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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3 19:26:44 ID : bwoLhAlxA2J
안녕하세요, 시를 좋아하는 직딩입니다. 읽다가 좋은 시 구절들을 나열할 예정입니다. 국내 현대 시를 위주로 옮길 예정입니다. 시를 옮기다가도 적당히 제 생각이나 일상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시는, """ {본문} - {저자}, {제목} ({전문/일부 여부}) """ 의 형태로 기록할 생각입니다. 혹여나 해당 스레에 이슈가 있다거나, 시에 대한 감상이 있다면 자유롭게 말해주시고, 같이 읽고 싶은 시가 있다면 형식을 맞춰 같이 쓰셔도 좋습니다. * 제목은 함민복 시인의 창비 시집 중 하나의 제목을 붙였습니다.
2021/04/16 19:56:45 ID : bwoLhAlxA2J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꽃 향은 두고 술 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집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신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 이병률,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전문)
2021/04/19 18:11:09 ID : bwoLhAlxA2J
저물기 전에 물기 많은 눈이 쏟아졌다. 보도에 닿자마자 녹는 눈, 소나기처럼 곧 지나갈 눈이었다. 잿빛 구시가지가 삽시간에 희끗하게 지워졌다.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변한 공간 속으로 행인들이 자신의 남루한 시간을 덧대며 걸어들어갔다. 그녀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사라질―사라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통과했다. 묵묵히. - 한강, 흩날린다 (전문)
2021/04/19 18:12:54 ID : bwoLhAlxA2J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 한강, 초 (일부)
2021/04/19 18:18:28 ID : bwoLhAlxA2J
사랑이여 너도 쉰 소리를 내는구나 몸 속 어디에 말 못 할 화농을 키웠던 걸까 쩔쩔 끓는다, 심장을 꺼내 발로 차면 바다에 빠질 듯 천지간 병 되어 흥건타 - 정끝별, 노을 (전문)
2021/04/19 18:20:15 ID : bwoLhAlxA2J
등대는 바다가 아니다 등대는 바다를 밝힐 뿐 바다가 되어야 하는 이는 당신이다 오늘도 당신은 멀리 배를 타고 나아가 그만 바다에 길을 빠뜨린다 길을 빠뜨린 지점을 뱃전에다 새기고 돌아와 결국 길을 찾지 못하고 어두운 방파제 끝 무인등대의 가슴에 기대어 운다 울지 마라 등대는 길이 아니다 등대는 길 잃은 길을 밝힐 뿐 길이 되어야 하는 이는 오직 당신이다 - 정호승, 무인등대 (전문)
2021/04/19 18:21:00 ID : bwoLhAlxA2J
이따금씩 길을 잃은 느낌이 들 때, 적어두고 읽는다. 읽어도 길이 보이진 않는다. 조금 덜어지는 기분도 아니고, 오히려 더 무거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이따금씩,
2021/04/26 08:50:53 ID : bwoLhAlxA2J
백 년을 넘긴 대추나무가 서쪽으로 기우는 달밤입니다 수평으로 퍼지다 직각으로 올라간 얼마 되지 않은 대추나무 가지에도 이른 메밀꽃처럼 꽃이 핀 달밤입니다 환히 뚫린 개집 안 더 아픈 강아지가 끈질기게 앓는 강아지의 등에 바짝 붙어 흰 털을 핥으며 실눈을 빗뜨는 달밤입니다 - 이윤학, 서대마을에서 (전문)
2021/04/26 18:09:09 ID : bwoLhAlxA2J
소멸하는 약력은 나도 부러웠다 풀 죽은 슬픔이 여는 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따라올라가면 은어가 하루처럼 많던 날들이 나온다 저녁 강의 시야가 그랬다 출발은 하겠는데 계속 돌아왔다 - 박준, 저녁 : 금강 (일부)
2021/04/26 18:11:45 ID : bwoLhAlxA2J
요새는 정신이 없어서 나만의 시간이 없었다.
2021/04/26 20:55:32 ID : bwoLhAlxA2J
아카시아 꽃잎과 빗물이 다져져 길이 되었다 그 위로 조금씩 흐르는 빗물은 아무도 씻어줄 수 없는 눈물이었다 (어느 봄 중앙병원 혈액종양외과 병동 앞에서, 초로의 어머니와 딸은 그렇게 울고 있었다) 아무도 씻어줄 수 없는 눈물을, 나는 또 그때처럼 구두 바닥으로 짓이기고 있었다 - 이성복, 또 그때처럼 구두 바닥으로 (전문)
2021/04/26 20:58:18 ID : bwoLhAlxA2J
참으로 고운 것들은 고운 데 미친 것들이다 밤의 속눈썹에 이름 없는 꽃들이 매달려도 너는 잘 잔다 너는, 너는 잘도 잔다 - 이성복, 너는 잘 잔다 (전문)
2021/04/26 21:13:54 ID : bwoLhAlxA2J
책을 읽을 시간이야 너는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네가 조용히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나는 이혼은 했는데 결혼한 기억이 없어 이혼보다 결혼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 심보선, 독서의 시간 (일부)
2021/04/26 21:20:16 ID : bwoLhAlxA2J
당신의 눈빛은 나를 잘 헐게 만든다 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수면은 새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래된 물길들이 산허리를 베는 저녁 강 건너 마을에 불빛이 마른 몸을 기댄다 미열을 앓는 당신의 머리맡에는 금방 앉았다 간다 하던 사람이 사나흘씩 머물다 가기도 했다 - 박준, 문병 : 남한강 (전문)
2021/05/01 19:35:02 ID : bwoLhAlxA2J
오늘은 살금살금 지나간다
2021/05/01 20:17:25 ID : bwoLhAlxA2J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못된 사람이라는 말과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나의 선의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미래 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되풀이해서 말한다. 선의는 잘 차려입고 기꺼이 걱정하고 기꺼이 경고한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금한다. 창문을 연다.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민다. 오늘 날씨 좋다. - 임솔아, 예보 (일부)
2021/05/01 20:24:41 ID : bwoLhAlxA2J
뒤돌아서는 당신의 그림자는 왜 짙은 그늘로만 기울어지나요 안 그래도 휘어진 등 힘들어 보여서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힘은 어디서 오나요 벽에 못 하나 박는 일이나 시장바구니에서 저녁거리를 담는 일 사무실에 홀로 남아 야근하는 일이나 과장님의 주말 카톡까지도 생각해 보면, 모두 심써야 하는 일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울컥하는 또 다른 마음도 있습니다 말로는 내 마음 다 담아낼 수 없어 당신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습니다 심내요 힘내요 - 주영헌, 힘은 어디서 오나요 (전문)
2021/05/02 12:08:35 ID : bwoLhAlxA2J
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악마가 묻는다 꽃나무를 심었냐고 비는 어리석고 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초승달 모양의 마른 저수지 바닥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산의 어깨 위에서 비가 되지 못한 것들이 굴욕을 견디며 웅성거린다 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새에 대하여 저녁에 대하여 꽃나무에 대하여 비는 약속하지 않을 것이다 비는 체념이다 나는 몇 시간째 생을 내려다본다 - 허연, 21세기 (전문)
2021/05/02 12:11:35 ID : bwoLhAlxA2J
슬픔은 위엄이다 일월에 꽃을 피웠다는 홍매화나무 아래 병색의 노수녀가 서 있다 멀리 잔파도 소리와 그레고리오 성가가 들리는 오후 겨울 햇살은 용서처럼 와 있다 유기견 한 마리 졸고 있는 양잔디 깔린 앞뜰 피뢰침 그림자 끝에 천국 같은 게 언뜻 보이다 말았다 담장 안쪽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베네딕도의 손수건이 젖어 있다 - 허연, 무반주 (전문)
2021/05/02 12:14:41 ID : bwoLhAlxA2J
오늘은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맛있는 밥을 먹고, 다시 집에 와야지.

레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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