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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3/02/22 10:17:49 ID : vdA7s0062JU
옛날에 친구랑 재미로 쓴거 구글 독스에서 우연히 찾게돼서 올린다 ㅎㅎ 오글거려도 애기들 두명이 쓴거니까 봐조 -간질간질간질간질 주의-
이름없음 2023/02/22 10:25:57 ID : vdA7s0062JU
봄 春 벚꽃 내음과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봄과, 어깨가 처질 대로 처진 채 고등학교 3학년에 전학을 가던 난 그들과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이름없음 2023/02/22 10:26:07 ID : vdA7s0062JU
학교 밖 벽돌은 누런 페인트가 벗겨져 보기 꽤나 흉했고, 학교 시계는 초침과 분침이 조금 녹슨 것 빼곤 잘도 돌아가고 있었다. 반면 학교 주변은 심어져있던 벚꽃나무에선 바람에 맞아 찰랑거리며 떨어지는 꽃잎들로 가득 매워져 있었고 하늘에는 예쁜 양떼구름이 띄워져 있었다.
이름없음 2023/02/22 10:26:38 ID : vdA7s0062JU
스타트업 회사를 차릴 곳을 물색하던 아버지 덕에 워낙 전학이 잦았던 난 그저 평범한 학교생활을 바랄 뿐이었다. 엄마나 남동생이나 계속 집을 옮겨 다니느라 지쳤을 게 불 보듯 뻔했기에 그만 좀 이사다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차마 아버지에게 회사 그냥 차리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난 또다시 떨리는 맘을 안고 등교했다.
이름없음 2023/02/22 10:26:49 ID : vdA7s0062JU
댕 - 댕 - 댕 조례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담임 선생님께서는 날 3학년 제일 끝 10반으로 안내해 주셨다. 여닫이 방식으로 되어있는 문은 나무 코팅이 되어 있어 정갈해 보였고, 커플 이름처럼 보이는 글귀들이 벽에 수두룩하게 적혀 있었다. 이곳이 내가 졸업까지 머물러야 할 반이라고 생각하니 부담감이 엄습했다. 그래도 이왕 온 거 부모님 속 썩히지 말고 조용히 졸업해야겠다고 되뇌었다.
이름없음 2023/02/22 10:29:35 ID : vdA7s0062JU
반 안은 시끄러웠지만, 내가 한 걸음을 내딛어 그들의 세계에 입장하자마자 교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여전히 나를 본채 만채 수다를 떨고 있었지만 몇몇 학생들은 내게 이목을 집중한 채 조례를 준비했다.
이름없음 2023/02/22 11:36:13 ID : vdA7s0062JU
“자, 자! 조용하고. 이쪽은 이번에 새로 온 전학생이다. 인사는 각자하고, 3학년 때 와서 더 적응하기 힘들 테니 다들 잘 해줘라! 이상.”
이름없음 2023/02/22 11:36:20 ID : vdA7s0062JU
선생님은 그렇게 대충대충 나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고 삐걱거리는 여닫이 문을 열고 나가셨다. 난 어쩔 수 없이 아무 데나 비어보이는 자리에 가서 앉아 모두를 등진 채 엎드려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때, 한 학생이 조심스레 내게 다가와서는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이름없음 2023/02/22 11:40:00 ID : vdA7s0062JU
“안녕! 난 강하랑이라고 해. 오늘 전학왔지? 이름이 뭐야?”
이름없음 2023/02/22 11:40:12 ID : vdA7s0062JU
전학생인 나한테 말을 거는 것 보니 이 강하랑이라는 애가 반장인듯 하다. 티 날듯 말듯 연한 화장에 미소를 머금은 입술, 살살 치는 눈웃음, 그리고 너무 많이 뿌려서 역하기까지 한 석류향 향수. 내 눈살은 반장에 대한 비호감적인 기분을 감추려는 나의 의지와 다르게 찌푸려졌다. 간신히 표정을 숨겼지만 토할 것 같은 느낌마저 주었던 향수 때문에 난 웅얼웅얼거리며 조용하고도 어색한 자기소개를 했다.
이름없음 2023/02/22 11:40:25 ID : vdA7s0062JU
“응… 내 이름은 유주영이야. 동덕여고에서 왔어.” “헐, 유주영 이름 진짜 예쁘다.”
이름없음 2023/02/22 11:40:38 ID : vdA7s0062JU
뭐지? 솔직히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다. 마음을 함부로 여는게 어려웠던 나였기에 굳이 엄청나게 친한 친구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해 모두에게 애써 쌀쌀맞게 대한다. 이 애, 내가 눈살을 찌푸린 것을 보지 못한 건지 봤는데도 무시하는 건지 갑자기 나한테 친한 척 다가온다. 내 이름이 예쁘게 들린다고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볼 필요까진 없지 않나 싶다. 그래도 매몰차게 반장을 밀어내서 나쁜 관계를 만들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난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이름없음 2023/02/22 11:43:28 ID : vdA7s0062JU
“고마워! 강하랑이라는 이름도 진짜 예뻐. 미안한데 혹시 있다가 쉬는시간에 학교 지리 좀 알려줄 수 있을까?”
이름없음 2023/02/22 11:43:36 ID : vdA7s0062JU
다른 친구에게 지리를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일진 애들과 다니면 나 역시 그렇게 될까 두려웠고 모범생들과 다니면 모든 게 비교당할까 봐 무서웠다. 반장과 다녀도 비교 당할 것 같긴 했지만 굳이 나에게 다가오는 아이를 밀어낼 필요는 없지.
이름없음 2023/02/22 11:47:39 ID : vdA7s0062JU
조례가 끝나자마자 왠지 험상궂게 생긴 인상의 남자 국어 선생님이 들어와 정말이지 석상보다도 딱딱한 말투로 수업을 시작했다. 역시 집중하기 굉장히 힘들었다. 나의 눈꺼풀은 위아래로 흔들리며 깨어 있으려는 나의 의지를 사뿐히 즈려밟고 있었다.
이름없음 2023/02/22 13:08:06 ID : vdA7s0062JU
댕 - 댕 - 댕 이렇게 이 학교에서의 첫 수업이 끝났다. 쉬는 시간에는 반장이 학교 투어를 시켜주기로 했기에 곧바로 반장 책상에 갔다. 반장은 주저없이 4층부터 설명해주겠다며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역시 역한 석류 향이 났다. 정말 적응할 수 없는 냄새인 것 같다.
이름없음 2023/02/22 13:10:00 ID : vdA7s0062JU
“여기는 3학년 교무실이고, 그 옆은 화학용 과학실, 그리고…” 하랑이는 정말이지 친절하게 한 층 한 층 내려오며 학교 지리를 설명해 주었다. 덕분에 길을 잃어서 수업에 늦을 일은 없을 듯 하다. 반장은 꽤 괜찮은 아이인 것 같다.
이름없음 2023/02/22 13:10:20 ID : vdA7s0062JU
여름 夏 첫 등교 날 이후로 하랑이와 말을 섞는 일은 없었다. 하긴, 하랑이는 워낙 밝고, 친구도 많을 성격이었다. 재잘재잘 말도 잘하고, 항상 웃는 데다가 착하기도 정말 착했다. 그런 애가 나랑 같이 다닐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니, 갑자기 현실 자각이 되며 하랑이와의 괴리감이 느껴졌다.
이름없음 2023/02/22 13:14:08 ID : vdA7s0062JU
이곳에서도 역시 난 혼자겠구나 싶은 맘으로 휴대폰을 꺼내들어 평소 좋아하는 ‘스카비오사’라는 그룹의 인디음악을 들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중의 무명 그룹이지만 그들의 노래는 정말 날 웃게 하기도, 울게 하기도 할 정도로 의미도 깊고 듣기도 아름다웠다.
이름없음 2023/02/22 13:14:20 ID : vdA7s0062JU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일일초' 라는 노래인데, 후렴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가사는 이러했다. ‘그대에게 기어서라도 가겠소, 날아서라도 가겠소, 다리가 있는 한 뛰어가겠소.’
이름없음 2023/02/22 13:14:30 ID : vdA7s0062JU
절절한 사랑이 느껴지는 듯 해서 나의 연애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연애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좋아하는 남자애도 있던 적 없는데.
이름없음 2023/02/22 13:14:41 ID : vdA7s0062JU
나의 정신이 일일초와 함께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고 있을 때쯤, 하랑이가 갑자기 다가와 나의 휴대폰을 들여다보자마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입을 막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이름없음 2023/02/22 15:38:46 ID : vdA7s0062JU
“와 미쳤다… 너도 스카비오사 좋아해? 진짜 이 그룹 아는 사람 살면서 처음 봤어!” 하랑이는 스카비오사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나와 입덕을 한 포인트 역시 신기하게도 똑같았다. 갑자기 엄청난 내적 친밀감이 생성되며 우린 스카비오사의 모든 곡들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하랑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스카비오사 1집 수록곡인 ‘아스타' 였다. ‘아스타' 또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였다.
이름없음 2023/02/22 15:39:05 ID : vdA7s0062JU
“넌 아스타 제일 좋아하는구나, 난 일일초 제일 좋아해!” “헐, 나 그 노래 알아. 일일초는 솔직히 후렴구가 찢었지.”
이름없음 2023/02/22 15:39:24 ID : vdA7s0062JU
스카비오사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하랑이와 난 급속도로 친해졌다. 서로서로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기도 하고, 그들의 음악을 들을 때면 마치 내가 다른 감성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름없음 2023/02/22 15:39:38 ID : vdA7s0062JU
쉬는 시간을 전부 스카비오사 이야기에 쏟고 나니 어느새 수업은 시작되었다. 수업시간에는 다시 어색해질 줄 알았던 하랑이와 난 비밀 쪽지를 주고받고, 교과서에 웃긴 낙서를 하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괴리감 따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름없음 2023/02/22 15:39:48 ID : vdA7s0062JU
웃음을 참고 있는 하랑이의 모습은 정말 사진을 찍어주고 싶을 정도로 웃겼다. 보조개는 들어갈 대로 들어가고 웃음소리는 꺼이꺼이 우는 소리처럼 들려서 그 모습에 나 역시 웃음이 터지곤 했다. 그러다 가끔 운이 안 좋은 날에는 선생님이 교과서의 낙서들을 보고 우릴 교실 밖에 세워 두기도 했다. 그래도 우린 뭐가 좋다고 계속 실실거리며 의미없는 수다를 떨었다.
이름없음 2023/02/22 15:44:36 ID : vdA7s0062JU
“아니 강하랑 너 웃는 거 진짜 개웃겨! 찍어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야 진짜.” “뭐래, 누군 안 웃긴 줄 아냐? 너도 나만큼 심각해!” “학교 끝나고 나랑 놀러가자!” “그러자. 뭐하고 놀래?” “너 혹시 떡볶이 좋아해? 솔직히 싫어하는 사람 없지 이건.”
이름없음 2023/02/22 15:44:47 ID : vdA7s0062JU
솔직히 말하자면, 난 매운 걸 정말 못먹는다. 밀가루도 딱 질색이다. 나의 단골 백반 집에 데려가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연근이랑 멸치볶음을 추천하려고 했는데, 하필 내가 가장 싫어하는 떡볶이를 먹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난 거절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동조하고 또 호들갑을 떨었다.
이름없음 2023/02/22 16:09:03 ID : vdA7s0062JU
“너도 떡볶이 제일 좋아하는구나! 역시 우린 잘 맞는 듯. 나 여기 앞에 진짜 매운 떡볶이 잘하는 집 아는데, 거기 가자!”
이름없음 2023/02/22 16:09:12 ID : vdA7s0062JU
심지어 ‘진짜 매운' 떡볶이라니… 먹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얘기했는데 이제와서 싫어한다고 말하면 하랑이는 나에게 실망할 것이 분명했다. 처음엔 그냥 적당히 거리를 두며 다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하랑이는 나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있었다. 잃고 싶지 않았다. 잃을 것이 두려웠다.
이름없음 2023/02/22 17:53:46 ID : xSJU1xzU2Mi
하랑이가 안내한 떡볶이집은 꽤 허름했다. 벽에는 덕지덕지 ‘최복남 왔다감' 같은 글귀로 가득했다. 요즈음은 어디에나 자기 이름을 새기는 게 유행인 것 같다. 또 아주머니가 철판 위에서 만들고 있는 떡볶이에서는 향 마저도 매운 향이 났다. 신기하게도 하랑이의 석류향 향수는 또 그 매운 향을 뚫고 내 코를 자극해 왔다. 역시 역한 감이 없지않아 있다. 그래도 꽤 적응을 해서 이제 표정관리는 잘 할 수 있다.
이름없음 2023/02/22 17:53:55 ID : xSJU1xzU2Mi
아주머니는 하랑이를 아주 잘 안다는 듯이 살가운 미소를 머금고 우리에게 인사를 건내셨다. “하랑이 왔네! 옆은, 친구니? 하랑이한테 잘해줘, 너 이런 친구 만나기 힘들다?” “아주머니, 주영이한테 왜 그래요. 주영아, 그냥 하시는 말이야. 아주머니 떡볶이 2인분만요!” “그래, 알았다. 매운 정도는 평소랑 똑같이 해줄게!”
이름없음 2023/02/22 17:54:04 ID : xSJU1xzU2Mi
몇 분의 기다림 끝에 떡볶이는 우리의 식탁 앞에 놓여졌다. 아까 본 것보다도 색이 빨겠다. 이걸 과연 내가 먹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난 떡볶이로는 부족하다며 맵지 않은 메뉴인 튀김과 순대도 주문했다.
이름없음 2023/02/22 17:54:16 ID : xSJU1xzU2Mi
“주영아, 여기 떡볶이 진짜 미쳤어! 아 해봐 아~” 하랑이는 친절하게 매운 고춧가루가 잔뜩 묻은 떡볶이를 내 입으로 밀어넣었다. 나의 혀는 곧 불타는 듯한 감촉에 휩싸였고 시야마저 흐릿해져 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하랑이는 허겁지겁 떡볶이와 어묵튀김을 볼이 터져라 씹고 있었다. 난 겨우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코에서는 매운 숨을 내뿜으며 하랑이에게 천천히 먹으라며 나도 맛있게 먹는 척 허겁지겁 먹었다.
이름없음 2023/02/22 17:57:51 ID : xSJU1xzU2Mi
“주영아, 여기 떡볶이 맛있지?” “응…! 완전 맛있어!” “그치! 앞으로 매일 와서 먹자. 오늘은 네가 샀으니까 내일은 내가 살게!”
이름없음 2023/02/22 17:58:00 ID : xSJU1xzU2Mi
이제 다 먹었으니 일어나야 했다. 나의 위장은 강하게 요동치며 내가 억지로 쑤셔넣은 음식물을 역류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구토를 하거나 배가 아프다고 웅크리면 하랑이는 내가 떡볶이를 싫어하는 걸 알아챌 것만 같아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이름없음 2023/02/22 17:58:08 ID : xSJU1xzU2Mi
“주영아. 내일 봐!” 우린 짧은 인사를 주고 받은 뒤 각자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내 배는 발버둥쳤고, 집까지 어떻게 잘 도착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위장은 긴장이 풀린 듯이 나의 목구멍을 지나 나의 입 안까지 소화된 떡볶이를 역류해냈다. 난 다급히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화장실로 달려가 토를 했다. 먹었던 모든 걸 뱉어내고 거실로 나가보니 엄마가 날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없음 2023/02/23 00:32:07 ID : xSJU1xzU2Mi
“주영아, 괜찮니? 왜 갑자기 토를… 혹시 너 매운 거 먹었니? 병원 가야하나 이거?” 역시 엄마의 촉은 속일 수 없었다. 거짓말인 게 들통날 것이 뻔했지만 난 애써 아니라고 부정하며 물 한 컵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왜 내가 그리도 무모하게 매운 떡볶이를 먹었을까.
이름없음 2023/02/23 00:32:43 ID : xSJU1xzU2Mi
다음 날 등굣길에는 하랑이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자연스레 그쪽을 향해 똑같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하랑이를 향해 달려갔다. 뛰어와서 잡은 하랑이의 손은 따뜻했다.
이름없음 2023/02/23 00:33:07 ID : xSJU1xzU2Mi
학교에서의 수업시간은 하랑이와 수다를 떨고 선생님이 주시는 학습지를 조금씩 푸는 것의 반복이었다. 선생님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지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하랑이와 떠드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 멈출 수 없었다.
이름없음 2023/02/23 00:33:24 ID : xSJU1xzU2Mi
그 와중에 하랑이가 나의 학습지에 작게 나를 그려주었다. 너무 귀여워서 흐뭇하게 웃고 있다가 나도 그려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좀 못생긴 하랑이를 그려주었다. 그랬더니 또 보조개를 실컷 드러내며 꺼이꺼이 웃었다. 또 난 그 모습을 보며 숨죽여 웃었다.
이름없음 2023/02/23 00:33:41 ID : xSJU1xzU2Mi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이었지만 하랑이와 수다를 떨며 장난을 치다 보니 어느새 행복한 하루가 지나 있었다. 어제 엄마와 급하게 가본 응급실에서는 앞으로 자극적인 음식을 일절 끊으라고 했지만 난 아무렇지 않은 듯: “우리 오늘 야자 끝나고 떡볶이 먹으러 가자. 사주기로 했잖아?” 이라고 말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하지 주영아!” 난 이렇게 고등학교 생활의 마지막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이름없음 2023/02/23 00:54:15 ID : xSJU1xzU2Mi
가을 秋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다. “수능 이제 세달밖에 안남았다. 얘들아 조금만 더 힘내자.” “네.”
이름없음 2023/02/23 00:54:33 ID : xSJU1xzU2Mi
선생님이 나가시자마자 교실은 여느때와 같이 시끄러워졌고, 교실 뒷문 옆 거울은 머리에 헤어롤을 하고 있는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이름없음 2023/02/23 00:54:46 ID : xSJU1xzU2Mi
저녁 야자 시간은 그들에게 잊혀진지 오래였고, 나는 낡아서 다 헤져 가는 가방에 문제집을 쑤셔넣으며 교실 창문을 통해 선선하게 불어오는 가을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집에서 조금만 눈을 붙이고 바로 공부할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익숙한 목소리가 날 불렀다.
이름없음 2023/02/23 08:44:05 ID : vdA7s0062JU
“야 유주영! 너 야자 안 째낄꺼지? 내 반장 체면 좀 세워줘.”
이름없음 2023/02/23 08:44:21 ID : vdA7s0062JU
어느새 하랑이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내 얼굴 앞에 다가왔고, 오늘따라 하랑이의 진한 석류 향수 냄새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는 귀에 꽂힌 에어팟을 빼며 하랑이를 올려다 보았다. 뽀얀 얼굴에 생기있는 볼, 이마를 살짝살짝 가리는 앞머리, 깊은 쌍꺼풀 속의 커다랗고 깊은 눈, 도톰한 입술.
이름없음 2023/02/23 08:44:28 ID : vdA7s0062JU
예쁘다.
이름없음 2023/02/23 08:45:01 ID : vdA7s0062JU
뭐지. 갑자기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드라마 주인공이 된 듯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쿵쿵거리는 내 심장 소리는 귀까지 울려퍼졌고, 숨이 턱턱 막혔다. 당황스러운 내 마음을 대변하듯 식은땀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고,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름없음 2023/02/23 08:45:09 ID : vdA7s0062JU
내가 하랑이를 친구로만 생각하는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름없음 2023/02/23 08:45:19 ID : vdA7s0062JU
“야! 왜 대답을 안해… 째낄꺼냐니까?”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하랑이는 좀 더 상기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수줍음에 하랑이의 커다란 눈을 끝내 보지 못하고 이내 고개만 끄덕였다. 갑자기 내가 왜 이러는건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이름없음 2023/02/23 08:45:50 ID : vdA7s0062JU
하랑이의 향수 냄새가 너무 진했던 것일까. 머리가 아프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이상한 기분을 뒤로한 채 야자는 시작되었고, 나는 도저히 풀고 있는 문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랑이가 문제집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넘길때마다 하랑이의 석류 향수냄새가 살짝살짝 느껴졌다. 이상했다. 오늘따라 환히 웃는 하랑이의 보조개는 너무나도 깊었다.
이름없음 2023/02/23 08:45:59 ID : vdA7s0062JU
“나 먼저 갈게.” 나는 하랑이가 대답할 틈도 없이 교실을 빠져나왔다. 운동화로 갈아신을 새도 없이 달렸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 도착한 곳은 집 앞 놀이터였고, 사람들은 모두 집에 가버렸는지, 고요했다. 여유롭게 부는 바람과 달리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있었고, 숨은 턱 밑 까지 차올랐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눈치없이 내 눈은 눈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이름없음 2023/02/23 08:46:06 ID : vdA7s0062JU
이게 맞는걸까. 지금 내가 하랑이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걸까. 혼란스럽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책가방을 들고 좁고 낡은 계단을 걸어올라갔다. 한 칸 두 칸, 한 층 두 층씩 걸어올라갈 때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때마다, 하랑이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 때마다, 해맑게 웃고 있는 하랑이의 얼굴이 떠올라 괴로웠다.
이름없음 2023/02/23 08:47:37 ID : vdA7s0062JU
“다녀왔습니다.” 힘든 발걸음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니,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까지 다 같이 거실에 모여있었다. 소파에 기대고 앉아 빨래 개는 엄마, 소파에 누워 사과를 먹으며 뉴스를 보고 있는 아빠와 동생.
이름없음 2023/02/23 08:47:47 ID : vdA7s0062JU
“누나 또 야자 쨌지? 이제 고3인데 어쩌려고 저러는거야…” “야 유준혁, 너는 공부 안하냐? 지금 시간이 몇신데 아직까지 놀고 있어?” “유주영! 너 오자마자 동생한테 시비걸지말고 들어가서 공부나 해. 그리고 준혁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야자를 왜 자꾸 빼. 이제 엄마 선생님한테 거짓말도 안해줄거야.” “주영 엄마, 알아서 하겠지. 좀 냅둬, 애도 아니고.”
이름없음 2023/02/23 08:47:56 ID : vdA7s0062JU
또 시작이다.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 시끄럽고 짜증나지만 지극히 평범하고 따뜻한 저녁시간.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어둡고 서늘한 방에는 온전히 나 밖에 없었다. 사회와의 단절. 아마 나는 절대 이 평범한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가 될 수 없겠지? 하랑이를 볼때마다 내가 느끼는 이 설렘과 감정을 엄마가 알아차린다면 더더욱.
이름없음 2023/02/23 08:48:05 ID : vdA7s0062JU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알면 뭐라고 할까. 아마 손가락질하겠지. 멸시하겠지. 그럼 내가 지금 느끼면 안되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가.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하랑이는 이런 내 마음을 알까. 혹시, 정말 혹시나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면? 그때는 내 마음을 전해도 되는걸까.
이름없음 2023/02/23 08:48:15 ID : vdA7s0062JU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그 아래는 각자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다 가로등 아래 벤치에 앉아있는 노부부. 가방을 발 옆에 내려놓고 옆에 앉아 수줍은 듯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커플 한 쌍. 가로등 아래 나방을 피해 뛰어다니는 어린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엄마 아빠.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상상했다. 해가 저 멀리 자취를 감춘 깊은 밤에 하랑이와 걱정없이, 고민없이, 사람 하나 없는 강변을 걷는 모습을.
이름없음 2023/02/23 09:28:42 ID : vdA7s0062JU
이런 상상은 그저 부질없는 꿈에 불과하기에,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랑이에 대한 감정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고민과 걱정들은 나의 숨통을 조여 오기에 내일이 밝는 것이 너무나도 싫지만, 하랑이를 빨리 보고싶은 마음에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나는 나의 내면과 갈등했다.
이름없음 2023/02/23 09:28:51 ID : vdA7s0062JU
그날 밤, 나는 꿈을 꿨다. 다를 게 하나 없는 학교 점심시간이였다. 운동장에는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아래 축구를 하는 학생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학생들로 가득하였고, 나와 하랑이도 그 중 하나였다. 우리는 저 멀리 축구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손에는 유치하기 그지없는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고, 반대 손에는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름없음 2023/02/23 09:29:18 ID : vdA7s0062JU
전기밥솥 취사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되려, 더 눈을 질끈 감고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꿈이 흩어지고 깨지지 않도록. 손에 스쳤던 그 촉감을 잃지 않도록.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졌고 나의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 너무나도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름없음 2023/02/23 09:29:27 ID : vdA7s0062JU
학교에 가는 내내 하랑이 얼굴을 어떻게 볼지가 걱정이였다. 얼굴이 또 제멋대로 붉어지지 않을까, 당황한 기색 없이 재치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면 어떡할까, 하랑이가 내게 말을 안 걸어주면 어떡할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내 진심을 말해버리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와중, 나는 학교에 도착했다.
이름없음 2023/02/23 09:30:36 ID : vdA7s0062JU
“하랑아 안녕.” 어제 밤의 꿈이 자꾸 생각나 차마 하랑이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나는 바닥을 응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인사했다. “어 유주영 왔네 안녕! 너 어제 왜 야자 중간에 바로 갔어?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이름없음 2023/02/23 10:22:36 ID : vdA7s0062JU
이제와서는 형식적인 걱정과 아침인사에도 설레고 기대하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사실 하랑이에게 내 마음을 전해볼까, 내 감정을 표현해볼까 생각했던 게 한두번이 아니였다. 하지만 매번 내 자신에게 다짐하고 용기를 낼때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혀 넘어졌었다. 어쩌면 그냥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내 핑계이자 변명.
이름없음 2023/02/23 10:22:42 ID : vdA7s0062JU
수 많았던 기회 중 굳이 하나를 뽑자면 학교끝나고 항상 가던 우리의 단골 떡볶이 집에서 그날따라 주문하고 있는 하랑이가 달라보였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긴 머리와 멀리 있는데도 살짝살짝 나는 석류 향수냄새, 주인아주머니께 살갑게 웃으면서 인사할 때 살짝살짝 들어가는 보조개. 별안간 나의 가슴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없음 2023/02/23 10:23:15 ID : vdA7s0062JU
“하랑아.” 미처 듣지 못한 건지, 매운 떡볶이가 너무 맛있어서 정신이 팔렸던 건지 하랑이는 날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난 무척이나 머쓱한 맘을 부여잡고 이번에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불렀다. “하랑아.”
이름없음 2023/02/23 11:04:29 ID : vdA7s0062JU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용기내어 입을 열었지만 야속하게도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랑이의 입은 떡볶이 국물을 찍은 튀김을 가득 물고 있었고 그 깊고도 큰 눈은 동그랗게 떠져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으며, 내 몸은 두려움과 긴장이 휘감고 있었다.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나를 멀리할까 봐, 어색해질까 봐. 불쾌함을 드러내면? 아니면, 날 경멸하게 되면 어떡해야 하나. 난 결국 이러한 생각의 바다에 잠겨 가라앉고 있었고, 물은 한없이 차 오르며 그 물은 날 더더욱 작고 힘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렇게 나의 고백 아닌 고백은 끝이 났었다.
이름없음 2023/02/23 11:04:41 ID : vdA7s0062JU
야자를 마치고 집에 가자 복잡미묘한 나의 마음과 조금만 건드려도 펑 하고 터져버릴듯한 머리와 달리 우리집 거실은 평온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는 소파에 앉아 빨래를 개며 저녁 연속극을 보는 엄마가 있었다.
이름없음 2023/02/23 11:04:53 ID : vdA7s0062JU
“우리 딸, 무슨 일 있었니? 왜 이렇게 오늘따라 힘이 없어보여?” 따뜻한 엄마의 걱정에 내 목소리는 미친듯이 떨리기 시작했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난 내 눈가에 차오르던 눈물을 간신히 삼켜내며 아무렇지 않게 남의 이야기인듯 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름없음 2023/02/23 11:05:02 ID : vdA7s0062JU
“엄마. 우리 학년에 나 아는 애가 남자말고 여자 좋아한대.” 떨리는 목소리를 힘겹게 감추며 겨우겨우 내뱉은 내 말에 대한 대답과 일말의 희망은, 마치 모래사장 위에 신발 쓸려가듯 거친 파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름없음 2023/02/23 11:05:09 ID : vdA7s0062JU
“어머 그런 애가 있어? 누구야? 너네 반이야? 선생님한테 반 바꿔달라고 할까? 걔가 너 좋아하는 건 아니지? 남사스러워라. 걔네 부모님은 아시니? 부끄러워서 학교는 어떻게 다닌데? 딸, 걱정 마. 어차피 아빠 직장 때문에 곧 전학 가야됐어. 어우 말세야 진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입이 더는 떨어지지 않았고 흐르는 눈물을 감추어보려 고개를 숙였지만, 내 양말은 금새 축축해졌다.
이름없음 2023/02/23 11:13:51 ID : vdA7s0062JU
안되는거였구나. 좋아하면 안되는거였구나. 문득 하랑이가 미워졌다. 향수 냄새는 왜 그렇게 좋아서. 보조개 생기게 살살 치는 눈웃음은 또 왜 그렇게 이뻐서. 떡볶이는 또 왜 그렇게 좋아해서.
이름없음 2023/02/23 11:14:00 ID : vdA7s0062JU
다음 날 등굣길엔 비가 내렸다. 꿈 따위, 꾸지 않았다. 어쩌면 하늘도 나의 이 무너진 세상을 슬퍼하는 것만 같았다. 뭐, 물론 그냥 내리는 비일 뿐이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석해서 나의 심정을 위로하고 싶었다. 실수로 버스에서 우산을 두고 내렸다. 오늘따라 등굣길은 더 멀게 느껴졌고, 오르막길은 더 가파르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난 파블로프의 개처럼 향수냄새를 맡자마자 습관적으로 멈춰섰다. 그리고 내리는 비 사이로 희미하게 들리는 하랑이의 목소리는 내 맘을 정말이지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름없음 2023/02/23 11:14:09 ID : vdA7s0062JU
“주영아 왜 비를 그냥 맞고있어! 그러다 감기걸려! 나랑 우산쓰고 가자!” 자연스럽게 내 팔 사이로 들어오는 하랑이의 팔짱을 난 거칠게 밀어냈다. “뭐야 갑자기 왜그래?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이름없음 2023/02/23 11:14:17 ID : vdA7s0062JU
내가 거칠게 밀어냈는데도 화난 기색 없이 놀란 토끼눈을 한 하랑이를 보자 가슴이 먹먹해지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흐르는 눈물은 내리는 비가 가려주었다. 그리고 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이름없음 2023/02/23 11:14:27 ID : vdA7s0062JU
“너는 왜. 너는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야. 네가 뭔데 왜 나를 헷갈리게 하는거야.”’ 당황하는 하랑이를 꼭 껴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 그런 마음과 달리,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향수는 왜 이렇게 많이 뿌려, 머리아프게. 그리고 넌 속도 없냐. 뭘 맨날 쪼개고 있어, 재수없게”
이름없음 2023/02/23 11:14:36 ID : vdA7s0062JU
좋아한단 말 대신,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말 대신, 나는 이런 몹쓸 말을 하고 말았고, 주워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름없음 2023/02/23 11:14:44 ID : vdA7s0062JU
“뭐? 진심이야?” 하랑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되물었다.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목이 메여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름없음 2023/02/23 11:15:13 ID : vdA7s0062JU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하랑이의 얼굴을 마주보고싶었다. 사실 그게 마지막이 아니길 간절히 빌고있었다. 하지만 난 하랑이가 나의 마지막 모습을 우는 모습으로 기억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랑이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나는 그대로 집으로 달려갔다. 절대 좋은 기억이 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난 그렇게 빌었다.
이름없음 2023/02/23 11:15:44 ID : vdA7s0062JU
하랑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멈추어서 뒤돌아보면 더 이상 하랑이를 좋아하지 않겠다는, 멀리하겠다는 나의 다짐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랑이와 계속 친구로라도 남고 싶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이였던 것일까. 나에게는 과분한 감정이였던 것일까.
이름없음 2023/02/23 12:52:25 ID : vdA7s0062JU
하랑이를 향한 그 설레었던, 또 뜨거웠던 그 감정을 알아차렸을때처럼, 하랑이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 용기내었을 때처럼,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세상이 내 주변을 도는 듯 했고, 나혼자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 했다. 이것이 하랑이와 나의 마지막 기억이자 이별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아, 이제 정말 끝이구나. 다시는, 절대 다시는 하랑이를 볼 수 없겠구나.
이름없음 2023/02/23 12:52:32 ID : vdA7s0062JU
차라리 이게 잘된거야, 차라리 이게 잘 된거라는 말만 수없이 되뇌이며 얼굴에는 땀, 비, 그리고 눈물이 뒤섞여 흘렀다. 한 때 타오르던 불꽃은 작은 불씨가 되었다가 완전히 꺼져버렸다. 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표현 못해. 이제 하랑이와의 꼬이고도 꼬인 관계를 풀어내기엔 너무 늦은 것 같다. 꿈이 끝났다.
이름없음 2023/02/23 13:22:15 ID : vdA7s0062JU
겨울 冬 “엄마 나 잠깐만 밖에 좀 나갔다 올게 알았지?” “....” 요즘은 고등학교 졸업식도 다가오고 수능도 끝나서 그런지 엄마도 전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원래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내 휴대폰은 조용하다.
이름없음 2023/02/23 13:22:25 ID : vdA7s0062JU
“아 왜 또 눈이 오고 그러냐..” 수능이 끝난 기쁨에 어디든 나가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눈은 멈출 줄 몰랐다. 하랑이는 이제 나한테 먼저 문자하지도 전화하지도 않았다. 관심을 못받는것 같아 괜히 애처럼 심술은 났지만 솔직히 수능이라는 핑계가 있었긴 해도 지난 가을 내내 하랑이를 먼저 무시한건 난데 뭘 바라겠냐고.
이름없음 2023/02/23 13:22:34 ID : vdA7s0062JU
지난 가을 내내 난 하랑이 때문에 어지러워진 머리를 책상에 내리치면서 미친 듯이 공부만 해왔었다. 그러면 하랑이를 피했던 그 거짓 이유가 진짜가 될 것만 같아서. 그러면 ‘너를 좋아해서 그랬어 혼란스러워서 그랬어’ 따위의 진실은 그냥 없는 일이 될 것 같아서 그랬다. 수능만 해치우면 학교는 사실상 다 끝난 거니까 머리도 정리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름없음 2023/02/23 14:06:38 ID : vdA7s0062JU
내 인생의 마지막 학기가 끝나가면서 나는 하랑이와의 관계도 정말 이대로 없어져 버리는 것인지, 지금쯤 걔는 뭘 하고 있을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그 석류향 향수는 아직도 뿌리고 다니는지가 궁금했다. 고민이라고 했던 피부에 뾰루지는 없어졌는지 그렇게 성공할거라며 큰소리치던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은 진짜 성공 했는지가 궁금했다. 듣고 싶은 얘기도 하고 싶은 얘기도 너무 많아서 잠시동안이라도 그렇게 차갑게 하랑이를 대해야 했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이름없음 2023/02/23 14:08:11 ID : vdA7s0062JU
카페에 앉아서 혼자 음료수라도 먹을까 했지만 그날 먹은 초코라떼는 전혀 달지 않았다. 오랜만에 들른 소품가게에도 눈에 들어오는건 없었다. 온 동네의 가게들이 다 수험생 할인을 해주면서 나를 반기는데 나는 왜 이리 심란하지?
이름없음 2023/02/23 14:38:17 ID : vdA7s0062JU
“유주영! 뭐해, 물건 앞에서 멍때리고. 돈 없어서 못사? 이거 봐, 새로 들어온 피규어. 일본에서 직수입 한거다! 진짜 귀엽지 요즘 잘팔리더라고 이렇게 쇼윈도쪽에 진열해 놓으니까…” 내가 즐겨가던 소품가게 언니는 내가 듣든 말든 이번에 새로 들여왔다는 호빵맨 피규어 이야기만 계속 했지만 내 눈에는 옆에 쌓여 있는 예쁜 편지지만 들어왔다.
이름없음 2023/02/23 22:45:56 ID : xSJU1xzU2Mi
‘언니 이게 뭐에요?’ 이것도 파는 거야?’ ‘한세트에 2000원!’ ‘살게.'
이름없음 2023/02/23 22:46:06 ID : xSJU1xzU2Mi
편지지를 보자마자 하랑이 생각이 났다. 얼굴보고 얘기 못할거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차라리 편지라도 보내 보는게 나았다. 난 딱히 뭐 글쓰기에 소질은 없지만…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털어낸다는 마음으로 쓰면 읽어줄만하지 않을까.
이름없음 2023/02/23 22:46:15 ID : xSJU1xzU2Mi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집에 오자마자 외투고 장갑이고 다 벗어제쳐 놓고 허겁지겁 편지지 포장부터 뜯어 책상에 앉았다. 잘 써지는 펜을 들고 스탠드를 켜고 그렇게 나는 조심스럽게 한글자 한글자 쓰기 시작했다.
이름없음 2023/02/23 22:46:45 ID : xSJU1xzU2Mi
하랑이에게 안녕, 오랜만이야 하랑아. 보고싶었어. 너한테 설명해야 할 게 많은것 알아. 내가 싫어졌어도 이 편지는 꼭 읽어주라. 지난 2학기 내내 내멋대로 퉁명스럽게 대하고 밀어내서 미안해. 내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그랬어. 너를 좋아했어. 사실 지금도 좋아해. 난 처음에 내가 처음 전학 왔을때 불안했어. 다른 친구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걔네들한테 내 깊이 숨겨져 있는 속마음까지 털어놓는게 너무 두려워서. 너를 만나고 너랑 친해진 다음엔 기뻤어. 마치 내가 정상적인 애들처럼 정상적인 친구관계를 가지게 된 것 같아서. 그치만 시간이 지날수록 왜 난 너에게, 하필 수많은 사람들 중에 너에게 마음이 생긴걸까. 하랑아, 사실 나 너무 무서웠어. 나한테 하나밖에 없는 친구마저 잃어버리게 될까 봐. 난 널 정말 많이 좋아하지만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고 싶어 욕심낸다면 가족들과 남들의 너의 눈초리가 걱정됐어. 널 정말 많이 좋아하지만, 내 모든걸 걸고 내 진짜 속마음을 너에게 보여줄 용기가 나지 않았어. 제대로 설명도 안하고 무시해 버려서 미안해. 용서해 줘. 네가 싫어서, 귀찮아서, 속상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야. 널 처음 만났을땐 간질간질했고 너랑 떡볶이를 먹을 때는 바보처럼 설렜어. 단풍이 떨어질 때 즈음에는 나, 더이상 못 견디겠더라. 얼마전까지 고민했어. 내가 지금와서 너한테 감정이 있었다고 밝히면 내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많은 추억들이 전부 불순하고 더러워 보일 것 같아서. 난 너한테만큼은 오해받고 싶지 않아. 그 무엇보다 나에게 넌 가장 소중한 친구야.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너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 편지를 읽고 나와 마음이 같다면 답장해줘. 널 마주할 용기를 낼게. 주영이가
이름없음 2023/02/23 22:47:12 ID : xSJU1xzU2Mi
다 쓰고 손은 욱신거려왔지만 심장의 쿵쾅댐에 느끼지 못했다. 다시 읽어보기조차 부끄러워 최대한 빨리 접고 편지지와 같이 들어있었던 작은 봉투에 욱여넣었다.
이름없음 2023/02/23 22:47:20 ID : xSJU1xzU2Mi
‘스티커는 남사스러워.’ 난 그냥 풀로 편지봉투를 붙이는 쪽을 택했다. 수능이 끝난 2월 학교에 나오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지만 난 그날 아침 여섯시 반에 눈이 자동으로 떠졌다. 내내 멍때리며 등교해 텅 빈 교실로 들어갔다.
이름없음 2023/02/23 22:47:32 ID : xSJU1xzU2Mi
“강하랑...강하랑…” “여깄다.” 하랑이의 사물함을 발견하고 나는 재빨리 틈사이로 편지봉투를 떨어트렸다. 혹시나 누가 올까 하랑이라도 올까 숨이 가빠와 교실을 나가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없음 2023/02/23 22:47:45 ID : xSJU1xzU2Mi
“유주영.” “하랑아.” 그순간 내 머릿속은 완벽하고도 멍청하게 깔끔했다. 그동안 하랑이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행동을 할지 밤새 짰던 계획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우린 달려가서 서로를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몇초가 지났나, 하랑이는 내 손을 잡고 내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이름없음 2023/02/23 22:47:53 ID : xSJU1xzU2Mi
“가자.” “어디로?” “어디로든. 우리 할 얘기 많잖아.” “하랑아, 내가 편지를...” “내 사물함에 넣는 거 봤어. 난 말로 할게.” “좋아해.”
이름없음 2023/02/23 22:48:02 ID : xSJU1xzU2Mi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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