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19/12/23 01:28:15 ID : bu1dveK2E9z 0
땡길때 글 연습하는 스레. 피드백 등등 다 환영이야!
2 이름없음 2019/12/23 01:44:00 ID : bu1dveK2E9z 0
이불이 유달리 무거웠다. 밤에는 항상 그렇다. 뭔가 하나가 신경쓰여 도저히 잘 수가 없다. 어제는 냉장고 불빛이었고, 저번에는 도로의 소음이었다. 밤마다 신경이 날카롭게 긁히니 낮에는 더욱 예민했다. 난생 처음으로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고 아끼던 머그컵을 벽에 집어 던졌다. 한참 그렇게 난동부리다 보면 쓰러져 잠들곤 했다. 오늘은 그것마저 중간에 깨는 바람에 나는 더욱 피곤했다. 피로가 전신을 짓눌러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3 이름없음 2019/12/23 23:57:03 ID : bu1dveK2E9z 0
눈을 떴을 땐 설원에 홀로 서 있었다. 피비린내나는 싸움도, 굴러다니던 시체도 없었다. 그곳에서 오롯이 살아 숨쉬는 것은 나 뿐이었다. 눈발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공기에 노출된 피부가 얼어 찌릿했다. 다시 싸우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나? 스스로 도망쳐 온 이가 할 질문은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곳에는 온갖 이들이 뒤얽혀 쓰러져 있을 터였다. 하나쯤은... 그곳에 없어도 될지도 모른다.
4 이름없음 2019/12/26 00:14:30 ID : bu1dveK2E9z 0
그는 나를 몹시 그리워하다 떠났더랬다. 다시 그를 찾아 떠나기에는 나는 너무 피곤했고, 약했고, 지독하게 가난했다. 북부의 겨울을 홀로 견디는 것은 처음이었다. 중심가에서 꽤 떨어진 교외의 호텔에 방을 잡았다. 울창한 침엽수림으로 둘러싸인 산 속의 오래된 건물이었다. 목조 계단은 삐걱거렸고, 카펫은 더러웠으며 젊은 지배인 남자는 건물 안에서 외제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내 방의 낡은 시트에 누워 눈 쌓인 협곡을 바라보면 영영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
5 이름없음 2019/12/26 02:20:24 ID : NvDAnQtBvyG 0
뭔가 이어지는 것 같다! 아님 말고..
6 이름없음 2019/12/26 20:21:29 ID : bu1dveK2E9z 0
생각하고 쓴 건 아닌데 보다 보니까 그렇네!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았던 것은 졸업 직전의 겨울이었다. 일곱 명으로 이루어진 그림 동아리였다. 기차역에 내려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의 의자는 일곱이 모두 앉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코트 사이로 계속 바닷바람이 밀려들었다.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롱패딩으로 둘러싸인 친구놈이 비웃었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폼을 잡겠다고 이러냐며 낄낄대는 얼굴이 우스워 나도 웃었다. 218번, 300번, 199번을 보내고 한참을 기다려서야 321번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버스 시간표라도 알아보고 올 걸 그랬나 싶었다.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해안의 도로를 달렸다. 먼지 낀 차창 너머로 한겨울의 바다가 끝없이 밀려들었다. 부서지는 파도가 태양빛을 받아 반짝였다.
7 이름없음 2019/12/28 21:22:52 ID : bu1dveK2E9z 0
야, 들어봐봐. 아니, 진짜 어이없지 않아? 누가 고백을 감자전 먹으면서 해. 걔랑 저번 주 일요일에 밥을 먹으러 갔어. 저번에 너랑 갔던 데 있잖아, 그 에이드 맛있었던 레스토랑. 뭐 시킬지 고르고 있었는데 사이드 메뉴 중에 감자전이 있는 거야. 파스타랑 감자전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근데 걔가 갑자기 궁금하다면서 그걸 시키자는 거야. 난 분명히 말리려고 했거든? 근데 어찌저찌해서 그게 주문이 들어갔어. 심지어 굽기 조절도 해준대. 미디엄 레어로 구워달랬는데, 몰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감자전이 나왔는데, 걔가 그걸 한참을 바라보다 갑자기 내 손을 딱 잡고 눈을 맞추면서,
8 이름없음 2020/01/01 08:16:34 ID : bu1dveK2E9z 0
멀어지는 그 애를 그저 지켜봤던 나는 닿을 수 없어 늘 서러웠다. 그 밤에는 별이 유독 환했다. 걸을 때 마다 젖은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바다 너머에서 날 기다리는 이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짠 비린내 섞인 바람이 그곳에도 불고 있을 터였다.
9 이름없음 2020/01/01 20:37:59 ID : bu1dveK2E9z 0
어느 겨울, 궁전 정원의 눈 속에서 하얀 양귀비가 피었다고 합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올해 봄까지 수도에 계셨으니 들어 보셨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눈까지 오는 겨울에 꽃이 피다니, 이상한 일도 참 많네요. 그러고 보니 작년 11월에는 무사하셨습니까? 꽤나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하던데, 별 일 없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이런 촌구석에도 느리지만 소식이 닿습니다. 비록 한 달 후에 신문이 도착하기는 하지만, 요양차 온 거라 특별히 할 것도 없고, 요즘은 신문이나 책을 읽으면서 보내고 있으니까요. 최근 저택 지하실에서 오래된 신문 다발을 찾아서 제 방에 가져왔는데, 재미있는 일은 예전에도 많이 일어났나 봅니다. 특히 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적, 그러니까 18년 전에는 꽤 흥미로운 일들이 많던데... 아, 그때 이야기를 좀 해 주시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그때 혁명 정부에 계셨다면서요. 그때 왜 저와 제 동생은 살려 두셨습니까?
10 이름없음 2020/01/06 01:48:14 ID : bu1dveK2E9z 0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웃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의 굳은 표정이 거울에 비치면 사람이 아니라 밀랍 인형 같아 그는 종종 몸서리치곤 했다. 누군가를 끌어안고, 뺨을 쓰다듬고, 키스할 때의 감각이 전과는 달라 그것도 고통이었다. 정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갔다 들어왔다 슬펐다 기뻤다 분노했다 황홀했다 반복해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이 얽히고 눈이 마주치고 목을 졸라도 감정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다 항상 극단을 달리던 정신이 파국을 맞으면 습관적으로 주변을 쓸어버리곤 했다. 깨진 유리조각에 손이 베여 피가 뚝뚝 흘러 사방에 튀었다. 13년산 보르도 포도주였는지, 싸구려 문샤인인지 모를 라벨 붙은 병의 파편이었다.
11 이름없음 2020/01/12 02:11:29 ID : bu1dveK2E9z 0
설계도를 긁는 연필의 소리가 하나만 남을 때까지 그는 줄곧 유리창 너머에 서 있었다. 단순 호기심으로 기다리기엔 꽤나 긴 시간이었다. - 됐어요, 들어와요. 이제 나 말고 아무도 없으니까. - 이거, 당신이 설계한 거에요? - 네. 제가 설계했고, 당신이 탈 로켓의 일부죠. 적당히 구경하다 나와요, 저도 퇴근할 때 다 됐으니까. 남자는 클린룸 안에서 멍하니 기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서 B-11의 거대한 엔진은 수많은 조명의 빛을 받아 눈부신 광택을 뿜어내고 있었다.
12 이름없음 2020/01/13 02:14:18 ID : bu1dveK2E9z 0
형, 내가, 내가 죽으려는 생각을 했어. 비가 계속 오는데, 창 밖이 너무 깜깜해서 숨이 막 막히고 그랬어. 한겨울인데 오라는 눈은 안 오고 비가 그렇게 오더라. 창 밖을 내다보면 나만 비쳐서 밖이 잘 안 보였어. 빗소리는 계속 커지고, 형은 없고... 그래서 울었다? 다 큰 어른이 거실 소파에 쭈그려 앉아서 엉엉 울었어. 울다 고개를 들었는데 저번에 형이랑 찍은 사진이 보여서 더 서러웠어. 그때 바다에서 형이 사랑한다고 말하던 목소리가 이제 기억이 안 나. 분명히 그때 형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파도가 어떻게 밀려왔는지,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형 손이 덜덜 떨리던 것 까지 다 기억을 하는데, 목소리가 떠오르질 않아서 무서워. 소름끼치게 두렵고 슬퍼서 죽을 것 같아. 나는 언제까지 형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까.
13 이름없음 2020/01/13 02:37:56 ID : 2lfUY7hzdRw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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