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스레드
북마크
이름없음 2020/02/29 01:52:19 ID : s1g7y6jdA3W
나는 x3세의(앞자리는 프라이버시) 여행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저씨다. 여행금지국만 아니면 웬만한 곳은 거의 다 가봤지. 유명한 관광지는 오히려 꺼리는 편이야. 뭔가, 사람들의 손때가 타지 않은 순수하고 투박한 곳이 내 기대감을 높여주기 때문이기에.. 그래서 자유 여행으로 오지 마을이나 가파른 산지 여러곳을 다녀보기도 했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내가 놀러다닌 곳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이어 붙인 거다. 짧고 싱거운 에피소드는 과감하게 빼고, 엑기스만 담고 싶었는데.. 사실 그 짜잘한 에피들이 난 더 재밌다고 생각해서 보따리에 주섬주섬 담아 와봤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한다.
이름없음 2020/02/29 01:52:55 ID : yGtwL9irthb
ㅂㄱㅇㅇ
이름없음 2020/02/29 01:53:57 ID : 65e5grBs8i7
우와 보고이써!
이름없음 2020/02/29 01:56:28 ID : s1g7y6jdA3W
첫번째 이야기는 내가 술자리에서 가장 많이 푸는 썰인데, 그걸 해줘야겠다. 백색 천지 이야기. 백색 천지 이야기는 러시아 북부의 무르만스크라는 도시에서 직선으로만 약 125km 정도 떨어져있는 한 산골의 이야기야.
이름없음 2020/02/29 01:59:27 ID : U3SNs1cnxCn
우와아 보고있어!!
이름없음 2020/02/29 02:00:20 ID : s1g7y6jdA3W
오오 보고있다니 다행이다. 힘내서 써볼게 1장, 백색 천지 이야기 무르만스크에 도착한 나는 예약해둔 호텔에 체크인하고 조금 좁지만 안락한 방에 들어갔다. 무뚝뚝한 호텔 직원이 대충 방 구조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이쪽지역 사람들은 날씨가 추워서인지 도통 웃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갑갑하게 옥죄는 묵직한 방한코트를 벗어던졌다. 확실히 추운 동네이다보니, 두꺼운 코트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히터가 빠방했던 덕분에, 방에서는 코트를 벗고 조금이나마 몸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름없음 2020/02/29 02:01:01 ID : MrzeZjzhAqq
나도 보고있어!
이름없음 2020/02/29 02:04:00 ID : s1g7y6jdA3W
반갑다. 내 이야기가 재밌었으면 좋겠네 호텔 방에는 그닥 즐길만한 무언가는 없었다. 꼬리꼬리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티 포트, 오래됐는지 누르스름한 빛깔을 띄는 냉장고, 재미없는 러시아 가요채널들, 딱히 내가 즐길만한 무언가는 없었다. 애초에, 무르만스크에는 즐기러 온 것이 아니니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내가 무르만스크에 온 이유. 무르만스크에서 현지인이 운전하는 배를 타고 동쪽으로 꼬박 가다보면, 침엽수 반 눈 반의 기막한 경치를 자랑하는 산골마을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으니까. 나는 그곳을 즐기러 갈 예정이었다.
이름없음 2020/02/29 02:08:49 ID : s1g7y6jdA3W
보는 사람이 엄청 많네??? 새벽이라 그닥 없을 줄 알았더니.. 재밌게 봐주시오 나는 곧바로 서랍 위에 달랑 놓인 빨간 구식 전화기의 수화기를 덥썩 집어들었다. 차르륵거리는 올드한 느낌의 다이얼을 돌리자, 서너번의 뚜- 하는 대기음이 들려왔다. 대기음이 끝나고, 매우 어눌한 러시아어를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라로프입니다. 용건을 말씀해주십시오." "이반 안드레예비치 말라로프씨가 맞습니까?" "맞는데요." "소피아(내 러시아인 친구)의 소개를 연락드립니다." "아~ 사무엘!(내 세례명인데, 그냥 러시아 이름으로 씀) 이따 16시에 뵙는게 틀림없지요?" "물론입니다." "그때 뵙지요. 끊습니다." 뚝. 러시아인들의 통화는 대체로 간결하다. 웬만해선 2분을 넘기지 않는게 보통.
이름없음 2020/02/29 02:12:44 ID : s1g7y6jdA3W
수화기를 내려놓자 철커덩하는 쇳소리가 들렸다. 나는 낡아빠지도 못해 마치 30년 쯤 과거로 온 것만 같은 감성에 웃음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지금은 오후 3시,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이 남았지만, 시 외곽에 위치한 이 호텔에서 미리 일러둔 약속 장소까지 가려면 오히려 한 시간이 촉박했다. 거리상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눈이 쌓일대로 쌓이고 도로 상태도 완전 젬병인 탓에 대중교통은 커녕 자가용들도 발이 묶이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 갈 때는 필요없을 몇가지 짐들을 따로 빼 캐리어에 옮겨 담았다. 등산 가방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거기서 거기였다. 다시 묵직하고 갑갑한 코트를 둘러입었다. 마치 중세 기사가 철갑을 두르듯, 이것은 중무장과 크게 다를게 없었다. 나는 가방까지 들쳐메고, 바닥을 쓸고 있는 아까 그 무뚝뚝한 직원을 지나쳐 호텔 밖으로 나왔다.
이름없음 2020/02/29 02:18:18 ID : s1g7y6jdA3W
다행히 도로는 생각보다 한적했다. 대낮이라 차가 그닥 많이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후 세시, 무르만스크의 하늘은 놀랄만큼 우중충했다. 껌껌하다고는 할 수 없고,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서 우중충했다. 택시를 불러서 타고 시내로 나가면서, 똑같이 생긴 아파트들이 마치 도미노처럼 군데군데 지어진 모습들을 보았다. 비록 이제는 민주주의 국가라지만, 옛 사회주의 국가의 유물은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의 일상속에 여전히 녹아있었다. 40분이 안 돼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약속장소는 항구 인접지역의 작은 모터보트 회사. 그곳에서 말라로프씨를 만나볼 수 있었다. 2m 가까이 되는 장신이지만 체격이 그다지 다부진 편은 아니었고, 새하얀 피부에 난 갈색 콧수염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나의 눈을 바라보는 그의 벽안은 무르만스크의 깊은 바다와 같이 새파랬다.
이름없음 2020/02/29 02:23:04 ID : s1g7y6jdA3W
"반갑습니다, 말라로프씨." "소피아는 잘 지내나요? 언제 한 번 내려오라고 하긴 했는데.." "별 탈 없이 지내요. 말라로프씨한테 안부 전해달라더군요." 초면에 주고받는 인삿말들. 그닥 깊은 의미는 지니지 않았다. 말라로프씨는 내 러시아 친구 소피아와 소꿉친구로, 무르만스크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나와 동갑내기인 그는 내가 긴장을 풀 수 있게 따듯한 홍차 한 잔을 내오며 친절하게 말을 계속 걸어줬다. "게임 좋아하십니까?" "게임 좋죠. 이를테면 리x 오브 레x드, 오x워치, csgx.." "csgx! 저도 즐겨합니다. 아직 출발까지 시간도 남았는데 같이 한 판.." 그가 사무실에 놓여있는 컴퓨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나는 일면식도 없던 러시아 남자와 함께 나란히 앉아 게임을 하게 되었다.
이름없음 2020/02/29 02:25:09 ID : s1g7y6jdA3W
내가 게임 실력이 좋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뇌리를 마구 때렸다. 나의 트롤링으로 인해 무려 6연패를 당하자, 말라로프씨는 죽상이 되어 한숨만 내쉬었다. "말라로프씨는 잘하시는데 제가 못하네요.."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절대 내가 잘한다고는 안해줬다. 그는 시계를 힐끔 보더니, 컴퓨터를 끄고 벽에 걸린 코트들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나도 출발이 가까워왔음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짐들을 하나둘씩 챙겼다.
이름없음 2020/02/29 02:29:31 ID : s1g7y6jdA3W
어느새 저녁 다섯시, 공기는 차라리 마시지 않는 편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차가웠다. 폐에 드라이아이스를 집어넣는 느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기상 백야였기때문에 해가 진 것은 아니었지만, 구름이 해를 완전히 범하는 바람에 천지에 어둠이 깔렸다. 그것도 역시 진풍경이었지만, 그런 사진은 인터넷이 차고 넘치기 때문에 딱히 찍지는 않았다. 무르만스크에는 러시아 해군의 군항이 있었다. 그곳에는 잠수함이라던지, 대형 군함들이 오갔으므로 내가 이용할 10인승 보트따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 우리는 현지인들이 애용하는 소형 간이 항구로 갔다. 그곳에서 보트에 시동을 걸던 말라로프씨는, 이제 다 됐다며 내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이름없음 2020/02/29 02:33:40 ID : s1g7y6jdA3W
보트는 차가운 바다를 가르고 유유히 동쪽으로 향했다. 운전중인 말라로프씨의 옆에 앉아 보온병에 담긴 뜨끈한 홍차를 홀짝이며 북극의 하늘을 감상하고 있던 나에게 그가 말을 걸어왔다. "사무엘, 거긴 왜 가려는 거에요? 볼 거리도 없는 촌구석인데.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거요?" 어느새 나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한 말라로프씨는 짓굿게 웃으며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글쎄요, 숨겨둔 애인은 없지만, 제가 좋아하는 건 거기에 있지요." "그게 뭔데요?" "비밀입니다." 말라로프씨는 궁금하다며 계속 알려달라고 나를 보챘다. 그치만 나는 굳이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인적드문 시골마을만 골라서 여행다닌다고 하면, 별나다는 소리를 들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름없음 2020/02/29 02:34:04 ID : 5bxBfapO2tu
헉 , 나도 여행 무지 좋아하는데 ,,, 이런 이야기 좋다 !! 그리고 가독성 되게 좋다 !!! 계속 들려주길 바라 !!
이름없음 2020/02/29 02:38:59 ID : s1g7y6jdA3W
글은 많이 안 써봤는데, 고마워. 레스 보고 힘내서 쓰는중 ^0^ 말라로프씨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말이 적어졌다. 나도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파도와 부딪히며 들썩이는 보트에서 문득 소피아가 한 얘기가 떠올랐다. 사실 소피아는 내가 무르만스크를 여행한다고 할 때, 나를 만류했었다. "거긴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중간중간 군사 수역이 있는데다가, 보트로 다닐만큼 만만한 거리도 아니라고. 심지어 가는 길에 군사기지가 있어서 잘못하면 너나 말라로프나 체포될 수 있어." "음, 소피아. 에베레스트에서는 매년 사망자가 나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산가들이 왜 거기를 찾는지 알아?" "왜?" "그곳에 산이 있기 때문에.." "으이구 이 미친놈아.." 목침으로는 그 때 처음 맞아봤다. 학창시절에 수학여행가서 목침으로 배게싸움을 하려다 생각 외로 너무 단단해서 포기했는데.. 역시 안 하는게 옳은 선택이었다. 맞은 곳에 피멍이 들었다.
이름없음 2020/02/29 02:41:37 ID : s1g7y6jdA3W
그녀의 말대로 그곳에는 중간중간 군사수역이 있었다. 말라로프씨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치켜올린 선글라스를 푹 내려쓰고 내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위험한 곳입니다. 전자기기는 전부 끄세요." "앗, 알겠습니다." 말라로프씨의 지시대로 나는 모든 전자장비의 전원을 껐다. 전자장비래봐야 핸드폰밖에 없었지만. 군사수역이라는 네 글자가 나를 그리도 긴장시킬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어느새 털이 곤두서고 모공이 닫혀버린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라로프씨는 생각보다 여유로워보였다.
이름없음 2020/02/29 02:41:49 ID : 5bxBfapO2tu
늦은 시간이니 너무 무리하지 말구 ! 꾸준히 볼게 :)
이름없음 2020/02/29 02:43:42 ID : s1g7y6jdA3W
"긴장되지 않나요??" 왼팔을 받침대에 걸치고 오른손으로 핸들을 쥐고 있는 말라로프씨에게 물었다. 말라로프씨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긴장될게 뭐 있나요?" "그래도 군사수역이잖아요! 이거 걸리면 감옥가는거 아니에요?" "군사수역이기는 한데, 지나다닐 수는 있어요. 정기적으로 배가 다니거든요." "아.." 나를 때린 소피아가 얄궂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름없음 2020/02/29 02:46:00 ID : s1g7y6jdA3W
요즘 낮밤 패턴이 바뀌는 바람에 이건 무리도 아니게 됐네 ㅋㅎㅋㅎ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사무엘." "그게 뭔데요?" "그 배는 정기선인데, 우리는 아니잖소." 소피아가 말한대로, 여기에 잠수함이 돌아다닌다면, 우리는 어뢰맞고 죽을 위기였다. 순간 온몸의 털이 전부 빠지는 듯한 따가움이 밀려왔다. 내가 긴장이 역력한 모습을 보이자, 말라로프씨는 싱긋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요. 우리는 허가를 받았으니까요." 말라로프씨는 사람 놀리는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름없음 2020/02/29 02:52:46 ID : s1g7y6jdA3W
보트는 계속해서 달렸다. 단 한 번의 멈춤 없이 쭉 내달리는데도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고, 온통 수평선 뿐이었다. 약 세 시간을 그렇게 항해하니까 어딘가 고립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계속해서 움직이고는 있는데 온통 푸르다 못 해 새까만 바다만이 눈에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꽤 끔찍할 것이다. 다행히 옆에는 유쾌한 말라로프씨가 있었다. 배를 탄지 약 여섯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목적지의 끄트머리가 수평선 위로 조금씩 부상하고 있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말라로프씨도 감격에 차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왔네! 뻐근해 죽겠구만.." "저 내려주시면 다시 무르만스크로 돌아가시는건가요?" "그럼 당신은 누가 데려온답니까? 저도 거기 있어야지요."
이름없음 2020/02/29 02:56:37 ID : s1g7y6jdA3W
소피아가 이전에 일러준대로, 말라로프씨는 책임감있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맡은일은 끝까지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이 어딘가 멋있기도 했다. 길고 긴 항해 끝에 우리는 마을 X(지명을 공개하진 않겠다.)에 도착했다. 통나무로 지은듯한 오두막집 몇채가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길거리에는 눈이 수북히 쌓여있었고, 그것을 딱히 치우지도 않는 것 같았다. 어디가 길바닥이고 어디가 맨땅인지 구분이 안 될정도로 높게 쌓인 눈을 허벅지 힘으로 헤치며, 마을 X에 사는 마리야를 찾아갔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무르만스크와는 다르게 확실히 이곳은 쨍쨍했다. 그렇다고 따듯하다는 건 아니고, 하늘과 땅이 모두 새하얬다.
이름없음 2020/02/29 02:59:19 ID : V9jAlA7s09y
킁킁,,,,레전드 냄새,,,,,,발자국 콩 추천 콩
이름없음 2020/02/29 02:59:38 ID : 2pXwLhumre5
꼭 4분을 텀으로 올라오네! 신기하다 그래서 아까부터 다른것도 보다 거의 4분마다 들어와서 확인중ㅎㅅㅎ
이름없음 2020/02/29 03:01:18 ID : s1g7y6jdA3W
마리야씨는 자기 집 대문 앞에서 작은 기름등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야씨는 말라로프씨를 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깡총깡총 뛰는 모습이 어딘가 귀여웠다. 물결같이 자연스럽게 구불거리는 긴 금발이 인상적인 마리야씨는 문을 직접 열어주며 따듯한 집 안에 우리를 들였다. 촌동네라고 생각해서 벽난로와 화로를 먼저 생각했건만, 내 로망은 산산히 쪼개졌다. "삼성"에서 만든 62인치 티비부터해서 너무나 현대적인 흑-백 인테리어, 역시 삼성에서 만든 히터.. 옛스러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름없음 2020/02/29 03:04:55 ID : s1g7y6jdA3W
콩! 콩! 뭔가 귀엽다..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글 쓰는 속도가 웬만하면 그렇게 맞춰지네?? 아닐 때도 있긴 해. 무튼 봐줘서 고맙다. 마리야씨는 방금 우린 홍차와 거기에 타먹을 딸기잼을 내왔다. 아늑한 촌의 오두막을 기대했던 나였지만, 그래도 따듯한 차 한 잔에 몸이 녹아내리니 그런 생각은 씻은듯이 없어졌다. 마리야씨는 말라로프씨의 단짝으로, 원래 소피아-말라로프-마리야 이렇게 무르만스크에서 같이 지냈다고한다. 그러나 소피아가 제일 먼저 대학문제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거처를 옮기고, 마리야씨도 아픈 할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말라로프씨는 내 존재는 까맣게 잊은 채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웬만하면 알아듣겠지만, 말이 너무 빨라서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름없음 2020/02/29 03:09:03 ID : s1g7y6jdA3W
말을 마구 쏟아내던 마리야씨는 어느새 달관한채로 조용히 차를 홀짝이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의식적으로 말을 천천히 하기 시작했다. 마리야씨는 인정많고 배려심이 많은 편이였다. 창 밖은 여전히 밝았다. 밤이 바뀌지 않으니, 어떻게 잠을 자는지 궁금해진 나는 마리야에게 물었다. "근데, 이렇게 밝은데 잠은 어떻게 자나요?" "?? 커텐을 치면 되죠." 당연하단 듯이 대답하는 마리야씨 덕에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이름없음 2020/02/29 03:11:39 ID : 2pXwLhumre5
ㅋㅋㅋㅋㅋ당연한말이긴한데 궁금해하는 스레주도 공감돼서 웃겨
이름없음 2020/02/29 03:12:31 ID : 5bxBfapO2tu
계속 보고 있는데 ,, 난 잠이 와서 자도록 ,, 오후에 풀린 이야기 보따리를 기대할게 ! 그리고 흥미로운 얘기 들려주어 고마워 !!
이름없음 2020/02/29 03:13:21 ID : s1g7y6jdA3W
오랜 친구와의 재회는 오랜 운전으로 피곤해진 말라로프씨가 잠들면서 끝이 났다. 나는 본격적으로 마을 X에 오게 된 이유를 마리야씨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라고 미리 마리야씨에게 당부하자, 그녀는 주방에서 끓인 물을 더 가져왔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자야겠네요. 빈 방이 있나요?" "저기 게스트룸에서 주무시면 돼요." "일단 제가 짠 계획으로는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등산도 좀 하고, 여기 풍경을 좀 즐길 생각이에요." "좋네요. 모닝콜 필요한가요?" "네. 그래주시면 고맙겠네요. 그리고.." "그리고?'
이름없음 2020/02/29 03:17:32 ID : s1g7y6jdA3W
나는 이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워 머뭇거리다가 결국 막힘없이 내뱉었다. "소피아가 말하길, 마리야씨는 백색 천지에 대해 알고 계시다고.." "백색 천지 이야기요? 알죠. 저희 어릴 때 되게 유행하던 얘기였는데. 소피아가 말해주던가요?" "예. 무르만스크 살 시절에 많이들 했던 얘기라면서 자주 하더라고요. 여기, 마을 X에는 백색 천지라는 곳이 있다고, 하도 그렇게 얘기해대니까 궁금하기도 해서.." "음, 근데 저는 그게 진짜라고는 생각 안 하는데. 제가 여기 7년 정도 살면서 한 번도 못 가봤어요." "진짜요???" "네. 어르신들도 백색 천지 이야기는 그냥 겁주려고 하는거라면서, 바보냐고 킬킬 비웃으셨죠.." 마리야씨가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말에 나는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비싼돈 주고 힘들게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일순간에 잃어버렸다.
이름없음 2020/02/29 03:20:52 ID : s1g7y6jdA3W
"그럴리가 없는데.. 소피아가 말하길 분명.." 마리야씨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소파에 누워서 코를 고는 말라로프씨는 어느새 안중에도 없던 나와 마리야씨는, 서로의 목소리가 높아져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했다. "..소피아가 말하길 분명, 미하일이라는 아이가.." "그 얘기는 조금 듣기 불편하군요, 사무엘." 마리아씨의 어조가 딱딱해졌다. 친절하던 그녀가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군요." "괜찮아요. 하지만 주의해주세요. 미하일 얘기는. 소피아가 왜 그런 것까지 말했는지 모르겠네." 마리야씨가 불쾌해하며 다 마신 찻잔을 거두어갔다. 나는 말없이 게스트룸에 들어가 침대에 철퍼덕 엎어졌다.
이름없음 2020/02/29 03:24:08 ID : s1g7y6jdA3W
노곤한 몸을 움직이려고해도, 힘이 다 빠져버려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침대 끝부분에 올라온 나무 장식이 발등에 걸려서 불편했지만, 발을 치울만큼의 힘도 없었다. 그저 녹초가 되어 침대와 합체된 느낌이었다. 그렇게 누운채로, 나는 소피아가 해준 "백색 천지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렸다. 마리야씨가 불편해하는 그 이야기를 말이다. ------------------------------------------------------------------------------ 저 산 꼭대기만큼 먼 옛날에, 불라노바라는 마녀가 살았다. 마녀는 높은 산 위에 자신의 성을 지어놓고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 하게 마법을 걸어 성의 실체를 숨겼다.
이름없음 2020/02/29 03:26:41 ID : s1g7y6jdA3W
성을 지은 마녀는 사람은 드나들 수 없게 천장 한가운데에 입구를 짓고, 날아다닐 수 있는 자신만 드나들 수 있게 사다리 같은 것을 전혀 설치하지 않았다. 마녀는 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내려가, 자신의 약물을 만들 물건들을 구입하려고 했다. 노아라는 이름의 청년은 노파로 변장한 마녀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녀를 친절히 맞아들였다. "찾으시는게 있으신가요, 할머니?"
이름없음 2020/02/29 03:28:46 ID : s1g7y6jdA3W
"거미의 다리와 소의 눈알을 원하네." 청년은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그런 것은 팔지 않아요, 할머니." 마녀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거미 다리와 소 눈알이 없단 말인가?"
이름없음 2020/02/29 03:31:43 ID : s1g7y6jdA3W
"맹세컨데, 이 마을 그 어디를 가봐도 그런걸 파는 곳은 찾을 수 없을 거에요." "하늘에 맹세코?" 마녀가 간사하게 웃었다. "예. 하늘에 맹세코." "그 맹세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마녀가 진지하게 청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예. 하늘에 대고 한 맹세는 바꿀 수 없지요." 청년은 의아해하며 마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름없음 2020/02/29 03:34:39 ID : s1g7y6jdA3W
마녀는 클클 웃기 시작하더니, 손가락을 뻗어 웬 가게를 가리켰다. 청년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홀린듯이 그곳으로 터벅터벅 걸어들어갔다. 그곳에는 마치 눈썹처럼 촘촘히 박힌 수많은 거미의 다리와 천장에 박힌 수많은 소의 눈알이 있었다. 청년은 기겁하며 그곳에서 뛰쳐나왔다. 뛰쳐나온 청년의 바로 앞에는 마녀의 모습을 한 마녀가 서있었다. "이 마녀가 나를 간사한 꾀로 속여넘겼구나!" 노아는 하늘에 대고 탄식했지만, 구원의 손길은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노아는 자신의 옷자락을 조금 찢어 바닥에 던져두었고, 마녀는 그걸 모른채 흑마술로 노아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름없음 2020/02/29 03:39:15 ID : s1g7y6jdA3W
노아의 친구인 게오르기는 노아가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온 마을을 뒤지며 그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선반의 먼지까지 털어가며 노아를 찾던 게오르기는, 그의 가게 인근에서 찢어진 옷자락을 발견했다. 그가 옷자락을 집어들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가게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게오르기는 귀신에 홀린 것인지 아니라면 자신이 술에 취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는 자기 뺨을 때리며 그 건물 주위를 빙빙 돌며 살피기 시작했다.
이름없음 2020/02/29 03:42:42 ID : s1g7y6jdA3W
창문 하나 나있지 않은 건물 안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던 게오르기는, 그냥 문을 덥썩 열고 들어갔다. 그 안에는 수십개의 촛불이 켜져있었고, 바닥에는 핏자국 같은것이 나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는 거의 벽장만한 크기의 거울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게오르기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이 옷자락은 내가 노아에게 선물로 준 옷 같은데. 그는 항상 이 옷을 입기를 좋아했으니 틀림없어." 게오르기가 그렇게 생각하자, 거울에는 갑자기 창백한 피부색의 대머리 노인의 얼굴이 한가득 비쳤다. 놀란 게오르기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젊은 여자의 얼굴이 한가득 비쳤다.
이름없음 2020/02/29 03:42:45 ID : 5TPcqY5Qq5g
보고있어 우와 무슨 소설같아
이름없음 2020/02/29 03:46:58 ID : s1g7y6jdA3W
얼마 안 가 이번엔 아이의 얼굴이, 이번엔 젊은 청년의 얼굴이 비쳤다. 청년의 얼굴은 게오르기에게는 매우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것은 노아의 얼굴이었다. 게오르기가 노아의 얼굴이 비친 거울에 가까워지자, 건물 안을 울리는 시끄러운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간간히 들려오는 절규에 게오르기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 순간 켜져있던 수십개의 촛불이 동시에 꺼졌고, 거울은 불타올라 없어지고 말았다. 게오르기는 이것이 사악한 마녀의 소행일 것이라 생각하고, 노아는 그 마녀에게 붙잡혀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오르기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대장간에서 커다란 망치를 들고 신의 도움을 받기 위해 산을 올랐다.
이름없음 2020/02/29 03:51:54 ID : s1g7y6jdA3W
산 꼭대기에서 눈을 맞으며 애타게 울부짖는 게오르기의 앞에 높은 성이 나타났다. 그러나 성에는 문이 없었다. 그 때 하늘에서 굵은 빛줄기가 내려와, 성의 꼭대기를 비추었다. 게오르기는 이것이 계시임을 알고 용감하게 성벽을 타고 올라갔다. 손톱이 들려서 피가 나는데도, 성벽을 꿋꿋이 오른 그는 손가락 두개를 잃고서야 성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꼭대기에는 다락문이 나있었다. 게오르기는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세상 모든 악취가 그곳에 모여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엄청난 악취가 풍겨왔다. 게오르기는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다락문 안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이름없음 2020/02/29 03:59:47 ID : s1g7y6jdA3W
게오르기는 펄펄 끓는 커다란 가마솥 바로 옆으로 떨어졌다. 가마솥은 게오르기의 키를 이미 세 배나 훌쩍 넘겼을 정도로 커다랬다. 가마솥을 휘젓던 마녀는 자기 몸집만한 주걱을 잠시 턱에 걸어두고, 게오르기에게 분노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오는게냐!" "노아는 어디에 있는가?" "노아라는 청년 말인가? 그 청년은 이미 이 탕안에서 끓고 있다!" 진노한 게오르기는 망치를 휘둘러 가마솥 밑을 깨부수었다. 그러자 용암같이 뜨거운 국물이 온 바닥을 휩쓸었다. 게오르기는 두둥실 떠오른 커다란 접시에 올라탔다. 마녀는 공중에 떠서 게오르기의 다리를 속박했고, 뒤이어 그의 망치를 빼앗아 저 끓는 바닥 속으로 던져버렸다. 게오르기는 온 몸이 꽁꽁 묶인채로 하늘에 대고 간절히 빌었다. "신이시여, 제게 힘을 주십시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에 마녀는 그를 비웃으며 그의 영혼을 몸에서 분리해내고, 그의 육신은 저 바닥 속으로 집어던져버렸으며, 그의 영혼은 성 밖으로 추방시켜버렸다. 격노한 마녀는 커다란 지팡이를 휘둘러 성을 부수었고, 이에 산에 쌓인 눈이 온 마을을 뒤덮었다.
이름없음 2020/02/29 04:02:34 ID : s1g7y6jdA3W
게오르기의 영혼은 계속해서 아무것도 없는 마을 위를 떠다녔다. 눈과 바뀌지 않는 낮만이 있는 공간에서 헤매던 그는, 십자가를 진 용감한 기사가 와 마녀의 흑마술을 제거할 때 까지 추위와 어지러움에 떨어야했다. ----------------------------------------------------------- 여기까지가 백색 천지 이야기의 본 부분이었다. 그러나 소피아는 이 이야기를 해줄 때 이것에 대한 뒷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며 나를 붙잡고 한참동안 얘기했었다.
이름없음 2020/02/29 04:04:20 ID : s1g7y6jdA3W
2시에 써서 벌써 두 시간동안이나 썼다. 이게 생각보다 육체적으로도 힘드네. 처음 알았다. 스레주는 이따 오후에나 또 올 것 같으니, 나중에 보자. 이만 나는 자야할 시간.. zzZ.. 그 때는 정말 당황했다.. 재밌게 봐줘서 고맙다. 소설책을 많이 읽다보니 글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나가나보다..
이름없음 2020/02/29 04:16:41 ID : 2pXwLhumre5
잘자! 맞아,,글쓰는거 꽤 힘든일이더라고 그래도 되게 재밌게 읽고 있었어 얘기 들려줘서 고마워 필력 대단하다 이어질 내용도 기대하고 있을게 이따봐 레주!!
이름없음 2020/02/29 08:30:25 ID : JPfVbA6mJPi
워우 스레주 진짜 미쳤다 미쳤어.. 이야기 너무잘쓰는데..? 스레주 혹시 실례가안된다면, 앞으로 이야기가 몇개정도 더있는지 말해줄수있어??
이름없음 2020/02/29 11:45:03 ID : g6i9vDwNs7g
너무너무 재밌져 나도 여행 좋아하는데 !!! 담편 기대된당
이름없음 2020/02/29 17:06:51 ID : s1g7y6jdA3W
글 쓰는 레스주구나. 칭찬 고마워. 더 힘내서 써볼게.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이 남았다. 백개는 더 남았어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다..^0^ 동지들 오늘 부스스 일어나서 바로 스레딕부터 켰네. 반응이 너무 좋아서 글 쓰는게 기다려질 정도다. 오늘은 하루종일 집에만 있어야하니까 저녁식사만 하고 바로 와서 스레 이어나가야겠어.
이름없음 2020/02/29 18:01:31 ID : s1g7y6jdA3W
"백색 천지 이야기", 지금 바로 이어쓰겠습니다.
이름없음 2020/02/29 18:04:49 ID : s1g7y6jdA3W
사실 백색 천지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나를 감응케하는데는 성공했다. 여지껏 듣도보도 못한 흥미로운 신화니말이다. 신이 도움을 주지 못 하고 무력해하는 모습을 담은 신화는 사실 흔치 않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이미 충분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소피아는 나를 더욱 흥분케할 뒷 이야기를 말해줬다. "..미하일, 미하일 라도바노프라는 아이가 있었어." "미하일 라도바노프?" "내가 무르만스크에서 살다가 왔다고 했잖아? 미하일은 내가 무르만스크 살 적에 동네친구였어."
이름없음 2020/02/29 18:08:26 ID : s1g7y6jdA3W
미하일이라는 아이는 용기있고 순수하며, 자기가 하고픈 일은 어떻게든 하는 저돌적인 아이였다. 소피아는 그런 미하일이 멋있다고 생각해 언제나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고 한다. 소피아의 13번째 생일에, 그녀는 스스로가 미하일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를 생일잔치에 초대해 진솔한 마음을 전하려고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12시간이 지나도 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름없음 2020/02/29 18:11:10 ID : s1g7y6jdA3W
"미하일은 오지 않으려나봐." 작은 마리야가 소피아에게 말했다. "그럴리가.. 꼭 온다고 했었는데.." 소피아가 울먹였다. 소피아의 바람과는 다르게, 미하일은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생일잔치 끝난지 무려 5일 뒤가 되는 날에도. 그는 홀연히 사라져있었다. 당연히 그의 부모나 친지들은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하고 있었다.
이름없음 2020/02/29 18:14:30 ID : s1g7y6jdA3W
미하일이 사라진지 10일 째, 그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피아는 그의 실종 소식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공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다. 좋아하는 아이를 잃은 소녀의 여린 가슴은 미어지고 있었다. 그런 소피아의 모습을 보다 못한 마리야는, 침통해하는 소피아를 부추겼다. "이렇게 앉아서 궁상이나 떤다고 걔가 돌아오진 않을거 아냐! 너 왜 그래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 애를 네가 직접 찾아보던가!" 소피아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이름없음 2020/02/29 18:17:32 ID : s1g7y6jdA3W
소피아에게는 사랑을 포기할 마음이 한 톨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곧장 집을 나와 온 무르만스크를 뒤지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군사기지가 위치한 북쪽의 비밀도시 근처까지 다다랐다가 붙잡혀 되돌아오는 일도 생겼다. 그럼에도 어린 소피아는 전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깊어갈 수록 애타게 헤메이는 마음은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마리야는 그런 소피아가 안쓰러웠다. 마리야는 부족한 그녀를 위해 기꺼이 함께 여행해줬다.
이름없음 2020/02/29 18:19:11 ID : 2pXwLhumre5
오 안녕!! 오늘도 잘읽을게!
이름없음 2020/02/29 18:20:51 ID : s1g7y6jdA3W
한 달, 자그마치 38일이 되는 시간동안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미하일에 대해 수소문하던 그녀들은, 결국 한계점에 봉착했다. 의지만큼은 투철했지만, 결국은 여리고 작은 소녀의 몸으로 그런 험한 여행은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지친 마리야는 이제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훌쩍이는 소피아에게 말을 건넸다. "마지막으로, 산 X(마을 X에서 서남쪽으로 가면 나오는 산. 당시 아이들은 무르만스크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이곳은 상당히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만 가보자. 우리가 갈 수 있는 한계야." "거기서 미하일을 찾을 수 있을까?" 소피아가 말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야.. 미하일.."
이름없음 2020/02/29 18:22:59 ID : s1g7y6jdA3W
독자분이 여기 한 분 계셨네. 잘 봐줘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둘은 마을 X까지 정기적으로 출항하는 배를 탑승하기 위해 무르만스크로 되돌아왔다. 산 X로 가는 유일한 관문인 마을 X로 가는 배는 2주에 한 번씩 출항하는데, 그 배를 놓치면 말짱 도루묵이었기에, 둘은 서둘러 항구로 향했다. 그러나 절망적이게도, 배는 그녀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닻을 올렸다.
이름없음 2020/02/29 18:26:56 ID : s1g7y6jdA3W
"너 때문이야! 네가 그 망할 가방만 놓고 온게 아니였어도!!" 소피아가 텅빈 항구에서 빽하고 소리쳤다. "그러는 너도 머리띠 놓고왔다고 했잖아!" 마리야가 그녀에게 질세라 역시 소리를 질렀다. "그까짓 머리띠는 버리고 갈 수도 있는거잖아!"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두 아이의 날선 고함소리만이 메아리치는 항구에는 단 한 점의 뱃편도 없었다. 그 때, 항구 인포 앞 벤치에서 눈을 붙이고 있던 소년이 소피아에게 다가왔다.
이름없음 2020/02/29 18:29:28 ID : s1g7y6jdA3W
"아가씨들, 부탁인데 조용히 좀 해주시죠.. 시끄러운건 질색입니다." 츄리닝 바람의 작은 말라로프는 부시시한 눈을 하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민망해진 마리야와 소피아는,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말라로프는 둘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배를 놓친것 같은데, 저거라도 탈래요? 우리 아빠가 모는건데.." 말라로프가 작은 6인승 보트를 가리켰다.
이름없음 2020/02/29 18:34:15 ID : s1g7y6jdA3W
"저희가 어디 가는 줄 알고요?" 마리야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여기서 뜨는 배는 전부 마을 X로 밖에 안 가니까요." 말라로프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야의 붉어진 얼굴이 아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결국 체념한 소피아는 조심스레 말라로프에게 2500루블을 보이며 말했다. "확실히 마을 X까지 태워다주는거죠? 운전은 누가하는건데요?" "우리 아버지가 할 겁니다. 아빠!" 말라로프가 인포 안에 큰 목소리로 소리치자, 흰 콧수염이 짙게 난 중년의 남성이 그 안에서 나왔다. "허허, 이따 봄세 말치크.... 너는 왜 소리를 지르냐! 귀 안 먹었어!" "이 아가씨들이 배 없냐고 그러는데요?" "읭?? 아아아, 손님들이시구만. 이리로 오시죠 꼬마 아가씨들. 마을 X로 가는게 맞죠?"
이름없음 2020/02/29 18:37:01 ID : s1g7y6jdA3W
앗, 이런.. 상사한테 메일이 왔다. 끔찍하네. 일단 일좀 처리하고 올테니 다들 나중에 보자. 늦어도 9시 전에는 올테니까.
이름없음 2020/02/29 18:42:10 ID : 2pXwLhumre5
주말에 상사메일이라니,,ㅎㅎ 화이팅하구 이따봐 레주!
이름없음 2020/02/29 21:22:36 ID : JPfVbA6mJPi
천천히와!! 정말 흥미진진하게보고있어!
이름없음 2020/02/29 21:34:15 ID : o3TSJXs79ju
정말 재밌어@!!@@!
이름없음 2020/02/29 21:54:22 ID : i3vhbCo1zRz
뭔가 구레딕 파라다이스아일랜드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이런 이야기식 괴담 좋아해서 스레주 응원해. 보고있어.
이름없음 2020/02/29 22:50:32 ID : s1g7y6jdA3W
끔찍했어.. 너무 느긋하게 왔네 미안해 재밌게 봐준다니 고마워 그거 안 봤는데, 나중에 시간나면 봐야겠네. 무슨 얘긴지 궁금해졌다. 예상보다 일이 한참 늦어졌다. 이런일 흔치 않은데.. 2시간이나 더 기다리게 했네. 다들 미안해.
이름없음 2020/02/29 22:50:53 ID : 5bxBfapO2tu
잘 해결하고 오길 ! 오늘도 어김없이 왔다 ㅎㅎ
이름없음 2020/02/29 22:53:58 ID : 61A0nBeZg40
ㅎㅇㅎㅇ
이름없음 2020/02/29 23:01:10 ID : s1g7y6jdA3W
4명을 태운 보트는 아주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마리야에게는 익숙한 마을 X에 도착했을땐 이미 마을은 고요히 잠든 상태였다. 마리야와 소피아는 그곳에서 미하일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애타게도 뛰어다녔지만, 주민들로부터 고운 시선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마리야의 할머니인 타티아나는 손녀가 어떤 소년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네 엄마가 걱정할게다. 어서 돌아가거라." 인자해보이는 할머니가 두 아이들을 타일렀다. "이왕 나온거 목표는 이루고 가려구요. 할머니, 혹시 검은 머리에 매부리코를 한 남자 아이 못 봤나요?" "본 것 같다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그 아이를 찾는답시고 여기까지 오는 건 위험한 짓이야. 누가 너희를 여기까지 태워다 준게냐?" 말라로프의 아버지인 말라로프 Sr.는 타티아나 할머니로부터 엄청난 꾸중을 들어야했다.
이름없음 2020/02/29 23:04:40 ID : s1g7y6jdA3W
소피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곤란해진 말라로프 부자를 뒤로하고 마을을 뒤덮고 있는 흰 산을 올려다보았다. 바다에서 봤을 땐 적당히 높지만, 마을 자체의 고도도 높았다. 한 시간이면 오를 수 있었다. 소피아는 당연히 지체하지 않고, 곧장 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타티아나 할머니와 말라로프 Sr.의 언쟁을 듣다 못한 마리야는 소피아보다 십 분 정도 뒤쳐져 그 산을 올라갔다.
이름없음 2020/02/29 23:05:40 ID : 61A0nBeZg40
레주 혹시 소설,,,,,,, ㅆ느ㅡㄴ 게 직업인가??? 너무 진짜 소설같은 느낌이야ㅠㅠㅠㅠㅠ
이름없음 2020/02/29 23:07:19 ID : s1g7y6jdA3W
꾸준한 독자분 덕에 힘이 난다. ^0^ 안녕~ 산은 생각보다 험난하지 않았다. 눈이 많이 쌓인 돌산이라 그런지 미끄러운 것을 빼면 그렇게 올라가기 어렵지도 않았다. 소피아는, 이곳에서 미하일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정확히는, 찾고 싶었던 것이다. 올라가는 길에 발을 내딛을때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이미 틀렸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런 산에 미하일이 왔을리가 없잖아..' 소피아는 절망감에 짓눌린 채로 무감각하게 산을 기계적으로 오르고 있었다.
이름없음 2020/02/29 23:12:26 ID : s1g7y6jdA3W
내 직업은 글쓰는거랑 꽤 거리가 있는데.. 소설책을 좋아해서 많이 보기는 해. 한 시간이 걸리리라고 예상한 거리지만, 눈의 산보는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끝이 났다. 그것마저도 미끌미끌한 바닥 탓에 지체된 것이기 때문에, 그닥 거리가 있는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산의 꼭대기에는 눈이 잔뜩 쌓여있었다. 구름이 낀 산의 모습은 소금을 흰 종이에 소복히 쏟아올린 듯한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장관은 소피아나 마리야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마리야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소피아는 눈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름없음 2020/02/29 23:23:41 ID : s1g7y6jdA3W
그동안 지나온 수많은 장소들이 모두 소피아의 뇌리를 스쳐갔다. 한 달이 넘는 기간동안, 헛수고나 해왔다는 좌절감에 소피아는 조금도 움직일 기운이 들지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꺄아아악!!!!" 마리야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었다. 강직한 성격의 그녀가 이렇게 요란스럽게 놀라기는 처음이었다. 소피아는 그 점에 대해 의아해하며,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마리야는 그 자리에 서서 온 몸을 나뭇거지 떨리듯 떨고 있었다. .... 그 자리에는 "미하일"의 학생증이 있었다.
이름없음 2020/02/29 23:28:45 ID : s1g7y6jdA3W
눈밭에 덜렁 떨어진 직사각형 모양 학생증에는 미하일의 자세한 인적사항과 그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소피아도 그 학생증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둘은 혼이 빠진듯이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로 산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이름없음 2020/02/29 23:34:06 ID : s1g7y6jdA3W
..이것이, 소피아가 내게 해준 "백색 천지 이야기"의 뒷이야기이다. 나는 사실 이 뒷이야기를 들었을 때, 왜 미하일의 학생증이 거기있었는지, 왜 미하일은 없어졌는지를 알 수 없었다. 왜 미하일은 300km가 넘는 곳까지 가서 학생증을 떨어트리고 온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소피아는 내게 그런 얘기를 해주며, "이런이런 일이 있으니 가지 않는게 좋다"라며 만류하고 있었다. 나는 이걸 그냥 나를 못 가게하려고 하는 급조한 이야기 정도로 치부했다. 하지만 나의 탐험욕은 고작 그런 말에 꺾일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또 그 급조한 이야기의 진위여부가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다. 소피아에 말로는, "백색 천지 이야기"가 생각나서 미처 학생증을 수습할 생각은 하지 못 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산 정상 어딘가에는 아직도 그 학생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월이 흘러 눈이 쌓이고 마을 주민들이 가끔 올라가기도 해서 찾는게 쉬운일은 아닐테지만, 내겐 그것이 또 다른 흥미로 다가왔다.
이름없음 2020/02/29 23:36:02 ID : s1g7y6jdA3W
오늘은 여기서 컷트! 이따 새벽에 다시 올 수도 있습니다. 다들 좋은 밤 되기를.
이름없음 2020/03/01 00:12:37 ID : qi1h9hfdU7t
으와 헐 이야기를 너무 빠져들게 쓰는것같아 머리속에 이미지가 그려져서 안멈추고 쭉 읽었어 너무 재밌다ㅠ 나 이런거 좋아하거든!
이름없음 2020/03/01 00:12:50 ID : E7e0oNxPa8n
으와 헐 이야기를 너무 빠져들게 쓰는것같아 머리속에 이미지가 그려져서 안멈추고 쭉 읽었어 너무 재밌다ㅠ 나 이런거 좋아하거든!
이름없음 2020/03/01 01:27:57 ID : 2pXwLhumre5
아까 좀 잤는데 나도 일어나자마자 스레딕 접속했어 뒷얘기 궁금해서!! 야식먹으면서 읽었다 ㅎㅅㅎ 마리야랑 소피아가 왜 미하일의 학생증을 보고 놀랬던건지 스레주는 모르는거야? 그냥 미하일의 흔적?이 있어서 놀란건가,,
이름없음 2020/03/01 01:32:40 ID : 7hthbDy3SMl
미하일이 지내던 마을부터 300km나 떨어진 곳에 가서 사라졌다면 얘가 왜 여기까지 왔구 걔 소지품이 떨어져 있었다면 혹시라도 무언가에 쫓기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하구 놀란거 아닐까
이름없음 2020/03/01 01:44:16 ID : 2pXwLhumre5
그런가? 비명질렀다는거 보고 학생증에 뭔가가 있구나 했거든 근데 생각해보니까 레스주 말처럼 그래서 놀랐나 싶기도 해서ㅎㅎ 의견 고마워! 그이유 같다
이름없음 2020/03/04 05:45:55 ID : 2pXwLhumre5
레주 언제와?ㅠㅠ
이름없음 2020/03/04 05:54:54 ID : 5bxBfapO2tu
나 이거 못 찾아서 스레까지 세웠잖아 ㅋㅋㅋ 잘 보고 있다 !! 오랜만에 옴 .. ㅎ

레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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