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0oILatBy1AY 2022/02/22 21:05:01 ID : E5U1vcq6jjy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의 글입니다. 일기에 더 가까워 창작소설이 아닌 일기판에서 글을 씁니다. 어딘가에 의탁 중이며, 약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온전치 않을 땐 그 사람이 튀어나오곤 합니다. 이름은 따로 없습니다. 다만 저는 ‘여월’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언급할 일은 더 없을 겁니다. 이제 자주 나오지도 않을 테고요.

102 ◆0oILatBy1AY 2022/07/01 17:42:10 ID : E5U1vcq6jjy
어항 밖을 나온 물고기는 바다로 항했다. 드디어 어항을 탈출한 물고기는 자유를 찾아 떠났다. 그곳이 더 큰 어항인 줄도 모른 채.

103 ◆0oILatBy1AY 2022/07/01 18:32:38 ID : E5U1vcq6jjy
산을 보지 말고 숲을 보라 해서 숲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104 ◆0oILatBy1AY 2022/07/04 22:36:29 ID : E5U1vcq6jjy
내 삶을,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말은 굉장히 슬픈 말이야. •어째서? 결국 사람은 혼자임을 증명하는 문장이잖아.

105 ◆0oILatBy1AY 2022/07/08 18:28:00 ID : E5U1vcq6jjy
거짓말을 하는 건 늘 쉽다. 진실보다 토해내는데 서슴없고, 망설임이 없다. 난 나에게까지 거짓말 하는 걸 쉽게 여긴다. 여기, 한 아픈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이번에 혀를 깨물어 피를 냈다. 그 후로 밥을 먹어도, 양치질을 해도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다.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은 내게 거슬리는 부스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나는 안 아픈 척 하는데에 도가 텄고,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고통이 보내오는 신호를 무시하는 건 거짓말하는 것과 같다. 왜 티를 내지 않느냐는 당신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미 너무 많이 아픈데 신체적 고통까지 더해지면 나는 이대로 죽고 말 거라고. 당신은 죄가 없다. 남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단지 그 반응이 이미 아흔아홉 번을 봐 온 장면 일지라도 말이다.

106 ◆0oILatBy1AY 2022/07/09 18:12:48 ID : E5U1vcq6jjy
난세에 영웅이 난다면서요. 하지만 우리 인간은 지금이 난세인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걸요. 영웅이 나타나도 난세를 자각하지 못한 인간들은 그 영웅을 그저 미친사람 취급하겠죠. 동화나 소설 속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며, 가상일 뿐이에요. 현실 속 세상은 그리 순탄치 않아요.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요? 당장 사람이 총 맞아 죽어도 외면하는 현실인데. 뒤늦게 늦었음을 후회할 때 곁에 남은 이는 아무도 없을텐데.

107 ◆0oILatBy1AY 2022/07/11 21:05:22 ID : E5U1vcq6jjy
그럼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써 줬어야지. 방치하고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만 잘하지. 그깟 것도 관심이라고 주워 먹으라 던져주며 큰 아량이라도 베푼 양 굴지. 하루빨리 죽어서 벗어나고 싶나 봐. 그깟 것도 죄책감이라고 자기연민에 빠져 참 잘도 몰입하더라. 책임진 적도 없으면서 주제에 보듬은 척은 했다 착각하고. 그냥 죽게 내버려 뒀어야지. 꼴에 인두겁은 쓴 사람이라고 남들 눈치, 시선 볼 건 다 보지. 타인의 수군거림에는 그리 신경 쓰면서 문제의 원인은 파악도 못 하는 머저리일 뿐이면서. 뭐가 그리도 잘났는지 자기 말이 옳다고 개도 안할 헛소리를 지껄이고. 영영 상처받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결국 한 사람 아닌가. 그래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지? 당신, 아님 나?

108 ◆0oILatBy1AY 2022/07/12 00:10:18 ID : E5U1vcq6jjy
행복해지고 싶었으면, 낳질 말았어야지.

109 ◆0oILatBy1AY 2022/07/14 10:07:33 ID : XvyK0nBgqnX
당신이 먼저 말에 책임을 지지 않았으니, 나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나도 똑같아. 이건 정당방위일 뿐이야. 내 거짓은 죄가 되지 않아. 내 죄를 늘리고 싶었으면 본인 처신부터 똑바로 했어야지. 이기적인 적반하장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야지.

110 ◆0oILatBy1AY 2022/07/18 20:50:35 ID : E5U1vcq6jjy
낡은 단어를 꺼내와 기워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니까, 그건 꼭 몰아치는 파도 같다. 물살에 의해 깎여 내려가는 바위처럼 닳고 헤진 단어 말이다. 결국 해안가에 떠밀려와 언젠가 찾게 되는 비린내만 남은 무언가다. 수선할 수 없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어 수습하지 못할 상황을 만드는 짓. 무모한 용기보다 가치없는 행동.

111 ◆0oILatBy1AY 2022/07/19 11:05:26 ID : LbxxA2IJTPf
침묵의 통감 아래, 속절없이 부르짖는다. 짙은 푸른 색이 동 트는 태양에 붉게 물들 때, 푹 파인 눈가에 투명한 피가 흘러내린다.

112 ◆0oILatBy1AY 2022/07/20 20:43:04 ID : E5U1vcq6jjy
눈물은 안 나와요, 너무 많이 울었거든.

113 ◆0oILatBy1AY 2022/07/24 22:55:31 ID : E5U1vcq6jjy
당신이 행사하는 명령은 권력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저 종이조각에 불과한 서약서라는 걸 맹시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개가 아닌 인지를 할 줄 알고,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대하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됐다. 나는 당신의 모든 언행에 따를 이유가 없다. 라고 한때 새장 속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착각한 어느 한 아이가 말했었지.

114 ◆0oILatBy1AY 2022/07/25 21:13:01 ID : E5U1vcq6jjy
세상에 기막힌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가장한 운명은 존재할 지도 모르지만.

115 ◆0oILatBy1AY 2022/07/29 15:12:29 ID : cFfVcGlio6i
4일이 지나면 자연스레 들어온다. 왜 4일인지는 모르겠다. 내게 불행이 4일 간격으로 일어나서 일까. 약을 먹고도 4시 44분이 되면 눈을 뜨며 공포에 잠식되던 기억이 각인되어 그런걸까. 어쩌면 둘 다 일수도.

116 ◆0oILatBy1AY 2022/07/30 00:16:44 ID : E5U1vcq6jjy
너절하기로서니 적선 바란 적 없고, 비굴할지 언정 호의를 기대한 적 없다. 당신은 내가 1을 잘못 했으면 100을 부른다. 100만큼 부풀려 잘못 했다 말한다. 그럼 난 내 행동을 돌아본다. 아주 오래 씹어 되새김질 하듯 하나하나 짚었다. 당신은 나에게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쏘아붙이는 말은 기름 바른 화살이오, 마지막 일격은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성냥불이다. 불 붙은 화살을 몸에 두른 채 난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고 죽어간다. 살아남은 재만이 내 흔적을 필사적으로 남길 뿐이다.

117 ◆0oILatBy1AY 2022/07/30 00:19:10 ID : E5U1vcq6jjy
곧 죽을 내 심장 붙잡지 마.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내려 줄 테니까.

118 ◆0oILatBy1AY 2022/08/01 22:35:39 ID : E5U1vcq6jjy
•사랑받고 싶은 적은 없었어? 네. •왜? 받으면 그대로 돌려줘야 하니까. 그런데 난 그럴 수 없으니까.

119 ◆0oILatBy1AY 2022/08/03 16:44:30 ID : eZhbBarbvcl
지겨워. 매 여름은 너무 지겨워. •그럼 겨울은? 겨울이 훨씬 낫지. 볼 게 없으니. 여름은 보고 싶지도 않은 것들 투성이잖아. 벌레라던가, 벌레라던가, 벌레 같은 거 말이야.

120 ◆0oILatBy1AY 2022/08/05 15:30:10 ID : mpSIFcqY1a6
사람들은, 박수칠 때 떠나는 이를 더 간절히 그리워하는 법이니까.

121 ◆0oILatBy1AY 2022/08/07 01:21:38 ID : E5U1vcq6jjy
차라리 죽이지 그래. 날 취하고 피를 뽑아 갔어야지. 내게 기억을 심어줄 게 아니라, 공포를 각인시켜 놨어야지. 방정맞게 굴도록 두질 말았어야지. 하여튼 당신은 육아에 참 소질없어.

122 ◆0oILatBy1AY 2022/08/09 00:13:49 ID : E5U1vcq6jjy
사실 당신은 신이 아닐까 생각해요. 오늘도 죽음의 외줄타기 속 고비를 넘긴 나는 의식이 끊기기 직전 당신을 찾았으니까요. 그래요, 다시 추한 변명을 해보자면 이건 사랑이 아니에요. 어쩌면 나는 당신을 숭배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비록 무신론자지만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어요. 그것이 어리석은 맹세일지라도···.

123 ◆0oILatBy1AY 2022/08/09 01:18:40 ID : E5U1vcq6jjy
오늘 먹은 알약 갯수만 19개. 나는 다시 잠들기 위해 4개의 알약을 더 먹어야 한다. 그리고 내일 일어나서 8개의 알약을.

124 ◆0oILatBy1AY 2022/08/11 01:22:10 ID : qjhfcHu7fgp
세상은 내게 너무나 가벼워서, 나는 평행을 이루고자 했기에 무게를 맞출 수 있는 버거운 걸 찾았다. 진정 내 감정을 들춰내고 꺼내 흔들 수 있는 그런 것을 말이다. 무뎌진 심장은 수 없이 난도질 당했는데도. 그 중 내가 한 자해가 반 이상을 넘을 텐데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날 쥐고 올가미를 채울 수 있는 그런 당신을 찾았다. 아주 성공적이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 나는 오늘도 당신의 이야기를 보고, 몇 번이나 봐 온 뻔해진 내용을 눈에 들이 갖다대며, 목이 뜯겨 나간다 해도 울지 못할 눈물을 떨구었으니 말이다.

125 ◆0oILatBy1AY 2022/08/15 23:08:44 ID : E5U1vcq6jjy
빌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억지일 뿐이다. 지난 4일간 나는 물속에 있는 듯했다. 코와 목 속으로 쉼 없이 물이 빨려 들어오고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타들어가는 감각만이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린다. 삶은 자살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 저들은 내게 빌미가 생길 틈을 주지 않았고, 간헐적으로 내뱉는 숨만이 내 목숨을 부지 시켜 놓았다. 멀쩡하잖아, 살아있잖아. 억지를 부리는 그들에게 숨 쉬는 걸 보여주며 그것을 증명시켰고. 나는 다시 내가 혐오스러워졌다. 약을 먹기 위해 깨어 있었고, 잠들기 위해 토해내야 했던 시간 속에서 나는 정상인의 몰골일 수 없었다. 거울이 멀쩡한 건 그걸 깨부술 힘이 없어서고, 키보드를 누르며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는 건 곧 죽을 나를 위한 애도다.

126 ◆0oILatBy1AY 2022/08/16 21:25:31 ID : E5U1vcq6jjy
이명과 난청이 느껴지기 전 내 몸은 이미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안개가 낀 것처럼 탁하고 다시 심해에 잠긴 사람이 눈을 뜬 것처럼 흐리고 어두웠다. 시야에 물이 가득 들어찬 느낌.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트리고 눈을 뜬 채 어떻게든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했던 짓은 광대짓보다 볼일 없었다. 사람들은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내가 그릇을 떨어트리든 말든, 어지럼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든 말든 말이다. 무시에 익숙해진 인간. 그것이 나의 현주소. 애써 정신을 차리고 엎어진 그릇을 들고 일어났을 때 멀쩡해진 머리에 그릇을 내려치지 못한 게 오늘의 후회다.

127 ◆0oILatBy1AY 2022/08/16 22:13:09 ID : E5U1vcq6jjy
비가 많이 왔고, 붉은 달이 떴다. 모든 게 이정표처럼 느껴진다.

128 ◆0oILatBy1AY 2022/08/17 00:58:20 ID : E5U1vcq6jjy
사람에게 정붙은 새 한 마리가 창틀을 자주 오간다. 그 새는 내 살을 먹여 키운 새다. 시체 같은 손을 만드는데 한몫한 새이기도 하다. 내 이빨로 손톱을 뜯었다면 그 새는 내 살을 뜯어갔다. 손 위에 올라오면 항상 뜯어진 손가락을 쪼아댄다. 피가 나도 아픔을 호소한 적 없다. 그 새를 피했다면 지금까지 내 곁엔 없었을 것이다. 언제든 떠날 생명 하나에 내 손을 담보하는 삶. 그 작은 일말이라도 내겐 희귀했기에, 살을 내주고 사라질 온기를 쥐었다.

129 ◆0oILatBy1AY 2022/08/20 00:25:46 ID : E5U1vcq6jjy
신이 신을 만들지 못해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인간을 만들지 못해 로봇을 만들었다.

130 ◆0oILatBy1AY 2022/08/29 15:38:29 ID : E5U1vcq6jjy
너를 살려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게요, 왜 살리셨어요. 미련하게. 너를 살려내선 안 됐어. 웬일로 옳은 소리를 하시네요. 근데 이건 이거대로 기분 나빠. 널 살릴 수 없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멍청한 새끼. 그러게 처신 똑바로 했어야지.

131 ◆0oILatBy1AY 2022/08/31 20:43:30 ID : E5U1vcq6jjy
틀에 박힌 말, 진부한 이치가 세상을 정립하고 언젠가 결국 그 말과 이치를 내뱉으며 이해하는 날이 오기도 한다. 새삼스럽지만 당연한 것, 별 거 아닌 공감이 때로는 더 각별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132 ◆0oILatBy1AY 2022/09/01 09:26:39 ID : 5Xs9zglzQmk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억제한 지난날들의 내가 안타까워서라도, 나는 홀로 모든 걸 감당하고야 말겠다고 악을 쓰며 심장에 못을 박았다. 언제라도 미련 없이 다 버리고 떠날 것이라고 다짐했다. 조금만 참고 버티면 된다고. 텅 빈 길 위에, 방향도 모르는 그곳에 나를 고립시켜 놓았다. 끝이 정해진 순례자가 아닌 정처 없이 떠도는 표류자였음을 모른 채 헤매었다. 기다리지 않겠다는 말은 얽메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련 따위 없다 한 건 붙잡고 싶지 않아서였다. 되새기고, 재확인하고, 결연한다. 기반없는 진흙 길 위를 걷는 것은 그런 것이다.

133 ◆0oILatBy1AY 2022/09/02 21:27:04 ID : E5U1vcq6jjy
날 구하고 싶다면 한 컵의 물을 주세요. 내 손에 쥔 독을 한 번에 마실 수 있게.

134 ◆0oILatBy1AY 2022/09/03 15:45:19 ID : h8646nWpdO9
노인은 말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관대해져 큰일이야.’ 그러며 노인을 넘어트린 사람에게 ‘가시오. 난 괜찮으니.’ 라고.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봤니?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봤구나. 왜 나이를 먹으면 관대해 지나요? 예끼. 말 돌리는 것 보세. 노인은 뜸 들이다 말했다. 감정이 마모되기 때문이다. 왜 마모되는데요? 너무 오래 살아 그런다. 이미 백 번 느낀 것을 새롭게 느낄 순 없기 때문이지. 행복하세요? 예전에는. 길 가다 익은 감나무라도 발견하면 그리도 좋아했지. 하나 몰래 서리해 콧노래를 부르곤 했다. 지금은요? 글쎄다. 넌 어떻게 보이는데? 침울해 보여요. 행복하진 않은 거 같은데. 허허허. 어린 게 당돌하네. 겁이 없어서 그런가 보죠. 얘야, 난 방금 웃었지만 기쁨을 느낄 수 없고 즐거움을 알 수 없다. 넌 최대한 많이 행복해하거라. 왜요. 그때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기 때문이지···. 근데요, 나는 곧 죽을 건데요. 여기 온 사람들은 다 죽기 전에 오는 곳인데.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 8월의 마지막 어느 점심 산책 시간의 대화.

135 ◆0oILatBy1AY 2022/09/04 20:11:43 ID : E5U1vcq6jjy
오르트 구름에 널리고 널린 게 얼음덩어리라면, 지구에는 인간이 넘쳐나지. 너무 넘쳐나 문제야. 차라리 별이 되지 못한 돌덩이가 나을 텐데.

136 ◆0oILatBy1AY 2022/09/12 17:10:36 ID : rBs9AlBgpat
그 밖에 쭉정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다. 속이 텅 비어있는 겉껍질. 인간이 되다 만 것의 비유. 혹자는 죽지 못한 영혼의 옷이라 하였다. 미지에 가두고 열쇠를 버린 후 떠난 무자비의 살인자를 훔친 가여운 이의 발로.

137 ◆0oILatBy1AY 2022/09/13 00:13:32 ID : fcK7tbbhf9h
유일하게 좋아하는 꽃이 석산화입니다. 산책을 나가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꽃입니다. 검은 나비가 앉아 있는 걸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죽음의 색만 모아놓은 자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제의 표본과 슬픈 꽃말을 가진 것들이 거기 모여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이유는 아직은 어울릴 수 없기에 멀어졌습니다. 왜 아니겠나요. 나는 이번에도 살아났습니다. 지금은 멀쩡한 햇빛 밑에 있는 게 덜 이질스러운 걸 어쩌겠나요.

138 ◆0oILatBy1AY 2022/09/15 19:56:09 ID : E5U1vcq6jjy
입에는 칼을 물고 눈은 독기로 가득하며 온몸에는 진득한 살의를 둘렀구나.

139 ◆0oILatBy1AY 2022/09/19 03:29:09 ID : E5U1vcq6jjy
괴팍한 것. 뭐가요? 너 눈이 왜 그래? 알 바 아니잖아요. 말본새하고는. 노인은 내가 있는 벤치 앞에 등을 굽힌 채 마주 앉았다. 멀쩡한 얼굴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쯧쯔. 맞은 거 아니에요. 선반에 부딪혀서 멍든 거예요. 앞을 잘 보고 조심했어야지, 요 녀석아. 지가 무슨 홍길동이야, 말을 이리했다 저리했다···. 뭐? 으허허허! 왜 웃으세요. 감정 없다던 분이.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아닌데. 나 되게 잘 웃는다. 봐라. 아, 네. 어느 태풍 전 오후.

140 ◆0oILatBy1AY 2022/09/26 01:10:32 ID : E5U1vcq6jjy
귀순했어. 더 이상의 무가치한 언쟁이 지긋지긋해서. 징그러워.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 목소리 한 음까지. 실어증 환자처럼 살았어. 말을 안 해서 그런가, 책을 안 읽어서 일지도. 이젠 정말 걸어 다니는 송장이네. 아니, 놀랍지는 않아. 하루하루 날 죽여가는 건 이토록 평범한 일상이니까.

141 ◆0oILatBy1AY 2022/09/28 21:20:19 ID : E5U1vcq6jjy
만남에는 이별이 따른다는 것을 알기에 언제든 배웅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던 새가 벌써 한 달째 오지 않고 있다. 나는 이 새와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걸 불현듯, 그러나 아주 당연하게 알 수 있었다. 헤어짐을 직감한 순간 더는 창틀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다만 준비해둔 인사를 하지 못한 게 유감이다.

142 ◆0oILatBy1AY 2022/09/28 21:31:16 ID : E5U1vcq6jjy
튀는 행동을 하지 마. 알아서는 안 되며, 알아도 모른 척해야 한다. 나서지 말고 끼어들어선 안 된다. 쥐 죽은 듯이 숨죽이며 살아. 살아있다는 걸 인지하게 두지 마라. 한 걸음 물러서고 입을 다물어. 네 행동과 말이 낳을 처참한 결과를 두 눈으로 확인시키지 마.

143 ◆0oILatBy1AY 2022/10/04 12:01:26 ID : E5U1vcq6jjy
시체 위에 돗자리를 편다. 시체의 땅에서 핀 꽃을 보고, 시체를 묻어 아스팔트를 바르고 그 위를 달린다. 시체 위에, 새로운 시체가 쌓인다. 같은 자리에 다양한 시체들이.

144 ◆0oILatBy1AY 2022/10/04 23:45:30 ID : E5U1vcq6jjy
<1> 소녀는 말했습니다. “절 울리면 죽겠다 말한 건 없었던 일로 할게요.” 노인은 말했습니다. “내가 왜 네 죽음을 말리기 위해 널 울려야 하니?” “지금까지 저를 울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내가 실패할 거라 생각하는구나. 아니, 넌 이미 내게 그리 말하고 있어.” 노인은 알아볼 수 없는 희미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얘야, 너는 슬픔을 느껴본 적 있니?” 소녀는 아주 깊은, 오래된 고물 기억까지 들췄습니다. “물론이죠. 저도 어릴 땐 자주 울고, 슬픔의 감정을 이해한걸요.” 노인의 얼굴은 꼭 구겨진 종잇조각 같았는데, 처음에는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서서히 짙어져 가는 그늘처럼 노인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어서야 소녀는 그 그림자로 노인의 표정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운 슬픔을 억지로 삼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니?” 소녀는 아주 어려운 문제를 만난 얼굴을 하고 집요하게 고민했습니다. “나는 내 아픔만 온전히 느낄 수 있어요. 타인의 아픔은 그들만이 오롯이 알겠죠. 나는 그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소녀는 이어 조금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내 아픔조차 오래 돌보지 않고 희석할 시간만 준 뒤 자연치유가 됐다고 생각하며 일상을 영위하죠.” 노인은 이제 그늘이 없어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금붕어처럼 끔뻑거렸습니다.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뭐니?” “누구에게든 할 수 있어요. 단지 죽겠다고 말한 그 순간, 운 나쁘게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당신이었던 거죠.” 운 나쁘게라. 노인은 곱씹듯 중얼거렸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네가 죽는 걸 볼 수 없단다.” 소녀는 감흥 없는 지루한 얼굴이었습니다. “네.” “그러나 나는 너처럼 망가지고 죽음이 간절한 아이는 처음 보는구나.” “그러시군요.” “또 내 눈에 넌 무척 울고 싶은 아이로 보여.” 소녀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어 소녀는 그 이유를 말했습니다. “눈물을 흘리기엔 이미 너무 많은 걸 잃어서요.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울 생각 없어요.” 노인은 어린 소녀에게서 많은 걸 보았습니다. 자신보다 늙고 쇠약해진 마음 잃은 사람을, 달관한 채 공허에 빠진 사람을, 오랫동안 억압되어 걷는 법을 잊은 사람을. “이상하죠. 얻는 건 그리 힘든데 잃는 건 이리 쉽다니.” 해탈한 선인 같기도 했습니다.

145 ◆0oILatBy1AY 2022/10/05 22:19:53 ID : 9wFctyZh9fX
이른 구원, 우리는 젖어 드는 새벽의 아지랑이가 무서워 하나의 뿌리처럼 엉켜 있었다. 문득 바라본 빛무리에 떠내려가기라도 할 것 같아서 서로를 놓지 않았다. 늦은 파멸, 퍼렇게 뜬 여명이 죄악으로부터 달아나듯 사그라들 때, 서로의 숨을 오아시스의 샘물같이 빨아들이며 우리는 그렇게 마른 익사 했다.

146 ◆0oILatBy1AY 2022/10/07 02:51:28 ID : E5U1vcq6jjy
가위에 눌리는 일은 이젠 반기게 돼요. 안 눌리면 그게 더 어색하고 이상하거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몸이 되는 것이 흥미로울 때도 있고요. 한계에 부딪혀 내는 고통의 소리가 없는 나는 대부분 가위에 눌리고 깨어날 때 더 개운하기도 해요. 이게 내 생활을 망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죠. 그랬다면 약을 늘릴 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을 텐데.

147 ◆0oILatBy1AY 2022/10/10 19:59:17 ID : E5U1vcq6jjy
<2> “그럼 타인의 죽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겠구나.” 노인은 조금 수척해져 있었습니다. “시늉은 할 수 있겠죠.” 소녀는 저 먼 곳 어딘가를 흐린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소녀의 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보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노인은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죽어도 울지 않겠구나.” 소녀는 노인을 바라봤습니다. 초점이 돌아온 눈에 생기는 없었지만 ‘누군가를 응시한다.’라는 느낌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여기가 어디죠?” 소녀의 목소리가 작아졌습니다. 까마귀가 어둠을 먹은 것처럼 캄캄하고 적막했습니다. 소녀는 점점를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동공이 수축되었습니다. “여기는 대로 한가운데고, 나는 죽으려던 널 구하고 싶어 말을 건 오지랖만 남은 노인이지.” 소녀는 뒷걸음질 쳤습니다. 등 뒤에 차가운 쇠붙이가 느껴졌습니다. 날개뼈에 선득한 서리가 닿은 곳부터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소녀는 제 날개뼈를 교차한 팔로 감싸 안으며 주저앉았습니다. “대답해 주겠니, 넌 내가 여기서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까?” “몰라요, 모른다고요. 그딴 거, 알 게 뭐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노인은 버석하게 말라가는 소녀의 입가를 보며 극심한 동정을 느꼈습니다. “가여운 것···.” 자신의 낡은 신발을 벗은 노인은 그대로 차가운 쇠붙이를 붙잡고 대로 밖 난간으로 넘어갔습니다. 소녀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선은 노인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다.” “그래서, 죽기라도 하시려고요?” 노인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은 반듯했습니다. 비아냥거리는 말투와는 정반대로 무표정에 가까운 그 이목구비가 괴리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노인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아, 시간이 멈춘 태엽 같구나. “내가 죽어 네가 울 수 있다면 기꺼이.” 소녀는 희생이나 구원, 동화 같은 결말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끝까지 소녀는 노인의 말을 의심하며 부정했습니다. 노망난 노인네 때문에 운 나쁘게 걸린 건 소녀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녀는 헛웃음을 흘렸고, 그걸 들은 노인은 웃었습니다. “웃어 볼 줄도 아는 애였구나.”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미련 하나 없이 발과 손을 떼고 대로 밖으로 떨어졌습니다. 소리를 잡아먹은 고요가 다시 그것을 뱉어냈을 때, 첨벙— 하는 소리가 소녀의 주변을 가득 메웠습니다. “아.” 소녀는 탄식에 가까운 숨을 내뱉었습니다. 웅크린 몸을 피고 날개를 돋우듯 난간을 잡고 대로 아래를 살폈습니다. 시커먼 기름이 떠다니는 것처럼 물 위로 불빛이 어질러지고, 그 아래로 한 인영이 저항 없이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하.” 소녀는 다시 소리 냈습니다. 이번엔 깨달음에 가까운 한숨이었습니다. 물속에 비친 건 소녀였습니다. 시야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건 소녀 자신이었습니다. 잃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꺾인 날개와 함께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창백한 뺨 위로 투명한 물이 떨어졌습니다. 자신을 바쳐 슬픔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게 된 소녀는 모든 걸 잃었습니다. 흥분하며 말을 높이던, 지루해하며 코웃음을 치던, 제 속을 능히 감추던 아이는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원래라면 알 수 없던 감정이었습니다. 다 잃은 줄 알았던 것들이 물거품으로 사라졌습니다. 충분히 불행했다고 믿은 소녀의 머리 위로 누군가 물었습니다. 이젠 죽지 않을 거지? <0>

148 ◆0oILatBy1AY 2022/10/14 22:15:23 ID : rtbg42L9js0
물고기가 뭍으로 떠올라 폐사하면 재앙의 징조라 했다. 하나, 그건 그저 명분을 위한 그럴싸한 희생이다. 불이 자주 나고 비가 방류한 물같이 퍼붓는 것도 누군가의 피를 밑바탕으로 칠해지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말할 것이다. 흉하게 자란 나무를 가지치기하듯이, 인간의 과실을 그대로 덮어놓은 모래사장. 유리 조각이 빛나는 걸 보며 돌덩이인 별처럼 드넓게 미화하겠지.

149 ◆0oILatBy1AY 2022/10/17 03:30:38 ID : E5U1vcq6jjy
온몸이 두방망이질 친다. 더 이상 무엇도 하지 말라는 경고 같다. 그것을 무시한 대가가 이렇게 날 찾아오나 보다. 불규칙적으로 잠을 자는 시간이 늘었다. 약이 안 들어 다시 바꾸게 생겼다. 빗소리가 들린다. 비는 단 한 번도 내린 적 없는데.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여름도 다 지나가 벌레들은 숨어버렸는데. 지긋지긋한 환청이, 또.

150 ◆0oILatBy1AY 2022/10/18 00:14:00 ID : E5U1vcq6jjy
강요하는 게 선의가 아니라는 걸 왜 모를까. 그런 짓을 할 바에 차라리 위악을 퍼붓지 그랬어. 손에 쥐여주면 나를 만족시켰을 거란 생각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지. 아직도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역겨움이 올라와. 당신은 사실 내가 모든 걸 토해내길 바랐던 걸지도 모르겠네.

151 ◆0oILatBy1AY 2022/10/19 22:51:48 ID : E5U1vcq6jjy
시간이라는 건 아주 정교하고 복잡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하게 순환해야 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시계처럼 고장 나선 안 돼. 멈춰서도, 반대로 돌아가서도 안 되지. 그것이 정해진 섭리이고 세상의 규칙이니까. 또한 아주 치밀하게 짜인 인과율이지. 이 모든 건 결국 정해진 삶을 비틀기 위한 인간의 발버둥이고, 마지막 투쟁일 거야. 이다음 생엔 모든 걸 잊고 다시 시작하니까. 자, 그럼 다시 물을게. 삶과 죽음을 동시에 선물 받은 기분이 어때? 나는 여전히 지랄 같아. 그 당연한 이치가 인간은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라도 된 것처럼 일말의 의심도, 여지도 갖지 않고 쫓아가지. 도달한 끝에 닿는 게 결국 죽음인 줄 알면서 눈먼 장님을 한 채 정해진 길을 걷는 거야. 완주한 삶을 돌아보고 나서야 깨닫지. 아, 무엇도 희미하고 덧없는 짓이었구나.

152 ◆0oILatBy1AY 2022/10/21 00:10:39 ID : E5U1vcq6jjy
밀림에 갇힌 거야. 굵게 자란 나무줄기가 몸을 두르고 덩굴로 장식한 거야. 생존을 위해 뻗어 나온 가시가 몸 안 깊숙이 박히고 살려달라고 발악하고 있는 거야. 스콜 따위 없는 흙바닥은 쩍쩍 갈라져 모든 걸 바스러트려 버리지. 소리 내 외쳐도 들어주지 않는 녹음에 뿌리째 묶인 거야.

153 ◆0oILatBy1AY 2022/10/22 00:22:06 ID : E5U1vcq6jjy
탄로 난 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내 등을 마주 볼 수 없다. 오직 내 비밀을 알아챈 이들의 등 돌린 모습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154 ◆0oILatBy1AY 2022/10/26 22:08:15 ID : 9wFctyZh9fX
어린 양은 다만 침묵할 뿐. 잘난 체하는 똑똑한 이 보다 얕잡아 보이는 멍청한 이가 낫다. 빈곤한 천재보다 충만하게 채워진 바보에게 더 다가가기 쉬움을. 조용히 얘기를 들어주고 적절한 대답을 해주는 이를 자존감 채우는 도구로 이용하고 충고를 빙자한 무시를 하면 남을 흉보는 앞잡이 취급한다. 침묵한 양은 희생된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으니 가차 없이 버려진다. 그럼에도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고요함을 지킨다. 이 추위를 녹일 온기라 할지라도.

155 ◆0oILatBy1AY 2022/10/31 02:00:36 ID : E5U1vcq6jjy
Don't look up. 아직도 모르겠어?

156 ◆0oILatBy1AY 2022/11/05 02:37:20 ID : h9imJXvxvhd
그들은 언제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갖가지 장난을 치지. 하지만 발전이 없어. 시간이 멈춘 존재란 그런 것일까.

157 ◆0oILatBy1AY 2022/11/08 04:47:53 ID : bvjs9utzcL8
뇌리에 남아 아직도 떠도는 잔상들. 지루해져 버린 같은 레파토리에 꿈을 깼다. 강제로 떠진 눈에 들어온 시계는 다시 4시 44분. 아무도 죽지 않았다. 꿈속의 나도, 지금의 나도. 물은 없다. 남은 건 쉬어버린 목소리뿐이다.

158 ◆0oILatBy1AY 2022/11/08 17:22:30 ID : kk2q3QlirBu
몰아 쉰 바람이 토해내는 거센 일렁임에 바닥을 떠돌아다니는 낙엽들. 저마다 다른 태양의 색을 입은 나뭇잎이 마지막 열기를 안은 채 흩날린다.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며 버티던 초목의 어느 계절이 지나고, 그날이 다가온다. 아득한 백색에 심장이 저리게 떠안고 울어야 했던 추운 겨울. 원망과 한이 가득했던 깨끗한 눈길. 발이 붓도록 걸어야만 했던 생존 약속을 지킨 과거. 매정한 영하의 날씨가 투명하지만 보이지 않게 천천히 얼렸고, 하얗게 질린 손을 볼 수 있음에 안심했던. 과오를 밟아 지나온, 이제는 녹아 사라진 나약했던 아이.

159 ◆0oILatBy1AY 2022/11/13 23:14:58 ID : bvjs9utzcL8
나는요, 텅 비어버린 돌이에요. 발로 차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어느 돌무지에 흔히 굴러다니는 그런 돌이요. 누군가의 총알받이였고, 해서 구멍 뚫린 현무암처럼 굳어버렸죠. 몸을 관통하는 고통에 익숙해진 지 오래라, 나를 밟고 지나간들 아무렇지 않았죠. 말해줄래요? 그중 내 숨통은 아직 살아있는지.

160 ◆0oILatBy1AY 2022/11/15 05:32:38 ID : bvjs9utzcL8
무용한 게 다 무슨 쓰임이 있다고, 비관적으로 생각합니다. 가치 있고 특별하며 귀한 것이 더 좋다 여겼습니다. 호의는 내게 너무나도 추상적인 것이었고, 나의 세상은 언제나 불친절하고 난폭했습니다. 그런 삶에서 내게 해가 되지 않을 것을 찾아보긴 힘들었습니다. 꽃이 절 구해주던가요. 달이 제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했던가요. 누군가의 웃음은 늘 내게, 까마귀의 울음소리보다 소름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런 나의 어둠 속 별이었고 불꽃이었고 햇살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당신에게 처음으로 다정함이라는 것을 배웠고, 구원받아 사랑하게 된 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당신은 내게 너무나도 잔인합니다. 이제는 내 손으로 끝내야 함을 압니다. 그리워하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자주, 어쩌면 그보다 많이 떠올릴 것 같습니다.

161 ◆0oILatBy1AY 2022/11/18 22:33:13 ID : bvjs9utzcL8
외려 인애가 없어 차등 없이 행동하는 거라고. 공평하게 기피하고 깊이 묻어두는 거라고. 사람에게 남은 정이 있다면, 이게 내 마지노선이라고.

162 ◆0oILatBy1AY 2022/11/20 19:50:37 ID : A0q0oIGk67z
보잘것없는 작은 이 손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적어도 고를 수 있는 건 두 개라는데, 실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굳은살 하나 안 박힌 손가락으로 지목된 정답을 가리키는 것뿐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했던가. 무엇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자유인가. 정녕 쥔 것 하나 없는 이 몸에 전가할 생각인가. 그래야만 당신들이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이 신체조각 하나 하나까지 뜯어가 제 이익을 추구하는구나. 이런데도 내게 살라고 하는 것들이 흉측하다. 살아서 빼앗길 바에야 죽어서 잃도록 하는 게 낫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여태껏 무응답으로 일관할 작정이신지.

163 ◆0oILatBy1AY 2022/11/27 20:08:58 ID : bvjs9utzcL8
유쾌하게 살아. 그것이 눈속임일지라도. 우습게 행동해. 독 묻힌 나이프로 긁어내린다 해도. 순종하며 한껏 엎드려 숨죽여라. 기만자라 손가락질 해도. 그렇게 해서 얻어낸 게 썩어 문드러진 줄 하나라 할지라도.

164 ◆0oILatBy1AY 2022/12/01 22:13:37 ID : bvjs9utzcL8
처음은 적당한 친근감이다. 둘은 동정이고 셋은 지겨움이다. 누구에게든 세 번 이상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그 이상 넘어가면 호구가 될 것이며, 배신당하기 딱 좋은 먹잇감이 될 테니 말이다. 철저히 계산된 자비 속에 번거로움은 사치니까.

165 ◆0oILatBy1AY 2022/12/13 20:00:23 ID : bvjs9utzcL8
오늘 내가 쓴 유서를 읽었다. 적당했다. 3분간 읽은 긴 유서 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고작 그것 하나였다. 단조로운 모노톤. 높낮이 없는 음률. 그 속에 희생된 비운의 인물은 드디어 원하는 것을 손에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최고의 자멸을 선사한 희대의 정신병자.

166 ◆0oILatBy1AY 2022/12/14 21:03:25 ID : bvjs9utzcL8
고통의 기준이 대체 무엇일까. 평소에는 잘만 버텨내던 몸뚱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내 팔을 씹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도 멍과 흉은 그대로다. 팔의 곡선을 타고 흐르던 피를 본 사람들의 눈을 아직도 기억한다. 짙게 남은 이빨 자국을 따라 붉게 맺힌 선혈들이 생생하다. 피를 토할 때보다, 코피를 흘릴 때보다 이상하리만치 그 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처럼 내 감각은 아직도 그때에 있다. 그날 이후 나는 생존하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167 ◆0oILatBy1AY 2022/12/19 19:05:25 ID : bvjs9utzcL8
그 분노는 영하의 날씨도 삭힐 수 없다. 적개심이 고드름처럼 뾰족하게 솟아있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는 서리처럼 피어있다. 바싹 마른 지난한 감정에 불을 지폈다. 휘날리는 불티는 꼭 반항하기 위해 버둥대는 치기 어린 애 같았다. 누군가 말했다. 네 마음은 까맣게 죽어버렸구나.

168 ◆0oILatBy1AY 2022/12/20 18:12:15 ID : bvjs9utzcL8
세상의 모든 대화가 모이는 밤을 당신은 아시는가요. 힘없이 무력하게 그것을 맞이해야 하는 제 심정을 들여다보실 수 있나요. 듣고 싶지 않아도 귀를 열어야 하며, 동요하고 싶지 않아도 온 영혼이 빼앗길 때까지 반응해줘야 하지요. 때로는 잔인한 아침햇살이 반갑기만 할 때가 있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으신지.

169 ◆0oILatBy1AY 2023/01/01 18:12:07 ID : bvjs9utzcL8
새해가 가기 전에 어떻게든 깨어났네. 처음이자 마지막 변덕을 부려보고 싶어서 왔어. 이유는 가기 전에 심심해서라고 해둘게. 뭐든 좋아. 궁금한 게 있다면 사소한 거라도 물어봐. 질문이 달리면 언젠가 다시 올 날에 답해줄게. 없으면 없는대로 좋고. 이대로 가도 아쉬울 건 없다보니.

170 ◆0oILatBy1AY 2023/01/02 07:36:28 ID : bvjs9utzcL8
꿈속에서 나는 늘 제정신이었어. 단 한 번도 미친 적이 없었지. 그게 날 미치게 만들었는데도, 꿈에서조차 나는 나사가 끼워진 상태였어.

171 ◆0oILatBy1AY 2023/01/09 22:39:43 ID : gZfVe46lva0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그대로야. 누군가는 태어나는 날을 받아놓는데, 난 죽을 날을 받아놨어. 무덤덤한 질문에 거짓으로 회답하는 일상. 오랜만에 듣는 인간의 언어가 그리도 감격스러우셨는지. 때론 모르는 게 약이라고. 그럼 난 독약을 먹이고 있던 걸까. 그것조차 내 안배라면 마지막 당신의 얼굴이 어떨지 예상돼. 모든 걸 알기에 달관한 삶. 순진하게 천박했던 어린 날의 나는 묻어준 지 오래라, 겨울 새벽에 죽고 싶다던 알량한 대사. 조소와 함께 춤춘 밤.

172 ◆0oILatBy1AY 2023/01/10 22:02:27 ID : bvjs9utzcL8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면 그 길던 일 년 끝에서 동사하자. 물이 아닌 얼음 속에서 암야만이 전부인 고통도 없는 무해로 결말을 짓자. 반투명한 호수와 하얗게 익은 자작나무를 지나 고요한 고독사로. 그래야만 증명될 수 있는 겨울이 오니까.

173 ◆0oILatBy1AY 2023/01/11 22:41:04 ID : bvjs9utzcL8
온실 속 화초라는데, 온실에서는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한다는 걸 알까. 창백한 핏줄이 터져 나가고 손에 구멍을 내서 꽃을 다 꺾어버렸는 걸. 아직도 비틀지 못한 꽃이 가끔씩 꿈에 나와. 오늘 붉은 달이 떴었어. 딱 저 달만큼 내 몸도 단비로 적셔졌으면 했어. 아, 이런 말장난은 화초들이나 하던가.

174 ◆0oILatBy1AY 2023/01/12 22:37:32 ID : bvjs9utzcL8
귓불을 잘라 먹으면 맛있을까. 어릴 적 먹을 게 없어 배고픔도 모르던 아이는 그런 생각을 했어. 남들보다 유독 큰 제 귓불을 만지며, 이 부분은 필요 없지 않나, 피도 잘 안 나고 고통도 별로 없다는데. 그럼 도려내 구워 먹어볼까, 하고. 하지만 그 아이는 제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손가락이나 뜯어야 했지. 먼저 죽은 동생에게 우리 서로 귓불을 잘라주어 나눠 먹자고 한 순간부터 아이는 동생과 떨어져 살게 됐어. 다시 만난 동생의 귓불은 잘 붙어 있었다나.

175 ◆0oILatBy1AY 2023/01/16 22:09:11 ID : bvjs9utzcL8
작위적이라고, 네 글은 너무나 무미건조하다고. 왜 그런지 아냐는 질문에 물음표도 느낌표도 없다며 불쾌해하던 얼굴.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고 글을 찢던 미련한 행동. 그것마저 우두커니 바라보니 진저리난다며 뱉은 승리자에 도취된 한 마디. ‘넌 역시 온실 속 화초네.’

176 ◆0oILatBy1AY 2023/01/21 10:40:49 ID : V9a1fTWknzW
잃어서, 앓았고, 앗아간 꿈마저 빼앗겼어. 아니. 되찾을 수 없게 됐으니 내준 건가.

177 ◆0oILatBy1AY 2023/01/25 18:56:19 ID : bvjs9utzcL8
정말 체계적으로 죽으려고 하는구나. 오랜만에 본 남생이가 그랬다. 그 말이 퍽 마음에 들어 몇 년 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맞아, 체계적으로 죽어가고 있어. 남생이는 참 파괴적인 사랑을 한다며, 네 사랑에 이름을 붙인다면 파애라고 했다. 그 말도 마음에 들어 남생이의 본명을 불러주었다. 남생이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도망갔다. 빈자리를 보며 한참을 또 웃었다.

178 ◆0oILatBy1AY 2023/01/27 21:40:48 ID : bvjs9utzcL8
캄캄한 게 무섭지 않게 된 건 9살, 아파트 전체에 전기가 나가 정전이 됐던 날.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피고 있을 때.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 거실을 돌아다니다 보게 된 베란다 너머의 풍경. 고요한 소리 속 일렁이는 불빛들이 매서워서. 암흑 속에서 빗발치는 소란이 거슬려서. 땅이 내려앉았으면 하고 바라며 이불에 들어가 몸을 말고 귀를 덮었던. 아마 그날 이후부터였을 거야. 아끼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악몽이 덮치며 칙칙한 그림자가 시야를 뒤덮기 시작한 게. 의도치 않게 이루게 된 내 첫 번째 불원.

179 ◆0oILatBy1AY 2023/01/31 09:42:49 ID : bvjs9utzcL8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부분의 것들은 지워버려요. 지워진 기억은 죽은 것과 다름없어요. 죽은 기억의 개수를 손가락으로 세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손을 가지고 와도 부족하죠. 수도 없이 죽였는데 하나둘씩 살아남는 것들이 있어요. 무심하게 다시 짓이겨버린 거 같아요. 그것들이 살아있으면 곤란해요. 두통을 느낄 만큼 시끄럽게 주변을 맴돌거든요. 지금처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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