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빗소리가 자동차를 규칙적이게 두드립니다. 산발적인 울림. 그것은 연주보다는 누군가의 난타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너무나 성가신 소리입니다. 항상 비가 오는 날 듣기 좋다고 여겼던 소리가 지금은 끔찍합니다. 제가 바라보는 지금이 꿈인지 무엇인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새벽의 도로 위로 여자아이의 시체가 피투성이인 채 널브러져 있습니다. 그 핏자국은 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 때문에 조명은 을씨년스러운 홍등이 되었습니다. 길가에서 저는 그 옆에 쓰러져있고, 제가 방금까지 치어버린, 그 아이와 똑같은 아이가 올라타 주먹을 제 얼굴에 내리꽂고 있습니다. `` 잘하는 짓이네요. 이게 뭐예요, 술이라도 들이킨 거예요? 앞도 안 보고 잘도 차를 몰고 다니시네요. ``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 어떻게 되었냐니, 그쪽이 못돼먹은 거죠! 죽고 싶다고는 해도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씩씩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아이가 여덟 번째로 때리자 울컥하면서 입안에서 후끈한 멍울이 터졌습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저는 쇠를 핥는듯한 느낌에 미간을 구겼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분명히 누워있는 아이의 숨은 멈춰있습니다. 되려 미동조차 없습니다. 단발의 머리카락은 피가 묻어 눅진 거리고, 한쪽 다리는 잔인하게 일그러져있습니다. 반면 제 위로 올라탄 아이는 누워있는 아이와 영락없이 똑같지만, 상태는 달랐습니다. 이런 표현은 경솔하지만, 양호했습니다. 군데군데 좀 상처나 흉터가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차에 치인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섭게 내리는 빗줄기에 블레이저가 무겁게 내리 앉아있을 뿐이었습니다. `` 뭘 보고 앉아있어요. 구경거리 났어요? `` `` 난감해서, 아니. 당황스러워서... 미안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너를...`` 아이는 이내 망연자실한 상태로 어두운 골목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한참을,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어두운 골목을 바라봤습니다. 이내 아이는 다시 저를 죽일듯한 눈으로 내려봤습니다.

주먹질이 멈추고, 아이는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주먹에서 핏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당황하며 상황을 정리할 틈도 없이 아이는 제 멱살을 잡아당겼습니다. `` 당신이 날 죽였어요. 일단, 그건 확실하다고요. `` `` 그렇지만 너는 지금... 너는 그럼 누구라는 소리야? `` `` 일단, 제 시체를 트렁크에 실어주세요. 살인마씨. `` `` 기다려봐. 일단, 일단. `` 제가 비에 젖은 손으로 경찰서에 전화하려 스마트폰을 꺼내자 아이는 제 손을 손톱을 잔뜩 세운 상태로 맞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좀..! 일단 하라는 대로 하세요! 머리 아프게 하지 말라고요. 지금부터 생각해야 하니까! `` `` 너야말로 미쳤어? 네 말대로 나는 살인을 저질렀어. 중범죄 중의 중범죄라고. 내 이성이 그나마 남아있는 지금이라도. `` `` 뭘 잘했다고 큰소리를 내요? 죽은 장본인이 관두라고 하잖아요. 일이 복잡해진다고요. 내 이름 동네방네 다 팔리는 꼴 보고 싶어요? `` 대화의 내용이 상식 밖입니다. 사람을 죽여놓고는 준법시민인 양 뒤늦게 신고하려는 가해자와, 그것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덮으려는 피해자. 모든것이 뒤죽박죽입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말입니다.

#2 서로가 말싸움을 한 지 한참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는 채 비를 맞으며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끝내 내린 결론은, 일단 설명해줄 테니 아이의 말을 따르기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차 안에서 벌벌 떠는 동안, 저는 혼자 아이의 시체를 실었습니다. 아이의 시체는 생각보다 가벼웠습니다. 비에 젖은 시체는 사람이라기보다 가벼운 쌀 포대에 막대기가 엉킨 것 같았습니다. 제가 운전석에 탈 즈음 아이는 잔뜩 시트에 몸을 웅크린 채로있었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기울이며 얼른 운전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당장 제게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 뭐해요. 안 움직이고. `` `` 알고 있어. 나도 얼어 죽겠어. 조금만 기다려줘. `` `` 사람을 죽이고 나니까, 차를 몰기가 무섭죠? `` 소름 돋을 만큼 아이는 냉랭한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습니다. 그러나 진정이 된 사람의 목소리와는 달랐습니다. 마치 자신을 죽인 범인이 당신이라며 추궁하듯, 아이는 견디기 힘든 침묵을 이어갔습니다. 이따금 어깨를 뒤척이면 작은 소리만이 울렸습니다.

`` 사정은 알겠는데요. 빨리 움직여주세요. `` 아이가 옷깃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리고 보채듯 그것을 쥐락펴락합니다. 저는 그런 움직임에 쫓기듯 정신을 차리고 차를 몰았습니다. 방금 전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게, 최대한 신중하고 천천히 운전합니다. 드물게 사람이 보이기만 해도 저는 가뜩이나 느린 속도를 더 낮추었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고, 저는 차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트렁크를 열고서 이 시체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아이는 눈치 빠르게 제 뒷좌석의 우산을 먼저 펼쳐 제 옆에 나란히 섰습니다. `` 이제 들쳐업으세요. `` `` 뭐? `` `` 죽은 당사자를 위해 그것도 못해요? `` ``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오히려 그런 의미에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해. 내 말은, 숨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뜻이야. `` `` 방금까지는 신고하겠다고 난리를 치더니, 막상 돌아오고는 겁이 나는 모양이네요. 그런데 그런 걱정, 아무 의미 없어요. `` `` 왜? `` 아이가 그 말에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섭니다. `` 있죠. 당신이 날 제법 강하게 들이받고 여기까지 오는 사이, 지나가던 사람이 한 명 있었죠.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요? ``

`` 이상한 점이라면, 글쎄. `` `` 정신이 없었으니 몰랐겠죠. 차 상태가 엉망이잖아요. 유리에 크게 금이 갔다거나. 그런데 그 사람, 신경이나 쓰던가요? `` 그랬습니다. 그때 저는 순간 차를 멈췄고,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러나 행인은 차를 살피기는커녕 눈길만 짧게 주고는 제 갈 길을 갔습니다. `` 단순히 엉망인 자동차에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잖아. `` `` 앞유리는 망가지고, 비가 이렇게 오는 동안 헤드라이트에는 아직 핏기가 남아있는 자동차지만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겠네요. ``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 좀 복잡한 얘기인데, 저는 제가 죽은 시점에서 멈춰버려요. 그 죽은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 `` 뭐? `` 아이는 대답 대신 턱을 들어 올리며 제 시체를 가리켰습니다. 제가 시체를 조심스레 업은 후에야 걸어가며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 그리고 돌아가기까지, 저를 죽인 당사자 이외에는 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해요. 저라는 존재, 저랑 관련된 것들이 죄다 없는 셈이 되는 모양이에요. `` ``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 다시 생각해보면 그 질문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습니다. 아이는 질문을 듣고는 미간을 구기며 불쾌하다는 색을 내비치고, 글쎄요 하며 얼버무렸습니다. 저의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먼저 아이가 걸음을 옮겨서 저는 허겁지겁 아이를 앞서가야 했습니다.

#3 `` 생각보다 집은 멀쩡하네요. `` `` 고마워. `` 아이는 들어서자마자 젖은 양말을 벗었습니다. 젖은 발을 대충 수건으로 닦아내고는 맨발로 집 안을 어슬렁거리며, 희미한 발자국 모양의 물기를 남겼습니다.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젖은 블레이저도 의자에 걸어두고는 저를 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 제 시체는 안방에 놔주세요. 내일쯤 되면 그 시체도 멀쩡해질 거예요. `` `` 그럼, 너는 내일 돌아가? `` `` 아뇨. 시간이 좀 걸려요. 자세히는 모르고요. 그때까지는 그쪽이 저를 좀 챙겨줘야 할 거예요. `` `` 챙겨준다는 말은? `` `` 밥. 잠자리. 샤워. 제가 돌아갈 즈음에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아깝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죠. `` `` 미안해. `` 아이가 시선을 제게 향합니다. 이런 말 한마디로 살인을 희석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우선 아이에게 전해야 하는 말이었습니다.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어딘가 탁해 보이는 눈을 감았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날숨을 뱉고 나서 말했습니다. `` 미안하면 똑바로 하세요. 그리고, 너무 그... 초상 치르는 분위기로 있지는 말고요. `` `` 무슨 뜻이야? `` `` 미안해서 찍소리도 못하는, 그런 건 지양하라는 말이에요. 제가 어색하니까. ``

'' 내가 죽었지, 그쪽이 죽은게 아니잖아요? '' '' 이렇게 태평해도 괜찮아? '' '' 네, 뭐. 단점이 좀 많기는 한데, 저한테는 대충 쉼표같은 시간이기도 하거든요. 이런 죽음. '' '' 예를 들어서? '' '' 관심이 많으시네요. 천천히 알려줄게요. 저 피곤해요. 춥고. '' 아이의 죽일듯했던 기세는 다소 누그러진듯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분이 풀린 것 같지도 않았지만, 최소한 아이는 감정을 혼자 추스르고 있었습니다. 나이에 비해서 어른스러워보입니다. 아이는 마저 옷을 벗은채로 들어갔고, 저는 일단 마른 옷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그러기 위해서 저는 오늘에 대해서 먼저 정리해야 했습니다. 오늘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일을 하려 했는지. 저는 먼저 이전의 것들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그 다음을 정리할 수 없습니다. 추상적이게 꼬인 실타래를 풀어가는 느낌입니다. 서랍장에서 편지를 꺼냈습니다. 아사기리. 오늘 만나려했던 사람입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만나고 싶어서 비가 오는 밤에도 차를 몰았습니다. 아사기리와의 인연은 묘하다면 묘했기에, 떨어진지 몇년이 된 지금도 명확하게 기억합니다. 집을 이곳으로 옮기는 위치를 정할 때 아사기리라는 존재가 큰 몫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사기리를, 서로를 시기하고 폄하하며 위안삼았던 그 아사기리를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편지를 펼쳤습니다. 너무도 자주 접고 펼치기를 반복해서, 편지지의 모서리는 닳아있었습니다. ` 네게 설명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아.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들을 설명해야만 해. 그렇지만 그걸 편지나 전화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설명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이 물 위로 떠다니는데, 내게 주어진 도구는 금방 부서질 것 같은 막대기 하나뿐이야. 애써 막대기를 뻗어서 단어를 잡아보려 해도 불가능해. 필요한 단어는 너무나 많고, 내 손에 잡힌 단어는 고작해야 두어 개 정도니까. 그래서 너를 만나야만 해. 지난 시간 동안 네가 줄곧 보내온 편지에 답장하지 못했던 것도 사과할게. 우리가 한참 서로를 자신 아래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막상 네가 멀어진 후부터 나는 네 편지를 기대하고 있었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또래랑은 말이 잘 안 통하잖아. 그렇다 보니 내가 얘기할 사람은 너뿐이었는데, 어려운 일이 있었어. 자세한 얘기는 9월 27일, 공원에서 하자. 너랑 내가 익히 알던 그 공원에서. 너는 8시에 서 있기만 하면 돼. 내가 찾아갈 테니까. 그때 나를 보면 반드시 기억해줘. 내가 너를 잊은 적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편지봉투에는 별첨된 장소가 적힌 종이만이 남아있습니다. 다시 보면 이상한 편지입니다. 무언가 기승전결에 필요한 중요한 것들은 잘려나가고, 허전하게 여백이 남아있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습니다. 당시 아사기리와는 동갑이었고, 저와 아사기리는 같은 반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사정으로 이사를 자주 다녔던 저는 지금보다 몇 년 전, 학기 중 애매한 기간에 전학을 왔습니다. 남들보다 뭔가를 빠르게 배웠지만, 최고보다는 한 수 아래였던 저는 중학생 때부터 무언가를 익히고, 사귀는 데에 신물이 나버렸습니다. 잦은 전학 때문에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던 저는 인간관계에 대한 만족을 해소할 수가 없었고, 자연스레 당시의 중학교에서도 멀어지게 됐습니다. 그런 저와 같으면서 달랐던 아이가, 바로 아사기리였습니다.

#4 당시의 아사기리는 분명 주변에서 겉돌았지만 미묘했습니다. 저처럼 명확하게 겉도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아사기리는 자신이 맴도는 쪽을 선택한 아이였습니다. 무언가에 엮이며 기대고 의지하는, 그러한 것들을 거부하는 아이였습니다. 어느 날 어울리는 것을 동경하던 제가 물어봤을 때 아사기리는 말했습니다. `` 동경할 필요 없어. 남들에게 의지하면 그만큼 갚아줘야 하잖아. ``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아사기리에게,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저 귀찮은 일 정도였을 것입니다. 혹은 기대를 하지 않는 쪽이었을지, 아무래도 어느 쪽이든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사기리와 저는 통하는 면이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겉돌면서 저는 아사기리를, 아사기리는 저를 알게 모르게 자신보다 더 불쌍한 사람으로 인식했습니다. 그것을 은연중에 표출하면서 저는 질 나쁜 위로를 받고 있었습니다.

편지에서 언급된 공원을 떠올렸습니다. 늘 집에 갈 때마다 헤어졌던 공원입니다. 아사기리의 집으로부터 제법 먼 방향인데도 아사기리는 늘 그곳에서 헤어졌습니다. 긴말도 없이 안녕,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걸어가서 그런 헤어짐에 의문을 갖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전학을 갈 때 아사기리는 편지 주소를 먼저 적어줬고, 이후에도 한동안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다 소식이 끊기고, 최근에서야 다시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편지를 받자마자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 다 씻었어요. `` 아이의 말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통이 넓어서 셔츠는 아이의 허리 아래까지 늘어졌습니다. 조금 불만이라는 표정으로 젖은 머리를 털면서 아이는 빈 욕실을 향해 고갯짓했습니다. ``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쉬기로 해요. 차차 설명해도 되겠죠. `` `` 괜찮겠어? `` `` 딱히 상관없어요. 뭐... `` 아이는 손가락을 쭉 펼치고, 하나하나 접어가며 말했습니다. `` 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그쪽만이 저를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저는 죽기 직전으로 돌아가고, 지금부터 그때까지의 일은 저만 기억하고, 없던 일이 된다. 정도만 기억하면 돼요. ``

`` 먼저 자. `` `` 네. 침실 좀 빌릴게요. 침대 없이는 잠을 못 자거든요. `` `` 그렇게 해. `` 아이는 제 편지에 눈길만 주고는 들어갔습니다. 이제야 좀 오늘의 사건이 정리되어갑니다. 오늘은 9월 27일. 아사기리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사기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고, 저는 새벽까지 기다리다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던 길에 저 아이를 치어버렸습니다. 새벽에 교복을 입고 있던 아이를 말입니다. 새벽에 교복. 시체를 들고 올 때 가방도 들고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생이 새벽까지 바깥에 있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아이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죽을 시점에서 멈춰진 상태입니다. 아이의 얼굴, 몸에 있던 상처는 이전에 있던 상처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아이는 죽음에 초연했습니다. 처음으로 겪었다기에는 자신의 죽음이 멈추는 것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쉼표라는 표현이 지금 제게는 너무나 거슬리는 표현입니다.

잘 보고 있어 흐름 끊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이네 다음부턴 조용히 좋아요만 누르고 갈게 그냥 보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 정말정말 잘 보고 있어

>>13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5 오전 11시입니다. 어제 밤 동안 비를 지겹도록 맞았던 저는 일어나면서 온몸이 쑤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늘은 어제보다는 한결 맑아졌지만, 여전히 우중충했습니다. 그래도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아이를 찾았고, 제가 찾아낸 것은 포스트잇 한 장뿐이었습니다. ` 찾지마세요. 돌아오면 문을 열어주세요. ` 글씨는 무심하게 쓴 듯 보였지만, 그런데도 한눈에 들어오는 간결한 글씨체였습니다. 어제 말리기 위해서 걸어놓았던 옷들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아이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침대에는 시체만이 누워있습니다. 혹시, 모든 일이 꿈이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내 정신이 마침내 미쳐버린 나머지 현실을 부정하면서 혼자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꾸미는 것은 아닐까. 저 자신에게 점점 이상이 생기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이성을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아이를 지켜봤습니다만, 그렇다고 어떠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시체에서 흘러나왔을 피 때문에 침대가 엉망이 되어야만 할 텐데, 시트는 그대로였습니다. 그저 시체의 얼굴에 묻어있는 피가 눅직눅진하게 굳어있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는 죽은 시점에서 자신은 없는 사람이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 현장은 어떻게 되어있을까요. 저는 옷을 갈아입고, 자동차 열쇠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습니다.

자동차에 타자마자 시동을 걸었습니다. 노래를 틀었을 때 정확하게 Back number의 히로인이 들려옵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서 자동차는 나아가고, 노래에서는 가사가 들려옵니다. ' 너의 매일에 나는 어울리지 않을까? ' 전학을 가버린 후로 일이 꼬여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꼬여버린 일의 종점인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예감이 불길해서, 분명 뭔가 더욱 안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습니다. 아사기리를 만나려는 제 행동이 잘못된 것만 같습니다. 죄책감이 머리를 옭아매는 것이 느껴집니다. 잠깐 차를 움직이고 몇분. 다시 움직이고 몇분. 자동차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나아가다 멈추기를 반복했습니다. 페달을 밟는 것이 어제보다 더 무섭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가봐야만 합니다. 우선, 제가 아이를 죽여버린 현장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다행히도 길은 기억하고 있어서 저는 평소보다 천천히 장소를 향해갔습니다. 홍등으로 바뀌는 신호등을 의식하고, 사거리가 나올때면 평소보다 긴장했습니다. 휴대전화에서 전화가 왔음을 알리는 진동이 울렸지만 저는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거리낌없이 받았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 ... ... " 현장에 돌아온 저는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수상해 보일 정도로 꼼꼼하게 둘러봤습니다. 분명, 이 골목으로 들어와서 아이를 치고는 당황한 나머지 자동차는 급정거를 했을 텐데, 주변이 너무나 멀쩡합니다. 경찰이 수사하지도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제 내린 비가 남아서 물기를 머금은 아스팔트 바닥을 걸어 다니면서, 저는 다시 한 번 살펴봤습니다. 사고가 일어났던 흔적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대뜸 행인을 붙잡고 사고에 관해서 물어보려던 찰나, 다시 진동이 울렸습니다. 휴대전화를 들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였습니다. 조금 전과 똑같은 번호인지라, 안 받기도 애매해졌습니다. 제가 망설이는 와중에도 전화가 끊기지 않아서 마지못해 저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 네. 듣고 있습니다. " " 마카베 이사오씨? " " 그렇습니다. " " 마카베 타카유키씨와 친족관계시죠? " "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가족이 저만 있는 건 아닐 텐데요. " " 그게... 다른 분들께서는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요. 급히 병원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 마카베 타카유키. 그 사람은 제 형입니다. 어린 시절 제 관심을 모조리 독차지해놓고는, 비겁하게 먼저 앓아누워버린 장본인. 끝까지 저를 비교되게 만들면서 자신이 지닌 관심을 삼키고, 지금에 와서는 부모로부터 외면받고있는 인간입니다. 그 인간이 병원이 누워있는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18 감사합니다. 천천히 이어가겠습니다.

#6 바로 병원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상태로 저는 담배 두어 개비를 내리 태우며 일부러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형에게 어설픈 동정심은 갖고 싶지 않습니다. 제 삶의 태양을 가져가며 무럭무럭 자라난 형. 그 형을 증오하는 저로서는, 그런 감정은 부정해야 할 것 같은 일종의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 심각한 상태의 형을 마주 봤다간 제가 그런 감정을 갖게 될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병원 안으로 걸어가고, 저는 형의 이름을 댔습니다. 리놀륨 바닥을 딛고 나아가면서 주변의 환자들을 시선에 담아둡니다. 링거가 연결된 채 느릿하게 걸어가는 환자. 목발을 짚은 환자. 의자에 앉아서 면회객과 대화를 나누는 환자. 모두가 어딘가 아픈 구석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 전부가 마음마저 병들어있지는 않았습니다. 굳이 집는다면 제 형도 이런 부류에 가까울 것입니다. `` 형. `` 병실에 들어선 저는 형을 불렀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부모는 역시 오지 않았습니다. 가습기는 조용히 하얀 구름을 흩뿌리고, 병실 안 다른 환자는 조용히 자고 있었습니다. 형은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로 숨을 헐떡거리며 주변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 마카베씨? `` `` 예. 맞습니다. `` `` 타카유키씨가 발작을 일으키는 동안 가족분들을 부르셨어요. 특히 마카베 이사오씨를요. `` `` 이런 경우가 자주 있습니까? 보호자를 환자가 호출하는 경우 말입니다. `` `` 흔치는 않아요. 하지만 있는 족족 기억에 남게 되죠. ``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되면서 간호사들은 물러갔습니다. 형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한 명, 제게 대답했던 그 간호사만이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다 들어갔습니다. 사랑들이 물러간 뒤, 저는 병실에 갖춰진 작은 의자에 앉았습니다.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 갑자기 근육이 조여오듯 아팠어. 그러면서 숨을 쉬기 힘들어졌지. `` `` 다행이네. `` `` 그러게. 네게 흉측한 꼴을 보일 뻔했잖아. `` `` 지금 농담이 나와? `` 형은 태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어딘가 사그라들어가는, 꺼져가는 불꽃처럼 보였습니다. 제 신경질적인 반응을 형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힘없는 손으로 형은 제 손을 잡았습니다. `` 와줘서 고마워. `` `` 징그럽게 굴지 마. 난 형한테 딱히 정이 없어. `` `` 그렇지만 와줬잖아. `` `` 오지 않으면 부모들이 닦달을 할 테니까. `` `` 너는 착해. 나보다도 훨씬. `` 거짓말입니다. 저는 누구보다 질이 나쁜 인간입니다. 살인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형이 뭐라고 할까요?

#7 `` 아무튼, 위험은 넘긴 모양이네. `` `` 응. 벌써 돌아가려고? `` `` 그래. 무사한 모양인데 더 있을 이유가 없잖아. 다른 환자도 자고 있고. `` `` 소란스러웠을 텐데. 어떻게 자고 있을까. `` 다른 환자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어떠한 약을 처방받고 곤히 잠을 자는 걸지도 모릅니다. 혹은, 지금의 상황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고요해서, 대화를 이어나가는 종종 존재를 잊고는 했습니다. `` 가볼게. `` `` 잘 가. 그리고... 너무 서둘러서 살지는 말아줘. `` `` 내가 급해 보여? `` `` 무척. 독해지려고 하려는 것 같아. `` `` 형은 나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 `` 남들이 너에 대해서 아는 사실은 몰라. 하지만 남들이 모르는 사실은 알지. `` 저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사랑만 받고 자라서 병실에 앉아있는 사람의 말은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형은 뒤늦게 버림받은 후에야 현실을 알았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이라는 어설픈 사명감에 조언을 하는 겁니다.

형은 잘 가라는 말을 다시 했고, 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나왔습니다. 나오고서 병원 1층을 방황했습니다. 시간을 연초처럼 태우고, 또 태웠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마음에 먼지를 묻혀갑니다. 제가 후련해질 때까지 시간을 태우니, 시간은 늦은 오후를 향했습니다. 돌이켜보니 아이의 쪽지가 생각났습니다. 돌아오면 문을 열어달라는 내용이 떠오릅니다. 돌아오는 날이 오늘인지, 내일인지도 모르는데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입니다. 바로 집을 향해 돌아가니, 아이는 계단에 주저앉은 상태로 제가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머리에는 어제 보지 못했던 헤드셋이 쓰여 있고, 가방을 메고 있었습니다. `` 가져온 거야? `` `` 네. 심심해서요. 그쪽은 좀 늦었네요. `` `` 집에 갇혀있는 타입은 아니거든. `` `` 그래요. 그럼 문 좀 열어주실래요? ``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면서 아이가 일어나, 제 등 뒤를 따라옵니다. 문을 열고 아이와 함께 들어온 저는 담배를 찾았습니다. 아이도 덩달아 담배를 입에 물었습니다.

`` 담배도 피워? `` `` 안 돼요? `` `` 안되지. `` `` 저는 떳떳한데요. `` `` 미성년자잖아. `` `` 그렇지도 않거든요? 낭비한 시간을 합치면 나이는 그쪽이랑 비슷할 거예요. `` 아이가 불씨를 담배 끝에 남기며 아파트 아래를 쭉 훑어봤습니다. 일전에 제가 했던 질문에 대해서, 명확하진 않지만 답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낭비한, 지금처럼 멈춰버린 시간은 최소 년단위라는 뜻이 됩니다. `` 아무도 몰라? `` `` 담배를 피우는 거요? 아니면 지금 저 자체를요. `` `` 둘 다. 그쪽만 나를 볼 수 있어요. `` `` 외로웠을 것 같아. 미안해. 너를 혼자 놔둬서. ``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이윽고, 아이가 눈을 반쯤 감았습니다.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저를 바라보고는 마치 저를 비난하듯 말했습니다. `` 고맙네요. 그러니까 제 일상에는 터치하지 마세요. 지금 최대한 요양 왔다는 생각으로 자기 위로하고 있거든요? `` 분위기에 저는 아이에게 압도당했습니다. 더 말을 하지 않고, 몇 분간 꽁초를 태우다 저희는 들어갔습니다.

재밌다ㅜㅜ 잘 보고있어!! 순식간에 읽어버렸네

>>25 감사합니다. 환경상 글을 규칙적이게 이어가기 어렵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8 저와 아이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제처럼 매서운 기세로, 그러나 어제와는 다른 장단에 맞춰서 비가 내립니다. 빗방울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지게 아이는 창문을 열었습니다. `` 내일도 나갈 생각이야? `` `` 아뇨. 나갈 생각은 아니지만, 내일이 되면 바뀔지도 몰라요. `` `` 스마트폰은? `` `` 있긴 있는데요. 번호 딸 거예요? `` `` 맞아. 부탁할게. `` 아이는 퉁명스러운 시선으로 저를 쳐다봤습니다. 유령처럼 창백한 하얀 피부에, 눈가에는 희미하게 붉은 핏기가 어려있습니다. 눈동자는 유화처럼 탁했지만 분명하게 어떠한 말을 하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인형 같은, 자신이 죽인 사람과 독대하니 순식간에 저는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부분적으로는 귀신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이내 아이는 시선을 조금 바꾸고, 흥미롭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 내일도 집에 있을 생각이 없는 거죠? `` `` 그래. 부끄럽지만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네가 그랬잖아, 너무 네게 묶여있는 건 불편하다고. `` `` 초상 치르는 분위기는 지양하라고 했는데, 뭐... 어느 정도는 제가 바라는 분위기로 있네요. 좋아요. ``

`` 좀 기분 나쁜데요. 저는 그래도 그쪽이 저한테 좀 더 시간과 관심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혹은 사정을 설명하거나. `` `` 그렇구나. 사정을 얘기해야 한다는 뜻이구나... `` 너를 죽여버린 그 날, 나는 간절하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찾고 싶다. 그런 사정을 솔직하게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내며 아이에게 설명해야 했습니다. 제가 섣불리 말을 하지 못하고 고심에 빠지자, 아이는 입을 열었습니다. `` 그냥 심술 좀 부려본 건데, 참 재미있게 당황하시네요. `` `` 미안해. 설명하기 쉬운 사정은 아니거든. 나는... 사람을 좀 찾고 있어. 오랜, 아주 중요한 사람이야. `` `` 그런데요? `` `` 그 사람을 만나야 했는데 사정이 생겼거든. 그래서 일이 틀어졌어. `` `` 흐응. 더 얘기해보세요. 재미있다면 내 번호 그대로 넘겨줄게요. `` `` 번호를 얻는 것 자체는 네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기 위함이야. 널 위한 이유라는 뜻이지. `` `` 좀 아쉬운데. 대신 나도 중요한 사실을 설명해줄게요. 초치기는 싫지만요, 그쪽이 사람 찾는 행위는 별 의미 없을 거예요. `` `` 왜? 왜 그렇게 장담하는 거야? `` 아이는 조금 더 이야기를 풀어보라며 독촉했습니다. 두 다리를 의자 위로 모으며 오므리고, 그대로 턱을 얹었습니다. 저는 아이의 페이스에 말리는 기분을 느꼈지만, 저는 제 염원이 영문도 모른 채 부정당했다는 사실에 묘한 불쾌함마저 느꼈습니다.

#9 `` 길게 설명할 것도 없어... 그냥, 그 사람을 좀 찾아볼 거야. `` `` 되게 스토커 같네요. `` `` 그런 짓이랑 달라. `` `` 뭐가 다른데요. 앞에 나타나지도 않고, 뒤꽁무니 조사나 음침하게 하는데. 지금 하려는 거, 신상 조사 아닌가요? `` `` 앞에는 나타났어. 그렇지만... 그땐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어. `` `` 당신에게 실망했을 수도 있죠. ``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말이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저는 그때보다 음침해졌고, 어딘가 곪아있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오랜 시간 외면받으면서 정이라는 것과는 멀어진 사람입니다. 혹시, 아사기리는 사실 그 자리에 나타났지만 실망했거나, 혹은 달라진 제 모습에 흥미를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갈색의 단발머리 너머로 저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제 눈앞에서 손가락을 두어 번 튕겼습니다. 동시에 제 머릿속에서 무언가, 팽팽한 것이 아슬아슬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그러니까 찾아보겠다는 소리야. 한 번, 한 번만 만나보면 되는 일이니까. `` `` 만나고 나서는요. 내가 보기에 그쪽을 만나면, 상대는 더 실망할 텐데. `` ``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만나서 확인해야 해. 그 사람의 사정을. 간절하게 기다렸으니까. `` `` 그 사람도 그럴 거예요. 그런데 그 만남을 포기했다잖아요. 왜 그 사람 사정은 생각도 하지 않아요? `` `` 오래 기다리다 이제야 다시 연락을 받았어! 그 사람이 오지 못해서 내가 가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문제야? `` `` 그래요. 문제예요. 남의 입장도 모르면서. 눈치가 있으면 좀 생각을 해보세요. 왜 상대가 그 간절함을 억눌렀는지. 사정이 있다면 다시 연락이라도 하겠죠. ``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반사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끝까지 긴장되어있던 끈이 풀렸습니다. 저는 몸을 일으키며 두 손을 식탁에 지탱했습니다. 그대로 저는 아이를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 네게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안 되겠어. `` `` ... `` `` 간절함이 뭔지 알아? 간절함을 느껴보기나 했어? `` 제가 고독을 실감하지 않게 도와준 아이. 제가 방황하던 중에도 목표의식을 놓치지 않게 도와주던 아이. 아사기리. 저는 어느새 그 아이를 변호하는 것을 핑계로 저 자신을 변호하고 있었습니다. 제 행동의 명분과 방향을 아사기리라는 대상을 향해 맹렬하게 내리꽂고 있었습니다.

`` 할 말은 다 했어요? `` `` ... 그래. 네가 생각하는, 불쾌할 선에서의 행동은 배제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나를 비꼬는 짓은 그만둬. `` `` 간절함, 나도 누구보다 잘 알아요. 간절하게 소원을 매일 빌어봤거든요? 그런 소원들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 `` 뭘 말하고 싶은 거야? `` `` 간절하게 바라는 소원은, 늘 마지막에 어긋나게 이루어져요. `` 아이는 일어나서 제가 취하는 자세를 똑같이 취했습니다. 서로 간의 거리는 30cm. 아이는 냉소적이게 말했습니다. `` 여기서부터가, 제가 의미가 없으리라 장담하는 이유에요. 제 원래 몸이 회복을 끝내면, 지금까지의 시간은 없는 것이 돼요. 기억도, 사건도. 작은 흔적조차. `` `` 이번에는 무슨 뜻이야... `` `` 알면서 물어보시네요. 당신이 어차피 그 사람을 어떻게든 찾고, 만나서 무슨 말을 해봐야 내가 회복이 끝나면 당신도, 그 사람도 싹 다 잊어버리게 된다고요. 나를 빼고. 그대로 시간은 제가 죽기 하루 전으로 돌아가서, 모든 일은 리와인드 돼요. `` 즉, 정리하자면 헛수고라는 뜻입니다. 아이는 그것을 애써 돌려 말하던 것입니다. 이대로 제가 간절함을 품고서 그 사람을 찾아봐야 실망감이 커질 확률이 높고, 설령 서로 간절하게 만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미래는 이제 알 수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이 마치 이미 져버린 것을 실감하고 두는 체스처럼 느껴집니다.

`` 제가 야속하시겠네요. 기껏 실마리를 찾았더니, 언제까지일지도 모르는 시간을 불가피하게 낭비하는 꼴이 되었으니. 당신이 죄책감마저 없었다면, 나를 여기서 때렸을지도 모르겠어요. `` `` 아냐... 너는, 도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야? `` `` 살인마요. 내가 아는 어른들은 다 그렇던데요. `` `` 완전히 맛이 가버렸어. 너는 이상해. 사고부터가 엉망이야. `` ``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던데. 그쪽도 저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 한마디도 지지 않는 아이로부터 저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이 아이도 곪아있다는 사실을, 저 못지않게 나사가 빠져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디다. 저는 무관심으로, 아이는 뒤틀린 관심으로 망가져 있습니다. `` 제가 했던 말들은 잊으세요. 이건 제 번호고요,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어요. 저 내일 어디 좀 가 있을게요. `` 아이는 자신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쪽지에 적으며 익숙하게 레토르트 식품을 꺼냈습니다. 적혀있는 이름은 고야나기 나나시 였습니다. 농담하는 건가 싶어 물어보려다, 아이의 장난기 없는 표정에 관두기로 했습니다.

#10 팅, 하며 경쾌한 알림이 울렸습니다. 전자레인지의 조리가 완료되었다는 신호입니다. 아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맥 앤 치즈를 꺼낼 동안, 저는 포트에 물을 올려두고 기다렸습니다. `` 미안해요. 감정이 좀 격해졌어요. `` 아이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 내가 어른답지 못했어. `` `` 제가 편히 굴라고 말했는데, 참... 계속 그 쪽에게 빈정대게 되네요. `` `` 이해할 수 있어. 너는 나를 때려죽여도 모자랄 텐데. `` `` ... 일념무명이라는 영화 알아요? `` `` 아니. `` `` 그럼, 매드월드는요. `` `` 그건 알고 있어. 홍콩 영화잖아. 조울증에 관련된. `` `` 그쪽이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았어요. 그 영화의 다른 이름이 일념무명이에요. `` 아이는 식탁에 앉아서 마카로니를 하나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습니다. 어려운 말을 하려는 듯, 혹은 지금의 분위기가 말을 하기 어려운 듯. 아이는 시선을 아래로 향하며 대화의 조각을 신중하게 조립하고 있었습니다. `` 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 `` `` 그쪽한테 이해를 구하고 싶어서요. `` `` 그 말은? `` `` 뭐... 좀, 내가 많이 비뚤어져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다 조금 긴장이 나아지면 지금처럼 수그러들고요. 잠깐이지만. ``

이윽고 아이가 의자 위로 몸을 젖혔습니다. 다리를 모으는, 예의 그 자세를 취하면서 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이는 그런 자세가 버릇이 들었는지, 지켜보면 몸집이 작은 짐승 같기도합니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사람의 손을 타다 버림받은 길고양이에 가깝습니다. `` 그럴 때마다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르지만... 저는 남을 좀 미워하게 돼요. 본래 그렇지만, 그 기질이 심해져요. `` `` 듣고 있어. `` `` 그러니까... 그럴 때, 그 쪽에게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반응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 `` 괜찮을 거야. 네게 저지른 짓이 있으니까, 그 정도는 감수할게. `` 얘기하면서 포트에서 들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에 집중합니다. 슬슬 버튼이 내려갈 텐데, 하는 생각으로 지켜보면 볼수록 포트는 시간을 오래 잡아먹습니다. 집 밖에서는 긴박하게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구급차가 불빛을 밝히고 차들의 틈새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 이해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 `` 응. `` `` 아닌 것 같은데. 불만이 남아있잖아요. `` 아이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이쪽을 보라는 말에 저는 시선을 향했고, 그제야 아이가 눈꼬리를 내렸습니다. `` 다시 한 번 말해봐요. 정말 이해할 수 있어요? `` `` 정말이야. 대신, 너도 불만이 생기면 알려줘야 해. `` `` 좋아요. 참, 맥 앤 치즈 잘 먹었어요. 나중에 나갈 일 있으면 좀 사주세요. ``

이후에는 서로 별 대화 없이 조용히 밤을 보냈습니다. 씻고, 불을 끄면 잠들고. 마치 오랜 커리큘럼에 몸이 먼저 따라가듯 일련의 문제없이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오늘도 아침이 찾아왔고, 탁자에는 포스트 잇이 붙어있었습니다. ` 맥 앤 치즈를 사다 주세요. 그리고 화초를 기르고 싶어졌어요. 어차피 제가 회복되면 지금까지 쓴 돈은 돌아올 테니까, 시험 삼아 이것도 사다 주세요. ` 어제보다 내용이 늘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돌이켜보면 아이에게 돈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용케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에게는 돈이라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어제의 편지를 찾았습니다. 아사기리가 제게 보냈던 그 편지. 편지에는 아사기리의 이름과 함께 주소가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아사기리를 찾고 싶다는 열망과 지금직접 찾아가면 예전 같은 거리감을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저는 그 두 가지 정서를 한데 모아 열량으로 바꾸었습니다. 걸음을 옮겨나갈 열량으로 말입니다. 아이가 죽어버린 골목을 지나고 좀 더 깊숙하게 들어갑니다. 갈수록 길이 좁아져서 다른 차와 대면하면 한동안 서로 주춤거려야 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을 좇아 도착한 곳은 상당히 허름한 빌라였습니다. 아마도 사는 가구는 4가구 정도겠지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마침내 주소에 적혀있는, 아사기리의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초인종만 누르면 될 일입니다. 조금만 더 용기를, 혹은 충동을 부리면 됩니다. 설령 만남이 잘못되더라도 아사기리를 볼 수 있다면 만족입니다. `` 실례지만, 누구시죠? `` 저는 순간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습니다. 실수했습니다. 이렇게 수상한 반응은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11 아사기리를 닮은 인물. 그러나 그보다 훨씬 어딘가 뒤틀려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눈가에는 경계심이 가득했습니다. 나이가 제법 되어 보이는 여성입니다. 이 집에 사는 인물이라면, 아사기리의 모친일지도 모른다고 저는 짐작했습니다. 아사기리가 지금 있느냐고 물어보려던 저는 뭔지 모를 거부감에 잠깐 말문을 멈췄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여성의 경계심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 다시 한 번 물어보겠어요. 누구시죠? `` `` 아사기리의 옛 동창입니다. `` `` ... 아사기리요? `` 그 이름이 왜 나오느냐는 눈빛입니다. 한눈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친에게 저는 수상한 존재로 첫인상이 깊게 박혔습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밝히는 편이 일이 더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는 방법일 것 같습니다. 저는 얼른 두 손으로 결백을 표시하며 대답했습니다. `` 네. 아사기리... 중학교 시절 같은 반으로 오래 지냈습니다. 아사기리의 편지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혹시 잠깐 시간을 조금... `` `` 죄송한데요. 아사기리라는 이름도, 성도 제 가족에게는 없어요. `` `` 네? `` `` 얘기했잖아요? 저희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은 없다고요. `` 일이 이렇게 되면 저는 이 여성을 아사기리의 모친이라고 칭할 수도 없습니다. 애초에 주소는 맞는데, 아사기리는 이곳에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간단하게, 그리고 성급하게 생각한다면 아사기리가 편지를 쓴 직후 이사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사기리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은 오늘로부터 대략 일주일 전이니, 마음만 먹는다면 이사를 할 수는 있습니다. 혹은, 아사기리가 단순히 쫓아오는 것을 피하고자 보내는 주소를 다르게 적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사기리는 여기서 저를 만나고, 다시는 볼 생각이 없었다거나 혹은 이후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나 이런 호기심들은 더더욱 꼬리를 물고 늘어질 뿐입니다. 어째서 아사기리는 저를 그렇게 경계하는지, 혹은 왜 이런 수고를 들이면서 나를 만나려 하는지. 모든 것들이 미스터리입니다. `` 여보세요. `` ``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혹시 이곳에서 살기 전 이 집에 머물던 가족은 아십니까? `` `` 잘 모르겠는데요. 우리 가족은 여기서 산지 몇 년씩이나 되었으니까요. 죄송하지만 볼 일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주시겠어요? `` 저는 여성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뒤로하고 자리를 옮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확은 있었습니다. 확실한 점은, 아사기리가 만나서 하려던 이야기에 대해서 아사기리는 상당히 신중하게 의식하던 것 같습니다.

빌라를 나온 뒤, 저는 크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돌이켜보면 이곳은 제가 살던 집의 근처입니다. 지금은 저도, 가족도 이곳으로부터 멀어졌지만, 과거에는 분명히 이 도시에서 살았고, 또한 이 도시의 중학교를 나왔습니다. 저는 늘 겉돌았기에 이곳에는 애착이 없었고 늘 생소하게 느꼈습니다. 그랬기에 지금도 저는 이 도시를 난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또 한 번 아사기리를 찾으려는 열망이 부정당했습니다. 분명 집을 나오는 순간에도 이 결심이 실패로 이어진다면 마음을 정리하자고 다짐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렇게까지 일이 꼬이는 것이 누군가의 꿍꿍이처럼 느껴집니다. ` 제 원래 몸이 회복을 끝내면, 지금까지의 시간은 없는 것이 돼요. 기억도, 사건도. 작은 흔적조차. ` 아이가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저는 이미 아사기리에 대해서 모든 사고가 집중되어있습니다. 아이의 말을 제멋대로 해석했습니다. 아이가 몸을 회복하기까지는 일종의 연습입니다. 아사기리에 대해서 찾아볼 수 있는, 비겁한 연습의 기회입니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저는 저 같은인간이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하루 단위로 희석해감에새삼 놀랐습니다.  역시 피는 진합니다. 제 가족의 무신경함을 혐오했지만 제 몸에는 그러한, 제게 불리한 것에는 둔감해지는 기질이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저에 대한 혐오를 한층 더 견고하게 쌓아올리며 아사기리와 같이 다녔던 중학교로 향했습니다.

#12 목적은 간단했습니다. 아사기리와 함께 다녔던 중학교로 간 뒤, 졸업사진을 확인한 후 같이 다녔던 구면을 찾아서 아사기리의 소재를 물어볼 것입니다. 개인정보를 물어본다는 이유로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할 경우도 있었지만, 최소한 아사기리와의 접점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대충 머리속으로 청사진을 그려가면서 중학교를 향해 걸었습니다. 혼자 돌아가던 길목. 혼자 지켜보던 공원. 혼자서 건너갔던 횡단보도. 모든 것들이 혼자입니다. 아사기리라는 존재가 일종의 편린처럼 느껴집니다. 탁해진 사진에 붙어있는 수려한 수채화 같습니다. 아사기리는 석양같은, 세피아 색으로 남아있습니다. 제게는 이질적이면서 부각되는 존재입니다. 길목을 돌아가서 중학교에 도착하기 직전, 낯선 얼굴과 마주쳤습니다. 낯선 얼굴은 저를 금방 눈치챘는지 제게 선뜻 다가오며 말을 걸었습니다. 단발의 머리에 딱히 꾸미지 않은듯한, 자연스럽고 시원스러운 인상의 제 또래 여성입니다. `` 마카베? 마카베 이사오 맞지? `` `` 맞습니다만... 누구시죠? `` `` 나야. 오오가미 나즈나. 같은 반 반장이었잖아. ``

`` 오오가미..? ``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 이름이 있었나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반장이라면 눈에 익을 법도 했는데, 제가 어지간히 학교생활에 관심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 그래. 네가 늘 도서관으로 도망칠 때마다 인사했던. `` `` ... 기억이 잘 나지를 않네. 미안해, 기껏 말을 걸었는데. `` `` 아냐, 아냐. 너는 그런 아이였잖아. `` `` 무슨 뜻이야? `` `` 그냥? 딱히 주변에 관심이 없고 차분한... 늘 있는 타입 있잖아. `` 오오가미는 저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얘기했습니다. 입고 있던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로, 이 대화를 익숙하게 이어나갑니다. 저와 그리고 아사기리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타입입니다. `` 그래서, 무슨 일로 돌아왔어? 이 동네에서 금방 이사갔잖아. `` `` 중학교에 좀 가려고. `` `` 왜? 우리 선생님을 찾아가려고? `` `` 뭐, 그렇지. 그분께 볼일이 있거든. `` 오오가미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갸웃하며 시원찮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단발이 바람결에 흔들거리고, 조용히 곤란한 소리를 내더니 제게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 그건 좀 어려울텐데... 그분 올해 떠나셨다고 들었거든. `` `` 다른 학교로? `` `` 응. 어느 날 다른 학교로 그냥 가셨어. 그 선생님, 나이가 지긋하셔서 참 편안하고 좋았는데. ``

`` 급한 일이야? `` `` 내게는 급한 일이야. 인제 와서는 어쩔 수 없지만. `` ``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면 좋겠네. `` `` 그럴 필요까지야... 왜 그렇게 열성적이야? `` `` 아, 미안. 좀 부담됐어? `` 본인은 그런 사실을 잘 몰랐다며 순간 손사래를 쳤습니다. 오오가미는 눈치가 없어서 부담될 줄 몰랐다기보다, 순수하게 돕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한 쪽에 가까웠습니다. 아마 중학교 시절에도 오오가미는 저런 이미지였겠지, 저는 그렇게 제멋대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졸업사진을 무턱대고 보여달라는 부탁은 오오가미처럼 어색한 구면에게 꺼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되면 껄끄러운 본가를 찾아가는 방법만 남게 됩니다. 집으로 올라갈 생각에 거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추진력을 얻어 의욕이 생겼습니다. `` 그런건 아냐. 그냥 좀 실례되니까. `` `` 그래. 그냥, 오래간만에 보니 반가워서 좀 실례해봤어. `` `` 쭉 여기 살았어? `` `` 응. 나는 이제 거진 이 도시 토박이야. 저기, 서점에서 아빠를 돕고 있거든? ``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큰 대로를 가리키며, 저기만 돌아서 쭉 걸어가면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불현듯, 반장이었던 오오가미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 오오가미. 혹시 아사기리 기억해? `` `` 아사기리? `` `` 응. 고이즈미 아사기리. `` `` 글쎄... 혹시 그것 때문에 중학교를 찾아가려던 거야? 찾아보려고? `` `` 맞아. `` `` 졸업앨범을 찾아봐야겠네. 한동안은 서점에 묶여있을 예정이라... 창고도 뒤져봐야 하고. 당장은 알려주기 어려울 텐데, 일단 바로 떠오르지는 않는 이름이야. `` ``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그거면 됐어. ``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면 아사기리와는 친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사기리의 졸업앨범을 부탁하는 것도 애초,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분위기 깨서 미안한데 제목 잘지었다!

#13 `` 찾게 되면 알려줄까? `` `` 괜찮아. 정확히는 아사기리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거든. `` `` 무슨 탐정 놀이 같아. 걔가 돈이라도 빌려 갔어? `` `` 그런 거 아냐. 너는 누구에게나 이렇게 장난을 치는 거야? 나처럼 어색할 만한 사람에게도? `` ``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반가워서 그런 점도 있어. 여기 살던 아이들은 어른이 돼서 떠났거든. `` `` 너는? `` `` 모든 나비가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건 아니야. 특히, 나처럼 우물 안에서 꽃을 찾은 나비는 더더욱. `` 긴 대화 끝에 오오가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습니다.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대사였던지라, 저는 말을 곱씹었습니다. 오오가미 본인은 제법 멋있는 말을 했다고 느꼈는지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며 물어보려던 찰나를 오오가미가 선수쳤습니다.. `` 슬슬 돌아가 봐야겠네. 아빠가 부를 거야. `` `` 무슨 애도 아니고... `` `` 일을 돕느라 그런 거야! 이상한 생각 하지 마. `` 저는 오오가미에게서 짧은 거리 밀려났습니다. 거리낌 없이 장난을 치는 잠깐 편한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 아무튼, 조심해서 들어가. 이 동네에 머무른다면 가끔 보기로 하자. 오래간만에 보니까 반가웠어. ``

이 동네에 살던 아이들은 대부분 떠났습니다. 아사기리를 가르쳤을 선생님도 이제는 학교에 있지 않습니다. 아사기리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들이 하나씩 흐릿해져 갑니다. 찜찜한 기분에 괜히 흡연실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오오가미는 나름대로 도와주려는 모양이라 다행이지만, 아이가 회복된다면 지금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됩니다. 그 때문에 시간이 촉박한 만큼 오오가미에게 기댈 수는 없습니다. 설령 찾는다면 단서는 어떻게 돌아간 후의 제게 남길 수 있는지, 그것도 불투명합니다. 조금이라도 아사기리의 흔적이 남아있을 만한 장소를 생각해야 합니다. 집이 주소와 다르더라도, 아사기리가 아무튼 같은 중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사기리가 자주 머물렀던 장소, 그 장소를 막연하게 가봐야 합니다. 그런 장소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작은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제 기억을 다시 조금씩 되감습니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말입니다. 집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헤어지기 전, 아사기리와 머무르던 장소들을 떠올려갑니다. 그것은 케케묵은 기억이 돼서 조각을 맞춰간다는 느낌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희뿌연 그림이 선명해져 갑니다. 도서관입니다. 도시의 시립 도서관. 숙제를 위한 자료를 찾는다거나, 여름방학에 도서관이 주관하는 작은 행사에 참여한다거나 경우는 많았습니다. 도서관에는 오래 머무르던 사서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을 찾아가 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때마침 전화가 울렸습니다. 고야나기 나나시로부터온 전화입니다.

`` 고야나기? `` `` 나나시예요. `` `` 그래. 고야나기 나나시. `` `` 실례지만 지금 바쁘신가요? `` `` 도서관에 가려던 참이었어. `` `` 잘됐네요. 저를 데리러 올 겸 도서관에 와주세요. 그쪽이 사는 동네에 있는 큰 시립 도서관이에요. `` `` 거길 네가 어떻게 알아? `` `` 저기요. 살인마씨. 저는 그 동네 주민이에요. `` 거리가 복잡하다 보니 구분이 모호해서 몰랐습니다. 아이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볼일을 조금만 보고 돌아갈 거라는 말에 아이는 반응했습니다. `` 조사가 잘 되어가는 모양이네요. `` `` 그 반대야. 계속 삽질 중이거든. `` `` 도서관에 가는 것도 허탕일 것 같은데요? `` `` 어디에 사는지는 알 수 없겠지. 다만, 언제부터 오지 않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잖아. `` `` 그걸로 뭘 하려고요? `` `` 대충 타임라인 정도는 알 수 있겠지. 고등학생 때 도서관 방문이 끝났다면 이사를 했다던가, 그런 거. `` `` 뭐, 그럼 와서 조사해보시던가요. 저는 슬슬 가려던 참이었으니, 그걸 조사하고 가면 되겠네요. `` 짧게 전화가 끊겼습니다. 용건이 끝났으니 당연하기도 합니다. 이후, 곧바로 차를 타고 가자 도서관 입구에서 아이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쓰고 있던 헤드셋을 내려놓고 손을 한 번 흔들었습니다.

#14 `` 안녕하세요, 살인마씨. `` `` 그런 호칭은 너무 노골적이지 않아? `` `` 그럼 어떻게 불러드려요? 아저씨? `` `` 나는 아저씨까지는 아냐. 오히려 그것보다는 어려. `` `` 오빠라는 호칭은 좀 그렇고요. 뺑소니씨도 있고, 뭐... `` `` 마카베 이사오. 그게 내 이름이야. `` 제가 선뜻 이름을 밝히고, 두둑두둑 희미한 감촉이 어깨 위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빗방울을 잉크 삼아 필담을 나누기 시작하려는 모양입니다. 늘 여름이 되면, 둘은 간신히 점자로 된 대화를 나누고는 합니다. 아이는 제 이름을 확인하려는 듯 다시 불러보았습니다. `` 마카베 이사오. `` `` 그래. `` `` 이사오... 마카베 이사오. `` `` 그렇게 어려운 이름이야? `` `` 제 버릇이에요. 사람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해서, 종종 읊어보고는 해요. `` `` 부디 외워줘. 그 이상한 호칭은 잊어버리고. `` `` 죄송해요. 까먹었는데 이름이 뭐라고 했죠? 살인마씨. `` 저는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이는 품에 들고 있는 책을 안은 채로 천천히 걸음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기 시작하자 나가려던 사람들은 당혹감에 우왕좌왕하기 시작해서, 입구는 붐비고 있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주로 들렀던, 중앙의 서적 대여실을 찾아갔습니다. `` 어릴 때 이후로 참 오래간만에 와보는 것 같아. `` `` 책을 좋아했어요? `` `` 그때는 그랬어. 하염없이 책 속 문장으로 시간을 태우는 걸 좋아했지. `` `` 혼자서? `` ``아니. 아사기리랑 여기서. ``

`` 그 사람 얘기 좀 해주세요. `` `` 뭐? 지금? `` `` 그럼요. `` ``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생겼어. 너는 죽어있는 동안에는 없는 사람이 된다고 했잖아. `` 네에, 네에 하며 아이는 말끝을 늘렸습니다. 눈빛은 이 얘기보다 다른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 그럼, 내가 네게 말을 걸면, 허공에 대고 말을 하는 거야? `` `` 알면 상처받을 텐데. `` `` 알려줘. `` `` 네. 남들이 속으로 미친 사람 취급할 거예요. `` `` 그래서 지나가던 아이가 쳐다봤던 거야? `` `` 아마도? 속으로 좀 고소하다고 느꼈어요. 그렇다고 밖에서 저랑 문자로 대화를 주고받을 생각은 관두세요. `` `` 미친 사람이 되어야겠네. `` `` 미친 사람으로 보이기가 싫다면, 다른 방법이 있기는 해요. `` `` 뭔데? `` 카운터에서는 나이가 든, 그 할아버지가 노곤한 분위기에 졸고 계셨습니다. 자칫 무미건조할 수 있는 백색의 도서관 안에서 유독 할아버지가 머무르는 공간은 공기가 버건디색으로물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세월을 타고 흘러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재주였습니다. `` 비밀이에요. `` `` 좀 아쉬운데. `` `` 나중에 알려줄게요. 용무나 보세요. `` `` 할아버지. 할아버지? `` 할아버지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셨습니다. 눈꺼풀 사이로 검은 달이 움직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곧바로 알아채셨습니다. `` 이사오... 너로구나. 그간 많이 변했어. ``

`` 시간이 지났으니까요. 잘 지내시는 것처럼 보여서 다행이에요. `` `` 책을 빌리려고? `` `` 아뇨. 할아버지, 혹시 예전 기록을 좀 볼 수 있을까요? `` `` 무슨 기록을 말이냐. 여긴 흥신소도 아닌데. `` 농담으로 말하면서도 할아버지는 낡은 타자기를 두드리셨습니다. 딱히 의식해서 미소를 짓지도 않았건만, 표정에는 여유가 묻어났습니다. `` 예전에 사람이 혹시 이곳을 이용했나 확인하려고요. `` `` 글쎄. 대여 기록이라면 찾을 수야 있다만... 오래되었나? `` `` 네. 6년... 아니, 7년 정도... `` `` 오래 되었구만. 누구의 대여 기록을 찾으려는 거야? `` `` 고이즈미 아사기리예요. 저와 같이 다녔던 아이. 기억하세요? `` `` 이 나이가 되면, 기억은 썰물처럼 변해가지.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어. `` 안경을 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할아버지는 부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 고이즈미 아사기리. 그런 아이의 대여기록은 없구나. `` `` 없어요? 분명 이 도서관을 자주 이용했을 텐데요. `` `` 하지만 봐라, 네 기록도 멀쩡한데 그 아이의 기록은 없어. `` 세상에서 아사기리의 기록도, 흔적도 온통 사라졌습니다. 불현듯 짜여진 각본같은 상황에 아이를 바라봤습니다. 아이는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들썩였습니다. `` 저는 아사기리씨가 누군지도 모르거든요? 괜히 아사기리씨로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좀 상처거든요. `` `` 그럼 이게 말이 돼? 이렇게 갑자기 사람 흔적이 사라진다는 게? 네가 무슨 짓을 했거나, 혹은... `` `` 대여 기록이잖아요. ` 대여 기록 `. 책을 빌리지 않았으면 기록이 남지 않겠죠. 잘 생각해봐요. 그 사람이 도서관을 자주 이용한다고 치고, 책도 빌려 갔어요? `` 순간 아차 싶은 생각에 기억을 또다시 되돌립니다. 과거로의 복기, 현재로 돌아와서 추리. 저는 지금 제 유년시절이 담긴 오래된 동화책을 듬성듬성 읽어가고 있습니다.

되게 흥미로운 소재네요

재밌는데 왜 쌍따옴표가 이상하게 생겼어? 그냥 궁금해서 한 질문이야.

>>50 감사합니다. >>51 모바일로만 작성합니다. 맞춤법 검사기를 한 번 돌린 후 내용을 복사해서 다시 가져오는데, 그때 쌍따옴표가 그대로 옮겨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15 `` 이사오. 이사오. `` `` 응? `` `` 그 책, 빌려 갈 거야? `` 아사기리의 목소리에 어린 소년이 고개를 돌립니다. 상대는 아사기리입니다. 자신의 품 안에 딱 들어오는 책을 내려놓으면서, 반대로 제가 들고 있는 책을 가리킵니다. `` 응. 집에 가서 읽으려고. 아사기리는? `` `` 나는 도서관에서 읽을 거야. `` `` 도서관을 정말 좋아하네. 그렇지만 도서관에서 언제까지고 읽을 수는 없잖아. `` `` 그때가 되면 다음에 와서 읽으면 되지. `` `` 아쉽지 않아? `` 아사기리는 눈을 도로록, 도로록 구슬처럼 굴립니다. 그리고는 좋은 단어를 찾았다는 듯, 손가락을 튕겨 소리 냈습니다. ``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그 아쉬움을 읽고 싶어서야. `` `` 그게 뭐야? 이해하기 어려워. `` `` 한참 읽다가 시간이 다 돼서, 이야기가 도중에 끊겨버려. 그럼, 거기서부터 다음 이야기까지의 공백이 생기잖아? `` `` 공백? `` `` 빈 공간 말이야. 아무것도 없는 도화지처럼. `` 아사기리는 설명을 도와주겠다며 작은 손을 맞잡았습니다. 제 손을 이끌어서, 그것을 지휘하듯 두 손을 벌려놓습니다. 그대로 손을 떨어트리고는 케이크를 가르는 것처럼 빈 공간을 토막 내기 시작합니다.

`` 집에 간 다음부터, 나는 이 공간을 읽는 거야. 다음날 도서관에 오기 전까지. `` `` 하지만 다음 내용을 모르잖아. 어떻게 읽어? `` `` 모르는 내용을 읽는 거지. `` ``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를 아쉬움이라고 불러? `` `` 아마... 그런 모양이야. `` 아사기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책의 모서리를 그리듯 훑어나간 후, 아사기리는 미련 없이 책을 정리했습니다. 다음에 읽을 때를 위해서라며, 꺼내기 쉽게끔 다른 책들보다 조금 삐져나오게 넣었습니다. `` 그렇구나. 그럼... 오늘은 도서관에서 남아 있을 거야? `` `` 이사오는 들어가려고? `` `` 슬슬 들어갈 생각이었어. `` 순간 눈꼬리가 내려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기분이 어땠는지는 지금에야 알 것 같습니다. 혼자서 도서관에 있기를 섭섭해 하는 눈빛이 아니었을까요. `` 그럼, 나도 빌려 가야겠다. `` `` 조금 전까지는 빌려 가지 않겠다며? `` `` 네가 읽는 책 내용이 궁금해서. 그거랑 같은 책을 빌려 갈래. 먼저 가 있어. 책을 찾아가게. `` 아사기리는 책을 빌려 가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들고 나온 적은 없습니다. 늘 그랬습니다. 보란 듯이 책을 품에 안는 것이 버릇인 아사기리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 어때, 좀 결론이 났어요? `` `` 책을 빌려 가지는 않았던 것 같네. `` `` 도서관은 좋아했고요? `` `` 그래. 왜 네가 관심 있는 거야? `` `` 그냥, 궁금하잖아요. 남의 연애사가 재밌기도 하고요. ``

결국, 또다시 지니고 있던 단서가 모래처럼 흩어집니다. 이제 또 뭐가 남아있나 생각합니다. 아사기리를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으면서, 막상 찾아보려니 발자국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간신히 찾은 단서마저도 허깨비입니다. 몇 년간의 간극이 모든 접점을 지워버렸습니다. `` ... `` `` 이사오씨. `` `` 어. `` `` 남은 단서는 이제 없는 건가요? `` `` 모르겠어. `` `` 아쉬워요? `` `` 당연하지. 지금 누구 놀리는 거야? `` `` 아뇨. 기분전환 겸, 제 부탁을 좀 들어달라고 하려 했는데 타이밍이 좀 이상하네요. `` 그제야 기억이 났습니다. 맥 앤 치즈와 화초. 아이가 부탁했던 것들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소나기가 한점, 한점 마른 시멘트 바닥을 물들여 어느새 진한 회색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 얼른 가요. 오늘은 쉬자고요. 단서가 이걸로 끝은 아니겠죠. `` `` 하지만 막막하잖아. 마음만 굴뚝같고. `` `` 그럼 그 마음을 좇아가면 되죠.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있잖아요? `` `` 그래서? `` `` 그걸 하나씩 적어나가 보자고요. 물론, 하루에 제 부탁도 하나씩 들어줘야 해요. ``

#16 오늘 몫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자리를 옮겼습니다. 빗방울이 퍼뜨리는 동그라미들을 밟았습니다. 아이와 정한 전반적인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아이를 살해했으니, 아이에게 속죄해야 한다. 그 조건은 아이가 돌아가기까지, 하루에 한 번 소원을 들어준다. 어차피 돌아가면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가지만, 아이의 경험, 기억이나 아이 소유의 사물 등은 죽어버린 시점으로 돌아간 뒤에도 남아있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대형마트를 가기로 했습니다. 대형마트. 아이는 거대하고 넓은, 코스트코를 가고 싶어 했습니다. `` 왜 맥 앤 치즈를 사는데 코스트코까지 가는 거야? `` `` 그냥요. 먹고 싶은 것들을 잔뜩 살 거예요. `` `` 평소에 갈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지? `` `` 예. `` 아이는 시큰둥하게 답했습니다. 그리고 늘어지는 줄을 바라봤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라서 그런지, 분위기마저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온 김에 다른 것도 사갈까 생각했습니다. `` 참, 화초도 사겠다며. `` `` 그건 여기서 말고요. 있지도 않겠지만. 화초가 가득한 곳에서, 신중하게 고르고 싶어요. ``

카트를 제가 뒤에서 잡아끌자, 아이는 앞에서 한 손으로 잡으며 방향을 정했습니다. 이곳, 저곳. 각각의 코너들을 세심하게 둘러보며 아이는 싱싱한 재료들을 고르기 시작합니다. 정작 레토르트 식품은 지금의 아이에게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 냉장고에 이게 다 들어가? `` `` 정리하면 되죠. 솔직히 그쪽 집 냉장고는 제가 볼 때 수라장이었어요. 순 오래된 재료만 있고. `` ``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 `` 있어요. 먹는 음식이 음침하면, 사람도 그렇더라고요. `` 아이는 어딘가 기운차 보였습니다. 어떤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역동적인 느낌도 있었습니다. 밤의 그 우울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만약 제 얕은 기억이 맞았다면, 아이는 조울증을 겪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조증의 상태일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치, 불규칙하게 일렁이는 라이터의 불씨 같습니다. 어느 순간 확 불타오르다, 불안하고 또 불안하게흔들리기를 반복하는 불씨 말입니다. `` 아스파라거스. `` `` 샀어. `` `` 등심? `` `` 샀어. `` `` 마늘, 양파. 또... 감자. `` `` 너, 이거 다 요리할 줄은 알아? `` `` 그럼요. 혼자 밥해 먹을 일이 많았어요. ``

문득 계란판을 고르는 아이의 손길에 눈이 갔습니다. 피부는 새하얗지만, 손가락 끝은 제법 거칠었습니다. 분명 많은 일을 혼자 해냈을 손입니다. 그래서 윤곽도 도드라졌을 것입니다. `` 마무리는, 이거랑 이거. 이거. `` `` 윽. `` 아이가 멀찍이서 무심하게 빵, 버터를 집어 던졌습니다. 그것들을 받으려다 저는 우스꽝스럽게 식빵 봉투에 얼굴을 맞았습니다. `` 바보 같아. 사실 이름이 바카베인거 아니에요? `` `` 실례되는 말이야. `` `` 실례라는 말이 당신 입에서 나올 줄이야. ``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아이는 쿡쿡 웃었습니다. 왜 웃느냐는질문을 하기도 전에 저는 눈치챘습니다. 곧 사람들의 관심이 끊어지자 이어폰을 연결하고 귀에 꽂았습니다. `` 제가 했던 말 기억나죠? `` `` 그래. `` `` 남들 눈에는 그쪽이 어설픈 재주를 부리는 곰처럼 보였겠네요. 혼자 식빵을 던지고, 받고. `` `` 나를 놀리는 게 재미있지? `` `` 그럼요. 이 정도로 놀려줘도 분은 풀리지를 않지만요. ``

* 馬鹿는 일본어로 바카라고 발음하며, 바보녀석 정도로 해석됩니다.

2020/05/02 그래도 항상 기다리는 중입니다

* 사정상 이어가기가 늦어졌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입니다.

#17 " 어쩐지 신나보이네. " 제가 짐을 들고 가는 동안, 아이는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신이 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확실히 아이는 평소보다는 힘이 넘쳤습니다. " 남의 돈으로 사고 싶은 걸 사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에요. " " 그래. 그렇겠지. " " 그쪽이 그 맘을 잘 알아요? " " 그럼? 잘 알지. " " 호오. " " 무슨 반응이 그래? " 자동차 시트에 짐들을 옮겨놓으면서 말했습니다. 비가 부디 그치기를 바라면서, 저는 차근차근 정리했습니다. 아이는 한발 빠르게 자리에 앉았습니다. 제가 정리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무릎이 조금 까져있습니다. 아이의 상처에 눈길이 갈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가 만들어버린 것만 같은, 죄악감과 비슷하면서 이질적인 정서였습니다. " 다음은 화초를 사러 가주세요. " " 화초? 무슨 화초? " " 몰라요. 가서 봐야 알겠는데, 일단 정해둔 화초는 보스턴 고사리예요. " 그게 뭐냐는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시동을 걸었습니다. 아이가 이번에만 알려줄게요, 하는 태도입니다. " 보스턴 고사리는요, 건조한 기후를 좋아해요. 그렇지만, 건조한 기후에 강하면서 한편으로는 습기가 없어지면 금방 죽고 말아요. " " 또? " " 그렇다고 너무 물을 많이 줘도 뿌리가 썩어요. 직사광선은 피해야 하는데, 또 밝은 곳에 두면 좋아해요. " " 아이 같네. " " 그쵸. 사춘기 10대 같잖아요. 관심이 너무 많아도, 적어도 죽고 마는 까다로운 아이.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생명력이 질긴 화초예요. " " 화초가 사람보다 나은 것 같아. 그렇게 보면. 최소한 나는 그러지 못했거든. " " 뭐래요. 이상한 맞장구 치지 마세요. " 머쓱한 분위기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말이 없는 시간이 시계 초침을 한 바퀴 돌렸습니다. " 저도 그랬어요. " 아이가 말했습니다.

관엽 식물을 판매하는 가게에 도착했습니다. 차로 오고 가는 동안, 아이와 화초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화초보다는 식물 그 자체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주로 흐름은 식물은 이러이러한데, 사람은 이러이러하지 못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딱히 흉을 보려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비교만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인 모양입니다. 사람보다는 화초, 화초보다는 고양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 애옹, 하는 고양이 소리 정말 귀여운데. " " 다 왔어. 여기야. " " 아. 도착했어요? 여기가 동네에 있는? " " 유일한 가게지. 이상하게, 우리 도심 사람들은 식물을 좋아하지 않거든. " " 그거 부러워서 그러는 거예요. " 아이의 말에 동의하며 내렸습니다. 안으로 들어갔을 즈음, 작은 정원을 가꾸던 나이 지긋한 주인이 인사했습니다. " 반가워요. 처음으로 오셨네요? " " 네. 화초들을 좀 둘러보려고 하는데요. 이름이... " " 보스턴 고사리. " 아이가 옆에서 이름을 알려줘서, 덕분에 화초는 금방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정원사가 품에서 꺼낸 보스턴 고사리. 그것이 늘어선 모습은 녹색 폭죽이 터지던 중, 멈춰선 모양을 닮았습니다. 칙칙한 제 방에 색깔이 생긴다는 점이 내심 기대되기 시작했습니다.

#18 오늘 사기로 했던 물건은 전부 다 샀습니다. 아이는 제가 들고 가려던 화초를 자신이 받아들었습니다. 크기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기에, 들고 가는데에 무리는 없었습니다. '' 다 샀으니 돌아가요. '' '' 응. '' 차에 들어가 앉아서 시동을 거는 동안 아이는 조용했습니다. 비가 제법 거세진 뒤라, 빗방울 소리가 시끄럽게 차를 두드렸습니다. 저는 아이를 차로 쳐버린 기억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직감했습니다. 앞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저는 분명 이 아이를 떠올리며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히리라는 직감이었습니다. 화초를 지켜보던 아이가 넌지시 말했습니다. '' 출발해주세요. '' '' 어, 응. '' '' 내일도 나갈 예정이죠? 뒷조사 하러. '' '' 그래. '' '' 어디로요? '' '' ... ... 글쎄... '' '' 이 마을에 생태 공원 있는 거 알아요? '' 아이의 말에 고개를 들었습니다. 정신이 든 저는 그대로 엑셀을 밟았습니다. 느린 속도로 바퀴를 움직이며 생각했습니다. 생태공원에서 연못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아사기리는 이제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시간만이 다르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 그런데, 그게 조사랑 의미가 있어? '' '' 행방을 알아내기에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 '' 구태여 갈 필요가 있어? '' '' 혹시 알아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지. ''

'' 그냥 네가 가고 싶은 거 아냐? '' '' 그러려면 혼자 갔겠죠. 좀 생각을 하세요. 저는 불쾌함에 소리내서 혀를 찼습니다. 고소하다는듯 아이가 웃었고, 저는 딱히 말을 더 이어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 더 기억나는 거 없어요? 그... 아사기리라는 사람에 대해서. '' 그 말이 나오자 절묘하게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왔습니다. 잠시 차를 멈춰세우고, 저는 괜스레 음악 소리를 올렸습니다. T-Rex의 debora가 자동차 안의 적막함을 채워갔습니다. '' 편지 보내기를 좋아했어. 또... 나처럼, 도서관에 틀어박히기도 좋아했고. '' '' 편지. 편지라. 둘 다 참 아날로그적이네요. '' '' 아날로그만의 매력도 있는거야. '' '' 오늘 조사의 성과가 어떤데요. 그 주소 찾아갔어요? '' '' 찾아갔는데, 아사기리라는 사람은 모른데. 이전부터 살던 사람이라니까, 주소를 다른 곳으로 썼다거나... 그런 거겠지. '' '' 예전부터 주고 받았을거 아니예요? '' '' 응. '' '' 그게 말이 돼요? '' 제가 또 무슨 뜻이냐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나나시는 뭔가 이상하지 않느냐며 두 손을 깍지꼈습니다.

'' 처음부터 주소를 속여서 썼다거나, 그 집주인이 거짓말을 했다거나... 그렇잖아요. 그런데 주소를 다르게 썼으면 편지를 전달받을 수가 없었겠죠. 엉뚱한 사람에게 답장이 올테니까. '' '' 편지를 받아서 아사기리에게 전달할 수도 있잖아? '' '' 그럴수야 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죠. 너무 손이 많이 가요. '' 우회전입니다. 차량이 핸들을 따라 돌이가고, 덩달아 사고의 흐름도 회전합니다. 아이가 찌른 맹점에 논파되었습니다. 이것만으로 명확한 답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변환점은 찾을 수 있었습니다. '' 집주인이 거짓말을 한다고? '' ''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죠. '' '' 왜? '' '' 그쪽이 수상해서요. '' '' 동창에게서 가족을 숨긴다고? '' '' 그런식으로 접근하는 사기꾼들 많잖아요. 문전박대 당한거겠죠. '' '' 그렇다고 보통 가족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잖아. '' '' 그게 아니면 뭐. 개인적인 가정사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이러면 더더욱 캐내기가 찝찝해지죠? '' 아사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는 점점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비추기는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보다는 뭔가, 넘지 말아야할 선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선을 넘어버리면 알기 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우리라고 계속해서 누군가 속삭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19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렇다할 다른 얘기는 없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용했습니다. 별다른 말 없이, 적막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도착하고는 짐을 집까지 옮겨, 아이와 함께 정리했습니다. 오늘의 저녁은 자연스레 제 몫이 되었습니다. 나나시는 집 안을 돌아다니다 잠시 흡연을 하러 나갔습니다. 간단한 선에서의 요리를 하면서, 아이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 ... 개인적인 가정사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이러면 더더욱 캐내기가 찝찝해지죠? ' 뭐였을까. 무슨 일이었기에 아사기리의 집은 아사기리를 모르는 척 했던걸까. 아사기리를 구태여 숨겨야할 이유가 있을까. 가족을 숨겨야만 하는 이유는 뭘까.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평소처럼 혼자 집에 남은 저는, 전화기를 들어 낯선 번호를 눌렀습니다. '' ... 여보세요? '' '' 형. '' '' 이사오? '' 제가 대답을 하지 않으니, 상대도 조용했습니다. 저는 낯선 기분에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의식중에 결국 찾는 사람은 형이었습니다. '' 별일이네? 네가 전화를 먼저 걸고. '' '' 뭣 좀 물어보려고. '' 얼마든지. 형은 여유롭다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 있잖아. 그. '' '' 그? '' '' 기억 나? 내가 도둑질하다가 걸린 날. '' '' 기억나지. 주인 아저씨가 노발대발했지. '' '' 그때 형이랑 친구들. 나랑 눈 마주쳤잖아. '' '' 응. 그랬어. '' '' 네 동생 아니냐고 물어보던 거, 거기까진 들었는데. 뭐라고 대답했어? '' 횡설수설 말을 한 끝에 간신히 결론을 토해냈습니다. 제가 잠자코 기다리는 동안 전화기에서는 조용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형은 마치 대답을 글로 써내듯 차분해보였습니다. '' 얘기했지. 내 동생이 맞다고. '' '' 부끄러웠어? '' '' 갑자기 왜 그래. 술 마셨어? '' '' 아니, 그냥... 좀. 남의 의견이 궁금했어. 가족을 숨기는 심정이 어떨지. '' '' 넌 이런 내가 부끄러워? '' '' 별 생각 없어. 남들이 형 보고 병신 소리 해도. 대신 좀 고깝긴 해. '' '' 내가? '' '' 걔네가. '' 형의 웃음소리와 동시에 물이 끓어올랐습니다. 저는 불씨를 조금 줄이고서 다시 형과의 통화에 집중했습니다.

'' 나는 잘 모르겠네, 가족을 숨긴다는 심정이 어떤지. '' '' 그래? '' '' 하지만, 이사오. 그건 있어. 가족은 일단 같이 지낸 사람이잖아. '' '' 그래서? ''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 전화기 너머로 병원의 방송 소리가 들렸습니다. 동시에 문이 열리며 나나시가 슬리퍼를 질질 끌었습니다. 저는 곁눈질로 아이의 시선을 확인하며 답을 기다렸습니다. '' 그 사람과 같이 지낸 시간을 부정하고 싶은거겠지. 그 사람이 싫거나, 혹은 자신이 싫다거나. 그 시간을 내다 버리려는... 혹은 묻고 싶다거나, 뭐...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고. '' '' 그게 결론이야? '' '' 응. 내 생각에는, 시간의 문제라고 생각해. '' '' 명쾌하지는 않았지만 고마워, 형. '' '' 그래. 잘 자. '' 통화를 끊으며 냄비를 끌어옵니다. 아이는 그것을 바라보며 먼저 식기를 마련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이가 가족이냐며 물어보기에, 저는 그에 대해서 적당하게 대답했습니다. 동시에 짧게 내일 일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 참, 이사오 씨. 일은 안해요? '' '' 한동안은 그럴 예정이야. 네가 돌아가기 전까지는. '' '' 얼마나 걸릴지 알고요. '' '' 어차피 벌어봐야 네가 돌아가면 없어질 돈이잖아? '' '' ... 오. '' 아이는 할 말이 없었는지,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20 이후, 끼니를 해결하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서로 조용하게 티비를 보거나, 제 할 일을 할 뿐이었습니다. 조용히 시간이 흐르고, 암묵적인 약속처럼 잠에 들었습니다. 문득 잠든 아이를 보며, 안방에 안치되어있을 시체가 떠올랐습니다. 아이는 시체와 똑같았습니다. 그리고는 꿈을 꾸었습니다. 평화로운 꿈이었습니다. 꿈 속에서 저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거리는 눈에 익숙합니다. 거리가 제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기억해내라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옵니다. 그 거리의 끝에, 아사기리가 서있습니다. '' 이사오. '' 아사기리의 부름에 저는 걸어갑니다. 마치 인력처럼, 아사기리에게 끌어당겨지고 있었습니다. '' ... '' '' 이사오. 간만이야. '' '' 너를 찾고 있었어. '' '' 지금 그런건 아무래도 좋아. 눈 앞의 사람에 집중해야지. '' 거리가 가까워지자, 아사기리는 자연스레 제 허리를 끌어당겼습니다. 저는 그만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사기리에게 하소연하듯, 모든 것들이 엉망이라며 중얼거렸습니다. 고개를 들어올리자 서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 이거 꿈이야? '' '' 네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 ''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 '' '' 보통 그런 대사는 연인끼리 재회할 때에나 나오지 않아? 우린... ... 모르겠어.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어도 좋을지. '' 아사기리의 표정은 미동도 없습니다. 그저 입꼬리만 올린 채, 제 품 안에서 이따금 뒤척일 뿐이었습니다. 꿈에서라도 본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말문이 막혔습니다. '' 이사오. 나를 좋아했어? '' '' 잘 모르겠어... 널 만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 '' 그건 사랑이 아니라 호기심이나... 그리움일지도 몰라. '' '' 왜 내가 네 편지를 그렇게나 기다렸을까? '' '' 나도 네 편지를 기다렸으니까.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어. ''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아사기리는 어깨만 으쓱였습니다. 그리곤 입을 닫습니다. 너는 사실 답을 알고 있다고, 그리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차라리 누구라도 좋으니, 명확하게 답을 내려주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사기리는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습니다. '' 이사오. 나 이제 가봐야돼. '' '' 잘 가. 다시 볼 수 있을까? '' '' 지금 보고 있는걸. '' '' 다음에도 말이야. '' 거리를 벌리며 아사기리가 떨어집니다. '' 나를 잊지 말아줘. 그러면 볼 수 있어. ''

환한 빛에 눈을 떴습니다. 곧, 저는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나나시가 아침이 되고 커튼을 걷어낸 모양이었습니다. 창문 너머로 밝은 햇빛이 내려앉아서, 방 안이 밝았습니다. 테이블 위로 잼을 바른 토스트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나나시는 이미 다른 토스트를 물고 있었습니다. 티비에서 진행중인 뉴스를 배경삼아 저는 몸을 일으킵니다. '' 네가 만들었어? '' '' 네. 싫어해요? '' '' 아니. 토스트 좋아해. '' '' 대신 설거지는 당신이 해주세요. '' 뉴스에서 기상 캐스터는 오늘의 날씨가 맑으리라 얘기합니다. 뉴스의 진행처럼 하늘은 쾌청했습니다. 간만의 선선한 바람에, 저는 제법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다 먹고는 정수기를 향하는 아이에게 넌지시 물어봤습니다. '' 얼마나 남았어? '' '' 딸기잼이요? 한... 3분의 1이요. '' '' 그거 말고. 네가 돌아가기까지. '' '' 아... 그거요. '' 아이는 생각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냉수를 가득 따라서, 아이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 모르겠어요. 그때 그때 달라요. '' '' 그래? 뭐... ... 좋아. 생태공원에 가자. '' '' ... 갑자기요? '' '' 간만에 날씨가 너무 좋아. 할 일이 생겼어. ''

#21 목적은 간단했습니다. 기분전환. 지금으로는 마땅히 드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간절함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들은 의외로 우연이나 시간이 답이었습니다. 저는 공원을 배회하며 그러한 답을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할 수 있다면 아사기리가 머무르던 이 마을의 구석구석을 다 돌아다닐 생각입니다. 나나시는 미리 정리했던 교복 차림이었습니다. 이따금 바람이 불면 베이지색 블레이저가 흔들거리고는 했습니다. 공원에 도착하고서, 막연히 정한 것도 없이 산책로를 따라 걸어갔습니다. 나나시는 걷는 내내 조용했고, 이따금 멈춰서선 생태공원의 연못이나 새들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종종, 그것을 사진으로 찍고는 했습니다. 아사기리에 대한 행적으로 고민하던 중이었기에, 저는 드물게 던져진 아이의 대화를 놓치고는 했습니다. '' 쾌청한 날씨의 생태공원은 이런 느낌이었네요. '' '' 나쁘지 않지. '' '' 저였다면, 당신이 지금 하는 고민을 조금은 내려놓을거예요. ''

''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고민이 아니잖아? '' '' 그렇다고 붙잡기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마땅히 떠오른 접점 있어요? '' '' 접점은... '' '' 그 사람에 대해서 당신이 모르는 것들이 많을지도 몰라요. '' 날아가는 새를 보기 좋게 찍으면서, 아이는 시선을 새에 고정했습니다. 저와는 다르게, 아이는 이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습니다. '' ... 나나시. 나나시. '' '' 뭐예요? 징그럽게... '' '' 생각해보니, 넌 남들 눈에는 없는 셈이잖아. '' '' 그런데요? '' '' 관련된 것들도. '' '' 그래요. '' '' 그 핸드폰도? '' '' 없는 셈이 되겠죠. '' 아이는 당연한 소리를 한다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시시한 얘기라며 아이가 무시하려던 것을, 저는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 네게 닿은 것들은 다 없는 셈이 되는거야? '' '' 그거야 뭐... ... 이상한 부탁 하지 마세요. '' '' 부탁할게. '' '' ... 와. 진짜 질린다... '' 아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 자연스레 저를 가택침입에 이용하시네요. '' '' 다른건 괜찮아. 아사기리가 그 집에 있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돼. '' '' 싫어요. 기분 나빠요. '' 그 요구에는 관심이 없는 듯, 아이는 시선을 돌려 걸어갔습니다. 이런 요구를 아이에게 연신 권하려던 것은 관뒀습니다. '' 꼭 눈으로 보는 것 말고도, 그 사람을 확인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니까요. '' '' 예를 들어서? '' '' 그건 당신이 생각해내야죠. '' '' 편지. '' '' 편지? '' '' 아사기리가 보냈던 편지들을 처음부터 읽어보는거야. '' 내용들을 하나씩 더듬을 생각입니다. 사소하다고 생각해 잊었던 것들까지. 지금은 시간이 지나 흔적이 대부분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하나쯤은 그때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 좋은 생각이네요. 최소한 집에 몰래 기어들어가는 것보다는 바람직한 방법이예요. 집에 가면 저도 볼래요. '' '' 너는 왜 보고 싶은건데? '' '' 그냥, 궁금하고 재밌어보여요. 제가 당신의 스토커질에 대한 해답에서 좀 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22 '' 그렇게 해, 그럼. 딱히 상관은 없을테니까. '' 만족스러운 답을 들은 후, 아이는 마저 걸어갔습니다. 한가롭게 걸어가던 중, 생태공원의 끄트머리에서 멈춰섰습니다. 나비가 날고 있었습니다. 나비는 혼자였습니다. '' 이사오, 여기예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 '' '' 여기? 여긴 끄트머리잖아. '' '' 그게 어때서요? '' '' 어떠냐니. 허전하고 뭔가... 뭔가 그래. '' '' 한적해서 좋잖아요. ''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아이가 먼 허공을 바라봅니다. 아이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습니다. '' 그 사람도 좋아했을걸요. 여기. '' '' 네가 어떻게 알아? '' '' 그냥. 알 수 있어요. 저와 같은 사람은 다 좋아해요. '' '' 아무말이나 뱉는구나? '' 대화가 끝나도 나나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나비가 움직이는 것을 그저 멀뚱히 따라서 보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잠깐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짧게 한숨을 내쉽니다. 제가 조용히 기다리니, 아이는 뒤돌았습니다.

화창하리라던 예보와 다르게, 조금씩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당황합니다. 희미한 빗방울을 맞아가며 나나시는 걸음을 옮겨갑니다. '' 아쉽게 됐네. 산책이 급하게 끝나버려서. '' '' 뭐... 괜찮아요. 보고 싶었던 것들은 다 봤어요. '' '' 그럼 들어가자. '' '' 아까 본 나비, 어떻게 될까요? '' 좌석에 탄 채로 나나시가 넌지시 물어봅니다. 시동을 거는 소리에 묻혀서, 저는 반사적이게 되물어봤습니다. '' 나비? 나비가 왜. '' '' 비가 오잖아요. 나비는 비가 오면 날 수 없어요. '' '' 글쎄. 어딘가에 숨어있겠지. 비를 피할때까지. '' '' 날개가 젖으면 죽게 될까요? '' '' 아닐거야. 날개가 젖어서 죽는다면, 세상 나비는 멸종했겠지. '' 그렇구나. 아이의 짧은 대답입니다. 들어가면 씻은 뒤 편지를 보자고 나나시가 보챘습니다. 갈피를 잡고 나니, 무언가 해볼 의욕이 다시 생겼습니다. 그것이 하루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차를 타고 돌아가면서, 잠깐 나나시는 영화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것은 장애를 가진 여자와 남자의 연애 얘기였습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오래 됐다면 제법 오랜 영화입니다. '' 그 영화에서, 조제는 자신을 물고기에 비유해요. 오랜 시간 바닷속에 있던 자신이 물 바깥으로 나왔다고. '' '' 왜 나왔데? '' '' 그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야한 밤을 보내러 나왔데요. '' '' 뭐야. 코미디 영화야? '' '' 낭만적인 영화거든요? 분위기 다 깨기는. '' ''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야한 밤이 낭만이구나. '' '' 질린다, 진짜. '' 제 웃음소리에 못마땅하다며 나나시는 질색했지만, 저는 그 영화에 퍽 흥미가 생겼습니다. 나나시에 따르면, 영화 속 여주인공인 조제는 하반신에 마비가 있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 장애는 그녀의 삶을 가두고, 주변인들과의 단절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남주 츠네오는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서 관심이 생기게 되고, 그녀의 장애를 대하며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그래서. 둘이 잘 이어져? '' '' 아뇨. 둘은 결국 헤어져요. 꽤 담백하게. '' ''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 한계라는 선은 늘 존재하니까. '' '' 그래도 조제는 괜찮다고 했어요. 다시 바다에 빠져 나뒹굴더라도. 실제로 그녀는 혼자 다시 의젓하게 살아가요. '' 잠시 빨간 불에 차가 멈췄습니다. 창문을 작은 빗방울들이 악기 삼았습니다. '' 괜찮아보여요. 그런 결말도. '' 아이가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습니다.

#23 '' 이것들이예요? '' '' 응. '' 편지들을 꺼내놓았습니다. 아사기리와 주고 받았던 편지들은 제법 많았습니다. 그것은 몇달간의 기록이었습니다. 처음 아사기리에게서 편지를 받았던 날 기뻐했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감정을 잊고 지내온 저 자신을 떠올립니다. 편지는 마른 양피지처럼 건조했습니다. '' 첫날부터 읽어볼거야. '' 나나시는 제 옆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글자를 눈으로 읽어가 시작합니다. 6월 18일. 네가 가고 며칠이 지났어. 허전한 기분이야. 너도 알겠지만, 여긴 뭔가 비어있잖아. 그런 부분에서 네가 있는 동안은 재미있었는데, 어쩔 수 없지. 오랫동안 심심할거야. 내가 익숙해지기까지. 다른 아이들과는 통하지 못하는 구석이 있으니까.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너도 그런 기분을 느껴봤으면 싶어. 짓궂다고 해도 좋아. 네게는 얄미운 구석도 늘 있었으니까, 마냥 좋은 말만 쓰지는 않을거야. 이해할 수 있지? 넌 가능할거야. 참, 네가 가고 도서관 관리를 맡게 됐어. 우리 학교 도서관. 거기 참 조용하더라. 왜 네가 도서관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아. 여긴 학교가 끝나도 좀 더 머무를 수 있다고 그랬어. 진작 좀 알려주지. 나중에 봐.

6월 23일 네 편지, 잘 받았어. 거기서도 어색하게 지낸다니, 이사오답네. 마냥 욕하는 건 아냐. 그냥, 너니까 그럴것 같다는 소리지. 너는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타입이잖아. 남들보다 훨씬. 그러니, 아마 한동안은 더 그런 상태로 머무르겠지. 쌤통이야. 네가 사는 곳, 그 곳의 밤은 어때? 밝아? 아니면 어두워? 여긴 밤이 되면 불빛이 많지 않아 깜깜하잖아. 별이 잘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해. 나는 밝은 밤을 좋아하니까. 밖을 걷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아. 솔직히 무서워. 이렇게 말하니 우리 동네가 무슨 시골처럼 들리네. 시골까지는 아닌데. 좀 아담할 뿐이지. 그래도 역시 집구석은 나가고 싶어. 멀리, 야경이 좋은 곳에서 혼자 살거야. 이 동네를 나가야지. 언젠가 찾아오라고 말했는데, 기억해둘게. 내가 갈게. 나중에 갈 수 있다면.

편지들을 읽어갑니다. 나나시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커피를 들고 마셨습니다. 제 몫을 찾으려 일어나니, 아이가 손을 붙잡았습니다. '' 그쪽 몫도 타왔어요. 거기, 옆에. '' '' 고마워. '' '' 뭘요. '' '' 아사기리가 찾아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거야. '' 뭔가 씁쓸한 뒷맛에 한숨이 나옵니다. 저는 손을 뻗어 뒤섞인 편지 사이로 다음 편지를 찾아갔습니다. 나나시는 다리를 모은 채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제가 읽었던 편지를 쥐고, 그것을 가늘게 뜬 눈으로 다시 읽었습니다. '' 보관을 성실히 하셨네요. '' '' 나한테는 중요했으니까. 난 위로받고 있었어. 아사기리에게서. '' ''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하고 싶어요? '' '' 만나면... ... 보고 싶었다고 얘기할거야. '' '' 그리웠군요? 그 사람. '' 다음 날짜의 편지를 찾았습니다. 행여 찢어질까, 조심스레 편지를 펼쳤습니다. '' 잊었던 적이 없어. 유일하게 통했던 사람이니까. '' '' 그래보여요. 그냥... 이 사람 글을 보면 알 것 같아요. ''

#24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축음기 위를 도는 원판같습니다. 시간은 하나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편지를 읽어가는 행위는 원래 그러해야했을 부품처럼, 저를 제자리에 끼워맞춰갔습니다. 6월 28일 책을 자주 읽고 있어. 네가 떠나고 그게 늘어났어. 딱히 네가 아쉽다는 말은 아냐. 그냥 그렇다는 뜻이지.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이게 원래의 내 모습처럼 느껴져. 제자리를 찾았다에 가깝겠지. 책은 사람을 위로해주고, 조명을 밝혀줘. 갑갑해지면 무작정 책을 펼치는거야.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돼. 막연하게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그렇다고 책에 내 하루를 털어놓을 수는 없어. 네게 쓸 편지가 있으니 상관은 없겠지만. 그저 나는, 막연하게 책만 읽으면 되는거야. 내일 학교에서 이런저런 축제가 있을거야. 규모가 커보였거든. 아마 온종일 바쁘겠지만, 도서관은 늘 그랬듯 조용하겠지. 그런 큰 모임, 나만 뭔가 거북하니?

이후에도 편지는 여럿 있었습니다. 그것은 꽤 산발적인 간격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편지가 끊긴 것은 12월. 이후 몇년의 시간동안 편지는 끊어졌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제쪽에서 보낸 편지에 대한 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12월부터 다시 만나자전 편지가 온 9월, 그 사이의 공백을 상기했습니다. 잠시 생각을 환기시키고자 베란다로 향합니다. 아이는 따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빗소리가 짙어집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편지를 다시 읽어가며 묘한 기류를 느낀 것 같습니다. 제 기억에서 아사기리는 저와는 분명 완전한 정반대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편지를 쭉 읽어보면서, 아사기리의 일상은 실제로는 저와 비슷하게 혼자 머물거나, 조용하게 흘러가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내용은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졌습니다. 덤으로, 아사기리는 제가 없어지고 혼자 이곳저곳을 둘러봤습니다. 무엇보다 걸리는 점이 있었습니다. 축제처럼 큰 모임, 아사기리는 단 한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습니다. 담배의 끝을 손가락으로 튕겨 재를 떨구었습니다. 작은 눈이 내렸습니다.

돌아오니 아이는 편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집중해서 읽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자연스레 옆에 앉으며 나나시에게 물었습니다. '' 뭔가 떠오르는 거 있어? '' '' 글쎄요... 뭔가 애매하다는 느낌은 있어요. '' '' 애매하다고? '' '' 그냥... 편지에 뭔가 빠진 느낌이예요. '' '' 뭔가 빠지다니. '' '' 서로 얘기는 주고 받는데... 뭔가 떠오르는 거 없어요? 자기 얘기에 대해서 느껴지는 거리감이라거나. '' 아이는 내용들을 가리켰습니다. '' 뭔가 나열하는 느낌이예요. 보고하는 것처럼... 좀 다르기는 한데, 아무튼 자기 얘기를 걸러가며 풀어가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 그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다른 내용들도 얼핏 그런 인상을 줬습니다. 아사기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사기리의 일상을 얼핏 듣긴 했지만, 그에 대한 아사기리의 생각은 어딘가 건조했습니다. '' 반대로 물어볼게요. 뭔가 떠오르는 거 있어요? '' '' 뭔가를 숨긴다는 얘기지? '' ''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은 그래요. 그냥 사람 성격이 소극적일 수도 있겠지만요. ''

#25 " 포기하려는건 아니죠? 이 사람 찾는거. " " 나?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 다만... " " 어차피 당신은 포기하기에는 선을 너무 넘어갔잖아요. 그리고 간절하지 않아요? " " 응. 간절해. " " 간절하면 어떻게든 되게 되어있어요. " 아이가 커피를 홀짝거렸습니다. 두 손으로 가지런히 잔을 잡은채로, 아이는 넌지시 물었습니다. " 아니면 말이예요. 노선을 좀 틀어도 되지 않아요? " " 노선? " " 응. 노선이요. 찾는다는 생각도 좋죠. 좋은데. 그건 부수적인 목표로 두자고요. " " 그럼, 1차적인 목표는 뭔데? " " 그 사람을 이해하세요. 제 생각인데,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 " 지금도 충분히 이해하려 하고 있잖아? " 제가 말을 더 이어나가기 전에 아이는 말을 잘라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아이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이의 그런 단호함이 싫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누가 내 손을 잡고 정답으로 끌어줬으면 좋겠다, 그러한 생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 평생을 걸려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세상에는 그런게 많고요. 당신은 아직 멀었죠. 그럼요. "

" 아니면, 역시 그녀를 이해하려니 부끄러워요? " " 그런건 아니거든? " " 지금 반응 좀 볼만했어요. 막 발끈하네. " 저는 손을 길게 뻗어 아이의 근처에 놓여진 다른 편지들을 죄다 걷어갔습니다. 빈 잔을 내려놓고, 아이는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있잖아요. 당신에게 가장 적당한 복수가 뭔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 " 그런데? " " 지금, 괜찮은 방법이 하나 떠올랐어요. " " 말해봐. 네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난 널 도울 생각이야. 지금도 유효하고. " " 정말요? 도울 수 있다면 도울거예요? " " 응. " 아이는 선뜻 걸음을 제게 옮겼습니다. 차박거리며 발바닥이 땅에 닿는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곧, 아이는 의자에 앉아있던 저를 뒤에서 끌어안았습니다. 목에 두른 팔은 가볍고 여리게 느껴졌습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그대로 제게 가만히 뺨을 맞대고서, 아이가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 당신이 찾고 있는 그 사람을 잊게 만드는거예요. "

" 뭐? 너. 아니. 뭐라는거야? 미쳤어? " " 왜요? 제 생각에는 괜찮은 복수같은데. " 제가 아이를 떨쳐내려하자 아이는 더욱 힘줘서 끌어당겼습니다. 앉은 상태로 타인에게 붙잡혀버리면, 힘을 쓰기가 참 난처해집니다. 꼴사납게 아이를 연신 부르며 손을 잡아 뜯어내자, 아이는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습니다. 흐흐. 아이는 짧게 웃으며 그런 제 반응을 좋다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지금... 지금 나랑 장난하는거야?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이러는건데? " " 흔들려요? " " 뭐? 아니? 지금 네 행동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랬던거야. " " 흐흥. 저도 차에 치였을때 참 어처구니가 없었거든요. 그것도 음주 상태인 당신한테. " " ... " " 당신이 간절하게 찾던 사람을 잊을만큼 당신을 놀려줄래요. 그러다 시간이 돌아가고, 당신의 기억이 사라지면... 궁금하네요. 당신이 빈자리를 의식할 수 있을지. " " 장난이면 경고하는데, 두번 다시 이런 짓 하지 마. " 알겠다며 아이는 제 앞의 빈 잔을 걷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잔을 행구러 가며 제게 잘 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가 자리를 뜬 후, 저는 불쾌한 감각에 혀를 찼습니다.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닙니다. 아이의 장난은 크게 머리에 남겨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기는 끔찍하게 싫었습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저는 남은 편지들을 하루 온종일 정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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