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0/06/06 23:41:04 ID : VdWp9a7dXxQ 0
첫번째는, 온종일 비가 내렸던 주말을 지나 월요일이 되어 갠 하늘 밑에서 단짝이 흥분하며 말해줬던 이야기. '볼일이 있어 급하게 나갔다가 그리 멀지 않은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네 갈래 길이 난 커다란 횡단보도에서 짙은 하늘과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밝은 색의 우비를 입은 사람이 있었다. 고작 이정도 비에 우비까지 입나 싶으면서도, 멀리서 볼 때는 전혀 이상한 건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눈에 확 들어올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옆에 서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야의 테두리께에서 옆으로 보이는 얼굴이 온통 검었다. 거기에 아무것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친구는 여러 번 거기엔 아무것도 없이, 검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많이 무서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도망치기로 마음을 먹고 기다렸다. 그것도 여전히 바라보던 방향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신호가 되자마자 뛰쳐나갔다. 큰 길이어서인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반대편에 도착하고 뒤를 돌아보니 없었다. 지금 떠올려보니 근처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굉장히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이 뒤로도 그 전으로도 친구는 나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괴담 얘기도 따로 꺼낸 적이 없다. 다시 기억날까봐 무서운 걸까.
2 이름없음 2020/06/06 23:54:38 ID : VdWp9a7dXxQ 0
두번째는, 어느 햇빛 쨍한 날 학교에서 돌아오며 심한 현기증이 나 방에 엎어져 꾼 꿈 이야기다. 그날은 유독 더운날도 아니었고, 전날에 잠을 덜 잔 것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집 문을 열기 전까지도 느끼지 못했던 심한 졸음과 현기증이 갑작스레 나의 머리를 덮쳤다. 마당의 집 문을 잠그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고, 차마 방 문조차도 닫을 힘이 없이 쓰러졌다. 혼절이나 기절이 알맞는 단어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정신없이 빠져들어갔다. 꿈조차도 독특했다. 온통 희게 빛나는, 어린아이 꿈 속 특유의 생략된 공간 속에 내가 있었다. 정확히는 저 멀리에서 있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꿈의 개요나 맥락을 지참할 여력이 없게도 다른 피사체나 나의 특징이 두드러지진 않았지만, 단순히 저것은 나를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저 멀리에서도 더 멀리, 아이들이 뛰노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처량히 바라보았다. 그가 조금이나마 쓸쓸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걱정스러운 맘으로 지켜보니 저쪽의 아이들이 먼저 움직였다.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드디어 날 눈치챈 것인가, 묘한 희열과 함께 내가 그 무리로 섞여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나는 나를 봤다. 이번엔 멀리에 있는 나였다. 그리고 부럽느냔듯이 씨익 웃었다. 소름이 끼쳤고, 마찬가지로 항변하고 싶었지만, 잠에 빠져들때와 비슷한 기분으로 쫓겨나듯이 깨어났다. 제법 긴 시간을 잔 것 같았지만 깨어나자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그날은 이 꿈을 돌아보느라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아직도 나는 이 꿈을 다시 꾸지 못하고 있고, 가끔씩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줄 뿐이다.
3 이름없음 2020/06/07 00:02:56 ID : VdWp9a7dXxQ 0
세번째도 꿈 이야기다. 비슷한 조건, 비슷한 날에. 얼마 가지 않아서 다시 쓰러졌다. 이번엔 쨍한 햇빛은 보이지 않는 노을 가운데. 꿈속에서 눈을 뜨자 나는 매우 빠르게 시장의 골목이 지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통 익숙한 가게뿐인 그 풍경은, 기묘하게도 완전히 정면으로 보였다. 나는 옆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기억이 닿는 곳까지 나는 날아갔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단지 사람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불이 완전히 꺼진 새벽의 풍경, 그건 어린시절엔 착했던 내가 일찍이 본 적 없을 것이었다. 더해서 애초에 새벽에도 흔히 불빛을 밝히는, 일명 먹자골목의 거리였음에도 나는 분명 꿈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노력없이 옆으로 날아가면서. 기억이 미치지 않는 먼 거리에 오자, 결국 위의 꿈과 비슷한 방식으로 깨어났다. 무슨 의미를 지닌 꿈인지, 왜 쓰러져버렸던 날에만 악몽도 길몽도 아닌 꿈을 꾼 것인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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