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그럼 시작할까요? 검은 머리의 청년이 비가 내리는 숲을 무덤덤하게 걸어나갔다. 그가 뒤집어쓴 망토에서 빗물과 함께 붉은 핏방울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걸어 숲 중앙에 있는 거대한 성에 도착한 청년은 팔을 뻗어 거대한 철문을 열었다. 성안으로 들어선 그는 하염없이 복도를 걸었다. 그렇게 걸어 도착한 곳은 왕의 알현실. 청년은 들고 있던 검을 뽑아들고 자신의 왼손을 단숨에 베어냈다. 철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왼손이었던 고깃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저 피가 쏟아져 내리는 왼팔을 들고 알현실을 이곳저곳을 돌며 어떤 문양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출혈로 청년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갈 때쯤 그는 왕좌에 도착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왼팔을 들어 왕좌에 피를 뿌렸다. 그리고 그 행위를 마지막으로 그는 피로 물든 왕좌 위에 쓰러졌다. 호흡이 느려지고 몸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청년은 자신의 죽어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은 내기에서 이겼고 그녀를, 소중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게 됐다. 왕좌 위에 쓰러져있는 청년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것은 마치 검은 안개 덩어리 같았다. 그것은 청년의 곁으로 다가와 몸을 숙이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단하네? 정말로 성공할 줄은 몰랐어. 청년은 가쁜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약속을...... 약속을 지켜.....” 그의 목소리를 들은 안개 덩어리는 재밌다는 듯 높은 웃음소리를 냈다. 킥킥, 좋아. 네 소원을 들어줄게. 그 말을 끝으로 안개 덩어리가 청년의 몸을 감쌌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과거를 바꾸기 위한 여행을.

02. 웃을 수 밖에 없는 가면 백색에 가까울 정도로 옅은 금발의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틀어올리고 화려하게 치장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홀로 방안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그녀의 결혼식 날. 하지만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진한 슬픔이 담겨있었다. “벨로스.” 여인은 조용히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아무도 없던 방 안에서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거나 당황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를 만나고 이런 일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돼버렸으니까.... 발소리는 그녀의 바로 뒤에서 멈췄다. 발소리가 멈추고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공주님.”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공주의 귓가에 울렸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그때까지 슬픔으로 점칠 되어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이지만 생기를 되찾았다. “나한테 뭐 할 말 없나요?” 공주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함께 있던 시간이 길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알고 있는 건 그의 이름과 이곳에 오기 전까지 용병이었다는 것뿐. 하지만 그녀는 이 정체 모를 호위 기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공주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바라는 대답을 해주길 원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그녀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아니야. 내가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게 아니야. 공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뒤에 서있던 남자를 돌아보았다. 조금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그와는 대조적은 밝은 금색 눈동자를 가진, 검은색 가면을 쓴 기사가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를 보자 그녀는 다시금 터져버릴 것 같은 눈물을 애써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그런 말은 하는 거예요? 당신은 아무렇지 않나요?”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신을 꾸며준 시녀들도,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만이라도, 그녀가 사랑하는 이 호위 기사만이라도 그녀에게 진실된 마음을 보여주길 바랐다. 하지민 그는 공주의 기대를 무참히 부숴버렸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고, 입가는 아름답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축하의 말을 전해왔다. “지젤 공주님, 다시 한번 결혼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셔야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기사는 그녀의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바로 몇 초 뒤,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벨로스는 공주가 있던 방에서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공주의 결혼식 준비로 바빠서 그럴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다시 한번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쓰고 있던 가면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빛조차 삼켜버릴 것 같은 흑색으로 변했다. 이걸 된 것이다. 자신은 저주받은 자. 자신과 함께한다면 그녀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이 최선의 선택인 거다. 벨로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진심을 꾹꾹 눌러 담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면 밑으로 드러난 그의 얼굴에 더 이상 미소는 없었다. 표정이 사라져버린 그의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03. 낙원이라 불리는 곳.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바다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때 들었던 노랫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만약 낙원이란 곳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 있는 곳일 거야. -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 위에서 검은 망토를 깊게 눌러쓴 벨로스가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그녀가 죽고 이곳은 생물 같은 건 살지 못하는 죽음의 바다가 됐을 텐데,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기분 나쁠 정도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바다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사람들 앞에서 곡예를 부리고 있는 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양 갈래로 갈라진 붉은 고깔모자에 프릴로 크게 부풀려진 소매와 치마, 얼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괴상한 흉터 분장까지. ‘마치 광대 같군.’ 그 누구도 저 모습을 보고 그녀가 고위 악마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도 직접 보기 전까진 믿지 못했으니까. 벨로스는 조용히 자신의 왼손을 들어보았다. 아직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그의 왼손은 언제 잘려나갔나 싶을 정도 깔끔하게 붙어있었다. ‘정말로 시간을 되돌렸을 줄이야.’ 자신이 소원을 빌면서도 믿지 못했다. 하지만 죽음의 세계로 변해버렸던 자신의 대륙이 다시 한번 생명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일시적인 것일 뿐, 녀석을 막지 못하면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다. 녀석은 분명 그 죽음의 세계를 낙원이라고 불렀다. 세상이 낙원으로 변했을 때 지상으로 여신이 내려올 것이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녀석이 공주를 죽이기 전에 먼저 찾아내서 죽인다, 벨로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악마, 데블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그렇게 살벌해?” “아무것도 아니다.” 데블은 벨로스의 말이 미심쩍은 듯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자신이 모아온 정보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까 뱃사람들한테 들었는데 이 근방에 인어가 나타난다고 조심하라던데? 노랫소리에 홀리면 그대로 바다로 끌려들어 갈 수도 있다고 말이야." 그 말은 들은 벨로스는 콧방귀를 뀌며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 어이가 없군.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는 건가?” “어? 아니야?” 너무나도 생각 없는 그녀의 대답에 그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데블은 몇천 년을 살아온 악마였지만 너무 오랜 시간을 봉인돼있던 탓인지 세상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네가 알고 있는 인어는 이미 몇백 년도 전에 모두 멸종했다.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인어의 목소리는 수면 위에서는 들리지 않아.” 데블은 벨로스의 말을 듣고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뱃사람들이 한말은 뭐야? 아무것도 없는데 소문이 생길 리 없잖아.” “그건 인어가 한 짓이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에 벨로스와 데블의 고개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갔다.

04. 들리지 않는 인어의 노래 그곳에는 커다란 풀 테 안경을 쓴 키가 큰 남자가 서있었다. 벨로스는 남자의 복장이나 들고 있는 서적들을 봤을 때 아마 학자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벨로스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학자는 처음부터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던 듯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인어는 같은 동족 이외의 생물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벨로스는 학자의 말을 그대로 흘려버리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굳이 신경 써서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지루해하는 벨로스와는 다르게 데블은 눈을 반짝이며 학자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짜 인어의 노랫소리가 그렇게 예뻐?” “그럼요! 저도 딱 한 번밖에 들어보지 못했지만 정말 아름다웠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는 생전 처-“ “인어의 목소리를 들어봤다고?” 두 사람의 대화에 벨로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 듯한 눈으로 눈앞에 있는 학자를 응시했다. 학자는 벨로스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는 듯 조금 자조 섞인 미소를 지르며 말을 이었다. “믿지 못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그녀를 만난 건 정말 기적이었거든요.” 그러면서 학자는 마치 추억에 잠긴듯한 눈빛을 하며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기적 덕분에 제가 지금 이곳에 살아있을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벨로스는 그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건.... “그러니 다시 한번 그녀를 만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단 걸 알고 있으면서도 끝없이 그 흔적을 쫓을 수밖에 없는..... 지독한 사랑의 감정이었다. “그만 포기하지?” 학자는 벨로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에도 벨로스는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인어를 만날 확률은 네가 한 국가를 통치할 왕이 될 확률보다 적어, 만에 하나 인어를 만나더라도 그자가 네가 만났던 인어일 확률은 더 적지.” 벨로스는 왜 자신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배에서 내리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한테 이렇게 짜증이 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계속 그렇게 허송세월만 보내지 말고 좀 더 가능성 있는 일을 하는 게 어때?” 벨로스의 독설에도 학자는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몹시도 고요하고 차분한 눈으로 벨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제 마음을 이해하고 있군요.” 학자의 말에 벨로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보통 이 말을 들으면 헛소리로 치부하거나, 잘해보라고 비웃음 섞인 말을 건넸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학자는 벨로스에게로 한발 한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학자는 벨로스의 바로 지척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은 저와 같으시군요.” 학자는 그의 눈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것은... “당신은 포기할 수 있었습니까?” 마치 벨로스에게서 자신을 투영하는 듯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는 벨로스에게 나올 대답이 무엇일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대답은..... 아마 저와 같으시겠죠.” 왜냐하면 두 사람은 지독할 정도로 서로를 닮아있었으니까......

05. 가시 철창속의 하얀 새 벨로스는 학자의 눈을 피하며 신경질적으로 오크통 위에 앉았다. 마음을 읽혔다. 그것도 완벽하게. 속마음을 감추는 것은 언제나 간단한 일이었는데 저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간파해냈다. 맹하고 사람 좋은 얼굴하고 있으면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벨로스가 대답을 하지 않자 데블이 다시 학자에게 질문한다. 학자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에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답하고 있었다. 그러다 벨로스는 자신의 망토가 당겨지고 있는 걸 느꼈다. 그가 시선을 내리자 그곳에는 한 소녀가 서있었다. 10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그 소녀는 정리되지 않아 산발이 된 긴 오렌지색 머리카락에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벨로스는 소녀가 고아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곧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와 옷과는 대조적으로 희고 상처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무엇보다 길거리 생활을 했다면 좋든 싫든 손이 망가져있을 텐데 소녀의 손은 손톱이 조금 긴 것을 빼면 상당히 깨끗해 보였다. 그녀의 오렌지색 눈동자가 너무나도 올 곳은 눈으로 벨로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 눈동자가 지젤 공주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색도 모양도 다를 텐데 어째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벨로스가 소녀의 눈동자를 보면서 잠시 과거에 기억에 잠겨있을 때 소녀가 입을 열었다. “예쁜 사람이네? 근데 나랑은 하나도 안 닮았어.” 소녀의 말에 벨로스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소녀의 목에 겨누었다. 바로 지척에 있던 데블과 학자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위험하단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도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벨로스를 바라보았다. “넌 뭐지? 나한테서 뭘 읽은 거냐?” 그의 질문에도 그녀는 그저 멀뚱멀뚱 자신에게 향해있는 단검을 보고 있었다. “대답해.” “나도 몰라.” 벨로스는 소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답하기 싫다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른다는 건지 그녀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가 다시 한번 소녀를 추궁하기 위해 입을 열려 했지만 그녀가 먼저 말을 시작해 벨로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신기해. 지금까지 들린 적은 있어도 보인 적은 없었거든.” 소녀는 벨로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고 그는 그녀의 행동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소녀의 목에 있던 단검을 거두었다. ‘아차.’ 벨로스는 자신이 실수했단 걸 깨달았지만 소녀는 이미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그의 움직이지 않는 왼손을 붙잡고 그대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벨로스는 그런 소녀의 행동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 감정은 더더욱 커져갔다. “많이 힘들었겠네. 그런 일까지 하다니.... 나랑 닮았다는 그 사람, 당신의 엄청 소중한 사람이구나.” 소녀는 고개를 들고 벨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엔 은은하게 미소가 걸려있었다. “사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어. 당신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거든.....” 소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미약하게 쓸쓸함이 묻어있었다. “그런데 안될 것 같아. 내 말 들어줘서 고마워.” 소녀가 벨로스의 손을 놓고 몸을 돌림과 동시에 데블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데블은 스쳐 지나가는 소녀를 힐끗 바라보고 벨로스에게 속삭였다. “저 애, 너한테 무슨 말을 했어?” “아무 말도.” 벨로스의 말에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물었다. “정말 아무 말도 안 했어?” 계속되는 데블의 질문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그녀는 잠시 학자의 눈치를 보더니 벨로스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벨로스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이자 데블이 좀 전의 어린아이 같은 말투가 아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이의 목에 속박의 인이 새겨져있었다.” 그녀의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속박의 인. 노예였단 말인가? “다만 평범한 속박의 인이 아니었다. 이 기분 나쁘고 질척거리는 기운.... 평범한 인간이라면 얼마 버티지 못한다. 저건......” “악마의 인이다.”

06.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 악마의 인. 그렇다면 저 아이는.... 벨로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동시에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악마가 자신의 인장을 인간에게 세기는 것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나는 계약의 인. 인간이 악마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소원을 빌었다는 증거. 또 한 가지는 속박의 인. 계약자가 소원을 대가로 바친 인간에게 새겨지는 [제물의 표식]. 벨로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쓸었다. 괜찮아. 나는 이제 그 녀석의 제물이 아니야. 그리고 아마 벨루가도... 그는 애써 고개를 저어 떠오르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운다. 그리고 잠시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데블은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이윽고 벨로스가 조금 진정된 기색을 보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연관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그 말을 들은 벨로스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데블은 그가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덥혀있는 기운으로 봤을 때 절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야. 나도 시간을 되돌리는데 힘을 거의 써버려서 지금은 싸울 수 데다, 너도 왼손이 정상이 아니잖아?” 그녀는 벨로스의 움직이 않는 왼손을 들어 올려 그의 눈앞 대고 흔들었다. “우리의 목적을 잊은 건 아니겠지? 인간 한두 명 죽는 것까지 신경 쓰다간 절대로 못 막아.” 데블은 그가 시간을 되돌린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그 말은 들은 벨로스의 어깨가 흠칫거린다. 그가 다시 한번 심호흡하며 오른손을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리고는 떨어지지 않은 입을 열어 겨우 데블에게 알겠다고 말했다. 데블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목적을 위해서 뭐든 희생시킬 수 있는 냉혹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무언가를 희생시키는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악마겠지. 데블은 찬찬히 벨로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악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증거.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악마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이도 저도 아닌 생명체. 악마에게는 힘을 키우기 위한 사냥감, 인간에게는 악마라고 손가락질 받는, 언제 타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에서 자랐을 텐데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계약한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다웠다. 데블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학자가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벨로스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벨로스의 상태를 물었다. “저, 아까부터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은 건가요?” “신경 쓰지 마. 뱃멀미를 심하게 하거든.” 그 말을 들은 학자의 표정이 밝아지며 이제 안심하라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데블에게 말을 하며 벨로스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아! 그렇다면 이제 괜찮을 겁니다. 이제 목적지까지 얼마 안 남았거든요.” “그러고 보니 당신은 그곳에 왜가는 거야? 거기에 뭔가 연구할 게 있어?" 데블의 질문에 학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매고 있던 배낭에서 오래된 고서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이 책에 쓰여있는 전승에 따르면 인어는 따뜻한 바다를 좋아한다고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특정 시기가 되면 어떤 항구도시로 이동한다고 나와있고요.” 그때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항구에 닿았다. 선원들이 짐을 내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소리에 데블과 학자가 도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형형색색의 꽃들과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즐비해있는 아름다운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부터 약한 미풍을 따고 간판으로 꽃잎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학자가 도시를 가리키며 쾌활하게 말했다. “도착했군요. 여기가 영원한 봄의 도시 [프리마 벨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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