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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문제를 정리하자면
0. 극도로 소극적인 성격과 불안한 정서
1. 무의식적인 반추
2. 늘 긴장하고 불안해하고 있음
3. 늘 최악의 경우부터 상정함
4.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
5. 타인의 탓을 하는 걸 두려워함
대충 이 정도
스무살. 여자. 중학생 시절 범불안장애 진단 이력 있음.
약 복용했었고 상담치료 받았었고 고1인가 그때까지 손목 그었음. 아직도 자기 뺨 후려갈기거나 벽에 대가리 처박는 정도는 함.
1번은 내 성향이랑 관련이 있는 문제같다고 생각해.
내가 과거의 어떤 경험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되새기며 분석하고, 나중에 갑작스럽게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지 이성적으로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대책을 미리 찾아두려는 것 같아. 그때가 되면 이성이 날아갈 걸 아니까.
늘 최악의 경우부터 상정하는 것도 그래서겠지.
예전 일을 되새기며, 그때의 상황을 조감하고 다시 판단해서 자기 스스로를 납득시키면 그제서야 한번의 사이클이 끝나. 하지만 그 결과를 납득하고 나면, 당연히 그랬어야만 한다는 걸 알기에 우울해져. 그리고 또 다시 무의식적으로 그 일에 대해 생각하게 돼.
과거의 여러 사건에서 오는 불안감과 우울함을 내가 소화시킬 수 있는 형태로 바꾸기 위한 되새김질인데, 이게 멈추지 않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당연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할 증거가 필요한데, 그 증거를 찾아내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 사건 자체는 충분히 받아들였음에도, 그에 딸려오는 우울까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거야. 납득하고 나서도 사고가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게 가장 끔찍한 일이야.
실제 동물의 되새김질 행위로 비유하자면, 보통 소는 여물을 마구 씹어서 반추위로 넘긴 뒤 적당히 효소로 물러진 걸 다시 입으로 가져와 제대로 씹고 본 위로 넘긴다고 해. 그렇게 하면 제대로 소화가 되는 거고. 하지만 내 방식을 소의 되새김질에 적용하면, 씹어서 넘긴 풀죽이 본 위로 넘어간 뒤에도 반추를 하는 것이 멈추지 않아서 위액을 입으로 가져오고, 혀를 씹어가며 다시 짓씹다가 피 섞인 위액을 도로 목구멍으로 넘기는 느낌.
뭐가 문제였지? 아하, 그렇구나. 그게 문제였어. 하지만 그것만 갖고는 이런 일은 안 생기는데? 생각해보니 그때 이 행동은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던 것 같아. 그럼 그것도 고치자.
이런 식으로만 가면 모를까, 이대로 내버려두면 그 행동을 하게 된 이유가 뭐였지? 그 전까지는 그런 방식으로 살았으니까. 그런 방식이 굳어진 이유가 뭐지? 어째서지? 이렇게 사고가 확장되고, 결국 태어난 것이 문제구나. 하고 생각하게 돼.
생각해봤는데, 남 탓을 하지 않는 건 어쩌면 내게 있어 가장 편한 방법일 지 몰라.
전부 내 잘못이었던 게 되면 그냥 다 편하잖아.
그냥 나만 참으면 편해지지. 생각하기가 싫어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다니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야.
내 권리를 포기하면 남들이 더 얻어갈 수 있다는 것도, 결국 그런 식으로 자기 스스로를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자위질하는거나 마찬가지지.
이렇게 자꾸 사고방식이 불안한 쪽으로만 흘러가. 그럴 때마다 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밀어내려고 해. 가능하다면 외국어인 편이 좋아. 한국어 가사면 아무래도 모국어다보니 직관적으로 꽂히는 감이 있어서 금방 다른 걸 떠올려버리거든. 발음만으로는 직관적으로 알 수 없는 외국어 가사의 번역문을 기억해내며, 최대한 그 의미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 불안했던 일들은 생각이 안 나거든. 잊어버리니까.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멍청해서 다행이야.
그래도 이젠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냥 생각을 그만둬버리고 싶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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