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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18/01/11 22:27:04 ID : byL85U0so5a
이름없음 2018/01/11 22:30:36 ID : byL85U0so5a
한 번도 소설 완결을 내본 적이 없어서, 꼭 완결하겠다는 목표로 여기서 끝까지 써보고 싶어. 백설공주의 새엄마가 왜 악인이 되었나에 대한 내용인데 빨리 끝내는 게 목표라 인물들 감정선이나 줄거리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어ㅠㅠ뭔가 이상하다거나 고쳤으면 좋겠다 싶은 부분은 지적해주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
이름없음 2018/01/11 22:35:22 ID : Ao46rAlxwq1
화이팅. 아까도 말했지만 문체 좋은거 같아. 빨리 끝낸다는건 조금 아쉽네.
이름없음 2018/01/11 22:59:09 ID : 89unvgZeNBt
우와 진짜 재밌게 읽었어! 스레주 힘내 ㅋㅋ 꼭 완결까지 보고싶어.
이름없음 2018/01/11 23:40:03 ID : B9ba01cts3x
문체는 나긋하고 표현은 세심해. 긴 글인데도 순식간에 읽었다고 느낄만큼 문체가 훌륭하다고 생각해. 완결을 진심으로 응원할게.
이름없음 2018/01/12 11:38:44 ID : lbhgqmJPipf
나도 이렇게 글 잘 쓰고 싶다 ㅠㅠ 근데 중간에 매긴 번호 중에서 4가 중복됐어~
이름없음 2018/01/12 18:27:34 ID : byL85U0so5a
6 내 인생이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예감한 건 그날 저녁이었는지도 모른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 드르렁거리며 잠들어 있는 아빠,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엄마의 숨소리. 세상은 평소와 똑같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사물들이 미래를 속삭이고 있었다. 단지 옛날에는 앞날을 몰랐기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벽난로의 불꽃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쥐새끼처럼 다리를 타올라 어깨까지 이르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덮고 있는 짚은 축축하고 시체처럼 차가웠다. 무언가를 견디는 데는 소질이 없는 내 성격대로라면 곧바로 짚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야 했지만, 그것도 오랫동안 반복하니 익숙해진 것 같았다. 겨울의 잠자리는 늘 축축하고 소름끼쳤으니까. 여름에는 모든 것들이 점점 무르익으며 한밤이 되지만 겨울에는 모든 것들이 싸늘하게 식어가며 한밤이 된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키가 조막만했던 시절의 나는 그게 대지가 불어대는 입김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지병으로 인한 아픔에 시달리는 안나의 뒤척임이라는 건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나 알게 되었다. 그날밤도 꼭 그랬다. 갑자기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바스락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나이는 아니었으므로 온 감각을 소리가 난 곳에 집중했다. 길을 잃은 도둑이 그 흔한 빵 한 점 없는 우리 집에 침입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차하면 소리를 지를 준비를 하며 어둠 사이를 응시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바스락거리는 소리의 연속이었다. 잠시 후 그게 뭔지 깨달았다. 굳게 닫힌 나무문 너머에서 안나가 내는 소리였다. 가엾은 안나, 잠을 못 자고 있구나. 얼어붙어 빨갛게 곱은 손으로 짚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아까 들은 부스럭거림과 똑같은 소리가 났다. 아빠가 밤중에 나온 나를 보면 무척 화를 낼 게 틀림없었다. 그 뼈가 툭툭 불거진 손으로 머리채를 쥐어잡고 물을 것이다, 대체 어디로 갈보짓을 하러 가냐고. 아무 남자애랑도 하지 않을 거라고 소리를 지르면 그제야 엄마는 깨겠지. 눈이 내리는 밤의 일상이었다. 눈은 나를 매혹시켰다-사실 모든 희고 빛나는 것들은 그랬다. 끝없이 순결하고 깨끗해서 나랑은 전혀 달라 보였다. 그저 지켜 주고 보호해 주고 싶은 심정에 두텁게 쌓인 눈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고는 했다. 그러고 난 다음날이면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몸이 뜨거워졌다. 다행히도 아빠는 아침 일찍 농토에 가기 때문에 혼날 일은 없었지만, 제 몸이 아픈데도 나누어줄 연민이 있는지 나를 보듬으려 애쓰는 안나 때문에 늘 골치가 아팠다. 숨을 죽여 발끝을 부패 중인 나무 위에 얹었다. 끼익거리는 짧은 신음을 내뱉고 나더니 내 체중에 완전히 적응한 모양이었다. 그걸 네댓 번 더 반복하며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중간에 한 번 코를 고는 것을 멈춰 모든 생각이 얼어붙었지만, 아빠는 곧 뭔가가 막힌 소리로 피이이익, 긴 날숨을 뱉었다. 나는 안나의 방문이 물 먹은 소리로 끽끽대지 않기를 바라며 톡톡 노크했다. 노크, 그건 정말 이상한 습관이었다. 하지만 아빠조차도 안나의 방에 들어갈 때 노크한다는 무언의 규칙을 지켰다. 아빠가 안나를 존중했던 건 아니었다, 그는 누구도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만 안나를 지나치게 불편해했다. 그애는 사실, 농부의 딸보다는 귀족집 영애에 어울렸으니까. 정말인지 낡고 쥐가 나오는 집에서 산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운 애였다. 우리 둘은 쌍둥이여서 외모는 비슷했지만, 안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 사실을 잊고는 했다. 안나에게는 사람들이 자신이 그렇게 예쁘지는 않다는 사실을 잊게 하는 재주가 있었으니까. 그애는 항상 날개를 꺾여 날아오를 수 업는 천사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걸치고 있었다. 노크하자 곧바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방 안의 안나는 아마 누가 두드렸을지 가늠하고 있으리라. 나는 방문에 귀를 바짝 대었고, 안나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다. "레오니, 내가 깨웠구나!" 나는 손바닥으로 문을 밀었다. 다행스럽게도 비명 없이 부드럽게 밀렸다. 다시 등 뒤의 문을 꽉 닫자, 한순간 크게 들리던 코 고는 소리가 작게 멎었다. "아이들은 많이 자야 해, 그래야 키가 크지." 안나는 상냥하게 속삭였다. 달이 천장 즈음에 조그맣게 난 창문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깨진 달걀이 되어 온 세상을 끈적하고 맑은 은색 흰자로 채우겠지. 그 은빛 액체는 안나의 창백한 뺨과 머리로 스며들며 그녀를 빛냈다. 꼭 투명해 실핏줄이 보이는 피부가 반짝거리며 달빛을 빚어내는 것 같았다. 손으로 꽉 쥐면 부러질 갸냘픈 목, 자국을 남기기가 진흙보다 쉬울 것 같은 흰 손, 목 언저리를 덮고 있는 짚이불. 한순간 달려가 안나의 손을 꾹 누르듯 쥐었다. 평소에도 이질적이었지만 오늘은 더 그래 보였다. 작은 소원을 들어 주고는 가버리는 요정처럼 금방 사라질 것만 같았다. 공기에 녹아들듯 아주 떠나는 것이다. 안나는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안해하는지 알겠다는 듯 목에 입을 맞췄다. "레오니, 쉿, 자도 돼. 아무 일 아니야." "평소에는 밤에 잘 안 깨잖아." "미안해서 어쩌지, 네가 귀가 밝다는 걸 잊고 있었네." 나는 더 무서워저 안아 달라고 말했다. 안나는 시든 꽃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꽉 안아주었다. 그러나 이유 없는 그리움은 커지기만 했다. 불안해하는 나를 보며 안나는 커다란 비밀을 고백하듯 말했다. "레오니, 난 몇 분 뒤면 하늘나라로 갈 거야." "모두들 항상 그 말을 해왔어." 난 비난조로 속삭였다. 아니 속삭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안나가 자신의 입술 위에 검지를 대자마자 꽤 큰 목소리로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무 덧붙임 없이 서로를 보고만 있었다. 그동안 계속 안나의 시리게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건 기이한 반짝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는 모두가 그렇게 말해왔지만 안나만은 그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제 알았구나." 안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느낄 수 있어, 내 심장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이제 꺼져가고 있다는 걸. 사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지. 그 기적에 정말 감사해." 안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오, 레오니." 안나는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그제야 나는 내 눈물을 느꼈다. "거짓말." "모든 사람은 죽어. 나도, 엄마도, 아빠도, 프란츠도, 유진도." "그럼 나도 죽겠네." "저 위에서 만나겠지." 짧은 단어를 끝마치자마자 안나는 힘든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나는 공포에 휩싸여 안나의 가녀린 손목을 꽉 눌렀다. 내가 손아귀 힘을 풀었을 때 안나에게는 멍이 들어 있었다. "아파. 아주 아파, 레오니." 그리고 다시 눈을 마주쳤다. 아까보다 덜 빛났다. "난 고작 십이 년, 아니면 십삼 년 살았지." "넌 고작 십이 년, 십삼 년 살았어. 죽지 마. 그건, 그건 아니잖아. 알잖아. 그건 아니야." "내가 사라지는 게 두렵니?" "두려워!" 나는 거의 비명처럼 소리쳤다. 방문 밖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멎었다. "그러지 않아도 돼. 우리는 똑같이 생겼잖아. 호수를 들여다보면 내가 보일 걸." "농담하지 마, 농담하지 마." "미안하지만......그러니까, 너무 아프다. 정말 너무 아파." 안나는 한 번도 아프다는 말을 한 적 없다. 다음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빠가 노크 없이 방문을 연 것이었다. 아빠도 안나의 방 안에 가득한 기묘한 냄새를 감지한 게 틀림없었다. 그건 꺼져가는 화롯불이 내는 것과 비슷했다. 아주 불안한, 다시는 이 순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내음. "안나." 아빠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새하얀 안나의 피부에 눈처럼 세상이 반사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처럼 시린 냉기가 안나의 온 몸에서 흘러나왔다. 아빠는 정신없이 달려와 침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방 입구에서는 엄마가 바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지는 난쟁이들의 초라한 천막집처럼. 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바보처럼 구는 엄마도, 자기 딸인 주제에 그애를 숭배했던 아빠도, 점점 녹아내려 종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안나도. 엄마와 아빠는 안나를 뭉쳐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안나는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안카는 눈이었던 것이다, 정말로 그랬던 것이다. 온기를 받으면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흰 눈, 그게 안나였다. 아빠에게 꺼지라고 말하려고 했다. 아빠가 안나를 안아주면 안나는 정말로 물밖에 남지 않을 것이고 종국에는 그 물마저 증발하겠지. 우리 모두 안나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안나가 사라질 거야. 광기가 나를 휘감았고 안나의 손을 떨쳐내 방을 벗어났다. 엄마를 밀치고 지나갔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집 문을 잠그고 있는 긴 나무토막을 잡아빼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복히 쌓일 눈이. 아무도 없는 위험천만하고 어두운 거리를 계속 달리고 또 달렸다. 오른쪽 다리를 내밀면 다음으로는 왼다리를 내뻗었다. 안나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살아 있다고, 이런 순간에도 징그럽게 살아 있다고 꿈틀대는 이 따뜻한 심장과 안나를 최대한 멀리 떨어트려야 했다. 혼돈 속에서 달리는 와중에도 눈은 계속 내렸다. 바닥을 덮고, 하늘을 덮고, 온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온 세상이 안나의 창백함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뛰어도 뛰어도 온 세상이 안나였다. 결국 나는 유진이 보초를 서고 있는 북쪽 성벽으로 달려갔다. 지대가 계단처럼 빠르게 높아져 꼭 교수형대를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집 여러 개가 휙휙 지나쳤고 서로의 멱살을 잡고 바퀴벌레처럼 모여 있는 남자들이 점점 보이지 않더니 종국에는 아무 집도 없어졌다. 커다란 성문에 도착했다. 그 성문을 팔로 밀고 도망쳐 안나의 소식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탑의 나선 계단을 올랐다. 바닥 곳곳에 서리가 어려 미끄러워 두세 번 넘어졌다. 무릎이 깨지고 턱에서 피가 났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눈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유진이 있는 곳까지 이르자 유진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이해했다. 유진은 씨발, 하고 웅얼거리더니 나를 침대에 눕혔다. 시간이 다시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이곳에 몸을 뉘인 어저께 밤으로. 그리고 눈을 뜨면 아직 안나가 있을 것이다. 안나가 없는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내 반쪽, 내 영혼의 집을 잣는 소녀. 나는 잠들고 싶었고 잠들었다. 7 삶의 반짝거리는 순간들은 간간히 찾아왔다. 우리가 내일로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순간들 말이다. 그것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더 늘어났고 흰머리가 한두 가락 생겼을 즈음에는 거의 매일이 그런 날들이었다. 더 살아갔다면 더 많은 기회를 얻었겠지. 그러나 그 잔잔한 행복을 위해서는 젊은 날들을 견뎌야 했다. 한없이 괴롭고, 음울하고, 잔인한 날들. 나는 그 나날을 견뎌냈다. 뭐 그렇다. 사람들은 사신이 안나를 보고 사랑에 빠진 거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가여운 아이가 죽을 리가 없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신은 안나를 데리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의 영혼을 회수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은 일이지. 날 때부터 왼다리를 절어 먼 곳은 나가본 적도 없는 안나는 쓸데없이 똑똑하기만 해, 저 멀리 동방의 비취빛 바다를 꿈꾸고 사흘 밤낮을 걸어도 모래뿐이라던 이상한 장소를 알았으니까. 안나는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다가도 내 손을 붙잡고, '꼭 가. 나중에 좀 더 크면 수염을 붙이고 가슴을 싸매서 아주아주 먼 동방으로 떠나버려. 절대로 여자로 살아서는 안 돼, 그래서는 안 돼.' 하고 다급하게 속삭였다. 그런 말을 할 때면 나는 안나가 나와는 아주 다른 세계의 소녀인 것 같았다. 그냥 이 마을에서 자라고, 결혼하고, 일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에게 맞고, 그리고 죽겠지. 그게 내가 꿈꿀 수 있는 최대치였다. 고개를 흔들며 매몰차게 손을 빼내면 안나는 흥분해서는 그 흰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애원했다 '넌 여기 살아서는 안 돼. 네가 자유로울 수 있는 곳으로 떠나.' 안나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토하고 싶었다. 그 애는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목숨 걸고 훔쳐오는 책들 속에 파묻혀 살 뿐이었다. 망할 지도책 한 권이 내 목숨 값이라는 것도 모르고 터무니없는 소리나 해. 절대 그 사실을 폭로해서 안나에게 충격을 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처럼 굴 때마다 괴로워하게 만들고 상처주고 뺨을 때리고 싶었다. 사는 건 생존이었다. 그러나 안나의 세상에서 사는 건 꿈을 쫒는 일이었다. "난 널 이해해, 레오니. 여자애로 사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아. 하지만, 하지만-" "이해 못 해, 날 이해했다면 넌 이미 자살했겠지." "레오니......" "난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여기서 애나 줄줄이 싸지르고 그 애새끼들 뺨이나 때려주며 살 거니까 닥쳐." 그리고 끝났다.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동화 속의 안나와 처절함 속의 나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 지금에야 드는 생각이지만, 나도 그렇게 방 안에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무슨 귀족 집 자제라도 되는 냥 책이나 읽는 게 다였다면 우아해질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내게는 우아해질 기회가 없었다. 떠날 용기도 없이, 새끼 새가 어미 새에게 먹이를 받는 것처럼 안나가 주는 최소한의 꿈만 먹고 살았다. 말하자면 나는 그 세계를 동경했던 것이다. 흠 하나 없이 매끈한 안나의 세계를. 그러나 매끈한 것은 깨지기 쉬운 법이었다. 안나의 삶은 꿈을 깨트릴 걱정 없는 안전한 길이었지만 내 삶은 울퉁불퉁한 돌길이었다. 그래서 나는 비겁하게도 생존에 필요한 꿈을 외웠다. 마음속으로 받아들였다 깨지는 게 싫어 그저 머릿속으로만 갈 거야 갈 거야 되뇌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되뇌이다 보면 마음도 유해져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는 걸 몰랐다. 내가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안카의 꿈은 어느새 내 꿈이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득한 지평선 너머를 꿈꿨다. 나를 때리는 아버지도 없고 나를 짓누르는 절망도 없이 항구를 드나드는 거대한 배가 가득한 아라비아를. 서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가득해 내 꿈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곳을. 프란츠처럼 금색 갈기를 가지고 포효하며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사자를. 그러나 그곳까지 가는 길은 가파른 절벽이었다. 아예 도달하는 길이 보이지 않는 신의 땅이었다. "저 너머로 갈 거야," 성벽 위에서 내가 웅얼거리자 프란츠는 가만가만 미소지었다. 프란츠가 미소짓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저 너머, 어디까지?" "사자가 있는 곳까지. 내가 사람으로 대우받는 곳까지." "내가 데려다줄게." "네가?" "사자가 있는 곳에 가본 적 있어." "어떻게 생겼어?." "황금색으로 빛나, 자신을 붙잡으려는 인간들을 떨쳐내고 달려가. 자신을 가두려는 것과 늘 싸워." "상상이 안 돼." "꼭, 내가 보여줄게. 반드시, 꼭." "네 꿈은 뭔데?" "내 꿈은 너야."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프란츠는 금색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황금색 햇살이 나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안나의 꿈은 나의 것, 그리고 나의 꿈은 프란츠의 것. 그렇다면 안나는 죽어도 죽지 못한다. 네 꿈이 나와 프란츠를 침범하고 있으니, 너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꿈을 나누지 않았다. 그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가 누구에게 시집가게 될 것인가-그리고 그는 나를 많이 때릴까, 언제쯤 빵을 배불리 먹어볼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늘상 부정적이었고 그래서 더욱더 꿈에 매달렸다. 거기서는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었으니까. 일종의 이분법이었다. 현실은 추운 음지였고 그리는 꿈은 따뜻한 양지였다. 언젠가 꿈과 현실이 합쳐지는 날이 오면 해는 머리 꼭대기에서 나를 비추리라, 그렇게 그림자를 무찔러 주리라.
이름없음 2018/01/12 18:33:23 ID : byL85U0so5a
고마워ㅠㅠ모르고 있었어༼;´༎ຶ ۝༎ຶ`༽
이름없음 2018/01/12 18:53:36 ID : byL85U0so5a
긴 글 읽어줘서 너무 고마워ㅠㅠㅠ문체 좋다니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야 지루할 텐데 재미있다니 정말 고맙고 끝까지 읽어줘서 다시 고마워ㅠㅠㅠ 정말 고마워, 좋은하루 보내!
이름없음 2018/01/14 00:06:16 ID : byL85U0so5a
7 가만히 눈을 떴다. 온 세계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아니 내가 돌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판판하게 끼워맞춰진 돌들과 지붕을 얹은 기름칠한 나무. 그 나무들은 꼭대기로 갈수록 좁아지는 원뿔 모양이었다. 햇빛은 원뿔 중심까지 닿기 힘든지, 천장의 그 작은 공간은 완전히 캄캄했다. 나는 눈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숨을 멈췄다가 다시 숨을 쉬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눈이 다시 감겼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월. 안나가 죽었다. 숨막히는 기억들이 나를 압도한다 그리고 짓누른다. 이것은 기억일 수 없었다. 악몽이어야 했다, 악몽이어야 했다. 악몽, 그래야만 했다. 현실일 수가 없었다. 안나는 내 반쪽인데, 도끼로 나를 반으로 가른 것이나 다름없는데. 안나가 죽었는데 어떻게 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가. 성대보다 더 깊숙한 곳의 언어로 안나를 불렀다. 안나, 하고. 그러니까 안나. 나의 안나. 안나 안나 나의 안나 안나 안나 안나 안나안 나 안나 안나 안나안나안나 안 나 안나 안나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되뇌이고 싶었다. 되뇌이고 되뇌여서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단어로 느껴질 때까지. 똑같은 단어를 여러 번 외면 갑자기 뜻이 해체되고 이질적인 기분이 드는 것처럼, 안나라는 존재도 해체되고 멀어졌으면 했다. 너무 아프고 숨이 막혀서, 차라리 안나가 사라졌으면 했다. 안나, 그 두 글자를 수백 번 외었지만 그럴 때마다 안나라는 단어는 더 거대해졌고 터질 것처럼 부풀기만 했다. 결국에 그것은 나를 압도했다. 그 이름은 나를 잡아먹었다. 내 뼈 하나하나를 와드득 씹어먹고 살을 발랐다. 뼈만 잡아먹는 괴물. 뱉어진 살들은 모여 무언가를 만들어내려 했지만, 뼈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바로 그거야 안나. 네가 내 뼈들을 잡아먹어 버렸어.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어. 움직일 수도 없고 숨쉬는 법도 잊었고 심지어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법도 모르겠어. 안나. 돌아와, 다시 내 세계로 돌아와. 아직 안나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안나와 나는 연결되어 있었다. 내 피는 안나에게서 흘렀고 안나의 피는 내게서 흘렀다. 그런데 뻥 뚫린 기분이 들었다. 뱃가죽 언저리가 공허하게 열려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안나는 없다. 그러니까, 정말로 안나는 죽었다. 숨이 찬다. 심장이 새장 안에 갇힌 야생 새가 되어 발악했다. 내 심장 박동이 세계를 뒤덮을 거야. 정말로 그렇게 될 거야. 귀에서 느닷없이 이명이 들린다 꼭 온 몸을 후려치는 것처럼. 팔뚝과 허벅지 그리고 종아리 온통 울혈로 가득할 것 같은데, 그런데 아무것도 없어. 아니 울혈이 있어야지.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나는 손톱으로 허벅지를 긁었다. 그러자 숨을 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숨이 막혔다. 왜 내게서 소중한 사람들을 앗아가는 거야.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왜. 죽죽 긋기만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피가 배어나왔다. 이불이 붉어지는 것을 보는데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머릿속에 꽉 찼던 안나를 몰아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안나를 몰아내고 싶었다. 너무 아파. 너무 아픈데 허벅지가 아니라 다른 데가 아파. 심장이 아픈 것도 아니고 머리가 아픈 것도 아니야. 그냥, 모든 곳이 다 아파. 아니 온 세상이 아픈 걸지도 모르겠어. 그래, 네가 죽었잖아. 네가 죽었잖아. 정말로? 응, 정말로. 아니라고 해 봐. 네가 느껴지지 않아, 안나.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네가 없이 어떻게 살 수가 있겠어? 이제 내가 사랑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정말 이 땅에 남은 좋은 건 아무것도 없어. 오직 너만이 좋은 것이었는데. 왜 좋은 건 빨리 없어져? 돌아와 안나 제발 내가 잘못했어 그냥 돌아와만 줘 안나 안나 안나.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싶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다. 나를 꽉 채운 너, 안나. 나를 꽉 채우고. "..해." 나를 너무 꽉 채워서 숨이 넘어갈 것 같아. 목구멍으로 네가 튀어나올 것 같아. 내 식도를 비집고 네가 나올 것 같아. "그만해." 살려줘, 안나. 살려줘. 안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왜? 아니야 죽지 않았어 거짓말이야 그런데 네가 없어, 항상 네가 느껴졌는데 아무 데서도 느껴지지 않아. 너무 먼 곳에 가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나는 너를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대체 왜 가버 "그만해! 그만해! 씨발 그만하라고!" 유진이 내 손목을 꽉 쥐고 더는 허벅지를 긋지 못하게 막았다. 순간 숨이 트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천에 칼로 구멍을 뚫은 것처럼, 그렇게 그 목소리가 숨통을 열었다. 갑자기 폐를 가득 채우는 공기에 헐떡거리며 눈을 뜨자, 유진이 그르렁대는 신음을 토하며 손목을 거칠게 내팽개쳤다. "안나, 죽었지." 대답해줘야 했다. 그런데 다시 숨이 가빠오는 것 같았다. 내가 빠르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기 시작하자, 유진은 내 턱을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나와 유진의 눈이 마주쳤다. 아, 유진이 울고 있었다. 그도 울고 있었다. "그만해, 작작 좀 쳐 떨어." 유진은 손을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 말은 내게 하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꾸중이었다. "너까지 이 지랄이면 어쩌라고, 응? 어쩌라는 거야, 어쩌라고, 어쩌라고......" 유진이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흐느낌이 말을 잠식했다.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 유진은 숨기려고 하거나 울음을 참지 않고 그냥 서럽게 울기만 했다. 나는 유진을 끌어안았다. 유진도 밀어내지 않고 파묻어 내 어깨를 적셨다. 우리는 불완전한 아이들이었다. 가엾고, 힘없는 아이들. 나는 유진이 나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진은 내 허벅지에 쓰러지듯 얼굴을 묻었다. 상처와 피로 가득한 그곳에 눈물이 섞였고, 따끔거렸다. 이상하게도 가장 아프고 가장 슬픈데 지금처럼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사는 건 따끔거리는 일이겠다. 그것도 무지. 9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뜯겨난 것 같은 부분이 존재한다. 칼로 싹둑 갈라내 저 먼 곳에 던져버린 것 같은 과거. 아무리 생각해도 떠올릴 수 없는데 주변인들은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는 시간. 물론 내게도 그런 부분이 있다. 안나, 나의 반쪽이 죽은 날. 나는 그로부터 삼 개월 뒤까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꿈 속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거나, 절망적이어서 매일 울었다거나 뭐 이런 흐릿한 기억조차도 없다. 5월에 프란츠가 돌아왔고, 그와 함께 내 기억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체는 땅에 아무렇게나 매장된 뒤였는데, 잘 썩지 않았다. 사람들은 안나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고 했다. 흡혈귀가 되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흡혈귀가 되어 돌아오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기꺼이 안나를 위해 목을 내어주겠다. 프란츠는 울지 않았다. 딱히 놀랍지 않다. 그애는 울지 않는다.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을 쥐어뜯다가, 내게 내뱉은 게 다였다. '안나는 우리 안에 아직 있어.' 사실 안나는 우리 안에 없다. 나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프란츠를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비가 내렸다. 오월의 비는 모든 것을 씻고 갔다. 길거리에 가득한 오물도, 우리 몸의 텁텁한 땀냄새도, 그리고 안나에 대한 슬픔도. 사람 하나쯤이 없다고 모든 것이 망가지지는 않았다. 나는 다리가 세 개인 탁자와 비슷하게 되었다. 탁자는 다리가 하나 떨어져도 아슬아슬하게나마 서 있지 않은가. 실수로 다리가 없는 쪽에 무언가를 올려놓으면 쓰러지고 말겠지만. 유진과 나는 자주 서로를 보듬었고 프란츠는 가끔씩 이상한 보석 같은 것을 선물로 주었다. 물론 진짜 보석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조 보석이라도, 무지한 내 눈에는 충분히 진짜처럼 보였다. 그걸 모아서 안나가 있었던 방 창가에 하나씩 진열해 두었다. 엄마는 힘없이 그걸 둔다고 안나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여느 집과 똑같이 생겼다. 안나가 죽음의 신과 여행하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 마을에 들리게 될 때, 이런 표시라도 없으면 어디가 자기 집인지 모를 게 아닌가. 안나가 집 밖으로 나가본 건 태어나서 딱 세 번뿐인데. 어쨌던 우리는 그렇게 살아나갔다. 엄마는 더 자주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먹여살릴 입이 줄어 좋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가끔 안나의 방문을 노려보다가 벌컥 열고 들어가기도 했다. 그 기분을 알았다. 꼭 그애가 다시 살아나서 안전하게 짚이불 안에 있을 것 같은 기분. 지금 문을 열면 살로 이루어진 진짜 사람이 거기 앉아 있을 것 같은 착각. 거기서 안녕, 놀래라. 하고 잔잔히 대답해줄 것 같은. 하지만 진짜 안나는 저기 사람을 파묻는 묘지에 있다. 거기에 뼈만 남아서, 혹은 살 몇 점이 붙어서 드러누워 있다. 나는 내가 유진과 결혼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는 주먹을 휘두르지 않고, 나는 그를 보충해줄 수 있다. 나는 이제 막 가슴이 봉긋이 솟아올랐고 그는 이제 막 파르스름한 수염 자국이 생겼다. 서글픈 결말이었다. 나는 사자를 보고 싶었다. 자신의 삶을 다스리는 초원의 왕. 저 먼 땅에 살고 있다는 사자를. 그건 일종의 상징이었다. 사자를 보고 나면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꿈이다. 잘 알고 있다. 안나가 죽고 두 번의 겨울이 지난 뒤, 유진은 내게 결혼하자고 말했다. 최소한 하루 두 끼는 먹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아마 행복해질지도 모른다고. 나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사실 상관없지 않았다. 나는 그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 좁고 더러운 마을에 내 평생을 묻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뭐? 그래서 뭘 어쩐다는 말인가? 어차피 나의 삶은 똑같을 텐데. 엄마처럼 살 텐데, 그렇게 제가 낳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지킨다는 규칙을 끌어안고 살 텐데. 아이를 많이 가지고 싶어. 애들이 떠드는 소리, 웃는 소리, 싸우는 소리로 가득한 집을 만들고 싶어, 레오니. 나는 싫었다. 엄마는 자신의 언니도 비슷한 병으로 앓다가 죽었다고 말했다. 더는 안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세상을 꿈꾸기만 하다가 픽픽 쓰러져서 죽어버리는 그런 애는, 안나 하나로 족했다.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죄로 목숨을 빼앗기는 아이. 죽음의 신이 사랑하게 되어 빨리 데려가는 아이. 어쨌던 싫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싫어서 달라질 건 없다. 프란츠는 그때부터 미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 년, 이 년이 흐르는 동안 프란츠는 더 많은 바깥세계 이야기를 들고 왔다. 그애는 점점 더 금색 늑대처럼 변해갔다. 아무렇게나 자른 황금색 머리카락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황금색 눈. 더 이상 사기를 칠 수는 없었다, 어린애라면 몰라도 소년을 믿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서 그애는 사냥꾼이 되었다. 성벽 밖에서 사슴을 잡고 덫을 놓아 토끼를 잡았다. 어느 정도 돈을 벌었는데 왜 집을 짓고 살지 않아, 하고 묻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나는 이미 답을 알았다. 길이 낳은 아이는 길 위에서 살아가야 한다. 어딘가에 묶어두면 금방 죽고 마는 것까지, 늑대를 닮았다. 그애는 그렇게 질문했었다. 왜 유진과 결혼하려는 거야? 날 안 때려. 서로를 안아줄 수 있고. 그거면 돼? 뭐가. 사자를 보고 싶다며. 무슨- 사자를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리고 난 그걸 보여 준다고 했는데. 이상한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프란츠를 보았다. 프란츠는 낮게 속삭이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금방이라도 오열할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레오니, 너는 내 꿈이야. 그런데 포기하면 나는?"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꿈이었어, 알잖아." "아니야. 내가 진짜로 만들어줄게. 네 꿈이니까 내가 진짜로 만들어줄게." "하지마. 아직도 거기서 살아?" "왜 좋은 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걸 몰라?" "씨발, 그만 좀 해, 내가 원한 것도 아니잖아!" 토할 것 같았다. 가까스로 포기했는데 들쑤시지 마. 뒤흔들지 마, 그러지 마. "말해줘." 프란츠는 이마를 내 어깨에 얹었다. 목에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닿았다. "말해줘, 나가고 싶다고. 내가 사자를 보여줄게." 울 것 같았다. 거짓말인데, 전부 다 거짓말인데. 그걸 잘 알고 있는데. 농노가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성벽은 견고했고 내가 농노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았다. 이 성 안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만약 도망치려고 한다면 처형당할 것이다. 그런데 구원을 말하는 프란츠의 속삭임은 확고했다. 그 단단한 성벽보다 더 단단하게 들렸다, 꼭 안나의 목소리처럼. "사자를 보고 싶어." 나는 프란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가고 싶어. 너도 눈치챘잖아,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유진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아." 머뭇거렸지만, 다시 이었다. "안카가 줬던 꿈 있잖아. 그걸 버리고 싶지 않아." "응." 프란츠는 조용히 대답하고 머리를 어깨에서 떼었다. 그리고 두 팔로 나를 꽉 안았다. "이제 그건 내 꿈이야." 알록달록하고 한없이 우울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름다운 내 쌍둥이 안나. 그녀는 내게 자신의 꿈을 물려주었고 나는 프란츠에게 꿈을 물려주었다.. 안나는 늘 사람을 만드는 건 꿈이라고 말했으니 곧 프란츠는 안나인 셈일까. 안나 너는 그렇게 이곳저곳에 꿈을 나누어주어 죽지 않았구나. 죽었는데도 살아서 세상을 꿈꾸고 있구나. 그렇게 온 세상이 안나였다.
이름없음 2018/02/27 04:08:53 ID : fO060mnBbCk
음 몽환적
이름없음 2018/03/03 02:25:12 ID : byL85U0so5a
10 하늘에 멍이 들었다 어느 곳은 보라색으로, 어느 곳은 붉은색으로. 내 절망이 후두둑 빗발쳐 하늘을 때렸기 때문일까 모든 아이들이 영원히 아이로 남을 수 없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유진과 프란츠 그리고 안나가 함께했던 유년기에서 내쫒겨와 천천히 죽어갔다. 새벽에 몸을 일으켜 밭에 나갔고 해가 지면 아픈 몸을 이끌고 짚이불에 몸을 뉘였다. 가끔, 잠들기 전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나무문 안 누군가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면 거기에 안나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날보다 한 뼘은 더 커버린 내 몸이 그날로 되돌아가 안나처럼 작아지겠지. 모든 것은 원래대로고, 나는 유진과 결혼하지 않아도 되고, 프란츠 그 애와 함께했던 유년기로 돌아갈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어나 방문을 열면, 나를 맞는 건 안나가 아닌 싸늘한 공기였다. 생리를 시작했다. 속옷에 갈색의 무언가가 말라붙어 있어 겁에 질려 빨래터에 가 벅벅 비볐다. 옆자리에 걸터앉아 있던 건너편 아주머니가 담담히 웅얼거렸다. 여자가 됐구만, 좋은 일들은 다 끝이야. 정말로 좋은 일들은 다 끝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 된 기분이었다. 가게 아저씨들은 가슴을 지분거렸고, 길거리에서는 젊은 청년들이 내게 휘파람을 불며 낄낄댔다. 발목을 보일 수도, 여름날 강에 뛰어들어 더위를 식힐 수도 없었고, 더는 유진이 보초 서는 탑으로 도망칠 수 없었다. 프란츠와 마음대로 나다닐 수도 없었다. 내가 유진과 약혼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니, 가끔 시장에서 마주쳐 몇 마디 주고받는 게 끝이었다. 그건 진심이었을까? 나를 사자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준다던 프란츠의 말은? 사실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심이 아니더라도 고마웠다. 덕분에 나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다. 오늘은 프란츠가 나를 먼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약속을 지켜줄 거야, 그 생각을 하며 추위에 곱은 손가락에 입김을 불었다. 고된 나날이었다. 안나의 꿈을 꾸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어른이 되면 될수록 찬란함은 내게서 멀어지기만 했다. 일 년이 더 지났다. 안나가 죽고, 삼 년이 지났다. 최악이자 최고의 해였다.
이름없음 2018/03/03 02:25:45 ID : byL85U0so5a
11 너무 완벽했다. 하필이면 그때 프란츠가 검은 로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백 년간 괜찮았는데 하필이면 그때 일이 터졌다는 것, 십이 개월 중 삼 개월만 머무는 프란츠가 하필이면 그때 있었다는 것 그 모든 게. 가끔씩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그 금색 눈동자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대체 거기에 뭘 품고 있어.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었어. 그럴 때면 프란츠가 두려워졌다. 내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그애의 옆모습을 보고만 있으면, 프란츠는 조용히 속삭였다. 아니야. 거짓말일 수도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 프란츠는 나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때로 사랑은 추악한 형태로 드러난다. 하루를 마치고 나면 온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진다. 쑤시지 않는 부분이 없고 하루종일 비를 맞으며 움직인 몸은 삐걱거린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잔다' 는 말은 단순한 관용어가 아니라는 거다. 꿈은 사치일 정도로 정신없이 수마에 휩싸인다. 그 무렵부터 간간히 코를 골았다. 오 분만이라도 더 잠들 수 있으면 세상을 떼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해는 매일같이 떴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콩콩 쳐가며 음울하게 집을 나섰다. 어릴 때 어른들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표정으로 집에서 나서는 게 퍽 재미있게 보였다. 지금은 재미있지 않았다. 반쯤 죽어 있는 괴물처럼 비척이며 집을 나서는 그 무리에는 나도 있었으니까. 아빠는 나를 깨우기에는 너무 겁에 질렸고, 엄마는 시집올 적 감춰두었던 무언가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를 깨운 건 프란츠였다. 그 솟아오르는 불길과 비명 속에서 태연하게 자고 있었다고 했다. 프란츠는 나를 가볍게 흔들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뺨을 서너 대 때렸다. 그제야 눈꺼풀이 올라갔다. 눈앞에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나를 깨우는 프란츠가 보였다. "뭐, 잠깐만, 프란츠? 왜 우리 집에 있어? 아니, 빨리 나가. 아빠가 우릴 죽일 거야." 힘이 센 사람이 양손으로 머리통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혼란스럽기보다는 피곤했다. 수면부족으로 아픈 머리를 서너 번 두드리며 프란츠를 밀었다. "레오니." 그애는 급히 내 눈을 비벼 눈곱을 떼어내 주었다. 앞이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고 그제야 귓속으로 온갖 소음이 밀려들어왔다. 지금은 한밤중이다. 한밤중이었고, 창문 너머로 별도 보였는데, 온 세상이 환했다. 챙강거리는 뚜렷한 금속음과 불타는 소리가 들린 건 그다음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맑아졌다. "성문이 뚫렸구나." 아동 강간이나 살인 같은 범죄로 성벽 너머로 내쫒겼던 추방자들은 한 해 걸러 한 번씩 공격해왔다. 그 수가 적어 매번 성 위에서 활을 쏘면 내빼곤 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나 보다. 나는 최대한 또렷하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뱉고 보니 후들거리고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를 어르듯 쓰다듬은 프란츠는 가위를 달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가끔 성벽 밖으로 드나드는 상인들이 추방자들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있다. 여자는 겁탈당해 목이 잘린 채로, 남자는 목이 잘린 채로 발견된다. 어차피 죽는다면 겁탈당하지 않고 죽는 게 낫다. 가위를 찾아 프란츠에게 주었고, 그애는 머리카락을 목까지 짧게 잘라주었다. 뭉텅이로 잘려나갔다. 골이 울렸다. 이게 현실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우리 아빠랑 엄마는?" "두 분 다 도망가셨나 봐." 나를 깨우지도 않고? 그래도 십오 년은 함께 살았는데,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익숙한 사이였는데. 사실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분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분들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내가 혹시 둘을 보았냐고 물으려는 순간, 금속성의 충돌음이 울렸다. 별로 먼 곳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프란츠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프란츠의 시선을 쫒은 그곳에는 칼과 칼, 철과 철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이 엉겨붙어 있었다. 여기저기서 불타는 집들 때문에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저 사람을 알았다. 유진의 친구였다. 그 역시 마을을 지켰다. 서너 합이 이어졌지만 실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병사와 못 먹어 살이 내린 추방자, 누가 이길지 뻔하다고 생각하며 안심한 순간, 그의 뒤에서 또다른 추방자가 달려와 뱃가죽을 꽤뚫었다. 유진의 친구는 허수아비처럼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를 찌른 추방자는 갈비뼈에 걸렸는지 잘 빠지지 않는 검신을 두고 한참을 끙끙댔다. 마침내 칼이 빠진 순간, 병사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엎어졌다. 나는 헛숨을 들이켰고 프란츠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레오니, 성문까지 가야 해. 추방자들처럼 까만 로브를 쓰면 어떻게든 될 거야." "다 죽었어?" "나도, 나도 몰라. 시체가 많아." 탈출을 꿈꿨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이건 탈출이 아니라 내쫒기는 게 아닌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이곳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추방자들은 이곳에서 살기 위해 침략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늘 화가 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내쫒았고, 마치 난쟁이라도 되는 것처럼 멸시했었으니, 단지 이곳을 파괴하기 위해 공격하는 거겠지. 집은 불타고 안나의 무덤은 파헤쳐질 것이다. 프란츠는 내게 검은 천을 주었다. 그것을 뒤집어썼다. 그애는 문고리를 붙잡고 셋을 세자고 했다. 딱 셋만 세고 나가자고, 바깥을 살피고 기다려도 나아질 것 없다고.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것마저 꿈 같았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한낮 꿈 같았다. 왜 다 망가지고, 망가졌다 싶으면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뒤집어지고 그럴까. 그냥 배 곪으면서 안나랑 사는 게 내가 원한 모든 것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이름없음 2018/03/03 02:25:54 ID : byL85U0so5a
하나, 둘까지 셌다. 그런데 갑자기 안나의 방문이 열렸다. 우리는 깜짝 놀라 그쪽을 돌아봤다. 아마 프란츠는 누가 그 방에 침입했다는 생각을 했을 거고 나는, 나는. 알지 않은가. 안나가 살아난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방에서 나온 건 뜻밖에도 엄마였다. 프란츠는 당황한 듯 보였지만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내가 누워 있었던 텅 빈 침대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엄마, 하고 속삭이자 곧장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 잡혔던 주름이 사라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엄마가 웃었다. "레오니, 이걸 봐라." 엄마의 손에는 흰 천으로 만든 주머니가 있었다. 그 안에 있는 무언가는 크고 딱딱했다. 엄마는 한손에 들어가는 크기의 그것을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굽혀 꽉 쥐게 했다. "이걸 가지고 수도로 가거라." 엄마에게 이게 대체 뭐냐고 묻는 눈길을 보냈지만, 그는 자신이 하는 말에만 집중했다. 나는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운 물체를 살짝 더듬었다. 물방울 무늬의, 도톰한 무언가. 내 체온에 따라 천천히 따뜻해졌다. 이건...이건 보석이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가서, 수도에 가서 가장 큰 성을 찾아라. 찾아서, 카롤리나 폰 란드그라핀의 딸이라고 해." "누구의 이름이에요?" 조용히 물었지만 엄마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게 당신의 이름이라고? 그건 귀족의 이름이 아닌가? "괜찮아, 너는 내 젊은 시절과 똑같이 어여쁘니 받아줄 테다." 울 것 같았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다. 글을 쓰고 읽는 엄마. 귀족 부인이 쓰는 말투로 내게 말을 거는 엄마. 마을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엄마. 단서는 충분히 있었다, 다만 그걸 하나의 결론으로 매듭짓지 않았을 뿐이지. 아마 그건 어렴풋한 분노나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습게도 내게 이는 감정은 슬픔이었다. 너무나도 거대한, 정말 거대한 슬픔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엄마는? 당신이 이 보석을 팔았다면 안나는 살 수 있었다. 이런 추운 농노의 집이 아니라 비단 침대에서 간호를 받으며 지금도 살아 있었겠지.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고 무슨 꿈을 꾸었단 말인가. 그는 엄마가 아니었다. 한 순간도 엄마였던 적이 없었다. 그는 한 사람이었고 수많은 이름이 있었겠지만 그중에 엄마는 없었다. 나는 그를 엄마라고 불러서는 안 됐다. 카롤리나, 그게 그에게 딱 맞는 이름이었다. "당신은 엄마가 아니었구나." 카롤리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속삭였다. 너희를 좋아했다, 하지만 사랑한 건 나뿐이었어. 나쁜 사람. 당신에게는 안나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게 끝도 없이 많았구나. 프란츠는 내 손을 감쌌다...이제 떠나야 했다. 더 늦었다간 살해당하겠지. 카롤리나의 얼굴을 보았다.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즐거운 것이다. 아이를 둘 낳은 건 하나는 유전병에 걸려 죽을 테니 남은 하나에게 이 좆 같은 보석을 주고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기 위해서였겠지. 저 사람한테 세상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그래도 불쌍하지도 않았어? 매일같이 미칠 정도로 아프다가 추운 겨울에 죽은 안나는, 안 불쌍했어? 주머니를 던지려고 했다. 카롤리나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었다. 그러나 프란츠가 내 팔목을 잡아 저지하고 주머니를 가져갔다. 그애는 입구를 살짝 열어 든 것을 살펴보았고, 내 귀에 가져가자 하고 속삭였다. 프란츠는 살아남는 법을 알았고, 나는 프란츠를 알았다. 나는 한참 동안 프란츠의 눈을 노려보았고, 결국에는 내가 졌다. 나는 그애가 주머니를 조끼 안에 쑤셔넣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아직도 혼란스러웠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안나는 죽었으니, 죽음은 무서운 게 아니었다. 프란츠는 내 손에 깍지를 꼈고, 우리는 현관에서 조심스레 밖을 둘러보았다. 로브 자락으로 시야가 반쯤 가려지만 모든 것을 뚜렷했다. 피와 불과 사람, 그 셋뿐이었다. 어느 순간 발바닥에 축축한 것이 닿아 화들짝 뒤로 물러섰다. 피였다. 몸을 숙이고 집에서 멀어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카롤리나는 우리를 쫒아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그걸 지키느라 안나를 구해주지 않았던 그 집에서 나가는 게 두렵다는 듯이 현관에 서 있었다. 두 번은 돌아보지 않았다. 카롤리나는 행복할까? 사랑하는 집에서 죽을 테니 행복할까? 행복해야지, 그렇게까지 했는데 행복해야지. 씨발년.
이름없음 2018/03/03 02:26:26 ID : byL85U0so5a
12 프란츠는 온갖 샛길을 다 알았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지만, 시체를 큰길로 옮길 수는 없으니 시체가 다니는 길도 있었고 도둑들만 쓰는 정신없이 얽힌 길도 있었으며 포주와 매춘부들이 살아 대로에서 먼 길도 있었다. 예상대로 추방자들은 그곳까지 들이닥치치 않았다. 그러나 얽히고섥힌 길을 따라온 추방자들이 여기 남은 사람이 더 있다고 알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길들은 도망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프란츠와 나는 체구가 작았고, 우리는 사람들 틈을 파고들며 용케 넘어지지 않고 뛰었다. 로브 때문에 우리를 추방자로 착각한 사람들이 비명을 내며 길을 비켜주는 바람에 뛰는 속도는 더 빨라졌다. 혹여 프란츠의 로브 자락을 놓칠까 꽉 쥐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사람 그림자가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결국에는 비명과 소음도 먼 곳의 이야기가 됐다. 프란츠는 아무도 성문을 지키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아마 안전할 거라고. 프란츠가 떠는 게 느껴졌다. 그애는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 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심장이 벅차야 정상이겠지만 깊은 늪으로 서서히 잠식되기만 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안나는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이 보석이 무슨 의미였지? 안나의 목숨보다 귀중한 보석이 있을 리가 없는데? 항상 떠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막상 떠나게 된 지금은 머무르고 싶었다. 카롤리나에 대한 증오가 차게 식자 묻고 싶었다. "프란츠." "...죽었을 거야. 이 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죽을 거야." "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성벽 쪽에 붙어서 달려가고 있었고, 그래서 보이는 거라곤 바로 위의 하늘뿐이었다. 까맣고 청명한 밤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우리를 녹이려는 듯이 비가 퍼부었다. 치맛자락이 종아리에 달라붙어 발걸음이 자꾸 엉켰다. 더 이상은 달릴 수 없다고 생각한 무렵이었다. 나는 치마 때문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바닥만 보고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프란츠가 멈췄다. 절벽이라도 만난 것처럼 아주 급작스럽게. 체감상 성문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도착한 건가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거기 있는 건 사람이었다.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 우리에겐 무기가 없었고 그에게는 있었다. 이제 끝이구나. 그 거대해 보이는 실루엣이 점점 더 커졌다. 나는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손끝조차 움직이지 못한 채 까만 인영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실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와 프란츠는 목이 매달릴 것이다. 혼란을 틈타 달아나려 한 건방진 농노. 어쩌면 추방자들이 마을을 붕괴시킬 수도 있겠다. 하나하나 전부의 배의 칼에 꽂아. 어느 쪽이던 우리는 죽어야 했다. 해를 등지고 선 그 사람이 점점 더 가까워졌고, 점점 더 뚜렷해졌다. 길고 마른 목, 짧게 깎은 머리, 그리고 나를 수백 번 위로해 주었던 손. 그는 유진이었다. 프란츠는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내 손을 잡으며, 우리는 동료고 저쪽은 적이라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교감하고 있는 건 유진. 유진도 나를 보고 있다. 사람에게 공감하는 재주를 내게 좀 나눠달라고 안나에게 한탄했을 때였다. 안나는 눈을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해 준다고, 때로는 너무 많을 것을 말해 줘서 의도치 않게 발가벗은 몸을 마주한 기분이라고. 그래, 그게 지금이었다. 나는 안나의 말을 이제서야 이해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고, 그게 다였다. "가." 유진은 핏기 없는 얼굴로 웃었다. "가, 레오니. 떠나." 프란츠가 주춤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그게 진심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괜찮아. 너희는 꿈을 꿀 수 있는 사람들이야. 그건 아주 드문 재능이지." 프란츠는 내 손을 세게 쥐고 몇 번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유진은 따라오지 않았다. 프란츠는 여전히 내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손가락들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불타는 지붕과 비명, 그리고 울음. 지옥 속에 유진은 서 있었다. 나는 왜인지 몰라도 갑자기, 같이 가, 하고 소리쳤다. 그러냐 유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휘몰아치는 무더운 바람, 그는 미소짓고 있었다. "못 가. 나는 꿈꿀 줄 모르거든." 그건 순간이었지만 내게는 영원이었다. 지금도 유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순간 유진이 느꼈을 상실은 오롯이 내게 새겨졌다. 여기 이 심장 안쪽,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곳에. 프란츠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내게 속삭였다. 가자. 그리고 우리는 갔다. 꿈을 꿀 수 없는 자들의 지옥에 유진을 버려두고, 갔다. 14 폭풍우가 쳤다. 간간히 번개가 쳐 세상의 진실을 드러냈고, 그때마다 뒤를 돌아보았다. 유진은 밝은 뇌우 속 계속 성문에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리에 풀이 쓸려 풀독이 올랐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비가 퍼붓는 밤, 자신의 발조차도 보이지 않는 그런 밤. 유진은 너무 멀어 내가 볼 수 없을 때까지 거기 서 있었다. 평생토록 거기 있을 것 같았다. 뿌리를 내려, 자신이 떠나보낸 나를 계속 그리워하면서. 가지가 돋아나고 이파리가 피고, 결국에는 나무로 변하겠지. 그 나무는 폐허로 변할 나의 고향 성벽을 뒤덮을 것이다. 온통 푸른색의 초목으로 변할 그 마을. 이상하게도 뱃속이 홧홧했다. 지평선이 보이는 너른 평지, 온통 젖어 발목에 달라붙는 치마, 저 멀리 강변에 모여 불타는 성을 바라볼 뿐인 난쟁이들, 그리고 우리는 미래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유진은 나의 미래였으나 지금 이 순간, 그는 나의 과거가 되어갔다. 나는 미래가 과거로 변해가고 꿈이 미래로 변해가는 태풍 속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나의 길잡이는 프란츠. 프란츠는 묵묵히 내 손을 잡고 달린다. 산 꼭대기에 오르자 저 멀리 침몰하는 난파선이 보였다. 그 안에서 불타는, 말뚝 박힌 내 반쪽이 든 관. 칼에 가슴이 궤뚫린 사람들. 성문 앞에서 나를 보고 있을 유진. 세상의 반대편을 보는 것처럼 무심한 눈으로, 거대한 비극을 바라보는 난쟁이들. 아니 어쩌면 그들에게는 희극이리라. 우리는 너무 많은 삶을 경시해왔다. 난쟁이들, 그리고 굶어 죽는 죄 없는 추방자의 자식들. 그 거대한 슬픔이 파도가 되어 배를 덮치는 것이다. 억울해할 것 하나 없다, 왜냐하면 어디에도 악당은 없으니까. 지금 사람들을 살육하고 있는 추방자들은 악당이 아니다-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추방한 우리가 악당이다. 천사, 그리고 다른 종류의 천사밖에 없다. 이곳이 천국이던가, 사람들 모두 제가 천사라 아우성치는구나. 앞을 보면 어두웠고 뒤를 보면 밝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마녀들이 나무 사이를 스쳐가며 내는 돌풍에 귀를 기울였다. 그제야 엄마가 떠올랐다. 나를 아끼고 안나를 사랑하는 엄마. 엄마는 이제 없다, 시체로 누워 있을 카롤리나만 있다. 아버지도, 엄마도, 유진도, 안나도, 없는 사람이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온 몸의 뼈가 부러져 그것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처럼, 아팠다 나는 항상 성벽 밖을 생각했지만 거기고 나가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어쩌면 그냥 내 마을이 아라비아로 한순간에 옮겨지기를 바랬던가. 모든 것들은 나아감을 위해 결국 버려야 할 것들인데. 나는 평생 유진의 손을 붙잡고 한 보 느리게 뒤에서 걸었지만, 지금 내 손을 붙잡고 있는 건 프란츠였다. 번개가 내리쳤다. 세상이 아찔해지고 모든 것이 훤하게 드러났다. 프란츠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길을 살피고, 묵묵히 계속 걸었다. 빗방울 때문에 손을 뻗으면 내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는다. 프란츠는 몸으로 외운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 별 두려움 없이 그애를 따랐다. 비가 얼음처럼 내 팔뚝을 때렸다. 다시 번개가 쳤다. 프란츠의 완고하게 다문 입술, 그리고 금색 눈동자.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불현듯 프란츠는, 추워, 하고 말했다. 그건 물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춥다고 말했다. "아무도 우리를 뒤쫓지 않아, 쉬었다 가자." 프란츠는 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기 위해 서너 번 주위를 헤집었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나뭇잎을 걷어냈다. 그러는 동안 내 손만은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붙잡고 있었다. 그다음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피곤했기 때문인 것 같다. 두 다리가 이상하게 후들거리고 목이 죽은 닭처럼 늘어졌다. 나무 밑동 구석에 생긴 조그만 공간인 것 같았는데, 바닥이 온통 진흙탕이었다. 프란츠는 물이 닿지 않은 높은 지대에 나를 데려갔다. 우리는 거기서 상처입은 짐승처럼 몸을 웅크렸고, 여전히 서로의 손을 잡았고, 그리고 잠들었다. 잠들기 전, 낮고 부드러운 프란츠의 자장가가 귓속으로 흘러든 것도 같았다. "눈을 감아, 레오니. 우리는 안전해질 거야."
이름없음 2018/03/05 22:30:56 ID : lbg1xBgqo59
정말... 닮고 싶어, 너의 문체가. 동경 대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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