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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4/03/24 08:46:02 ID : lh9ck3xyLcJ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의 기독교 학교였는데도 특이하게도 오컬트 동아리가 있었어. 오컬트 동아리의 존재 의의이자 지금까지 버틸 수 있던 3학년 선배들이 졸업한 후에는 물론 폐부됐어. 신청하는 사람이 영 없었거든. 내가 딱 1학년일 때부터 선배들이 대학교 신입생이 될 때까지 종종 만나며 있었던 일들이야.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적을 게.
이름없음 2024/03/24 09:28:46 ID : lh9ck3xyLcJ
【영매술】 동아리는 굉장히 다양했지만, 나는 딱히 뭘 좋아하는 게 없었어. 당시엔 장래도 정하질 않은 답 없는 고등학생이었으니 동아리도 어디에 가야겠다고 마땅히 생각해둔 곳이 없었지. 하지만 배구부인 여선배가 애걸복걸해서 다른 동아리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신입생 남자애들한테 퍼졌어. 키도 크고 미인이신데다가 배구부라서 몸도 좋으니 굉장히 뜨거운 감자였지. 맞아. 나도 그런 선배가 있다고 하니까 동아리에 입단하려 했어. 그게 오컬트 동아리라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난 기대감만 품은 채 가입 신청을 넣었어. 오컬트 동아리라는 점 때문인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애들도 제법 있었는지 동아리 신청은 스무 명 남짓 밖에 하지 않았어. 동아리실에 있던 사람의 수를 생각하면 충분히 다 받아줄 법한 인원이지만, 배구부 여선배의 강건한 요구에 우리는 입단 테스트를 하기로 했어. 동아리실은 상담실 옆에 있는 복지실이라는 명분의 다목적실이었어. 굉장히 길고 좁은 형태였고 그 긴 방 끝에 창문이 하나 달린 형태였는데, 원래 그곳은 상담실에서 진행하는 단체 상담이나 일이 생긴 아이들의 교육 목적으로 설비된 곳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쓰일 일이 없는 곳이라 그 사실이 마음에 들어 오컬트 동아리를 세웠대. 하여튼, 우리는 그곳에 모여 영매술 비슷한 것을 하기로 했어. 끝까지 방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성공이라는 조건이었지. 있잖아, 사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귀신은 별로 믿지 않아. 이제는 그 존재를 조금이나마 인정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이 무서운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지금도 그래. 난 귀신보다 인간이 더 무섭다는 주의의 사람이야. 그리고 이 일은 이걸 확실하게 해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 했어. 우리는 원형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양손바닥은 완전히 바닥에 밀착시킨 채 몸을 앞으로 살짝 숙이고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감고 기다리면 된다고 했어. 하지만 교실이 조금 긴 형태이다 보니 우리는 긴 타원형처럼 앉았어. 어쩌면 마름모 같은 모양에 가까웠을지도. 이런 일은 대개 완전한 원형이 아니냐고 누가 묻기도 했는데, 배구부 여선배는 대충 이런 대답을 했던 것 같아. "영을 가두는 건 형태가 아니라 가두고자 하는 정신적 교착점이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아. 하지만 정신적 교착점이라는 말이라는 건 확실해. 그 말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거든. 어쨌거나 배구부 여선배는 굉장히 기대되는 듯 히죽거리며 창문에 썬팅지를 붙이며 방안을 어둡게 하며 준비를 마쳤어. 그때까지는 그저 신난 사람처럼 굴었기에 우리는 이상한 점을 그닥 느끼지 않았지. 되려 그런 어린애 같은 부분이 좋은 듯 히죽대는 애들도 있었을 정도야. 나도 별 생각 없이 입구쪽 끝부분에 앉아있기 때문에 창문에 몸을 살짝 기댄 채 미소 짓는 배구부 여선배가 잘 보여서 설레는 마음으로 영매술을 시작했어. 완전히 어두워진 그 공간에서 우리는 계속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길 기다리며 그 자세를 유지했고 배구부 여선배는 아주 짧게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고는 모두를 향해 속삭이기 시작했어. 그닥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었어. 숲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나뭇가지에 잡혀 사라지게 되는 기괴한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할 뿐이었지. 그냥 계속계속 그 이야기만 말했어. 나는 '존나 별거 없네 ㅋㅋ'이라고 생각하며 개꿀이라고 생각했지. 찌질하게 동아리 시간 때 어떻게 선배와 친해질까~ 하는 생각만 하며 시간을 보내려 했단 말이야. 그리고 그건 시작됐어. 빛 하나 없는 방에서 눈을 감고 있는데 시선 한켠에서 무언가 붉은 기 같은 게 느껴진다 생각했어. 너희 눈을 누르면 약간 피부색 같은 것이 눈에 밝게 보이는 거 알아? 그런 기분이었어. 난 어쩌면 배구부 여선배가 장난기 가득하게 양초 같은 걸 우리 얼굴 주변에 가져다대며 그 붉은 기 같은 빛으로 우릴 놀리는 거라 생각했어. 오히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만 나왔지. 나는 한 번 놀라줘야 하나 싶어 장난스레 눈을 떴어. 그런데 뜨면서 생각해보니 이상해. 아직 배구부 여선배의 목소리는 창문에서 그대로 들려왔거든. 그렇게 눈을 떠보니 그곳엔 되려 더 어두운 뭔가 떠다닐 뿐이야. 검은 숯댕이 같은 것이 연기처럼 시야 한켠을 차지하고 있더라고. 난 곧장 고개를 떨궜어. 그리고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해서 눈을 감았지. 가슴을 주먹으로 한 대 세게 맞은 것처럼 커다랗게 한 번 아파오더니 심장은 지나칠 정도로 느리게 뛰고 살결은 차가워졌어. 그런 내 귀에 배구부 여선배의 약간 웃음기 섞인 이야기는 계속해서 들려왔고 몸은 가끔 너무 울어서 호흡이 가쁠 때 느껴지는 앞뒤로 나도 모르게 흔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어. 어두운 시야 속에서 계속해서 커져만 가는 붉은 기, 앞뒤로 게속해서 흔들리는 몸, 들려오는 이야기. 들려오는 이야기, 앞뒤로 흔들리는 몸, 눈앞에 가득 찬 붉은 기. 슬슬 공포에 빠진 나는 두 눈을 뜨고 배구부 여선배를 바라봤어. 차라리 탈락이라도 되고 싶다는 심정이었지. 그 탈락이라는 말을 너무 원했어. 완전히 밀착시킨 손바닥이 쉽게 떨어지려 하질 않았거든. 마치 허용되지 않는 행동인 것처럼. 그리고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어. 썬팅지로 생긴 아주 약간 검은색의 빛을 등진 채 공허한 입을 헤벌쭉 드러내며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배구부 여선배가 웃고 있었어. 알아들어? 그렇게 그냥 웃고만 있었다고. 어느 순간부터 계속해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여선배의 목소리가 분명했는데, 그 사람이 말하고 있던 게 아닌 거야. 그제야 나는 내 귀에서 그 이야깃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어. 하지만 차갑게 식어가던 내 몸은 이제 미친듯이 펄떡이는 심장으로 점점 뜨거워졌어. 저 미친 사람이 무슨 짓을 한 거지? 언제부터 혼자 이러고 있던 거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건가? 이게 귀신인가? 진짜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어.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지. 다시 고개를 들면 그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어. 그리고 도화선이 불이 붙기라도 하듯 연쇄적으로 내 주변에서부터 우는 소리도 들리고 정말 재난 상황에 도망치는 발소리처럼 다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가는 소리들도 들려왔어. 한참이나 이어진 소동 끝에 살포시 무언가 내 어깨에 내려앉았지. 난 정말 귀신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실상은 더욱 끔찍했지. 배구부 여선배는 창문에 붙은 썬팅지처럼 광택진 쌔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려두고 시선을 맞추었어. 이전보다는 다소 진정된 채로 미소 짓고 있었지. 그리고 속삭였어. "너 합격이야. 축하해. 금요일에 또 보자~" 그리고 겨우 떨어진 손으로 가슴팍을 붙잡으며 숨을 몰아쉬는 나를 혼자 내버려둔 채 바깥으로 나갔어. 그 발소리와 겹친 학교 종소리는 나를 구원해주는 것만 같았지. (´。_。`) 적고 보니 재미있을지 모르겠네. 있었던 일 중에 하나 정도는 너희 마음에 들겠지. 나중에 시간이 나면 종종 올게. 정기적으로는 힘들 것 같아.
이름없음 2024/03/24 11:57:49 ID : NxO8rzgpdRu
뭐야.. 엄청 흥미진진하다 ㄷㄷㄷ 영화 한편 본 거 같았어 계속 써줘
이름없음 2024/03/24 23:43:45 ID : lh9ck3xyLcJ
【귀신은 정의될 수 있는가】 딱히 시간 순서대로 적어볼 생각은 없지만, 아무래도 첫 주의 금요일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나누고 싶네. 우리 학교는 수요일에 한 시간, 금요일에 한 시간 하는 식으로 동아리 시간이 분리되어있었어. 일반적으로 하루를 정해 두 시간 하는 모양이던데, 우리는 동아리에서 과제를 내거나 하는 경우도 있어서 분리하고자 했던 모양이야. 수요일에 입단 테스트에서 유일하게 통과한 나는 금요일의 동아리 시간이 너무 두려웠어. 솔직히 째고 싶었을 정도야. 겨우 다시 돌아간 그 교실엔 저번과는 달리 배구부 여선배만이 있던 것이 아니었어. 같은 고등학생 3학년으로 오컬트를 좋아하는 남자애라는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남선배와 문학 소녀에 가까운 스타일의 존재감 없는 안경의 2학년 여선배였어. 동아리의 존속을 위해 동아리에 가입하지 못해 헛도는 아이들을 동아리에 들여서 유령 회원이 잔뜩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오컬트 동아리 멤버는 우리 넷이 끝이야. 특히 남선배와 배구부 여선배는 닮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어. 배구부 여선배는 무서운 모습을 내게 보이긴 했었지만, 평소에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밝은 성격이었던 것에 비해 남선배는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별로 즐기지도 않았고 무뚝뚝했어. 게다가 오컬트에 관한 지론도 완전히 정반대야. 그걸 첫날부터 알게 되었어.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첫날의 주제를 배구부 여선배가 먼저 꺼내며 히죽거렸어. 또 시작이라는 듯이 남선배가 눈알을 굴리는 동안 안경 여선배는 조용히 창문에 썬팅지를 다시 붙이며 방을 어둡게 했어. 나만이 배구부 여선배에게 저주라도 받을까 조용히 그녀의 말에 경청했지. "...너, 신입을 실험쥐 취급하는 건 그만둬라." "신입! 넌 불행의 상징 같은 것들을 알고 있어?" 남선배의 말에도 신경도 쓰지 않으며 배구부 여선배는 말을 이어갔어. 불행의 상징 같은 건 너무 당연히 알고 있었지. 행운의 편지... 검은 고양이라던가 그런 것들 말이야. 하지만 그건 오컬트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미신들이었어. 내가 머뭇거리며 이런 대답들을 뱉자 오히려 그런 애매한 미신이 딱 좋다는 듯 배구부 여선배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어. "행운의 편지는 사건이라지만, 검은 고양이를 생각해보자. 검은 고양이는 어쩌다가 불행의 상징이 된 걸까?" "흑사병을 몰고 와서 그런 거래요... 뭐... 검은색이 흑사병을 연상케 한 것은 아니었을련지요..." 안경 여선배의 대답은 굉장히 오컬트와 동떨어져 있었어. 그런 대답은 오컬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위험한 트리거는 아닐까 싶었지만, 의외로 배구부 여선배는 좋은 대답이라 답했어. "허상의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저런 병을 몰고 온다는 헛된 착각은 인상을 만들고, 인상은 소문이 되어 상징으로 굳어지게 돼.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난 그 해답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그건... 이상한 논리지 않나요? 상징이 되었다고 해서 정말 그 효력이 있는지는 불분명하고... 무엇보다 닭과 달걀은 어느 무엇 하나 먼저 존재할 수 없는 거잖아요." "똘똘한 신입이 들어왔네." 내가 가끔 이런 식으로 반박하는 게 남선배는 마음에 든 듯했어. 대화하는 걸 싫어하는 남선배가 내게 쉽게 마음을 열게 된 계기라더라. 배구부 여선배의 말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다고. "아니. 난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야. '불행의 상징이라는 개념을 우선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검은 고양이가 그 불행의 상징으로 퍼질 수 있었다.' 라는 말이지." 난 더는 반박하려 들지 않았어. 여전히 상징물이 닭과 달걀을 대체할 수 있는가.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해. 그냥 그때는 더 꼬치꼬치 캐물으면 나쁜 일을 당할까 그랬어. 요약하자면 이래. 검은 고양이는 불행이라는 요소를 지니지 않고 있었는데, 인간들의 믿음과 상상이 정말 불행이라는 요소를 지니게 했다는 거지. 현재에 와서는 이런 일이 미신으로 취급받거나 안경 여선배가 말한 것처럼 그 실체를 알고 상징을 잊으며 살아가기에 그 요소가 옅어지고 있단 이야기. 되려 검은 고양이가 유행을 타서 애완동물로 선호되는 경향도 있을 정도이니 말이야. "오컬트란 게 다 이래. 결국 사람이 기운을 엮어서 만들어낸 것들이지. 실제로 그것이 영적인 기운을 지녔을지는 몰라. 어쩌면 점을 봤다는 기억 때문에 사소한 일에 과민하게 평가하는 것처럼 심리 현상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영적인 것에 그런 말 하다가 천벌받는다. 영은 그저 있는 거야. 딱히 이렇다 할 정의내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고." "정말 그럴까? 달걀이 먼저 존재했었다고 한들, 닭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면 인간은 달걀이 닭이 된다는 결과에 결코 도달하지 못해. 인정하지 그래?" "넌 마치 영을 정의할 수 있다는 듯 말해. 하지만 말이야, 그런 정의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기에 오컬트가 빛이 나는 거야. 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을 향하는지, 그리고 무얼 떠올리게 하는지 중요한 거라고." 둘은 한참이나 말다툼을 했어.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다른 비유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는 둘이 졸업을 하고 나서도 계속 이어졌어. 나는 아직도 그 누구의 편을 들진 않아. 그래도 확실한 건 둘 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이야기지. 요컨대 쉽게 정리하자면 이래. 배구부 여선배는 인간이 누군가 영을 해칠 수 있다, 혹은 해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강한 정신적인 염원이 실체가 되어 영이 소환, 혹은 창조된다는 거지. 그 염원을 지닌 영이라는 존재는 실제로 인간을 해하는 일을 벌였고 그것이 소문이 된다. 오컬트라는 달걀은 그런 달걀을 낳는 닭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탓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닭이 먼저라는 이야기. 남선배는 그런 논제 자체를 부정해. 영은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고 이렇다 할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것이 행한 것은 의미를 지닐 수 있을 지언정 그 존재 자체는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정통 오컬트를 신봉하는 것에 가까웠어. 그저 설명할 수 없는 힘, 영적인 무언가, 그런 말들을 좋아하는 부류라는 뜻이 되려나. 배구부 여선배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것으로 더욱 깊게 즐기고 빠져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어. 나는 감히 그 둘의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괜히 린치만 당했어. 난 원한이 쌓여 귀신이 생기는 것이니 둘의 말이 어느 정도 다 맞는 것 아니냐고 물었고, 곧장 둘은 가장 듣기 싫은 말을 들은 것처럼 얼굴을 구기며 내게 설명했어. 배구부 여선배는 서양권과 동양권의 귀신의 이미지가 다른 것을 예시로 설명했어. 해외의 귀신은 일상적인 것이나 크리스천에 관한 이미지를 지닌 범접할 수 없는 존재에 가까운 것이 반해 동양은 원한에 집중한 평범한 일반인의 혼령을 이미지로 잡고 있지. 이 이유가 문화의 차이로 인한 요소 때문에 인간이 상상하는 방향성이 달라서 만들어진 차이라고 했어. 인간이 먼저 만들었기에 비로소 이런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거지. 남선배는 모든 혼령이 원한을 지니기라도 한 거라면 이 세상에 영을 믿지 않는 존재가 이리 많을 리 없다고 말했어. 분명 원한을 지닌 영이 존재할 수 있음은 맞지만 그렇지 않은 영이 있기에 도시괴담과 같이 해함을 당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심령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이지. 그렇게 된다면 원한이 있기에 영이 되었다는 말이 틀리게 되고 비로소 영이 되는 이유에 관해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것 같아. 그렇기에 영이 된 것은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고 설명했어. 나는 다음부터 결코 이 둘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면서 둘의 이야기가 끝나길 동아리 시간 내내 기다렸어.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갈 무렵, 안경 여선배가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끌었어. "근데... 어차피 오늘 확인하려는 것 아닌가요...? 누가 옳았을지는 오늘 증명될 텐데... 그걸 신입에게 설명해주는 편이 나아보여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였어. 그걸 증명할 일을 한다. 날 실험쥐 취급하지 말라던 남선배의 말이 이제 조금 이해가 되더라. 이 셋은 날 무슨 일에 휩싸이게 하려는 거야. 입단 테스트 때 있었던 그런 기묘한 일을 말이지. "오늘 11시 30분에 냇가로 와. 자정에 봐야할 게 있으니까." 게다가 그건 곧장 당일에 벌어졌어. 정말 난 나 자신이 싫어지는 기분이 맴돌았어. 왜냐하면, 조금이나마 이런 일이 재밌다고 느꼈거든.
이름없음 2024/03/24 23:50:44 ID : lh9ck3xyLcJ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네. 눈치 없이 재미없는 얘기나 혼자 올리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럼 힘내서 적어볼게!(〃` 3′〃)
이름없음 2024/03/25 12:12:32 ID : lh9ck3xyLcJ
【닭과 달걀】 우리 학교 옆에는 길고 긴 냇가가 흐르고 있어. 지역을 S자 모양으로 반으로 가르는 수준으로 긴 냇가라서 그곳을 통해 걸어가며 등하교 하는 재미가 쏠쏠했지. 제법 물도 깨끗해서 야생 거북이 같은 것도 살 정도라 제법 괜찮은 곳이었어. 하지만 말이야, 그곳이 관리가 잘 되는 곳은 아니라서 가로등이 잘 있지도 않고 위에 있는 도로변에 있는 가로등도 고장난 것들이 많아서 밤에 걷기 좋은 곳은 아니었어. 특히나 부모님께 친구와 숙제하고 온다고 거짓말하며 한밤 중에 나오기 좋은 곳은 더욱 아니었지. 다들 일상복이 이미지에 딱 들어맞아서 웃겼던 게 기억이 나. 거무칙칙해서 있는 줄도 몰랐던 바람막이의 남선배, 가디건과 치마를 입고 온 안경 여선배, 저지와 츄리닝 바지를 입고 온 배구부 여선배까지. 나만 무색무취의 후드를 입고 왔더라. 하여튼 그렇게 모여서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우린 냇가를 걷기 시작했어. 이건 수십 킬로미터나 있는 냇가기도 했고 그 너머에 있을 게 산이었으니까 걷기만 해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게 뻔했어. 나는 분명히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아니었어. 상가를 지나고 학교도 지나고 주변에 있던 다른 학교까지 전부 지나치면서 우린 계속 냇가를 걸었어. "저기, 저희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그냥~ 자정이 될 때까지 쭉 걷는 거야." 배구부 여선배는 내가 질문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정말 곧장 답했어. 키득거리고 있는 미소를 보니 분명 나쁜 일이 다가올 것이 느껴지더라. 제발 저번처럼 나한테 나쁜 일이 벌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던 찰나에 시계를 확인해보니 자정까지 남은 시간이 5분도 남질 않았더라고. 곧 뭔가 벌어지겠구나 하고 실감이 되니까 기분이 묘했어.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 기대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일을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겠지, 아마. 그리고 그건 자정이 되자마자 시작되었어. 내 발소리와 겹치는 다른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거야. 처음엔 뒤를 돌아봐도 아무도 보이질 않아서 자갈 따위가 밟히며 생긴 다른 소리일 뿐이라고 넘겨짚었어. 하지만 분명하게 누군가 한 명이 더 있는 듯한 발소리가 있었어. 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니까 배구부 여선배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날 쳐다봤더라. "들려?" "...들리는 것 같기는 하네요." 그러자 배구부 여선배는 말 그대로 신나서 방방 뛰며 애처럼 굴었어. 그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남선배는 살짝 떨리는 눈으로 내 뒤를 빤히 바라봤는데, 뭐가 보일 리가 없지. 딱히 배구부 여선배도 안경 여선배도 안 보였던 모양이니까. 애당초 소리가 들리는 내게도 안 보이는 형체라면 남에게 보일 리도 없었어. 영감이란 게 있어서 남선배만 볼 수 있는 그런 거라면... 아무래도 그 사람도 소리가 들렸을 거야. 아마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던 모양이야. "거봐! 내가 가능하다고 했지? 푸하하! 이 얼빠진 표정 좀 보라고 다들. 그렇게나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애의 얼굴이라니까!" "정말 들렸어? 확실해?" "발소리가 들리긴 해요. 딱 한 사람 더 같이 뒤를 걷고 있는 것처럼. 멈추면 안 들리고 걸으면 들리고." 내 대답을 들은 남선배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우리도 그의 뒤를 따라 계속 걸었어. 자기가 틀렸다는 생각에 창피한 거라면서 배구부 여선배는 정말 쉬지도 않고 놀렸지만, 그게 아니라 생각에 잠긴 모습에 가까웠달까.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자기 딴에 설명할 방법을 찾는 듯했어. 그러는 와중에도 내 귀에는 계속 따라붙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어. 전에는 무언가 가깝다, 멀다 라는 감각과는 동떨어진 그저 소리가 들려오는 느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점점 다가온다는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한 거야. 하지만 그 소리가 워낙 작았던지라 분명 착각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게 어느 정도 가까워지니까, 순간 내 손을 낚아챈 거야. 내가 발작을 일으켜서 팔을 휘두른 게 아니라면 옆에서 본 사람도 분명하게 알아챌 정도로 팔이 뒤로 젖혔어. 우리가 전부 뒤를 돌아보자 무언가 붙잡았다는 감각은 곧장 사라졌지만, 우리는 한참이나 숨을 죽인 채 내 팔을 바라봤지. "뭐야?" "네? 모르시는 일이에요?" 배구부 여선배도 살짝 놀란 기색이었어. 뭔가 실험이라던가 그런 말을 했으니 난 배구부 여선배는 전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야.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이니 나도 덜컥 겁을 먹어서 곧장 되물었어. 그러니까 이 상황 자체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모두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어. "응... 이건... 신기하네... 아니 신기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려나... 후후..." "야, 일단 튀자." 안경 여선배의 장난스런 말 이후로 떨어진 남선배의 도주 허락에 우리는 냅다 달렸어. 우선 냇가에서 벗어나라는 말에 나는 말 그대로 계단까지 버틸 수가 없어서 언덕을 기어올라갔어. 커다란 우리의 발걸음을 따라잡기 위해서인지 발소리는 점점 크고 울리는 소리로 바뀌었고, 내가 도로변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은 듯 계속 쫓아왔어. 마지막엔 발소리라기보단 잡기 위한 손바닥 소리도 들려오더라고. "대체 뭐에요 이게!!" 저 멀리서 계단으로 올라온 셋은 숨을 헐떡이면서 내게 다가왔어. 나는 거의 우는 목소리로 소리쳤고 배구부 여선배와 안경 여선배는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 미소 지으면서 냇가를 내려다봤어. 그리고 이 일의 전말을 천천히 설명해주더라. 이 일의 시작은 이래. 저 둘은 내가 오기도 전부터 이런 오컬트 지론의 차이 때문에 매번 싸운 모양이야. 안경 여선배가 입학도 하기 전인 1학년 때부터 싸웠고 2학년일 때 아주 정점을 찍었대. 그래서 결국 배구부 여선배가 계획한 실험이 바로 '소문은 귀신을 만드는가'였어. "넌 그래도 첫 동아리 활동이 이거지만... 난 모르는 사람들한테 소문을 내고 다녀야 해서 꽤 곤란했다구... 후후..." 안경 여선배는 싫어하듯 말했지만 딱 봐도 즐기고 있던 것 같아. 모르는 사람에게 없는 괴담을 퍼트리고 다닌 거지. '냇가에서 어두워진 자정에 여럿이서 걷고 있다보면 유령이 동행한다.'라는 괴담을. 이 말도 안 되는 실험은 어느 오컬트 만화를 보고 착안한 실험이라고 했어. 소문이 도시괴담이 될 정도로 유명해지지는 못했지만, 그 셋의 친구에서부터 천천히 퍼져나가긴 한 모양이야. 실제로 믿고 밤에는 냇가를 아예 안 걷는 사람도 있다고 했어. 뭐, 치안적인 부분에서 나쁜 짓은 아니지만 여전히 몹쓸 짓이긴 했지. 꽤 오래 반응이 없었지만, 그래도 셋은 포기하지 않았다더라. 딱 1년후인 올해 4월까지만 시도해보고 실제로 안 나타나면 포기하려던 찰나에 겨우 성공한 거야. "그런데 팔을 낚아챈다던가 그런 위험한 요소는 전혀 없었는데." 그리고 이게 그 문제였어. 이 실험은 결국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 무섭다, 그렇게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실제로 생겼다는 건데... 이게 진짜든 아니든 간에 원래 소문과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한 거야. 겨우 우리가 찾아낸 결론은 두 개. "역시 소문 따위로 영이 생겨난다든가 그런 거 말도 안 돼. 이건 우리의 안 좋은 기운이 비슷한 영을 어디선가 불러낸 거야. 완전히 똑같은 영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서야 소문대로 행동하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까 얼추 주변에 있던 비슷한 혼령이 힘을 지니게 되서 나타났고,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아니? 이건 되려 소문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차야. 입소문은 금방 변질되고는 하잖아? 어느 순간부터 누가 이런저런 옵션을 달기 시작해서 이렇게 되어버린 건 아니려나? 우리가 모르는 새에 우리의 소문이 더욱 위험한 쪽으로 가기 시작한 거지." 우리가 만난 것이 정말 그 소문의 탓이라면 남선배의 말도 배구부 여선배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어. 난 그냥 이런 미친 짓을 변수도 생각하지 않고 강행한 셋이 미웠을 뿐이야. 그런데 그 말을 계속 듣자하니 나는 사뭇 다른 생각이 떠올랐어. '이건 달걀이 먼저라는 거 아니야?' 이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만든 귀신을 통해 소문을 퍼트린 것처럼 말했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들이 만든 귀신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잖아. 소문이라는 달걀이 퍼져서 겨우 그 달걀이 깨졌는데, 나온 것이 닭인지 공작인지 괴물인지는 알 수가 없던 거지. 그래도 달걀이니까 알을 낳는 동물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 이상을 알 수는 없는 거야. 달걀이 깨질 때까지. 그리고 우리가 깬 달걀은 제법 상상한 대로였지만, 영 달랐던 건 아닐까? 확실히 달걀만 먼저 존재해서는 닭을 상상할 수는 없어. 하지만 부화하기까지 기다린다면... 달걀만으로 닭을 상상할 수 없는 건 아니잖아? 글쎄. 실제로는 어떠려나. 난 딱히 그 말을 꺼내진 않았어. 이전 경험을 토대로 이 주제에 관해서는 어느 편을 들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결심했거든. 빨리 집에나 가고 싶지 그 자리에서 린치까지 맞긴 싫었어. 그 귀신이 아직 냇가에 남았는지는 몰라. 그래도 이건 확실해. 나는 절대 늦은 시간에 그 냇가에 가지 않아. 누가 알겠어? 이젠 그 소문이 지나치게 무성해져서 팔을 젖히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
이름없음 2024/03/25 23:43:14 ID : IMjbeK6pgnO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4/03/26 03:12:54 ID : lh9ck3xyLcJ
【절지동물】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야. 딱히 악몽이 아니더라도 그냥 잠을 설치는 경우가 잦아서 자주 꿈을 꾸고 그만큼 기억을 자주 하는 경우도 많아. 그런데 이와 관련돼서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 이어지는 꿈이라는 걸 살면서 다들 한 번쯤은 경험해봤으리라 생각해. 나도 마찬가지야. 어렸을 땐 하루이틀 연이어 꾸기도 하고 뭔가 꿈의 내용이 시원찮으면 노력하며 다시 잠들었을 때 가끔 다시 그 내용을 꾸기도 하지. 꿈을 오컬트적인 무언가로 상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 내용을 끝맺음 지어야 한다는 강박은 확실하게 느꼈던 것 같아. 그리고 그 꿈은 섬뜩하기 짝이 없는 기괴한 고등학교의 오컬트 동아리에서도 이어졌어. 난 무려 3일이나 같은 꿈을 꾸었지. 기껏 모인 동아리 시간에 우리가 활동을 하는 일은 자주 있지 않았어. 일주일에 서너번 정도가 끝이지. 아무래도 오컬트란 게 원할 때마다 주제를 꺼낼 수 있을 정도로 흔한 게 아니더라고. 어느 지역에 국한된 도시괴담이거나 딱히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강령술 따위가 유행하기 나름이니까 말이지. 그 날도 다들 각자 할 일을 지내며 시간을 보내고 있길래 내가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어. 꽤나 여러 사건이 있고 가을쯤 되니 나도 슬슬 오컬트에 관심이 생기던 시기였으니 뭐라도 걸리라는 심정이었지. "요즘 자꾸 같은 꿈을 꿔요." "개꿈이야. 그냥 잊어버려." 하지만 간만에 꺼낸 주제에도 배구부 여선배는 건성건성 대답했어. 안경 여선배나 남선배도 딱히 반응을 안 해주는 것을 보니 그 셋은 꿈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던 모양이더라. 아무래도 악몽을 몇 번 꾼 것으로 인해 오컬트적인 무언가를 겪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서 그런 모양이야. 어쨌거나 나는 배구부 여선배의 조언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어. "지하철 안에 있는 꿈이었어요. 뭐랄까... 만화에서 나오는 퇴근길의 지하철 같은 이미지. 달리는 지하철의 밖에서 창문 안에 비치는 주인공들을 찍는 그 구도 있잖아요." "그래서...? 혼자였니...? 아니면... 뭔가 변화라도 있었니...?" 내가 심심해 하는 걸 눈치챈 건지는 몰라도 안경 여선배만 겨우 반응해주었어.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서 적어뒀던 걸 보며 대답했어. 딱히 꿈일기를 적는다든가 하는 습관은 없었지만, 재미가 있겠다 싶은 것들은 적어두는 편이었거든. "첫날에는 가족 전부가 지하철에 있었는데, 날이 갈수록 조금씩 인원 수가 줄어들었어요. 마지막에 가서는 저랑 엄마만 타고 가고 있었고요." "어. 그거 진짜야?" 내 말을 듣고 조용히 생각하던 배구부 여선배는 갑작스럽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어. 꽤나 흥미가 생긴 듯 또 새까만 눈동자를 빛내면서 나를 바라봤지. 여러 사건으로 오컬트에 관심은 가졌지만, 여전히 배구부 여선배와는 쉽게 친해지질 못했어. 아무래도 그 사람과 엮이면 매번 나쁜 일만 벌어졌거든. 당시에도 그런 미소를 들이미니까 괜스레 겁이 나고 싫었던 기억이 나. 그 사람이 좋아하니 이건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 나쁜 일이다, 라고 말이지. "자세히 얘기해봐, 빨리!" "자세히 설명할 것도 없어요. 이게 끝인데... 마지막 꿈이 오늘 아침에 꾼 꿈이고, 그냥 다들 맹하니 창밖을... 그러니까, 그 구도를 찍고 있는 시선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별 내용이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어지는 꿈 자체에 재밌는 이야기가 있을까 싶어서 꺼낸 주제였어. 그런데 저렇게 관심을 가지니 분명 꿈 자체에 무언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나도 최대한 무언가 디테일한 것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영 떠오르질 않더라. 정말 그게 끝인 내용이었거든. "내가 보기엔 말이야, 그 꿈을 또 꾸게 될 거야. 하지만 이번엔... 지하철이 아닐 거야. 아마도~" "너, 그러니까 신입한테 그런 짓 좀..." "쉿! 이 다음은 절대 비밀이야. 남선배가 대뜸 짜증을 부리자 배구부 여선배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댔어. 그 의미심장한 말에 대해 몇 번이나 되물었지만, 더는 이야기해줄 생각이 없는 듯 배구부 여선배는 입을 꾹 다물었어. 나는 그 불편한 상황 속에서 이렇다 할 재밌는 이야기도 듣지 못한 채 동아리 시간을 날려먹었지. 밤이 돼서 다시 잠들려고 하니까 배구부 여선배가 해준 말이 신경 쓰여서 쉽게 잠들 수가 없었어. 나는 한참이나 잠을 설치다가 불안과 함께 겨우 잠에 들었어. 그리고 배구부 여선배의 말대로 나는 꿈을 꾸었지. 꿈은 시작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태였어. 우리에겐 새엄마가 나타나서 그 사람이랑 친해져보려고 노력하고 있었지. 게다가 그 꿈의 장소가 이사하기 전의 집으로 꽤나 낡은 집의 이미지라 단번에 악몽인 것 같았지. 나는 괜히 배구부 여선배가 한 말 때문에 이런 꿈을 꾸는 거라 생각했어. 진절머리가 나서 짜증은 났지만, 딱히 그런 옅은 생각이 느껴질 뿐 움직일 수 있는 꿈은 아니었어. 자각몽의 훈련 같은 것도 한 적이 없는 나는 뭔가의 위기에 대비할 방법도 없었지. 그렇게 새엄마와 친해지던 나날이 이어지다가 밤에 나와서 물을 마시던 내가 새엄마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 주방과 안방이 이어져있어서 분명 살짝 열린 문틈 너머로 보여야 할 얼굴이 보이질 않았지. 화장실도 주방에서 볼 수 있는 곳이라 불이 꺼진 걸 보니 화장실도 아닌 것 같았어. 그래서 이상하네~ 같은 안일한 생각이나 하면서 다시 방에 돌아가려 했는데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걸 깨달았어. 까득까득 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였지. 난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어. 강아지를 몇 번 키워봤고, 오리뼈나 개뼈를 주면 이빨로 씹는 소리가 그런 소리였지. 이사 전 주택의 옆에 붙어있는 집은 진돗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이 시간에 개뼈를 먹나? 싶었어. 하지만 난 진짜 그 집이 이사하기 전까지 그 개가 간식을 먹는 걸 본 적이 없어. 꿈이란 게 항상 그렇듯 사소한 의심을 지우고 돌아갈 법도 하지만, 궁금해서 확인하러 나가게 되었지. 그리고 봐버리고 말았어. 새엄마가 게걸스럽게 옆집의 진돗개를 뼈채로 씹어먹고 있다는 걸 말이야. 꿈은 살짝 두리뭉실한 감각의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는 느낌으로 경험하는 경우가 많아. 내가 실제로 무언가 겪는다는 감각은 위험한 상황에서나 느껴지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진다든가 할 때 말이야. 근데 그 때는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 정말 진짜 있는 일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뒷덜미의 털이 바짝 서는 것이 느껴졌고, 숨이 턱 막히면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지. 그 진돗개를 먹느라 내 존재를 몰랐다면 좋았겠지만, 굉장히 유감스럽게도 새엄마는 나를 이미 본 상태였어. 고요 속에서 떨리지 않는 두 눈을 번뜩이며 누군가 나를 바라본다는 건 어둠 속에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경험일 거야. 그건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이전에 진돗개가 당한 것처럼 가슴팍을 헤치고 벌리며 뼈 채로 몸솔을 파먹기 시작했어. 고통이라고 느낄 법한 저림이 온몸에 퍼져나갔고 난 그대로 깨어났어. 난 해봐야 지하철이 떨어진다던가 그곳에서 내리며 생길 일 정도로 생각했어. 하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꿈이었다고. 배구부 여선배의 말이 하나도 맞질 않아서 짜증이 나면서도 그런 끔찍한 꿈을 꾸었다는 게 믿기질 않았어. 숨을 헐떡이던 나는 아침을 맞이하며 학교로 향했어. 그 일이 있던 날이 목요일이라서 동아리 시간은 하루나 남아있었어. 배구부 여선배가 틀렸다고 당당히 말하려고 혼자서 뭐라고 말할지, 또 허튼 이상한 소리를 하면 무어라 반박할지 계속 머리로 망상했어. 그런데 아침 수업을 듣던 도중, 그 소리가 들려왔어. 사각사각, 하는 아주 작고 작은 소리가 말이야. 이미 난 영적인 것의 소리가 어떤 식으로 겪어지는지 알고 있었어. 그건 어느 곳에서 난다는 걸 느끼기보단 그저 내 귀에 들려와. 멀리 있다는 생각도 가까이 있다는 생각도, 내 귀가 좋아서 들렸다는 생각도 안 들어. 그저 들리지. 난 그 소리가 들리면서 일이 잘못된 걸 깨달았어. 그건 분명하게 지네 같은 기다란 절지동물이 걸어다니는 소리였거든. 그건 점심을 먹을 때부터 굉장히 심해져서 정말 귀의 고리에서 기어다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정도야.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지. 그리고 그 소리가 더욱 다가올 수 없게 되니, 그때부턴 몸이 간지럽기 시작했어. 아주 작은 솔 같은 것이 몸을 문대는 기분이었지만, 당시의 내겐 그게 그런 소프트한 감각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았어. 그건 무언가 기어다니는 기분이야. 그것도 내 살 안쪽에서 반대로 매달려 기어다니는 기분이었지. 눈의 안, 가슴팍의 안, 후두 부분과 입천장 부분이나 외설스런 장소들까지 전부. 내 몸의 구멍이라고 할 법한 곳은 전부 간지러웠어. 고통이나 간지럼증이란 감각보단 되려 몸살처럼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 온몸이 이상한 기분으로 덮여서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지. 난 매일 아침에 씻고 나가는 습관이 제대로 들여놨어서 그 날도 씻고 나갔으니 안 씻어서 간지럽다든가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그저 난 해소될 리 없는 몸을 벅벅 긁어대며 배구부 여선배의 반으로 질주했어.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며 본 커다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가관이었어. 두 눈은 핏줄이 서서 충혈됐고 얼굴은 창백한 데다가 조금 평소보다도 야윈 것처럼 보였어. 분명 내 살이 좀 까만 편인데도 시퍼런 핏줄이 얼굴에 보일 정도였지. 어디 병 걸려서 입원한 사람들처럼 말이야. 난 솔직히 조금 더 친한 남선배에게 갈까 했지만, 난 솔직하게 이게 배구부 여선배가 벌인 정말 질 나쁜 장난이라 생각했어. 정신적 교차점. 나 혼자만의 것이었던 이 이어지는 꿈에 배구부 여선배의 영향력이 더해지면서 실제로 무언가 벌어진 것이라 생각했어. 그러니 도울 방법이 있는 사람도 배구부 여선배뿐이라 생각했지. 그래서 이런 모습을 보이면 마치 꼴 좋다는 듯 날 비웃을 줄 알았어.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람." 하지만 그런 나를 본 배구부 여선배도 곧장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듯했어. 정말 놀라서 창백해진 얼굴로 내 상태를 살피더니 곧장 오컬트 동아리로 향했어. 주변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대화할 곳을 찾은 것 같아. 그곳에 가서 요즘 짜증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나는 무릎을 꿇고 빌면서 울듯이 말했어. 그런 끔찍한 경험은 다신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거든. 그런데 배구부 여선배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다행스럽게 무언가 깨달은 듯 휴대전화로 어딘가 전화하기 시작했어. 나는 배구부 여선배의 도움을 받아 보건실에서 누워있었지만, 결코 잠들 수도 없고 그냥 잠시 기다리라는 말만을 믿으며 계속 그곳에서 버텼어. 벅벅, 사각사각. 한쪽에서는 내 손톱이 한쪽에서는 뭔가 기어다니는 소리가 양쪽에서 들려왔어. 난 그 소리만을 들으며 마치 정신을 잃은 채 몸을 긁는 것만 했어. 그런 상태여서 그랬을까,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났어. 얼마나 지났을까 8,9교시의 보충 시간까지 나는 누워만 있었고 7교시가 끝나니까 보건실 선생님은 열쇠로 문을 잠구라고 대충 설명한 채로 퇴근해버렸어. 그리고 그런 오랜 기다림 끝에, 검은 봉투를 들고 있는 안경 여선배와 배구부 여선배가 함께 등장했어. 나는 무슨 일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반가움에 침대에서 몸을 던져 둘한테 다가갔어. "이거 마셔!" 배구부 여선배는 안경 여선배가 들고 있던 검은 봉투를 건네주며 외쳤어. 난 뭔가 음료 같은 걸까...? 싶어서 그 봉투를 받았는데, 그 정체를 알아보기도 전에 나는 헛구역질밖에 나오질 않았어. 짙은 쇳덩이 냄새. 그건 봉투 너머에서 느껴질 정도로 뜨끈한 피였어. "이딴 걸 마시라고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너 엄청 질 나쁜 영에 씌인 거야! 죽은 네 혼이 씌인 거라고!" "그게 뭔..." 나는 욕지거리를 뱉었어. 내가 그렇게나 흥분한 상태였는데도 배구부 여선배는 어떻게든 설명하려 애썼어. 그러니까, 내가 예상한 것이 어느 정도는 맞아. 아무 의미 없는 꿈에 나는 무언가 기대감을 걸고 있었어. 게다가 예전에 그랬듯 '이 끝맺음이 궁금하다'라는 마음으로 다시 꾸고자 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지. 그것은 나 혼자의 염원이었어. 하지만 혼자서는 교착점을 지을 수 없어. 그런데 나는 그 3일간의 꿈으로 여러 개의 정신이 얽히게 되었다는 거야. 배구부 여선배의 이론대로라면 말이지. 그래서 남선배와는 달리 배구부 여선배는 대충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는 거야. 그런데 예상 외로 그 수준이 너무 깊어졌대. 그것이 배구부 여선배의 방향성이 안 좋은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짙어진 불안감이 어지럽게 만든 건지는 모르지만 혼선이 생기고 그 꿈을 꾸게 된 거지. 거기서 생긴 영향력은 '죽은 나'를 만들고 그곳에서 난 죽어 시체가 된 거야. "그 집, 낡았다고 했지? 주변에 있던 벌레들이 네 시체에서 기어다니는 거야. 실제로 그런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도 되고 그런 비슷한 영이 끌려왔다고 생각해도 좋아. 어쨌거나 너는 그런 영 때문에 그 시체가 느끼는 벌레가 기어다니는 감각을 전부 전해져 받는 거라고." "그게 피랑 뭔 관계인데요!" "지네 같다고 했지? 뭐... 원래는 지네가 닭피는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원래라면 닭과 지네는 완전히 반대의 기운이야. 한국에선 최소한 그런 이미지가 있지. 실제로 이게 마셔서 네 몸에 닭의 기운이 돌지는 몰라. 그래도 그냥 그렇게 믿어보는 수밖에 없어! 이거 외엔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고! 우린 부르는 방법이나 알지 퇴마 같은 걸 몰라!" 나는 다급해보이는 배구부 여선배의 말에 하는 수 없이 안에 두 여러 겹으로 쌓인 비닐봉지를 찢어 이빨로 봉지를 깨문 채 흘리지 않도록 몇 모금 들이켰어. 비리고 뭔가 덩어리진 기분에 완전히 금속의 쓴 맛. 헛구역질이 나온다 같은 표현으로는 부족했어. 그냥 몸이 거부하고 뱉어내려 하는 수준이었지. 그래도 몇 모금 마시고 나니까 점점 그 불쾌한 감각에 머리는 어지러워도 그 기괴했던 감각들은 정말 멀어지는 기분이었어. 몇 번이나 화장실의 변기에 속을 게워내고 나니 현기증은 심해졌지만 분명하게 그 감각들은 사라졌어. 이게 통했다는 생각이 정말 끔찍하면서도 다행이라고 여겼어. 이걸 마시기까지 했는데 낫지 못한다면 너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거든. 후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꿈은 분명 누가 점점 죽어가는 꿈의 이미지라고 생각했대. 어쩌면 나도 그 이미지를 눈치챘을지 모르고 마지막 생존자로 내가 남는 악몽을 꾸리라 생각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완전히 반대였지. 그 반대라는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깨달았어. 시간 순서의 반대로 꿈을 꾼 것일지 모른다고 말이야. 새엄마는 엄마를 이미 처리했고 나도 처리했던 거야. 그리고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아빠, 그리고 가장 구석에 있던 할머니와 누나가 같이 자는 방으로 향한 거겠지.(제일 처음 모두 있던 전철 속에서 사라진 게 누나와 할머니. 그 다음이 아빠.) 나도 오컬트 동아리의 모두도 딱히 꿈이 다른 세계라던가 그런 말을 믿지 않았어. 그냥 꿈은 꿈이라는 생각이 짙었지. 그런데 이 일을 들은 남선배도 살짝은 그 가능성에 대해 열어두게 된 모양이야. 남선배는 내 기가 순간 약해져서 무방비해진 거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이 상황이 떨떠름한 기분이었어. 난 이 이후로 꿈일기고 뭐고 꿈을 오래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아. 어느 순간에 또 나쁜 우연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길 빌면서 말이야. 그리고 피 말인데, 그 일이 있고 한참이 지나서 물어보니 안경 여선배가 이렇게 말해줬어. "그나저나 그 피는 도대체 어떻게 구한 거에요? 뭐... 무당 같은 거라도 만나신 거에요?" "우리집.... 정육점을 하는데... 가족끼리 복날에 먹으려고 종종 키우는 닭이 있어서... 사정사정해서 한 마리 도축해달라고 했어... 후후... 이런 걸 구하는 오컬트 매점이라도 있을 줄 알았니...?" 배구부 여선배는 내 말을 듣고 그 모든 가능성들을 떠올렸을 뿐만 아니라, 안경 여선배가 이런 상황이라는 걸 곧장 떠올린 것 같았어. 난 배구부 여선배에게 안경 여선배와 나는 그냥 장난감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걸 보면 딱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어. 분명 우리가 했던 말을 잊지 않고 다 기억하는 모양이더라. 서먹했던 배구부 여선배와의 관계가 조금 나아지기 시작한 계기가 됐던 것 같기도 해.
이름없음 2024/03/26 06:47:16 ID : GrdQsnO2oE0
ㅂㄱㅇㅇ 내용 진짜 흥미롭고 재미있다! 글도 잘써서 더 잘 읽히는 것 같아
이름없음 2024/03/26 09:20:17 ID : mK7vBgpbzQk
글은 잘 쓰는 게 아닌 것 같아 ㅋㅋ... 나도 한번씩 들어와서 오타는 없나 다시 읽어보고 하는데 어색한 표현이랑 오타가 너무 많더라. 다음부턴 조금씩 퇴고를 하는 편이 낫겠어. 기억나는대로 올리고 있으니까... 그래도 봐줘서 고마워! 재밌게 읽어줬으면 해
이름없음 2024/03/26 11:37:22 ID : DtfTSHxu7gq
필력 뭐야…. 너무 좋다!!!!!! 진짜 재밌어
이름없음 2024/03/26 12:16:03 ID : lh9ck3xyLcJ
고마워! 생각보다 다들 재밌게 즐겨주는 것 같아 다행이네. 오늘도 두 개 정도 올려볼 것 같으니 재밌게 봐줘! o(〃^▽^〃)o
이름없음 2024/03/27 12:35:50 ID : lh9ck3xyLcJ
【애완 -상-】 우리 학교에는 각자 개성이 너무 강한 사람들이 셋 모인 오컬트 동아리가 있었어. 나도 그 사람 중 하나였고. 하지만 동아리가 오컬트라는 주제를 지닌 것도 문제지만, 억지로 동아리를 살려놓기도 했고 선생님마저 바지사장이라 활동을 추진해주지도 않아서 우린 이런저런 활동을 많이 하진 못했어. 하지만 그런 우리라도 굉장히 피크인 순간이랄까, 지나치게 활동이 많았던 시기가 있었어. 바로 여름방학인 때였지. 3학년인 선배들은 학업 때문에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학기가 진행되던 시기보다는 훨씬 나았어. 둘 다 예체능이었기 때문에 학원 방학이 오기 전까지는 평소 동아리 활동 때처럼 가끔 만나는 정도였지만 여태껏 동아리 활동이 시원찮았던 것의 보상이랄까, 배구부 여선배와 남선배가 돈을 모아서 합숙이라는 명분으로 오컬트 여행을 떠나게 됐어. 총 인원은 다섯이야. 평소의 오컬트 동아리와 안경 여선배의 친구인 다른 학교의 여선배가 따라왔어. 이전에 몇 번 같이 사건을 겪기도 했고 자기 여행비는 직접 지불한다고 해서 우리도 그냥 함께 하게 되었어. 이 선배는 안경 여선배랑 비슷해서 오컬트 현상을 쫓기보단 강령술이나 흑마법 같이 실제로 실행하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야. 안경 여선배는 비교적 골고루 좋아하는 반면에 이 선배는 극단적으로 치우쳐져 있는 편. 적당한 호칭이 떠오르질 않으니 주술사 여선배라고 부르겠는데 더 나은 호칭 있으면 추천 받을게. 우린 서해가 붙어있는 시골 쪽으로 향했어. 난 남선배와 배구부 여선배의 돈만으로 어떻게 여행을 준비했나 했더니만, 지낼 곳이 배구부 여선배의 집이었어. 배구부 여선배 외삼촌 혼자서 지내던 주택인데 여자친구와 여행 나가면서 빈 집을 봐줄 겸 시골 여행을 권유했던 거래. 둘은 거의 밥값과 교통비만 모았던 거지. "꽤나 튀는 집이네요." 나쁜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어. 시골인데도 불구하고 제법 좋은 집이 떡 하니 서 있었거든.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배구부 여선배의 외가가 꽤 잘 사는 모양이었어. 어쨌거나 나와 남선배가 같은 방, 퀸사이즈 침대가 있는 큰 방에 셋이서 지냈어. 짐을 풀자마자 우린 배구부 여선배에게 설명을 들었어. "엄마한테 물어보니 재밌는 이야기가 둘이나 있는 모양이야. 각자 흥미 있는 주제로 팀을 꾸려서 집에 돌아갈 때까지 알아내는 거지~" 제시된 두 개 중 하나는 개구리 조각상. 개구리를 좋아하던 남자애가 여름 방학 숙제로 올챙이의 성장 과정을 관찰하려고 채집을 나섰다가 실족으로 그대로 강가에 쓸려가버렸대. 그 아이를 기리려고 마을의 목공예를 잘하시는 분이 개구리 나무 조각상을 세워뒀대. 그런데 한밤 중이 되면 그 개구리 조각상에서 개구리가 우는 소리인지, 사람이 숨이 찰 정도로 힘들게 울고 있는 소리인지가 들린다는 것 같았어. 나머지 하나는 아귀에 관한 내용이었어. 그... 알 사람은 알 거야. 불교 신화를 보면 목구멍이 바늘처럼 얇고 음식을 먹으려 하면 전부 불타버리고 하는 그 귀신 같은 것 말이야. 산의 꽤 위에 있는 오랫동안 버려진 절이 있는데, 한 아귀가 그곳에서 스님들이 어쩌다 한 번 버리는 남은 음식을 먹으려고 지낸다고 했어. 그런데 절이 버려지게 되고 외진 곳에 있는 만큼, 더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된 아귀가 악귀로 변질되어 주변의 작은 산짐승을 잡아먹으려 하지만, 먹지 못해 불에 그을려진 시체만 나타난다는 이야기였어. 죽어도 아귀에 관한 건 가고 싶지 않았어. 이 사람들한테 오컬트란 아슬아슬하게 위험하고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이야기일수록 흥미롭게 되지만, 난 그 아슬아슬함이 싫었어. 그런데 문제는 개구리 조각상에는 배구부 여선배 혼자만 택한 상황이었어. 배구부 여선배의 감을 믿었다간 또 나쁜 일이 엮일 것 같았어. 아직 꽤나 서먹한 사이라서 둘이서만 다닌다는 것도 불안했고 말이야. 물론 내 의지는 의미 없었어. 상대가 누구든 간에 밤에 활동할 텐데 혼자 일을 보내기도 뭐했고, 이 여행에 큰 도움이 된 것도 배구부 여선배인데 괜히 혼자 가면 버려진 것 같아서 마음이 딱하더라고. 나는 하는 수 없이 개구리 조각상을 택했어. "물론 바다에 놀러가거나 하기도 할 거야. 바다에서 잔뜩 놀고 몸이 나른나른할 때에 찾아가야 귀신도 만만하게 보고 나타나지 않을까?" '이 사람은 귀신한테 만만하게 보이고 싶은 걸까.' 터무니 없는 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뱉었어. 그래도 기대는 됐어. 바다라면 되려 이쪽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게 있거든. 암튼 바다에선 재밌는 일이 없었어. 그냥 청춘 따라하기였어. 안경 여선배와 주술사 여선배는 모래성이나 짓고 놀았고 남선배는 배구부 여선배한테 끌려다니면서 SNS용 사진이나 찍고. 나는 선물 받은 거 바다에 던지고 있었어. 그리고 이제 첫 조사 시간이 됐어. 등산이 오래 걸릴 아귀 팀은 고기만 먹고 바로 출발했고 나와 배구부 여선배는 조금 더 시간을 태우다가 출발했어. 딱히 서로 할 말이 없어서 어색한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의외로 선배는 그 분위기를 깨려고 하지 않았어. 다 같이 있을 때는 언제나 먼저 아이스 브레이킹을 했었던 사람이라 이상한 일이 맞았다. "그... 그러고 보니 왜 이곳으로 왔나요? 오히려 선배 취향은 아귀가 더 맞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말을 걸었어. 야밤에 조용히 걷자니 그건 그거대로 무서워서 말이지. 물음에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배구부 여선배는 이내 풀어진 표정으로 답했어. "무슨 착각을 하는 거야. 난 딱히 안 가리거든~ 오컬트라면 뭐든 재밌잖아. 게다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어깨를 으쓱이고는 하는 말이... "그건 확실히 걔 취향이야. 양보해주는 편이 더 모두에게 재미있을 테니까." "남선배 취향이라고요?" 내가 되묻자 되려 무슨 문제 있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 했어. 지금까지 남선배와 이런저런 사건을 다니긴 했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심령 현상에 지나지 않았어. 무언가 해하더라, 저주를 내린다더라 하는 위험해 보이거나 하면 딱히 흥미를 가지지 않는 듯했지. 그런데 대놓고 작은 동물을 사냥한다던가 하는 내용의 이번 괴담이 남선배의 취향이라니. 당시의 나한테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더라. "전 남선배는 좀 더... 음... 소프트한 취향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소프트 한 게 뭔데?" "저번에 저랑 둘이서 해결한 학교 괴담이라던가... 다함께 조사했던 산 속 인형이라던가?" "음... 확실히 올해엔 그런 것만 하긴 했네! 그런데 말이야, 걔도 만만치 않아~ 맨날 나만 무서운 거 들고 온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가끔 무서울 정도로 굉장하다고." 이때까지만 해도 뒷담화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래도 내가 지나치게 남선배만 따르다 보니까 괜히 심술 부리는 거라 생각했지. 어쩌면 이때 깨달았어야 했다고 생각해. 안경 여선배나 주술사 여선배도 곧장 아귀 사건을 따라갈 정도로 구미가 당기는 사건인데, 배구부 여선배가 양보한다니. 평소의 내 이미지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어. 분명 무슨 일이 있던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었는데, 아마 그냥 부원을 위해 진지하게 양보한 것 같았어. "그리고 말이야~ 방금 전부터 우리 쪽 사건을 굉장히 쉽게 보는데, 이거 그렇게 '소프트'한 일 아니거든?" 아니면 처음부터 이쪽이 훨씬 재밌다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고. 진짜 속내는 나도 몰라. 근데 확실히 우리 쪽 일도 이야기가 있긴 해. 하지만 우선은 남선배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네. 그러니 우리 쪽 이야기는 우선 넘겨둘게. 나와 배구부 여선배는 진작에 돌아와서 자려 했어. 내일 점심 쯤에 갯벌 체험 가기로 해서 많이 자두고 싶었거든. 그렇게 여느 때처럼 뒤척이면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자꾸 들려오는 거야. 그냥 나처럼 뒤척여서 나는 이불 소리 같은 게 아니라 가방 속을 뒤지는 이상한 소리가 말이야. 나는 행여나 도둑이라도 들은 건가 싶어서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어둠 속에서 남선배가 가방 속을 뒤지고 있더라고. "아, 놀랐잖아요! 짐 정리하시는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도둑인 줄 알고 소리부터 지를 뻔했어요." "하하, 미안. 우리 이제 왔거든. 진짜 1시간 산만 오르는데 다리 떨어지는 줄 알았어." "지금이라도 주무셔요. 많이 못 자면 내일 힘드실 걸요." "그래. 그럴까?" 약간 어색한 면도 있는 것 같았지만, 본래 말하기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 가끔 그럴 때가 있었어. 오늘도 그냥 그러는갑다 싶었지. 나는 그때 확실하게 했어야 했어. 그 사람이 가방에 뭘 집어넣는지 말이야.
이름없음 2024/03/27 13:41:26 ID : SIGrbDs9By1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4/03/28 03:34:01 ID : lh9ck3xyLcJ
【애완 -중-】 갯벌 체험은 꽤나 재밌었어. 평소와는 다른 경험을 하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니까. 오컬트란 것도 결국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경험에 즐기는 것인 만큼, 우리에게 딱 맞는 종목이었을지도 몰라. 우리 셋한테는 분명 그랬어. 남선배와 배구부 여선배, 그리고 나는 신나서 조개 같은 걸 잡고 질퍽거리는 진흙에 다리가 빠지는 것만으로 웃고 그랬지만, 어째 안경 여선배와 주술사 여선배는 머뭇거리면서 긴장한 듯했어. 어쩌면 그 얼굴은 겁에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 나는 둘에게 뭔가 안부라도 물어야 하나 싶었지만, 워낙 이곳 사람들은 겁을 먹는다든가 하는 감각과는 달라서 말을 걸지 않기로 했어. 몸이 안 좋거나 하면 분명 혼자서 해결하리라 생각했지. 3시간 정도를 그리 놀다가 물이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고 슬슬 지쳐서 집으로 돌아갔어. 그런데 그때까지도 주술사 여선배는 손톱까지 깨물고 있을 정도로 굉장히 긴장한 모양이더라. 그건 절대 몸이 아파서 나올 만한 표정이 아니라, 무서워하고 있는 게 분명했어. 그 둘이 그렇게 겁 먹는 건 처음 보는 일이라 그제야 관심이 생겨 둘에게 물었어.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응? 아, 아냐아냐. 딱히 별일 없어." "뭐.... '아직은'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 주술사 여선배는 대충 질문을 피하려던 모양이었지만, 안경 여선배는 내가 끝까지 답을 알아내려 할 걸 이미 눈치챈 듯 의미심장한 말로 입을 뗐어. 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채 말하길 기다리자 안경 여선배도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말을 이었어. "어젯밤에... 남선배가 뭔가 하진 않았니...?" "네? 그냥 잘만 자시던데요." "음... 그럼 역시.... 우리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네...." 내 도움 안 되는 대답에 질린 건지 아니면 정말 착각이라 생각했던 건지는 몰라. 어쨌거나 확실한 건 내 대답을 듣고 더 말해주려 하진 않았어. 그리고 그건 내게 되려 확신을 주었지. 뭔가 께름칙한 일이 아귀 쪽에서는 벌어졌다고 말이야. 아니, 어쩌면 아귀 쪽이 아니라 남선배 쪽일지도... 남선배는 지나치게 평소 같았어. 어제의 일을 신나게 떠들거나 할 법도 했지만, 우리에게 있던 일도 묻지 않고 자신에게 있던 일도 말하질 않았어. 아예 그쪽 주제를 꺼내지 않게끔 하듯이 말이지. 이상한 일이라는 걸 그렇게 늦게 눈치채긴 했지만, 배구부 여선배는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라 물어볼까 고민했어. 괜히 둘이 싸우기라도 하는 날엔 분위기만 망친 채로 조사를 나갈 테니까. 저녁을 먹는 순간까지도 분위기가 묘했어. 그냥 내가 눈치를 보니 그렇게 느낀 것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내가 느끼기엔 그랬단 말이지. 그런데 배구부 여선배만 혼자 신나서 고기 뒤집으면서 "고기 맛있겠다! 야야, 조개 잡아온 것도 올려볼까?" 이러고나 있으니 한숨 나오더라고. 어제 그랬던 것처럼 아귀 팀이 먼저 출발하고 우린 잠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어제 있던 일로 조금은 말이 트긴 했지만, 여전히 우린 어색하게 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지. 나는 마당에서 시선을 돌려 저 멀리 그들이 떠난 산등성이를 보며 어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그리고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을 건지 상상했어. 하지만 도저히 나쁜 일을 벌이는 남선배의 이미지가 떠오르질 않아 미간만 주무르며 한숨을 깊게 내뱉었어. "고민이라도 있어?" 내가 대놓고 불안해 하자 배구부 여선배가 말을 걸어왔어. 형식적으로 묻는 거라 생각했지만, 정말 궁금했던 것 같아. 나는 좋은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말하기를 꺼려하다가 조금만 말하기로 마음 먹었어. "저 아귀 괜찮은 걸까 싶어서요. 행여나 사람이라도 홀리면..." "남선배가? 그럴 리가. 걔는 홀리거나 할 리가 없어! 애가 좀 비실비실하게 보이긴 해도 기는 진짜 세거든. 잘 보긴 하지만, 그렇다고 씌일 일은 거의 없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런 게 아니라면..." 나는 어제 배구부 여선배가 해준 말을 떠올렸어. 배구부 여선배조차 무서워 할 정도로 굉장하다. 난 배구부 여선배가 '놀랐다'는 건 종종 보지만, '무섭다'라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았어. 입단 테스트 때 우리가 혼란과 공포로 휘둘리는 모습을 보며 그 어떤 때보다 즐거워하던 그 사람조차 놀라는 수준이라니. 정말 그런 게 가능했다면 안경 여선배와 주술사 여선배가 그렇게까지 긴장하는 것이 놀랍지도 않았어. "...됐어요." 하지만 역시 거짓말이라 생각했어. 내가 안 믿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니까 배구부 여선배도 흥이 식은 듯 더는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해주려 하질 않았어. 우린 그 날의 조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어. 어제도 그랬듯, 우리가 훨씬 먼저 도착한 상태였지. 1시쯤이면 우리도 충분히 늦게 도착한 거였지만, 거긴 등산과 하산만 도합 2시간을 걸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게다가 조각상만 빤히 바라보던 우리와는 달리 불교 주변의 동물 사체를 찾거나 해야 했기에 그 조사 시간은 당연히 더 길어졌을 거야. 돌아와 내가 씻을 시간이 되길 기다리며 마루에 앉아있으니, 배구부 여선배가 머리에 물기를 털어내며 다가왔어. "내가 하나 예언 해볼까?" "선배의 예언은 언제나 나쁜 쪽으로 적중해서 싫은데요." "왜~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배구부 여선배가 무릎으로 내 등을 툭툭 밀치며 키득거렸어. 오늘 보인 모습 때문에도 있고 이곳에 와서 더욱 어색하게 내가 행동하니 조금 짜증이 났던 모양이야. 당시엔 뭔가의 배려 없이 나를 놀려야겠다는 생각만을 지닌 것 같았어. 하지만 그 날 조사에서 알아낸 게 조금 마음이 불편한 주제기도 했고 남선배 일은 아직도 예상이 되질 않아 스트레스 받던 내겐 그냥 그런 애 같은 행동이 다 싫었어. "하... 말해봐요, 그러면." 내가 귀찮다는 듯이 답하니까 배구부 여선배는 한참이나 입을 다물더니, 콧방귀를 한 번 뀌며 자기 방으로 향했어. "오늘 해 뜨기 전에 남선배 그 자식 분명 다시 나간다~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돌아오는 거 보자마자 묶어두던지 하는 게 나을걸~" '...남을 하루라도 헐뜯지 않으면 탈이라도 나는 건가?' 진짜 한 번 화를 내려다가 참으며 씻고 방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잠들었지. 돌아오는 걸 기다려볼까 했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남선배를 의심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쉽게도 말이야, 내가 틀렸어. ...부스럭부스럭. 새벽 3시 정도 됐을까, 다시 들려오는 잡음에 깬 나는 조용히 실눈으로 그곳을 바라봤어. 그리고 배구부 여선배의 말대로 남선배는 가방을 챙기더니 갑자기 밖으로 나섰어. 확실히 그 말을 듣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남선배를 묶어두는 것 말이야.
이름없음 2024/03/28 13:03:00 ID : lh9ck3xyLcJ
【애완 -하-】 나는 따라서 나갈 심산으로 마루까지 나갔어. 하지만 쉽사리 그곳까지 쫓아가진 못한 채 한참을 기다렸어. 쫓아가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들질 않았지. 그냥 산책이면 어떡하지? 아니면 깜짝 파티를 위해 뭔가 물건이라도 사러 나갔다던가? 절로 향했다는 확신이 없는 이상, 난 움직일 수 없었어. 어쩌면 이미 둘이 계획해서 서프라이즈로 뭔가 계획했기 때문에 나갈 걸 알고 있었다면? 내가 방해하게끔 유도해서 사이 좀 틀어지게 하려던 거면 어떡해? 그래. 나도 알아. 꽤나 답답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거. 하지만 그 정도로 당시엔 남선배 외엔 그닥 믿을 사람이 없었어. 어쩌면 그렇기에 비로소 나쁜 모습이 싫어 부정하던 것일지도 몰라. "바보냐." 그리고 진즉 알고 있었는지 배구부 여선배가 밖으로 나왔어. 나는 또 머리만 아파질 일이라고 생각해서 혀를 찼지. 내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끙끙대고 있으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으며 먼저 말을 걸었어. "난 따라갈 거야. 뭐, 대충 예상은 가지만, 그래도 확실히 뭘 하는 건지 보고 싶어서~ 너도 올 거면 오던가~" 배구부 여선배는 다짜고짜 앞장 서기 시작했어. 나는 정말 남선배가 절로 간 것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먼저 출발하는 게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나도 따라붙었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에요?" "글쎄~ 아마 무서운 일이겠지. 너도 좋아하잖아, 무서운 일." "너무 무섭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산을 오르는 1시간 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그게 끝이었어. 서로의 복잡한 감정이 이끌어낸 최악의 결과였어. 한참이나 걷고 걸으니 가파르고 높은 돌계단이 나타났어. 그걸 보니까 정말 무서운 장소에 우리가 왔구나 하는 게 실감이 돼서 닭살이 돋는 기분이더라. 올라가서 보니 남선배는 보이지 않고 무너질 듯한 절만 우두커니 세워져 있더라. 버려진 절에 관한 뭔가 환상적인 이미지가 있다면, 되도록 버리는 편이 좋을 거야. 특히나 오컬트적인 소문이 있는 절이라면 말이야. 얌전하고 몽환적으로 무너져 있다거나 공포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이미지는 절대 아니야. 폐가에 가본 적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알겠지만, 거기도 별 다를 것 없었어. 쓰레기가 넘쳐나고 야생 동물들이 창궐하며 그런 배변 덩어리가 여기저기 쌓여있지. 내부는 거미줄과 부화하지 못한 벌레 알 같은 것이 마구잡이로 있고 이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천 거적대기가 이리저리 널려있어. 강가나 가던 우리와는 달리 이런 곳에 매번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더라. "주변에 없는 모양이네~ 뭐, 소문도 딱 절에 있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주변 야생 동물이라도 찾아봐야 하려나~" 확실히 그 절 내에 있는 것 같진 않았어. 너무 가파른 곳에 갔을 리는 없으니 우리는 실족이라도 일어나지 않게끔 조심해서 붙어다녔어. 그리고 옆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니까 휴대전화의 플래쉬에 이상한게 비춰지더라. "...저거 제가 생각하는 그거에요?" "....뭐~ 비슷하려나? 저녁에 삼겹살을 누가 훔쳐가는 건가 해서 그렇게 눈치를 줬었는데, 여기 있었네~" 새들이 개구리 같은 걸 나뭇가지에 꽂아두듯 나뭇가지에 잘린 삼겹살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어. 그건 구웠다기보다 분명하게 불에 그을려져 있다는 것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우린 서로 말하지 않아도 어떤 경위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있었어. 헨젤과 그레텔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을려진 삼겹살은 계속 어디론가 이어져 있었어. 우린 바로 그 뒤를 쫓았지. 점점 귀는 먹먹했고 롤러코스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나 느껴질 법한 불안감과 불쾌감이 온몸을 더듬었어. 그리고 남선배와 그걸 마주하자 익숙한 감각이 휘몰아쳤지. 가슴은 세게 한 대 두드려 맞은 듯 아파왔고 심장은 느리게 뛰며 몸은 차가워졌어. 하지만 입단 테스트 때와는 수준이 달라. 이번엔 배구부 여선배가 풀파워로 정말 밀쳐낸 기분이었어. "어, 뭐야. 들켰네." 남선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딱히 놀란 기색은 안 보였어. 아마 들킬 걸 예상한 것 같기도 해. 그저 이전에 배구부 여선배가 보였던 것과 똑같은 상기된 얼굴로 공허한 미소를 내비쳤어. 긴 나무 막대 끝에 삼겹살을 끼우고 있던 남선배의 뒤로는 뭔가... 글쎄 아직도 뭐라고 표현할지 모르겠어. 검은 연기 같기도 했고, 뭔가 아지랑이 같은 느낌 같기도 했어. 그런 거대한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히 보였다기보단 느껴졌어. 내게는 보이지 않지만, 남선배와 배구부 여선배는 보이기라도 하듯 어딘가를 빤히 응시하더라. "...하하, 굉장하네. 아귀한테 밥이라도 주려는 거야?" "응. 그런데 전혀 먹질 못하네. 후후, 이것 좀 봐. 애완동물의 먹이 반응을 지켜보는 기분이지 않아?" 배구부 여선도 눈은 찌푸린 채 입만 겨우 웃으며 물어봤어.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선배는 신난 듯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움직였어. 그러자 정말 그 삼겹살은 순식간에 익혀지더니 곧이어 우리가 본 것처럼 그을려졌어. 정말 미친 짓이었지. 귀신을 상대로 약올리는 듯한 저 행위. '왜?' 그 말과 함께 불손하다는 생각이 절로 떠오르더라. 지금까지 우린 모두 그런 짓을 일삼아 오긴 했어. 오컬트란 게 본질은 그런 것과 가깝다고 생각하거든. 입단 테스트만 해도 스무 명 남짓한 사람에게 목적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영을 만들어 보려 하질 않나, 실제로 감당도 못할 소문을 퍼트려 냇가에 귀신을 퍼트려 놓질 않나. 배구부 여선배가 혼자서 계획한 것들만 봐도 이런 식이야. 하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순했어. 나는 그 이상한 것의 압도감 때문인지 아니면 극도로 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헛구역질이 나왔어. 조금 물러서서 그게 보이지 않는 장소까지 먼저 뒤돌아 섰지. 그러자 내 뒤로 배구부 여선배의 외침 같은 권유가 들려왔어. "야~ 적당히 하고 돌아가자. 슬슬 애들 깬다고. 뭐~ 애당초 네가 이런 모습 보여줘서 이미 잔뜩 겁 먹은 모양이니 아예 안 자고 있을지도, 하하..." "에이. 걔네들 앞에서 이런 짓까진 안 했지. 그냥...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 장난스럽게 말했을 뿐이라고?" 뒤돌아 보니 남선배는 흥이 다 식었다는 듯 흥미가 사라진 장난감을 던지는 아이처럼 비닐 봉투 채로 바닥에 내던진 채 우리를 향해 다가왔어. 아직 이 모든 일에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이 "너도 왔네?" 같은 말을 하며 내게 미소 짓더라. 나는 덜컥 화가 났어. 여태껏 봐온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으니까. "...이런 짓, 의미가 있나요?" "응?" "혼이란 게 그저 존재하는 거라면... 이런 약올리는 듯한 행위는 분명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그냥 나쁜 짓,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어요. 왜 이런 짓을..." 내 말에 배구부 여선배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어. 그리고는 먼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어. 남선배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들을 벌인 건지. 내가 궁금했던 이유는 하나뿐이야. 남선배는 이런 명분을 되게 깊게 따지던 사람이야. 우리가 실험쥐 취급을 받는 것에 매번 그러지 말라고 말리던 이유도 이거고. 배구부 여선배가 끝내 자리를 비우고 나만이 혼자 휴대전화 라이트를 비추며 표정을 잃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답을 얻어내려 했어. 그러자... "딱히 의미는 있잖아. 아귀라는 건, 신화 속 이야기가 옳다면 벌을 받고 있는 거라고? 나쁜 짓을 저지른 놈이란 거야. 넌 죄인을 바라볼 때 연민을 느끼는 타입이었나?" 나는 더 캐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어. 틀린 말은 아니야. 명분도 의미도 있어. 하지만 의미가 있다고 모든 일이 용납되는 건 아니야. 이미 그걸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어. 더 캐묻는 건, 그저 넘겨짚을 수 없는 상처만 서로에게 줄 것이 뻔했지. 옆에 아직 남아있는 그 존재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모든 일이 어지러웠던 건지 관자놀이가 계속 지끈거렸어. 겨우 남선배를 앞장 세우며 돌아가려 했어. 그냥 이 일은 빨리 있고 싶었어. 그런데 뒤이은 한 마디가 내 뇌리에 꽂히더라. "뭐, 실은 궁금했을 뿐이야. 귀신도 애완용으로 기를 수 있으려나 해서~♪" 난 그제야 깨달았어. 그 사람은 소프트한 걸 좋아한다든가 그런 게 아니었어. 재미있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야. 어쩌면 배구부 여선배보다 더. 하지만 명분을 따져. 그리고 그 명분이 충족되면... 필사적으로 그 재미를 쫓는 거야. 영에게 '인간으로써의 룰'은 없어. 그것이 오늘 벌인 행동의 근간이었지. 그 후로 그것과 비슷한 감각을 남선배에게서 직접적으로 느껴본 적은 없어. 그러니 저 상상을 실현한 적은 없을 거야. 뭐,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말이지. 다 합치면 1.3만자는 나오는 분량이라 짧게 세 번 끊어봤어. 너무 자주 끊은 감이 있나~ 싶기도 한데 어땠을지 모르겠네. 쓸데없이 길게 이야기했나 싶기도 하구. 마지막 부분만 떼어서 이야기하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르겠네. 조각상 이야기는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이야기 해줄 게. 일단은 다른 이야기를 더 적고 싶네. 그럼 시간 나면 또 적어둘게. 다음에 또 봐! (~ ̄▽ ̄)~
이름없음 2024/03/30 01:41:58 ID : lh9ck3xyLcJ
【봉숭아】 여름이 끝나갈 즈음, 아직 더위가 사라진 것도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더운 것도 아닌 시기에 우린 한참이나 이런저런 학교의 화단에 침입할 수밖에 없었어. 봉숭아를 키운다고 하는 학교란 학교는 정말 다 찾아가봤지. 초등학교 급식실 옆의 작은 화단, 교내 공원이 있는 대학교, 진짜 별별 장소를 다 간 것 같아. "진짜 쪽팔려 죽겠어요.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진지하게 여긴다니... 누가 퍼트린 괴담인지 몰라도 진짜 찾아가고 싶을 정도에요." 내가 투덜거리자 배구부 여선배도 헛웃었어. 대부분의 일을 계획하는 건 배구부 여선배와 남선배였지만, 이건 가끔 있는 안경 여선배의 안건이었어. 평소 실험쥐 역할을 하던 우리가 안건을 물어오면 둘은 양심이 남아있는지 적극적으로 도와줬고, 나까지 휘말리게 된 거지. "그래도 재밌잖아~ 봉숭아 씨앗 터지지 않게 모아오기라니... 아, 터졌다." "고스트헌터보단 봉숭아헌터가 돼서 돌아다니는 판국에 그런 말이 나와요?" 나는 최대한 손이 떨리지 않게끔 힘을 주며 작은 전지가위로 봉숭아 씨앗을 줄기와 분리했어. 겨우 터트리지 않고 떼어낸 그걸 상자 속에 조심히 넣는 것도 일이야. 하나가 잘못 터졌다간 연쇄적으로 터지기도 하는 걸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됐었거든. 우린 그런 멍청한 짓을 이어가며 계속 봉숭아 씨앗을 땄어. "그래도 이 지긋지긋한 것도 오늘이면 끝이네요." "그러네. 난 둘이 강령술 하는 거 한 번도 못 봤었는데, 잘 됐네~" 맞아. 이건 강령술에 관한 이야기였어. 그것도 꽤나 황당한 사건이었어. 사건의 발단은 이래. "혼에도 무게는 있을까요....?" 평소처럼 아무 주제도 꺼내질 못해 조용하던 때에 안경 여선배가 속삭였어. 우리 모두가 곧장 대답했어. "없지~" "있지 않겠냐?" "없겠죠." 당연하다는 듯 다들 헛웃으며 답했지만, 어째 의견이 갈리는 듯했어. 나와 배구부 여선배는 남선배를 빤히 바라보며 곧장 눈살을 찌푸렸어. "너 오늘따라 낯설다~ 맨날 정통 오컬트나 좋아하는 척 했으면서 이런 부분은 또 자기 고집이 있는 모양이야?"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물론 모든 영이 지닌 거라고 하진 않겠지만, 분명하게 영은 현실 세계에 간섭할 힘이 있어. 힘이 있다는 건 곧, 무게가 있단 소리겠지." "그런 부분이야말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라던가, '간섭'과 같이 영 그 자체의 힘이 아니라 영과 인간 사이의 힘 아니었나요? 전 줄곧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래. 게다가 우리가 어쩌다 만나는 영들도 대부분 뭉개뭉개 한 것이 알아보기도 힘들잖아~ 딱히 무게가 있을 법한 형태는 아니라고." "그럼 구름도 무게가 없냐? 그리고 안 보이는 척 좀 하지 마라. 나보다도 잘 보는 주제에." 우린 꽤나 날이 선 목소리로 서로 대화했어. 딱히 오컬트에 관한 지론처럼 진지한 주제는 아니었지만, 뭐랄까 '토마토는 과일인가 채소인가'와 같은 분위기의 논쟁이었어. 그리고 그렇게 답을 정하지 못하는 우리를 보며 쿡쿡거리던 안경 여선배는 싸울 듯한 우리를 말리며 말했어. "그거면 됐어요... 그게 실은... 제 친구가 그걸 확인할 방법을 인터넷에서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누구인지는 뻔했어. 주술사 여선배겠지. "봉숭아 씨앗과 같이 약한 충격에도 반응이 있는 물건들을 바닥에 뿌려놓고... 강령술을 하는 거에요... 그럼 그에 이끌리는 영이 지나가며... 그것이 반응했는지 안 했는지 보면 되는 거죠..." "그거 그냥 기계나... 점토 같은 걸로 하면 안 되는 거야?" "영이 무게를 지녔다고 해도 형체를 지녔을지는 글쎄요... 점토에 형체가 남지 않을 수 있어요... 그리고 기계에는 탐지 되지 않을지도 모르죠... 아무래도 영의 힘은 파장과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고들 많이 하니까... 그런 전자기기에 이상 현상을 줄 수는 있어도 제대로 작동하리라 기대하기 힘들어 보여요... 무엇보다 봉숭아 씨앗은 자연물이니까 그런 영향에서 꽤 떨어져 있으니 안전하고요..." 이 실험을 위해서는 터지기 직전의 봉숭아 씨앗이 필요했던 거야. 아슬아슬 한 상태일수록 결과는 좋겠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채집이 힘들어져. 그래서 이렇게 바보 같은 일을 하는 중인 거였지. "그냥 콩알탄 같은 걸 써버리면 안 되는 걸까요?" "콩알탄은 순간의 충격에서 벌어지는 마찰로 폭발하는 거라서~ 아무래도 짓밟는 것 따위에는 안전할 거야, 아마. 실제로도 종이 상자 같은 부실한 곳에 넣어주면서 완충재는 톱밥으로 꼼꼼하게 되어있는 이유도 그런 거겠지~" "...그런가요." 나는 다른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질 않아 잔말 않고 채집했어. 운반 중에 못 쓰게 되거나 시간만 지나도 스스로 터져버린 것들 때문에 우린 꽤나 많은 양을 모으진 못했어. 그래도 한 박스 정도 모아서 겨우 그날 밤에 모두가 모이기로 했어. 우린 주술사 여선배와 처음 사건으로 만났던 곳인 폐건물로 향했지. 모두가 평상복을 입고 온 것에 비해 주술사 여선배만 코스프레라고 해야 할까, 검은 반투명한 천이 달려 얼굴을 가리는 챙모자와 프릴이 잔뜩 있는 검은 드레스, 까만 귀걸이나 팔찌 같이 악세사리를 주렁주렁 매달고 왔어. 굉장히... 과했다는 느낌을 물씬 풍겼어. 안경 여선배도 한참이나 그 모습을 놀리면서 이런 말을 했어. "아무래도 하려는 강령술에 맞춰 꾸민 것 같네..." 둘이서 할 강령술은 굉장히 강한 강령술이랬어. 행여나 '약한 영이기에 무게가 없다'라는 말을 나오지 않게끔 미리 수를 써놓은 것 같았지. 우리는 조심스럽게 바닥 사방팔방에 봉숭아 씨앗들을 내려놓았어. 그러는 동안 주술사 여선배와 안경 여선배는 형형색색의 밀랍초나 무언가 그림 같은 걸 그렸어. 나는 악마 숭배에 쓰는 오망성 같은 거나 룬 문자를 기대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어. 오히려 그건 부적의 그림과 비슷했어. 한자 같으면서도 그림 같고... 또 결계 같다는 느낌도 물씬 풍겨. 팔 방위에 그런 그림들을 새기는 걸 끝낸 둘은 이제 마지막으로 중앙에 빨간 리본을 한 배이지색 곰인형을 내려놓았어. "저희가 할 건... 죽은 자매의 놀이터라는 강령술이에요..." "한 소녀가 죽은 여동생과의 추억을 기리며 다시 한 번 놀기 위해 시행했다는 강령술이죠! 물론 끝까지 하진 않을 거에요. 이런저런 촉매를 잔뜩 달았으니, 우리가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언뜻 보기에도 위험한 것처럼 보였어. 원래라면 '강령술 따위 있을리가 없잖아.' 라며 넘겨짚었지만, 이미 둘의 강령술이 진짜 영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반응을 불러온다는 걸 알았거든. 이전에는 주의점을 실수로 이행하지 못해 사건이 터질 뻔했지만, 이번에는 꼭 문제 없이 할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둘의 말에 경청했어. "우리가 떠도는 영을 부르면... 그 영은 이 인형을 향해 다가와요... 영이 머문다고 해서 나홀로 숨바꼭질처럼 움직인다든가 하지는 않지만... 괜히 영이 담긴 물건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후후..." "그러니까~ 우리가 신호를 주면 저 인형을 불로 태워버리는 거지!" "...그래도 괜찮은 거에요? 반대로 영을 불러냈는데 머물 곳이 없어지면... 주변을 배회하는 것 아닌가요?" "뭐, 영이란 건 어디에나 있는 거라고. 여기 불러와서 조금 돌아다닌다고 해봐야 사람들 전등이나 몇 개 부수겠지. 난 상관없어! 난 이 근처에 살지도 않고." 이기적이지? 주술사 여선배는 종종 이런 모습을 보이곤 했어. 본질적으로는 딱히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아마 문제가 없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니까 장난삼아 하는 말일 거야. ...아마도. "어쨌거나... 그 역할은 신입이 해주었으면 해..." "네? 저요?" "응... 우리 중엔 영감이 제일 나쁘니까..." "이...이런 건 가장 좋은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 좋은 사람은 영이 나타나자마자 영향을 받게 될지도 몰라... 나쁘다는 건 둔감하다는 뜻이야... 그러니 남들보다도 네가 먼저 행동할 수 있을 거야..." '이 사람 마저 내가 실험쥐 같나?!' 나는 짜증을 부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라이터와 라이터 기름이 담긴 작은 유리병을 받았어. 그리고 둘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팔을 서로의 팔 위로 포갠 채 속삭이기 시작했어. 안경 여선배는 마치 녹음기를 반대로 튼 것처럼 들렸어. 게다가 숨을 뱉으며 하는 소리가 아니라, 숨을 들이키며 하듯이 힘들게 소리를 냈어. 그에 반해 주술사 여선배는 아주 빠르고 작게 평범히 속삭였지만,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속삭였어. 이런 연습을 혼자서 하고 있을 둘을 생각하니 뭔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소름돋더라. 그리고 둘이 작은 은단검을 꺼내더니 안경 여선배는 아래에서 위로, 주술사 여선배는 위에서 아래로 손바닥을 살짝 그었어. 손바닥을 꽉 쥔 채 핏방울을 곰인형 위로 몇 방울 떨어트리자 곧장 주변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지. 꽤나 바람이 불지 않던 날인데도 돌풍으로 창문이 열리서 커튼이 휘날렸고 문은 덜컹거리며 격렬히 흔들리기 시작했어. 이전처럼 가슴은 크게 한 번 맞은 기분이 들고 밀랍초의 불꽃은 점점 커다랗게 타오르며 떠올랐어. 타다닥.. 탁탁... 그리고 우리의 귀에 선명히 들려왔어. 봉숭아 씨앗이 터지는 아주 작은 소리가 말이야. 한 번 터진 것이 연쇄적으로 터지던 건지, 아니면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건지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한 번에 터지는 양도 늘어나는지 그 소리의 크기조차 커지고 있었지. 나는 약간 겁 먹은 채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그저 남선배와 배구부 여선배만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고 있었어. "신입...! 지금이야...!" 안경 여선배의 외침에 나는 라이터 기름을 곧장 내던져 곰인형의 옆에 깨트렸어. 그리고 라이터를 키려 했는데, 미친 이 사람이 부싯돌 라이터를 준 거야. 평소 담배를 피는 배구부 여선배였다면 능숙하게 한 번에 켰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걸 쓸 일이 없으니 아무리 부싯돌을 굴려도 켜지질 않았어. 그러자 다급해진 주술사 여선배도 함께 소리쳤어. "뭐 하는 거야! 빨리!" 끝까지 부싯돌만 굴리던 나는 돌연 짜증이 나서 바닥에 있는 밀랍초를 향해 달렸어. 당황한 안경 여선배가 나를 말리려 했지만, 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 밀랍초를 들어 던졌어. 곰인형은 빠르게 불타올랐고 주변의 뒤바뀌었던 공기는 원래의 형태로 천천히 되돌아오더라. 바람은 잔잔해지고 문은 흔들리기를 멈추고 우리의 호흡은 천천히 고르게 되어갔어. "라이터가 안 켜져요... 제기랄, 역시 제가 할 일이 아니었어요." "음... 아니야... 그건 아마 네 탓이 아니었을 거야... 아마 처음부터 그리 될 운명이었을지도..." 후에 설명을 들으니, 피나 밀랍초, 바닥에 그린 그림은 그 강령술에서는 쓰지 않는 방법이랬어. 그저 그 힘을 더 증대화하기 위해 쓴 촉매였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 수준이 너무 올라 위협할 수 있는 행위 자체가 그 자리에서 밀려났던 거야. 부싯돌을 킨다든가 하는 것 말이지. 하지만 밀랍초는 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촉매였기에 관여할 수 없어. 그렇기에 내가 던져도 불이 붙는 것이 가능했던 거야. "하지만 그런 거라면... 여기로 오게끔 유도된 영이 밀랍초를 던지면서... 속박이 풀렸을지도..." "아마 무조건 그러겠지.다음에 뭐라도 조치를 해야겠네." "후후.... 이런 복잡한 건 다음에 생각하고... 영의 무게는 다들 실감하셨나요...?" 나와 배구부 여선배는 입을 꾹 다물었어. 확실히 봉숭아 씨앗이 터지긴 했지.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영 때문이었으리라 단정 지을 수 없었어. 돌풍이 일어나며 굴러간 씨앗이 연쇄적으로 터졌을 가능성과 들짐승, 그러니까 쥐 따위가 건들여 터진 것이 연쇄적으로 터졌을 수도 있으니까. 특히나 다가오며 점점 커진 소리는 연쇄적으로 터졌기에 그 범위가 커졌다는 걸 보여주는 셈이었어. 요컨대, 우연이란 말이지. "영은 확실히 왔어. 어쩌면 영이 터트린 것이 맞긴 할지도 모르지. 글쎄~ 직접 부등켜 안고 들어올려 보는 게 아닌 이상 난 아직 실감하진 못하겠네~" 그에 대해 배구부 여선배는 이렇게 답했어. 만족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안경 여선배도 가볍게 미소 지었어. 이것이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에 든 것 같더라. 하지만 반대로 남선배는 의아함이 느껴지는 듯 계속 바닥에서 터지지 않은 봉숭아 씨앗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바라봤어. "야, 신입. 나한테 와봐." 그의 부름에 나는 토달지 않고 앞으로 다가갔어. 그러자 남선배는 더욱 이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곤 말했어. "안 터졌어." 나는 무슨 말을 하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고, 남선배는 내가 온 길의 바닥을 가리켰어. 안 터진 봉숭아 씨앗들이 잔뜩 바닥에 깔려있었지. "일반적으로 사람의 정신이 이런 걸 밟고 싶어 하냐? 딱 봐도 밟으면 터지는 데다가 인위적으로 깔아둔 게 분명한 물건을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어지지 않냐?" "그러면..." "...글쎄. 뭐, 영에게 발이 없어서 어느 지점 자체에 무게가 증가하는 식일 수도 있고..." 우린 이번 실험을 통해 두 가지를 깨달았어야 했지만, 깨닫지 못했어. 하나는 피를 촉매로 하는 강령술을 하면 안 된다는 것과.... "...어쩌면 일부로 밟은 걸지 모르겠네." 우리가 강령술에 재미를 느끼는 만큼, 영들도 강령술에 재미를 느낀다는 걸 말이야..
이름없음 2024/04/07 23:57:26 ID : lh9ck3xyLcJ
【지박령】 내가 지내던 곳은 그렇게까지 농촌 같은 시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시의 느낌이 있는 곳은 아닌 애매한 시골이야. 그런 탓에 아무래도 재개발이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내가 오컬트에 입문하게 된 고등학교의 오컬트 동아리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나는 학교와는 꽤나 거리가 있는 곳에서 살고 있었지만, 고등학교가 제법 괜찮은 곳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 집 주변에도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애들도 있었어. 한창 재개발 지역의 건물들을 철거 과정이 끝나가던 시기인데, 같은 반의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가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곳을 봤다고 하면서 우린 재개발 구역에 관한 주제로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었어. 여기에도 재개발 구역의 모습을 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고 있자면 굉장히 묘해. 아직 철거되지 않은 몇몇 건물이 다른 건물들의 잔해 사이에 세워져 있기도 하고 여러 방치된 채였던 가구들과 부서진 건물 잔해들이 수북히 쌓여있는 걸 보고 있자면 전쟁통의 도시가 이런 꼴이 되겠구나 싶어지기도 하고 그런 아무 사람도 없는 어두운 밤에 건물 잔해가 쌓여있는 곳을 바라본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썩 좋진 않아. 소름끼치기도 하고. 하여튼 그런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친구가 나를 향해 장난을 치듯 말했어. "그나저나 너 오컬트 동아리잖냐. 이렇게 한 구역 자체를 다 철거해버리면 지박령은 어떻게 되는 거야? 싹 다 그냥 갈 길 잃고 사라지나?" 나는 답할 수가 없었어. 오컬트에 관한 지식이 옅은 것도 이유겠지만, 정말 한 번도 상상을 못 해봤었거든. 물론 지박령이란 게 흔한 것도 아니고 집에 있는 경우는 더 드물었으니까 상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정작 듣고 나니까 궁금하긴 하더라고. 그래서 난 수요일이 되기만을 기다렸어. "...뭐 그렇게 된 경위인데요." "으음~ 확실히 궁금하긴 하네~" 의외였어. 배구부 여선배는 아무래도 귀신이 생기는 이유를 누군가의 정신적인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반대로 사라지는 이유도 모두에게서 잊혀지며 힘을 잃는다고 보는데, 그렇다고 치면 이 질문에 답은 꽤 간단했거든. 철거 되면서 그 영을 묶어둘 장소가 사라지고 자연스레 사라진다고 보겠지. 애당초 지박령이란 존재를 믿을지도 의문이었고. 그런데 흥미가 있다고 말한 거였어. "그런가요?" "많이는 아니고 조금~ 그럼 다 같이 밤에 모일까?" "싫어." "저... 오늘은 좀 바빠서..." 그래도 사정이 있는 안경 여선배와는 달리 남선배는 정말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어. 난 이것도 뭔가 오컬트에 관한 지론이 있는 건 줄로만 알았어. 자기 지론에 맞지 않으면 종종 아예 참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거든. "재미없네~ 그럼 우리 둘이서만 가겠네? 하하." 배구부 여선배는 되려 뭔가 신난 듯 보였어. 날 좋게 보시고 계시진 않지만, 내가 되게 오컬트 적인 것에 당하거나 무서워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 반응을 보는 것만큼은 좋아하시는 듯했어. 첫날에 우리를 보며 웃던 것도 아마 이런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해. 어쨌거나, 그걸 알고 있던 나였기에 결코 그 상황이 반갑지만은 않았어. 그래도 난 참여했어. 그 싫다는 부정적인 감각보다 호기심이 더 깊었지. 어쩌면 이때부터 내 오컬트를 향한 관심이 비약적으로 커진 듯해. 나 스스로 오컬트 현상을 쫓고 싶다고 생각한 시기였던 거지. "신입! 여기야!" 배구부 여선배는 재개발 구역 입구의 멀리 있는 건물에서 내게 소리쳤어. 나는 왜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는가 하니, 아무래도 이런 곳에 제멋대로 들어갔다가는 경찰한테 부모님 부를 때까지 혼날 가능성이 있었거든. 아무리 야밤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오컬트와는 동떨어진 '재미없는 일'을 확실하게 피하고 싶어 하는 듯했어. "자, 그럼 준비됐어?" "준비는 됐는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요. 갔는데 처음부터 이 구역에 지박령이 없었다면 어떡하나요?" "그러면 재수 옴 붙은 거지~ 아니, 귀신을 만나는 거니까 있는 게 재수 옴 붙는 건가? 하하!"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배구부 여선배는 꽤 신난 듯했어. 우리가 위험한 일을 한다는 실감이 되어서 그랬나 봐. 그리고 우린 결국 그 안으로 들어갔어. 여기저기 날카로운 유리조각이나 제멋대로 뻗은 못, 쇠막대 같은 것들이 있어 야밤에 손전등도 키지 못한 채 돌아다니는 건 참 많은 의미로 위험했어. 중장비들이 돌아다닐 길이 터 있기는 했어도 여전히 자잘한 것까지 완벽하게 치워져 있지는 않았어. 다치는 것도 위험했지만, 그런 거슬리는 소리가 경비원에게 들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확인을 못 하는 건 고사하고 난리가 될 게 뻔하잖아? 우린 그 정도로 호기심을 해결하려 계속 안을 휘저은 거야. 그리고 아직 부서지지 않은 집들을 향해 다가갔어. 대 여섯 채 정도 한 곳에 몰려있더라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시간 문제상 오늘 작업을 끝마치지 못한 듯했어. 난 지박령의 거처가 박살 나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던 거니 그 잔해 사이를 뒤지고 다닐 줄 알았는데, 배구부 여선배는 마치 드디어 찾았다는 듯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였어. "따라와, 어서!" 배구부 여선배는 손짓 하며 먼저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향했어. 그 뒤를 따라가니 곧장 시작하더라. 귀는 먹먹하고 가슴은 한 대 얻어맞은 듯... 그러니까, 귀신이 나오면 생기던 전조 증상들 말이야. 집에 가까이 가기도 전부터 느껴질 정도면 그것이 심상치 않다는 건 분명했어. 그리고 나조차 느껴질 귀신들은, 대개 배구부 여선배에겐 보여. 난 배구부 여선배가 뭘 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 표정을 확인했어. "...우와~ 진짜... 끔찍하네." 하지만 표정으로도 반응으로도 지금 뭘 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 그저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은 요동쳤고 기분은 묘했어. 우린 한참이나 말 없이 그곳을 바라보다가... 쾅! 쾅! 쾅! 그건 뭔가를 굉장히 세게 두드리는 소리였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았지만, 그곳에 뭐가 보이리란 기대는 서로 하지 않았어. 그 소리의 형태가 뒤라는 것만 느껴지지 딱히 어디라는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거든. 이것마저 귀신이었던 거야. 내가 멍 때리고 있으니까 배구부 여선배는 나를 낚아챘어. "...이상하네. 빨리 돌아가야 할지도?" "네? 왜요?" "이상하잖아. 이렇게나 거센 소리가 났는데 형체가 너한테도 안 보인다니. 발만 따로 다니는 귀신이어도 힘들겠어." 사실이었어. 나도 오컬트 동아리에서의 경험 중 몇 번은 귀신을 직접 눈으로 바라볼 기회가 있었는데,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이런 큰 반응을 동반해. 당시의 나에겐 본 경험이란 게 없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이걸 뜻하는 거겠지. 나는 이해는 안 됐지만, 다급해진 배구부 여선배의 뒤를 따랐어. "어디까지 보였어?" "전 하나도 안 보였어요. 애당초 전 살아 생전 제대로 된 형체의 귀신은 본 적이 없어요." "음~ 그래? 그럼 그 주택에 잔뜩 있던 것들도 하나 안 보였던 거네?" 나는 고개만 갸우뚱 기다렸어. 설명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살아있는 밀웜 통에 넣어진 사과라도 되는 것마냥 주택의 온갖 곳에 귀신이 달라붙어 쉬고 있었다는 거야. 처음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는데, 그냥 추측해본 바로는 지박령이란 건 결국 장소에 의존해서 버티는 영이잖아? 그게 악귀라서 엄청난 힘을 가진 게 아닌 이상 장소를 철거 당하면 배구부 여선배는 그 존재 이유 자체를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대. 물론 예전에 예시로 가르쳐준 검은 고양이처럼, 사라지는 것은 한 순간에 걸쳐 이루어지지 않는대. 소문 실험이 1년이나 걸렸듯, 그저 장소가 부서졌다고 지박령도 하루 아침에 사라지진 않을 거란 거지. 그럼 장소를 잃은 지박령은 어디로 가는가? 그게 그 주택의 정체인 거지. 어디로든 다른 장소를 붙들어보려 하지만, 지박령은 집만 있다고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저 마지막 발악과 애통함으로 뭉친 그런 장소였던 거지. 누군가에게 목격이 됐을 정도인 거대한 영도, 그저 존재할 뿐이었던 작은 영도 한 곳에 억지로 뭉쳐 있으니 느껴지는 감각도 평범한 귀신과는 달랐던 거려나.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남선배는 슬쩍 시선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더니 자신이 안 가길 잘했다고 말하더라. 분명 나쁜 일이 생길 줄 알았대. 그런데 그게 배구부 여선배 때문은 아닌 모양이었어. 배구부 여선배의 추측대로 지박령이라는 게 영화에나 나올 법한 귀신이 아니라, 그 집에 남아있는 영 그 자체를 말하는 거니 자잘한 영들도 많이 있다는 거야. 장소에서 미련을 못 버리고 남았다는 건 이미 애통함이 있는 자들인데 죽고 나서의 거처마저 빼앗기면 얼마나 애통하겠냐는 거지. 오래 가지 못하더라도 악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마지막에 만난 것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고 했어. 방황하는 애통함을 마지막 기회삼아 다른 주택에 달라붙으려 다가왔는데, 나름 귀신들 사이에서는 길과 입구로 치부되던 곳에 우리 둘이 멀뚱멀뚱 서 있었단 거야. 귀신들은 대체로 자기만의 길과 입구를 중요하게 여겨서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아무 벽이나 다 뚫고 다니지 않는다고 설명해줬어. 개중엔 아예 인간과 같은 입구를 써야만 평온함을 느끼는 것들도 있다고. 그래서 비키길 원하는 마음에 그런 것은 아니었나 싶다더라. 여기까지 걸어온 귀신의 애통함을 에너지의 원천 삼아 그런 커다란 반응은 보였지만, 여전히 잡귀였기에 볼 수는 없는... 참 생각이 많이 들었어. 오래된 주택에서만 그런 잡귀가 생겨나는 건 아니겠지만, 고작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해 그런 존재들 따위 생각도 안 해버리고 밀고 있다는 연민이 대뜸 떠올랐어. 나도 알아, 살아 있는 사람이 잘 살아야지 뭘 그런 걸 걱정하냐는 거. 그래도 그때만큼은 조금 불쌍하다고 느껴졌어. 병사를 피해 구덩이로 도망치는 꼴 같았단 말이지. 그리고 동시에 한 가지가 궁금해졌어. 안경 여선배와의 강령술의 실험을 토대로 배구부 여선배처럼 잊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되돌려 보내야 하는 과정이 있다고 했어. 그저 승천도 퇴마도 아니라 물리적으로 장소를 잃은 지박령들은 끝내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린 지박령의 끝을 본 것이 아니야. 그건 마지막 직전의 현실 부정 덩어리에 가깝지. 글쎄. 얇고 아무 위협이 안 되는 종이라고 하더라도 억지로 뭉치고 뭉치고 뭉치면 반발력이 생겨 쌓인 에너지가 한 번에 방출되기도 해. 그곳에 모인 게 애통함이라는 부정적 에너지라면... 마지막 집까지 철거될 때 그게 주변으로 퍼져나가진 않을까? 그것이 주변에 불운을 가져다주는 결과가 될지도, 아니면... 그냥 원혼 채로 지박령에서 주변을 배회하는 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요즘 좀 많이 바쁘네. 그래도 간간히 계속 적을 게! ( •̀ ω •́ )✧
이름없음 2024/04/10 17:39:40 ID : lh9ck3xyLcJ
【질의응답】 너희는 강령술이나 영매술이라고 하면 대개 무슨 이미지가 떠올라? 두 가지 정도로 나뉜다고 생각해. 악마 숭배자나 할 법한 오망성 위의 양초,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불길의 빛.... 아니라면 분신사바나 위자보드, 콧쿠리상 같은 특정 매개체를 이용한 것들을 떠올리겠지. 섬뜩했던 고등학교의 오컬트 동아리에서 우리가 하는 것도 결국 별반 다르진 않았어. 그저 조금 더 본격적으로 한다는 것에 언제나 의의를 가졌지. "저기... 혹시 오늘 한가해...?" 안경 여선배의 물음에 나는 완전 한가하다던가 그런 식으로 신나서 대답했던 거로 기억해. 입부 완전 초기였고 전반적으로 셋 모두 이미지가 나빴지만, 3학년인 남선배와 배구부 여선배와는 달리 비교적 동류라는 느낌이 있었어. 그래서 '뭔가 데이트라도 하려는 걸까~'하며 신났던 거겠지. "친구... 소개시켜줄게..." "소개요?!" "응..." 안경 여선배는 신난다는 듯 입까지 가려가며 웃어댔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내 모습이 웃겼던 건지 아니면 오늘 있을 일이 기대되던 건지는 모르겠어. 확실한 건 그 사람 생각보다 눈치가 좋으니까, 내가 착각하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을 듯해. 그래서인지 곧장 내 기대감을 박살 냈어. "그러니까 오늘 밤에 연락하면... 학교 앞으로 와... 개인적으로 지니는 부적 같은 게 있으면... 꼭 챙겨오고..." "부...부적이요?" "응... 뭔가 씌일지도 모르거든..." 엄청 후회했지만, 떵떵거리며 오늘 완전 괜찮다고 했으니 자존심이 있어서라도 말을 바꿀 수는 없었어. 그대로 나는 도축되기를 기다리는 돼지처럼 밤까지 기다렸지. 이미 학교 괴담으로 야밤에 우리 학교를 무단 침입해본 적이 있어서 이번에도 비슷한 걸까 생각했어. 하지만 학교 앞에 있던 안경 여선배는 혼자서 멀뚱멀뚱 서 있었어. "왜 혼자세요? 다른 분은 이미 들어가 계신가?" "아, 아냐... 우리 다른 곳으로 갈 거야...." 나는 더 묻지 않았어. 괜히 학교에 마음대로 들어갔다가 교무실에 호출될 바에야 다른 곳으로 가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거든. 숲을 가기 전까지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높은 산 같은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깊이는 있는 동네에 있는 산이었는데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지 않아 풀이 무성하게 자란 길을 들어가면 폐건물이 하나 있었어. 무슨 목적으로 짓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짓던 도중 건설사가 돈을 가지고 내뺀 탓에 완공되지 못했다고 하더라. 뭔가 교회 같은 거로 다시 활용해보려고 했는지 나무 의자나 커튼 같은 것은 달려 있었지만 그대로 버려졌어. 우리 동네엔 노숙자랄 사람이 그닥 없었기에 이곳에 누가 숨어 살고 있지도 않았으니 강령술을 하기엔 아주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었지. "...지금 저기를 들어가자고요?" 물론 난 그런 걸 몰랐으니까 진짜 죽어도 들어가기 싫었어. 괜히 거기서 지내던 괴한 같은 게 뛰쳐나와 우릴 찔러버리면 어떡하나 싶었어.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당시엔 역시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주의가 더 심했기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걱정보단 그런 현실적인 걱정이 더 지배적이었어. "아무도 없는 건 내 친구가 확인했으니 괜찮아... 애당초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까...." "아니... 그래도 이거 들어가는 거 괜찮아요? 사유지 무단 침입이라던가 그런 문제가 생길지도..." "난 이 주변에 살아서 아는데 저 건물 4년 넘게 방치된 건물이야... 걱정 말래두..." "그렇지만..." "어이! 여기야, 여기!" 그때, 폐건물 방향에서 한 외침이 들려왔어. 그게 바로 주술사 여선배와의 첫 만남이었어. 손목 부분에 프릴이 있는 검은 천 장갑과 교복, 그리고 귀에 달린 피어싱과 그 어둠 속에서도 달빛에 번쩍이는 탈리스만까지. 예나 지금이나 과한 패션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어. 이미 저렇게 큰 소리를 내기도 했고 안에서부터 나왔었으니 조금은 경계가 풀어져서 나도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어. 짧은 자기 소개를 나눈 후에 주술사 여선배는 신난 듯이 본론을 말했어. "질의응답을 나누는 강령술은 정말 종류가 많아. 여러 나라에서 탄생한 강령술인데도 그 형태는 거의 비슷해. 이건 분명하게 '영에게서 답을 얻는 강령술'이 실제 존재했기에 어느 정도 매개체를 바꾸어 가며 실행할 수 있던 거야. 그리고 우린 오늘 촉매를 한계까지 끌어올려서 그런 강령술을 해보려고 해." "...뭔가 궁금한 거라도 계신 모양이에요?" "응? 아니? 그냥 뭐... 재밌잖아." 주술사 여선배는 꽤 섬뜩하게 미소 지었지만, 그게 남선배나 배구부 여선배처럼 누군가를 겁먹게 할 정도는 아니었어. 그 미소만으로 그 둘만큼 오컬트에 미쳐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지. 하지만 문제는 그 둘과는 스케일이 남다른 일을 벌이려는 게 문제였어. 그 선배는 자신의 운과 탈리스만을 굉장히 신뢰하는 모양인데, 확실히 그 사람은 운이 좋아. 하지만 여전히 운이 좋다는 거지 기가 세다거나 나쁜 일을 막는 힘이 있는 건 또 아냐. 여러모로 이런 위험한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어. 우린 이때까진 그 사실을 몰랐지. 어쨌거나 여기까지 왔으니 나도 내뺄 수가 없어서 하는 걸 도왔어. 하는 방식은 굉장히 여러 강령술을 섞은 듯한 형태였어. 우선은 폐건물의 구석 방에 라디오를 넣어둬. 그리고 응답이 없는 노이즈가 낀 주파수로 맞추어 놓아. 나도 이 방식은 어디에서 채택한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어. 손님대접이라고 하는 강령술이었는데, 당시엔 이름은 모르고 이런 방식을 쓰는 강령술이 있다고 알고 있었어. 왜냐하면 미디어 매체에서 한 번 굉장히 위험하다! 라면서 주접을 떨었던 걸 본 적 있거든. 이걸 주력 매개체로 삼은 이유는 이랬어. 둘은, 특히 안경 여선배는 영이 파동과 관련된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듯했어. 영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지만, 누군가에게 관측이 되면서 그 존재와 의미를 갖게 된다는 거지. 눈치챈 사람이 있을 텐데, 관찰자 효과에 관한 내용이야. 그러니 일부러 관측을 피하면 파동의 형태로 존재하리라 생각한 거지. 라디오는 그런 파동 형태의 영을 담아두기 위한 매개체야. 주파수라는 것도 결국에는 파동이라서,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지. 폴터가이스트 현상 중 전자기기에 관련된 상호작용이 잦다는 걸 이유라고 말하더라. 라디오의 노이즈가 낀 곳은 사람이 사용할 수 없거나 사용하지 않는 곳이라고 했어. 그건 실제로 비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인식 자체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라더라. 어쩌면 배구부 여선배처럼 인식 그 자체가 작용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는 듯했어. 그러니 그 노이즈가 낀 라디오는 분명 영을 담아서 목소리를 뱉어낼 수 있다고 신신당부했지. 다음은 피였어. "피는 왜요? 굳이 필요한가요?" 열심히 단도를 알코올로 닦고 있는 주술사 여선배에게 물었어. 지금은 그게 확실히 효과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당시엔 아무 의미도 없으리라 생각했어. 다른 것들은 안경 여선배가 주장한 파동에 관한 연관이라도 있지, 피는 그냥 피잖아. 그런 것이 영을 불러온다고 믿기는 힘들다고 생각했어. "뒤섞인 남녀의 피가 미끼가 되어줄 거야. 경험이 없는 자의 피면 더욱 효과가 좋지. 그래서 네가 필요했던 거고." 경험이 없는 자. 좀 멋지게 말해줬지만, 걍 내가 동정 같아서 불렀단 뜻이었어. 딱히 사실이니까 불만은 없었지만 고작 그런 이유였다는 게 허무했달까. "영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여된 무언가를 쫓아. 죽음으로써 육신과 기를 잃어버린 영은 활력 그 자체를 의미하는 피를 쫓아서 와줄 거야. 라디오는 낚시찌, 피는 미끼인 거라고." "...뭐, 알았어요." 나와 주술사 여선배의 피는 비커 속에서 섞여 문앞에 조금 뿌려진 다음, 라디오 옆에 자리 잡았어. 그 모습이 마치 바다에 미끼를 뿌리고 찌에 따로 떡밥을 달아두는 것 같더라. 다음은 육신이었지만, 그 부분은 넘길 거라고 했어. 라디오에 가두려는 강령술인데 굳이 그런 촉매까진 필요 없다는 게 이유였지. 어쨌거나 다른 사소한 준비는 둘이서 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본 커다란 준비는 거기서 끝났어. 그리고 주술사 여선배는 우리가 방으로 향하는 길목과 문에서 충분히 떨어질 수 있게끔 했어. 귀신이 나다닐 길이 중요하다고 하나 뭐라나. 여전히 주술사 여선배는 강령술에 대한 자신의 고집이 있었기에 여러 복잡한 부분들을 나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해. 대충 주파수 신호가 겹치면 라디오가 제대로 신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다른 영이 영이 지날 길을 막으면 제대로 오지 못할 수 있다더라. "..." 자신도 충분히 떨어진 채로 주술사 여선배는 무릎을 꿇고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도 없었어. 무언가 자신이 직접 연습한 방법일까 궁금했는데, 물어봐도 "비밀~"이라면서 말해주지 않더라고. 내가 물어보는 것에 고집이 굉장히 세서 왠만한 건 답을 알아내는데, 이것만큼은 아직도 잘 몰라. 안경 여선배가 말하길, 어쩌면 아무 의미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했어. 배구부 여선배의 이론이 또 통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래. 영은 불결한 기운을 지니고 하는 행위에 민감하다고. 그래서 대놓고 '나는 너를 부르고자 하니 어서 오너라.'라는 의미로 불순한 의도를 품을 뿐일지도 모른다고. 정확한 건 몰라. 그저 가능성이지. 점점 주변은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고 심박수는 되려 낮아졌어. 이젠 몇 번이나 설명했으니 알 거야. 그것이 다가오는 기분이었어. 점점 기압이 높아지는 것이 귀가 먹먹해지고 숨이 거칠어지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었어. 그리고 그 감각이 내 몸에서 희미해지는 순간, 주술사 여선배는 중얼거리기를 그만두었어. 말 없이 미소 지은 주술사 여선배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고, 우린 지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방문 앞에 섰어. 양초불에 의존하며 폐건물 속에 단 셋이 있는데, 문 너머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니 좀 소름끼치긴 하더라고. 나는 이제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 건가 싶어서 둘이 하는 걸 기다렸어. "내일 비는 오나요?" 그리고 주술사 여선배는 굉장히 쓸데없는 질문으로 시작했어. 나는 왜 그런 질문이나 하는 건지 물어보려 했지만, 나름 주술사 여선배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어. 방 너머의 라디오에선 이전과 다른 음정의 소리가 울리긴 했지만 그게 답변이라고 보기는 힘들었어. 더불어 사람의 소리라고는 확실히 볼 수 없었지. 주술사 여선배도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수첩에 무언가 끄적이고 있었어. "죽으셨던 시기의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건 충분히 대답이 나오리라 생각했어. 하지만 안경 여선배의 물음에도 방 너머의 라디오는 감감무소식. 주술사 여선배는 이전의 표정을 유지하며 수첩에 다시 무언가 끄적이길 반복했어. 둘의 다음 질문을 뭘까 기다리던 찰나에 둘의 시선은 내게로 꽂혔어. 안경 여선배의 손가락도 주술사 여선배의 볼펜 끝도 나를 가리키더니 질문을 하라고 재촉했어. 무어라 대답하려 한 순간에 둘은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하더니 그저 질문하라는 듯 계속 손짓하더라. 각자 하나씩의 질문을 하는 걸 '예의'라고 생각하는 듯했어. 그리고 잡설과 질문을 반대편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당연시 여겼고. "..." 나도 시답잖은 질문을 하려다가 둘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걸 떠올렸어. 그럼 최소한 둘의 방향성과는 다른 걸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사후세계는 있나요?" 그러자 곧장 라디오는 굉음을 냈어. 귀신의 포효 같은 건 아니고, 그저 삐이 하는 망가진 소리를 주변을 향해 내뿜었지. 우리는 당황해서 귀를 틀어막다가, 못 참겠다는 듯 안경 여선배가 방문을 열어젖히며 발로 라디오를 차버렸어. 벽면에 강하게 부딪힌 라디오는 단번에 부서지며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되었지만, 우리는 숨을 거칠게 쉬며 방금 상황이 뭐였는지 혼란스러워 했어. "신입은 특이하네. 딱 봐도 해선 안 될 질문 같잖아." "뭐... 그래도 반응은 얻었잖아...? 딱히 강령술이 실패하진 않았다는 거니까..." 주술사 여선배는 살짝 짜증이 난 것 같았지만, 안경 여선배는 그런 날 이해해주는 듯했어. 이런 건 내게 설명이 되지 않았던 부분이라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억울한 마음도 같이 들었지. 그게 어떤 방향이든 '대답'이었는지 아니면 내 잘못된 질문 방향성을 향한 분노와 같은 단순 반응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우린 그 이후로 이 강령술은 안 하기로 마음 먹었거든. 해선 안 될 질문의 범위가 있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령술이 풀리거나 하는 게 아니라 격렬하게 피해를 끼칠 수 있는 행위로 발현된 건 위험하다는 걸 분명히 드러내는 거라고 했어. 무엇이 영을 그토록 화나게 만든 건지, 그리고 어떤 것이 자극했는지 당시의 우리는 알지 못했지. 이제 너희도 어느 정도 알겠지만, 별로 좋은 영이 온 건 아니었던 걸 거야. 이유는 말했듯 피고. 어쨌든 실험 하나를 날려먹었다는 걸 빌미로 주술사 여선배는 억지를 부리며 다음에 부르면 언제든 실험에 동참하라고 강요했어. 나는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나쁜 제안은 아니었어. 섬뜩한 경험보단 무언가 실험한다는 분명한 느낌이 있었거든. 솔직하게 말하자면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영은 어째서 이런 부름에 응하는지. 그리고 무얼 바라고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하는 건지 말이야. 그 의문점들이 해소되기까진 딱 1년이 걸렸어. 언젠가는 이 일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려나 모르겠네. 바빠서 그 전에 글을 접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물씬 든다. 어쩌면 접기 전에 이것만은 말하자 싶어서 미리 적을지도?
이름없음 2024/04/10 17:51:34 ID : eFa2k1heY8l
와 엄청 재밌다...
이름없음 2024/04/10 22:13:04 ID : lh9ck3xyLcJ
그랬으면 완전 다행이네 앞으로도 꾸준히 적어볼게!
이름없음 2024/04/11 16:28:43 ID : GpQsphzaoK1
ㅂㄱㅇㅇ! 레주 필력 무슨일이야 너무 재밌다!!!
이름없음 2024/04/12 01:14:31 ID : lh9ck3xyLcJ
【생일-내 경우-】 우리 학교에 있던 섬뜩한 오컬트 동아리는 그 인원수가 적기도 했고 날 빼면 셋 다 장난기가 많은 편이라 생일을 특별히 축하해주고자 했어. 난 처음엔 숨기고 싶었는데, 배구부 여선배가 친구들한테 물어보니 술술 불어버려가지고 들켰지. 아마 얼굴에 넘어가버린 건 아닌가 싶어. 어쨌거나, 가장 빠른 생일이었던 여름방학 전에 난 가장 먼저 그들의 생일 파티 문화를 겪어볼 수 있었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걸... 후후..." 먼저 도착해 있던 안경 여선배는 잔뜩 신난 듯 계속해서 웃으며 나를 바라봤어. 여느 나쁜 관습이 그렇듯 당하는 입장에서 가하는 입장이 되면 즐거운 법이니까. 안경 여선배의 선물은 아뮬렛이었어. 종종 내게 부적을 권했었는데 마땅히 사야할 곳도 모르고 비싸기도 해서 안 구하니까 직접 구해왔던 모양이야. 내게 있어서는 굉장히 고마운 일이었지. 평소답지 않게 늦는 배구부 여선배와 남선배를 기다리며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나 나눴어. 그러다가 하도 늦길래 나는 안경 여선배는 작년에 어땠나 궁금해서 물어봤어. 안경 여선배의 생일엔 '저주받은 인형 만들기 체험 키트'를 남선배에게서 받았고, 배구부 여선배에게서는 내게 줬던 것처럼 아뮬렛 하나를 선물 받았다는 모양이야. 물론 선물이 메인 디쉬는 아니었지. 생일 파티를 대신해서 나간 탐사는 '얼어붙은 강가 밑에도 물귀신이 사는가?'였대. 안경 여선배는 한겨울인 12월 말이 생일으로 우리 중에 가장 늦었던 탓에 가능했던 일이었지. 방학 중에 모인 셋은 빙어 낚시도 가능하다는 곳으로 가서 얼음 위에서 캠핑도 하고 밤이 되면 강령술도 하고 난리를 쳤다는 모양이야. 마지막에 의미 있는 반응은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진전이 되질 않아 포기했다더라. 나는 학기 중이라서 저런 거창한 일은 안 하겠지만, 생일을 핑계로 평소와는 다른 거대한 탐사를 할 수도 있다고 했어. "짜잔~ 이게 뭔 줄 알아?" 그리고 나타난 배구부 여선배와 남선배는 각자 엉성하게 포장된 선물을 들고 왔어. 배구부 여선배도 남선배도 그 크기가 얼마 크질 않아서 예측하기가 힘들었어. 끝내 맞추질 못하겠어서 어깨를 으쓱이니까, 배구부 여선배부터 낭만도 없이 내 앞에서 선물을 자기 손으로 뜯어버리더라고. 굉장히 헌 노트가 안에서 나왔는데 난 뭐 이런 걸 선물로 주나 싶더라고. 심지어 놀랄 부분은 이게 끝이 아니었어. "이거 주는 게 아니라 돌려줘야 해! 잠시 빌려주는 거야~" ".....대부분 생일인 사람한테 '대여권' 같은 걸 주나요?" "이건 평범한 게 아니라고? 네가 얼마나 안목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굉장한 거야~" 무슨 지하철에서 비누 파는 사람처럼 말하니까 황당하더라. 그래서 듣자하니, 그건 남선배와 배구부 여선배에게 오컬트를 가르쳐준 사람이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라고 했어. 난 이때 처음 알게 됐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오컬트를 배웠다는 걸 말이야. "그런데 둘이 왜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 거에요?" "오컬트 자체는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어. 그런데 이 오컬트 동아리를 만든 사람 덕에 직접 활동을 다니기 시작했을 뿐이야." "선배는 굉장했다고~ 우리랑은 비교도 못할 정도였어. 영감도 우리보다 훨 좋았지만, 역시 그런 것보다도 오컬트에 관한 이해도가 남달랐어." 난 아직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 그건 안경 여선배도 마찬가지인 듯했어. 둘이 이 학교에 들어왔을 때 이미 3학년이었다고 하니 말이야. 이 사람에 관해서는 실제 만나본 적이 없으니 이때 잠시 빌렸던 노트와 둘이 가끔 해주는 이야기로만 알 수 있었는데, 기회가 되면 다음에 이야기해보도록 할게. 어쨌거나, 배구부 여선배에게 받은 선물은 그거였고, 남선배도 안경 여선배와 같이 부적 같은 걸 줬어. 아직도 이건 뭔 역할을 하는지 몰라. 뭐냐고 물으니까 "언젠가는 돌아오는 부적이야."라고만 하더라고. 무조건 돌아오는 그런 부적인 모양이었어. 딱히 지켜주거나 나쁜 일이 벌어지기보단 딱 그것 이상을 못 하는 모양이더라. 그래서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모두 함께 바다에 놀러갔을 때 제대로 밀봉된 플라스틱 관에 담아서 던졌어. 언젠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아직 안 돌아왔어. 그렇다보니까 뭔 역할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한 거고. 맞아. 중요한 건 선물이 아니지. 내 생일 파티의 탐사 주제는 무려 '낭떠러지에서 강령술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였어. 주술사 여선배도 그렇고 남선배도 그렇고 '귀신이 나다니는 길'을 아주 중요시 여기는데, 안경 여선배도 배구부 여선배도 딱히 부정은 하지 않는 듯했어.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두고 둘의 의견에 맞춰주려 노력하지. 그리고 이번엔 '만약 그렇다면 귀신이 올 길이 하나뿐일 때엔?'이라는 궁금증이 생긴 거야. 영은 사람이 죽어서 된 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사람과 비슷한 사고 방식을 통해 움직인다는 건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었어. 무의식 중이든, 혹은 영들의 규칙으로든 인간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행위는 선호하지 않거나 아예 하지 못하는 듯해. 나는 사람이 죽어 영이 된다고 믿는 주의니까 내 의견대로 설명하자면, 인간이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온 시간이 있고 그 모습과 인지 그대로 영이 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런 행동을 피하게 된다는 거야. 뭐, 예를 들면 지금 하려는 실험처럼 낭떠러지가 있는데 그냥 날아서 허공으로부터 역주행 하지 않고 우리가 걸어온 길처럼 낭떠러지의 반대편에서 올 것이라는 거야. 안경 여선배가 준비한 실험이 아니었기에, 이번엔 꽤나 캐주얼한 느낌의 강령술을 진행했어. 쌀을 가득 채운 인형과 붉은 실로 꿰멘 곰인형, 머리카락 몇 줌과 양초 몇 개. 안경 여선배의 평가는 '후후... 나이에 걸맞는 강령술이네.... 뭔가 귀엽다...'였어. 나홀로 숨바꼭질이 절로 생각나는 비주얼의 강령술을 이런 개방된 곳에서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긴 했어. 내가 강령술에 관해 빠듯한 건 아니지만, 분명히 주술사 여선배와 안경 여선배끼리 모여 할 때와는 그 수준 차이가 느껴지더라. 의식 같은 걸 이어서 했는데, 남선배가 말도 더듬고 좀 엉성하게 하니 안경 여선배가 직접 나섰어. 무릎을 꿇고 또 알아듣지 못할 말을 속삭이니 순간 닭살이 돋더라고. 약간 추워진 탓에 그런 것 같았는데, 한 여름에 그런 감각이 느껴지는 것도 여전히 정상은 아니지. 그냥 안경 여선배의 의식이 언제나 소름끼쳐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고. 이유야 어찌 됐든 불어드는 바람에 양초는 단번에 전부 꺼져버렸어. 우리는 급한대로 휴대전화의 라이트와 배구부 여선배가 가져온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추었어. "다음부턴... 양초는 좀 비싼 걸로 사요..." 쉽게 꺼져버린 것에 안경 여선배는 사소하게 투덜거리며 다리를 털고 일어섰어.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반대편을 함께 바라봤지. 우린 그곳에 무언가 왔다는 예감이 들었어.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확신이 들더라. 거기 분명 뭔가 있었어. "안 오는 거려나~" "못 오는 거 아니야?" "글쎄요... 뭐라도 반응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나 현장이 변했는데 더 올 수는 있는 거에요?" 우리는 각자 의견을 나누면서 계속 어두운 숲속을 바라만 봤어. 그러다가 콰직! 하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라고. 나만 놀란 줄 알았는데, 넷 다 놀라서는 흠칫하고 얼어붙더라. 내가 놀란 건 소리 때문이지만, 나머지는 다른 이유로 놀란 듯했어. "....다람쥐겠지?" "...그러겠지~" 우리는 곧장 해산했어. 조금 허무하지? 원래 이런 일들이 더 많은 편이야. 그래도 왜 다들 겁 먹었던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딱히 귀신이 온 것 같은 감각이 없었는데 소리가 난 게 이상해서라고 하더라. 그러고 보면 어느 정도 귀신이 오면 느껴지는 감각이란 게 있는데,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었어. 안경 여선배도 강령술은 분명하게 통했다고 생각하는데, 어째 귀신이 나타났다는 징조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 이상하다고 하더라. 유추해볼 수 있는 건 두 가지였어. 귀신이 아니었거나, 느끼진 못할 정도로 멀리 있었거나. 아니면 더 다른 가능성도 있기야 하겠지. 다만 다른 가능성은 딱히 우리에게 떠오르지 않았어.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그냥 관심이 없던 건 아닐까 싶네. 말했듯이 귀신도 강령술에 재미와 흥미를 느껴. 그래서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해. 그럼 반대로 사람마다 기호가 있듯 재미 없다고 느끼는 영도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이렇다 할 정보가 없던 탐사였기 때문에 결론도 조금 흐지부지한 편이네. 그래도 난 꽤나 재미있는 날이라고 기억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재미있는 경험으로 하루를 보냈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가장 웃겼던 건 배구부 여선배의 생일날인데, 이것도 천천히 다음에 이야기해보도록 할게.
이름없음 2024/04/12 11:42:00 ID : GpQsphzaoK1
ㅂㄱㅇㅇ! 레주 필력 뭐야 재밌다!
이름없음 2024/04/12 12:16:17 ID : lh9ck3xyLcJ
댓글 두 번이나 달아줬네 그 정도로 재미있던 건가?! 앞으로도 열심히 적을게, 칭찬 고마워!
이름없음 2024/04/13 02:15:54 ID : lh9ck3xyLcJ
【산속 인형】 이건 우리, 그러니까 고등학교 시절에 있던 섬뜩한 오컬트 동아리에서 처음으로 의뢰받은 사건이었어. 대부분 우리끼리 알아온 사건들을 주로 다루었지만, 어느 날 동아리실 앞에서 주뼛거리고 있는 사람이 있길래 말을 걸어보니 제보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더라.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우리는 당황스러우면서도 흥미로웠어. 이미 동아리 면접 때의 소문이 퍼져 괴짜들 모임이라는 건 다들 알았지만, 주된 동아리 활동인 탐사는 철저히 우리들과 해봐야 주술사 여선배 정도에게만 알려졌기에 실질적인 경험을 했다는 걸 사람들은 몰랐어. 그런데도 찾아왔을 정도로 다급했던 걸지도 몰라. 어쨌거나 이건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라는 거겠지. "산속에서... 그러니까, 어, 인형 뭉치...? 같은 걸 봤어요." 그 여학생분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어. 어쩌면 제대로 기억하지만 그 기억의 이미지 자체가 흐릿했던 걸지도 모르겠네. 나 같은 일반인들이 귀신을 접하면 그 형체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근데 그게 정말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기억에서 다시 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어서 헷갈린다고 판단하는 걸지도 몰라. 확실한 건 내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일반적으로는 저런 반응이 평범하다는 거야. 우리에게 말해준 내용은 이래. 걷기 동아리-거짓말 같지만 진짜 있는 동아리였어-의 일원이었는데, 그렇게 냇가를 걸어다니다보니 자연스레 걷는 게 즐거워졌다는 거야. 걷는 것을 점점 혼자서도 즐기게 됐고, 등산의 영역까지 넘보게 되었는데 중간에 길을 놓치고 삐뚤어진 방향으로 가게 됐대. 어떻게 돌아가지 걱정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찰나에 그걸 봐버린 거야. "거기에 인형이 잔뜩 있던 거에요. 놀라서 도망치다가 실족해서... 다리가 이 모양인 거고요." 그 사람은 우리에게 부러져서 깁스를 한 발을 보여줬어. 그래도 크게 안 다친 게 다행이었지. "인형이 잔뜩 있었다는 게... 일본의 그 숲처럼....?" "아,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렇게 확 드러나는 건 아니었는데... 그냥 쌓여있어요. 이상하리만큼 더럽고 낡은 인형 뭉치가..." 그 이야기에 배구부 여선배는 잠깐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우선은 계속 이야기를 들었어. 그 후로도 그 인형이 머릿속에서 벗어나질 않아서 그림까지 그렸었고 우리에게 그걸 잠시 보여줬어. 그 사람의 그림 실력이 그닥 뛰어나진 못했기에 디테일한 부분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대충 형태는 돌탑처럼 수많은 인형이 쌓여있는 느낌이었어. 제대로 마주하고 잊어버리고 싶지만, 다리가 그 모양이어서는 도저히 갈 수가 없다는 거야, 그러니 우리가 진상을 밝혀줬으면 좋겠다고. 되도록이면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줄 사진도 하나 찍어주면 좋겠다고. 그게 우리에게 한 부탁이었어. "그래, 좋아~ 그런데, 사진은 조금 고민해봐야겠는걸?" "엇, 왜요?" "심령 현상이라면 찍을게. 하지만 아니라면 딱히 찍고 싶진 않아~ 자, 이야기 끝! 내일까지 해결해둘테니까, 수업이나 들어가시고 금요일에 봐~" 배구부 여선배는 의뢰자를 쫓아내듯 내보냈어. 그리고 신난 듯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었지. 되게 초기에 있던 일임에도 저 표정을 보고 난 단번에 알았어. 지금 느껴진 나쁜 예감이 적중할 거라는 사실이 말이야. 우린 평소와는 달리 이른 저녁에 산을 올랐어. 거의 학교가 끝나자마자 버스를 타고 출발했지. 덕분에 안경 여선배는 학원을 하루 빼려고 몇 분 넘게 통화했었어. 이건 실족했다는 말로 볼 때 그닥 길이 안전하지 않다는 점과 산, 그것도 등산로를 벗어난 곳을 가야한다는 점 때문에 밤에는 갈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어. 물론 이건 우리의 추측이고, 배구부 여선배가 말한 이유는 '밤에 봐서 즐거울 녀석은 아니다'였어. 산을 올라 전해들은 장소에서 방향을 꺾어보니 그냥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거기엔 자라난 나무들과 빈 공터만이 계속 있었지. 슬슬 어두워질 시간이었던지라 우리는 사방으로 퍼져나가 다급히 그걸 찾으려 애썼어. 그리고 그 첫 결승점을 지난 건 불행히도 나였지. "으악!" 알고 있었지만, 처음 보자마자 비명부터 나왔어. 그건 그림으로 작게 그려져 있어서 그렇지, 거의 우리 가슴팍까지 올라올 높이의 인형으로 된 덩어리였어. 오랜 시간 밖에 내놓아진 탓에 이끼가 자라고 여기저기 녹아내린 부분에 더불어 인형의 겉면에 묻어있던 잉크 따위들이 흘러내려 뒤죽박죽이었지. 내 비명에 놀란 셋이 모이고 함께 그걸 바라봤어. "...확실히 을씨년스럽긴 하네." "그래도... 역시 딱히 귀신은 아니네요..." 남선배와 안경 여선배의 평은 그랬어. 난 되려 이런 게 귀신이 아니라는 게 더 끔찍하더라. 귀신이 아니라면 누군가 분명히 의도를 갖고 이런 것일텐데 관리도 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난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아서 혼자 고개를 이리저리 갸우뚱했어. 그런 내 모습을 본 배구부 여선배는 씨익 웃으면 내 옆에 다가왔어. "가까이서 한 번 구경해봐~ 새로운 점들이 보일지도~" 나는 선배의 말에 당황한 채로 머뭇거리다가 남선배와 안경 여선배가 먼저 앞장 서주는 걸 보고 용기를 내서 함께 가까이 다가갔어. 딱히 편견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건 전부 여자 아이들이 가지고 놀법한 어린이용 인형들이었어. 9할 이상이 플라스틱으로 된 장난감으로, 옷 갈아입히기 인형이나 소꿉놀이용 인형 따위처럼 보이더라. 하나 같이 햄버거 게임을 하듯 서로가 서로를 깔아뭉개듯 누운 채 그 모습을 천천히 잃어버리고 있었어. "...이거, 오래된 줄은 알았지만 전부 옛날 인형 같은데요." 처음으로 느낀 건 그거였어. 싸구려 느낌이 나는 것도 이유겠지만, 그것보다도 요즘 있는 브랜드 상품들이 아니라 8-90년대에 짝퉁으로 낼 법한 분위기의 인형들이 잔뜩이었어. 그럼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여기 있었다는 말이 되겠지. "그렇게 되면 비교적 상태가 괜찮네... 어쩌면 꽤 오래 관리되다가 그만두게 된 걸지도..." "게다가 다 신품이야. 중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봐, 옛날에 자주 쓰던 진공 비닐이 남아있는 애들도 있어." 둘의 의견을 전부 들은 배구부 여선배는 가까이 다가와서 우리에게 말했어. "이거 실종된 아이를 찾으려고 쌓아놓은 거래~" "네?" "예전에 딸과 아빠만 살던 가정이 있는데, 아빠가 일하러 나간 사이에 혼자 논답치고 애가 산에서 실종된 거지. 경찰까지 동원해 찾고 찾으며 아무리 찾아도 못 찾겠다는 거래. 그래서 애가 가장 좋아하던, 그리고 가지고 싶어했던 플라스틱 인형들을 보면 돌아올까 싶어 이 산에 하나하나 놓기 시작한 게 여기까지 온 거지." 나는 그 이미지를 상상하려 애썼다. 아이에게 해주지 못한 것이 뒤늦게나마 후회되어 하루하루 인형을 쌓아가는 홀로 남은 아버지의 모습이. 어떻게든 좋은 모습을 유지하려 바득바득 쌓여있는 인형들을 관리하고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딸을 기다리던 그 모습이 상상이 되니 뭔가 미소가 지어지질 않았다. "그럼... 이제 관리하지 않는다는 건..." "....글쎄~ 어쩌면 찾은 걸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라면 뭐... 받아들인 걸지도 모르고. 이거보다 더 나쁘게 생각하진 말자~ 그래서 좋을 건 하나 없잖아?" 우린 그 말에 동의하며 하산했어. 이걸 의뢰인한테 어떻게 설명해줘야 마음이 편해질까 하는 걱정만 들었지. "...생각보다 마음이 편하진 않네요. 오컬트란 건..." "원래 그런 법이야. 오컬트란 것도 결국 사람 사는 일이다보니까 말이지~" "익숙해지는 게 좋을걸. 겪기 싫어도 이런 일들을 자주 만날 가능성이 높아." 배구부 여선배와 남선배는 떳떳이 말했지만, 여전히 나와 안경 여선배는 쉽게 받아들이질 못했어. 우린 이런 거나 찾아다니면서 재미를 느끼는 건가 싶기도 했지. 의뢰인에게는 사실대로 말했어. 굳이 거짓말이나 좋은 이야기를 보태어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우리 말을 듣던 의뢰인은 한참이나 말 없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어. "그런데... 만약 그런 거라면 인형을 왜 쌓아놓죠? 그것도... 그렇게나 정갈히 한 방향으로만..." "그건 관리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 아닐까요? 신품으로 보이고 싶던 마음이..." "진공 비닐도 뜯지 않았던 거라면 그런 문제는 없지 않았을까요? 사방에 두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 방향으로 전부 누워있는 게 이상해요."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지만, 돌아와서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어. 사방팔방에 두는 게 훨씬 효과가 좋을텐데 굳이, 그것도 등산로에서 한참 벗어난 한 지점에 이상하리만큼 인형을 쌓아둔다... 누가 청소의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야.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이 있었음은 분명했으니까. 그럼... 그건... "...." 우린 다 같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듯했어. 우린 묘한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지만 아무도 입밖으로는 꺼내지 않은 채 '극한으로 몰린 사람은 원래 이성적이지 못하다'라는 이론으로 밀어붙히며 의뢰인을 되돌려보냈어. 어차피 답은 얻었으니 의문점이 남아있어도 언젠가는 잊어낼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말이야. 우리가 굉장히 차갑게 굴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 사람도 알 권리가 있다고 말이지. 하지만 말이야... 인형이 움직여서 스스로 쌓인 걸지 모른다는 상상을 그 자리에서 뱉고 싶은 사람은 너희라도 아무도 없었을 거야. 확신해.
이름없음 2024/04/14 23:22:09 ID : lh9ck3xyLcJ
【사후세계】 너흰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어? 난 안 믿는 주의야. 그런데 영은 믿는다니 우스꽝스럽지? 이렇기에 더더욱 날 혼란스럽게 했던 일이 있어. 내 고등학교 1학년을 담당한 섬뜩한 오컬트 동아리에선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영에게 사후세계에 관한 주제는 금물'이라는 규칙이 따랐어. "이제야 묻는 거지만, 영에게는 사후세계가 있든 말든 상관 없는 것 아닌가요?" 내 물음에 모두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바라봤어. 아직도 그 날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듯한 시선을 잊을 수가 없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만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 걸요. 오히려 이런 걸 더 많이 묻지 않나요? 분신사바든 뭐든..." "그냥 애기들이 가지고 노는 RC카랑 어른들이 갖고 노는 RC카의 수준이 다른 걸 예시로 들면 되겠냐?" 물론 알고는 있었어. 아무 강령술에나 전부 반응해서 영이 오진 않을 거라는 걸 말이야. 되려 그건 대개 소속감을 느끼기 위함, 그리고 친구를 골려주기 위해 하는 경우가 더 많지. "그래서 왜 안 되는 거예요?" "음~ 그럼 지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붙잡아서 너한테 '당신, 진짜 세상이 따로 있는 건 알고 계시죠?'라고 물어보면 어떨 것 같아?" "그야... 조금 혼란스럽긴 하겠지만, 미친 소리 하는 사람이라고 넘겨짚을 것 같은데요?" "비슷한 거야~ 영들에게 있어서 그 세상은 죽음 이후의 세상이 아닐 수도 있어." "네?" 내가 답답했는지 남선배는 한숨을 가볍게 내뱉고는 대신 말을 이어갔어. "실제로 많은 영들은 자신이 죽은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부정해." "부정한다는 건...." "예전에도 내가 말했지만, 영이라고 해서 인간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게 아니야.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따르려고 해. 이건 아마 방어기제도 똑같이 적용될 거야. 죽음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쉽게 미쳐버리고는 하는데, 죽음이라는 거대한 충격에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 것 같아?" "..." 요컨대 이 이야기는 인지에 관한 내용이었어. 쉽게 요약하자면 이래. 사후세계에 관한 질문 그 자체가 망각하고 있던 죽음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는 거야. 이게 어떤 영들은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것에 대해 충격이 컸던 영들은 거부반응이 나타나는 거지. 그때의 라디오처럼 말이야. 트라우마를 지녔던 사람들의 무작위적인 감정 배출이 몹시 성가시고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점에서 영들의 죽음 인지 또한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거고, 이것이 해선 안 될 까닭이 되는 거야. "하지만 이상해요. 그때 분명 안경 여선배가 '죽으셨던 시기의 대통령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했단 말이에요. 이건 또 괜찮은 거예요?" "이게 참 애매해....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는 범위가 되게 한정적인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 다만 확실한 건, 사후세계에 관한 질문은 일괄적으로 예민하다는 거겠네..." "그랬어? 흐음~ 우리는 아예 그런 질문도 안 된다는 주의이기는 한데." "뭐, 우리보다 훨씬 강령술을 많이 했으니 애매한 범위를 잘 알고 있던 걸 수도 있고. 어쩌면... 죽음 그 자체는 안 되지만 그 주변의 영역은 괜찮은 게 아닐까? 뭐... 사후세계에 관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면, '지금 계신 곳은 어떤가요?'라는 질문은 허용되었을지도 모르지?" 우린 끝내 결론을 내질 못했어. 하지만 분명하게도 그들은 사후세계에 관한 질문만큼은 금물이라고 끝까지 내세웠지. 안경 여선배는 아마 경험으로 알고 있는 듯했지만, 둘이 같은 주의를 믿는다는 점에서 둘의 지론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둘을 가르쳤다는 사람에게서 배운 듯했어. 난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눈살을 찌푸린 채 혼자 생각에 빠졌었어. 괜히 복잡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 같아 그때는 말하지 못했지만, 여기는 어차피 너희들만 읽으니 내 생각을 말해보자면... 간섭이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 그 자체를 떠올릴지도 몰랐던 안경 여선배의 말은 아슬아슬하게 통과했지만, 사후세계에는 격한 반응을 보이며 거부했다. 라는 것보다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은 무언가의 간섭이 흐른다. 라는 내용이 더 그럴싸하다고 생각이 들었어. 있잖아, 우리가 헛된 소문을 퍼트려 영과 비슷한 존재도 만들고 별에별 영을 부르고 만나봤지만, 죽음 이후를 무언가에게서 알아낼 방도는 없었어. 그들이 정말 사람이 죽어서 된 영인지, 아니면 이들의 이론처럼 그저 생겨났든, 정신적 교착점에 의해 생겨났든, 우리와 다른 공간을 쓰고 있다는 건 분명해. 그것들이.. 그러니까 귀신 같은 것들이 물리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정말 정신적인 무언가라면 우리의 정신으로 도달할 수 없는 어느 절대 영역이라도 따로 있는 건 아닐까? 그 절대 영역의 벽에 틈을 내는 것이 우리의 '영감'과 '강령술'이라고 하는 애들이고. 그 너머의 세상을 알려는 것은 절대 영역에 관한 도전... 그로 인한 노이즈. 몰라. 뭔가 오타쿠처럼 말했지만, 난 아직도 귀신은 그다지 믿질 않아서 말이야. 이런 식으로라도 해석하지 않으면 그간 겪은 일들을 설명할 수 없어. 난 차라리 이런 접근이 편하다고. 우리 나름대로 오컬트의 경험이 쌓였던 시기에 다시 나왔던 이야기였던 만큼 아직 답이 나오지 않은 신기한 주제라고도 할 수 있어서 짧게 이야기해봤어. 너흰, 어떻게 생각해?
이름없음 2024/04/17 23:42:41 ID : lh9ck3xyLcJ
【개구리 조각상】 좀 예전에 적은 글이라 기억하려나 모르겠지만, 이건 내 고등학교 시절의 섬뜩했던 오컬트 동아리가 여름 합숙을 나선 때의 일이야. 당시엔 남선배 일이 너무 임펙트가 커서 그렇지 우리가 맡은 개구리 조각상도 만만치 않은 일이기는 해. 오늘은 한 번 그걸 이야기해볼게. 우린 첫날 별 수확이 없었어. 그저 그곳의 상황을 살폈지. 그곳은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산속의 자갈이 가득한 맑은 냇가였어. 그 옆에 마치 청개구리가 무덤 짓듯 떡하니 개구리 조각상이 서 있었지. 그건 나무로 섬세하게 깎인 짧은 장승 같은 느낌이었어. 다만 위에 깎여있는 게 사람의 얼굴 모양이 아니라 개구리였던 거지. 우린 처음 그곳에 가서 그냥 멍하니 그 조각상을 바라봤어. "그냥 이게 끝인가요?" "이런 일 하루이틀도 아니고 왜 그래~" "그래도 너무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냥 어두워서 무섭기만 해요." 당시엔 내가 투덜거려도 웃기기만 한듯 배구부 여선배는 키득거렸어. 나도 그때까진 그래도 즐겁게 기다렸던 것 같아. 뭔가 반응이 나타날까, 들리게 될 소리는 어떤 소리에 가까울까, 이렇게나 영을 부르는 것이 가깝게 있는데 괜찮은 걸까 하는 그런 기대감들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아쉽게도 그 날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 그저 조용했지. 둘째 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았어. 어쩌면 내가 그날에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차이점을 못 느끼게 된 걸지도 몰라. 그냥 우린 서로 한 마디 나누지 않고 개구리 조각상을 바라보다가 돌아가려던 찰나였어. 꾸르륵... 꾸륵... 그리고 뒤에서부터 그 소리가 들려왔어. 나도 배구부 여선배도 놀라서 뒤돈 채로 그곳을 빤히 바라봤어. 아주 일순간 들린 그 소리는 확실히 설명을 들었던 대로 개구리가 우는 소리 같기도 무언가 숨을 쉬기 힘들어하는 사람의 소리 같기도 했어. "들렸니?" "...네." "음~ 난 확실히 사람 소리 같기도 한데, 신입은 어때?" "저도 확실히 사람쪽에 가까운 것 같기는 한데..." 그냥 개구리가 울었다고 보기엔 힘들었어. 그건 방향성은 있지만 여전히 어디선가 들렸다는 감각이 없어. 영들에게서 느껴지는 감각의 특징이었지. 그렇다면 분명 개구리라기보단 사람이라고 느꼈던 것 같아. 아무래도 지네 사건을 겪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런 영적인 감각은 무조건 사람으로만 관련이 있다고 느낀 것도 하나의 이유였겠지. "그럼 확정이네~" "뭐가요?" "이거, 사실 소년을 기리기 위한 게 아닐지도 모르거든~" 나는 배구부 여선배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뭐, 물론 불손한 건 아니지만~ 그게 옳은지는 모르겠네." 그 말과 함께 시작된 설명은 나를 다소 당황스럽게 했어. 그러니까 그 개구리 조각상은 평안과 묵념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살아있길 바라는 마음', '돌아올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졌다는 거야. 이쯤되면 어느 정도 눈치챘겠지만, 이걸 배구부 여선배가 보기엔 그 목적 때문에 굉장히 다른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는 거지. 원래라면 평온한 죽음을 받아들였어야 할 아이가 이것에 묶여 영이 되었다는 거야. 그런데 하필이면 그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서 물귀신과 비슷한 느낌이 되어버린 거지. 쉽게 말해서... 영원히 물속에서 익사하고 있는 거야. 믿고 싶지 않았어. 너희라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믿고 싶지 않을 거야. 그런 끔찍한 상황을 우리의 오컬트 탐사라는 명목으로 즐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속까지 안 좋게 할 정도였지.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어. 그런 사실을 알고 나면 즐겁지 않은 일이 될 법도 한데, 배구부 여선배는 여전히 희미하게 웃고 있었어. '이 사람은 진짜 답이 없구나.' 당시의 나는 멋대로 생각했어. 그냥 배구부 여선배는 불쌍하다고 느낄 생각이 없는 거구나, 아직도 이런 게 즐거운 거구나, 처음부터 알고 있는데 내 앞에서 그렇게 웃고 있었구나 하면서 말이야. 그때부터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지끈거려오던 것 같았어. 그리고 그날 새벽 남선배의 일이 있었지. 배구부 여선배도 나도 그 다음날은 별로 컨디션이 좋질 않았어. 그런 거대한 걸 만났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냥 남선배의 행동에 배구부 여선배도 약간 놀란 듯했어. 나는 말할 필요도 없었지. 그리고 우린 마지막 날 어디 놀러가는 것 대신 모두 개구리 조각상을 함께 지켜보기로 했어. 캠핑이라는 명목으로 말이지. 난 진짜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 남들에겐 내게 말해준 사실을 말하지도 않고 그냥 즐길 거리로 숨긴 채 캠핑을 하는 거야. 영원히 고통받는 영 앞에서 캠핑이나 하겠다는 사실이 영 탐탁지 않더라고. 그래도 그걸 티를 낼 수는 없으니까 배구부 여선배의 지시에 따라서 모닥불도 피우고 텐트도 세우고 했어. 하고 나니 캠핑이라는 느낌은 물씬 났지만, 그냥 그것뿐이었어. 결코 즐겁질 않았지. 나만 즐길 수 없는 캠핑이 이어지던 도중에 그건 다시 시작됐어. 한밤 중에 갑자기 냇가 방향에서 들려왔지. 꾸르륵...꾸륵... 이전에는 아주 잠깐 들린 것에 비해 이번에는 굉장히 길게 이어졌어. 꾸르륵... 꾸륵.. 꾸륵... 꾸륵.... 주술사 여선배는 충격이라도 먹은 건지 입까지 틀어막으며 그곳을 바라봤고, 오컬트 동아리였던 우리는 비교적 무덤덤하게 그곳을 바라봤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저게 개구리 소리와는 다르다는 걸 모두 눈치챈 것 같았어. 그렇게 아무도 반응하지 않고 바라만 보던 때에, 배구부 여선배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어. "슬슬 할까~" "그거 진짜 하는 거냐." "응! 하긴 해야 하는 일이잖아?" 배구부 여선배는 남선배와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조금 주고받더니 개구리 조각상을 향해 걸어갔어. 그리고는 냅다 발차기를 갈기더라고. 오늘따라 자주 말하지만 그때는 진짜로 미친 건 줄 알았어; 영을 만났을 때 수준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서게 되더라. 나는 그리고 배구부 여선배에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쳤어. 내가 분노에 가득차서 소리치니까 배구부 여선배는 왜 그러냐는 듯이 숨만 헐떡이면서 눈썹을 치켜세웠어. "아니, 그걸 왜 부숴요!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잖..." "있잖아. 내 설명도 들었으면서 잊었니?" "그건...!" 난 그 뜻을 곧장 이해했어. 그 영이 고통받는 건 전부 그게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뜻이었지. 그러니까... 그걸 부숴버리면 이 문제가 해결될 거란 것 같았어. 아무리 그래도 영을 묶어둔 물건이라면 그런 물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 지금처럼 뚜렷한 건 아니지만, 난 여전히 직접적인 힘이 영에게 간섭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질 않았거든. 하지만 내 그런 반대에도 그냥 배구부 여선배는 어깨만 으쓱이며 계속 개구리 조각상을 뽑아버리려 했어. 점점 그 듣기 힘든 소리는 커져만 가는 듯했고 이건 분명히 해선 안 될 짓을 하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했어. 끝내 멈추지 않던 배구부 여선배는 개구리 조각상을 뽑아버렸어. 그러자 놀랍게도 그 소리를 조금씩 낮아지더니 편안한 숨소리를 한 번 들려주고는 들리지 않게 되었어. 우리는 그 소리만으로 어떤 상태인지 상상할 수 있었지. 어안이 벙벙해진 우리는 지쳤는지 땀을 손등으로 닦고는 개구리 조각상을 들고 오는 배구부 여선배를 바라봤어. 그리고 배구부 여선배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개구리 조각상을 모닥불 위에 던져버리고는 손을 털며 우리에게 말했어. "뭐해? 돌아가자~" 우린 그게 틀린 행동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살짝 어안이 벙벙했어. 결과적으로 실제로 영은 편안하게 된 것 같았지만 그 방식이 너무 믿기 힘든 건 사실이었지. 그렇게 모닥불은 남기고 텐트만을 회수한 채 우린 돌아갔어. 돌아가는 배구부 여선배의 옆에 내가 서 있었는데, 뭔가 배구부 여선배의 표정이 좋진 않았어.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원래 조금 웃는 상의 사람인 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은 건 아닌 듯했지. "...죄송해요.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었는데." "신입은 날 그다지 안 좋아하니까~" "..." 정곡을 웃으며 찔러오는 모습에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돌렸어. 그런데 반응을 보아하니 내 반응 때문에 화난 게 아닌 듯했어.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으세요?" "...참 사람은 미련하구나 싶어서~" "그게..." 난 더 물어보려다가 말았어. 의미를 곧장 깨달았지. 저 개구리 조각상. 결국 인간의 욕심 덩어리나 다름이 없잖아.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길 바라는 그 마음에 만든 거지만 결국 실패하고 더욱 괴롭게만 만든 거야. 심지어 아주 오래된 일이니 저 영이 얼마나 저기서 도움을 바라고 그 소리를 내던 건지는 상상도 못할 정도야. 결국 오컬트도 사람에 의한 것이 많다지만, 이건 우리가 겪은 가장 사람의 욕망에게서 비롯된 오컬트 사건이었어. 이건 여담이지만, 실제로 조각상을 뽑아버려서 영을 해방시키는 게 성공한 것과는 별개로 그런 걸 멋대로 건들지 말라고 이후에 배구부 여선배에게 엄청나게 후회하며 말했어. 나는 행여나 그 영이 선배한테 씌이기라도 한 건가 싶었는데, 비슷한 모양이더라. 뭔가 나쁜 기가 몸에서 빠지질 않아서 며칠 고생했다고. 뭐, 너희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너희도 행여나 이런 일이 생기면 저런 공격적인 방법은 사양하는 게 좋을 거야. 차라리 전문적인 곳에 맡기는 게 훨 나을 것 같네. 어쨌거나 이 일을 통해 알 수 있던 건 두 가지야. 첫째는 배구부 여선배는 영보다는 사람을 괴롭히고 놀리기 좋아한다는 것과... 하나는 영의 매개체가 영에게 분명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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