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호오, 흥미롭군 아이들은 일정 시기에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한다. 그 현상은 옹알이라 하며,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그렇다면 역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게 그대의 제안인가? 호오, 흥미롭군.” “오, 거기서 그렇게... 흥미로운걸.” 흑발에 적안이라, 이 특색이라곤 하나 없는 공작나으리는 역시 ‘호오, 흥미롭군’이란 병에 걸린게 틀림없다.

1.게 얼마전부터 저택에 붉은머리의 여자가 들어왔다. 남쪽 어느 귀족가의 마지막 후손 이러쿵저러쿵. 학살을 피해 도망쳐온 어쩌고저쩌고. 나는 그녀가 게같다고 생각했다. 강렬한 붉은머리에 여기가 있을 자린지 없을 자린지 구별도 못하고 들이대는 게 마치 게같지 않은가! “그래서 이게 내 제안이에요. 계약을 받아들이겠어요?” “착각하지 말아요. 이건 계약일 뿐이니까.” 공작. 잘난 공작. 자작은 너무 촌스러우니까, 멋지게 공작으로 가자. 그렇게 결정된 것 같은 작위를 단 남자가 흥미병에 걸렸다면 게는 계약병에 걸린 것 같다. 입만 열면 계약, 계약, 계약. 그래놓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설레고 두근대겠지! 그 모든 것은 재미와 흥미로 포장된다. 정말, 보기좋은 꼬라지들이야.

2.추측 저택에 머물 손님이 들어왔다는 것은 아랫 사람들에겐 큰일이 된다. 당장 모셔야할 사람이 늘어난다는 소리니까. 준비하던 음식의 양이 늘고, 빨아야할 옷이 늘고, 청소해야할 부분이 많아지며 관리도 철저히 해야한다. 저기 지나가는 하녀들의 손은 부르텄겠지. 하인들의 옷은 땀에 절었겠지. 저 마부는 게가 가고 싶다는 곳을 전부 데려다주느라 아끼던 말을 잃어버렸을거야! ...볼 수는 없지만, 말이지.

3.나탈리아 저택을 청소하는 하녀들이 한둘은 아니지만, 가장 인상적인 여자는 그녀일 것이다. 다소 건장해보이는 체격에도 일이 서툴러 항상 하녀장에게 꾸지람을 받는 회색머리의 소녀. 그럼에도 클래식하지 않게 전혀 활발하지도, 전혀 사교성이 좋지도 않은. 돌과 같은 여자애. 세 달 전, 처음 그녀를 봤을 때부터 나는 그녀에게서 모종의 친밀감을 느꼈다. 그녀는 볼때마다 제각기 다른 도구들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어느 땐 도끼였고 어느 땐 걸레였으며 어느 땐 빗자루였다. 그녀가 그 큰 키에 어울리지 않는 빗자루를 들고 이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오던 날, 그 손엔 빗자루가 아닌 창이 들렸어야 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무뚝뚝하게 팔의 왕복운동만을 계속했다. 그 얼굴엔 전투의 희열이 있어야 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전사의 떡잎은 그렇게 청소를 마치곤 하녀장에 대한 불평을 토로하며 홀을 떠났다. 그 입에선 개선가가 흘렀어야 했다. 왜 문명과 신분은 한 사람의 전사를 허드렛일이나 하는 잡일꾼으로 만든단 말인가.

4.뒷담화 게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모양이다. 하녀들 중 몇이 저택에서 사라질 예정이란다. 그녀를 낮잡아보며 뒤에서 수근댔다는 이유로. 하녀들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게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그녀들은 어서 없어져야할 것이다. 나는 그 중에 나탈리아가 없길 바랬다.

5.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나탈리아는 무사한 것 같았다. 무사한 것을 넘어, 과정은 모르겠지만 게의 라인에 잘 선 듯했다. 이걸로 그녀를 계속 저택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지만 내가 친근감을 느꼈던 나탈리아는 없어진 기분이 들었다. 오늘밤은 조금 습했다. 으레 건조한 것이 북부의 평균적인 날씨라지만 기이하게 습하고 비가 오는 날도 간혹 있는 것이다. 그런 날엔 이렇게 눈물을 후두둑 쏟아내는 하녀도 있기 마련이고. 케이티, 이 금발의 소녀는 내일이면 저택을 떠난다. 제딴엔 서러운지 아무도 없다 생각하곤 펑펑 우는데 짜증나 죽겠다. 그럼에도 귀족의 우아한 삶에서 자신은 장치일 뿐이란 걸 너무나 잘 알기에 숨어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나는 케이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녀가 정말 잘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케이티의 넋두리만을 들은 나는, 케이티를 감싸줄 수 밖에 없다. 이제 케이티는 이 곳에서 도보로 일주일은 걸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야한다. 아버지의 눈초리를 받으며 다시 일을 구해보겠지만 그게 쉽지는 않겠지. 사라질 하녀들 중엔 케이티보다 더 기구한 자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나로써는 그 행방을 알 길이 없다. 그들은 항상 어딘지 모를 곳에서 와서,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버린다. 애초에 저택에서 일했던 순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정도로 그녀들의 추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아는 삶의 방식으로는 결코, 그 답을 알아낼 수 없겠지.

6.약혼식 게와 공작의 약혼식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미동도 없이 게와 공작이 홀의 테이블에 앉아 약혼식의 상세한 부분을 결정하는 것을 보았다. 게는 계약임을 강조하면서도 반지의 외양엔 하나하나 끼어들었다. 공작은 원래부터 이런 데 관심이 없던 건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재밌다는 말만 반복했다. 고장난 인형 같을 정도로 반복되는 일상. 그들에게만 우아한 나날. 게가 오른손을 들자 옆에 있던 나탈리아는 충견마냥 빈 티포트를 다른 것과 바꿔왔다. 꼴도 보기 싫다. 자신이 사람을 상당히 안 좋게 보며 편견이 심하다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그렇다고 사과할 생각도 없다. 속 좁은 녀석으로 있는 게 나는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탈리아를 계속 볼 바 에야 정신을 놓는 게 더 낫지 않나 생각했다. 그녀를 자꾸 보노라면 어쩔 수 없이 배신당한 기대의 시체가 스멀스멀 악취를 풍긴다. 그럼 이렇게 하지, 공작이 먼저 일어나더니, 게에게 손을 건넸다. 잡고 일어나라는 것일까? 게는 공작과 눈을 맞추더니, 스스로 일어나 의자도 직접 넣었다. 게는 좋아하지 않지만,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도 공작의 얼굴엔 생글벙글 미소가 감돌았다. 이해 불가.

7.마부장 이반 집사는 모든 사용인을 담당하는 사람이고, 하녀장은 그 중에서도 하녀만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왜 하녀만은 그렇게 따로 관리되어야하지? 그 검은 작업용 드레스와 흰 에이프런이 미의식적으로 나쁘진 않다 해도, 하인장은 없으면서 하녀장은 있다는 게 의문이다. 그러고보면 마부장도 없군. 사실 마부장같은 것은 이 저택에 필요가 없다. 이곳은 고립된 북부이며, 현재의 공작은 더더욱 밖에 나가길 싫어하는 외톨이니까. 기사단의 말은 기사단 숙소에 따로 딸린 마굿간에서 관리되고 있으므로 저택의 마굿간은 다소 한미하다. 그렇기에 새로운 하녀장 스텔라와 달리 이반은 ‘마굿간지기’라는 다소 허름한 명칭을 단 채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나탈리아가 어느순간 들어와 내 시선을 빼갔다면, 이반은 존재만 알고 있는 녀석에 가까웠다. 키는 멀대같이 크면서 몸은 적당히 마르고, 상당히 음울한 인상이면서도 사람 좋게 씩 웃는 건실한 마굿간지기. 그리고 그 옆에서 먼 왼 눈을 머리카락으로 가린, 제 아비와 똑같이 생겼던 사내아이. 나는 이반을 처음 보았을 때 실망했다. 제 조상들과 그렇게나 닮아놓고, 가장 중요한 건강을 물려받질 못했으니. 때문에 그의 조상들에 대해 가졌던 관심을 그에겐 주지 않았다. 그러나 녀석은 꽤 성실했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하녀들이 수군거리는 것만으로도 그가 꽤 수고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사심이 담긴 말이 오가기도 했지만, 듣다보면 엄청난 목석이라 관계가 진전되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는 슬픈 말로 끝날 뿐이었다. 우습다. 인생 뭐 있다고, 그렇게 여자가 들이대면 받아주는 게 진짜 사내 아니겠는가! 이반에 대한 내 평가가 연약한 놈에서 찌질이로 변경될 무렵, 이반이 홀에 나타나는 빈도가 올라갔다. 아마 약혼식 도중 말이라도 등장시킬 모양이거나, 기타 잡일을 맡을 예정인가보지. 그리고 나는 그가 아주 치명적이고도 소름 끼치는 덫에 빠졌음을 직감했다. 그의 조언에 알겠다며 미소지어준 게의 뒷모습을, 이반이 홍조까지 띄우며 배웅하고 있었다.

8.멍청이의 멍청한 짓은 멍청이만 알아본다 요즘은 생각할 틈도 없었다. 점점 탐지 범위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져 한동안 힘을 쓰지 않으려 했다. 얼마가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멀리까지 보이는 걸 생각하면 헛짓을 한 것 같진 않다. 이반은 약혼식에서 게가 타고 올 말이 난동을 부리지 않을까 감시하는 역할이라 했다. 그동안 봐왔던 약혼식에선 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덕담을 나누고, 남자쪽이 반지를 끼워주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사람도 엄청나게 부르고 말까지 타고오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로 했다. 아마 게의 신분과 연관이 있나보지, 공작이 유들유들하게 말하려던걸 게가 막아버려 듣진 못했다. 들을 사람이라고 해봤자 좋다고 보고있는 이반과 게에게 찍 눌려버린 하녀들 뿐인데. 게는 이어서 이반에게도 ‘크리마는 내가 제일 잘 다루니, 당신이 실제로 할 일은 없어요. 보여주기용이니까 내가 크리마와 무슨 행동을 하든 지켜보세요.’라고 초록색 암말을 쓰다듬으며 새침하게 말했다. 나는 이반이 화를 내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수치심에 떨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응당 게라면 그럴 것이라는 얼굴로, 조금 지친 목소리로 수긍했다. 하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거기에 동의해선 안 됐다.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져야만 했다. 짐승은 길들이기 어려운 존재고 말들은 특히 고약하다. 나는 이반의 고개를 간단히 끄덕이게 한 게의 솜씨가 얼마나 좋길래 그러는지 비꼬고 싶었다. 마침 공작이 레이디의 실력이 궁금하다며 넌지시 운을 띄웠다. 게는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승마술을 제대로 교육받았다며 공작의 손을 잡고 홀을 나갔다. 하녀들도 모조리 그 뒤를 이었기에 홀에는 그녀의 약혼식에 함께할 것으로 추정되는 초록색 암말, 크리마와 이반만이 남았다. 이반은 크리마의 머리에 손을 조심히 가져다대곤 이내 쓸어내렸다. 강아지를 만지듯 크리마의 머리를 어루만지던 그는 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은 이뤄질리도 없고 이뤄져서도 안 된다. 자신 혼자 아파하다 끝나는, 그런 열병. 차라리 내가 너였다면, 그 분이 다정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실까? 애정어린 손길로 만져주실까? 이반은 게의 말투를 따라하며 낄낄대다, 크리마의 고삐를 다시 바투 잡았다. 이제 네 집으로 가야지. 네 사랑스러운 주인님이 뭐라 하실거야. 안주인을 따라하는 행동만으로도 불량한 하인의 자세지만, 실고용주의 아내를 더러 사랑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은 더 문제되는 자세일 것이다. 그것도, 한창 때의 성인 남성이 하는 것은 더더욱. 나탈리아는 헉, 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공작님께서 피크닉 느낌이나 내자시기에... 회색머리의 여자는 두 눈을 어디에 둬야할 지 모르겠다는 듯 말하다, 황급히 이반을 지나쳐갔다. 나탈리아가 뛰어 들어왔기 때문에 나가려던 이반이 그녀를 보려면 고개를 돌려야 했다. 당황하기는 그도 매한가지 같았다. 나탈리아는 게의 친한 고용인이고, 방금 자신의 추태가 전해졌다간 자신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직업을 잃을 것이었다. 그는 나탈리아를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으나 왼쪽에서 아우성을 치는 크리마 때문에 별 수 없이 마굿간으로 돌아갔다. 재밌었다. 당분간은 계속 의식을 유지하고 있어야겠다.

9.전전긍긍 이반은 그 날 이후 크리마가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홀을 서성였다. 아마 나탈리아를 찾아서 오해를 풀려는거겠지. 다른 하녀들에게 그녀의 거취를 묻지 않는 것은 자신들만의 일을 그 누구도 모르게 해결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반대로 나탈리아는 철저하게 그를 피했다. 애초에 저택에서도 둘은 볼 일이 거의 없었고, 가끔 게가 뭔가를 시키면 꼭 다른 시녀에게 대신 부탁해 이반과의 일을 처리했다. 싸우고 토라진 연인도 아니고, 이게 뭐람? 나는 당장이라도 한 놈의 사지를 결박해다가 둘이 마주보게 한 다음 결판을 내게 하고 싶었다. 그게 말이든 싸움이든, 지금보단 나으리라.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이반이 자신의 기다림을 접고 결국 나탈리아가 알아서 묻겠지 하며 넘어갈 무렵이었다. 약혼식이 하루 남았다.

10.약혼식 몇 시간 전 그날따라 바닥은 꼼꼼하게 닦였다. 오랜만에 나도 결박에서 풀려나 꽃단장을 했다. 차가운 물을 맞으니 기분이 좋았다. 하녀의 정성스러운 손짓은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단순히 고용된 하인으로써 '청소'한 것뿐이겠지만. 바다에 나가 짠 해수에 온몸이 흠뻑 젖던 것은 언제의 기억인가. 누군가의 친구로써, 또다른 자기자신으로써 기능하며 삶을 이어나가던 것은 언제의 기억인가. 이제는 닿지 못할 과거의 향수는 왜 이리도 아름다운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 이전부터 그랬듯 시종들을 내려다보았다. 하녀장 스텔라가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는 사이 공작이 다가와 여러 장식들을 추가로 요청했다. 약혼식에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이러는건지 나는 여전히 이해를 못하겠다. 약속하지 않으면 결혼을 보장하지 못할만큼 서로를 못 믿는건가? 하긴, 이들은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니 믿음은 당연히 없겠지. 허례허식에 미친듯이 웃어재끼고 싶어졌다. 이제 증오조차 남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웃는 것밖에 없으니까. 게가 뒤에 나탈리아를 대동한 채 들어왔다. 이제 준비는 다 끝난걸까? 창밖을 내다보니 이 먼 곳까지 굳이 마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보였다. 왜 오다 전복당하지 않고 무사히 여기까지 와버렸는가. 공작과 하녀장 스텔라가 손님대접에 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지만 난 그런 관습엔 관심이 없었고, 내가 알아먹은 것은 게가 자신의 등장을 준비하러 떠났다는 것 뿐이었다 나탈리아는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잠시 살펴보다, 제 동료들을 도우러 가버렸다. 내가 신경쓸 흥미도 없는 소란만이 남았다.

11.너는 나를 보았다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검은 옷의 하인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옷을 건네받아 옷걸이에 걸러 갔다. 어머, 어떻게 지내셨나요? 아하, 그러셨군요. 별로 재밌어하지도 않는 대화를 유쾌한 듯 나누며 그들은 곧 치뤄질 약혼식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다. 이스틸라 공작가에서 이렇게 큰 약혼식을 치루는 건 처음이에요, 상대가 엄청난 가문의 영앤가보죠, 하지만 아직까지 정체가 안 밝혀진걸보면 무명가의 여식일지도 몰라요 등등등... 그놈의 가문이 뭐라고 이러는지. 내가 보기엔 다 똑같이 생겼는데. 고리타분한 견제질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끝을 모르고 몰려들었다. 전 공작의 약혼식 때는 안 이랬는데. 그 때는 정말 친지 몇 명만 모여서 단란하게 했고, 정식 결혼식만 수도로 가서 했다. 역시 공작은 이기주의자다. 그나마 친척과 남들 생각해서 접근성이 좋은 수도에서 대규모 행사를 열었던 제 아버지와 달리 위신 때문에 이 수많은 이들을 이렇게 척박한 북부까지 오게 하다니! 그 소름끼치는 발상에 오한이 드는 것 같다. 다들 그만하시지요, 공작님이 들으셔서 좋은 얘기는 아닌 듯 하니. 키는 다소 작지만 옆으로 우람한 중년 남성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꽁꽁 싸매신 것은, 그만큼 정체가 드러났을 때 우리 모두 놀랄만큼 중요한 분이시기에 그런 것이겠지요. 중년의 말에 아마도 그의 아들로 보이는 금색 머리의 청년이 말을 덧붙였다. 설령 이스틸라 공작가의 새 안주인이 평민일지라도, 우리는 웃으며 받아들여야할겁니다. 공작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건 없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다. 하지만 웃으며 받아들여선 안 된다. 그 여자가 얼마나 미치광이인지 몰라서 그런 말이 나오지. 세상에 대체 어떤 여자가 자기 약혼식에 말을 타고 들이닥친단 말인가? 그 사실만 놓고보면 터프해서 좋긴 하지만 실상 그 말을 먹이고 재우고 돌볼 것이 그녀가 아니란 점이 포인트다. 그녀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 나는 이 저택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가 고맙다는 말을 한 걸 본적이 없다. 심지어 공작에게도! 거의 죽기 직전의 꼬라지로 크리마에 매달려서 영지까지 온 여자가 할 말이 '나와 계약결혼 좀 해줄래요?'밖에 없단 말인가? 그래, 뭐 했을수도 있지. 내가 볼 때만 빼고 감사인사를 한 거겠지. 그렇다해도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다. 고압적이고 자신만 잘난 줄 아는 인간은 나와 정말 안 맞는다. 아까 하녀에게 물어봤는데 참 아름다우시다던데요? 기대되네요? 지랄도 정도가 있지, 옘병할 것들이 어디서 헛소문만 듣고는. "...지랄, 옘병...?" "? 미라스, 뭐라고 했니?"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북부라 그런지 춥다고요." "난 또, 네가 버릇 못 고치고 험한 말이나 한 줄 알았구나. 확실히 북부는 공기부터 다르구나." 금발의 청년은 의아하다는 듯 내 말을 따라했다. 들은걸까, 제 아버지가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 사이 청년은 제 주위를 둘러보며 날 찾았다. 나를 찾는 게 맞는건가? 우연히 추워서 욕을 한 것이면 어쩌려고? 여기서 붙박인 채 살아간 지 400년, 단 한 번도 내 목소릴 들은 사람은 없었다. 기묘한 희열감이 나를 감돈다. 내 목소리를 들은건가. 하지만 그럴리가 있는가. 설령 내 목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내가 나란 걸 어떻게 알지? 미라스는 눈썹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기다 저 부인과도 인사를 해야한다며 아버지에게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그가 나를 알아볼 지도 모른다는 환상이 깨져버린 순간, 그의 시선은 확실하게 나에게 닿았다.

짱재밌다....... 주인공은 대체 정체가뭘까....... 검의 유령? 혹시 흐름끊겨서불편하면 지울게

12.너는 나를 찾는다 그 시선은 아주 잠시 머물다 흘러갔다. 저 천치는 나를 보고도 내가 그 목소리의 주인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제 아버지에게 대체 어디를 보냐며 한 소리를 듣는 와중에도 계속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헤맸다. 들었다. 들은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어떻게? 도대체 무슨 수로? 400년 전에도 내 목소리를 들은 이는 몇 안 됐다. 가끔, 아주 가끔, 크라켄의 피에 취해 헛것을 보는 주술사들만이 꼬부라진 발음으로 대답을 해줬을 뿐이다. 미라스는 보기엔 아주 건실했다. 오크통 1.7개 정도의 키와 옷에 가려져 만져보기 전까진 모를 실전형 근육, 당당한 걸음걸이때문인지 그가 크라켄의 피, 하다못해 와인에라도 취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체 무슨 방법을 쓴걸까? 적어도 듣고싶어서 들은 것은 아닌게 분명하다. 선천적으로 타고 난 것인가? 그렇다면 왜 이 긴세월동안 여태 미라스 한 명 밖에 없었지? 들켰다면 어찌해야했을까도 생각해야한다. 지금은 넘어갔지만, 그가 내가 목소리의 주인임을 알아채면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사실 일반적으로 보면 곤란해질 것은 그다. 저기 보세요! 이스틸라 공작가의 상징이 말을 해요! 그 순간 정신병자로 몰릴게 뻔한데. 미라스가 다시 돌아왔으면 한다. 어차피 내 정체를 까발리지도 못할거, 보일때마다 그 귀에 욕지거리를 박아줘야지. 이런데서 잘못 입을 놀리면 인생 골로 갈 거다. 흥미병에 걸린 공작 인생 종치는 데 들러리로 어울리지 않을까? 낄낄대다가 문득 주위가 조용해진 것을 느꼈다. 게가 등장할 시간이었다. >>13 난입 ㄱㅊ 나야말로 주기 느려서 미안! 뭐 일반적으로 여기까지 오면 그렇게 사고가 흘러가긴 하지... 비슷은 해요

13.자갈만한 다이아 반지 시종들이 입구에서 홀까지 일직선으로 길을 텄다. 벌써 결혼식 치르냐? 이게 버진로드도 아니고. 하지만 모두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던 일이긴 했다. 게가 말을 타고 들이닥칠테니까. 사람들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것 같다. 누가 약혼식을 하는데 여자가 말을 타고 달려와서 서로 인사하고 엣헴 제가 이 분과 결혼합니다 하고 말하겠어. 애초에 이게 무슨 의미를 가진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결혼을 약속할거면 서로하지, 왜 상관이라곤 전혀 없는 타인들을 불러다 결혼예정소식을 알려주는건지. 결혼식 때 부르던가, 약혼식마저 화려해야해? 알려줄거면 그냥 편지로 보내는 게 더 좋지 않냐? 문명인의 문명은 대체 어디로 버려놓고 왁자지껄 모여서 술이나 쳐드고 계시는지, 나는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초록색 암말에 탄 게가 홀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를 간소한 정장을 입은 이반이 따라오고 있었고, 귀족들의 입은 떡 벌어지고 있었다. 게는 드레스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프릴과 보석이 잔뜩 박힌 승마복을 입고서(이럴거면 드레스를 입는 편이 차라리 나을텐데) 그녀는 도도하게 말에서 내렸다. 저 말은 남부 에킨지 공작가의 신수...! 신수? 신수라고 저게? 저렇게 촌스러운 이끼색 암말이? 환장하겠네, 신수면 신수답게 날개나 뿔 정도는 달고 돌아다녀야하지 않을까. 그러고보면 이름도 신수치곤 묘하게 하찮았다. 니네 집 강아지냐? 대대로 신수를 기르는 가문이라 해도 조금 더 성의있는 이름을 지어줘야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사람들은 몰락한 에킨지 공작가의 마지막 직계가 이곳에 나타났단 사실과, 그 여자가 현존하는 제국 유일의 공작 뭐시기와 약혼한다는 사실에 흥분한 것 같았다. 또다시 귀족 중심으로 정세가 흘러가는것인가? 에킨지 공작가의 세력마저 이스틸라 공작가에서 흡수한다면, 앞으로 황제는 어떻게 대처할까? 사실 이 모든 것을 황제가 용인하고 진행된걸까? 아예 예언을 해라.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만 있는 공작은 '흥미롭다' 한 마디만 하며 멋대로 일을 밀어붙인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으면 몰락가의 여식이 아니라, 수도에서 제대로 된 영애 아무나 후려쳐서 결혼했겠지. 공작은 자갈만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품에서 꺼내 게에게 내밀었다. 수줍어하는 기색도 없이, 그녀는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물건인 듯 손을 뻗어 반지를 끼우게 했다. 모두들 두 청춘이 하나가 되자며 약속하는 순간에 눈이 팔렸다. 이반, 이반은? 이 순간 이 약혼을 가장 바라지 않을 사람을 찾아 헤맸다. 그는 크리마의 고삐를 쥐고 마굿간으로 돌아가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게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오른눈밖에 남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 눈으로 바라봤다면 그 시선의 양에 게가 분명 이반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이반은 사람들의 박수가 끝나갈 때쯤에야 발걸음을 뗐다. 그에게도 오늘은 새로운 시작의 날이다. 마음을 접는 나날의 시작.

오마이갓....... 진짜 너무 내취향이다 그놈의 계약결혼지긋지긋했는데 주인공이 뭔가 인외?인것까지너무좋아

14.방해와 질낮은 놀림 그리고 춤판이 벌어졌다. 모기처럼 느릿느릿 왱왱거리며 여러쌍의 남녀가 허여멀건 손을 붙잡고 빙글뱅글 돈다. 게는 자신과 공작에게 몰려온 사람들에게 억지미소를 지어주며 대화를 잇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보이는 공작에게 저지당했다. 제 약혼녀가 피곤한 듯 하여, 개뿔. 언제부터 황소의 뿔도 뽑아버릴만큼 활기가 넘치는 사람을 피곤한 사람이라고 호칭하게 된거지? 게도 그것을 아는건지 몰래 노려봤지만 공작이 게의 손목을 붙잡고 인적 드문 복도로 나가버렸다. 으음, 로맨티스트! 지랄하네. 게는 아마도 인맥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인맥과 지위와 부를 얻어 제 가문을 끝장낸 놈들의 숨통을 끊고 싶었겠지. 그 점은 마음에 들지만, 그런 것치곤 지금껏 뭔가 해낸 게 없어서 꼽다. 한 사람의 전사로써 원수의 목에 꽂아줄 단검을 준비하기라도 했나, 교활한 책략을 짜길 했나. 그냥 계약거리면서 노닥였을 뿐이다. 하지만 더 괴랄한 건 공작이다. 누구는 목표를 위해 꼴뚜기들과 시덥잖은 얘기를 하는 정성을 보여주는데 그걸 대놓고 망친다? 게가 내건 제안을 흥미롭다고 받아들여놓곤 제 스스로 그녀를 방해하고 있다. 글쎄, 어쩌면 그렇게 게가 차츰차츰 포기하고 망가진 인형이 되어 자기한테 완전히 의존하면 그때서야 흥미를 잃고 다른 희생양을 찾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무튼 지랄맞다. 마음에 안 든다. 로맨티스트네 뭐네 꺄꺄거리며 남들에게 허튼소리 하지말라고 눈초리를 주는 년들이나,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모르고 입만 꾹 다문 놈들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서로 결혼해서 애나 낳으면 딱이겠군. 그러고보면 그걸 노리고 온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북부의 공작에게 연을 대는 동시에 결혼하기에 알맞은 상대를 찾아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라, 그네들에게 있어선 좋은 전략이겠지. 자신은 싫어도 부모에게 억지로 끌려온 사람도 있을테고? “그래서 눈에 드는 며느릿감은 찾으셨습니까?” “네 아내가 될 사람인데 왜 나한테 묻는건지, 원 참. 너야말로 마음에 드는 여자는 없고?” “있지도 않고, 있다해도 결혼할 수 있단 보장도 없으며, 무엇보다 저는 아직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라. 아버지, 정말 그런게 중요할까요? 제 직책을 아시잖습니까?” “하, 네 동료 중에 절반이 멀쩡히 결혼한 걸 아는데? 직책을 문제 삼으려면 거기에 너무 열중한 자신을 탓해야지. 허튼 소리 말고 미소나 지으려무나. 이번에 찾지 못해도 최소한 사교계에 얼굴도장은 박아놔야 앞으로 편해질테니까.” “눈이라... 이미 지겹도록 굴리고 있지만...” 그러시겠지. 어느새 다시 홀로 돌아온 미라스였다. 이걸 아직도 못 찾았냐, 멍청이. 킬킬거리고 있으니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자식, 화났나본데? 그러나 내쪽으로 다가와 난동을 피우는 일은 없었다. 당연하다. 나는, 나는 산 자가 아니니까! 인간도 아니고! 모두가 볼 수 있되 알아채지 못하는 저주받은 물건. 초대 아스틸라 공작이 내가 어떤 물건인지 완벽히 파악은 못했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날 파괴할 수 없음을 알고 이렇게 높은 곳에 매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는가. 그 괴물놈도 날 묶어두는데 그쳤는데 저 애송이가 뭘 하겠는가? 깔깔 웃어대며, 정 신부를 못 찾겠으면 저기서 대걸레질이나 하는 여자(나탈리아였다. 첨언을 하자면, 게의 명령으로 이전부터 몰래 손님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나 꼬셔보라고 조언해줬다. 이왕이면 방금 실연답지 않은 실연을 당한 이반을 데려가라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양측에게 너무하지 않은가. 나는 내 초월적인 농담과 재치에 한참을 웃어댔다. 주위 인식도 못할만큼 웃고나니 이제 환청이라고 여기고 쉬기로 한건지 아버지의 만류에도 홀을 나가는 미라스를 볼 수 있었다. 내일오전까진 여기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실컷 놀려먹겠다.

15.질긴 명줄 인간은 야행성이 아니다. 9시를 넘기자 많은 이들이 마차를 타고 다시 돌아가려했다. 공작의 성에 손님이 묵을 숙소가 많지 않은 것도 있고, 이곳에 더 있어봤자 공작과 깊은 연을 맺진 못하리란 계산으로 보였다. 내일 이 곳을 떠나려는 이들은 대개 돌아갈 곳이 멀거나 다른 용무가 있는 이들이었다. 공작에게 친구가 있을리가 만무하니, 그 용무도 분명 공적인 일이겠지. 밤 11시가 되자 하녀들이 남은 이들에게도 방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벌써 끝이라, 어쩌면 이 놈들의 소음으로 성이 시끄러워지는 걸 조금이라도 막아보려는 공작의 수인걸까? 지금껏 봐온 공작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비단 사람뿐이 아니라, 그는 생명과 친하게 지내질 않았다. 그가 관심을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잘 가꾸어놓은 기사단도 기사의 시작이 남 생명을 뺏고 다니는 불한당이란 걸 생각하면, 그의 생명혐오증이 보통 수준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대체 왜 게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여전히 알 길이 없다. 정말 알 길이 없다. 사악한 게의 저주에라도 걸려버린 것도 아니고. 여하튼 홀은 차차 정리되기 시작했다. 음식은 식당으로, 화려한 천은 창고로 간다. 하인들은 흰 수건으로 이곳저곳을 박박 닦는다. 아까 봤던 춤과는 달리 재빠르게, 그러지 않으면 누군가 그네들을 죽이기라도 할 것마냥 절실하게 걸레를 움직이고 식기를 차곡차곡 쌓아 운반한다. 그마저도 끝이 나면 그들은 서로 내일은 몇 시에 일어나야하는지 공유하며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간다. 그러면 다시 적막이 펼쳐진다. 샹들리에에 비춰지는 황금색 인조 마석등마저 꺼지고 나면 그제서야 나는 오늘도 똑같은 날이었음을 체감한다. 왠일로 들썩였지만 사실은 똑같은 밤이 찾아오고마는, 다들 왁자지껄 떠들지만 내게만은 허락되지 않는, 그런 암담한 날이었음을 알고만다. 세상과 모험과 여행과 전우와 싸움과 유혈과 활기에서 격리되고 전리품으로써 수백년간 결박되어 점점 힘을 잃어가다 결국엔 초라한 쇠뭉텅이가 될 나라는 존재. 복수의 때는 언제지? 오긴 하는가? 이런 유약한 사고는 절대로 갖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애써 냉소라는 이름으로 치장해보는 분노와 질투. 지랄맞다. 참으로 지랄맞다! 천하를 호령하고 북구의 바다를 누비던 몸이 방구석에서 처량한 신세한탄이나 하게 만든 세상은 어딘가 잘못된게 맞다! 이런 신기의 용도조차 몰라보고 성 안에서 텁텁한 먼지나 마시게 하는 인간들은 잘못된 게 맞다! 공작이고 게고 싹 다 죽었으면 좋겠다! 돼지창자보다도 질긴 그 명줄들은 대체 언제나 끊길련지. "글쎄, 너보단 길 것 같은데." 그 목소리와 함께 나는 황금 사슬이 풀려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16.이단심문관 미라스 미라스였다. 자객도 아니고 검은색의 옷을 칭칭 두른 그는 로브의 후드 부분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방금까지 말한 게 네가 맞는가? 그 왜, 지랄 옘병할 것들, 하녀랑 하다 돼지창자에 목이나 감겨서 죽어버리라는 욕설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나를 인식했음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야밤에 몰래 찾아와 포박을 풀곤 대화를 시도할 것을 예상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오래간만의 (어쩌면 처음으로 해보는) 대화에 그가 질문을 했다는 것과 생각보다 입이 험하단 것도 잊고 되레 그를 추궁했다. [너는 정체가 뭐지? 무슨 수를 썼기에 나와 대화하는 게 가능한거지?] "그래서 네가 말한 게 맞는건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건지 자각은 하는건가?] "내게 욕설을 퍼부은 게 네가 맞냐고 물었을텐데." 이대로라면 대화는 영영 진전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기묘한 안광을 보아하니 차라리 그의 말에 먼저 답을 해주고 내가 묻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맞다면 어쩔테지, 젊은이?] "한가지만 더 묻겠다. 너는 무엇이 어떻게 만들었지?" [백아흔살먹은 노인이 바위만한 곰의 피를 마시고 자란 자작나무로 자루를 만들었고, 드워프 대장장이가 해가 천 번 졌다 뜰동안 벼린 쇠로 만든 날을 그 위에 붙였지.] "그 목적은?" [무기에게 호탕한 전사와 일평생 같이 지내며 짜릿한 전투를 이어나가는 것 외에 목적이 따로 있는가?] 나는 뺏겨버린 자긍심에 분노하며 대답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였다. 베어나가는 것이 인간이든, 크라켄이든 상관없다. 나를 휘두르는자가 부족의 안전을 위해 나선 용자든, 가족의 복수를 위해 나선 과부든 상관없다. 이 외날이 피로 흠뻑 물드는 그 날들이 내 최고의 날들이리라. 미라스는 이런 내 신조에 깊은 감명이라도 받은 것인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너는 피를 마시고 자란, 대의도 없이 살생과 학살을 위해 쓰인 야만족의 무기였군. 이제는 알겠다. 왜 네 목소리가 내게 닿았는지, 아버지께서 나를 굳이 이 멀고먼 북방까지 끌고오셨는지. 이 모든 게 신의 계시였던것이지. 혹시 이름도 알 수 있겠나?" [이름이라, 그대 문명인들은 그런 것에 집착하곤 했지. 나는 <내려찍는 것>! 부족에서도 가장 우수한 전사에게 수여되는 영광의 도끼! 그 찬란한 전설이 네 앞에 있는 것이다. 그 특별함에 항상 감사를 표하도록. 그럼 이제 네 차례다. 너는 누구지? 어떻게 내 말을 알아듣는거지?] "감사하고말고.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신 우리 주께 항상 감사를 표한다. 나는 미라스 예니제, 신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현혹하는 그릇된 이단과 거짓된 신앙을 격파하는 자! 신께서 내게 사악한 것들의 목소리를 듣는 재능을 주셨고 그것을 개화할 기회를 주셨기에 내가 너같은 사악한 마검, 아니, 도끼와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의문은 풀렸겠지? 그럼 이제 작별이다. 이곳에 묶여있던 것은 행복이었다고 느낄만큼 지옥에서 처절한 고문이나 받아라!" 미친 놈, 사이비, 광신도! 미라스의 두 눈이 신앙이란 이름의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걸 공작가에 들키면 어쩌려고 이러는걸까, 아니, 그런걸 신경쓰는 사람이면 애초에 오지를 않았겠지! 그는 품에서 가장자리가 굉장히 날카로워보이는 십자가를 꺼내더니, 거기에 입을 맞추곤 숨겨둔 금강석 덩어리를 내게 내리쳤다. 쾅! 힘이 어지간히 센건지 단순히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로 끝나지 않았다.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이 울렸고, 미라스는 천천히 네모난 덩어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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