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19/02/19 00:29:06 ID : 7hvBcIIILbu 0
여느때와 다름없이 나른한 오후. 저 에어컨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상상하기도 싫다. 재수 2년차, 소울대(오타아님)에 입학하고자 노력중이지만... 사실 진전이 없다. 이 상태로는 구려대(오타아님)에 입학하고 말겠지. 하지만 이걸 누가 듣기라도 하면 재수없다며 뺨칠 기세로 노려볼게 틀림없다. 그렇게 정신없이 공부를 하던 차에, 새삼스럽게 에어컨의 시원함의 전율이 팔과 다리에 퍼짐과 동시에 그런 에어컨에게 감사의 표시가 하고 싶어졌다. " 에어컨님, 태양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셔서 감사하고 사랑해요.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쯤 태양의 공격에 못이겨... 체력이 바닥났을지도 몰라요. 따흐흑... " 사랑과 전쟁속 비련한 여주인공처럼 아련한 표정연기와 눈물연기를 시전할 때였다.
2 이름없음 2019/02/19 00:44:10 ID : 7hvBcIIILbu 0
뒷목으로 느껴지는 넥슬라이스와 선생놈의 앙칼진 목소리가 내 귀에 울려퍼졌다. " 놀고있다, 아주. 에어컨에게 감사한건 알면서 부모한테 감사한건 모르냐? 2년째 재수면 얼마야 벌써. 너 요즘들어 연애한다는 소리가 빈번히 들려와?소울대 지망생이 연애가 말이야 방구야?! 2년이면 충분하다 이제. " 그는 파인애플같이 뾰족한 머리에 조금은 쳐진 눈꼬리를 하고있어 검정x무신의 기영이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런 그가 입을 벌리며 말할 때면 심한 악취가 난다. 멀리서 말해도 난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선생놈은 말이 많다. " 어제도 단어시험 재끼고 말이야, 어? 아니 그리고 가형 본다는 애가 기벡은 또 왜 안해? 내가 과탐만 파지 말라고 했어 안했어?! " 그의 앙칼진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덕분에 악취는 잊을 수 있었지만, 내 날카로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3 이름없음 2019/02/19 00:54:07 ID : 7hvBcIIILbu 0
" 제가 기벡을 안한다뇨? 어제도 기벡 수능 기출문제 100개 풀었거든요!! 그리고 연애요? 하고싶어도 못하는... 아니, 안하는 걸 어디서 들으셨다고 그럽니까? " 나는 괜시리 억울해진 마음에 반박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림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 네 친구들이 그랬다. 이 자식이 툭하면 남자친구 자랑해댄다고 열폭을 하더라.. 커플링도 사주고 생일때 프라다 시계에 구찌 빽도 사줬다며? 지금 차고있는 그거 맞잖아. 얘가 또 능력은 좋아서 외제차 가지고 너 기분 안좋을 때마다 드라이브 다닌다고... 괜히 아닌척은.. " 아.... 이것들이.. 일부러 커플링 안 끼고 다녔는데.ㅠㅠ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됐구나..
4 이름없음 2019/02/19 01:04:42 ID : 7hvBcIIILbu 0
정말 친구가 맞는지 의심가는 애들 덕분에 재수학원 선생님한테 들킨게 마음에 안들었다. 기분이 영 찝찝해서 못 견디겠다. 새벽 12시, 끝날 시간에 항상 연락해주던 그는 무슨 일인지 소식이 없다. 사실 오늘따라 연락자체가 잘 안됐다. 무슨일이 있는건 아닐까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셜록홈즈처럼 갈색 정장에 빵모자를 쓴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 무슨 고민이 있으신 것 같군요. " 응...? 어떻게 알았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니 그는 굳어있던 표정에 시크한 미소를 보였다. "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장갑을 끼지 않은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난 이때 너무 당황스러워서 감지하지 못했다. 지금은 여름이라는 사실을.
5 이름없음 2019/02/19 01:14:53 ID : 7hvBcIIILbu 0
으아악!!!! 소름돋아. 버릴까. 아니지 태워버릴까... 책의 제목은 ' 달을 삼킨 태양 ' 이었다. ...나 겁주는 건가? 제목이 왜 이따위야... 하지만 섬뜩한 제목과 다르게 표지는 노란색에 태양 그림이 그라데이션으로 예쁘게 칠해져있었다. 이거 제목을 믿어야 되는거야 표지를 믿어야 되는거야... 모두가 잠든 지금, 평소에 연락에 불이 붙던 남자친구도 소식이 없는 지금, 사람같지 않은 남자가 나에게 이 책을 건넸고 나는 혼란에 빠져있다. 이 책을 펼치면 무슨 일이 생기려나...?
6 이름없음 2019/02/19 01:21:30 ID : 7hvBcIIILbu 0
역시 못보겠다. 잠이나 자야지. 나는 책을 펼쳐보는 일을 뒤로 미룬 채 잠이 들었다. 다 필요없고 그날따라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날따라 이상하게 기분좋은 꿈을 꿨다. " 이 꽃을 꺾어서 네 머리에 꽂으면, 누가 누군지 못 알아볼 것 같아. " 그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토해냈다. 하지만 그의 미소가 너무나도 따스하여, 오그라든다는 말 자체를 잊게 만들었다. 마치 태양이 우리 둘만을 비춰주는 느낌이 들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7 이름없음 2019/02/19 01:33:52 ID : 7hvBcIIILbu 0
ㄴ....누구야??? 그 따스한 미소를 가진 남자는.. 남자친구는 아니었다. 그는 남자친구보다 천진난만한 아이같은 미소를 가졌고, 그 남자의 분위기는 남자친구의 분위기도 아니었다. 아무리 꿈이었다지만 왠지 내가 바람둥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꿈속의 남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느끼다니... 그때, 알맞은 타이밍에 진동이 울렸다. " 야~ 화났어?? " 남자친구였다. 그는 중저음 목소리로 귀엽게 아양을 떨었다. 은근슬쩍 넘어가기 위한 수법이었다. " 아.니? 내.가.화.가.왜.나?^^ " 나는 반어법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한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 야~~ 진짜 미안하다고... 아니 내가 사실 어제... "
8 이름없음 2019/02/20 01:33:49 ID : 7hvBcIIILbu 0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말을 이어갔다. " 정장을 입은 사람이 다짜고짜 나한테 말을 걸더니 너랑 연락하지 말라고 했어. 안 그러면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거 있지... " 정장이라면....! " 그래서 내가 따졌지. 굳이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 나는 발가락에 힘을 준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물었다. " 뭐...뭐래? " 그는 잠시동안 말이 없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 왁!!!!!! " " 아씨!!!!!! " 이게 미쳤나. 누군 진지한데...ㅡㅡ " 돌았냐??? " 나는 급 억울해져 화를 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대로 쫄았네 ㅋㅋㅋㅋㅋㅋㅋ " 내 예상 반응까지 캐치한 그는 유쾌하게 터졌다. " 지금 웃을 상황이야?? 제대로 말해봐. 왜 나랑 연락하지 말랬는데? " 진지할 땐 진지해야지. " 장난임ㅋㅋㅋ 그걸 속냐 ㅋㅋㅋㅋㅋㅋ 사실은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라 일 끝나고 선물 준비하고 외식하느라 하루종일 정신이 없었어. " " 아... 진짜 너 나중에 뒤졌엌ㅋㅋㅋㅋㅋㅋ " 장난이었구나. 그래, 휴 내가 너무 예민했던 탓인가. 이젠 장난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다행히도 그녀는 대충 속아 넘어간 듯 했다. 사실 그녀는 우리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 언제인지 모른다. 방금 지어낸 얘기이다. 하지만... 그 정장의 남자 이야기는 사실이다. 절대 여자친구에게 이유를 설명하지 말라 했고, 만약 누설했을시... 그녀의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연락도 자주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제... 그녀와 이별을 준비할 때가 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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