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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13살 겨울이었다. 중학교 올라간다고 신난 나는 이제 완전히 다른 컨셉을 잡고 싶어서 이사 가자고 졸랐어.
결국 엄마는 승낙하셨고 아빠만 허락하시면 됐을 때였어. 당시엔 아빠가 출장 나가셔서 돌아오시는 토요일에 물어보면 될 일인데, 나는 또 너무 성급하게 엄마 허락을 받자마자 전화를 했어. 아빠는 회의 중이니까 못 받으셨고. 계속 전화를 안 받으시니까 꽤 짜증나서 폰을 침대에 버려두고 있었던 것 같아. 무음인 채로.
그날이 금요일 밤이었고, 나는 그대로 폰을 안 만지고 엎드려 잤어. 기쁨과 짜증이 조금씩 섞인 채로.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빠가 와 계셨고, 이사를 가자고 조르는 동안 또 1시간이 지났고... 그렇게 오후까지 내 폰은 여전히 침대에 방치된 채 놓여 있었다.
근데 그러는 동안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온줄 알아? 마흔 통임. 시1발 같은 번호로 마흔 통이나 와 있었다고. 그때 알아차려야 했음. 발신자는 단단히 미친놈이구나... 하고.
하지만 진짜 뻔한 레파토리같이 나는 그냥 어지간히 급한가보다~ 해서 전화를 걸려고 했어. 근데 그 사람한테서 먼저 전화가 오데? 좀 소름이었는데 어쨌든 받았음.
"어~ 00아! 너 이사 가...?"
내가 목소리 구별은 잘 해서 바로 알았다. 별로 안 친했던 친구였어. 왜 전화했지? 싶을 만큼. 근데 그때는 뭐 같은 반이기도 하고 하니까 그냥 들었음. 걔 하는 말이 대충 이사 가면 어디로 가는 거냐, 언제 가냐, 나도 같이 가고 싶다 이랬어.
어릴 때는 분간이 잘 안되잖아? 근데 그때는 진짜 의식이 명확했음. 얘가 내가 이사간다는 거 어떻게 알았지? 하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어. 놀라면 말 더듬는다는 게 뭔지 알게 되더라. 그래서 말 더듬으면서 아, 아니?? 이럼.
피융신ㅜㅜㅜ... 그때 내가 말수도 별로 없는 찐따였어서 그런 소문도 안 돌았고, 누구한테 그런 얘기 해준 적도 없었고 했어. 했는데... 그 말은 내가 이걸 인정하는 꼴이 되는거잖아. 그냥 뭐라는거야~ 하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암튼 걔가 음... 그래? 알았어. 이러면서 툭 끊어버림. 나도 개도 정신이 없었던 거지.
문제는 다음날이었어. 그러니까 일요일. 엄마는 친구분들이랑 만나러 나가시고, 아빠도 갑자기 일이 잡혀서 일하러 가셨음. 집에 혼자 있는 상태인 거야.
평화롭게 본진 영상 시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앞에서 쾅 소리가 났음. 옛날 집이 빌라였거든? 우리 앞집인가 싶어서 그냥 있었는데, 다시 한 번 쾅. 하고 뭐 떨구는 소리가 남.
개무서워서 학교에서 배운대로 아무도 없는 척 하고 가만히 있었어. 그러니까 그 뒤로 잠잠해지더라. 그러고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길래 그 유리구멍 알지? 그걸로 밖을 쳐다봤는데
누가 계단을 파바바박 하면서 내려가고 있더라.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있겠는데 왜 이렇게까지 달리지? 싶을 수준이었어. 진짜 어디 늦는게 아니면 굳이? 할 정도로.
근데 우리 빌라에는 아이라고는 거의 나밖에 없었고... 살짝 작은 체구였음. 그래서 이사라도 왔나? 했지. 아 왜이렇게 멍청했냐 나자신.
그 뒤로 이사할 때까지 집에서는 아무 일 안 일어나더라고. 대신 꼭 하루에 한 번씩 걔한테서 전화가 왔었음. 뭐 하냐, 무슨 일 없냐, 가족은 괜찮냐 하고. 나는 걔랑 내가 베프가 되어가는 줄 알았다. 말했잖아, 내가 찐따였다고.
암튼 그러고 한 달이 흘러서 방학이 됐음. 우리 가족은 이사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애들이랑 작별인사 하려고 편지를 쓰고 있었어. 사실 친구들이라고 해봤자 저학년부터 쭉 올라온 한두 명이 전부긴 했지만. 다 편지를 쓰고 마지막으로 걔(불편하다. A라고 할게.)한테도 편지 쓰기를 마쳤어.
그렇게 약속을 잡고 편지를 하나하나 돌렸고, 마지막으로 A랑 만나는 날이 됐어. A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나한테 인형을 줬고, 진짜 기뻐서(어쨌든 선물이니까) 고맙다고 100번은 말했던 것 같아. 말수도 별로 없는 애가 그랬던 거 생각하니까 A가 사교성이 좋긴 했나보네.
A가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니까 방에 놓고 절대 버리지 말라고 했었다. 순진한 나는 그걸 또 믿고 절대 안버린다고 결심함. 근데 중요한건 내가 집에와서 포장을 안뜯어버렸고, 그래서 엄마가 쓰레긴줄 알고 그냥 버린 거야. 내가 그날 펑펑 울면서 새로 사달라고 몇 번을 떼썼어. A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걸 말도 못하고... 진짜 다행이었지. 거기 카메라 들어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나중에 A가 너 이거 뭐야? 하면서 녹화본 안보내줬으면 손절 못칠뻔했다.
A의 행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 그 어린애가 친구 따라가고 싶댔는지, 어떻게 졸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를 같은 곳으로 배정받았어. 거기서 A와 나는 끝과 끝 반이었지. 유독 친구를 못 사귀던 나는 쉬는시간마다 A랑만 놀게 되었고, 그 때문에 중1은 아예 친구 사귀는 걸 포기했다.
그때 나한테 소문이 하나 돌았었는데, 아니 시1발 내가 정신이상자라는 거야. 허공에 대고 소리지른 적도 있었고 뭐 헛소리하고 그랬다고 하데. 뭔...ㅋㅋ 나는 그런 짓 한 적도 없었고 학교나 학원에서는 쉬는 시간 틈틈이 A랑 연락하거나 놀기만 했었는데.
그때 거의 모든 애들이 나를 꺼려하고 내 자리에 안 오려고 했음. 언제부터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내가 겨우 용기내서 아니라고 하니까 증거를 보여달래. 영악한 것들이. 심지어 그냥 걷다가도 나랑 부딪히면 몸을 털었음. 소문 하나때문에 그럴 수 있나 할 정도로 진짜 너무 소름끼쳤다. 반에서도 잘 안 나가려고 했고.
대신 A가 우리 교실로 찾아오기 시작했어. 그때 위안이 된 게 A밖에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A가 저런 애들 신경쓰지 말라고 해줬는데 그 말 하면서 머리 쓰다듬던 촉감이 아직도 생생해. 너무 고마워서 기억해두고 있었는데 그게 제일 기분나쁜 기억이 될 줄은 나도 몰랐어. A한테도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지만 A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음. 지금 보면 사람 하나를 망치려고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어.
어쨌거나 A는 그럴수록 나랑만 있게 됐고, 나도 A에 대한 집착? 우정? 이 좀 더 강해져서 내가 A를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것 같아. 참고로 나랑 A는 둘 다 여자고. A가 커밍아웃을 하면서 나랑 사귀고 싶다고 고백을 했고... 나는 얼떨결에 받았음. 오히려 사귀니까 좀 더 당당해지더라. 난 레즈인 것 같다, 근데 뭐 어쩌라고. 이렇게.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소문+레즈 이 상태가 합쳐져서 아예 돌이킬 수가 없어졌음.
아무튼 그해 가을에 우리는 드디어 100일을 맞았어. 그러고 보니 그동안 A를 한 번도 집에 안 데려간 게 생각나서 100일에는 우리 집에서 놀기로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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