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0/02/19 23:03:49 ID : XwLhwHBdQk4 0
※ 잘 못씀
2 이름없음 2020/02/19 23:10:24 ID : XwLhwHBdQk4 0
그 애는 초등학교 1학년 동네 미술학원에서 처음 만났다. 파란 바람막이에 반바지를 입은 차림새였는데, 눈매가 또래치곤 사나워서 애들이 무서워했었다. 그 애는 그림을 아주 잘그려서 선생님께 칭찬을 자주 받았다. 나도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받는 그 애의 그림이 궁금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애는 선생님들 말고는 아무에게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른 애들이 몇 번이나 보여달라고 이야기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부탁하지 않았지만 궁금한 건 매한가지여서, 그 애가 그림을 그릴 때 어깨너머로 몰래 본 적이 있다. 그 그림은 파란 하늘을 가르는 하얀 새 그림이였고, 그때까지 본 그림 중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3 이름없음 2020/02/19 23:16:24 ID : XwLhwHBdQk4 0
물론 대놓고 오래 보진 못했다. 내가 그림을 보고 넋을 놓고 있단 걸 알아차린 그 애가 스케치북을 덜컥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채 마르지 않은 파란 물감은 분명 앞장에 맞물려 데칼코마니 마냥 묻고, 번져버렸을 것이다. 뭇내 망가졌을 그림이 아쉬워 움찔했지만, 그 애가 내가 뒤에 있으면 스케치북을 다시 펼칠 것 같지 않아서 내 자리로 돌아갔다. 이것 역시 그 애에게는 비밀인데, 물을 갈러 화장실로 가던 중 내 생각보다 훨씬 망가진 그림을 들고 속상해하는 그 애를 보았었다. 그림이 망가진 것도, 그 애가 속상해하는 것도 전부 내 탓인것만 같아 슬퍼졌지만, 동시에 무서웠다. 물통을 들고 뛰어가다 넘어져서 웃음거리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4 이름없음 2020/02/19 23:24:39 ID : XwLhwHBdQk4 0
1학년 겨울방학식을 마치고, 사흘 정도 학원은 방학을 맞았다. 그 기간동안 난 기억을 더듬어 그 그림을 따라그렸었다. 엄마가 밥을 먹으라 재촉하는 소리에도 스케치북을 붙잡고 있었으니까, 아주 열심히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크레파스로도, 수채화로도, 연필로도. 어떻게 해도 그 그림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완성해서 그 애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내가 망가트려버린 그 그림을. 터무니 없이 조잡하지만 어떻게든 완성한 그 그림을 들고 다시 학원을 갔을 땐, 원장선생님은 더이상 그 애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사를 가서 학원엔 더이상 나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이상했다. 나는 다른 애들처럼 붙임성이 좋지 않아서 그 애랑은 말 한 번 해본 적이 없는데, 그냥 그 파란 그림을 조금 봤고, 그걸 망가트려버린 것 뿐이었는데, 그 애가 이사를 갔단 말에 울고 말았다. 원장선생님껜 아직도 죄송하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나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셨으니까. 그래도 울고 싶었다. 하얀 새에게도 그 애에게도 미안했다.
5 이름없음 2020/02/19 23:32:04 ID : XwLhwHBdQk4 0
그 애를 다시 만난 건, 고등학교 입학식에서였다. 키도 훌쩍 자라고, 더이상 파란 바람막이도 입고 있지 않았지만 아직도 눈매가 사나운 게 딱 봐도 그 애였다. 나를 못 알아본 것 같았다. 알아보는 게 신기하지,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 애랑 말 한 반 섞어본 적이 없으니까. 나에게 영원히 죽지 않을 파란 하늘과 하얀 새를 선물해준 건 그애였지만 내가 억지로 뺏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아는 척 하지 않으려 했다. 같은 반이 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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