스레더도 추석 즐겁게 보내기를.
  • 이후, 독립을 하는 동안 집에서 여러번 전화가 왔습니다. 독립을 한다고는 했지만, 가족과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제게 불편한 친절을 베풀고는 했습니다. 그러한 친절을 받을 때마다, 저는 내장을 뽑아내는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저를 위한 친절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마, 본인에게 주어진 어머니라는 역할을 수행하는데에 묘한 사명감을 느끼는 모양이었습니다. 그것을 수행할 대상이었던 형이 없어지자, 이제 그 화살이 제게 향한 것입니다. 저마저 없다면, 어머니라는 역할이 부정되고 맙니다. 아이는 용케 제 말을 차분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말을 들으면 조금 불편한 티를 내거나, 어설픈 위로를 할 법도 한데 아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두 손을 깍지낀 채 그 위로 얼굴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 " 그래서 단 한 번도 수족관을 가자는 얘기를 못 했다고요? " " 응. 딱 한 번, 형이 가자고 한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안 갔어. " " 기회가 있었는데, 왜 거절했어요? " " 수족관에 대한 내 기억이 무너질까 봐. 상상이 되잖아. " 어딘지 모를 수족관. 그곳에는 분명 물고기가 가득할 것입니다. 형과 부모님 사이에 낀 저는 흰색 옷에 묻은 얼룩 같습니다. 선천적으로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으로 만들어진 거리감. 수족관에 가서 새삼스레 그러한 거리감을 맛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곳에 억지로 끼어드는 것이 저는 싫습니다. 그럴 바에 야는 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어땠을까, 라고 막연한 상상을 하는 것이 훨씬 나았습니다. 만약, 실제로 같이 갔었다면 즐거운 추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억하는 편이 불행을 직면하는 것보다 상책입니다. "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다. 불쌍하네요. 그 쪽은. " " 내가 불쌍하다고? " " 응. 꺾이다 못해 비틀어졌어요. 줄기가 땅속을 향한 나무 같아. " 아이는 어떤 감정을 느낀 것인지, 평소와는 색이 다른 미소를 입가에 띄웠습니다. 몸을 일으킨 아이는 제 어깨를 잡고, 문득 고개를 끌어당겼습니다. 한차례 아이가 볼을 맞부비다 놓아주는 순간, 저는 귀가 먹먹해졌습니다.
  • " 또 멍때린다. " 아이가 말을 꺼내는 순간 정신이 들었습니다. 뭐가 재미있는지 아이는 비릿하게 웃고 있습니다. 살펴보니, 저는 갈 곳 잃은 손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습니다. 얼핏 손을 피려 하니 얼얼했습니다. " 이게 무슨 짓이야. " " 장난 좀 쳐봤어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 " 물어본 건 너였잖아. " " 그래서, 싫었어요? " 전혀,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잠깐의 순간에 사람 온기를 느껴본 것은 간만이었습니다. 술기운에 취기가 오르는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거북하지 않고, 그것은 눈 녹듯 멀어지는 온기였습니다.
  • " 그쪽, 되게 재미있어요. 지켜보다 보면. 내가 진작 그쪽을 만났다면 어땠을까요. " " 별로 좋았을 것 같지는 않아. " " 남들이 보면 그렇겠죠. " " 그러는, 너는. 이제 슬슬 네 이야기도 말해줘야 되지 않아? " 저도 아이를 따라서 몸을 일으키니 아이는 저로부터 거리를 뒀습니다. 본인 입으로 옷톳토, 하는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치더니, 시선을 돌려 돌고래를 바라봤습니다. " 돌고래는 무척 지능이 뛰어나다고 그래요. 그래서, 자기감정을 이해할 수 있고, 우울함을 못 이겨 자살하는 돌고래도 드물게 있데요.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 " 제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해줄게요. 지금은 수족관을 즐기고 싶어요. " " 미루는 게 어디 있어. 비겁하게. " " 차분하게 정리해서 말하고 싶은걸요. " 아이는 뒷짐 진 채 백치처럼 가지런한 이빨을 보이며 웃었습니다. 먼저 그대로 걸음을 옮겨나가서, 저는 별수 없이 아이를 따라 좀 더 수족관을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 수족관을 구경하는 것은 생각보다 제법 색다른 구경이었습니다. 저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말하길 본인보다 제가 더 구경에 집중했다고 했습니다. 사각형의 넓은 어항 안에서 열대어들이 여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던 중, 건너편에서 보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아이는 가볍게 헤실 웃고는 어항을 경계 삼아 입을 달싹였습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제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아이는 또 헤실 거립니다. 그대로 아이는 슥 멀리 걸어갔습니다. " 흐흐, 좋은 경험이었어요. 아쿠아리움에 오기를 잘했다 싶어요. " " 응. 나름 괜찮았어. " " 나름은 무슨. 혼자 10분 동안이나 넋 놓은 채로 가오리를 봤잖아요. " " 하지만 나폴거리는 게 보기 좋잖아. 그보다, 그걸 세고 있었어? " " 바로 옆에서 세고 있었는데. 홀딱 빠졌군요. "
  • " 좀 정리가 됐나? 얘기 말이야. " " 아뇨, 아직. " 제가 답을 보채자,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이 차분해서, 꺼리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이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로 잠잠했습니다. 편의점을 지나치려던 순간, 아이가 자동차의 창문을 소리 내서 두드리며 저를 불러세웠습니다. " 술 사 갈래요? " " 너, 나이가 괜찮던가. " " 그쪽이 사 와주세요. 술기운이 아니면 말을 못하겠어요 ." " 안돼. " " 그러지 말고. 저 술 마시는 거 이번이 처음 아니니까 괜찮아요. 아니면, 그쪽이 자신이 없는 건가요. " 저를 떠보려는 심상에 저는 브레이크를 걸며 차를 세웠습니다. 아이와 대화만으로 윤리적인 제 가치관을 떨구어 놓았습니다. 아이의 흉터를 보며 사랑에 빠져버린 저에게, 사실 이런 것을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편의점에서 적당한 주전부리와 수입 맥주를 몇개 사서 돌아오자, 아이는 봉투를 들여다보며 맥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 방으로 들어와서 곧바로 맥주캔을 열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는 먼저 좀 씻고 올 테니, 저에게도 씻고 있으라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먼저 씻고 나온 후 30분 정도. 입이 심심해서 먼저 주전부리를 뜯으려던 순간 문이 열렸습니다. 아이는 아직 머리가 다 마르지 않은 채로 실례한다는 소리를 내며 들어왔습니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볼가에 닿아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서, 새삼스레 아이가 곱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청소년이 같이 술을 먹자고 하는 건데, 별로 놀라지 않네요. " " 놀랄 게 뭐 있어. " " 혹시 기대했어요? " " 아니. 기대 안했어. 괜한 걱정은 집어넣어도 돼. " " 혹시 몰라서 얘기하는데요. " 아이는 맥주캔을 열었습니다. 필라이트. 저는 별 감흥 없는 그 밍밍한 맛이 좋아하는데, 그것을 아이가 집어 들었습니다. 다른 맥주도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아이는 저걸 제법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잘도 저런 어설픈 맥주를 좋아합니다. 제가 건배를 하자는 듯 아이는 맥주캔을 조금 기울이며 말했습니다. " 저 같은 애랑 장난쳐도, 별 재미 없을 거예요. 남들이 그러더라. " " 본인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기나 해? " 제가 맥주캔을 튕기자 아이는 기세 좋게 한 모금 쭉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숨을 크게 뱉고, 아이는 말을 시작했습니다.
  • " 있죠. 저는 원래대로라면 두 분 계획에 없는 아이라고 그랬어요. 뭐랄까, 폭탄이라고 해야 하나? 되게 갑자기 생겨버린 아이였거든요. 그래도 우리 엄마는 나를 키워보려고 애썼어요. 아빠도 그렇지만. 그래도 암묵적인 분위기라는 게 있었어요. 내가 부담된다는. 그래서, 저는 집안에서는 말을 잘 안 했어요. " " 듣고 있으니까, 천천히 얘기해도 좋아. "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이어나갔습니다. " 그러다가 제가 10살쯤이었을까, 엄마가 무척 아팠어요. 무슨 병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주변인들이 손발을 많이 들어야 하는 병이래요. 원래부터 두 분 사이가 안 좋기는 했는데, 그때 아빠가 엄마를 무척 원망했어요. 저 계집애에다가 너까지 왜 그러냐고. 저는 제가 뭔가 잘못을 한 것 같아서 아빠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그때 처음 손찌검을 당했어요. 남자는 힘이 무척 세더라. 분명 아빠는 그때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그 이후로 계속 그랬어요. 매번 미안하데, 미안하면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
  • " 엄마가 입원하고, 집에서는 저랑 아빠랑 둘만 있었거든요. 가끔 아빠가 며칠 집안을 비우고. 하루는 새벽에 자다 깼는데, 배가 묵직한 거야. 올려다보니 아빠가 있었죠. 제가 휘둥그레해서 아빠를 부르니까, 갑자기 아빠가 목을 졸랐어요. 본능적으로 이건 뒤틀렸다, 싶어서 말은 해야겠는데 소리는 나오지 않고. 그때 아빠 표정은... 어땠을까. 공포영화 ' 바바둑 ' 알아요? 거기 나오는 귀신 얼굴 같았어요. " 저는 위로를 하는 데에는 무척 서툴러서,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한숨을 쉬며 맥주캔을 내려놓음으로써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 결국 아무말은 못했는데, 아빠 표정이 오락가락하더니 어느 순간 손이 풀려있더라고요. 아빠도 내려가 있고. 기억도 잘 안나요. 갑자기 절 안으면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그걸 밀치지 말아야 했던 것 같아요. 그 날부터 저는 아빠가 무서워서 집에 잘 안 들어갔어요. 집에 돌아가 봐야 뻔했으니까. 때리고는 미안하데. 그러면서 다음 날 뭘 사 들고 왔는데, 저는 그런 건 거들떠보지도 안봤어요. " " 그런 걸 받아들이면, 폭력을 용인하는 기분이 들 테니까. " " 정확해요. 그렇다고 폭력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지만요. "
  • " 그러는 사이 엄마는 용케 종교를 알게 됐나 봐요. 딱 봐도 사이비인데, 그게 그렇게 좋데. 자기를 품어줄 수 있어서. 어느 정도 퇴원할 정도가 되니까, 엄마는 그대로 사이비 종교에 푹 빠져버렸어요. 뭔가 부적이나 그림 같은걸 잔뜩 사오더라. 그럴 때마다 아빠는 점점 엄마 아니면 저에게 자기 불안감을 표출했어요. 엄마는 그런 소홀함에서 종교를 더 찾고. 일종의 루프처럼, 그게 반복되다 보니까 저 둘이 정말 가족일까 싶더라고요. " " 그렇구나. " " ... 그쪽, 이거 알고 있죠. " 아이는 문득 은근히 감추고 있던 손목을 보였습니다. 최근에는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흉터는 푸르스름하게 남아있습니다. 새삼 보면 아이는 나갈 때 손목이 가려지는 옷을 선호했는데,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 "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 " 참, 나. 말이 돼요, 그게? 그쪽이 알면서 모르는 척해주는 게 좋았던 거예요. " " 그래서? " " 응. 그래서. 제가 몸을 함부로 다루던 게 14살부터였을 거예요. 그게 자기한테 독이 된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있다는 감각이 둔해져 버려요. 그렇게 지내다 우연히 할머니가 저를 찾았고, 제 몸을 보고는 잔뜩 울었어요. 저는 또 그때 제가 잘못한 걸까 생각했는데, 아무 말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거두어진 게 16살. 할머니가 먼저 가시고 혼자 살기 시작한 건 17살. " " 할머니께는... 적잖은 충격이었던 모양이야. " " 정말, 정말 그랬나 봐요. 급격하게 할머니는 쇠해졌는데... 그래도, 저 그 1년 동안 너무 즐거웠어요. 이런 게 가족이라면, 놓친 시간이 너무 아까울 정도로. " 아이는 잠깐 말을 멈추고는 저번처럼 두 손으로 눈을 지분 눌렀습니다. 아이는 눈이 시큰해질 때면, 저리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리자, 방 안은 침묵이 내리 앉았습니다. 오직 시계 초침소리만이 흐릅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아이였습니다.
  • " 나중에, 학교에 알려졌어요. 우리 엄마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고. 그때부터는 애들이 잘 놀아주지도 않아서, 괜히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랑 어울렸어요. 술 마시고, 담배하고. 치근덕거리면서 어른스럽다 어떻다 얘기할 때 기분 좋아했는데, 지금 보면 그것도 괜한 짓이었네요. 그쪽 나이 또래 사람이랑 사귀어본 적도 몇 번 있어요. 자려고 할 때마다, 내가 너무 무서워한다고 피하니까 슬슬 멀어졌지만. " 아이는 제 반응을 살폈습니다. 저는 어쩐지 아이가 하는 말에 모두 납득해버려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이는 벙찐 포정을 짓다, 헤실 웃었습니다. 어느 포인트에서 안심한 것인지 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 " 그래서 혼자 살다가, 우연히 그쪽이랑 접점이 생긴 거예요. 혹시 의도한 거예요? " " 아니. 시간이 겹친 건 우연이야. " " 그렇구나. 그래서, 감상이 어때요? " " ... 감상이라니? " 캔을 비우다 보니 아이는 조금 췻기가 오른 게 분명합니다. 아이는 대뜸 몸을 일으키더니 제 방향으로 기어오며 눈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 제 이야기를 들은 감상 말이예요. " "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는 거야? " " 부탁할게요. " " 부탁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 나는 너를 강하다고 생각해. 나보다도 더. " 그 말에 아이는 일순간 정지하더니, 이내 제 앞에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습니다. 좀 더 말해보라며, 마시던 캔을 내려두었습니다. 저는 잠깐 말을 멈추고, 취기에 헛소리하지 않게 말들을 정돈했습니다.
  • " 경우는 다르지만... 아무튼, 너랑 나는 홀로 서야 했다는 점은 같잖아. 나는 그때, 다른 사람을 보며 견뎠어. 누군가를 동경해서, 그 사람을 쫓아가려 했지. 항상 그랬어. 맞서보려는 생각은 없이 마냥 그랬어. 그런데 너는 달라. " " 듣다 보니 조금 낯간지럽다. " " 너는 어떻게든 혼자 답을 찾아보려 했어.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 결과 네가 설령 조금 무너지고 망가진다 해도, 나는 그런 네 모습을 더 높게 사. " " 내가 망가졌어요? " " 누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망가져. 나도 그래. 너만 그렇다는 게 아냐. " " 그렇구나. " 아이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홍조를 띤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윽고 두 팔을 벌리며, 아이는 대뜸 제 품 안에 안겨들었습니다. 머릿속에서 뻥, 하며 무언가 터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무어라 하려던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술기운이 올랐음에도 아이의 몸은 되레 차가웠습니다.
  • 품 안에서 뒤척이는 아이를 밀쳐내려고 하자, 아이는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습니다. 움직이기가 부담됩니다. 감각과 행동에는 조금씩 시차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 술김이에요, 술김. " " 그 술김이라는 핑계가 무섭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 " 나는 무섭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그쪽이 이런 걸로 책임을 피하지도 않을 것 같고. 내 말이 맞죠. " 아이는 그대로 고개를 들며 고개를 기울이곤 헤실 웃었습니다. 흰색의 얼굴에 져 있는 빨간 흉터들. 손목에 새겨진 아이가 혼자 견뎠던 횟수. 저는, 깨닫고 말았습니다. 아이라는 그림에 사랑에 빠진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혼자 견디고 있다는, 그림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동경이었습니다. 그러한 동경이 무르익어버린 것입니다. 눈을 마주한 채로, 숨만 내쉬며 머릿속 감정의 개화에 집중했습니다. 아이는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은 듯 옷깃을 꽉 붙잡았습니다.
  • " 예전에, 제가 그랬죠? 저, 남의 생각을 대충 짐작하는 버릇이 있다고. " " 응. " " ... 그러니까, 그쪽은 그래서는 안 돼요. " " 어째서? " " ... ... 말아. " 말이 들리지 않는다며 아이를 좀 더 가까이 끌어안았습니다. 아이는 입술을 지근 물다, 복잡한 표정으로 글썽였습니다. " 그랬다간, 이전보다도 더... 그 쪽에게 의지하고 말아. " " 아무래도 상관없어. " 긴말 없이 앉아있는 채로 몸이 포개어졌습니다. 얼굴을 묻은 아이는 말이 없고, 저는 아이를 재우듯 토닥였습니다. 다만 등을 토닥일 때마다, 아이는 이따금 훌쩍이는 소리를 내고는 했습니다.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에, 처음으로 공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 7-2.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희미하게 빛을 내는 형광등이 보입니다. 찢어져서 날짜를 알 수 없는 달력. 구석에 나뒹구는 옷가지들. 텔레비전에서는 이런 분위기와는 대조되게, 화목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울음소리를 따라가자, 어린아이는 쭈그린 채로 고개를 무릎 속에 파묻고 있습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자, 저는 주저앉았습니다. 왜 우느냐 물어봐도 고개를 가로저을 뿐입니다. 위로하고자 손이 닿자, 아이는 몸을 움츠립니다. 그런데도 어깨를 토닥이자 아이는 얌전히 손길에 수긍합니다. 아이에게 결핍된 것. 지금의 제게서 결핍된 것. 그 순간, 텁텁한 소리가 나며 아이는 모래처럼 사그라듭니다. 급하게 끌어안아 보려 해도 무너지는 아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손안에 남은 건 황색의 모래 뿐. " ... 정신 차려. 괜찮아? 어디 아파? " 순간 저는 소스라치게 몸을 일으켰습니다. 시간은 아침 6시입니다.
  • " ... ... 어제 무슨 일 없었죠? " " 아무런 일도 없었어. 잠든 너를 옮기는 게 힘들기는 했지. " " ... 그렇게 안 무거워요. 오늘은 일없어요? " " 나, 오전 중에 병원에 가봐야 해. 겸사겸사 할 일도 있고. " " 어디 아픈가 봐요. " 그 사람은 잠깐 멈칫하고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 아, 응. 간이 안 좋데. " " 그런 사람이 술을 마셔요? " " 그러게. 아-, 졸리다. 나는 조금 더 잘 거야. " " 잠이 깨버렸어요. " 말없이 투박한 손이 머리맡에서 눈을 내리덮었습니다. 그러한 행위를 몇 번 하고서, 그는 저로부터 등을 돌리며 누웠습니다.
  • " 저기, 감사합니다. " " 오늘은 뭐가? " " 그냥... 제 억지를 받아줘서요. " 한숨을 짧게 쉬고서,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조금은 웅얼거리듯이 말해서, 듣기가 모호했습니다. " 내가 원해서 이러는 거니까,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 " 그래도. " " 정 고마우면, 9시쯤 포트에 물 좀 올려줘. 부탁할게. " 눈을 덮던 손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습니다. 머리가 산발이 되어 헝클어졌는데도, 기분은 새삼 좋았습니다.
  • 저는 한 번 일어나기로 한 시간에는 분명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자신이 있다고 할지, 몸이 알아서 일어나고는 하니까요.' 정확하게 9시에 일어나서 포트 전원을 누르자, 그 사람이 시계를 보고는 신기하다는 소리를 냈습니다. " 정확하게 9시야. " " 어때, 제 생체시계 좀 대단하죠. " 이윽고 그가 먼저 씻으러 간 사이,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습니다. 이런 아침부터 전화하는 사람이 누구일지. 욕실까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직접 가져다줄까 했지만, 그건 저희 둘 사이에 너무 거추장스럽습니다. 저는 느긋하게 커피를 타면서 그 사람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 " 그쪽, 전화 오던데요. " " 누가? " " 저야 모르죠. " 그 사람은 전화 올 사람이 없다며 휴대전화를 들었습니다. 저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 제 몫의 커피를 들어 홀짝였습니다. 그 사람은 컵을 들어 올리려다, 잠깐 멈추다 다시 컵을 내려놓았습니다. 저런 반응은 처음입니다. 그 사람은 잠깐 당황하다, 한숨을 크게 푹 쉬었습니다. " 싫어하는 사람이예요? " " 아니. 있어. 좋아하는 사람. " " 애인이에요? " " 비슷하긴 한데 달라. " " 애인이랑 비슷한데 다른 게 어디 있어. 아, 잠자리에서만 보는 사이인가요. " " 네가 그런 말을 어떻게 알아? 그리고 절대 아냐. 좀 더 건전한 관계지. "
  • " 커피 마시고 있어. 전화하고 올 테니까. " " 응. " 아침 바람은 밤바람과는 다르게 차갑습니다. 열린 창문의 커튼이 나풀거리며, 쾌청한 찬바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잠깐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통화를 하며 밖으로 걸어나갔습니다. 포트에 물 좀 올려달라 해놓고, 커피는 마실 생각도 없는 모양입니다. 저는 커피를 마시며 잠깐 집 안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햇빛이 들어와서 집안의 아이보리색 벽지가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집안은 딱 혼자 살기에 적합할 정도의 가구만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빈공간은 없지만, 그렇다고 답답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절묘한 가구배치는 어쩐지 그 사람을 닮은 것 같습니다. 기타를 따라서 시선을 옮기니 반쯤 열린 그 사람의 방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잠깐만 둘러보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의 분위기는 어딘가 오묘했습니다. 지금이 창천의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방안의 분위기는 오후를 연상시켰습니다. 커튼의 촘촘한 틈 사이로 햇빛이 여과되어 호박색을 띠며 방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방의 벽면에는 방음처리가 되어있고, 앉은뱅이 의자를 중심으로 악보, 기타 등이 불규칙하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천천히 발로 마룻바닥을 지분대며 걸어가,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봤습니다. 의자는 바퀴가 달려있고 푹신했습니다. 그대로, 책상에는 여러 종이가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무언가 적혀있다가 구겨진 종이. 조심스레 펼쳐보니, 그것들은 모두 악보입니다. 그 종이들 사이에서 구석, 여러 장 겹쳐져 있는 악보집을 찾았습니다. 선이 난잡하게 그어져 있지만 분명한 악보입니다. 그것을 선들 사이로 촘촘하게 수놓아진 음표들이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 악보에는 여러번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그 중 가사 몇 구절이 눈에 들어와서, 저는 눈으로, 그러나 어느새 무의식중에 입으로 가사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 눈을 뜬 채로는 이상을 볼 수 없지만, 눈을 감은 채로는 현실을 볼 수 없더라. 저울질하는 척 버티다 팔이 저릴 즘 모든 걸 내려놓으면 어떨까. " 그 사람이 이렇게 간단하게 체념을 논할 줄이야. 저는 내심 놀랐습니다. 악보의 구성이 꽤 단조로워서, 저는 묘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잠깐 문을 열고, 아직 그 사람이 들어오지 않은 것을 확인한 저는 다시 돌아와 의자에 앉으며 악보를 걸었습니다. 기타를 집어 들고, 그 사람이 쓰던 곡을 조금만 음미해보려 합니다.
  • 곡은 누구나 쉽게 귀에 익힐 만큼 단조로웠습니다. 정확히는, 음악의 전체적인 틀이 하나의 멜로디가 반복되는 곡이었습니다. 곡은 하이라이트가 한 소절만 완성된 채로 멈춰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 거칠게 그어진 선들이 보였습니다. 대충 짐작이 갑니다. 아마, 이 구절에서 머리를 쥐어 잡다 포기했을 것입니다. 저는 곡을 3번 정도 반복하는 동안 가사를 소리 없이 입술로만 읊었습니다. 그 사람의 곡은 화려한 기교가 없었습니다. 가사도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노래는 근 들어 오래간만에 느껴본, 듣기 위한 노래였습니다. 곡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쳐보고서 들키기 전에 방을 나오자, 그 사람은 느긋하게 테이블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 언제 왔어요..? " " 네가 내 비밀을 연습하고 있을 때. " " 죄송해요. 잠깐만 둘러본다던 게... 그렇지만, 덕분에 좋은 곡을 구경했어요. 맘에 들어서 몇 번씩 연습했던 거예요. " " 사람을 비행기 태울 줄도 아는구나. " 제 말이 끝나자, 그 사람은 제 머리를 두어 번 툭툭 쓰다듬고서 외투를 찾아 걸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연주하던 사이 옷을 갈아있었던 모양입니다.
  • 7-1. ' 기억나? 네가 내게 얘기했지. 죽을 것 같으면 부르라고. ' 녀석의 목소리는 담담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느낌입니다. 죽는다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일련의 졸업처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기이하게도 녀석은 듣는 사람마저 안심시키고 있었습니다. ' 남은 얘기는 만나서 하자. 서둘러서 오지 마. 이번 주 내로 죽을 일은 없을 테지만, 널 보는 건 마지막일 거야. ' 휴대전화 속 갤러리를 둘러보니 녀석과 찍은 사진이 몇 장 없습니다. 녀석이 입던 맨투맨, 항상 고집하던 검은색 스냅백. 모든 것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피하며, 당연합니다.
  • 전철을 기다리는 순간마저 길었습니다. 투명한 창문 너머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숲이 지나갑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면 저만치 멀어집니다. 긴 거리 전철을 타고서 달려가자, 녀석은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못 본 사이 수척해져 있어서, 처음에는 전혀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없던 생기가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 우와, 또 와줬네. " " 그렇지. 네가 와주길 바랐잖아. " " 짐 좀 들어줘. 이젠 도저히 들 힘이 없네. " " 퇴원이야? " " 그런 셈이지. 억지를 부렸어. 이제 좀 쉬고 싶다고. 병원으로서도 고마울걸? 곧 죽을 놈보다야, 살 가능성이 있는 놈을 앉혀두는 게 벌이가 되니까. " 잘도 고약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녀석의 짐을 받아들며 병원에서 몇 분 거리 카페로 향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인데, 녀석과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각자 몫의 커피를 받아들었습니다. " 뭔가 특별한 걸 기대했나? 그냥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 부른 건데. " " 아니. 이러는 편이 너다워. "
  • " 그래. 나도 그래서 널 부른 거야. 다른 애들이었으면 불편했겠지. 이런 놈이랑 어울리는 게. " "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 같아? " " 내가 의사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뭐, 직감 같은 거지. 머지않았다는걸 직감한 거야. " 녀석은 커피를 한입 홀짝이다 씁쓸하다며 가시적이게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하긴, 병원식만 먹다 보니 이런 감각은 오랜만일 것입니다. 간만에 만난것이니 밥이나 먹고 가자고 녀석이 먼저 제안했습니다. 병원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으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 앞으로의 예정은 어떻게 돼. " " 글쎄. 하고 싶었던걸 할 거야. 난 말이야, 겨울 바다를 가보는 게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 " 그때까진 살 수 있어? " " 그러게. 내 염원이었는데. 아직 겨울은 멀었으니, 난 끝내 겨울 바다를 보지 못할거야. " " 바보 같기는. 겨울 바다나 가을 바다나 같은 바다야. 밥 먹고 냉큼 달려가. " " 일단 오늘은 잠 좀 자고. " 익살스레 웃으며 녀석은 자주 갔던 백반식당을 가리켰습니다. 예전에 녀석과 자주 갔던 식당. 이곳에서 멀어진 후로는 가본 적이 없습니다. 간판의 글자가 낡고 비틀어져 있지만, 그 형체는 아직 온전히 남아있습니다.
  • 갱신!!! 잘 보고 있었는데 어디 갔어 ㅜㅜ.
  • >>179 2주 정도 뜸해질 예정이야. 간간히 짬이 나면 올리도록 할게. 중요한 시기라서...
  •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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