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3/01/14 22:23:30 ID : uq7utBAqrxT
“왜 그랬어?” 수연이 물었다. 하지만 다성의 입에서는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본다면 그저 대꾸를 안한다고, 다시 말해 씹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수연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다성은 단지 남들보다 더 오래 생각하고 대답하는 사람일 뿐 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수연은 따듯한 캔커피 하나를 건네고는 기다리는 것이다. 다성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캔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있잖아, 하고 입을 열었다. “왠지 사람 이름을 부르기가 무서웠어.” 다성이 말했다. “왜 무서운 것 같아?”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수연은 말 없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럼 넌 그게 나쁘다고 생각해?” “무슨 뜻이야? 방금 나한테 왜 그랬냐고 한 건 너잖아? 그러니까...” 다성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말한 것에 스스로 놀라 말을 멈췄다. “미안, 화내려던 건 아니야.” “괜찮아. 그 정도는 화도 아니니까.” “일단 하던 얘기로 돌아오자고” 다성이 잠시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창 밖을 내다보자 수연이 말했다. “미안해. 나도 내가 이상하다는 거 알아.” 다성이 말했다. “이상하다고 한 적 없어. 사과는 이미 충분히 했고.” “그럼 뭐가 더 궁금한거야?, 바보같은 소리긴 하지만 난 이름을 부르는 게 무서워서 도망쳤어. 그것도 공연 도중에 말이야.” “그래서 연극도 때려치겠다고?” “그건 어떻게 알았어?...” 수연은 한숨을 쉬었다. 여러 번 대화가 오가고 잠시 후 다성은 그 때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어딘가에는 정말 그런 이름을 가진, 심지어 성격이나 외모도 닮은 그런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물론 나도 내가 하는 게 어디까지나 연극이고 공연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내 공연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야. 어쩌면 대본의 스토리나 대사가 마음에 안 들지도 모르고 말이야. 나도 알아.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 다성이 잠시 말을 멈추자 수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계속 얘기해봐. 듣고 있어.” “처음에는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 같은 건 무시하고 평소대로 하려고 했어. 정말로 그러려고 했다니까. 비상구 쪽으로 미친 놈처럼 뛰어가려는 생각 같은 건 절대로 안 했어. 그런데 연기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무서워지는거야. 또 다른 어딘가의 내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나 자신이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어. 세트장이라던지 배역이라던지 하는 것에서 말이야.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더라고. 그런데 어떻게 남의 이름 같은 걸 말할 수가 있겠어?” 다성은 질문하듯 말했지만 그게 진짜 질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수연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응 그렇구나.' 하고 한 마디 대꾸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역시 미친 놈이라고 생각하겠지? 왜냐하면 난 그 때 정말 미친놈 같았...” 다성이 말을 하다 말았다. 아니, 다 하기 전에 수연이 막아섰다. “진짜 미친놈은 자기 입으로 미쳤다고 말 안해. 자기는 절대 안 미쳤다고 하지.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 걸? 다들 이해해 줄 거야.” 수연이 말했다. 다성은 조금 안심하면서도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그런 깽판을 쳤는데도?” “그래도 괜찮아. 누구에게나 살짝 미칠 때가 있는 법이니까. 따지고 보면...” 어느새 기울어가던 창가의 그림자가 수연의 얼굴을 반쯤 덮었다. 그리고, “우리도 다 미친놈들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남들 앞에 서서 태연하게 '다른 사람 행세' 를 할 수 있겠어?” 수연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2 이름없음 2023/01/14 22:23:46 ID : uq7utBAqrxT
그는 매일 밤 달을 올려다 보았다.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린 날에도, 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는 밤에도 그는 어김없이 달을 보았다. 달이 보이지 않는 날에는 달이 있을 것 같은 곳을 보았다. 하루는 문득 그가 보는 것이 달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뭘 보고 있어, 하고 물어보니 그는 무심한 얼굴로 '아무것도' 하고 대꾸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그 눈에는 분명 초점이 잡혀있었다. 나는 달을 보는데, 하고 말하자 그는 잠시 시선을 내게 옮기더니 '뭐하러 그런 걸 봐?' 하고 말했다. 마치 이상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나라는 듯이. 그는 한동안 다시 밤하늘을 올려보다가 느닷없이 사과를 했다. “미안, 나는 달에는 별 관심이 없거든.” 그 말은 어딘가 '달은 나 말고도 봐 줄 사람이 많잖아.' 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문득 궁금해져서 슬며시 옆으로 다가가서 같은 방향을 올려다 봤다. 달, 그리고 별인지 뭔지도 모를 점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 말고는 없었다. “뭐하는거야.” 너무 얼굴을 바짝 댔는지 그가 깜짝 놀라서 옆으로 물러서듯 움직였다. “그냥, 거기선 뭐 다른 게 보이나 해서.” 그는 여전히 달도 아니고 별도 아닌 무언가를 보면서 말했다. “너야말로 달에서 뭐라도 보이는거야? 맨날 보면서 질리지도 않는 걸 보면 말야.” 그렇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야말로 달이 어디에 있건 무슨 색을 하고 있건 아무 관심도 없었다. 나는 턱을 괴고 말했다. “언제 봐도 똑같잖아요. 나는 그런 점이 좋아요. 언제나 한결 같은.” 그는 뭐가 웃긴지 피식 웃었다. “소나무처럼 말이지?” 아니, 그건 소나무가 아니라.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말도. 그 사람도 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어딘가를 바라보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3 이름없음 2023/01/14 22:23:58 ID : uq7utBAqrxT
정부에서 정한 이 업종의 정식 명칭은 생활 무슨 교정소다. 중간에 들어가는 '무슨'에 실제로는 어떤 단어들이 들어가는지는 철우의 사무실 어딘가에 잠복중인 서류에 적혀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철우를 포함해서 아무도 없다. 다만 철우가 항상 '생활 수리센터' 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10명 남짓한 직원들도 모두 그렇게 부른다. 개중에는 그게 회사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그건 어디까지나 철우가 멋대로 붙인 별명일 뿐이다. “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오셨네요.” 철우가 하품을 하며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에 쌍커풀이 잔뜩 잡힌 야간 경비원이 인사를 했다. 철우는 “예, 오늘은 좀 일이 많아서요. 상담받을 분도 있고” 하고 대꾸했다. “밤새 별 일은 없었죠? 특이사항이라던가 있어요?” “그다지 없었습니다. 졸려 죽을 뻔한 거만 빼면요” “그래도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덕분에 산업재해비는 안 나가도 되겠네요” “에이, 어차피 무슨 일 생기면 국가 보조금으로 나올텐데요 뭐” “그럼 교대하는 분 오실 때까지 조금만 더 수고해주세요.” 꾸벅 하고 인사하는 경비원을 뒤로하고 철우는 사무실에 들어갔다. 불을 켜자 사무실 겸 상담실을 겸하고 있는 소박한 방이 보였다. 어디선가 쿵쿵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철우는 무시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부재중 전화를 처리하고 상담 예약 확인 전화를 돌리는 둥 이것저것 하고 있다보니 어느새 다른 직원들도 하나 둘 사무실 앞을 지나며 철우에게 인사했다. 10시가 조금 지나자 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에서 녹차를 한 잔 타서 가져왔다. 잠시 후 사무실 문 앞에서 어색하게 머뭇거리는 남자를 보고 철우는 큰 소리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감색 코트를 걸친, 어딘가 교사같은 외모의 남자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들어왔다. “저, 상담 받으러 왔는데요.” “예. 잘 오셨습니다. 여기 앉으세요.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을텐데 차라도 한 잔 하시죠. 방금 우린거라 따듯한 겁니다.” 철우는 은인이라도 온 것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남자는 차를 한 모금 마시는가 싶더니 다시 내려놓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철우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기다렸다. 물론 처음 들어서자 마자 바로 본론을 시원시원하게 꺼낸다면야 철우도 상대도 편하겠지만 지금까지 그런 고객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이야말로 비정상일 게 분명하다. 그러니 철우에게 상대가 심호흡을 하고 입을 우물거리면서 망설이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 정도는 양치질을 하고 턱수염을 깎는 것 만큼이나 일상적이고 당연한 과정이었다. 철우가 '괜찮습니다. 천천히 말하셔도 됩니다.' 라던가, '망설여지시는 게 당연합니다.' 같은 말을 서너 차례 하고 나서야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죠, 실은 제 조카가...” 남자는 다시 말끝을 흐렸지만, 이미 하기 시작한 이야기를 다시 트이게 하는 것 쯤은 철우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사실 내용은 굉장히 간단했다. 늘 그렇듯이. 그에게는 현월이라는 이름의 조카가 있다. 그리고 그 조카는 정상이 아니다. 남자의 말을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한 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계약서입니다. 꼼꼼히 잘 읽어보시고 이 쪽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남자는 종이를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결심한 듯 펜을 들었다. “꼭, 저희 현월이를... 고쳐주십시오.” 철우의 손을 잡기라도 할 것처럼 간절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몇 번이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서야 돌아갔다. 남자가 떠나고 조금 지나서는 한 아주머니가 전에 치료했던 아이를 데리고 찾아왔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는 절대 사양하지 마시라며 과일 바구니까지 내미는 모습에 철우는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비록 정작 당사자이자 수혜자인 그녀의 딸은 미동도 없이 무표정하게 앉아만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조금 뻣뻣해보이는 것 정도는 사소한 부작용일 뿐이다. 정말 얌전하게 고쳐졌구나 하고 철우는 생각했다. 그건 그 아이에 대한 기특함이면서 또한 자신의 실력에 대한 감탄이기도 했다.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철우는 평소처럼 무시하려다가 같이 온 다른 손님이 그 소리에 관심을 가지는 걸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신경쓰지 마세요. 위층에서 공사중이라, 그 소리일 겁니다 아마.” 물론 '절대로 댁의 아드님이 벽에 머리를 부딪치는 소리 따윈 아니랍니다' 같은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며 철우는 자물쇠가 달린 철문을 하나 둘 차례로 지나갔다. 메아리처럼 쿵쿵 울리는 소리 뒤편으로 점차 고함과 비명이 뒤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어떤 병원과 치료소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문제아들이 고쳐지는 소리였다. 철우는 입꼬리가 저리도록 입술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했다.

4 이름없음 2023/01/17 23:15:59 ID : uq7utBAqrxT
바퀴가 둔탁하면서도 묵직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그와 동시에 몸 전체가 앞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벌써부터 온몸이 움찔움찔 했다. '자 다시 멈추세요' 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브레이크를 밟았다. 벌써부터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처음 치고는 잘하시네요.” 무심코 옆을 보니 강사가 미리 준비하기로 한 듯이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진심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이번에는 속도를 좀 더 내볼까요? 여차하면 제가 멈출 수 있으니까 걱정 마시고요.” 그래도 강사가 자신감 있게 말하는 걸 들으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럼, 10분 정도면 괜찮을까요?” “네 그럼요. 그 정도면 사고의 위험은 없으니까요. 자신감을 가지고 해봅시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다이얼을 천천히 돌렸다. 확실히 리미트가 걸려있다는 걸 초보자인 나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저항감이 있었다. 0에 맞춰져 있던 눈금이 맞춰져 있던 다이얼을 아주 미세하게 회전시키자 웅 하는 작동음 같은 것이 들렸다. 언뜻 보기에 주변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대형 시계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지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잠시 후 다시 속도를 내려 원래 상태로 돌아왔을 때는 차 안의 시간과 차 밖의 시간에 5분 정도 오차가 생겼다. “정말 잘하셨어요. 한 번 더 연습해볼까요?” “혹시 반대로도 해볼까요?” “아뇨, 그건 아직이에요. 좀 더 연습해보고 나서 해야죠.”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속도를 높였다.

5 이름없음 2023/01/17 23:57:27 ID : uq7utBAqrxT
그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책상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사실상 끌어안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둘은 한동안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였다. “XX, 지금 뭐하는거야?” 뻔하다면 뻔한 말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남자에게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은 지난 주에 나왔던 드라마 떡밥 뿐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왜 그래? 불만이라도 있어?” 하고 남자가 말하자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여전히 말은 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계속 대화라기 보다는 스무고개 같은 무언가가 이어졌다. “나하고 말하기 싫어진 거야?” 도리도리 “그럼 말을 못하겠어?” 끄덕끄덕 “종이에 적을 수는 있겠어?” 도리도리 여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턱짓으로 책상다리를 가리켰다. 어쩌면 책상다리가 아니라 자기 팔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했는데, 어느 쪽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남자로선 어느 쪽이라도 의미는 알 것 같았기에 그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의자에 붙어버린거야?” 도리도리 “그럼, 119라도 부를까?” 도리도리도리도리 “알았어 울지마, 전화 안할테니까. 그보다 식사는...” 도리도리 “아니, 대체 언제부터...” .... “아니 미안, 대답 안해도 되니까. 뭐 좀 먹을래?” 끄덕끄덕끄덕끄덕 남자는 냉장고에서 전날 먹다 남은 피자를 꺼냈다. 적당히 데우니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여자는 여전히 책상다리를 끌어안은 채로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살짝 뜨거우니까 조심해. 아, 하고.” 남자는 작게 자른 피자 조각을 여자와 자기 입에 번갈아가며 넣었다. 멀쩡한 식탁을 두고 그 아래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묘하긴 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식사를 끝내고 나서 남자는 여자의 팔을 떼어내려고 오만가지 방법을 궁리해냈다. 하지만 분명 접착제 같은 게 발린 것도 아닌데도 떼어내려고 할 수록 여자의 몸이 책상다리에 찰싹 들러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마치 '뭐하는 거야, 힘 좀 써봐' 하고 말하는 듯 끙끙대는 소리만 냈고, 남자도 그러기는 매한가지였다. 결국 둘 다 지쳐서 뻗었다. 물론 정말로 바닥에 뻗은 것은 남자 뿐이었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앉아서 잘 수는 없기에 결국 책상 다리를 분리하고 나서야 여자도 드러누울 수 있었다. 비록 식탁은 완전히 기능을 상실해버렸지만 그래도 덕분에 두 사람 다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다음날에도 여전히 여자는 분리된 책상다리를 꽉 껴안고 있었다. 당장 문제가 한 둘이 아니었다. 어떻게 씻을 것이며 어떻게 밖에 나갈 것인가. 결국 병원에 가야한다는 데 여자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밖에 나가기 전에 씻고 화장까지 꼭 해야한다고 여자가 고집하는 바람에 또 한 번 난관이 찾아왔다. 여자가 손을 전혀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씻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까지도 남자가 대신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세 시간 동안이나 시행착오를 반복한 후에야 두 사람은 외출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여자는 전혀 걸을 수 없고, 집에 휠체어도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남자가 여자를 안고 차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나마 차를 가까운 곳에 주차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여자는 책상다리를 꼭 안은 채 그 심정만큼이나 복잡한 얼굴로 번데기처럼 안겼다. 남자는 병원에서 기다리는 동안 얇은 이불로 여자를 가려주었는데, 그건 여자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함께 진찰을 받으러 들어갔다. 이불을 들추고 책상다리를 보여주자 의사는 청진기를 대보기도 하고 여러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다가 의자를 가져왔다. 의자는 대체 왜. 이윽고 의사가 의자를 들어 책상 다리에 갖다 대자 찰칵 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우그적우그적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와 책상 다리가 마치 벌레가 꿈틀거리듯이 움직여대기 시작했다. 여자는 반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눈을 끔벅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점점 몸이 바싹 말라가는가 하면 책상 다리는 점점 흐물흐물해졌다.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책상 다리에 어느새 팔다리가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입이 없어졌다. 남자는 미친듯이 소리 질렀다. “병원에서는 조용히 해주세요.” 간호사가 꾸중하는 소리에 그제서야 남자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 내가 지금 헛것을. 그렇지만 여전히 눈 앞에서는 여자가 갈색으로 변해가고 책상 다리에는 눈코입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나마 좋은 점이라면 적어도 책상다리가 떨어져 나오긴 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미쳤나요?...”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몸 속 어딘가에서 짜내듯 말했다. “아니요, 이건... 미치기 직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누군가가 말했다. 조금 전의 간호사인가? 아니, 애초에 정말 그 사람이 간호사가 맞았나? 의사가 말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책상다리를 안고 있던 여자가? 아니면... 남자는 이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눈 앞에는 책상다리와 여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이 책상 다리거나 혹은 여자인지 더 이상 남자는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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