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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허물을 벗고🐜비로소🦋 (404)
나는 나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나는 이곳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나는 갇혔다.
단지 이곳에 공책과 연필이 있기에 글을 쓴다.
단지 이곳에 공책과 연필만이 있기에 글을 쓴다.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거라곤 글쓰기 밖에 없기에.
나는 갇혔다.
변함없는 사실이다.
나는 갇혔다. 왜일까.
이곳은 물도 음식도 없다.
나는 아직 살고싶다.
이곳은 물도 음식도 없다.
나를 도와줘.
--그렇게 글을 마친 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정상적인 사람이 공책에 도움을 청할 리 없지 않나.
아.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지. 참.
공책과 연필만이 있는 방에 갇힌, 기억을 잃은 사람이 정상일 리가 없지 않나. 나는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허나설령내가정상적이지않다해도내가가진이생존욕구만큼은진실이니. 정상이라 말할 수 있으니.
공책 따위에게 도움을 청해서라도 이곳을 탈출하고 싶어서. 단지 그래서 있을 리 없는 존재에게 도움을 청한다.
--갑자기 생긴 노트 위 두 문장에,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내 눈이 잘못된걸까. 아니면 내가 더 미쳐버린건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단 두 문장이였지만 정상적으로 있을 리 없는 일이지 않는가.
..그래도 그래도이게진짜라면정말이게진짜라면이글이진짜라면어딘가에서날도와줄사람이존재한다면.
그런 희망에 나는 손을 덜덜 떨며 연필을 잡는다.
--..너는 누구지?
*맞습니다.
--나를? 어떻게? 왜? 그는 혹은 그들은 내가 누군지 알고 나를 도와주려는 건가. 나조차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데 무슨 목적으로 왜 날 도와주려는건가.
하지만 내가 이 존재하는지 내 상상속에 인물인지 모를 자의 도움없이 이곳을 탈출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도움을 거절하면 나는 굶어죽고 말것이다.
...방금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구걸하더니 막상 도와준다는 누군가가 나타나니 의심하는게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습고 괘씸하기 짝이 없군. 나는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의심을 불안을 애써 무시하고 연필을 잡았다.
--당신들의 도움을 내가 받아도 된다면 받겠다. 날 도와줘.
--아마도 공책 안에 있는 것 같은 존재는 한명이 아닌 모양이다. 저들의 말을 보면 저들도 현재 상황에 대해 아는것은 없다. 그렇다면 저들이 내게 해를 끼칠 존재일 확률은 적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현재 상황에 대해 저들이 아는게 없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저들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건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이런 상황에서는 한명보다 여러명이 나을 것이다. 분명.
나는 우선 저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이 있는지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정사각형 모양에 흰 벽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이곳에 조금만 더 있다간 정신병에 걸릴것 같군. 방에는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공책과 연필, 그리고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문이 있었다. 현재 보이는 것은 이것들 뿐이다. 벽과 바닥은 유심히 조사하진 않았다. 나는 이들에게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연필을 잡았다. 그때 한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저들은 공책 속에서 내가 준 정보만을 가지고 탈출을 도와주는 건가. 아니면 내가 본 것들이 저들에게도 보이는 건가. ..나는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너희가 생각하고 도와줘라. 현재 방에는 이 공책과 연필, 문이 있다.
*그렇습니다. 이곳에 적힌 모든 글은 그의 공책에도 적히게 됩니다. 그렇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탈출 하는 것이 매우 급하기에 여러분의 말을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입니다.
필기하느라 손이 아플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네가 보고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도 보이거든. 정확히는 네가 우리의 말을 글로 읽는 것처럼, 네가 보고 있는 것들이 묘사되는 걸 글로 읽고 있는 거지만.
다만, 궁금한 게 있으면 써주는 게 좋을 것 같네. 나중에 필요할 때 네가 다시 읽을 수 있도록.
네가 모르는 것은 우리도 알 수 없으니 놓치는 것이 없도록 살펴봐주면 고맙겠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지만, 단서는 하나라도 많은 것이 좋다고 생각해.
마지막으로, 행운이 함께 하기를.
흥미롭다 스크랩!!
아 레스 다 보인다고 했나ㅋㅋㅋ 근데 탈출하느라 신경 안 쓴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그치? 다행이다
--그자의 말에 나는 연필을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무슨 말을 써야할지 생각했다. 그자의 말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본 것들은 저들에게도 보인다. 내가 보지 않은 것들은 저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들을 세세히 조사한다면 쓸데없는 것까지 조사하게 될것이다.
그것은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게 될 것이고, 나는 죽을것이다.
...저들이 내가 무엇을 조사할지 지정해준다면? 그렇다면 쓸데없는 것을 조사하게 될 확률은 적어지고 시간과 에너지 소비도 적어진다. 내가 꼭두각시가 된다면 탈출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탈출만 한다면, 탈출만 가능하다면. 내가생존할수만있다면탈출할수만있다면. 정상이 될 수만 있다면. 남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불쾌감은 사라진다.
나는 연필을 잡고 손을 움직였다. 저들은 가끔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를 적는다. 내가 알 수 없는 말을 적는다. 하지만 나를 구해준다고 했다.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들이 적는 알 수 없는 단어와 말 따위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저들을 믿는다. ...믿어야만 한다. 탈출을 위해.
--내게 내가 할 행동을 지정해라. 내 눈이 너희의 눈이 되어줄테니 너희의 뇌를 빌려줘라. 날 도와줘.
--나는 공책을 들고 일어섰다. 바지를 두어번 털며 문쪽으로 다가갔다. 동시에 공책 위에 글을 적는다. 움직이면서 적어서인지 바닥에 두고 적지 않아서인지 글씨가 완벽히 엉망인 춤을 춘다.
--주변에 뭐가 보이는지 날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너는 이미 알고있다. 나는 이미 말해줬다.
--문은 동그란 문고리를 가지고있었다. 분명 잠겨있다는 것을 앎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흔든다. 당연하게도 열리는 일은 없었다. 문 아래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식판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 아마 여기를 통해 내게 혹은 남에게 음식을 준건가. 쭈구려 앉아 손으로 구멍 바닥을 쓸어보니 먼지가 가득이였다. 적어도 내게는 음식을 준 적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손바닥을 털며 일어났다. 나는 연필을 잡았다. 저들이 나와 시각을 공유하는 것을 알았으니 굳이 글을 쓸 필요가 없음을 알지만서도. 그냥. 손을 움직였다.
--현재 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 뿐이다.
그 구멍으로 바깥을 볼 수 있을까?
벽과 바닥이 하얀데 뭔가 있다면 얼핏 보면 눈에 띄는 게 있었을텐데 굳이 유심히 보지 않아도 그런게 안 보였다는 걸로 이해하면 될까
--저들의 말에 우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구멍부터 살피기로 했다.
굳이 일어날 필요가 있었나. 쓸데없는 일을 한 자신에게 짜증을 내며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은 어두웠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구멍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둠 뿐이였다.
손과 옷을 털며 일어나 벽으로 향했다. 벽을 두드리자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릴 하는지.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나왔다.
정보를 얻기위해 계속 벽을 두드리며 발을 움직였다. 다른 벽들과 달리 텅빈 소리가 나는 벽 앞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나는 공간의 크기는 대강 내 손바닥만하다. 아쉽게도 그 공간을 열 방법은 없다.
마지막으로 바닥을 살펴보았다. 어디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방의 모든 바닥을 본다.
바닥은 타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수많은 타일 중 하나의 모서리가 깨져있었다. 그 타일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손가락만으로 타일을 들려니 꽤나 고되었다.
그래도 타일과 나와의 싸움에서 승자는 나였다. 나는 인간이니 이기는게 당연하다.
타일 안에는 책이 있었다. 책등에는 L이라고 적혀있는, 자물쇠가 걸린 이상한 책이였다. 책 표지에는 일반적인 책들과 달리 글이 적혀있었다.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하지 않기에 이상한 존재. ... 비밀번호는 알파벳으로 되어있다.
자물쇠 비밀번호 갯수는 마침 3개. 과연 이게 맞을까. 아니 맞을것이다. 아니더라도 나는 그들을 의심해선 안된다.
나는 다이얼을 돌려 저들이 알려준 알파벳으로 맞추었다. D.. O.. G.... 아. 풀렸다.
책에서 자물쇠가 떨어진다. 나는 그것을 그저 바라본다.
쇠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는 그것을 그저 바라본다.
저들이 맞았다. 저들이 옳았다.
나는 술렁이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자물쇠를 주웠다. 그것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시 공책을 꺼내들었다. 연필이 글씨를 적어나간다.
--자물쇠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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