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CmE7e45fhun 2019/06/20 19:51:52 ID : 2nDvvgZbeHB 0
가능한 한 일찍 죽고 싶었다. 나의 존재는 불공평하다고, 차라리 내게 올 내일을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이 더 공평하다고 여겼다. 이 세상은 혼잡하기 이를 데 없고 발 디딜 틈 하나 내어주지 않으니, 나보다 더 내일의 세상에 필요한 사람에게 삶을 주자. 존재를 양도하자. 나를, 버리자. 존재에 대한 부정이란 그리 어렵게 찾아오지 않았다. 즐거움의 부재. 사랑의 부재. 소통과 공감의 부재. 감정에 고착된 것들의 부재로부터 나의 존재가 쉽사리 부정되고, 그로 인해 나는 얼마나 나약하고 불필요한 사람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어느 정도까지 나약해질 수 있는가. 이런 존재가 과연, 필요키는 한가? 세상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일은 세상으로부터 먼저 버려진 후의 일임이 분명한데도 나는 여전히 발을 디딜 틈이 없다. 완전히 나를 버리지 않은 탓인가, 하고 고민했다. 나를 완전히 버리는 방법은……. 부정이란 곧 죽음인가. 나는 내가 죽고 싶다고 해서 나를 저버릴 용기가 있는 사람인가. 수많은 질문이 나를 꿰뚫었지만 가장 아픈 것은 역시 환경이었다.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이 심장을 찔렀다. 죽으면 슬퍼하겠지. 분명 볼 수 없을 텐데 그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서 죽을 수가 없었다. 문장으로 된 질문의 형태보다 흐릿한 얼굴 한 조각, 선명하지도 않은 상상 하나가 나를 수없이 많은 포기의 앞에서 불러세웠다. 10년만 더 살아줘. 그럼 내가 10년 뒤에 또 10년만 더 살라고 해 줄게. 언제 들었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그 말을 겨우 부여잡고 버티기도 했다. 부어오른 뺨을 쥐고 거리를 배회하며 눈물을 떨구던 그 찬 겨울날에는 더더욱 그랬다. 살고 싶었던 본능인지, 나를 살리고자 했던 친구들의 부름인지.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나를 살도록 만들었다. 삶이란 고통이거늘. 적어도 나에겐 그러했다. 인생은 고통스러웠고 내일이 두려웠다. 희뿌연 안개가 마치 지금까지의 내 행복임이 분명했고, 걷어낼수록 점점 드러나는 잔상의 주인이 앞으로 맞이할 끔찍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었다. 살아가면 갈수록 그 앞에 서서 스스로를 시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공포스럽고 역겨운 기분이다. 아마 죽고 싶은 기분일 것이다.
2 ◆9wE6ZdDvu5X 2019/06/20 19:54:51 ID : 2nDvvgZbeHB 0
본디 행복이란, 누구나 가질 수 없기에 행복이었던 것이다. 신은 이다지도 우리를 미워한다. H는 역설하였다. 왜 나는 B를 증오하는가. 사랑이라는 이름의 궤변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목을 감싸 안고 꾸역꾸역 욱여넣었다. 질식되었으나 여념치 않는다. 우리는 어려운 언어들의 나열을 즐기기에 역설한다. 그래서 이것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 증오이다. 이따위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 결국 사랑일 리 없다고 말한다. 가설이 진리였다고 하여 벅차오르는 것을 담아내기란 불가능했다. - 잊어요. 겨우 한 마디만 뇌까리고 돌아섰다. 실패한 농담 같은 세상을 쥐고, 검버섯이 돋아난 노인의 소매를 한 남자는 타들어 가는 비아처럼 날개를 구부렸다. 스러진 몸체를 주워 올릴 이는 떠나고 없다. 비웃어야만 한다. 너는 불나방이었고, 나는 그림자가 없는 불꽃이었다고. 그래서 자신의 사랑 또한 잔여물이 없다고. H를 닥쳐왔던 수많은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종류라는 것이다.
3 이름없음 2019/06/20 20:17:13 ID : 2nDvvgZbeHB 0
돌아가길 바란다는 말로 날 고문하지 말아요. 희망은 때로 가장 아픈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잖아요. 품에 안겨드는 나를 내버려 둬요. 내가 더 이상 당신의 품을 찾지 않게 만들어 줘요. 종일 내 머릿속에서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당신이지만 절대 정말로 그러길 바라서 하는 상상은 아니에요.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 뜨겁게 불타오르는 서로를 상상하지만 당장 당신이 나와 그러길 바라서 하는 건 아니에요. 당신도 알잖아요. 그건 우리의 추억이에요. 난 단지 그것을 곱씹을 뿐이에요.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오지 않을 당신을 그리워하며 밤새 눈물로 적시는 추억에 불과해요. 모진 비가 되어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아요. 찬 바닥에 앉아 그저 그리는 것으로 족하겠다는 말이 이렇게나 아프게 내뱉어질 줄 몰랐는걸요. 혈흔은 마음 쓰지 말아요. 말만 받으면 그걸로 되었어요.
4 ◆9wE6ZdDvu5X 2019/06/23 00:18:42 ID : 2nDvvgZbeHB 0
종국에는 나방을 태웠다. 그렇게라도 꺼져가던 불씨를 살려낼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그림자가 내게 말을 건넸다. 제가 그 부나방인 줄은 꿈에도 모른다며, 그리 말을 걸었다.
5 ◆9wE6ZdDvu5X 2019/06/23 00:28:33 ID : 2nDvvgZbeHB 0
캠퍼스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서 공기 중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어내는 아이. 마치 담배 연기가 제 몸보다 더 무겁기라도 한 양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면서 쫓기듯 남은 담배를 마저 태우던 아이. 담벼락과 담배. 깡마른 손가락과 화장기 없이 깨끗한 얼굴. 허리께 위를 훌쩍 덮는 긴 곱슬머리. 특별히 남들과 다를 게 없는 외관. 하지만 기어코 나는 그 아이에게서 특별함을 찾아내고자 애썼다. 가만히 서서 그 애를 바라볼 이유라도 만들어 내려는 양 눈길을 짚고 짚어 이윽고 나풀거리는 속눈썹에 종착했다. 자욱한 연기가 부유하는 공기 중으로 나붓이 감겼다 열리는 눈꺼풀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 아래에서 조용히 팔랑이는 속눈썹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래, 마치 지금처럼. “뭐 해?” “어, 어?” 당황한 모습을 보고 우습지도 않은 지 단조로운 표정을 일관하는 아이의 얼굴이 되려 나를 창피하게 만들었다. 이따금 교내 담벼락인 흡연 구역에 가면 본의 아니게 마주칠 수 있었던 얼굴이 나를 향해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던 눈꺼풀과 이어진 속눈썹이 가까이서 조르듯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가까운 거리였기에? 잘 모르겠다. 이미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애가 나를 이끄는 대로 이끌리고 있었으니까. 미약한 담배 냄새가 퍼졌다. 글쎄, 오염이 별건가. 이런 게 오염이지. 그 애의 입술이 턱을 지나 목덜미로 옮겨붙었다. 네 입술만 이렇게 간지러운 거야? 아님, 원래 사람 입술은 이렇게 다 간지러워? 닿을 때마다 마치 먹히고 있는 기분인데 그게 싫지 않은 기분 있잖아. 오히려…. 오히려 더…. 방황하던 손길이 자리를 찾았다. 모두 맨살이 맞닿는 곳이었다. 술김에 하는 관계라 치기에 우리 둘 다 꽤 제정신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 그 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둘 중 그 누구도 그 점을 꼬집는 사람이 없었다.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서로에게 취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거짓은 아닌 게, 그 말 그대로 침대 위에 있는 서로는 정신을 빼놓을 정도로 엉겨 붙고 더듬어댔다. 종례에 다다라서는 달큼한 숨결이 어깨를 간질이는 감각을 부여잡고 정신을 놓듯 수마에 젖어 들었다. 뒤늦게 달려드는 옅은 취기가 몸을 완전히 맡기도록 만들었다. 밤새 옆을 지키던 온기가 물러가는지도 모른 채로, 그렇게 단잠에 빠졌다. 나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모텔방에 달린 전화기였다. 카운터와 이어져 있는 전화기 너머로 어리숙한 목소리의 알바생이 10시까지 방을 빼 달라며 재촉했다. 번뜩 드는 어제의 기억에 옆을 바라보았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구겨진 침대 시트와 잔향이 전부였다. 모든 게 꿈이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여서 잠깐 기억을 의심하기까지 해야만 했다. 나는, 아쉬워하고 있던 걸까? / 밖은 무더위가 한창이었다. 아직 9시가 막 지난 시각인데도 그랬다. 봄이 완전히 지나고 정말 한여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마저도 뜨끈한 어깨로는 오래도록 느끼고 싶은 감각은 아니었다. 오후 강의만 있는 시간표를 보며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정말 그 애랑 잤을까? 문득 고질적인 질문들이 떠올랐다. 매일같이 담배와 함께 있던 아이를 보러 가던 이는 내가 분명했다. 왜 그랬지? 나붓이 가라앉는 속눈썹을 봐야만 할 것 같아서. 왜? 내가, 그 애를 좋아해서? “… 설마.” 좋아한다 라. 그런 감정은 조금 더 뜨겁지 않나? 사랑이라는 존재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보다는 뜨거우리라 확신한다. 그러면 나는 그 애랑 왜 잤지? 그 애는 왜 나랑 잔 거지? 아니… 감정이란 게 끼어들 사이기는 했나, 우리. 아니, 그 애랑 나 사이에?
6 ◆9wE6ZdDvu5X 2019/06/23 00:32:08 ID : 2nDvvgZbeHB 0
사람은 왜 타인의 몸에서 시작하는 걸까. 평생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너무나 괴로운 일 일 텐데. A를 보고 있으면 그런 의문이 들었다. 왜 A는 저런 어른들 슬하에서 개보다 못 한 인생으로 살았을까. 분명 죽기보다 괴로웠음이 자명한데. 그래, 저 애는 그래서 저렇게 묵묵히 서 있나 보다. 제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어떤 색보다 화려하게.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주변인들을 벽지 삼아, 누구보다 환하게.
7 ◆9wE6ZdDvu5X 2019/06/23 00:43:10 ID : 2nDvvgZbeHB 0
손목이 잘렸다. 진득한 혈이 배어 나오는 단면이. 아니 사실은 피가, 뇌가, 척추가, 뜨거움이. 무엇인지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내게 고통을 선사했다. 하얀 옷을 입은 남자는 말했다. 손을 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 말이 가장 아팠었다. 그가, 왼손 병신으로 살아야 하는 내 미래를 만들어내는 초석 같아서. 나는 오른손잡이였다. 누군가 그건 다행이라고 했다. 그럼 너도 왼손 잘라낼래? 내가 웃자 그 애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 사과가 진심이었듯, 이전의 말도 진심이어서 왼손과 함께 사람도 잘라냈다. 아파서 예민한 거라고, 다음에 이야기하자는 대답을 들었다. 아니, 난 안 아픈데. 아픈 부분을 잘라냈거든. 신경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내 몸에만 신경을 쓰라는 의사의 말을 귀담아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 내가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를 생각하는 게 인간이니까. 코끼리는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분노에 밤잠을 설치고, 뒤척이고. 웃다가 떠올리고, 생각이 끝나갈 때 곱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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