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cso3RBcJU1v 2018/02/12 14:58:36 ID : pXy6jg43U0t 1
회사를 관뒀지. 갑자기 해야하는 철야작업도 싫었고 야근에도 지쳤어. 급여는 신입경리랑 별 차이도 없었고 야근비도 별로 안 챙겨줬지. 연차는 옛날에 사장이 없애버렸다고 하고, 휴일에도 나와서 일하라고 연락오고, 새벽에도 연락오고. 정신이 멍해지고 늘 잠이 부족했지. 소기업답게 사표를 내니까 말리더군. 그래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았어. 이미 일 년 넘도록 그만두고 싶었으니까. 한 달을 더 일하고 그만 두고 나왔지. 진작에 관뒀어야 했는데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 다시는 예전같은 회사에 가기 싫었어. 그런데 웃긴건 취업사이트 보니까 이전 회사 비스무리 한 곳이 왜 이렇게 많냐. 그래서 아직도 놀고 있다. 이런 상황이 너무 웃긴다. 이렇게 돌아가는 세상이 너무 웃긴다. 나는 웃느라 정신없어서 돌기를 멈췄다.
2 ◆cso3RBcJU1v 2018/02/12 15:04:28 ID : pXy6jg43U0t 0
놀다보니까 온갓 일상의 부조리가 다 보인다. 회사 다닐 때는 늘 잠이 부족하고 쉬기에 바빠서 지나치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지.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깨달았지. 가족이 화목하려면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야 한다는 것을.
3 ◆cso3RBcJU1v 2018/02/12 15:14:55 ID : pXy6jg43U0t 0
마냥 놀 수도 없고 다른 직종으로 취업하려고 공부를 했었어. 솔직히 초반에는 마음이 불안해서 뭐든 열심히 해야했지. 그런데 뭘 준비하든 박봉과 초과근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그래서 지금은 놀고 있어. 이제야 백수다워졌군. 진작에 이렇게 쉬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게 생각해보니 코미디야. 난 놀 줄도 모르는 놈이었네.
4 ◆cso3RBcJU1v 2018/02/12 17:26:03 ID : pXy6jg43U0t 0
동네 아줌마들이 복병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아직 날씨좋던 나날에 아줌마들이 벤치에 하냥 모여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재료삼아 떠들고 참견하는 거야. 대낮에 돌아다니다 나도 재료가 되었지. 그래서 방안에 틀어박혔어. 동네 아줌마들이 나를 히키코모리로 만들다니. 근데 이 아줌마들 중에 회사에서 일하고 있거나 일해본 사람은 없어보였어. 앞으로도 없겠지. 왜 열심히 일하다 퇴사한 내가 눈치를 봐야하지? 뭣보다 내 인생인데 같은 동네에 사는 것뿐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아야 하다니. 하릴없이 벤치에 모여 뒷담화나 하면서 시간보내는 거야말로 웃긴 일 아닌가. 뒷담화하는 사람도 웃기고, 거기에 상처받지 않겠다고 틀어박힌 나도 우스워.
5 ◆cso3RBcJU1v 2018/02/12 18:41:45 ID : pXy6jg43U0t 0
일할 땐 시간이 없어서 돈 쓸 기회도 없더니 일을 쉬니 내 돈 내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게 하네. 그냥 확 차라도 한대 뽑아버릴까. 아, 난 운전면허도 없지.
6 ◆cso3RBcJU1v 2018/02/13 00:07:57 ID : pXy6jg43U0t 0
피타고라스가 만물은 수라고 했던가. 갈수록 그의 말이 옳았다는 걸 깨닫고 있어. 내 삶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 중 하나가 고등학생 때 수학을 멀리한 거야.
7 ◆cso3RBcJU1v 2018/02/13 00:21:13 ID : pXy6jg43U0t 0
나는 내 성별이 싫어. 아주 어릴 때부터.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거북해. 옷처럼 갈아입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있지만. 나 같은 사람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어. 모르지. 만났는데 서로 몰라봤을지도... 이런 건 누구에게 대놓고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타고난 성별이 아무렇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도 정말 복 받은 거야.
8 ◆cso3RBcJU1v 2018/02/13 15:25:24 ID : pXy6jg43U0t 0
나한텐 형제가 한 명 있는데, 정말 오랫동안 일 하나도 안하고 놀았다. 근데 나 일하는 사이 엄마가 걔 통장에 엄마 명의로 된 돈을 입금했어. 거기다 집에 세금통장을 걔 이름으로 된 통장으로 등록했지. 물론 세금은 아빠가 벌어오는 돈을 엄마가 거기에 입금해서 납부했어. 나한테는 넌 일하느라 바쁘니까 안 바쁜 얘 앞으로 한 거라고 했지. 그래서 그러려니 했어. 그리고 형제를 친척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업시켜줬지. 지금은 내가 놀고 있어. 놀면서 이제야 보니까 집안의 돈이 걔 위주로 돌고 있는 거야. 세금도 사실은 아빠 돈인데 통장은 걔 꺼니까 서류상으론 마치 걔가 낸 것처럼 되어있고. 그 밖에 이런저런 일들을 더해서 참다참다 빡쳐서 말했지. 지금은 내가 쉬고 있으니 내가 내러 다니게 세금통장을 내 통장으로 해달라고 했어. 그러니까 놀라더니 니가 언제까지 놀 것도 아니고 취업할 텐데 그래야 할 거까지 있냐고 하더니, 이번 달 거는 이미 통장에 입금했으니 이번 달은 놔두고 다음 달에 생각해보자는 거야. (내 생애를 돌아보건데 이렇게 다음을 언급하며 미루는 건 안 해주겠다는 거다.) 그러면서 세금통장하려면 기기로 통장 입출금할 수 있어야 된다느니 이러면서 마치 내 통장은 안 되는 것처럼 말하길래, 요즘 기기로 입출금 안 되는 통장이 어딨냐고 내 것도 된다고 했지. 그러니까 아빠 것은 안 된댄다. 안 되는 통장, 입출금 가능하게 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굳이 아빠 것을 놔두고 형제 이름으로 된 통장을 세금통장으로 한 것이나, 내 걸로 바꿔달라니까 놀라면서 어떻게든 미룰려는 것이나 이게 그냥 세금통장이 아닌 거다. 시발, 나중에 재산분배할 때 집안 기여도에 이 세금통장을 증거로 들이밀 것 같다. 걔 명의 통장에 넣은 엄마 돈은 전부 걔 것이 되고. 난 얼만지도 몰라. 나는 혼자 힘으로 취업해서 알아서 용돈도 드리고, 월급 조금 올라가면 용돈도 덩달아 올려드리고 했는데, 명절날이나 생일이면 따로 돈 드렸는데, 명절 제사상에 보태라고 또 돈 챙겨 드렸는데. 걔는 놀 때는 맨날 게임이나 하고 결국 취업도 도움받고, 친척이 월급 올려줘도 오른 달만 용돈 좀 더 드리고 다시 예전에 주던 액수로 돌아갔는데도 이 꼴이 되니까 시발, 뭘 더 원해서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나도 인간이라서 배신감 느낀다. 퇴직금 받은 것도 앞으로 당분간 용돈 못 드린다고 몇 달 치 용돈 드렸는데. 날 더 잘해줄 필요는 없지만, 동등하겐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개인적으론 비극인데 남들이 보면 코미디다. 웃어라. 나도 3인칭 시점으로 보고 웃어재낄란다. 그리고 최소한 다음 달까지는 놀아야겠다. 이 교훈은 절대 잊지 않겠다. 혹시 부모가 될 인간들은 자기가 신경쓸 수 있는 자식이 몇 명인지 생각 좀 해봐라. 애새끼 하나만 위할 수 있는 그릇인 부모는 하나만 낳아 키워라. 제발 개코미디 만들지 말아라.
9 ◆cso3RBcJU1v 2018/02/13 16:08:30 ID : pXy6jg43U0t 0
웃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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