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타인이라기엔 가까웠고, 친구라기엔 서로를 잘 몰랐던 국화.
그 아이에게 못다한 말을 털어놓으러 여기까지 왔어.
902이름없음2023/01/31 02:39:44ID : Qre3O2smIHy
그렇게 언니와의 대화를 마친 O는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언니에게 같은 방에서 잘 것을 부탁했다고 해.
하지만 언니는 친구의 연락을 기다리던 중이었기 때문에 곧 집을 나선 모양이야.
O의 부모님은 지방에서 일하시고 주말마다 집에 돌아오셨기 때문에 온전히 그 집에는 O만이 남게 된거지.
903이름없음2023/01/31 02:41:07ID : Qre3O2smIHy
처음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TV를 틀고 쇼파에서 잠이 들었다고 했어.
사실 그렇잖아.
설마 귀신이 나오더라도 무모한 도전 재방 보는 중에 나오진 않을 거 같은 그런 묘한 믿음?
904이름없음2023/01/31 02:41:23ID : Qre3O2smIHy
그렇게 한 두 시간을 쇼파에서 불편히 자고 일어나보니 몸만 찌뿌둥하지 별 일은 없었다고 해.
괜한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방에 들어가 편히 잠자리에 든거지.
905이름없음2023/01/31 02:41:44ID : Qre3O2smIHy
한참 잠에 들었던 O는 뒷목이 당기는 것 같은 기분에 설풋 깨어났다고 했어.
그래서 벅벅 손으로 뒷통수를 긁으려는데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
풀어헤쳐져있어야 할 제 머리카락이 빳빳히 묶여진 느낌이었다는거야.
906이름없음2023/01/31 02:42:16ID : Qre3O2smIHy
쏴아아-
창 밖으로는 거센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지.
기묘한 감각과 빗소리에 잠이 달아난 O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어쩐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어.
“그저 머리가 당겨지는 걸 참으면서 비가 그치길 빌었지.”
907이름없음2023/01/31 02:42:35ID : Qre3O2smIHy
나는 믿을 수 없는 O의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믿을 수 밖에 없었지.
나도 분명 봤단 말이야.
908이름없음2023/01/31 02:43:00ID : Qre3O2smIHy
“머리카락을 땋는 게 당기려고 그런건가…”
“뭐?”
O는 대번에 내 앞으로 얼굴을 밀었어.
“나. 오늘 그 책상을 찾아서 부숴버릴거야.”
“뭐?”
“모레부터 장마래. 오늘부터 일 수도 있고. 가을 장마라니 웃기지?”
웃긴 일이라며 깔깔대는 O의 눈은 전혀 웃고있지 않았던 거 같아.
현실성 없는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나와는 달리 목적성이 분명한 O의 눈이 말이야.
묘하게 드는 현기증에 고개를 들어올리자 정말 꽤 흐릿해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어.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과 함께 말이야.
그리고 불현듯 ‘산신령 같던 내 친구 국화라면. 아니, 못해도 약산스님이라면.’하는 생각이 스쳤어.
아쉽게도 국화와의 연락 방법은 소원했지만 다행히도 약산스님과는 방법이 있었지.
당시 우리 반이 있는 건물은 구조가 굉장히 특이한 별관이었는데, 오직 1층과 지하 2층만이 존재했어.
모든 교실은 지상층인 1층에만 있고, 지하 1층도 아닌 2층은 선생님들의 동행이 있을 때.
그것도 오전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몰라.
사실 ‘여긴 오전에만 들어올 수 있어’라고 말하는 선생님 말을 별 생각 없이 흘려들었을 뿐이어서.
지하 2층에는 강당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철문이 하나.
그걸 열고 들어가면 또 다시 같은 철문이 하나 더.
거길 열고 나면 내부 공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지하 동굴같은 공간이 나왔어.
벽은 울퉁불퉁. 마감이나 페인트칠 따위는 없었고,
천장은 온갖 파이프와 전선이 늘어져있었지.
그 공간에 마감된 것은 오직 전구 두 개 뿐이었어.
그리고 그 곳은 온갖 책상과 의자가 가득 쌓인, 일종의 창고로 사용중인 것 같았다.
뭐 책걸상 뿐만 아니라 뜀틀이라거나 풍금같은 것도 마구잡이로 처박혀 있었던 걸로 기억해.
나나 O도 체육대회 준비중에 심부름을 가지 않았더라면 전혀 그런 곳이 있었는지도 몰랐을거야.
(요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떼는 체육부장과 준비위원이 있었거든.
나와 O는 그 직책을 맡으며 친해졌고.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체육쌤 따까리….)
아무튼 O는 아마 그 창고에 책상이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물론 예전에 쓰던 책걸상은 모두 그 곳에 박혀있었으니, 영 틀린 생각이 아니긴 했지.
근데 솔직히 그걸 어떻게 찾겠어?
거기에 널리고 널린 게 책상이고 의자야.
못해도 몇 백 개는 쌓여있을 거란 말이야.
대충 이런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전화를 끊고 잠시 허망함에 멈춰서 있었어.
그리고 보충수업 시작 10분 전을 알리는 예비 종소리가 울렸지.
터덜터덜 교실로 돌아가는데 정말 오만 생각이 다 들더라.
그런데 그 가운데서 풍경소리와 함께 들렸던 약산스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어.
‘마음가는대로 행동하고 너무 늦지 않게 날 찾아오렴.’
‘그래. 일단 저질러보자. 생각나는 대로 저지르고 뒷수습은 스님께 맡기자.’
이렇게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나니까 갑자기 어디선가 힘이 쑥 올라오는 것만 같았어.
원래 사람이 극도로 겁먹으면 당당해지고 막 뇌 빼고 생각하고 그런 거 있잖아?
아마 그 때 좀 그런 상태가 되었던 모양이야.
점심시간이 되자, O는 곧바로 교실을 나섰어.
맞은 등짝은 아프고 굶주린 배는 고팠지만 적어도 O가 향할 곳이 급식소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지.
시간은 오전 11시 30분.
(토요일에는 3교시가 끝나고 점심을 먹었었어)
나는 O를 불러 한숨을 쉰 후 함께 지하로 이동했어.
물론 그 물건도 함께 말이야.
우리는 손발을 더듬거리며 조심스레 지하로 향했어.
요전과는 달리 내려가는 계단조차도 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
아마 그나마 조금 나 있는 손바닥만한 창이 동향이라 해가 조금만 올라가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
거기에서 아차 싶긴 했지.
‘이래서 오전에만 내려올 수 있었던 건가’ 싶어서 말야.
마지막 문까지 열고나니까 예의 그 창고가 등장했어.
이상하게도 창고에 들어서니까 쿰쿰한 곰팡이 냄새와 어렴풋한 빛이 느껴졌지.
딸랑 두 개 있는 그 줄전구. 그게 다 켜져있더라고.
창고로 들어서는 O의 슬리퍼가 성기게 마감된 시멘트 바닥에 미끄러지며 ‘지익’하는 마찰음을 냈어.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에 침이 꼴딱 넘어갔다.
내 긴장감의 이유는 뭐였을까?
귀신? 어둠? 아니면 눈이 뒤집혀서 책상을 찾아 둥탕거리는 O? 아니면 이 소리를 듣고 쫓아올 당직 선생님들?
그래 설마 하나였겠어.
솔직히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몰아 닥쳐서 내 손바닥만한 간을 주무르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쫄깃하다는 느낌이 이런 거였나 싶을 정도로 말이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꽤 방음이 잘되는지 선생님들은 찾아오지 않았고,
그나마 조금씩 들어오던 햇빛이 옅어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
거기다 쿰쿰한 곰팡이 냄새 위로 조금씩 눅진한 향이 풍기기 시작했지.
나는 주인의 발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단번에 빼들었어.
‘비! 비냄새다!’
왜, 공부를 많이 하다보면 나사가 나가기도 하고 조금씩 미친 구석이 생기기 마련이잖아?
운동장 잔디에 물주는 스프링클러를 보고 달려드는 학생이나,
말도 안되는 눈물 콧물 핵 매운 맛 닭꼬치를 달게 먹는 학생이나,
와플 한 조각 먹겠다고 30분을 뛰어 달리는 학생들처럼 말이지.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 중에서 나는 비에 미쳐있는 평범한 학생이었어.
비 맞기도 좋아하고, 바라보는 것도 좋아하는 비 처순이 말이야.
그러다보니 제육냄새보다 비냄새를 더 칼같이 맡는 개같은 능력도 생겼다.
그런 내가 장담컨데 지하실까지 이 냄새가 풍긴다면 얼마 안가서 비가 내릴 게 분명했어.
“O! 나가자!”
“여기 있을거야! 그거 찾기 전엔 못 가!”
“여기 없을 수도 있잖아! 도깨비가 치웠을 수도 있어! 차라리 나가서 물어보자!”
“여기 있다고!”
“정신차려, O! 곧 비올 거 같아서 그래! 왠지 해가 없어지면 큰일 날 거 같단 말야!”
“비… 비온다고?”
‘비… 지금 비가 오던가…’
이미 비냄새는 뭉근히 퍼져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어쩐지 아무 소리도 들리질 않았어.
그리고 불현듯 O가 아무 목소리도 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당시의 나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절대적이라는 느낌만이 들었다.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O에게 향하던 나는, 날 바라보는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양 손으로 입을 막았어.
그렇게 배를 채운 후에야 나는 요즘 내게 이상한 일들이 잔뜩 생기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인정할 수 밖에 없었어.
‘긍정 파워로 살아온 내 인생… 뭔가 잘못되고 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거야~~]
어린 시절 줄창 불러왔던 백터맨 오프닝곡이 비장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지.
그 후로 꽤 오랜 시간 동안 가을 장마가 이어졌어.
여름 장마에 비해 눅눅함은 덜 했지만,
오히려 싸늘하게 기온이 내려가서 교복 위로 후드티나 집업 같은 사복을 입는 애들이 늘어났지.
추우면 교복 마이를 입으라고 선생님들이 혼내시긴 했는데,
다들 ‘드라이 맡겼다’ ‘갑자기 추워져서 어쩔 수 없었다’
이런 핑계를 대면서 은근히 사복을 입을 수 있는 그 기간을 즐겼던 거 같아.
하지만 적당히 봐주는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학주였던 도깨비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복을 통제했어.
복도에서 담요 두르고 다니는 애들만 봐도 일단 후려치고 볼 정도였지.
학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그게 이유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조금 들더라.
전에 이런 식으로 전교생이 강당으로 모인 적이 있었는데,
그 땐 교감선생님이 금이야 옥이야 기른 튤립을 누군가가 머리만 잘라서 앞에 내려놨다는 게 이유였어.
그 앞에 CCTV가 있으니 금방 범인이 잡힐 거라고.
그 전에 미리 죄를 고하라면서 말이야.
물론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데 알고보니 까마귀가 튤립의 머리를 똑 물어서 뜯더니 그 앞에 내려놨다는 거 있지?
지하실 이야기에 괜히 뜨끔해진 나와 O는 서로를 힐끗 쳐다봤어.
그 날 지하실에서 대놓고 와장창 뒹굴었던 기억은 있는데 정리를 해놓은 기억은 없으니,
그걸 어지른 사람인 우리 둘을 찾나 해서 말야.
하지만 도깨비 학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고.
‘어디서 헛소리 듣고와서 천장에 쓸데없는 거 달아둔 정신나간 놈들이 누구냐’면서.
쓰다보니 벌써 여기까지 왔네.
음… 사실 그냥 간단하게 설명해주자면,
이후로도 나는 몇 차례 기이한 일을 경험했고
그로 인해서 과거 국화가 겪었던 일이 뭐였는지 알게 됬어.
그리고 그 애한테 미치도록 미안해졌지.
그러고도 나는 다시 국화의 도움을 받게 됐는데,
그게 나와 국화의 마지막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