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좋아. 추운 게 좋아. 차가운 바람이 내 뼛속까지 스치고 가는 게 좋아. 볼을 베듯 매섭게 치는 칼바람이 좋아.
•그래서 여름이 싫은거야?
응. 여름은 덥고, 푹푹 찌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땀에 젖은 몸은 찝찝하고 벌레가 들끓지. 밤에 들려오는 모기 소리는 날 깨우는 아주 신경질적인 녀석이야.
모두 하얗게, 내장까지 보일만큼 투명하게 얼어버렸으면 좋겠어.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당신은 곧 나야. 아, 그러면 날 사랑하는 게 되네. 이래서 벌이라는 거구나. 응, 벌 맞네. 난 나를 사랑할 수 없으니까. 당신 말이 맞았어. 그래도 미안하다 하지 마. 날 사랑해줘. 사랑한다 한 마디만 해줘.
•그럴 수는 없어.
역시 당신은 잔인해.
당신을 부정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건 곧 너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 되지.
나를 부정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러지 마. 그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
나는 당신이 미워요.
•울지 마.
당신이 다정한 게 싫어.
•널 탓하지 마.
끝까지 이타적이야···.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가여워.
•약 안 먹었어?
내가 너무 가여워.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어.
•약 더 늘린 거 맞지?
지금 이 순간에도 날 죽여줄 수 있는 게 나라니, 얼마나 비참해.
•어서 약 먹자.
날 위해주는 척하며 전전긍긍하는 당신도, 그런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나도.
약 먹을게. 재워줄 거 아니면 이제 신경 꺼.
화가 나. 모든 인간이 미워. 나라는 인간조차 너무 밉고 증오스러워. 어째서 이런 내가 태어난거야? 왜 날 원망하면서 죽여주지 않는거야? 왜 내 죽음을 막는거야? 대체 왜···.
•울지 마. 아프게 하지 마.
나 너무 죽고 싶어. 고통없이, 하루 빨리 죽고 싶어. 이곳에서 하루라도 더 숨쉬며 살고 싶지 않아. 제발 누구든 나를 죽여줘. 그럴 수 없다면 더이상 내 죽음을 막지 말아줘.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나는 평생 공허와 외로움을 느껴야겠지. 친구와 있던, 가족과 있던 말야. 그것조차 내가 선택한 죄의 업이라면 평생 안고 살아야겠지. 내가 죽을 때까지 변함없겠지.
차라리 죽지 그래? 하기엔 그러게, 나도 죽고 싶은데 말이야. 어디 조용한 곳에서 한적한 바람을 느끼다 잠을 자듯 죽고 싶었는데 말이야.
사는 것처럼 죽는 거마저 쉽지 않아서 이제는 엄두도 못내는 내가 참 한심스럽고 혐오스러워서.
그냥 이대로 죽기를 기다릴까 해.
울고싶어. 내 몸의 모든 수분을 눈 밖으로 쏟아내고 말라 죽고싶어.
•우선 씻자. 재밌는 거라도 보면서 씻고 나와서 자자.
그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다고. 진짜 개같아.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어. 왜 안 죽는거야? 대체 왜? 왜 아직도 나는 살아서, 이 지옥을 견뎌야 하는거야? 나는 대체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지?
심연 속을 걷는 건 나 혼자로 족해.
•나도 있어. 잊지 마.
아무도 내 곁에 머무르지 않게 할거야.
•너무 외로운 길이 되지 않게 곁에 있을게.
응. 당신과 나는 쭉 혼자야.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곁에두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가자. 그 끝은 결국 하나일 테니까.
인간은 힘들 때 신을 찾아. 신에게 묻지.
신이시여, 저는 왜 이리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까?
신이시여, 부디 제게 답을 알려주소서.
대답없는 신은 늘 침묵을 택하지. 신은 답을 알려주지 않아. 신은 답안지가 아니니까. 물으면 원하는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지.
반대로 신이 인간에게 물을 수 있겠지.
아이야, 뭘 그리 괴로워 하니.
나의 아이야, 어째서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거니.
답은 언제나 내 속에서 찾아야 해. 신이 아니라. 그걸 앎에도 인간은 늘 타인을 원망하고, 타인에게 잘못을 돌리고, 타인에게 물어.
난 어떻게 해야 해? 난 왜 이러는 거야?
때론 타인이 잘 알고 있을 수 있겠지. 그럼에도 결국 답은 나에게서 찾아야만 해.
너무 잔인해.
•괜찮아. 잘 해결 됐잖아.
그럼 해갈되지 않은 내 감정은 누가 해결시켜 주는데?
•그건···.
봐, 결국 내 책임이 아닌 일에도 내가 고통스러워 해야 해. 내가 다 감당하고 짊어져야 해. 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거야?
•일단 진정해.
진정! 진정! 진정이 안되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차라리 죽일까? 응? 이것도 다 죽여서 시체로 만들까? 불태우고, 재만 남아서야, 그때서야 속이 시원해지겠니?
•왜 죽고 싶은 거니?
늘 뻔한 질문 말고 새로운 걸 가져와 보세요.
•왜 살고 싶지 않은 거니?
이봐요, 틀렸어요. 틀렸다고. 살고 싶은 것도, 죽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난 그냥 잠을 자고 싶을 뿐이에요. 어떤 수면제를 내 앞에 들이 밀어도 지겹도록 눈을 뜨는 밤을 끝내고 싶을 뿐이라고요. 나 좀 쉬고 싶어요. 이만 잠들고 싶다고요. 그것조차 내겐 사치예요?
왜 울고 있어요?
•···.
당신 우는 거 정말 오랜만에 보네.
•···왜, 그랬어.
이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뭐.
•···정말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던 거야?
응. 그럼 내가 뭘 더 할 수 있어.
•···.
알면 말해줄래요? 나약해 빠진 내가 내 몸에 상처내는 것 말고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더 있는지.
경찰도, 센터도, 모두 내 편이 아닌데.
나는 사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야. 불치병이라 치료방법도 없대. 어떤 약을 써도 듣질 않는대. 나아지지 않는대. 이대로 죽어가야 한대. 근데 그게 너무 싫어서, 자살을 하려고 했어. 곧 죽을건데 더 빨리 죽는 게 뭐가 나빠.
근데 그게 나쁜거래.
왜?
꼭 내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야만,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해야만 내 삶을 중단할 수 있는거야?
내 존엄은, 나는, 내 고통은 누가 감당해 주는데. 누가 책임져 주는데.
대신 짊어주지도 못할 이기적인 인간들이 내게 강요해. 아직 죽지 마. 난 이렇게나 괴로운데. 지금도 목이 막혀서 간신히 색색 숨만 내쉬는데.
그래도 죽지 말래. 곧 죽을건데 기다리래.
그게 언젠데? 얼마나 걸리는데? 며칠, 몇 달, 몇 년. 누가 장담해 그걸? '곧' 이라는 기준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데?
이래도 당신들은 자살이 나쁘대. 안 겪어봐서. 내 고통을 몰라서. 감히 대신해 주지도 못할 거면서. 무책임한 혀만 쉼 없이 움직이더라.
편히 죽을 수 있을 때 죽는 게 뭐가 나쁜데. 내 죽음은 내가 선택하고 싶다는 내 존중은 대체 어디에 갖다버린 건데. 박탈된 내 존엄은 어디서, 누구에게 찾아야 하는데.
내게서 죽음도, 존엄도, 안식도 빼앗아 가는 당신들이 가해자가 아니면 누가 가해자지?
놓아, 놓아, 날 그만 놓아. 나는 자유로운 새야. 날개는 없지만, 언제든 하늘을 향해 날 수 있지.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보다 자유롭지.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수평선까지 날 수 있지.
놓아, 놓아, 날 그만 놓아. 당신이 붙잡을 건 내 옷깃이 아니라 이미 떠나버린 바람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작별을 하기 위해 뒤돌아선 너의 모습이 너무나 환한 빛 아래에 놓여져 있어서. 그런 네가 빛도 보이지 않을 만큼 환하게 웃고 있어서. 나중에 다시 만나, 라는 너의 작별 인사가 이대로 마지막일 것만 같아서.
나는 그만 아스팔트 바닥 위 패배자처럼 주저 앉있다.
사실 이유를 안다. 그대로 달려가 붙잡고 싶었다. 내 몸을 살리기 위해 덕지 덕지 붙인 주사바늘을 빼버리고 그대로 달려가고 싶었다. 너에게로 날아가고 싶었어. 나중이 언제인지 물어보고 싶었어. 나도 잘 가, 인사해주고 싶었어.
그러나 나는 이미 날개가 꺾인 꺽새다. 너에게 갈 수 없어.
나 고장 났어.
•응, 그러게.
눈물도 안 나오고 이제는 흥분도 안 해. 화가 안 나.
•더 자야 할 거 같아.
잠도 안 와. 렘수면도 고장 났나 봐.
•···.
울지 마. 있지, 나 당신이 그동안 왜 안 왔는지 알게 됐어.
•···.
내가 아파서 당신을 못 부른 거야. 당신은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바보같이 내가 또 아파서.
•아냐. 그런 거 아니야.
나 이제 목을 못 쓴대.
•···.
그런데 별생각 없었어. 오히려 다행이지. 이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니까. 눈만 깜빡이면 되잖아.
•일시적인 걸 거야. 분명 나아질 거야.
아니, 난 지금 이 상태가 나아.
•···왜?
내게 말을 거는 것들이 없어. 조용하잖아. 꼭 내가 죽은 거 같아.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 가끔 필요한 것만 물어보고 마는 게 더 나아.
•응, 그래. 그건 다행이네.
그리고 말야, 이제 당신과 대화할 시간이 늘어서 좋아.
•···날 좋아하진 마. 난 죄인이야.
그리고 나도 죄인이지. 무고한 가해자. 희생될 마녀. 밤의 양.
•응, 우린 같은 죄인이야. 벌을 받고 있는.
있잖아요.
•응.
내가 또 아파서 당신을 못 부르면.
•···그러면?
날 기다리지 마. 다시는.
•그게 네가 바라는 거라면, ···기꺼이.
이제 서로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는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나도 슬퍼해선 안 돼. 우린 그저, 하나인 채로 가야하고 하나였던 것처럼 눈을 감아야 해.
•···.
하지만 내 죄가 아직 다 청산되지 않았다면 그 시간은 좀 더 멀어지겠지. 그땐 당신을 부를 기회가 몇 번 더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응.
그러니까 나 대신 울지 마요.
•···미안해.
재밌는 거 하나 알려드릴까요?
•어떤?
사실 세상이 불공평한 건 신이 심심해서예요.
•음···.
모두가 공평해 다재다능하고 예쁘고 잘생기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난 그 불공평함이 마음에 들어요.
•신이 불공평하게 만든 세상이?
응. 생각해 봐요.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으니까 하루에도 새로운 소식이 끊기지 않고 생성되잖아요.
•호모 루덴스라는 거구나.
응, 맞아요. 그거 꽤 와닿네요. 맞아요, 난 호모 루덴스일 거예요.
난 죽지 못하고 빨랫줄처럼 널려 있어. 누가 날 잡아 끌어내리지 않는 이상 영영 날아가지도 못한 채 메여 있겠지.
•널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하니.
아니, 아니요. 진작 칼을 챙기지 못한 날 원망해요. 그랬다면 그런 줄 따위 잘라내고 훨 훨 날아갔을 텐데. 날개처럼.
두 팔을 침대 위에 늘어트린 게 꼭 힘없는 봉제인형과도 닮아서, 나는 순간 내가 죽은 인형인 줄 알았지. 눈만 뻐금뻐금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흐리멍덩하게 뜬 채 허공을 응시하니 내가 퍽이나 신경 쓰였나 보지. 당신들은 그렇게나 내가 불안해 보였나 봐. 난 멍을 때려도 눈을 뜬 채 죽은 시체 같은가 봐.
나는 나예요, 80억 인구 중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요. 가치관도, 생각도, 철학도, 신념도 모두 다 제각기 다르다고요. 나도 그래요. 나도, 나도 가치관을 생각을 철학을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대부분의 보통의 사람의 틀에 끼워 맞추려하고 마치 복제품을 만들 듯 비슷한 부류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거죠? 대체, 왜?
나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고,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여기에 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사람에게 상처받고, 고통을 겪은 이들 아닌가요? 그럼 그 상처를, 고통을, 과거의 트라우마를 사람으로 치유하라는 말이 있죠. 당신도 그 보통의 사람들처럼 내게 틀을 씌울 건가요? 그들처럼 만들고, 나를 어떻게든 정상의 범주에 속한 이로 만들 건가요? 그런데 내가 변할 생각이 없다면요, 사람에게 상처받은 이 마음을 고쳐먹을 생각이 없다면요, 당신은 날 포기하겠죠. 도저히 틀에 맞춰지려 하지 않으니까. 욱여넣을 수 없으니까. 제자리에 들어가지 않는 퍼즐을 버려지기 마련이죠. 내가 개선의 의지가 없고, 발전해 나아갈 생각이 없다면 당신마저 날 포기하겠죠. 그럼 난 그때 또다시 죽기 위해 시도할 거예요. 그럼 누군가 날 다시 목격하고 신고하려나요? 그럼 난 다시 폐쇄병동에 입원해 없는 입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빚을 질까요? 다시 나아질 생각이 없는 난 어떻게든 정상인처럼 보이려 한 뒤 탈출해 다시 같은 시도를 하고, 그럼 누군가 다시 목격하고··· 이 끝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이 뭔지 아세요? 날 이해하고, 포기하는 거예요. 포기하세요. 난 당신들이 끼워맞출 사회의 퍼즐이 될 인간이 못 되니까. 날 그만 놓아요. 놓아주라고요. 나에게서 신경끄고, 잊어버리세요. 당신들 그거 잘하잖아. 정작 필요할 땐 외면하고 하등 도움바라지 않을 때 위선적인 손길을 내밀고 멋대로 동정하고 멋대로 구해놓고 멋대로 다시 버리는 거. 당신들 그거 잘하잖아요. 겉과 속이 철저하게 다른 내로남불, 모순과 괴변의 망상쟁이. 그러니 나 같은 괴물이 태어난 게 아니겠어요? 사회가 만든 괴물이 어디 나뿐일까. 고작 한 둘일까. 근데 그들이 조용한 이유가 뭘까요? 다 어디에 처박혀 사회에서 청소돼서 그런 거 아니겠나요? 나도 그렇게 청소시키고 깨끗한 거리가 진짜인 것처럼 속여 팔지 않겠어요? 간사하고 아둔한 천치들. 나는 당신들처럼 살지 않을 거야.
헤어질 걸 알면서 왜 사귀어?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사랑도 언젠가 식을텐데?
•보통은 그걸 생각하고 사귀진 않지.
사랑이 뭐라고 다들 그리 안절부절, 잡지 못해서, 손 안에 쥐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
•사랑을 모르니 평생 알 수 없겠지.
···당신은 언제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은 해주지 않는구나. 나 되게 간만에 나아졌는데.
•미안해.
됐어. 텅 빈 말 지겨워.
•왜 그들에게 아무런 저힝도, 대항도 하지 않니.
항거한들 내 입지나 대우가 달라지지 않아요. 그리고 내겐 없는 걸요.
•무엇이?
복수심, 증오, 원한. 그런 것들.
•···.
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될 수 없어요. 내겐 조력자가 되어 줄 파리아 신부같은 존재도 없고, 가장 중요한 복수 대상이 없어요.
•그들은 네 복수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거구나.
당신은 그런 내가 안타까운가 보죠. 꺼진 재를 보고만 있는 게 허무하고 쓸쓸하신가 봐요. 내가, 끝내 자학과 자해에 시달려 엉망이 된 모습이 가여우신가 보죠.
감정은 꼭 꼭 눌러담아 절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사람은 유리병보다 연약하고 잘 깨져요.
난 영원히 당신들 곁에서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에요.
광대도 아니며, 병풍도 아니고, 조형물이나 장식물 따위도 아니에요.
내 입은 당신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내 귀는 당신들의 지루한 소음을 듣기 위해 있지 않고,
내 코는 당신들 향수나 술 냄새 따위를 감별하기 위해 있지 않고,
내 눈은 당신들의 억울함과 진실을 꿰툻기 위해 있지 않아요.
난 당신들의 기계도, 도구도, 감쓰도 아니란 말이에요.
내 지난 행보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 잘 알아요.
그러나 난 잘못을 뉘우칠 생각이 없어요.
내 씻을 수 없은 죄는 내가 짊어지고 갈테니 부디, 나를 형벌하려 들지 마세요. 그것은 당신의 권한이 아니에요.
누구도 내게 휘두를 수 있는 판결이 아니며, 당신은 그것을 위임받을 자격이 없어요.
감히 월권을 저지를 생각, 마세요.
라고 말한들 이미 짐승이 되어버린 당신들 귀엔 들리지 않겠지.
갖고 싶은 게 없냐는 뜬금없는 질문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했다. 결국 이도저도 아닌 엉망인 얼굴로 그 질문을 곱씹고 소화시키고 있을 때 다시 질문이 날아들었다. 갖고 싶은 거, 정말 없어? 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내게서 무엇을 들은 것처럼 이미 저들끼리 결론을 짓고 규명해버렸다. 갖고 싶은 거, 많지. 당신들은 평생 이뤄줄 수 없는 숙원부터 내 안에 새싹으로 피다 죽은 소망까지. 그 사이 채워지지 않는 공백까지 입 안에 짓씹어 누르며 나는 언젠가처럼 고개를 젓고 아니요, 짧게 대답했다.
온건한 내 입이 내릴 수 있는 최후는 그정도였다.
당신들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아시나요?
뭘 못 먹고, 뭘 할 줄 아는지는 아시는지요?
내가, 당신들 손가락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당신들 눈길 한 번 내게 스친 적은 있었나요? 그 적선조차 없던 눈빛에 할 말을 잃고, 자비를 구걸하던 손길을 거둔 내 심정을 단 1%라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으신지요?
무슨 자격으로, 그 낯짝을 들이밀며 내게 자애로운 신처럼 구시는 건데요?
마른 눈가를 닦아내며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국만 남은 그 곳에 가득찼던 게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그리도 내 심장을 옥죄어와 폐부를 찔렀는지. 난 당신을 사랑했어, 언어로 이루어진 말은 입 밖에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사랑했었어, 목소리를 담고 나와야 할 그것은 기도 속에 처박혀 내 목을 짓눌렀다. 아니, 아니야. 당신을 존경했어. 부정의 말은 이단자가 내뱉은 최후의 통첩같기도 했다. 당신을···, 그러니까.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내가 낼 수 있는 변명이 있었는데. 기어코 변명을 덧씐 진심을 묻어둘 수 있는 단어가 있었는데. 잊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사랑했었다고. 거울 너머 나를 보는 것조차 힘겨워 했던 내가,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당신을 감히 마음 속 한 곳에 품어 키우고 있었다고. 함락할 수 밖에 없는 진실을 인정하고야 만 나는 더이상 예전처럼 당신을 볼 수 없다. 어디선가 당신의 부스러기라도 주워먹는 날에 나는 배탈나고 말 것이다. 비참히, 홀로 사랑한 이의 말로라면 딱 어울리는구나.
후회하지 않겠다고 한 말, 사실 거짓말이었어.
외롭지 않다는 말, 사실 가짜였어.
평생을 따라다니던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생각이 없다는 것도, 같잖은 변명이었어.
뙤약볕 아래에서 내가 뭘 생각했는지 알아? 우습지만, 이대로 타 죽어버려도 좋으니 날 저 태양이 태워주길 바랐어. 흔적도,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람을 거부하는 주제에 외롭다 징징대는 내가 꼴보기 싫어서.
미련도, 아쉬움도 부정하지 못하면서 후회하지 않는다는 내가 경멸스러워서.
죽고싶다면서 정작, 가장 곁에 있는 생일을 챙겨주지 못해 안달인 내가.
그런 내가 너무 가증스럽고 치가 떨려서.
왜 못 죽는걸까 한탄만 하는 내가.
왜 아직도 살아있는 걸까, 왜 나는.
이런 무가치한 생각만 하며 지렁이처럼 꿈틀대기라도 하는 내가 징그러워. 토가 나올 거 같아.
그래, 꼭 구더기에 핀 시든 꽃 같아 나는.
그렇게 더럽고 추한 내가 혐오스러운 거야.
혐오감마저 구더기가 파먹었나봐, 잘 자고 눈 뜨면 씻은 듯 잊고 하루를 연명하는 걸 보면.
잠은 훌륭한 도피처라고 누군가 그러더라고. 잠을 잘 때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고, 모든 상념은 어두운 암흑속에 집어 넣어 잊으면 된다고. 그런데 말이야, 나는, 나는 도저히 눈을 감은 어둠 속으로 도피할 수가 없어. 매일 밤 나를 찾아오는 악몽은 어찌나 친절하신지 노크도 없이 내 꿈 속에 침범에 모든 걸 헤집어. 내 감정, 내 마음, 내 정신 모든 것을 말이야. 그래서, 약 없이는 잠들 수 없어. 눈을 떠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야. 나는 결국 꿈 속으로, 잠으로 도피하지 못했으니까. 결국 내가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어. 어디에도. 막다른 길이야, 하고 주위를 돌아보면 내 앞에 있던 길마저 사라져. 그렇게 밀폐된 곳에서 숨도 쉬지 못하고 진동하는 핸드폰처럼 멍청하게 벌벌 떨고 있을 때,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어져. 인간의 삶을 살기를. 인간이었던 나를 몰수하고 이대로 영영 사라지고 싶어져.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약을 먹었다. 그 이상 가만 뒀다간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몰랐다. 그래서였다. 마지막 보루로 남겨둔 약을 쥐고 입안에 넣어 목구멍에 흘러넘치는 물을 들이부어 간신히 생각을 종결시킨 건. 내가, 여기서,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자유를 박탈당하고 생사권을 갈취당하고 주도권을 빼앗긴 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무료하고 진전없는 삶. 내일이 와도 불안하지 않고, 조용한 공간에 홀로 고독하게 숨을 들이키며 사는 거.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시체처럼 움직이지도,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지만 매일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살아갈 수 있을 거 같다고. 죽을 힘을 내기 위해 사는 게 아닌, 언제 죽어도 상관 없이 사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욕심을 버려서 모든 걸 내려놓고 초연한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