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를 들어서 1레스가 <헤어지고 나서 고민하는 여자>를 제시어로 주면 2~9레스가 그 장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쓰는 거!! 제시하는 장면은 상황이든 배경이든 아니면 물건이든 상관 없어! 제시: 꽃이 폈는데 눈도 같이 휘날린다

다른 꽃들보다 조금 늦게 피어난 꽃이면 어때, 너는 분명 이 겨울도 꿋꿋하게 보낼 수 있을 꽃으로 자랄 거란다. 긴 묘사가 아니라서 미안해, 그래도 너무 좋은 제시여서 썼어.

성윤은 기이한 광경을 보며 놀랐다. 한 겨울에 피어오른 꽃 이라니. 이 꽃도 인간으로 치면 공부를 참 어지간히도 못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십대와 이십대의 성인들을 ' 꽃 같은 나이 ' 로 칭하곤 했다. 모든 시기 중에 가장 아름답고, 총명할 나이이며. 그때가 공부 머리가 제일 잘 돌아가는 때 이니까. 사람의 머리는 늘 말랑한 것이 아니기에. 시기를 놓쳐버리면 두뇌가 굳어버린다나 어쩐다나. 성윤은 포근한 겉옷 주머니 속에 찔러넣고 있었던 오른손을 빼내어, 늦게 피어난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꽃잎이 마냥 얇고 여려보이지는 않았다. 벌레에 먹힌 흔적도 있었고, 불에 덴것 마냥 검게 그슬려진 자국도 남아있었다. 이건 곧 이 꽃이 져버린다는 뜻 이겠지. 꽃의 노력은 이 정도 까지 였나보다. 꽃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 아홉 쯤 됐을 것 이라. 몇 달 후면 삼십줄에 들어서니 늦게라도 노력 하고자 하는 것 이겠지. 한심한 것. 성윤은 꽃의 잎을 하나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 어차피 내년에도 똑같을텐데. 그만 포기하지? " 그 말을 끝으로 하나 남은 잎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란 寒蘭 식물 난초과의 상록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30~70cm이며, 잎은 뭉쳐나고 칼 모양이다. 초겨울에 잎 사이에서 긴 꽃줄기가 나와 노란색을 띤 녹색 또는 붉은 자주색 꽃이 핀다. 남쪽 해안 지방이나 들에서 자라는데 한국의 한라산, 일본 남부 등지에 분포한다. 이과갬성.

설중매(雪中梅), 그미는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고고한 자태가 처연하다. 거센 눈발에 붉은 꽃이 뭍힐까 염려되어 애써 초연하다. 그의 눈에 눈보라가 친다. 꺾일지언정 휘둘리지 않으리라고, 그미는 몇 번이나 시리게 되뇌인다.

나의 모든 날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이역시 커다란 모순이라, 꽃이 피었는데 떨어지는 것은 부서질듯이 환한 빛이라기엔 너무나도 새하얀 것. 정작 제가 원했던 것은 시리게도 추운 겨울이면서 네가 보내는 것은 따듯하기만 한 눈송이라. 너는 항상 그렇게 다정하기만 했고 네 다정은 온전히 따듯하기만 해서, 모든 것이 그런것인가. 결국 끝까지 너는 나에게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또 떠나버린 너의 다정에 깊숙하게 빠져 허우적 대고는 또 며칠을 빠져나오지 못하리라.

나는 눈이 무릎까지 쌓인 설산을 힘겹게 걷다 홀로 핀 보라색 꽃을 보았다. 그 꽃과 나는 이 높고 넓은 설산 위에서 가장 부자연스러운 존재들이었다. 어느 미친 자가 눈이 이렇게 날리는 겨울에 산을 오른단 말인가. 또 어느 미친 씨앗이 이 날씨에 꽃을 피워낸다는 말인가. 우리 둘은 때를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한 자들이었다. 어이가 없어 힘이 빠졌는지 그냥 쉬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굳어가는 발끝과 자비라곤 없는 칼바람에 지친 몸은 그 미친 꽃의 옆에 주저앉는 것을 택했고, 그 미친 꽃과 미친 인간은 이 설산에서 가장 부자연스럽고 미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괴롭다 한들 한 번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다. 이 미친 씨앗은 몰랐을까? 씨앗은 떡잎을 내보내는 순간 마주친 허연 경사면과 여린잎을 애워싸는 잔인한 눈바람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싹을 틔우기로 결정한 이상 시간은 유한했고 더는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오늘 안에 이 산을 넘어야 하고 못 넘는다면 죽는다. 꽃이 묻는다. 이대로 뒤질거냐. 살거냐. 나는 그것이 환청임을 알면서도 답한다. 뭐라는 거야. 난 살거다. 그렇게 미친 인간은 다시 비척거리며 설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위태로운 뒷모습을 미친 꽃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꽃이었다. 작고 푸른 들꽃.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은 그 작은 들꽃 위에 앉아있었다. 손 끝이 얼얼해질 정도의 추위지만, 나는 꽃잎을 살짝 건드렸다. 눈 결정이 파르르 떨리며 꽃잎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계속 떨어지는 눈들이 그 위에 사뿐히 앉았다. 이 추운 겨울, 눈의 무게를 견더가며 핀 푸른 꽃은 정말 아름다웠다.

손과 발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지던 계절은 끝이 났다.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던 와중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뽀득 소리가 절로 나던 새하얀 눈들도 어느새 녹아있었다. 봄은 찾아옴과 동시에 저를 혼란스럽게 해서 꽃이 피어남과 동시에 봄이 그리웠던 나는 4년은 더 된 오랜 쓰레빠를 끌고 바깥공기를 마셔보려 발을 더디 뎠다. 하지만, 이런. 맑은 하늘이 탁해지며 눈보라가 친다. 또다시 겨울이 제 앞을 가로막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눈앞의 전경은 꽃이 활개친 봄이었으나, 차디찬 눈이 내렸다. 이곳에 계속 서 있으면 분명 눈은 나에게 쌓이고 쌓이다 온전히 덮는 지경까지 이르겠지. 두려움에 휩싸인 나는 오늘도 현관문을 잠갔다.

제시: 마주보고 앉은 연인 사이 침묵이 흐르고 있다

의미 없이 물잔을 들었다 놓는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연인이 되고 함께한 시간이 쌓이면서, 이제 너와는 침묵 또한 편안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세상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게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어올릴 수가 없다. 너와 시선이 마주칠까봐 두렵다. 지금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움직임 없는 공간에서 딱딱하게 굳은 시선이 찬 공기를 스쳤다. 숨조차 무겁고 딱딱해서 공기가 허파를 당장이라도 멈출 것 처럼 흘렀다. 두명의 눈은 멀찍이 마주한 채 그대로 조용히 깜빡이길 반복했다.

카페에는 사람이 적었다. 몇 없는 손님들은 모두 조용하게 볼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유독 말수가 적은 손님이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가운데 책상을 두고,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공기 중으로 그녀의 숨이 나직하게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입이 말랐다. 침 삼키는 소리가 이 카페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침묵이 이어질수록 나는 더욱 초조해지고,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당신? 같은 장소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멀게만 느껴졌다. 냉엄한 시선이 불안에 떠는 내 영혼을 감시하는 것만 같았다. 난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어느샌가 목구멍에서부터 새어나오는 신음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머리에 파고들었다. 헤어지자, 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앉아있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누구 하나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서로의 눈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분리된 것만 같았다. 순간이 지나갈 수록, 나는 점점 이 공기에, 공간에, 이곳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그냥, 그냥 서로를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의미 없이.

얼마나 지났지?1분?10분?테이블 아래에서 치맛자락을 꼬옥 움켜진 두 손에 땀이 차는 듯 하다. 조심스레 시선을 올려 흘끗 반대편을 바라보면 쓰윽 입꼬리를 올린 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빛이 와닿는다. 재빨리 테이블 위의 폰을 바라봤지만 여전히 꿰뚫을 듯 온도가 높은 시선에 내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어색하고 낯간지러운 침묵은 우리가 아직 친구일 때에는 미처 겪어보지 못했던 터라 더욱 당혹스럽다. 시선에도 맛이 라는게 느껴지는 거였나?저 녀석이 저런 꿀 떨어지는 눈빛을...테이블 위의 폰에 고정한 시야에는 여전히 내쪽으로 쭉 뻗은 채 잼잼 거리는 녀석의 양 손이 자리하고 있었다. 손 잡아줘 손- 이젠 쭉 뻗은 자신의 팔뚝에 고개를 뉘여 내 눈과 시선을 맞추더니 입모양으로 저런 말을 하기까지!이런걸..이런걸 앙큼하다고 하는건가?폭스 같다?여우 같다??아..모르겠고 이젠 이 무언의 강요를, 침묵을 더는 못 견디겠다. 나는 결국 이미 조금쯤 축축해진 치맛자락을 힘겹게 놓고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려 녀석의 손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이내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맞잡아 오는 손바닥은 내 것과 같이 조금은 축축했다. 아, 너도 나랑 같았구나.. 붉어진 게 뻔한 얼굴을 들어올리자 나와 데칼코마니 같은 녀석의 표정이 보였다. 곧 두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동시에 활짝 미소지었다.

카페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깔려있다. 커피를 시키려 줄을 선 사람들, 그 주문을 받는 아르바이트생, 콘센트가 있는 자리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수다를 떠는 사람들. 그리고, 한쌍의 연인은 카페 안의 시끄러운 정적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들켰을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싸늘함을 두고 아무 일도 없었노라 말하는 것이야말로 기만이리라. 귀여웠던 앙 다문 입술에서 언제 책망의 말이 나올지 모르는 지금이 바로 시험 5분전, 질의응답 1분전이겠지. 아아, 안다면 어디까지 아는걸까. 배신이란 이름의 조각배를 타고 어디까지 갔는지 네가 알아챈걸까. 너를 두고 다른 이와 손을 맞잡고 입술을 부벼대며 서로를 탐한 사실을 알아버린걸까. 그렇다면 미리 말을 할까. 전신을 두들겨맞느니 뺨 한 쪽 맞는 게 나으리라. 그러나 모른다면? 단지 약속을 파토낸 것으로 화를 내는거라면? 알 수가 없다. 너도 내 행동을 진작 알지 못했으니 연인이란 것은 어쩌면 서로를 지독히도 모르는 두 멍청이를 로맨틱하게 이르는 표현일지 모른다. 한숨을 내쉰 사악한 멍청이가 커피를 홀짝이며 상대를 쳐다본다. 아직도 열릴 기미가 없는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욕이 아니길 빌며.

우리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같이 앉았음에도 눈 하나 마주치지 않고 단 한마디의 대화조차 나눠지지 않는게, 처음의 우리와 너무 반대되어서 괜히 과거를 회상하게 만들었다. 난 차게 식어가는 컵만 꼼지락대며 눈치를 살폈다. 날 부른 이유가 있겠지. 짐작가는 게 있다고 하면 있지만 그렇지 않길 바랄 뿐이다.

끝인가보다. 옛 시절이 무색하게 결국 우리도. 내가 하는 일이 다 이렇다. 어떤 관계도 오래가지 못한다. 너는 그동안 애썼다. 모두 나의 탓이다. 다만 혀끝에 얹힌 말을 제치고 또 무거운 공기만 뱉는다.

제시 《 횡단보도의 불이 일제히 초록불이 되어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속, 멈춰있는 한 사람. 》

거리를 둔 두개의 상자에는 푸른빛만이 맴돌고 있었다. 파란색일까, 초록색일까, 알아차리기는 어려운 푸른빛이었다.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도 않은채, 걸음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은 어쩐지 쉴새 없이 움직이는 개미떼와 닮아있었다. 서로가 어디를 가는 지도 모르면서 반대편으로 꾸준하 걸어나가는 것이, 퍽 우습기도 했다.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같이 움직이는 그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있는 누군가. 홀로 시간이 멈춘 것 처럼 거리 사이에 남아있었다. 그사람들은 그 누군가를 신경쓰지 않았다. 자기 갈 길만 계속 갈 뿐. 그가 울부짖어도, 땅을 치며 엎드려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게 당연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노래가 끝나면 멜로디는 잊혀지는 것처럼 나는 너를 잊어갔다.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인파 속에 섞여 횡당보도 앞에 서있는 거였고 그 건너편에 아무도 없었다.아니,없어야만 했는데… 누군가 서 있었다.파란색으로 염색한 머리,장난기 넘치는 미소,재밌다는 듯 응시하는 시선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래 하나가 끝나고,귀에 익은 멜로디가 다시 귀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파란불. 이유가 무엇일까. 모두가 일제히 한 곳으로 걸어간다. 간혹 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느리게 걷는 사람은 없다. 자리에 멈춘 사람도, 우는 사람도 없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진실로 옳은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 빠르고 단호한 발걸음이다. 자신이 걸은 이 한 발자국이,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재촉한 뜀박질이, 자신의 미래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끼이익- "뭐, 뭐야!" "차에 치였어요! 사,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달려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춘다. 멀리서도 알아차릴 만큼, 어렴풋이 피가 보인다.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누군가는 아이의 눈을 가리고, 누군가는 경찰을 부른다. 사람이 죽어 있다. 찌그러진 검은색 승용차 안팎으로, 몇십의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 걸음만 더 갔더라면. 그나마 목숨을 건진 몇조차, 꼼짝없이 저들과 같은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켜본다. 언제나처럼, 멀리에서.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왜 저들의 미래를, 저들의 죽음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냐고? 보통 사람들은 남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이다.

빨간 불에서 파란 불로 바뀌고 사람들은 일제히 횡단 보도를 걷기 시작한다 그저 한 사람만 빼고 그 사람은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다시 파란 불에서 빨간 불로 바뀌고 차는 '빵- 빵' 소리를 내며 그 여자를 욕하며 여자 옆으로 가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 여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하늘을 보고 얘기한다. "역시, 이 세상은 도움이 안되네."

횡단보도의 불문율. 운전자가 보는 신호등은 보행자가 보는 신호등보다 1초 정도 빠르다. 아니, 어쩌면 0.5초 정도.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은 왠지 조금 늦게 켜진다. 그리고 0.5초간, 도로 위 두 개의 신호등은 모두 빨간색이다. 움직이지 말 것. 조용히 기다릴 것. 고요함 속에서. 모두들 각자의 고요함 속에서. 멀리서 어느 모르는 차의 경적 소리가 들려오고 해는 쨍쨍 내리쬔다. 길가의 한 가게에서 약간은 철이 지난 유행가가 들려오고 해는 또 쨍쨍 내리쬔다. 두 개의 빨간불이 둥둥 떠다니는 이곳만 마치 마법에 걸린 듯 고요하다. 대낮의 도시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은 듯 하다. 갑자기 한 남자가 구멍 밖으로 걸어나간다. 걷는 모양새가 상당히 급하다. 그 남자를 시작으로 모두들 마법이 풀린 듯 다 함께 걸어나간다. 보행자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뀐다. 초록색으로 바뀌고 1초, 2초가 지난다. 어떤 사람이 횡단보도에 가만히 서있다. 3초, 4초가 지난다. 가만히 서있다. 우리는 그가 아직도 0.5초의 다른 세계, 빨간불이 둥둥 떠다니고 태양이 저 멀리로 사라져버리고 대낮 속에 밤이 허우적대는 어떠한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겠다.

열댓명 정도의 사람들이 내 주위에 서있다. 초조한 듯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앞의 붉은 신호등을 보았다 애간장을 태우는 안경 쓴 남자, 어깨를 드러낸 화려한 흰 색 원피스를 입고 큰 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여자, 가릴 빛이 한 줄기도 없을 것 같은 흐린 날씨였음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리듬을 타며 음악을 듣는 60대쯤의 노인 하나. 그 외에도 이 널찍한 길에는 서로의 색을 드러내려고 아우성대는 사람들이 가득 서 있었다. 그 때, 빨간 불이 깜빡 하고 사라지더니 녹색 불이 들어왔다. 우스꽝스럽게도 아까의 다채로운 색상을 지녔던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리 모두가 같은 행동을 취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가 된 마냥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서 그 거대한 흐름을 관측했다. 그러자 곧이어 나도 모르게 흐름 속으로 천천히 발을 옮기게 되었다.

깜박. 사방에서 눈 아프게 번쩍이던 빨간불이 환한 초록색으로 바뀌자 사람들은 일제히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역시, 사거리라 그런지 사람이 많아서 건너는 것조차 정신이 없었다. 통화하며 걷는 사람부터 급하게 달려가는 사람까지. 안그래도 많은 사람이 말그대로 사방 이곳저곳에서 더 쏟아져 나오니 천천히 걷고 있는 내 머리 속은 온통 사람들의 북적거림에 점령당하는 기분이었다. 그 복잡함 때문일까 괜한 다급함에 금방이랑도 초록불이 꺼질 새라 신호등이 있는 앞을 기웃대는데 어떤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 마치 그곳만 시공간이 다른 듯, 기묘하게 멈춰 서있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이 기묘하다기보단 그곳만 공기의 흐름이 다른 것 같아 기묘하게 느껴지는 거지만. 물론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것은 무례인 것을 잘 알고있는 사회인으로써 나는 고개를 곧 돌렸지만, 신기한 마음에 자꾸 그곳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속 어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하는 사람일지, 무슨 사정일지 궁금함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데 이를 해소하지 못하자 이젠 그냥 쳐다볼까 하는 충동까지 들었다. 안타깝게도 난 그런 충동을 이길 수 있는 멋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양심에 따라 돌렸던 고개를 양심과 맞바꾸어 다시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아까 그가 있었던 곳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 눈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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