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0/03/01 20:28:21 ID : r83A0so7wGq 2
1. 종이달
2 이름없음 2020/03/01 20:29:07 ID : r83A0so7wGq 0
사람 하나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쯤 간단하지 않을까.
3 이름없음 2020/03/01 20:40:54 ID : r83A0so7wGq 0
태국 치앙마이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니, 우메자와 리카는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4 이름없음 2020/03/01 20:41:32 ID : r83A0so7wGq 0
사라진다고 해서 죽는다는건 아니고 완벽하게 행방을 감춘다는 뜻이다.
5 이름없음 2020/03/01 20:41:50 ID : r83A0so7wGq 0
그런 일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6 이름없음 2020/03/01 20:42:17 ID : r83A0so7wGq 0
생각하면서 이곳까지 왔다.
7 이름없음 2020/03/01 20:43:49 ID : r83A0so7wGq 0
방콕 중심가만큼의 발전도 소음도 없고 도시 자체도 소규모였지만, 관광객이 많고 긴 여행 끝에 정착한 분위기의 외국인도 많이 보였다.
8 이름없음 2020/03/03 16:48:59 ID : r83A0so7wGq 0
숲을 이루고 있는 호텔과 게스트 하우스,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 틈새에 끼여서 시내 복판인데도 절이 있었다.
9 이름없음 2020/03/03 16:50:08 ID : r83A0so7wGq 0
밤에는 날마다 거대한 노천시장이 열려, 장사꾼들도 관광객도 터질 듯한 빛 속을 황홀한 표정으로 걸어다녔다.
10 이름없음 2020/03/03 16:52:00 ID : r83A0so7wGq 0
그런 가운데 리카는 관광을 하는 것도 쇼핑을 하는것도 아니면서 그냥 걸었다.
11 이름없음 2020/03/03 16:53:34 ID : r83A0so7wGq 0
젊은 유럽인 커플이 노천 가게 앞에서 티셔츠를 구경하고 있다.
12 이름없음 2020/03/03 16:54:48 ID : r83A0so7wGq 0
일본인으로 보이는 아가씨들이 악세사리 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 팔찌며 목걸이를 고르고 있다.
13 이름없음 2020/03/03 16:55:31 ID : r83A0so7wGq 0
중국인으로 보이는 단체 관광객이 코끼리 장식물을 둘러싸고 흥정하느라 침을 튀기고 있다.
14 이름없음 2020/03/03 16:56:37 ID : r83A0so7wGq 0
랩 스커트를 입은 중년 여성이 포장마차의 네모난 그릇에 담긴 반찬을 가리키고, 비닐에 담은 반찬을 받아들었다.
15 이름없음 2020/03/03 16:57:30 ID : r83A0so7wGq 0
시부야 언저리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차림의 이 지역 여자아이가 팔짱을 끼고 걷고 있다.
16 이름없음 2020/03/03 16:58:08 ID : r83A0so7wGq 0
향신료와 기름과 타이 쌀 냄새가 마을을 뒤덮듯이 떠돌고 있다.
17 이름없음 2020/03/03 16:59:05 ID : r83A0so7wGq 0
사람이 많기로 말하자면 방콕이 앞도적이지만, 그래도 리카는 그 도시에서 모습을 감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18 이름없음 2020/03/03 16:59:52 ID : r83A0so7wGq 0
그래서 언제나 흠칫거렸고, 대부분을 축축한 게스트 하우스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19 이름없음 2020/03/03 17:30:02 ID : r83A0so7wGq 0
하지만 이 도시는 다르다. 방콕보다 훨씬 혼잡하고 그늘이 짙게 느껴진다.
20 이름없음 2020/03/03 17:31:35 ID : r83A0so7wGq 0
기온도 습도도 그리 다르지 않을텐데, 햇살에 하얗게 염색된 도시 곳곳에 그늘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21 이름없음 2020/03/03 17:32:24 ID : r83A0so7wGq 0
오전에도, 한낮에도, 도시 그 자체가 밤에 싸이기를 나른하게 기다리고 있다.
22 이름없음 2020/03/03 17:33:31 ID : r83A0so7wGq 0
그리고 리카에게는 온 도시에 깔린 그 그늘 속에서 관광객도, 지역 주민도 아닌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멍하니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23 이름없음 2020/03/03 17:38:46 ID : r83A0so7wGq 0
너무 오래 여행을 해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 싸구려 마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 돌아갈 곳을 잃은 사람들. 사정이 있어 도망쳐 온 사람들.
24 이름없음 2020/03/03 17:40:18 ID : r83A0so7wGq 0
이 도시의 혼잡과 그늘은 그들이 그곳에 계속 멍하니 있는 것을 허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25 이름없음 2020/03/03 17:48:00 ID : r83A0so7wGq 0
리카는 밤이면 밤마다 노천시장 근처를 돌아다녔다.
26 이름없음 2020/03/03 17:48:50 ID : r83A0so7wGq 0
게스트 하우스에 틀어박혀 있기보다 그러는 편이 아무한테 들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27 이름없음 2020/03/03 17:51:33 ID : r83A0so7wGq 0
자신도 그늘에 푹 싸이는 것 같았다.
28 이름없음 2020/03/03 17:58:06 ID : r83A0so7wGq 0
그래서 실크 드레스도, 보석이 박힌 반지도, 하다못해 엽서 한 장 조차도 갖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리카는 조명에 비쳐 젖은 듯이 반짝거리는 상품을 구경하며 다녔다.
29 이름없음 2020/03/03 18:03:28 ID : r83A0so7wGq 0
배가 고프면 눈에 띄는 포장마차나 아무 식당에 들어가서 국수나 볶음밥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30 이름없음 2020/03/03 18:04:18 ID : r83A0so7wGq 0
방콕에서 산 조악한 티셔츠와 스커트는 빨아서 입는데도 어째선지 나날이 지저분 했다.
31 이름없음 2020/03/04 00:22:43 ID : r83A0so7wGq 0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갖고 사방으로 튀는 빛과 소음 속을 걷다 보면, 리카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흥분을 느꼈다.
32 이름없음 2020/03/04 00:23:17 ID : r83A0so7wGq 0
나는 뭐든 할 수 있다.
33 이름없음 2020/03/04 00:23:29 ID : r83A0so7wGq 0
어디로든 갈 수 있다.
34 이름없음 2020/03/04 00:23:52 ID : r83A0so7wGq 0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손에 넣을 수 있다.
35 이름없음 2020/03/04 00:24:05 ID : r83A0so7wGq 0
아니, 그렇지 않아.
36 이름없음 2020/03/04 00:24:29 ID : r83A0so7wGq 0
원하는 것은 모두 이미 이 손에 있어.
37 이름없음 2020/03/04 00:27:38 ID : r83A0so7wGq 0
리카는 얼마 전에 이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38 이름없음 2020/03/04 00:30:29 ID : r83A0so7wGq 0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39 이름없음 2020/03/04 00:30:56 ID : r83A0so7wGq 0
무서운 것도 두려운 것도 무엇 하나 없었다.
40 이름없음 2020/03/04 00:31:39 ID : r83A0so7wGq 0
하지만 지금의 기분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41 이름없음 2020/03/04 00:32:34 ID : r83A0so7wGq 0
리카는 신기했다. 나는 무언가를 얻어서 이런 기분이 된 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잃어서 이런 기분이 된 걸까.
42 이름없음 2020/03/07 12:24:51 ID : r83A0so7wGq 0
조간에서 빼낸 전단들을 테이블에 죽 펼쳐놓았다.
43 이름없음 2020/03/07 12:25:58 ID : r83A0so7wGq 0
오카자키 유코는 각기 다른 슈퍼마켓의 전단을 대조하며 빨간 펜을 들고 특가품 가격을 비교했다.
44 이름없음 2020/03/07 12:26:26 ID : r83A0so7wGq 0
열어놓은 창으로는 미풍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45 이름없음 2020/03/07 12:27:02 ID : r83A0so7wGq 0
햇볕의 정도에 따라 춤추는 먼지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46 이름없음 2020/03/07 12:27:38 ID : r83A0so7wGq 0
어딘가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나고, 엄마가 야단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47 이름없음 2020/03/07 12:33:35 ID : r83A0so7wGq 0
역 반대쪽에 있는 슈퍼마켓에서는 참치 통조림과 식빵이 싸다. 이쪽 슈퍼에서는 고기류를 30퍼센트 할인.
48 이름없음 2020/03/07 12:35:59 ID : r83A0so7wGq 0
먼저 이웃 동네 유자와야에 가서 옷감을 사고, 슈퍼에서 고기를 산 뒤, 동네 슈퍼로 돌아와서 냉동식품 구입.
49 이름없음 2020/03/07 12:45:43 ID : r83A0so7wGq 0
자전거로 돌면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50 이름없음 2020/03/07 12:46:19 ID : r83A0so7wGq 0
유코는 일주일분씩 생활비를 넣어두는 봉투를 들고 일어서서 창을 닫았다.
51 이름없음 2020/03/07 12:46:59 ID : r83A0so7wGq 0
유코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우메자와 리카를 떠올렸다.
52 이름없음 2020/03/07 12:47:23 ID : r83A0so7wGq 0
유코가 아는 리카는 가키모토 리카였지만.
53 이름없음 2020/03/07 13:02:51 ID : r83A0so7wGq 0
가키모토 리카는 유코의 중고등학교 시절 동창이었다.
54 이름없음 2020/03/07 13:03:08 ID : r83A0so7wGq 0
그렇긴 하지만, 친구였던건 아니다.
55 이름없음 2020/03/07 13:03:31 ID : r83A0so7wGq 0
친구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호하다.
56 이름없음 2020/03/07 13:04:25 ID : r83A0so7wGq 0
신문에 우메자와 리카의 이름이 실렸을 때, 유코도 바로는 그게 가키모토 리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57 이름없음 2020/03/07 13:04:48 ID : r83A0so7wGq 0
거기 실린 조악한 사진을 보고서도.
58 이름없음 2020/03/07 13:20:02 ID : r83A0so7wGq 0
우메자와 리카와 카기모토 리카가 유코의 머릿속에서 하나가 된 것은 벌써 몇 년째 연락하지 않던 고교 시절 동창에게 전화가 온 뒤였다.
59 이름없음 2020/03/07 13:20:49 ID : r83A0so7wGq 0
우메자와 리카, 바로 그 리카야, 가키모토 리카.
60 이름없음 2020/03/07 13:21:29 ID : r83A0so7wGq 0
얼굴도 희미하게 밖에 생각나지 않는 그 동창은 말했다
61 이름없음 2020/03/07 13:22:04 ID : r83A0so7wGq 0
나, 사짱에게 전화 받고 깜짝 놀랐어, 그 리카라고 해서.
62 이름없음 2020/03/07 15:20:33 ID : r83A0so7wGq 0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았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유코는 그런걸 물었다.
63 이름없음 2020/03/07 15:26:18 ID : r83A0so7wGq 0
7년 전 동창회에 오다, 너도 왔었지? 왜 그때 어쩐 일로 리카도 왔었잖아? 생각해보면 그때 이미 리카는 손을 담갔던건가 봐...... 뭔가 믿을 수 없어, 엄청 평범했지 않니? 어쩌면 전화 연결이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 전화를 한 건 말이야, 리카 얘기가 아니라 동창회가 또 있어. 곧 안내 엽서가 가겠지만......
64 이름없음 2020/03/07 15:28:36 ID : r83A0so7wGq 0
동창 목소리를 들으면서 유코가 생각했던 것은 가키모토 리카의 일이 아니라, 그러고 보니 나는 오다 유코였다, 라는 것과 이곳에 산 지 벌써 10년이나 지났나, 하는 것이었다.
65 이름없음 2020/03/07 15:30:29 ID : r83A0so7wGq 0
얘, 정말 놀랍지, 그 리카가...... 동창은 유코에게 놀라는 목소리를 이끌어내려는 듯이 재차 말했지만, 유코는 그러게, 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66 이름없음 2020/03/07 15:32:49 ID : r83A0so7wGq 0
그러게, 라니 그것뿐이야? 동창은 또 말하고, 유코는 이 전화 나도 누군가한테 걸어야 하는 거야? 하는 소리를 문득 중얼거려 동창이 어이없어 했다. 뭐야, 긴급연락도 아니고. 또 동창회에서 만날 거니까 그때...... 동창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67 이름없음 2020/03/07 15:47:49 ID : r83A0so7wGq 0
교외에 있는 와카바 은행 지점에서 마흔한 살의 계약 사원이 약 1억 엔을 횡령했다.
68 이름없음 2020/03/07 15:48:07 ID : r83A0so7wGq 0
그 뉴스가 흘러나온 것은 봄이었다.
69 이름없음 2020/03/07 15:49:18 ID : r83A0so7wGq 0
동창의 전화로 행방불명이 된 그 범인과 유코가 아는 가키모토 리카는 비로소 하나로 합쳐졌지만, 합쳐지고 나니 더 현실감이 없다.
70 이름없음 2020/03/07 15:49:47 ID : r83A0so7wGq 0
1억이라는 숫자에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71 이름없음 2020/03/07 15:55:20 ID : r83A0so7wGq 0
용의자 우메자와 리카는 아직 잡지 못했다. 최근에는 그런 뉴스가 있었던 걸 세상 모두가 잊어버린 듯 텔레비전에서도 신문에서도 새로운 뉴스만 보도하고 있다.
72 이름없음 2020/03/07 15:56:18 ID : r83A0so7wGq 0
리카를 까맣게 잊어버린 언론과는 달리, 유코는 날이 갈 수록 리카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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