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지금 이게 네 번째 페이지야. 더 이상 종이 낭비는 하지는 말자고. 이딴 일기장 쓰는 게 뭐가 어렵다고 쩔쩔매는지. 나 원, 참. 일단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 써 보는 일기니까 성의껏 써 보도록 할게. 어… 이름은 반지. 성은 알 거 없고, 나이는…, 선생님 이거 정말 써야 해요? 애초에 이렇게 쓰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 좋은데요, 왜. 쓰는 방식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에요. 반지 양이 쓰는 게 곧 방식이죠. 괜찮으니까 계속해서 써 보도록 해요.

… … 나이는 스물하나. 병명은 잘 모르겠는데 존나 길어. 남은 인생은 두 달 하고… 며칠이죠, 선생님?

> … 두 달 하고 하루? 제가 이 답변을 쓰는 중에 막 12시가 지났으니까, 이제 딱 두 달이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지금 이걸 쓰고 있는 오늘을 포함해서 이제 두 달이 남은 거네요. 음. 나는 그래도 생각보다 튼튼해. 어제 옆 호실 주사 할머니 휠체어를 끌어서 1층까지 모셔다드린 게 그 증거지. 다시 병실로 모셔다드릴 때는 간호사 언니가 도와주셨지만, 그건 절대 내가 힘들어서가 아니고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간다고 그랬던 거야. 주사 할머니께서 내가 일 보는 것도 기다려 주실 수는 없으니까! 그 할머니 치매거든. 눈을 떼고 있으면 어디로 사라지실지 몰라. 주사 할머니는 맨날 나한테 말 안 들으면 주사를 맞게 한다고 겁을 줘서 주사 할머니야. 간호사 언니 말로는 할머니 손녀한테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라나, 뭐라나. 그게 버릇처럼 말이 나올 정도면 어지간히 말을 안 들었나 봐, 그 손녀.

> 반지 양도 어지간히 말을 안 듣기는 하죠. 무리하면 안 된다는 데 아무리 엘리베이터가 있다지만, 괜히 본인이 할머님 모시고 5층에서 1층까지 휠체어 끌었다가 화장실에서 쓰러지지를 않나, 저번에는 -검은색 볼펜으로 마구 칠해서 보이지 않는다- 하다가 걸리지를 않나. 덕분에 결과적으로 맞게 된 주사도 꽤 있죠, 반지 양? 할머니 말씀. 잘 새겨 들읍시다.

> 알아요. 저도 사랑한답니다.

… … 아무튼, 나는 504호에 입원해 있고 병원에 입원한 지는 꽤 오래됐어. 몇 년이더라. 중학교 2학년 때 들어와서 지금까지 쭉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엄청 오래됐네. 우리 주치의 선생님은 이번에 레지던트로 들어와서 내가 첫 환자야. 그래서 아직 크게 치료해야 하는 환자들은 배정을 안 해주고, 내가 배정됐나 봐. 우리 선생님 존나 잘생겼어. 근데 성격이 -볼펜으로 검게 칠한 흔적- 이 일기장도 우리 선생님이 준 선물!

> … 성격이…. 다음에 뭔가요?

오늘은 수현이가 마시멜로를 사 왔어. 진짜 오랜만이야, 마시멜로. 저녁 먹고 후식으로 먹었지. 겁나 달던데, 그걸 또 걔는 핫초코 위에 올려서 전자레인지에 돌리더라. 뭐 하냐고 그랬는데 대답을 안 해줘서 보니까, 수현이가 엄청난 음식을 만들었더라고! 정수현 짱.

> 수현 양의 핫초코, 지나가다 봤어요. 엄청나던데요. 그건 그렇고 제 질문은 왜 대답을 안 하나요, 반지 양?

오늘 수현이가 또 병원에 찾아왔어. 점심때쯤 왔길래 물어보니까 오늘 고등학교 방학식이었대. 수현이는 고등학생인데 내 친구야. 예전에 내가 잠깐 학교에 다녔었거든. 열아홉 살에 고등학교 1학년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같은 반 친구였어. 지금은 수현이가 열아홉이네. 시간 참 빠르다. 그치? 수험생이면서 자꾸 병원에서 공부하는 거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는데, 앞으로 두 달 밖에 여기서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 둘 다 울지는 않았어. 그리고 수현이는 공부 잘하니까 괜찮대. 내 몫까지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했었거든. (정수현 학교 이과 탑이래!)

> 반지 양도 학교 다녔으면 굉장히 공부를 잘했을 것 같아요. 글쓰기를 좋아하니까, 반지 양은 문과 탑이 됐겠네요. 친구끼리 나란히요.

상상만 해도 즐거울 것 같아요. 고등학교 딱 한 학기만 다니고 다시 입원하게 됐는데도, 아직 우리 반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등교할 때 그 아침 냄새도 기억나고 급식실 가던 길도 다 기억나요. 죽기 전에 학교도 한 번 더 가보고 싶어요. 정수현 말로는 하나도 안 달라졌대요, 그 풍경이. 오늘은 수화를 배웠어. 병원에서 가끔 선생님들이 봉사활동으로 그런 강의를 할 때가 있는데, 생각보다 엄청 재밌더라. 이제 내 이름도 수화로 쓸 줄 알아! 수화로 대화를 해 보고 싶어졌는데, 딱히 대화 상대가 없는 게 아쉬워.

> 배우는 게 빠르네요. 저도 수화를 할 줄 아니까, 언제 한 번 수화로 대화해 봐요. 우리.

벌써 일기장을 쓴 지 일주일 하고 이틀이 지났어. 오늘 정수현 동생이 쓰는 일기장을 슬쩍 봤는데 내가 그동안 날짜 적기를 까먹고 있었더라고. 그래서 오늘부터 정말 구색을 갖춰서 쓸 거야. 오늘은 2015년 7월 13일 월요일. 날씨 째짐. 오늘 내가 잘한 일. 주사 할머니랑 놀아드리고 할머니 머리도 감겨드렸다. 오늘 내가 못한 일. 주사 할머니가 아이스크림을 사주셔서 먹었다가 쓰레기 버리는 걸 걸려서 혼났다. 다음엔 안 걸려야지.

> 안 걸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 근데 몰래 아이스크림 먹었어요? -밑에 작은 글씨로 헉. 이라고 쓰여 있다.-

2015년 7월 14일 화요일. 날씨 존나 더워서 정수현한테 짜증을 냈다가 안 그래도 짧은 수명을 단축할 뻔했음. 생각을 해봤는데 병원 밥이 맛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이유는 먹고 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야. 약은 엿같이 쓰고, 더럽게 맛없고, 간호사 언니가 내게 약을 건네주는 순간부터 약을 목 뒤로 넘길 때까지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 미워. 밥도 먹기 싫고 약도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다가 선생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입 다물고 둘 다 잘 먹었어. 무섭다.

2015년 7월 15일 날씨, 오늘은 덥고 내일은 비가 온대. 여름은 왜 비가 올까? 장마철은 너무 싫어. 비가 오면 창문도 못 열게 한단 말이야. 싫다, 정말. 내일은 병실에서 혼자 영화를 볼 계획이야.

> 재밌겠네요. 무슨 영화를 볼 건가요?

2015년 7월 16일. 장마 시작. 같이 안 볼 것처럼 하시더니 결국 오늘 저랑 같이 영화 보셨네요. 물론 바빠서 중간에 가셨지만. 다음에는 휴가 내고 저랑 영화관 가요, 선생님.

> 그래요. 선생님이 영화 보여주기로 약속할게요.

2015년 7월 17일. 오늘은 수현이가 병원에서 자기로 했어. 내일 주말이라 학원을 안 가서 시간이 많다나. 사실 거짓말인 것 같기는 한데,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어. 왜냐하면, 나도 엄청나게 기대되거든! 이제 고등학교 2학기가 시작되면 수현이는 엄청나게 바쁠 텐데. 사실 좀 걱정이야. 나는 어차피 죽을 거긴 한데, 내가 죽고 나면 수현이가 많이 슬퍼할 것 같아서. 수현인 그때부터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나갈 처음이 시작되는 거잖아. 괜히 나 때문에 그동안 쌓아왔던 걸 무너뜨릴까 봐 겁이 나. 죽는 건 안 무서운데, 그건 무서워.

> 수현 양은 강하니까, 괜찮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선생님도 걱정이거든요? 너무 막 슬퍼하진 마세요.

2015년 7월 19일 일요일. 날씨 개 구려. 존나 어이없어.

> 반지 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링거를 빼고 도망가나요. 다음부터는 링거는 끌고 도망가세요. -밑에 작은 글씨로 그게 더 이상하거든요? 라고 쓰여있다-

2015년 7월 20일 월요일. 주말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 평생 그 인간이 병실에 찾아오는 일은 없을 텐데. 누가 그런 인간에게 휴일이란 걸 준 걸까?

2015년 7월 21일 화요일. 선생님이 어제 병원에 들어오지 않으셔서 답글을 못 쓰셨어. 간호사 언니 말로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깐 어디 가셨다고만 하던데, 조금 불안해. 그래도 이 일기장이 있어서 다행이다.

> 잠깐 타 지역에 다녀 왔어요. 선물은 마음에 드나요? -옆에 네! 라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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