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1/11/14 20:00:24 ID : kts67y3Ve3W 1
부탁할겡ㅠㅜ
2 이름없음 2021/11/14 20:01:43 ID : kts67y3Ve3W 0
『UnTil the Sunrise』. 대한민국 최초의 증강현실 게임. 잘 짜여진 탄탄한 스토리 구성과 실제처럼 실감나는 그래픽, 몰입감 있는 액션까지 더해져 단숨에 전 국민에게 ‘언틸썬 열풍’을 불러일으킨 대상. 그러니까, 게임 따위에 조금도 관심없던 나에게조차 『UnTil the Sunrise』의 게임팩이 생일선물 명목으로 보내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소포를 받아들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명하게 그려진, 핏자국이 튄 로고. “이딴 거 필요없다니까…….” 내 아버지란 사람은 끝까지 제멋대로다. ㅡ최악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포장지를 멋대로 북북 찢어발기듯 찢어냈다. 그러자 툭, 소리를 내며 차갑게 식은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지는 종이 한 장. 휘갈겨 쓴 글씨. ‘생일 축하한다. 우리딸. ㅡ아빠’ 그러나 성의없는 그 한 마디에, ‘아빠’라는 단어 하나에 어쩐지 마음이 풀려서. 나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과 손길로 패키지를 집어들었다. 들어있는 건 네온 주황빛 렌즈가 달린 스마트 글라스와 무선 이어폰. 나는 잠시간 망설이다 이내 그것을 착용했다. [……100% 다운 완료. ‘Maddog City’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순식간에 로그인되며 뜨는 푸른 텍스트 창. 그리고 이내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황폐한 회색 도시, 무너져버린 콘크리트 벽, 시멘트와 철근, 태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 오염된 물이 흐르는 하수구, 몸 위를 기어다니는 쥐들, 모든 것이 실제처럼 다가왔다. 나는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거짓 속에서 눈을 떴다. 내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넋을 잃고 있던 그 때였다. 어느새 내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 아래서,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는 나를 향해 땟국물이 묻은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 새로운 ‘Underdog’이구나. 네 이름은…….} [당신의 이름을 정해주세요.] 그리고 이어 뜨는 텍스트 창. 나는 잠시 고민하다, 별 생각없이 책장에 꽃혀있던 책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의 제목을 말했다. ‘Twilight’. 곧 아주머니는 피처럼 붉고 선명한 여명이 어스름히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 황혼이 지는 시각이구나. 이제부터 네 이름은 ‘트와일라잇’이란다.} 아주머니는 이제 센터에 가서 신고하고 네 신분을 만들어야 한다며 마을 광장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고, 자연스레 눈 앞에 두 가지의 선택지가 떠올랐다. [예/아니오]. 나는 모른다고 답했고, 아주머니는 친절한 얼굴로 낡은 지도 한 장을 건네주고는 초행길이니 자신이 직접 데려다 주겠다며 앞장서 나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언더독’들이 쓰레기 더미 위에서 새로이 나타나곤 한단다. 그들이 매드독 시티에서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건 우리 시민들의 몫이지.} 나는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르며 NPC인 그녀가 흘리는 정보들을 주워들었다. 이내 [정보 수집] 아이콘에서 빛이 반짝이며 [언더독의 정체?], [보름달의 미스터리]라는 두 가지의 팝업창이 눈 앞에 떴다가 이내 스러지듯 희미해졌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드넓은 광장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석조가 깔린 바닥과 육중한 돌기둥들 가운데에는 커다랗고 아름답지만 물이끼가 가득 낀 낡은 분수대가 놓여 있었고, 아스라한 새벽 안개에 감싸여 스산한 분위기마저 내보이고 있었다. 푸른 베일의 장막같은 밤하늘 위를 날아오르는 까마귀 한 마리를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나를 아주머니가 이끌어 센터의 나무 문 안으로 발을 들이게끔 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지독히도 현실 같았다. 직원은 외안경을 쓰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로, 상당히 사무적인 태도를 보이며 나를 대했다. 그는 먼저 나의 이름을 물었고, 그 다음으로는 나이를 질문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내 실제 나이인 18세라고 답했으며, 성별에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여자라고 말했다. 센터의 직원은 잠시 콧수염을 쓸다가 카운터 안쪽을 마구 뒤지더니, 이내 먼지가 가득 끼고 금이 간 거울을 하나 꺼내들었다. {직원: 본인 맞으신가요?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눈 앞에 푸른 팝업창이 떠오르며 [첫번째 퀘스트!]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당신의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징 해 주세요. 보상: 100캐시] 나는 하는 수 없이 헐벗은 마네킹이나 다름없는 나의 아바타를 꾸며나가기 시작했다. 대충 이 정도면 제법 봐줄 만하다 싶을 때 즈음, 나는 [확인] 버튼을 눌렀고, 비어있던 왼쪽 상단에 100캐시가 차오른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언제나 많을 수록 좋았다. 현실에서나, 게임 속에서나. 그렇게 싱거울 정도로 간단히 등록이 끝나고, 직원은 더없이 사무적이고 무미건조한 어투로 매드독 시티의 새로운 시민이 되신 걸 환영한다고 말하더니 이내 용무가 없으면 이만 나가보시라며 축객령을 내렸다. 몇 번이나 말을 걸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왠지 내가 말을 걸어댈수록 그의 얼굴에 묘하게 번지는 짜증이 퍽 흥미로워서, 나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정말이지, 꽤나 세세한 부분까지 고려해 잘 만들어진 게임이었다. [퀘스트! 위험에 빠진 시민을 발견하고 행동하시오! (0/3) 보상: 300캐시] 내 짓궂은 장난은 새로운 퀘스트가 시작된 다음에야 끝이 났다. 나는 센터를 나서면서도 그에게 웃으며 메롱을 날려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평소의 나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던 장난기였다. 어쩌면 처음 해보는 경험에 마음이 들뜬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위험에 빠진 시민이라니,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조금 전 건네받은 지도를 꺼내 펼친 후 살피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으슥한 골목이나 어두운 밤길에서 발견할 수 있을 확률이 높을 듯 보였다. 나는 신중히 지도를 살피며 깊숙한 미로같은 골목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던 듯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희미한 신음과 비명, 구타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쌓인 벽돌담 뒤로 조심스레 몸을 숨긴 뒤 밖을 내다보았다. 한 남자가 왠 덩치 큰 이에게 발로 걷어차이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는 눈물콧물을 질질 흘리며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덩치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는 듯 했다. 보다못한 내가 나서려던 그 때, 눈 앞에 다시 한 번 선택지 창이 떠올랐다.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사양. 경찰에 신고한다.] [폭력을 쓰지 않는 선에서 내가 직접 해결한다.] [폭력에는 폭력. 나서서 남자의 복수를 해준다.] [재밌어 보인다. 악당을 도와 남자를 구타한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첫번째 선택지를 제외시킨다. 공권력은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두번째 선택지에서 나는 잠시 생각한다. 폭력을 쓰지 않는 선에서 해결한다고. 그렇다면 그것을 진정한 해결책으로 볼 수 있을까? 감옥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탈옥하면 그만이고, 범죄자를 죽이거나 팔다리 어디 한군데라도 잡아다 부러뜨리지 않는 이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텐데.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세번째. [나서서 남자의 복수를 해준다.] 그리고 그 순간, 눈 앞에서 뽑기 상자가 튀어나오며 랜덤 초능력이 적힌 카드가 찬란한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내 떠오르는 여러 개의 알림창. [축하합니다! SS급 소노키네시스(Sonokinesis) 카드를 얻으셨습니다!] [소노키네시서는 음파와 진동을 이용해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방어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아군의 심리를 안정시키거나, 적진을 혼돈에 빠뜨리는 데 사용될 수도 있어 활용도의 폭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획득 스킬: 소름끼치는 비명 단 한 명의 적에게 집중 공격되는 음파로 큰 피해를 줍니다. 데미지: -59] “스킬 발동.” 나는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험악한 인상의 덩치 큰 사내가 인기척을 느끼고 나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입술을 열었고, 곧이어 엄청난 음파가 터져나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소름끼치는 비명’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털이 주뼛 서고, 온 몸에 오한이 돋고, 차라리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주며 사람을 말라 비틀어져 죽게 하는. 나는 쓰러진 사내의 시체를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며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아직 나에게는 처리해야 할 두 개의 퀘스트가 더 남아있었다. 눈 앞에서 펑펑 터지는 팝업창을 감흥없이 바라보며 나는 또다시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레벨업! Lv.2 획득 스킬: 여왕의 울부짖음 전방에 엄청난 음파를 내보내어 범위 내 모든 적에게 큰 피해를 줍니다. 데미지: -103] 마지막으로 내가 막 한 여자를 성추행하려던 한 무리의 질 나쁜 사내들을 처단했을 때였다. 퀘스트 달성을 축하하는 메세지와 함께 300캐시가 수령되고, 막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며 뒤를 도는데, 목깃에 서늘하게 닿는 금속 재질의 촉감이 있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알림 창은 [인물 정보]라는 이름을 하고 있었다. [Midnight: 안티히어로 집단 『Memento Mori』의 수장] {미드나이트: 조금 전부터 널 지켜봐왔다. 네가 한 선택들을.} 칠흑처럼 새카만 머리칼을 눈썹뼈와 이마가 훤히 드러나 보이도록 짧게 잘랐고, 유난히 창백한 피부와 핏기없는 입술을 가진. 소년과 청년 사이의 경계에 선, 내 또래의 누군가. 가늘게 치켜올라간 눈꼬리며 날카로운 눈매가 매섭고, 눈동자는 녹아 더럽혀진 눈처럼 혼탁한 회색을 띠었다. 마치 죽은 생선의 것처럼 일말의 생기도 띠지 않는 어두운 빛이었다. {미드나이트: 너, 우리의 동료가 돼라.} 그리고 즉시 뜨는 새로운 텍스트 창. [안티히어로 『메멘토 모리』의 일원이 되셨습니다. 보상: 500캐시. 상징적인 가죽 장갑.] 가죽장갑을 장착하자 공격력이 +36되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를 집단에 가입시킨 이의 손에도 같은 것이 끼워진 것을 보니, 이 장갑은 그들 무리의 표식과도 같은 것인 듯 했다. [튜토리얼이 끝났습니다! 본격적인 스토리로 진입하기 전……&@#~%^!] 눈 앞에 떠오르는 알림창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한 순간,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와 함께 눈 앞의 세계가 일순간 픽셀이 되어 무너져 내렸다가 재정립 되기를 반복했다. 당황한 나는 그제야 게임을 황급히 종료하려 했지만, 렉이 걸린 듯 말을 듣지 않았다. 시야가 새하얗게 점멸했다. 마지막 순간 내가 본 것은, 기이하고 위협적이리만치 붉은 경고창이었다.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ERROR!]
3 이름없음 2021/11/14 20:02:50 ID : kts67y3Ve3W 0
이따금 들려오는 웅성거림과 조그마한 속삭임들. 잔잔한 대화소리. 고요한 소음과 소란한 적막, 어디인지 모를 곳, 그러나 왠지 모를 익숙한 향기. 축축한 흙내음, 싸늘한 공기, 코 끝에 밀려오는 추위, 그러나 어딘지 따스한 온기. 그리고 그 가운데의 어딘가에서 나는 눈을 떴다. 묵직한 둔통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기이한 감각이었다. 아주 오랜 세월을 잠들어 있었던 것만 같았다. 부서지고 조각난 기억의 편린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그럼에도 그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마치 어제의 일인양 생생히 피부로 다가왔다. 게임, 에러,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어지러움에 머리가 핑 도는 듯 했다. 툭, 빳빳하게 잔뜩 피어버려 헤지고 올이 풀린, 낡고 얇은 모직 담요가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야 일어났네.” 무심하고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중얼거리는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반쯤 허물어진 벽돌담에 등을 기대고 비딱하게 선 남자, 미드나이트가 보였다. 입술 새로 문 시가에서 후우ㅡ, 한숨처럼 내뱉은 희뿌연 연기가 허공을 떠돌다 이내 자욱한 안개 속에 섞여들며 형체없이 바스라진다. 밤하늘로 잿가루가 흩날렸다. “여기가 어딘지, 궁금해?” 눈 앞에 뜨는 알림창은 이곳이 [Rotten Claw]임을 알리고 있었다. [로튼 클로. 썩어빠진 발톱. 노동과 흙먼지, 가난으로 얼룩진 산업도시 매도그 시티에서도 가장 빈곤하고 절망적인 곳. 최악의 치안을 자랑하는 슬럼가.] 그 명성에 걸맞게 보이는 풍경은 마치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나 등장할 법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런던의 비참한 배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빈민가였다. 가난한 뒷골목, 희뿌연 매연과 스모그로 뒤덮인 회색빛 마을, 노동자들의 주름진 마디며 손톱에 얼룩진 악몽처럼 엉겨붙은 새카만 석탄가루. 빽빽하고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채 들어선 비슷한 외양의 벽돌 건물들. 여기도 공장. 저기도 공장. 폐허가 된 가게들. 깨진 유리창. 진창을 타고 흐르는 오물 덩어리. 퀴퀴한 악취. 길바닥에 나뒹구는 버려진 신문 쪼가리. 시간마저 고여 그대로 썩여가는 곳. “ㅡ창녀, 술 취한 실업자, 낳자마자 버려진 고아들, 수용소나 다름없는 공립 보육원,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부패한 경관들, 소매치기, 거지, 부랑자, 병 든 노인, 굷주린 아이, 널부러진 시체. 우리는 구세군의 아침식사 한 끼를 위해 3시간 동안 줄을 서고, 밤거리를 헤메며 노숙하지. 사람들은 오물 냄새 가득한 차 한 잔과 돌덩이처럼 딱딱한 빵 한 조각을 뼈가 부서질 듯이 고된 강제노역과 맞바꾸고, 하루 종일 죽어라 일을 한 노동의 값으로 겨우 자신과 가족의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 그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아 고저없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굶주림은 스피너즈 엔드의 끼니였다. 사람들은 좁은 인도에서 쓰레기를 집어먹었다. 오렌지껍질, 사과껍질, 포도 줄기, 빵 부스러기, 심지어 너무 더러워 정체조차 알기 어려운 사과 심마저 주워서 우물댔다. 아이들의 식당은 진창의 쓰레기 더미였다. 썩어가는 오물을 먹고 자란 거리의 아이들은 왜소하고 병약한 런던의 신인류, 빈민으로 자라났다. 그건 사회적 살인이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지. 강도, 폭행, 살인, 마약 밀수, 인신 매매……. 우리가 하는 일은 그런 놈들을 처단하고 합당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다.” 미드나이트는 마치 그것이 자신들이 날 때부터 타고난 숙명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당연한 어투로 말했다. 어쩐지 그 태도에 내가 기묘한 위화감마저 느끼던 찰나, 저 멀리서 희미한 인영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훤칠하게 높이 솟은, 적어도 백구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남자와 그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은 여자. 어느새 그들의 실루엣 뿐만 아니라 자세한 이목구비도 파악할 수 있을만큼 두 사람은 가까이 다가왔다. 마구 헝클어진 금갈색 더티 블론드에 왁스를 치덕치덕 발라 이마가 드러나게 한쪽으로 늘어뜨린 남자는 때가 타 더러워진 린넨 셔츠에 두꺼운 금목걸이와 반지를 끼고 있었다. 두텁고 단단한 손가락 끝에 발라진 은색 매니큐어며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풀린 눈매에 발린 푸른빛 펄 섀도가 왠지 모를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니까, 꼭 약에 취한 것처럼 늘어진 분위기를 가진 이였다. 그리고 그 옆의 여자는 나약이나 유약,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층 먼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풍선껌같은 분홍색으로 탈색한 단발머리는 억세고 뻣뻣했으며 아무렇게나 귀 뒤로 넘겨져 있었다. 한없이 치켜 올라간 눈썹과 매서운 눈매, 통통하고 도톰한 입술은 마치 마녀처럼 보이기도 했고, 여전사처럼 강인해 보였다. 남자의 안광을 잃은 초록빛 눈과 여자의 살기어린 청록색 눈은 전혀 재질이 다른 것이었다. “인사해, 우리의 새 멤버. 이름은…….” 미드나이트가 나를 힐끔 돌아보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잠시간 넋을 잃고 있다간 이내 황급히 대답했다. ‘트와일라잇’. 여자는 이름이 너무 길다고 거칠게 쉬어빠진 음성으로 볼멘소리하듯 크게 투덜거렸고, 남자는 상냥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ㅡ안녕, 트와일리(Twili). 내 이름은 던(Dawn)이야. 새벽이란 뜻이지. “그리고, 옆의 내 사랑(Be loved)은 데이(Day),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낮이야.” 황혼, 자정, 새벽, 낮. 나는 그들과 나의 이름을 곱씹었다. 어쩐지 무언가 연관성이 있을 거라는, 나조차 알지 못하는 무언가 깊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몸을 돌려 도망치는 대신, 당장에라도 이 망할 게임을 끝내버리는 대신 가만히 팔을 뻗어 너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어쩌면, 거기서부터 이 모든 건 잘못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동기화 100% 완료!] 다음 순간, 내가 무심코 게임용 글라스를 고쳐쓰기 위해 눈가를 더듬었을 때, 만져지는 것은 더없이 매끄럽고 낯선 소녀의 얼굴 윤곽 뿐이었으므로. 이 기막히고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하나였다. 아, 좆됐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든 감정은, 놀랍게도 기쁨이었다. ……차라리 잘 됐어. 엄마도 없는 그 염병할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아득바득 거려 대느니 그냥 게임 속이든 이세계든 훌쩍 떠나버리는 편이 정신건강에 덜 해롭지. 마치 이 세계에 들어온 것을 환영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하늘에서 얇은 빗줄기가 부스스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불이꺼진 맞은편 상점의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쳤다. 나는 홀린 듯 그곳으로 다가가 손바닥을 대었다. 굽슬거리며 물결치는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 새하얀 피부 위에 점점이 박힌 옅은 주근깨, 붉은 기가 도는 얇은 입술 사이로 엿보이는 토끼같은 흰 치아와 희미한 빛이 맺혀 동그랗게 떨어지는 코끝, 선명하고 커다란 매혹적인 눈매와 길게 뻗은 촘촘한 속눈썹까지. 시린 겨울밤 얼어붙은 호수의 물빛이었으며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푸르른 바다의 물결같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물에 고스란히 젖어들며 나는 희미하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는, 더이상 ○○○가 아니었다. “이렇게 새 멤버도 들어왔는데, 조촐한 축하 파티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어?” 던이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펼친 손바닥에서 작은 불꽃을 피워냈다. 막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고 난 뒤의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덥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ㅡ이렇게 사이좋게 둘러앉으면 캠프파이어가 빠질 수 없지. 안 그래, 자기야(Darling)? 그가 데이를 향해 찡긋, 눈짓했고, 데이는 한쪽 입꼬리 만을 비틀어 올리며 축축한 흙 위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 순간, 땅 속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 뿌리 내리고 돋아나더니 이내 뒤엉킨 가시덤불이 그야말로 놀라운 속도로 거대하게 자라났다. 정확히, 데이가 입맞춘 바로 그 자리에. 그야말로 생명의 시계가 순리를 거스르는,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던은 가시덤불 위로 불을 붙였고, 이내 타닥거리는 특유의 소리와 함께 불길이 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은 데이의 이마께까지 치솟았다. 잠시간 그렇게 멍하니 일렁이며 타오르는 화염을 바라보는데, 데이가 내뱉듯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씨발, 더럽게 고프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다며 험한 욕을 쏟아내는 그녀를 던은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눈가에 입을 맞췄고, 곧 데이는 도저히 더는 못 참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공터 한 구석으로 걸어갔다. 잠시동안, 그녀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땅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끌어내려는 사람처럼 뻗은 두 손끝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 모슴을 나는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흙 속에서 그야말로 유전 법칙을 거스른, 사람 머리통 만한 크기의 감자알이 줄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광경은 따로 있었다. 미드나이트의 손이 은빛으로 변하며 액체가 흐르듯이 형태를 바꾸더니, 이내 그의 옷소매 사이로는 팔은 온데간데 없이 날카롭고 유려하게 빛나는 검객만이 생겨있던 것이었다. ㅡ미드(Mid)는 메탈로키네시스(Metallokinesis)야. 단순히 철을 다룰 뿐만 아니라 신체의 일부를 금속 재질로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도 있지. 던의 부연설명에 나는 그제서야 몇 시간 전 그가 무기 하나 들지 않은 빈 손으로 어떻게 내 목에 칼날을 겨눌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 사이 감자가 다 구워졌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씩 받아들었다. 그런데 그 때, 나는 던에게서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포슬한 감자 위에 주머니에서 꺼낸 새하얀 가루를 듬뿍 흩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조심스러운 눈길을 눈치챈건지, 데이는 한 입 크게 감자를 베어물고 우물거리다 말고 나를 향해 퉁명스럽게 물었다. ㅡ뭔지 궁금하냐? “소금이나 설탕…… 아냐?” 그에 오히려 웃기지도 않다는 듯 거세게 코웃음을 치는 것은 데이 쪽이었다. ㅡ이 년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모르는 게 순진해 빠져가지고는. 우리가 그런 비싼 걸 어떻게 구하냐, 병신아. 그 거친 말투에 내가 잠시 눈을 굴려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때에, 던이 더없이 나긋하고 평화로운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약이야. 너도 할래? 기분 좋은데.” “……약쟁이 새끼.” 내가 그 태연한 어투에 잠시간 할 말을 잃은 찰나, 이러한 던의 형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쯧, 혀를 찬 미드나이트가 씹어뱉듯이 쏘아붙였다. ㅡ손 떨다가 능력 조준 실패해서 목표물 놓치기만 해봐. 내 손으로 목을 베어서라도 널 죽여버릴 거니까.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 드리워진 짜증, 그 한 겹 뒤에 덧쒸워진 미약한 걱정과 불안, 애정을 본다면 누가 과연 미드나이트를 일컬어 냉혈한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조금만 참아줘, 미드. ……중독자라고 해도, 이런 세상에서, 약에라도 취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그래.” 던이 안온하게 웃으며 말한다. ㅡ그리고 너도 알잖아, 내 실력.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야. 그러나 그 딴에는 달래보겠답시고 다정한 말투로 건넨 말이 오히려 미드나이트에게는 도리어 무언가를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분명했다. 주먹을 꽉 쥔 채 온 몸을 부들부들 떨던 미드나이트가 던에게 달려들어 거칠게 멱살을 잡아챈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런 씹……! 내가 지금 그딴 걸 걱정하는 걸로 보이냐?! 이 씨발, 좆같은 새끼가!!” 너 죽고 싶냐? 어? 죽고 싶냐고! 그렇게 소원이라면 내가 직접 네 놈 그 망할 숨통을 끊어주겠다며 잔뜩 흥분해 능력까지 써대려던 그를 말린 것은 데이였다. 그녀가 단단한 덩굴로 그를 옭아매어 두 사람을 떼어놓지 않았다면 던은 지금쯤 정말 끝장났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한이 들었다. 열이 몰려 벌겋게 달아오른 흰자위와 실핏줄이 터진 눈알로도 한참을 씩씩대던 미드나이트가 별안간 홱 돌아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던은 힘이 빠져 흙바닥에 나뒹굴며 미친 사람처럼 실실대고 있었다. 데이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아주 섬세하고 애정이 담뿍 담긴 손길로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을 보다가 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미드나이트를 따라나섰다. 어쩐지 그를 혼자 두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나는 그의 흔적을 무작정 좆으며 생각했다. 대관절 무슨 게임이 이다지도 실감나고 현실적이람? 암울하기 그지없네…….
4 이름없음 2021/11/14 20:03:09 ID : kts67y3Ve3W 0
참고로 좀 오글거릴 순 있엉...
5 이름없음 2021/11/15 07:50:53 ID : fPhhAlA1Cru 0
.
6 이름없음 2021/11/16 08:30:29 ID : kts67y3Ve3W 0
헉 고마웡…!! 감동이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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