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인간 이름 확실히 뺐지?]
[ㅇㅇ]
[그럼 됐고]
[언제 어디서 만나게?]
[이제 과제도 끝이라 시간 충분해서]
[난 언제라도 상관없음]
[강남역에서 보자]
[맛있는거 사줄게]
HYNCRST2023/01/22 02:51:43ID : du8i3DtgY09
나는 고민 없이 바로 답장을 보냈다.
서민호가 사주는 밥이라면 무조건 정답이니까.
[30분 후에 출발함]
[11시 40분에 만나]
HYNCRST2023/01/22 02:51:59ID : du8i3DtgY09
폰을 끄고 나는 즉시 욕실로 들어가 빠르게 몸을 씻었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방으로 들어가 머리를 말리고, 깔끔하게 빗질을 한 후에 가장 세련된 옷과 은색 손목시계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어, 어디 나가?”
“응. 형 만나러.”
“그래. 잘 다녀와—”
한서월은 형이 누구인지도 묻지 않고, 작별 인사를 했다. 여전히 넷플릭스 드라마를 고르고 있었다. 사적인 관계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HYNCRST2023/01/22 02:52:15ID : du8i3DtgY09
“한서월은 쿨하게 집을 지켜주도록 하지.”
참견하기 좋아하는 인간 같은 대사를 친 유령은, 아무것도 참견하지 않고 집을 나가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만화 카페에서 살았다고 했던가.
HYNCRST2023/01/22 02:53:02ID : du8i3DtgY09
나는 일일 퀘스트와 레진을 쓰는 것까지 전부 끝내고 난 후에 스마트폰의 게임을 껐다.
갑자기 생각난 것이지만, 원래 씹덕이란 인간들은 ‘창문을 반만 닫아 주세요’는 일본어로 말하지 못하면서 ‘우리들의 꿈은 여기에 있으니까 모두 힘내자’는 순식간에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씹덕들이 일본어를 잘 한다는 자신감에는 근거 따위 없는 것이다.
HYNCRST2023/01/22 02:53:19ID : du8i3DtgY09
「이번 역은, 강남, 강남 역입니다—」
「まもなく、江南、江南駅ですー」
차라리 지금 들리는 안내 방송이 방구석 오타쿠들보다 일본어를 훨씬 잘 할 거라 생각하며 내리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출입문이 열립니다.」
HYNCRST2023/01/22 02:54:06ID : du8i3DtgY09
‘나는 또 왜 이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무래도 기분 나쁜 혈육을 오래간만에 만나려니 온갖 잡생각이 든 모양이다. 나를 밥으로 사려고 하는 거냐며, 날 모독할 셈이냐고 꾸짖기에는 너무 맛있는 외식이니 어쩔 수 없지만 약간 귀찮은 건 사실이다.
순백의 티셔츠 위에 약간 오버핏인 순백의 셔츠를 걸치고, 새까만 바지와 은색의 3만원짜리 손목시계를 착용한 남고딩이 개찰구를 통과했다.
HYNCRST2023/01/22 02:54:27ID : du8i3DtgY09
—삑.
밖으로 나온 서유현의 눈앞에는,
“왔는가, 동생이여.”
형이라고 불러주기엔 좀 많이 한심한 대학생 서민호가 손을 흔들었다.
HYNCRST2023/01/22 02:54:44ID : du8i3DtgY09
“……에휴.”
“뭐야, 왜 갑자기 한숨?”
유일하게 봐줄 거라고는 키가 185센티미터인 점과 평균보다 약간 나은 외모뿐인 인간이 나를 내려다본다. 저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끼자 익숙한 귀찮음이 느껴졌다.
“아무튼, 오늘은 이 형이 마음껏 쏠 테니 감사하며 떠받들도록.”
“빨리 데려가기나 해.”
오케이. 저 생각 없어 보이는 밝은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이 뒤집혔던 게 떠올랐다. 한동안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았던 탓에 잊어버린 익숙한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HYNCRST2023/01/22 02:54:58ID : du8i3DtgY09
“전역하고 나서 톡 하나 안 보내지 않았었나.”
“복학하고 나서 여러가지로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었어. 유현이, 같이 안 놀아줘서 삐졌어?”
“그 말투 한번만 더 쓰면 집에 간다.”
넵. 서민호는 곧바로 얌전해졌다. 하지만 나는 기대하지 않았다. 한 10분 정도만 지나면 원래대로 날 놀려댈 게 뻔하니까. 멀쩡하게 작동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HYNCRST2023/01/22 02:55:09ID : du8i3DtgY09
“그나저나, 그 조별과제 잠수 탔다는 인간이 언제부터 빠진 건데?”
“아마 기억상으로는… 초반까지는 성실히 참여했던 것 같은데 중간에 중요한 부분 맡기고 난 후부터 연락이 안 되더라.”
“죄질이 아주 나쁘구만. 지금도 연락 안 되는 거고?”
“1이 사라지지가 않네요~”
목소리는 웃고 있었지만 표정은 열불이 나는 듯 입가가 비틀려 있다. 서민호가 보여준 폰의 카톡 창에는 수많은 노란 메세지들이 1과 함께 쌓여 있었다.
HYNCRST2023/01/22 02:55:19ID : du8i3DtgY09
“솔직히 마지막에, 마지막에라도 연락 받아서 미안하다고 하면 이름 정도는 넣어주려고 했거든?
근데 마지막 제출 시간까지도 연락이 없더라. 그래서 그냥 이름 빼버린 채로 제출 완료.”
“잘했어.”
서민호는 거리를 걸으며 번화가 쪽으로 계속 향했다. 익숙한 길인지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HYNCRST2023/01/22 02:55:34ID : du8i3DtgY09
“수 일 동안 커피랑 몬스터 빨아제끼면서 불철주야로 작업하게 만든 대가는 치뤄야지, 안 그러냐?”
“인정.”
자세히 올려다보니,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여전히 용서를 할 수가 없는 듯이 뭔가 중얼거리고 있다. 오랜만에 서민호가 딱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HYNCRST2023/01/22 02:55:45ID : du8i3DtgY09
“그래서 밥은 어디서 먹을 건데?”
“이 근처에 괜찮은 수제 돈까스집이 있거든.”
“오…”
“걱정하지 마. 형이 데려간 곳들 중에 맛없는 데 하나라도 있었어?”
아마도 없었다. 서민호가 유현을 데려간 곳은 전부 하나같이 맛집이었고, 유현의 취향마저도 완전히 저격했으니까. 어떻게 그런 곳들만 콕콕 집어서 찾아내는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HYNCRST2023/01/22 02:55:56ID : du8i3DtgY09
“어, 도착했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민호는 어느 건물 앞에서 멈춰섰다. 하얀 흑백의 간판 위에, 깔끔한 글씨로 [ 伊沢—いざわ ] 라고 쓰여 있다. 간판 오른쪽 구석의 [ 수제 돈까스 전문점 이자와 ] 가 눈에 들어온다.
안으로 들어가자 깔끔한 인테리어의 테이블과 의자들이 보였다. 점심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이 좀 있었다. 서민호가 이끄는 대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자 직원이 메뉴판 두 개와 물병을 가지고 왔다.
HYNCRST2023/01/22 02:56:09ID : du8i3DtgY09
“자, 마음껏 고르도록.”
멋진 척을 시작한 혈육을 무시한 채로 나는 메뉴판을 넘기기 시작했다. 가장 괜찮아 보이는 카레 돈까스와 우동 세트를 고른 뒤 서민호에게 말했다.
“카레 돈까스 우동 세트 먹고 싶어. 사이다 시켜줄 수 있어?”
“동생이라서 특별히 해 주는 거다?”
HYNCRST2023/01/22 02:56:22ID : du8i3DtgY09
서민호는 바로 호출 벨을 눌렀다. 직원이 주문을 듣기 위해 다가오자, 서유현이 익숙하게 봐 온 사회성 있는 듯한 인싸의 태도로 말했다.
“카레 돈까스 우동 세트 하나하고, 등심 돈까스 우동 세트 하나랑 사이다랑 콜라 각각 하나씩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서유현은 절대로 따라할 수 없는 저 여유로운 미소와 목소리 뒤에, 이토록 사람을 열받게 하는 본성이 숨어 있으리라고 직원이 예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HYNCRST2023/01/22 02:56:46ID : du8i3DtgY09
“동생 놀려먹는 거 참 좋아하는구나…“
“그래도 형밖에 없지? 밥도 사주고 말이야.”
내가 한탄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자, 변함없이 서민호가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엔 따지고 들지 않았다.
이제 가족이라고 할 만한 유대가 있는 사람은 형이랑 여동생 뿐이었으니까.
HYNCRST2023/01/22 02:57:02ID : du8i3DtgY09
“그러고 보니 현서 만나러 통 못 갔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
“지난 주에 가 봤어. 평소처럼 잘 지내고 있더라.”
“…다행이다.”
서현서의 이야기가 나오자 통통 튀던 태도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계속 이어질 듯한 침묵을 깬 것은 직원이었다.
HYNCRST2023/01/22 02:57:17ID : du8i3DtgY09
“주문하신 카레 돈까스 우동 세트, 등심 돈까스 우동 세트, 사이다와 콜라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은 식탁 위에 음식과 음료를 올려놓고선, 나와 서민호의 자리에서 떠나갔다. 나는 젓가락을 집으며 말했다.
HYNCRST2023/01/22 02:57:31ID : du8i3DtgY09
“잘 먹을게.”
“많이 먹어. 적어도 180은 넘어야지?”
“신발 포함하면 181이야!”
다시 사람 속을 긁어놓는 평소의 태도로 돌아온 혈육을 뒤로하고, 나는 밥을 먹는 데 집중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일본식 카레라이스 위에 올려진 돈까스 조각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HYNCRST2023/01/22 02:57:44ID : du8i3DtgY09
“확실히. 맛있긴 하네…”
“그렇지?”
맛있었다. 한순간이나마 서민호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까지 드는 맛이었다. 밥도, 카레 소스도, 고기도, 우동 면과 국물도 전부 완벽했다. 확실히 맛집 고르는 능력은 인정해 줘야겠구나.
—띠링.
HYNCRST2023/01/22 02:57:52ID : du8i3DtgY09
기분 좋게 생명 유지 활동을 완료하려는 도중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폰에서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무슨 일이지. 이런 시간에 갑자기 날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폰을 켰다.
전원이 켜졌고, 알림이 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