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스레드
북마크
◆a4MjfSK6rwH 2023/11/05 07:09:01 ID : Ai785Wo1A1y
이름없음 2023/11/05 15:41:11 ID : A5f9cpRwnyI
헐 드디어 와줬구나 ㅠㅠㅠ 엄청 기다렸어!!
◆a4MjfSK6rwH 2023/11/05 18:18:32 ID : Ai785Wo1A1y
기다려줘서 고마워. 그럼 이야기를 마저 해볼게.
◆a4MjfSK6rwH 2023/11/05 18:22:08 ID : Ai785Wo1A1y
자, 그럼 다시 돌아가 볼까? 강당으로 집합을 당해서 학주에게 윽박을 듣고, T로부터 ‘지하 2층에 머리가 매달려 있었다’다는 말을 들었던 그 날로. 그러고도 말없이 바로 집으로 내달려왔다가 잔뜩 성난 고모를 마주쳤던 그 순간으로 말이야.
◆a4MjfSK6rwH 2023/11/05 18:22:49 ID : Ai785Wo1A1y
괜히 찔리는 마음에 ‘내가 뭘?’ 하고 반박했지만, 굳은 고모의 표정은 풀리질 않았지. “신당에 다녀왔는데 선녀님이 니가 오색기를 잡으려고 날뛰고 있다시잖아!” ‘아.. 또 이건 뭔 개소리일까….’ 나는 급격히 피로해져서 미간을 꾹꾹 눌렀어.
◆a4MjfSK6rwH 2023/11/05 18:25:24 ID : Ai785Wo1A1y
’선녀는 나무꾼 여친 아니야? 연못에서 목욕하다가 옷털린 게 열받아서 갑자기 나한테 억하심정이라도 들었대?‘ 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도 함께 꾹꾹 누르면서 말이야.
◆a4MjfSK6rwH 2023/11/05 18:26:36 ID : Ai785Wo1A1y
“고모. 나 피곤해. 무슨 말 하는 건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당장 잠들어버릴거야.” 고모는 건조하게 말하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어. 그리고 약간 차분해진 말투로 설명을 덧붙여주기 시작했다.
◆a4MjfSK6rwH 2023/11/05 18:27:43 ID : Ai785Wo1A1y
“고모 다니는 신당 알지?” “응” 고모는 지금까지도 한 신당에 꾸준히 다니고 있는데, 말이 신당이지 그냥 무당집? 그런 곳이었다. 할머니가 신실한 불교신자이신터라 그런 고모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욕지거리를 내뱉곤 하셔서 기억하고 있었지.
◆a4MjfSK6rwH 2023/11/05 18:28:11 ID : Ai785Wo1A1y
“거기가 그냥 신당이 아니라 애동같은 분들에게 굿당으로 빌려주기도 하는 곳이거든.” “애... 뭐?” 일개 고교생에게는 참으로 복잡한 세상의 용어였다. 고모는 잠시 주춤했다가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어.
◆a4MjfSK6rwH 2023/11/05 18:28:42 ID : Ai785Wo1A1y
대충 그녀의 말에 의하면 갓 신내림 받은 제자들을 ‘애동’이라 부르는데, 이 ‘애동’분들의 능력이 아주 끝내준다고 하더라고. 소위 말하는 ‘신빨’이 좋은 시기라면서 말이야.
◆a4MjfSK6rwH 2023/11/05 18:29:08 ID : Ai785Wo1A1y
그리고 어제. 신당에 들렀던 고모는 한 분의 신내림굿을 돕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막 내림을 받은 애동의 첫 점사를 받는 영광을 받게 되었다고 했어. (여기서 ‘별 게 다 영광이네.’라고 중얼거렸다가 꿀밤맞았다.)
◆a4MjfSK6rwH 2023/11/05 18:29:47 ID : Ai785Wo1A1y
차례로 장군, 선녀, 동자가 한마디씩 해주는 모양이었는데, 선녀님 차례에서 그 말을 들으신 거지. ”니가 오색기를 잡으려고 천축으로 날뛰고 있다고 말이야!“
◆a4MjfSK6rwH 2023/11/05 18:30:32 ID : Ai785Wo1A1y
”아, 오색기가 뭐.....! 아? 그거?“ ”그래! 그 당집에 있는 다섯 개 색깔 깃발! 니가 신을 받으려고 용을 쓰고 있다고!!“ ”어어....“
◆a4MjfSK6rwH 2023/11/05 18:30:53 ID : Ai785Wo1A1y
나는 할 말을 잃었어. 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는 평범한 일개 고딩이었지만, 어찌어찌 저찌저찌 기억을 더듬어보면 평범하지 않았던 경험도 분명 있었던 것만 같았거든. 근데. 그건 그거고. ”그래서 어쩌라고?“
◆a4MjfSK6rwH 2023/11/05 18:31:11 ID : Ai785Wo1A1y
”이게 고모한테....!“ 나는 성난 고모에게 등짝을 난타당하면서도 꽤액 소리를 질러댔다. ”아니...! 악!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고!!! 하지 말라고? 아닉...! 아파! 그렇게 말할거면 뭘 하지 말란 건지 알려라도 줘야...! 아프다니까!“
◆a4MjfSK6rwH 2023/11/05 18:31:31 ID : Ai785Wo1A1y
한참을 쥐어패고야 만족한 건지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주저 앉은 고모는, 등짝을 어루만지며 앓는 소리를 내는 내 코 앞에 검지손가락을 세웠어. ”뭐가 됐든 하지마.“ 아주 단호한 경고를 내뱉으면서 말야.
◆a4MjfSK6rwH 2023/11/05 18:32:06 ID : Ai785Wo1A1y
하지만 일단 저질러진 일은 수습해야하지 않겠어? 나는 속으로는 메롱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네네’거렸다. 고모는 다시 단전에서부터 한숨을 몰아쉬신 다음, 주섬주섬 짐을 챙겨 집을 나서셨어. 그리고 대문께에서 속살거리듯 한마디를 덧붙이고 떠나셨지. ”동자님 말씀대로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모양이구나. 차라리 어디 비벼서 해결할 수 있는거면 니 맘대로 해보렴.“
◆a4MjfSK6rwH 2023/11/05 18:32:25 ID : Ai785Wo1A1y
언젠가 약산스님에게 들었던 말이 겹쳐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마음가는대로 하라던 그 말 말야. 잠시 대문 계단에 걸터 앉아 떠나가는 고모를 향해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대던 나는 일단 마음가는대로 라면이나 한 봉지 끓여먹기로 했다.
◆a4MjfSK6rwH 2023/11/05 18:33:34 ID : Ai785Wo1A1y
호로록. 라면을 먹으면서도 나는 복잡한 생각에 갇혀있었어. 배고프다. 라면 먹는다. 이런 본능적인건 참 마음가는대로 행동하기 편한데 말야. 흰 주머니가 달린 책상이나, 분노한 학주나, 대롱대롱 매달렸을 공주인형의 대가리나, 미쳐 날뛰며 오색기를 잡으려하는 중이라는 내 상태는 어디 하나 해결될 기미도, 구멍도, 묘안도 없었거든.
◆a4MjfSK6rwH 2023/11/05 18:33:59 ID : Ai785Wo1A1y
“아. 본능대로만 살고 싶다.” 매콤한 신라면에 벌개진 입술을 비비며 나는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어. 천장 조명에 붙은 빛바랜 야광별이 눈에 들어왔지.
◆a4MjfSK6rwH 2023/11/05 18:34:32 ID : Ai785Wo1A1y
괜히 거슬리는 그 모양새에 침대 위에서 까치발을 들고 야광스티커를 틱틱 뜯어내는데, 왠걸. 너무 오래되어서 였는지 떼어지는 게 아니라 부서지기 시작하더라고. 가루가 되어 온 손톱 밑에 끼면서. 나는 그 답답한 상황에 괜한 조명 커버만 벅벅 긁어대다가 치밀어오르는 깊은 빡침을 참지 못하고 쾅! 하고 천장을 주먹으로 찍었다.
◆a4MjfSK6rwH 2023/11/05 18:35:24 ID : Ai785Wo1A1y
“악!” 주먹으로 천장을 내려치자마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커버가 떨어져내렸어. 피할새도 없이 널찍한 플라스틱 커버에 부딪힌 내 몸이 휘청이며 뒤로 넘어갔지. 침대 위여서 망정이지, 스티커 떼려다가 뒤통수 깰 뻔 했다. 하지만 커버가 벗겨진 덕에 그놈의 야광별을 떼기는 아주 수월하겠더라.
◆a4MjfSK6rwH 2023/11/05 18:35:54 ID : Ai785Wo1A1y
커버에 맞은 코를 비비며 부스러진 야광별 나부랭이를 바라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목과 어깨가 아파오는 통에 밀려온 빡침과 천장을 깨부수겠다는 본능대로 행동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보면 꽤 좋은 효과가 있었잖아? 어차피 뭘 해도 답없는 문제라면 본능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a4MjfSK6rwH 2023/11/05 18:40:43 ID : Ai785Wo1A1y
평소에도 되는대로 살았던 열일곱의 나는 지금의 내가 생각해봐도 무서울 정도로 단순해질 때가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그럴 때였어. 그래서 그때의 나는 조명 커버를 방구석에 던져놓고 아빠의 창고로 뛰쳐들어가 망치 하나와 헤드랜턴을 챙겼다.
◆a4MjfSK6rwH 2023/11/05 18:41:07 ID : Ai785Wo1A1y
다음 날. 상쾌한 머리로 집을 나선 나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O를 찾았어. 그녀 역시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후다닥 달려 나왔다. 그 곁에 선 T를 보고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지. ‘O도 매달린 머리 이야기를 들었나보네.’라고 말야.
◆a4MjfSK6rwH 2023/11/05 18:42:24 ID : Ai785Wo1A1y
지하실에서 벗어났던 그 날 이후로 꽤 평온한 일상을 보냈던 O는, 순간 악몽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기분이었을지도 몰라. 학주의 분노와 매달린 머리와 지하 2층의 이야기가 오갔던 그 순간이 말이야.
◆a4MjfSK6rwH 2023/11/05 18:43:00 ID : Ai785Wo1A1y
내 짐작이 맞았는지 O는 날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었어. 도깨비가 아침부터 지하로 갔다면서. 지하 1층에는 음악실과 과학실이 있었지만, 나는 당연스레 그가 지하 2층의 창고로 갔을거란 확신이 들었어. 마침 1교시가 도깨비의 수업이었으니 수업 전후로 궁금했던 질문을 쏟아낼 계획을 세웠지.
◆a4MjfSK6rwH 2023/11/05 18:43:25 ID : Ai785Wo1A1y
하지만 종이 쳐도 도깨비는 오지 않았어. 반장은 웅성이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곤 교무실로 떠났고 말야.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반장은 갸웃거리는 표정으로 ‘조용히 자습하래’라고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물론 적어도 나와 O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었지만.
◆a4MjfSK6rwH 2023/11/05 18:45:23 ID : Ai785Wo1A1y
O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지. 살짝 돌아본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뒷문을 곁눈질하는 중이었어. 나는 곧 그런 O의 뜻을 이해하고 번쩍 손을 들었다.
◆a4MjfSK6rwH 2023/11/05 18:45:45 ID : Ai785Wo1A1y
“나 똥.” “....그런 거 그렇게 자신있게 말하지 마.” 어이없는 듯 헛웃음 짓는 반장이 다녀오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자, 난 가방을 들쳐메고 O의 손을 잡아 뒷문으로 향했다.
◆a4MjfSK6rwH 2023/11/05 18:46:29 ID : Ai785Wo1A1y
”야, 가방은 왜 가져가! 너 학교 째게?” “아니. 이게 있어야 마음이 진정돼서 쾌변을 할 수 있어.” “그럼 O는? 왜 또, 걔가 있어야 쾌변 가능함?!” “아니.”
◆a4MjfSK6rwH 2023/11/05 18:46:43 ID : Ai785Wo1A1y
어느새 우리의 대화를 반 아이들 모두가 집중하고 있었어. 예나 지금이나 나는 샤이 관종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이런 관심은 부담스러웠지. 그래서 급하게 말을 끝마치고 O와 함께 후다닥 교실을 빠져나왔어. ”O는 내가 옆에 있어야 마음이 진정돼.”
◆a4MjfSK6rwH 2023/11/05 18:47:02 ID : Ai785Wo1A1y
복도를 내달리는 동안 O는 상기된 얼굴로 빼액 소리를 질러댔어. ’제발 여고에서 그딴 소리 좀 지껄이지 마!‘ 라면서. 나는 틀린 소리는 아니지 않냐며 웃었던 것 같다.
◆a4MjfSK6rwH 2023/11/05 18:47:33 ID : Ai785Wo1A1y
그렇게 시끌하던 우리는 어둑해지는 지하 계단 층계참에 다다르자마자 조용해졌다. 나는 잔뜩 겁먹은 O를 보며 어깨를 으쓱 올렸어. 그리고 가져온 가방에서 헤드랜턴을 꺼냈지.
◆a4MjfSK6rwH 2023/11/05 18:47:49 ID : Ai785Wo1A1y
헤드랜턴은 그야말로 ‘작은 고추가 맵다’의 표본이었어. 쪼끄만 주제에 정면으로 마주봤다간 한참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았거든. 생각없이 O를 쳐다보면서 라이트 켰다가 싸대기 맞을 뻔 했다. (O의 말에 의하면 섬광탄이 이런 건가 싶었다고 했음)
◆a4MjfSK6rwH 2023/11/05 18:48:09 ID : Ai785Wo1A1y
다만 역시 작아서인건지 원래 헤드랜턴이 그런 거였는지는 몰라도 밝혀지는 부분이라고 해야하나 그게 굉장히 좁았어. 무대에 있는 스포트라이트 같은 느낌? 밝긴 한데 정말 머리가 향하는 방향만 일직선으로 좁게 보이더라니까. 그래서 의도치 않게 O와 딱 달라 붙어서 지하 2층으로 향했다.
◆a4MjfSK6rwH 2023/11/05 18:48:47 ID : Ai785Wo1A1y
그렇게 다다른 2층 계단 끝에서 O는 ‘이게 뭐냐’며 주르륵 주저앉았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서부터 비릿한 물냄새가 나는가 싶더라니 2층에 다다르자 발목까지 찰랑일 정도로 물이 고여있었거든.
◆a4MjfSK6rwH 2023/11/05 18:49:19 ID : Ai785Wo1A1y
O는 내 종아리에 매달리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그냥 물인거지? 비랑은 상관 없잖아. 그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렇게라도 믿고 싶은건지. 그녀는 달달 떨면서도 천천히 실내화를 벗고 있었어.
◆a4MjfSK6rwH 2023/11/05 18:49:45 ID : Ai785Wo1A1y
그 땐 ’그렇게 무서우면 그냥 교실에 있지, 왜 사람 옆구리를 찔러가면서 나오겠다고 한거야?‘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O는 살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어쩌면 가을 장마 내내 새끼에게 머리카락이 땋여지고 목이 뽑혀 대롱대롱 매달릴 뻔 했던 게 자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지. 그 다음은 정말 O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a4MjfSK6rwH 2023/11/05 18:50:28 ID : Ai785Wo1A1y
아, 그러고 보니 설명을 안했네. 당시에 우리는 도깨비가 ‘비오는 날엔 새끼가 나올까봐 야자감독을 한다’고 했던 것 때문에 그 알 수 없는 것을 ’새끼‘라고 부르고 있었어.
◆a4MjfSK6rwH 2023/11/05 18:51:56 ID : Ai785Wo1A1y
난 괜히 가방을 고쳐매곤 찰팍이는 바닥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래도 발이 답답한 걸 싫어해서 등교를 하면 늘 양말을 벗고 삼선슬리퍼를 신곤 했었는데, 물이 좀 차가운 걸 제외하면 이렇게 물 속을 걷는 것도 영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지.
◆a4MjfSK6rwH 2023/11/05 18:52:20 ID : Ai785Wo1A1y
뒤를 돌아보니 계단에 걸터앉은 여전히 O는 부들거리며 양말을 벗고 있었어. 나는 잠시 그런 O를 보다가 한마디를 내뱉었었다. “이러다 해지겠네. 여기 있어. 나 혼자 다녀올게.”
◆a4MjfSK6rwH 2023/11/05 18:52:36 ID : Ai785Wo1A1y
그리곤 고쳐맸던 가방을 계단에 내려두고 망치를 꺼냈어. 무슨 학생 가방에서 망치가 나오냐며 호들갑을 떨던 O는 이내 뻣뻣하게 표정을 굳히고 되물었지. “너 설마 진짜 그 책상을 부수려고?”
◆a4MjfSK6rwH 2023/11/05 18:53:00 ID : Ai785Wo1A1y
나는 망치를 쥐고 툭툭 어깨를 두드렸어. ‘어’라고 대답하면서 말이야. 멍청하면 용감하다. 그래서 그 날의 나는 쓸데없이 용감했었나봐.
◆a4MjfSK6rwH 2023/11/05 18:53:25 ID : Ai785Wo1A1y
정말 혼자 갈거냐며 쫑알대는 O를 뒤로 하고 나는 휘적휘적 창고로 향했어. O는 뭐 말만 시끄럽지, 내 빈 가방을 품에 꾹 안고 돌부처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a4MjfSK6rwH 2023/11/05 18:55:47 ID : Ai785Wo1A1y
그 때 혼자 가겠노라 말했던 이유는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어. 물론 내가 O의 왕자님이라서 그랬던 건 아니었고. 나야 흰 주머니랑 손 정도만 흘낏 봤지만, O는 밤새 머리가 똑 빠졌다고 했잖아. 내가 미미인형도 아니고 목이 뽁하고 빠지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보다야 O가 더 무섭지 않았겠어? (근데 다시 생각해보면 턱걸이 한 번조차도 못하는 나약한 숙주나물같은 O가 책상파괴에 1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제일 컸었던 거 같음)
◆a4MjfSK6rwH 2023/11/05 18:56:46 ID : Ai785Wo1A1y
뭐 그러 저러한 이유들로 나는 홀로 입구의 철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창고로 향했지.
◆a4MjfSK6rwH 2023/11/05 18:57:09 ID : Ai785Wo1A1y
안쪽으로 갈수록 정체를 알 수 없이 고인 물이 점점 깊어졌어. 계단 근처까지만 해도 겨우 슬리퍼 밑창 정도 깊이였던 것 같았는데, 창고 문 앞에 다가섰을 때는 발이 완전히 다 잠길 정도였다. 딱 맞게 줄인 터라 쭈그려 앉기도 힘들었던 내 교복바지의 끝단이 축축히 젖을 정도로 말이야. (물론 그 때는 긴장했는지 옷이 젖는지도 몰랐었음)
◆a4MjfSK6rwH 2023/11/05 19:00:33 ID : Ai785Wo1A1y
그리고 창고 문에 가까워지면서부터 묘한 한기가 몸을 감싸기 시작했어. 원래도 지하층이라 눅눅하고 서늘했지만, 유독 그 날은 더 시렵다고 해야하나? 좀 그런 느낌이 들었어. 온도나 습도도 낯설었지만 어쩐지 어딘가에서 빗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오싹해졌다.
이름없음 2023/11/05 19:00:55 ID : 6rzfaoHwmk2
와 나도 레전드 글을 실시간으로 보게 되다니 ㄷㄷ 잘 보고 있어!
◆a4MjfSK6rwH 2023/11/05 19:02:16 ID : Ai785Wo1A1y
읽어줘서 고마워.
◆a4MjfSK6rwH 2023/11/05 19:04:22 ID : Ai785Wo1A1y
그 오싹함을 뒤로 하고, 나는 문 앞에 완전히 다가섰어. 영화에서 보면 이런 문 열기 전에 하는 클리셰같은 행동이 있곤 하잖아? 왜, 그런 거 말야. 숨을 고른다거나, 침을 꼴깍 삼킨다거나, 떨리는 가슴께를 만진다거나. 난 그 날 그런 연출이 순 거짓부렁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었어.
◆a4MjfSK6rwH 2023/11/05 19:04:49 ID : Ai785Wo1A1y
진짜 그런 상황에 처하잖아? 숨이고 침이고 나발이고 그냥 뭐든 빨리 헤치우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들어. 적어도 난 그렇더라고.
◆a4MjfSK6rwH 2023/11/05 19:05:37 ID : Ai785Wo1A1y
계단에서 멀어지던 순간부터 오로지 ‘개박살낸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있었던 나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들어가서 그야말로 와장창 문을 열어제꼈다.
◆a4MjfSK6rwH 2023/11/05 19:07:17 ID : Ai785Wo1A1y
타당! 연녹색의 철문이 요란스레 열리자 언뜻 총소리같기도 한 소음이 흘렀어. 솔직히 그 전까진 진짜로 안쫄았었는데, 내가 낸 소리에 내가 쫄았다. (많이는 아니고.... 살짝....)
◆a4MjfSK6rwH 2023/11/05 19:10:05 ID : Ai785Wo1A1y
문이 확 열리는 통에 창고 안에 있던 물이 출렁거렸어. 그걸 본 나는 얕고 검은 파도가 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a4MjfSK6rwH 2023/11/05 19:11:52 ID : Ai785Wo1A1y
고개를 들어올리자 천장에는 여전히 멋없는 전구가 대롱거리고 있었어. 낡고 어둑한 전구는 헤드랜턴의 환한 빛 사이로 아주 미약한 노란 빛을 내고 있었지. 그리고 그 빛을 홀린 듯 보는 동안, 뭔가 파닥거리는 것만 같은 소음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a4MjfSK6rwH 2023/11/05 19:13:05 ID : Ai785Wo1A1y
황급히 시선을 내려서 주변을 살펴보자, 뭔가 이전보다 묘하게 창고가 어질러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 ’그 날 나와 O가 뛰쳐 나가는 통에 쌓아둔 물건이 무너지기라도 했던 걸까?‘ 싶을 정도로. 그리고 곧이어 그 파닥이는 소리의 정체도, 지하층에 차오른 물의 정체도 한 눈에 알 수 있었어.
◆a4MjfSK6rwH 2023/11/05 19:16:18 ID : Ai785Wo1A1y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오랜 시간 기다려준 이들에게 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 내가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 기억을 더듬어 케케묵은 이야기를 푸는 것 뿐이라 아쉽다.
◆a4MjfSK6rwH 2023/11/05 19:18:34 ID : Ai785Wo1A1y
그리고 이전 판에서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바꿀까 물어봤었잖아? 너무 설명을 자세히 하느라 글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물어봤던 거 였는데, 이대로가 좋다고 말해줘서 기뻤어. 국화에게 밀린 일을 털어놓는 것 같이 쓰던 글인데 그대로도 괜찮다고 해줘서.
◆a4MjfSK6rwH 2023/11/05 19:21:16 ID : Ai785Wo1A1y
스레를 처음 세웠던 날로부터 4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소식이 없는 국화라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어쩌면 내가 이 모든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나서야 돌아오는 건 아닐까 하는.
◆a4MjfSK6rwH 2023/11/05 19:22:41 ID : Ai785Wo1A1y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되더라도 그애에게 지난 시간을 말해줄 수 있도록 여기에 내 기억을 두고 갈게.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히 말이야.
◆a4MjfSK6rwH 2023/11/05 19:24:18 ID : Ai785Wo1A1y
그 동안 내 기억을 기억해준 레더들 모두 건강하게 잘 있기로 해. 그럼 조만간 다시 돌아올게. 좋은 밤 되길!
이름없음 2023/11/05 20:14:08 ID : 4Fio3O4HA3V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3/11/05 21:31:51 ID : eK2NBy4ZinO
기다릴게!
이름없음 2023/11/06 00:52:38 ID : xU2Mkk8ksrw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3/11/06 23:53:03 ID : nwoHA2NxWo2
감회가 새롭다ㅋㅋ 와줘서 고마워 잘 볼게.
이름없음 2023/12/08 11:56:04 ID : yLdU2HxxA7B
기다림.
이름없음 2024/01/02 19:43:46 ID : rdU7xWjcoHw
기다리구있어!

레스 작성
945레스소원이 이루어지는 게시판 2판new 38257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3시간 전
526레스플라시보 - opennew 12567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3시간 전
98레스소원이루어 지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new 6954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3시간 전
1레스.new 44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6시간 전
45레스기도원의 진실new 2180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1시간 전
6레스부모님이 사고났는데 혹시 뭔가 연관성 있는건지 아는 사람 있을까?new 304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2시간 전
53레스736일간의 감금new 4370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2시간 전
4레스귀문관살 있는 사람이 귀신본 썰 풀어봄 107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024.04.26
4레스악몽 꾼 기념으로 쓰는 괴담같은 꿈 이야기 85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024.04.26
24레스제발 과거로 돌아가는법 아시는분.. 5641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024.04.26
52레스저주하는 방법 아는사람 6067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024.04.26
55레스예지몽 꿔본 사람 있어? 1471 Hit
괴담 이름 : Ddd 2024.04.26
40레스영안 트인 스레주 질문 받음 1450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024.04.26
81레스내가 무속인인데, 어쩌면 좋을까? 3473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024.04.26
500레스소원 들어줄게 21581 Hit
괴담 이름 : ◆dDy0nyFg7Bu 2024.04.26
6레스마주보는 거울 1099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024.04.26
496레스보고 느껴지는 거 얘기해줄게 11592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024.04.26
16레스백마법사의 고민상담 744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024.04.25
25레스인형 친구 만들고 후기 남길게 1667 Hit
괴담 이름 : 2024.04.25
220레스분홍 원피스의 여자 7100 Hit
괴담 이름 : 이름없음 2024.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