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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mGnzSGq3 2019/11/02 00:07:25 ID : eHu8peY1eGo
가끔 글 쓰는 개인 스레 필력 꽝 조언 감사
◆alimGnzSGq3 2019/11/02 01:33:13 ID : eHu8peY1eGo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은 손끝에 물을 묻혔다. 손가락에 묻은 콧물이 미끌거리며 씻겨나갔다. 빨간 모자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거울을 봤다. 칙칙하고 타일벽을 뒤로 하고 돋보이는 것은 새빨간 빨강뿐이다. 빨간 모자의 시야가 흐릿하다. 안경을 밟아서 안경이 망가졌다. 안경 다리가 꺾였고 안경알은 조각이 났다. 빨간 모자는 안경집에 가야 한다. 빨간 모자는 화장실에서 나갔다. 물 묻은 신발 밑창이 바닥과 만나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안경집은 멀지 않다. 빨간 모자는 발걸음 수를 세면서 걸었다. 스무 걸음 앞에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빨간 모자는 숫자 세기를 그만뒀다. 달릴 때는 걸음 수를 셀 겨를이 없다. 빨간 모자는 숨이 찼다. 빨간 모자는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는다. 안경집 문은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문이다. 헐떡임이 멈출 때까지 빨간 모자는 유리문의 시야를 벗어나 몸을 숨겼다. 호흡이 평소대로 돌아오자 빨간 모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경집 점원은 싹싹하다. 점원도 안경을 썼다. 빨간 모자는 망가진 안경을 건넸다. 점원은 기다려 달라 말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경집 내부는 무척 밝다. 빨간 모자는 눈을 찌푸렸다. 챙이 없는 모자는 조명을 가려주지 못한다. 빨간 모자는 안경집을 둘러봤다. 곳곳에 거울이 놓여 있다. 거울에 빨간색 베레모가 비쳤다. 빨간 모자가 가만히 거울을 쳐다보는 사이 점원이 나왔다. 안경을 새로 구입하는 게 나을 거라 했다. 그러려면 먼저 시력 검사를 해야 하지만, 안경집에 시력 검사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절차는 생략됐다. 빨간 모자는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안경테를 골랐다. 무난한 검정색이다. 빨간 모자는 더 둘러보지 않고 곧바로 결정했다. 안경 때문에 빨간 모자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병원까지 걸어가는 동안 빨간 모자는 다시 걸음 수를 셌다. 빨간 모자는 걸을 때 정면을 보지 않는다. 빨간 모자의 시선은 늘 발끝을 향한다. 챙이 없는 모자는 얼굴을 가려주지 못한다. 길에는 사람이 많다. 빨간 모자는 잰 걸음으로 걸었다. 병원은 눈앞에 있지만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병원에는 의사가 빨간 모자를 기다리고 있다. 빨간 모자도 의사를 기다렸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의사의 말에 빨간 모자는 잘 지냈다 대답했다. 의사는 이 대답이 형식적인 것임을 알고 있다. 빨간 모자는 고개를 숙였다. 챙이 없는 모자는 얼굴을 가져주지 못한다. 빨간 모자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의사는 자판기로 무언가 적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한 주 동안 별다른 일 있었어요? 별 일 없었어요. 안경 바꿨네요. 안경이 부러져서 새로 샀어요. 어이쿠, 어쩌다가 부러졌어요? 의사는 다정하다. 빨간 모자는 의사만큼 다정하지 못하다. 이불 속에 있는 걸 못 보고 깔아뭉갰어요. 시력이 많이 나빠요? 좀 나빠요. 의사도 안경을 쓰고 있다. 안경 쓴 지 얼마 안 돼서 어색하죠? 조금. 의사는 가만히 웃는다. 안경을 쓰니까 어때요, 사는 게 좀 불편한가? 조금. 당신한테 안경은 어떤 물건이에요? 빨간 모자는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불편한 가리개. 의사는 다시 웃는다. 음, 선글라스가 아니어서 다행이네. 의사는 자판기를 두드렸다. 안경으로 무얼 가리고 싶어요? 빨간 모자는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눈. 눈? 빨간 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눈을 가리고 싶어요? 빨간 모자는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운 게 티 나니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요? 빨간 모자는 코를 훌쩍거렸다. 울고 싶지 않아요. 의사는 가만히 빨간 모자를 바라봤다. 빨간 모자는 화장실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했다. 화장실 조명은 따뜻한 주황색이다. 화장실 안에서는 모자의 새빨간 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빨간 모자는 코를 훌쩍이며 안경을 벗었다. 눈 흰자위가 붉어져 있다. 빨간 모자는 조금 새어나온 콧물을 손가락으로 훔지고 손끝에 물을 묻혔다. 콧물이 씻겼다. 빨간 모자는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물 묻은 손가락이 눈가를 향했다. 빨간 모자는 물로 눈물을 씻었다. 빨간 모자의 눈길이 거울을 향했다. 주황색 조명은 붉은 빛을 누그러뜨린다. 나는 울고 싶지 않아요.
◆alimGnzSGq3 2019/11/02 01:39:37 ID : eHu8peY1eGo
와우 모바일로 보니까 엄청 빽빽하군
◆alimGnzSGq3 2019/11/02 21:18:05 ID : eHu8peY1eGo
당신은 낙엽을 닮았군요. 남자가 여자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가을비를 맞고 떨어진 낙엽 같아요. 그럼 당신은 때 묻은 눈더미겠군요. 여자는 딱딱하게 응수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비가 그칠 텐데, 굳이 비를 맞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여자는 남자를 쳐다봤다. 회색 머리칼에 이슬처럼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눈빛에 남자는 웃었다. 보세요, 비가 잦아드네요. 남자는 손을 뻗어 비가 내리는지 확인했다. 진눈깨비처럼 무겁게 내리던 빗방울이 어느새 가벼워졌다. 여자는 손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 남자가 말을 거는 바람에 여자는 자기가 왜 이곳에 왔는지 잊어버렸다. 노랗고 붉은 머리칼이 손수건을 적셨다.
◆alimGnzSGq3 2019/11/03 14:48:03 ID : eHu8peY1eGo
그 사람은 바다에서 왔다. 태평양인지 대서양인지, 동해인지 서해인지, 정확히 어떤 바다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바다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사람 몸에는 군데군데 비늘이 있는데, 햇빛을 받으면 고려 청자 같은 빛이 난다. 그 사람이 내게 비늘을 보여주며 자신은 바다에서 태어났다고 말해준 것은 바로 며칠 전이었다. 그 사람이 나를 비밀스럽게 불러낼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같이 날이 추울 때 피부가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바다에서 태어난 사람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몸에서 비린내가 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지능이 물고기만 하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었다. 비늘과 아가미가 드러나지 않은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보통 사람이었다.
◆alimGnzSGq3 2019/11/03 14:48:54 ID : eHu8peY1eGo
의도치 않게 제목이 어그로를 끌었나 보다. 조회수가 이만큼이나!
◆alimGnzSGq3 2019/11/05 22:00:48 ID : eHu8peY1eGo
그 사람은 빛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자주 들려줬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을 뿐 거기에 참여하지 못한 까닭은 그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그는 생각을 날것 그대로 입밖에 꺼내놓는 말버릇이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마치 서툰 초보 번역가가 옮긴 외국 서적을 오디오북으로 듣는 것 같았다. 이 비유는 조금 과장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사유의 흔적에 비해 그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발음은 정확했다. 하루는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차오른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다. 만조가 되면 바닷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세상이 빛으로 가득해진다고. 그러나 그 말을 할 때 그는 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이 흐린 날이었는데도 그는 왠지 눈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구름이 많이 낀 날이 오히려 자외선이 더 강하다고 했던가. 자외선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빛에 무척 민감했다. 나는 그에게 선글라스라도 사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alimGnzSGq3 2019/11/05 22:31:42 ID : eHu8peY1eGo
그 사람은 비 오는 바다를 좋아한다.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 사람은 겨울 바다를 좋아한다. 물이 가득하지만 어딘가 건조한 느낌이 들어서 그렇단다. 그는 바다를 좋아한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시도 바다에 관한 것이다. 그 사람은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살고 싶어하면서도 그러기를 무서워한다. 너무 자주 보면 혹여나 바다를 사랑하는 마음이 식을까봐 그렇단다. 그 사람은 건조함을 사랑한다. 동시에 비를 사랑한다. 나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메마른 빗소리를 사랑한다.
◆alimGnzSGq3 2019/11/05 22:41:33 ID : eHu8peY1eGo
그 사람은 철학자를 동경한다. 그 사람은 예술가를 동경한다. 그 사람은 과학자를 동경한다. 그 사람은 이번 생에 자신이 동경하는 것 중 어느 하나라도 가질 수 없었음을 슬퍼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철학도 예술도 과학도 우리에겐 너무나 먼 것이었다. 우리는 흙바닥에서 살았다. 흙바닥을 좋아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낙서를 하고 곧바로 지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이 콘크리트 위가 아님에 감사했다. 그러나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할 지 몰랐다. 고마워한다는 말만 있을 뿐 거기에 마음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우리 둘 다 알면서도 늘 마음에 없는 말을 반복하며 살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정말로 고마운 마음이 생겨날 것처럼, 고마워해야 할 대상이 있게 될 것처럼 우리는 계속 고마워했다.
◆alimGnzSGq3 2019/11/06 23:56:51 ID : eHu8peY1eGo
그 사람은 자기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 덕에 문단속은 오로지 내 몫이 되었다. 나는 가끔씩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먼지가 얼마나 쌓였나 살펴보고, 그 사람이 얼마나 떠나 있었는지 가늠해보고, 청소도 하지 않은 침대에서 잠들었다. 그 사람이나 나나 청소를 싫어한다. 그 사람은 청소가 싫어서 떠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본 것은 몇 달 전이었다. 그 사람은 피곤한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피곤한 모습으로 다시 길을 떠났다. 그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어디로 갈 생각인지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묻지 못했다. 그 사람의 눈은 묘하게 슬퍼 보이기도 하고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집에 돌아올 때마다 새로운 표정을 보여준다. 나는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전혀 새로운 감정을 느낀다. 옛것에 대한 그리움, 나중에 대한 기다림, 돌이킬 수 없는 후회, 흔들림, 굳건함, 연약함, 강인함, 갈 곳 없는 마음들. 그 사람은 시간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듯했다. 여러 개의 시간과 공간에 여러 개의 집을 둔 것 같았다. 머물러야 할 곳이 많은 걸까? 그 사람은 떠날 때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나에게 꼭 돌아오겠노라 약속을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그는 이곳을 잊어버릴까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서우면 떠나지 않으면 될 일이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내 몸의 일부라도 떼어주고 싶었다.
◆alimGnzSGq3 2019/11/10 01:00:56 ID : eHu8peY1eGo
신도 인간을 필요로 한다는 말을 그대는 기억하는가? 인간은 신이 되고자 하는 반면, 신은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여기, 새로운 시대의 바벨탑이 완성된 때, 신과 인간은 마침내 하나가 되고 끝없던 고통과 절망은 사라지게 될지어다. 태양을 경배하라! 우리는 어둠을 밝힐 빛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가 빛이 되리니. 땅을 경배하라! 우리는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스스로 창조하게 되나니.
◆alimGnzSGq3 2019/11/14 00:37:07 ID : eHu8peY1eGo
그 남자는 나와 같은 미술반 수업을 듣는다. 시청에서 겨울마다 하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십만 원을 지불하면 일주일에 두 번씩, 12주 동안 유화를 배울 수 있다. 유화는 수채화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불투명하고, 거칠고, 뻑뻑하다. 한번 붓질을 하면 수정하기가 어렵다. 내가 유화 클래스를 선택하게 된 건 막연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는 작품이라고는 고흐의 그림들뿐이었지만. 3주가 지난 지금도 나는 유화에 대해서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건 물감을 섞고 칠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족하다. 유화는 유화만의 질감이 있다. 유화는 수채화보다 붓 자국이 더 뚜렷이 드러난다. 내가 유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것 때문이다. 붓질이 캔버스에 많이 묻어난다는 것. 그 텍스처가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넨 건 그쪽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그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머리카락에 먼저 눈이 갔다. 잿빛이었다. 시청까지 오는 길에 본, 길가의 더럽혀진 눈덩이가 문득 생각났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었다. 그 사람에게 목례를 하고 나는 내 자리에 앉았다. 그 뒤로 나는 그 사람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오늘 그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거는 바람에 다시 생각이 났다. 그 사람은 내 머리카락이 비를 맞고 떨어진 낙엽 같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기분이 조금 나빠져서 내가 느낀 그 사람의 첫인상을 그대로 말해버렸다. 더럽혀진 눈덩이 같다고. 나와는 다르게 그 사람은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alimGnzSGq3 2019/11/15 01:08:14 ID : eHu8peY1eGo
오늘은 수업을 들으러 온 게 아니다. 얼마 전에 이사를 해서 전입 신고를 하러 온 것이다. 새 집은 전에 살던 집보다 시청 문화센터와 가깝고, 햇빛이 잘 들어온다. 문화센터에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 겸사겸사 시청에도 들른다면 나는 일주일에 세 번을 집밖으로 나오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평소에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겨울이면 더욱 그렇다. 할 일이 있거나 날씨가 유난히 좋거나, 그것도 아니면 함박눈이 내리는 날씨가 아니고서는 집을 나올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오늘은 세 가지 조건 중 어느 것도 만족하지 않는 날이지만, 더 이상 미뤄둘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집을 나왔다. 수업이 있는 날 전입 신고를 깜빡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은 집에만 있을 수 있었는데. 컴퓨터가 먹통이 되지 않았더라면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청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때는 하늘에서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진눈깨비 같은 것이 내리고 있었기에 나는 손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려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말을 걸었다기보다, 그가 내뱉은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딱히 남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혼잣말이라고 하기에는 타인을 분명히 의식한 목소리였다. 당신 머리칼은 비를 맞고 떨어진 낙엽 같아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당혹감과 신선함과 약간의 불쾌함이 뒤엉켜서 시청에 온 목적을 머릿속에서 한순간 지워버렸다. 그럼 당신 머리카락은 때묻은 눈덩이다. 나는 그렇게 응수하고 민원센터로 들어갔다. 시청에서 직접 전입 신고를 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했던 탓에 그 남자가 내게 준 복잡한 감정들은 쉽게 잊혔다. 나는 기억을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alimGnzSGq3 2019/11/15 19:17:24 ID : eHu8peY1eGo
집으로 가는 길에 뒤에서 저기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길에 사람이 없으니까 아마도 나를 부르는 것일 테지, 이런 생각으로 뒤돌았더니 그 남자가 보였다. 시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아까 그렇게 말해서 죄송합니다." 그 남자가 말했다. 그는 밝지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라 변명할 말이 없네요." "저도 죄송해요." 나도 얼결에 사과했다. 그는 안심이 되었는지 약간 웃었다. "아녜요, 제가 먼저 잘못한 건데요 뭘." 사과를 하고 나니 서로 할 말이 없어졌고 나와 그 남자는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둘 다 실수한 거니까 퉁칠까요?" 어색함을 무마하고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남자는 다시 웃었다. "아, 그렇게 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했습니다. 다음주에 봬요. 조심히 가세요." 남자는 상체를 약간 숙여 인사를 했다. 나도 똑같이 작별인사를 했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가 보다 하는 감상평과 함께 뒤돌아서는데, 갑자기 별난 궁금증이 생겼다. "저기," 나는 그 남자를 불렀다. "아까 그 말 칭찬인가요?"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화면이 정지된 것 같이 서 있더니, 멋쩍게 웃었다. "네, 칭찬이었어요. 기분 나쁘셨겠지만." 그 말에 나도 뭔가 말해주고 싶었다. "저도 칭찬이었어요. 아니, 그러니까," 괜히 말했나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머리 색깔이 예쁘시네요." 남자는 이번엔 소리 내어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쪽도 머리 색깔 예쁘시네요." 이상한 칭찬이 오가고 할 말이 고갈된 우리는 또 다시 어색함의 상태로 진입했다. 나도 그 남자도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불편했고 한편으로는 색다른 기분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그 남자와 나는 겨우 헤어졌다.
◆alimGnzSGq3 2019/11/16 22:44:02 ID : eHu8peY1eGo
수업이 있는 날 일찍 가서 기다리고 있을지, 시간을 딱 맞춰서 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침 첫 시간에 있는 수업이라 일찍 일어나서 가는 건 무리일 게 뻔하다. 평소에는 시간을 딱 맞춰서 가는데, 가끔 늦을 때도 있다. 그래도 늦어서 그 남자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것보단 5분이라도 일찍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내가 빨리 갈지 여유 있게 갈지 고민하는 건 그 남자 때문이다. 서로 사과하고 좋게 끝났지만, 어째서인지 마주치면 굉장히 어색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이불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름없음 2019/11/18 00:26:30 ID : QoNs4JU5gqm
오, 대단하시네요. 흐름 끊어서 죄송합니다.
◆alimGnzSGq3 2019/11/21 18:43:23 ID : eHu8peY1eGo
뭐가 대단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입 고마워!!!!!!
◆alimGnzSGq3 2019/12/05 20:22:37 ID : eHu8peY1eGo
아 쓰던 거 다 날아갔네
◆alimGnzSGq3 2019/12/05 20:50:55 ID : eHu8peY1eGo
오늘도 그날처럼 진눈깨비가 내렸다. 포슬포슬한 눈이 내렸으면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될 텐데. 젖은 우산은 간수하기 번거롭다.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을 살짝 열고 안을 엿봤다. 아무도 없다. 일찍 오길 잘 했다. 우산꽂이에 우산을 넣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그 남자 목소리다. 일찍 일어난 보람이 없어졌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네." 그 남자는 우산꽂이에 우산을 넣었다.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행동하며 나는 자리에 앉았다. 얼결에 그와 나란히 앉았다. 수업 시간에 쓸 화구를 준비하는 동안 물건들끼리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어색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소리. 하지만 어쩌면 어색한 건 나뿐인지도 몰랐다. "수업 들을 만하세요?" 문득 그가 물었다. "네." 짧게 말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았지만 나는 단답밖에 할 줄 몰랐다. "원래 그림에 관심이 있으셨어요?" 그는 말을 이었다. 다행히 이 남자 때문에 어색한 침묵은 피할 수 있겠다. "관심......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닌데, 예전부터 배워보고 싶어서, 안 바쁠 때 배우면 좋을 것 같아서요." 말이 두서없이 나오는 것 같았다. 남자는 웃었다. "저도 그래요. 혹시 무슨 일 하세요?" 그가 내 쪽을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 사람은 참 붙임성이 좋은가 보다. 나는 계속 화구를 챙기는 척했다. "대학생이에요. 지금은 휴학했어요." "어, 저도 휴학했는데. 어디 대학이세요?" "A대학이요." "어, 저도 A대학인데?" 그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놀란 건 그 남자만이 아니었다. 같은 대학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할 말이 없을 때 반사적으로 나오는 미소였다. 그도 웃고 있었다. "무슨 학과세요?" 그래도 마음 한켠에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또 대답만 하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되겠단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철학과예요."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무슨 학과세요?" 그가 내게 물었다. "전 국문과요." 이제 보니 같은 인문대였다.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참 좁네요. 같은 인문대 학생을 이런 데서 만나고."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alimGnzSGq3 2019/12/10 16:55:58 ID : eHu8peY1eGo
물에 잠겨 움직임이 둔해진 다리를 이끌고 물길을 헤쳐 언젠가 언젠가 네게 닿을 거란 믿음을 품고서 오로지 너만이 보이는 어둠을 향해
◆alimGnzSGq3 2019/12/10 16:57:06 ID : eHu8peY1eGo
너는 햇빛 나는 하얗게 그을은 어둠
◆alimGnzSGq3 2019/12/10 17:04:14 ID : eHu8peY1eGo
젖은 옷을 말리는 바람은 체온을 빼앗고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워진 몸은 한발짝 움직일 때마다 머리부터 우수수 눈사태가 되고 온통 무너진 것들은 또다시 한 움큼씩 쌓이고 물의 고리에 갇혀 벗어날 수 없는
◆alimGnzSGq3 2019/12/12 00:40:15 ID : eHu8peY1eGo
허니, 그런 마음 먹지 말아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나를 금방이라도 찢어버릴 듯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손짓 하나로 눈짓 한 번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 인간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다만 그는 참을 뿐이다. 그는 생각보다 인내심이 많아서 아무리 바보 같은 실수도 웃으며 넘어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허니, 자기, 오늘은 좀 취한 것 같네요. 맞다, 나는 술을 마시고 오는 참이었다. 이 인간이 술냄새를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사람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술을 마시고 이 인간을 대면하러 왔다. 이 인간을 마주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해서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데, 그래서 취객을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술에 취해 있고, 다만 정신은 그런대로 차리고 있으나, 언제든 저 인간의 손에 배가 뚫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내가 지금 이 인간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형국이었다. 술을 더 마셨더라면 인내심이 바닥나는 꼴을 봤을지도 모르겠는걸. 나는 속으로 말할 것을 밖으로 내뱉어버렸다. 그러나. 허니, 난 화나지 않았어요. 손짓은 섬뜩했으나 그의 얼굴은 차분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이제 뭘 어쩌면 좋지? 방으로 가서 내일 아침에 먹을 해장국을 기대하며 주무세요. 이 인간은 사람 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다.
◆alimGnzSGq3 2019/12/12 00:49:22 ID : eHu8peY1eGo
그놈의 허니, 허니 하는 말버릇은 어디서 배워 왔는지 모를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취기가 사그라들지는 못할 지언정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복도의 하얀 벽과 회색 돌바닥이 젤리처럼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허니, 부축해줄까요? 환청인지 모를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인간은 사뭇 다정해서 낯간지러운 말도 거리낌 없이 하는 인간이었다. 저것은 환청인가, 그럴 듯한 환청인가, 진짜 목소리인가, 그렇다면 나는 부축을 받아야 하나, 대답을 해야 하나. 대답을 했다가 환청이면 나는 술 취해서 혼잣말 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럼 어때, 술 취한 사람한테 그 정도는 기본이지. 허니, 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가요. 나는 꿀이 아닌데 왜 자꾸 나를 허니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다. 저 녀석은 꿀벌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이 꿀로 보이는 거야, 그래서 허니 허니 하고 사람을 부르는 거겠지. 저 인간은 심지어 동물에게도 허니라는 호칭을 쓴다. 그래, 저 녀석은 꿀벌이다. 세상 모든 것들의 달콤함을 빼앗아가는 꿀벌, 그래서 저 녀석의 주변은 삭막하기 짝이 없는데 유독 저 녀석만큼은 다정하고 상냥하고 달콤하다. 나는 갑자기 저 녀석을 핥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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