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19/08/31 22:00:29 ID : tvzV84Mp82l 0
제곧내. 애매한 길이의 글들 올리는 스레. 서로 피드백 자유. 올리는거 자유. -결말이 있어야함.(열린결말 상관ㄴ) -문단이 최소 3개여야함.
2 이름없음 2019/08/31 22:01:26 ID : tvzV84Mp82l 0
내가 좋대. 걔가 나 좋아한댄다. 그니까 너도 조심해. 응? 조심해. 그 애가 나에게 말했다. 네가 동아리를 탈퇴하고 처음으로 둘이서만 가진 술자리였다. 그 애는 이미 취했는지 계속 중얼거렸다. 내가 좋댄다. 친구가 아니라 애인이 되고 싶다나봐. 응, 좋대. 마시지도 않은 술 때문에 취기가 도나 보다. 눈물이 나오려 해서 코가 먹먹했다. 창 밖을 보니 네온사인과 가로등이 반짝였다. 이 도시는 보면 볼수록 슬펐다. 너와 그 애를 만난건 재미로 들었던 심리학과의 교양이었다. 수강생이 많지 않아 셋이서 같은 조가 되어 과제를 수행했다. 의외로 흥미있는 주제고 한가한 시기여서 열심히 과제에 임했고 셋 다 관심사나 성향이 비슷해서 즐거웠다. 생각이 잘 통하는 친구들과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동아리도 만들었고 제법 인원이 채워져서 활동이나 친목을 다지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 대부분 사회적 이슈나 흥미있는 학문에 대한 토론이나 책을 읽었다. 즐거웠다. 재밌었다. 그러다 동성애 페스티벌에서 혐오 세력의 폭력적인 시위로 다친 사람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애가 준비한 프린터물이었다. 그 애는 점점 사회전반적으로 고조되는 혐오의 분위기와 폭력의 물결에 대해 열렬한 비판을 했다. 그리고 개인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설명했다. 너는 그 애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유독 그 날 따라 반짝이는 눈으로 새겼고, 질문도 적극적이었다. 이 날 눈치 챘어야 했는데. 아마 그 눈의 반짝임이 자라서 애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 애는 이제 완전히 취해서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차라리 고백하지 말라고, 고백하지 말지. 좀 돌려말하든가. 자랑도 아닌데 왜 그렇게 직접 말했대. 응? 너가 물어봐봐. 나는 그냥 셋이서 의견 나누고 그게 좋았는데 걔는 사랑이 더 중요하데? 너가 물어봐봐. 응? 나는 휴대폰을 들어 콜택시를 불렀다. 너를 부축해서 택시에 태우고 골목을 돌았다. 고시생, 혹은 재수생으로 보이는 학생의 뒷모습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에게 전화할까 하다가 말았다. 이렇게 비참할 줄 알았다면 술이라도 마실걸. 사실 너를 처음 만난건 새내기 환영식이었다. 내가 새내기 환영식에서 술을 마시고 취기가 돌았을 때, 한 남선배가 나의 어깨를 움켜잡고 뭐라뭐라 말했다. 무슨 말이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깨만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 손이 꼼지락 거릴때 네가 그 손을 치워주었다. 남선배가 뭐냐고 따지려 할 때 나에게 말했다. 나 취했나봐. 바람쐬러 같이 가자.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너는 다시 술자리로 들어갔고 나는 몸이 안 좋다고 빠졌다. 녹차맛이었다. 싱그러운 그 녹차향이 너를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었다. 네가 가까이에 있기만 해도 떨려서 단 둘이 만난적은 그 찰나가 다였지만 작은 순간은 부풀어서 나를 덮었다. 재미로 들으려던 수업이 아니었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네가 나를 역겨워 할까봐 대충 얼버무렸다. 네가 셋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줄 알고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아, 진짜로 나도 취해버릴걸. 친구의 커밍아웃을 강제로 해버려도 죄의식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취해버릴걸. 그러면 그 애를 얌전히 택시에 태워 보내지 않았을 텐데. 아니면 너에게 전화해서 시원하게 모든 말을 들려줄텐데.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의 세상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두서없이 내뱉었을 텐데. 이 도시는 너무 슬펐다.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꺼지고 도시가 잠들었다. 나는 아마 잠들지 못할 것이다. 마음속에 남아있는 기분 나쁠 정도로 사랑스러운 것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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