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기를 씁시다 (4)
2.결국 녹차라떼도 치자꽃도 내가 갖겠지만 (1000)
3.일기장 (11)
4.필터 (14)
5.논 알콜 마티니 한 잔, 젓지 말고 흔들어서 온더락으로. (109)
6.마인트롤 복용일기 (5)
7.live like a flower and die like a flower (87)
8.언니 벌써 6년이나 지났어. (11)
9.구덩이 (4)
10.16 (1)
11.★오늘의 일기★ (1)
12.아이고 다들 제목 맛깔나게 짓는데 왜 나는 작명센스가 없어가지곤 (1000)
13.꽃을 꺾는 아이 (17)
14.끝말잇기에서 해질녘을 추구하면 안되는걸까? (34)
15.난 좀 유치해지고 싶은데 (14)
16.기록. 내일의 나는 평안합니까 ? (7)
17.달빛 조각 하나하나 모아🌘 (620)
18.💮아무말 일기💮 (71)
19.💎 뻐꾸기 둥지 💎 (184)
20.오늘의 도는 둥근레코드 (4)
1
이름없음
2019/11/29 22:06:47
ID : 1h9jAlxzWjh
0
주님 제발 제가 이 스레를 매일 한번씩 갱신하게 해주세요.
끈기 제로 재주 제로 귀찮음 맥스
단기 목표는 12월 31일까지 매일 일기 쓰기
독촉을 위한 난입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2
이름없음
2019/11/29 22:06:58
ID : 1h9jAlxzWjh
0
2019. 11. 29
일기를 수기로 작성하는 데에는 번거로운 점이 많다. 첫째, 글씨체가 의식된다. 자간이 어긋나거나 균형이 맞지 않는 글자들이라던가, 군데군데 보이는 화이트 자국 같은 것들은 재독에 방해될 뿐더러 그 자체만으로도 나를 속상하게 한다. 내가 생각한 일기장은 훨씬 깔끔하고 반듯했는데! 그러나 현실의 결과물은 언제나 상상과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귀찮다. 귀찮다는 감각은 대체 언제, 무슨 의도로 생겨난 것인지. 초기 인간들이 너무 성실하게 문명을 개발한 나머지 컨텐츠의 부족을 염려한 조물주가 급하게 유전자 속에 쑤셔넣은 게 아닌 이상 귀찮음이라는 기질의 탄생을 해명할 방도가 없다. 그리고 나는 인간 종의 모든 성질이 그러하듯, 유전자의 미세한 농도 조절 실패로 끔찍하게 게으른 성정을 타고났다. 볼펜을 움직여 한 자 한 자 신경을 기울여(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나는 글자 한 끝마저 의식할 정도로 성가실 때가 있다) 쓰고 배치를 고심해 신중하게 스티커를 붙이고 마스킹 테이프를 이리저리 대 보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귀찮다. 셋째…… 슬슬 이 글을 쓰는 것까지 귀찮아지려고 한다. 그만두자.
일기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튼 건 우선 내가 각을 잡고 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그 이유지만, 오늘 새 다이어리를 받았다는 것도 일견 영향을 미쳤다. 하늘색 몰스킨 다이어리. 집 앞 스타벅스 단골인 엄마가 내게 온갖 프라푸치노를 사주며 모은 E-스티커를 오늘 교환하고 온 참이다. 보라색은 너무 작고 화려했고, 분홍색은 너무 큰 데다 레이아웃이 낯설었고, 청록색은 그냥 싫었다. 그러니 소거법으로 하늘색을 고르는 수밖에. 다이어리가 담긴 종이백을 열면서 맞은편에 앉은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오늘 내가 수업 시간에 쓴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읽고 있었다. 무궁화 학명이 히비스커스네, 히비스커스는 다른 꽃 아니니? 하고 묻는 모습에 불현듯 죄책감과 애틋함이 들어서, 대관절 이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고 어째서 나는 늘 엄마에게 이러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 이걸 읽을 언젠가의 내가 질색하고 진저리를 칠 만한 소리지만 아무리 생각의 방향을 바꿔봐도 결론은 하나다. 그 모든 애틋함과 죄책감은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내가 알기 때문에 발생한다. 특정 행위가 사랑이고 사랑이 아닌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불명확하고 아마 난다긴다 하는 철학자들도 모르겠지만, 커피를 마시면서 스티커의 개수를 확인하고 같이 다이어리의 색깔을 골라주는 것도 분명 사랑이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 오늘 일기 끝!
3
이름없음
2019/11/30 21:11:49
ID : 1h9jAlxzWjh
0
2019.11.30
일기는 글의 일종이므로, 전개를 위해서는 무언가 사건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오늘 아무 일도 없었다. 느지막히 일어나 별에서 온 그대 재방송을 보면서 밥을 먹었고, 카페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집에 들어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길 틈이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또 내 얘기를 해야겠다.
나는 미루기의 천재다. 천재라면 미루는 일을 하지 않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오늘의 주제는 내가 미루기를 몹시 잘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주어진 과제를 제 때 해본 적이 손에 꼽히는 사람인데, 제일 오래 전 기억에서도 한자 숙제를 미루고 있던 걸 보면 타고난 성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미루기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일이 생긴다 → 생긴 일을 감상한다 → 미룬다(대략 일주일 정도) → 이제 좀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지만 역시 하고 싶지 않으니 외면하고 논다(이틀 정도) →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깨닫고 꾸역꾸역 책상 앞에 앉아 쓰레기를 만들어 낸다.
과제물의 질이 어떻든 간에 어찌됐건 번듯한(속은 쓰레기) 결과물은 내놓으니, 그 지점에 의의를 두면 된다. 나는 자기합리화도 몹시 잘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건 내가 미루는 나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놀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늘 편치 못하다. 아, 일해야 하는데, 그거 마감일이 언제까지인데, 근데 하기 싫어, 그렇지만……. 잠들기 직전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불안에 떨지만 일은 하지 않는다. 전술한 단어를 정정해야겠다. 나는 미루기의 천재가 아니라 등신이다. 미루는 것까지 이렇게 등신같이 비효율적으로 하다니 믿을 수가 없지만 우리 모두 알잖아요 앎과 수용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걸……. 더 이상 쓸 말이 없다. 이만 줄이고 이제 근 삼 개월을 미뤄왔던 과제를 하러 가야겠다. 오늘 일기 끝.
4
이름없음
2019/12/07 23:39:03
ID : 1h9jAlxzWjh
0
2019.12.07
작법서를 보면 으레 나오는 문장이 있다.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사람과 사람을 둘러싼 환경에 관심이 많아야 하는 법이라고. 한창 신나게 작법서를 읽어제끼던 급식 시절에는 작가가 글만 간지나게 쓰면 되는 거지 뭔 개소리야 허세도 오져요ㅋ 하고 넘겼었으나 작가는 무슨 어디 중소 기업에 취직이라도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 나이가 되고 나니 그 말이야말로 작가 지망생들에게 꼭 필요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쓴 것 같은데), 글쓰기에는 사건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건 이전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 이전에 그 사람을 만드는 환경과 그 사람이 지금 처한 환경이 있다. 이러한 박자가 제대로 맞춰져야만 사건이 발생하고 작가는 그 사건을 얼마나 훌륭하게 묘사하는지에 따라 돈방석에 앉는 자와 패가망신하는 자로 나뉜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라는 말을 굳이 덧붙여야 하는가 고민되지만……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이렇게 구구절절 쓸모없는 말로 서두를 시작한 건 이제껏 일기 쓰기를 게을리 한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변명이다. 내 주변에는 무슨 사건이 일어날 건덕지가 없는데 대관절 무슨 글을 쓰냔 말이다.
아침에 일어난다. 씻는다. 밥을 먹는다. 카페나 학교에 간다. 공부를 하거나 혼자 논다. 글로 쓰고 나니 개찐따가 따로 없다. 나는 태생적으로 사람을 만나기를 싫어하거니와 주기적으로 관계를 돌보는 일도 어려워 하는 탓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으면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파투를 내고야 마는 개쓰레기같은 유형의 인간이며, 놀고 먹고 자는 삶이 지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해 알바조차 하지 않으니 무슨 사건이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가 없다. 슬슬 저번 일기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초조해진다……. ((글감 추천 받습니다.))
하루 일과를 늘어놓는 것만이 일기는 아니니까, 이번에도 과거를 반추해보는 걸로 오늘 분량을 채워야겠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향수는 돌리걸이다. 안나수이에서 나온 향수로, 향기보다는 그 패키지가 더 인상적이다. 엄마의 흰색 화장대 위에 놓여있던 얼굴과 목만 달랑 놓인 그 괴상한 병의 생김새가 적잖이 충격적이어서 괜히 얼굴을 뒤로 돌려놓거나 쓰러뜨려두곤 했다. 시선을 맞추고 싶지 않은 여섯 살의 피나는 노력. 지금 검색해봤는데 여전히 괴상하다. 짧은 머리카락과 뚜렷한 쌍커풀, 작위적인 콧대며 입술이며 볼터치까지. 이 패키지를 기획한 사람은 정말 이게 최선이었던 걸까요? 진심으로 이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어 입장을 표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전 아님. 그래도 구태여 의도를 파악해보자면, 가지런히 정리한 헤어라인부터 시작해 뷰러와 마스카라, 아이브로우, 블러셔, 립까지 다 꼼꼼히 챙긴 당신이 한 가지 놓친 것, 그것이 바로 이 향수다! 라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나왔으면 이 세태 못읽는 새끼는 몰매를 맞아야 한다며 여기저기서 욕 좀 얻어먹었을 게 분명하다.
이 돌리걸은 분명 엄마의 화장대에 놓여 있기는 했지만 쓰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엄마는 향수를 잘 안 뿌리는 편이기도 했고 엄마 곁에서 삼십 초라도 떨어지면 온갖 진상짓을 떨어대던 유년 시절의 내가 이 냄새를 극혐했기 때문이다. 머스크와 장미를 비롯한 갖가지 꽃의 무거운 향기를 질색하는 성질은 과연 유구한 것이었다. 아, 그래도 지금은 아카시아나 라벤더까지는 너그러이 맡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머스크와 코튼은 아웃이야.
그 다음은 엘리자베스 아덴에서 나온 그린티 향수. 마찬가지로 엄마 것이었다. 투명한 녹색병이 마음에 들어서 향기가 썩 취향에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가끔 손가락을 잘못 놀려서 입에다 뿌리기도 하고…… 왜 향수를 입에 뿌렸는지는 묻지 마세요 나도 기억 안 남. 그 이후로도 안나수이의 향수 두 개와 끔찍한 장미 냄새가 나는 향수가 하나 정도 더 있었지만 그다지 인상적이지도 할 말이 생각나지도 않으니 패스하겠다. 최근에는 록시땅의 레몬 버베나를 샀는데, 맡자마자 풍기는 익숙한 썬키스트 레몬 사탕 냄새가 결정적인 구매 요인이었다. 그냥 사탕 냄새가 아니다. ‘썬키스트 사탕의 외피가 입 안에서 파사삭 부서지면서 레몬맛 잼이 확 밀려나올 때'의 냄새다. 소매나 겉옷에 뿌리고 코를 박기만 하면 손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세상사가 다 그렇듯이 그 행복의 감각은 몹시 짧다. 삼십 초만 지나도 상큼함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고 나는 기억 속의 그 레몬 향을 곱씹으면서 지속력이 이렇게 똥쓰레기같은 향수를 향수랍시고 십 만원에 팔아치우는 악덕 기업의 욕을 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소비였습니다 고마워요 록시땅…… 양심이 있다면 다음 리뉴얼 때는 지속력을 좀 더 높이도록 하세요…….
최근에는 아카시아 향 향수를 찾아 인터넷에서 긴긴 여정을 지속하고 있다. 그나마 딥디크에서 비슷한 향수를 발견했는데 가격과(^^) 가격에서(^^) 아웃되셨습니다. 되게 흔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맡자마자 헉 씨 이거 아카시아잖아?!?!! 하게 되는 향수가 잘 안 보인다.
아카시아는 항상 이상하게도 아련한 냄새로 느껴지는데, 그 얘기는 후에 마음에 드는 향수를 발견했을 때 써야겠다.
다행히 자정은 안 넘겼다. 오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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