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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D (64)
19.다치거나 아픈 사람 묘사 (2)
20.소설 써보고싶다 (1)
나에게 삶이란 잘 익은 탐스러운 열매와 같아 손을 대면 너무나 간단하게 나의 뜻대로 휘둘러져서, 알지 못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나 열심히 땀을 흘리는, 그런 삶을.
글쎄, 이 현상에 이름을 붙여본다면 '왕자와 거지'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왕자 하나에 거지가 된 왕자 하나만 존재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비유하자면 그래. ...사실 지금이나 침착하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처음에는 내가 정녕 미쳤구나 싶었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그것도 빈민으로. 더구나 어릴 적의 과거로...
꿈인지 현실인지, 혹은 나의 망상인지 구분할 새도 없이 덮친 세상은 너무 가혹했어. 배는 고픈데 춥고, 그 와중에도 몸을 지켜야 했으니까. 태어나 처음 맛보는 폭력은 참... 끔찍했지. 난 살면서 내 허리를 조이던 코르셋보다 더 아프고 힘든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아픈 사랑 같은 거.
어렸던 거지. 꿈이 아니라는 걸 겨우 자각하고 나서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나 신을 원망했다. 바깥을 동경하여 자유로운 삶을 꿈꿨던 것도, 정략혼을 피해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것도 모두 맞지만, 이런 걸 원한 적은 없단다! 젠장, 빌어먹을. 여기서 살면서 언행이 거칠어 가는 걸 느껴. 숙녀답지 않아! ...더해서, 내가 얼마나 철없는 아가씨였는지 새삼 깨달았다고 해야 하니.
정신을 못 차리고 멍청한 짓을 하고 있을 때, 나와 지내던 남자가 있었는데.. 낡은 천으로 만든 모자를 뒤집어쓰고 헤진 옷을 입은, 누가 보더라도 가난한 사람이었어. 이런 시궁창에도 쓰레기만 굴러다니는 건 아니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변태거나, 노동 착취를 할 생각이었거나 하는 경우도 예상하고 조심했어야 하지만, 말했다시피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아무튼, 남자는 꽤 멀쩡한 사람이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가려진 꽤 말쑥한 얼굴에 몸에 베인 사소한 습관 같은 거.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는 내가 귀족에게 버려진 사생아 정도로 생각했나 봐. 나는 행색이 거지였지, 태도는 완전히 상류층의 그것이었거든.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나름의 배려였던 것 같지만, 나는 철없고 눈치없는 귀족 아가씨였던 사람이라, 감정을 추스르니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 그러나 남자는 내 말을 무시했어. 정말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았지. 쓰레기가 널린 공터 한편에서, 모닥불 앞에서 거적때기를 덮고 그렇게 한참 내 목소리만 울렸다.
새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리다가 어느새 잠들었던 건지. 비척비척 일어나니 아침이었어. 주위에는 덮고 있던 누더기 하나만 빼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또 버려졌나 하고 울음이 나왔다. 무례하고 낯선 사람이라도 의지했던 건지. 그런데 저 멀리 누가 다가오더라. 자세히 보니 남자였어. 대낮부터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 있으니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걸음을 서두르더구나. 그 때 남자가 다리를 전다는 사실을 알았지. 먹을 걸 구하러 갔었나 봐. 손에는 딱딱하고 버석한 식감의 빵이 들려 있었어. 옥수수로 만든 그거.
마땅히 할 일도 없고(사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를 따라다녔어. 고물을 줍고, 쓸만한 풀을 따고, 잡일을 하며 돈을 버는 걸 배웠지. 그러다 호칭에 불편함이 생겼는지, 과묵한 남자가 어느 날인가 대뜸 말했는데, "이름이 있니?" 하더라. 처음 이 몸으로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이름을 부른 적이 없어 이름의 여부는 몰랐어. 본래의 이름을 대려니 조금은 망설여졌고. 그렇다고 대충 짓기에는 무려 '이름'이라고! 정.. 정채? 그래, 정체성. 그걸 나타내는 거란 말이야.
대답도 하지 않고 눈만 굴리고 있으니 뭐라고 생각했는지. "그럼 대충 안이라고 하지." ...어이가 없었어! 남의 이름을 멋대로 짓다니. 그 말을 할 때 남자의 눈이 빈 깡통에 쓰여 있는 'ANNE'S BEEN'에 가 있던 걸 누가 모를 줄 알아?! 맛은 저 멀리로 던지고 포만감에 치중한 저 거지같은 통조림 이름이 내 이름이 되어버리다니! 아아, 어머니께서 아시면 눈물을 흘리실 거야. 동명이인이 드문 것도 아니고, 그냥 본래의 이름을 댈 걸, 하고 후회했지.
욱하는 마음에 나도 주위를 두리번거렸어. 적당한 게 보이지 않길래, 나는 끙끙 고민하다가 겨우 외쳤어. "그러면 아저씨는 호두에요!" 얼마나 뜬금없고 이상했으면 그 남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을까. "...이유나 듣지." "왜, 왜냐면, ...아저씨는 못났어요! 대답도 잘 안 해주는 쫌생이! 호두까기 인형은 못생겼잖아요. 그래서 호두에요!" 이러면 이름을 바꿔주지 않을까 싶어 시작한 말이었는데, 그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대충 손을 휘젓고 뒤돌아 은신처로 발걸음을 옮겼어. 잠시 당황하던 나도 그 뒤를 쫒았지.
오랜만에 기억을 되새기려니 조금 힘이 드는구나. 아니,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질, 괜찮다고 했잖아. 그래, 당신. 아직 완전히 초반이지만 궁금한 게 있을까? 사실 아직은 없다고 예상하는데. 무언가에 의문을 가지기에는 아직 이 이야기는 걸음마도 시작하지 못한 갓난아기나 다름없으니까. 같이 성장을 지켜본다면 재미있을지도 몰라. ....그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신 말하는 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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