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0/12/30 23:50:55 ID : kq3TO067wE2 58
내가 불과 3년전에 겪었던 일을 정리해서 써보려고 한다. 3년전 일임에도 마치 어제 겪은 것처럼 생생히 기억이 난다. 지금은 다 지나간 일이고, 조금의 각색을 첨가해봤으니 내가 겪은 이 기이한 일을 재밌게 즐겼으면 한다. --------- 스레주는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다. 병원을 학교가듯이 들락거렸고, 살면서 여러번 생명의 고비를 넘었던 적이 있다. 호흡기와 심장에 문제가 있었다.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나. 천식과 관상동맥의 기형... 이외에도 몇가지 질환들을 달고 태어났다. 달리 일상생활을 하는데 의외로 큰 지장은 없었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훅 정신을 잃곤 했다.
102 이름없음 2021/01/01 23:49:44 ID : kq3TO067wE2 0
"다가오지 마!" 내가 겁에 질려 소리치자, 그 사람이 주춤했다. 나는 뒷걸음질쳤다. 등으로 벽이 느껴졌다. 순간 망했다하는 생각이 머리를 감쌌다. "진정해." "다가오지 말라니까!" "일단 진정하라고!"
103 이름없음 2021/01/01 23:51:27 ID : kq3TO067wE2 0
그가 치는 고함에 나는 순간 딸꾹질이 나왔다. 저 사람, 내게 말을 했다. 해칠 용의도 없어보인다. 하지만 뒤집어 쓴 후드와 두꺼운 가면 탓에 스산한 분위기가 풍겨졌다. 가까워지고 싶단 마음이 들지 않는 외모였다. 마치 흑사병 의사의 까마귀 가면처럼, 음침하면서도 이유모를 공포가 그 가면에서 느껴졌다. 내가 두려워하거나 말거나, 그 사람은 쓰러진 나를 뒤로하고 자판기로 가 음료수를 한 캔 뽑았다. 어떻게 불꺼진 자판기에서 그걸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은 내게 음료수를 건넸다.
104 이름없음 2021/01/01 23:53:10 ID : kq3TO067wE2 0
"마셔." 무심하게 청량음료를 한 캔 건넸다. 의심스러웠다. 과연 여기에서 나온 것들을 마셔도 되는 것일지? 만약 마셨다가 죽게 된다면... 또는 이제까지 봤던 괴물처럼 변하는게 아닌지? 온통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처음 만난 기괴한 외모의 사람이 어째서 내게 호의적으로 나오는지도 의문이었다.
105 이름없음 2021/01/01 23:55:00 ID : kq3TO067wE2 0
하지만 음료수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가면 뒤로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모르는데, 굉장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오히려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겁에 질린 나는 결국 그 캔을 받아 마셨다. 달고 시원한 음료수였다. 건강때문에 음료수는 많이 못 마신지라, 간만에 느끼는 청량감이었다.
106 이름없음 2021/01/01 23:56:44 ID : kq3TO067wE2 0
그 사람은 내가 음료수를 마시는걸 지켜보더니, 팔짱을 끼고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난 이 정도면 됐어..요..." 반말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성숙한 여자의 목소리에, 작지 않은, 오히려 큰 키. 어딘가 나를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내가 음료수 캔을 다시 건네자, 그 사람은 아무말도 않고 나를 쳐다봤다.
107 이름없음 2021/01/01 23:58:35 ID : kq3TO067wE2 0
그 사람은 뜬금없는 말을 시작했다. "정말... 끔찍이도..." "예?" "끔찍이도 못생겼군...."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사람은 그말을 남기고 후드를 벗었다.
108 이름없음 2021/01/02 00:00:01 ID : kq3TO067wE2 0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머리카락은 아주 길었다. 그 사람의 키는 165cm 정도 되어보였는데, 그 허리 윗부분까지 머리가 내려갔다. "저는 됐으니까... 드세요." "난 마실 수 없어." "예????" 그녀는 계속해서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다.
109 이름없음 2021/01/02 00:01:47 ID : kq3TO067wE2 0
"가면을 썼잖아." "벗고 마시면 되잖아요?" "좀 괜찮아지셨나? 계속 대꾸하는걸 보니." 겁먹은 나는 음료수를 억지로 꼴깍꼴깍 삼켰다. 그녀는 당황한 듯 했다. 이내 그녀는 자기 팔을 쓰다듬더니, 바깥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110 이름없음 2021/01/02 00:02:34 ID : kq3TO067wE2 0
"나가려고 하는거야?" "네." "그 몸으로?" 당시 나는 병원복, 그것도 제대로 매여지지 않은 걸 하나 걸치고 있었다. 밖은 겨울 날씨였으니, 확실히 이러고 나가는건 미친 짓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나는 춥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이해한 것과는 조금 다른걸 묻는것 같았다.
111 이름없음 2021/01/02 00:03:52 ID : kq3TO067wE2 0
"조금 쌀쌀하긴 할 것 같은데...." "아니, 밖에 있는 귀신들을 단신으로 상대할 생각이었냐고." 그녀는 내게 밖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112 이름없음 2021/01/02 00:04:41 ID : kq3TO067wE2 0
그녀가 말하기를, 이 병원 밖에는 생명이 거의 없다고 했다. 평소엔 생기가 넘쳤던 거리에도,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집에도.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건 "귀신"이었다. 수백, 수천마리의 귀신. 저마다 각기 다른 끔찍한 모습을 한 채로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
113 이름없음 2021/01/02 00:05:22 ID : kq3TO067wE2 0
병원에 있는 귀신은 극소수로, 힘도 음기도 극히 적은 약골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방금 그것한테 뿌린건..." "성수야. 그런 귀신은 성수를 뿌려주면 연기가 되어 사라지지. 근데 밖에 있는 종들은 달라. 성수를 뿌려도 참고 네 심장을 노릴거니까."
114 이름없음 2021/01/02 00:06:06 ID : kq3TO067wE2 0
그녀가 내 가슴 오른쪽에 손가락을 꾹 찔러넣었다. "당신은 그럼 귀신이 아닌건가요?"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고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답했다.
115 이름없음 2021/01/02 00:07:30 ID : kq3TO067wE2 0
"글쎄. 내가 처음 여기로 굴러떨어졌을땐,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여기에 오래 있다보니 가끔은 내가 귀신인 것 같기도 해. 하지만 성수를 만질 수 있으니, 귀신은 아닐거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의미심장했다. 한편으로는 종잡을 수 없이 무서웠다. 그치만, 그녀가 하는 말엔 중요한 말이 분명 들어있었다. "굴러떨어졌다고요?"
116 이름없음 2021/01/02 00:08:32 ID : kq3TO067wE2 0
그녀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그녀가 여기에 온 이유는 악마와 거래를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넘기는 댓가로 자신의 동생을 살렸다고 했다. "너무 간절했어. 하나뿐인 어린 동생이 고통 속에 죽는건 원치 않았으니까. 악마같은게 진짜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있더라고. 이름도 모르는 악마였어. 사람들은 악마라고하면 루시퍼나 벨제부브를 떠올리지. 파리나 염소의 마왕들 말야. 하지만 내가 본 악마는 너무 달랐어." "어떤 모습이었죠?" "독수리의 형상을 하고 있었어."
117 이름없음 2021/01/02 00:10:05 ID : kq3TO067wE2 0
"동생분은 살아계신건가요?" "나도 몰라." "예?" "내 목숨을 거래한 즉시 나는 여기로 굴러떨어졌어. 너처럼 저 병원으로. 웬 미친 간호사가 이상한 약을 주사했는데, 정신이 점차 몽롱해졌어. 그 직전까진 난 살아있었지.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녀는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이 계절에 샌들, 반바지, 반팔 차림을 하고 있었다. 팔엔 긴 장갑을 하고 있었으니 그렇다쳐도, 하반신은 얼어죽기 딱 좋은 차림이었다. "안 추우세요?" 그녀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118 이름없음 2021/01/02 00:11:12 ID : kq3TO067wE2 0
"넌 지금까지 추웠어?" 순간,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충격이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여기선 추위를 느낄 수 없어. 여기 오래있으면, 감각이 점차 사라지지. 제일 첫번째로 사라지는 감각은 '추움'이야."
119 이름없음 2021/01/02 00:11:49 ID : kq3TO067wE2 0
여기서 잠깐 끊을게. 배고파서 야식 시켰는데 배달왔음. 치킨 조금만 뜯고 이어가겠습니다. 만약 이야기 중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물어봐주세요.
120 이름없음 2021/01/02 00:34:44 ID : K2MjdBdTO63 0
ㅂㄱㅇㅇ!
121 이름없음 2021/01/02 11:23:08 ID : wmmtAqo1xCq 0
언제오닝
122 이름없음 2021/01/02 12:53:34 ID : XApf88o1zWr 0
너무 잘 보고 있어 ㅠㅠㅠ 뒷이야기 궁금하다..!
123 이름없음 2021/01/02 14:44:28 ID : By1DvA0oK3R 0
헉 가면을 쓴 사람??
124 이름없음 2021/01/02 17:17:55 ID : 9dBhzdPg4Zi 0
헐 너무 재밌다 그 여자분 누군지 궁금해ㅜㅜ
125 이름없음 2021/01/02 23:11:14 ID : kq3TO067wE2 0
스레주임다. 어제 야식으로 닭다리를 뜯다가 그만 배불러서 쿨쿨 자버렸지 뭡니까. 어제 못푼거랑 오늘치 분량 오늘 그냥 한 번에 하겠습니다. 언제나 봐줘서 고맙다 스테디 레스주 많이 늦었지? 미안해 지금부터 열심히 풀어나갈테니 재밌게 봐줘. -124 그녀의 정체는 최후반부에 공개가 될 것임.
126 이름없음 2021/01/02 23:11:54 ID : kq3TO067wE2 0
지금 당장은 아니고, 오늘은 40분쯤에 올 것이야. 심야에 달려야 재밌으니까 ㅎㅎ..
127 이름없음 2021/01/02 23:39:38 ID : kq3TO067wE2 0
약속한 40분입니다. 이야기를 마저 진행해보겠습니다.
128 이름없음 2021/01/02 23:40:17 ID : kq3TO067wE2 0
그녀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독수리 형상을 한 악마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감각이 사라진다니... 심지어 나는 이미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어떤 매커니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곳에 가까워지고, 원래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129 이름없음 2021/01/02 23:40:46 ID : kq3TO067wE2 0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녀는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하고, 이곳에서 겪은 일을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130 이름없음 2021/01/02 23:41:08 ID : kq3TO067wE2 0
그녀의 이름은 레나(가명), 16살때 여기에 처음 들어왔다. 그 뒤로 꽤 오랫동안 여기에서 지냈다. 그곳은 시간을 알 수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진짜 나이도 얼마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한 목소리나, 그녀의 외형으로 봤을때, 확실히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게 틀림없었다.
131 이름없음 2021/01/02 23:42:52 ID : kq3TO067wE2 0
그녀는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했지. 그땐 의심하는 법을 잘 모르는 때니까. 어느날 동생이 큰 사고를 당했는데, 동생은 혼수상태였어. 그때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별 짓을 다 해봤어. 성당에도 찾아가보고, 교회에도 가보고, 절에도 가보고. 영험하다는 무당을 찾아가봤지만 그 무당은 사기꾼이었지. 기도는 내 동생을 살리지 못했어.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어. 인터넷 같은데서 얻은 정보로 어떻게든 살리려 노력해봤는데, 되는게 없었지. 그때 찾은거야. 독수리와 태양이 그려진 책을."
132 이름없음 2021/01/02 23:43:20 ID : kq3TO067wE2 0
검은 겉표지, 그리고 그 가운데에 그려진 금빛 독수리와 태양. 제목은 없었다. 집 안에 그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레나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그 책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표지를 넘기자, 의미없는 목차가 나타났다. 그저 1. 2. 3. 이렇게 순서만 있고, 내용은 없었다. 그 다음장을 넘기자, 백지가 나왔다. 다음 장도, 다다음 장도, 그렇게 쭉 책을 팔락거리며 넘겨도, 텅 빈 백지 뿐이었다.
133 이름없음 2021/01/02 23:43:50 ID : kq3TO067wE2 0
다만 책의 가장 마지막 부분, 마지막 부분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Ende die not." 아무것도 없는 빈 책의 유일한 구절이자 끝맺음이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134 이름없음 2021/01/02 23:44:35 ID : 9dBhzdPg4Zi 0
헐 보고있어!!! 마지막에 나온다니ㅜㅜㅜ 꼭 마지막까지 다 이야기해죠ㅠㅠ
135 이름없음 2021/01/02 23:45:01 ID : kq3TO067wE2 0
"아직도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 하지만, 그 구절을 읽고 나서 나는 고통에 시달렸지. 어지럽기도 하고, 메슥거리기도 하고. 하루는 침대에 피를 토한 적이 있는데, 그날 만났어. 독수리 모습을 한 악마..." 독수리의 모습을 한 악마가 레나를 찾아왔다. 레나는 내게 그 독수리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해주었다.
136 이름없음 2021/01/02 23:45:50 ID : kq3TO067wE2 0
머리가 둘인 독수리, 왼쪽 머리는 하늘을 향해 게걸스레 입을 벌리고 있었고, 하나는 레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독수리의 몸은 날개가 없이 깃털이 가운데로 소용돌이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안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가 하나 있었다.
137 이름없음 2021/01/02 23:46:18 ID : kq3TO067wE2 0
대충 800스레 정도가면 이야기가 마무리될 것 같아. 그때까지 힘내볼게
138 이름없음 2021/01/02 23:46:48 ID : kq3TO067wE2 0
레나는 그 독수리 형태의 악마를 만나자마자 기절했다. 정신을 차렸을때는, 나처럼 이 병동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미친 간호사를 만난거지. 그리고 여기서의 끝나지 않는 생활이 시작됐어."
139 이름없음 2021/01/02 23:46:49 ID : 9dBhzdPg4Zi 0
근데 레주 몸 약하다며 몸 잘 챙겨가면서 하는게 제일 중요해
140 이름없음 2021/01/02 23:48:05 ID : kq3TO067wE2 0
지금은 전보단 많이 나아졌어. 그래도 격무는 안 되지만. 걱정해줘서 고마워 ㅎㅎ ---------------------- 레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는 레나의 말을 듣고, 내가 여기로 오게 된 과정을 떠올렸다. <powhoaenam> 유튜브에서 본 그 영상을 떠올렸다. 영상의 말미에는 독수리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이는 레나가 말한 독수리 형상의 악마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141 이름없음 2021/01/02 23:49:03 ID : kq3TO067wE2 0
뒤이어, 레나는 바깥의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저 문 밖으로 나가면, 네가 아는 그 풍경이 나타날거야. 네가 기억하던 병원 근처의 야경. 뭐, 가로등은 안 들어오지만."
142 이름없음 2021/01/02 23:49:44 ID : kq3TO067wE2 0
"밖에는 귀신이 있다면서요." "그렇지. 귀신이 득실거리지. 아닐때도 있고." "아닐때가 있다고요?"
143 이름없음 2021/01/02 23:50:59 ID : kq3TO067wE2 0
레나의 말에 따르면, 이 곳의 귀신들은 모두 일정한 때마다 사라진다고 한다. 그때가 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레나는 자기도 밖에 도사리는 귀신들을 모두 상대하긴 버겁다고 말했다. "만약 여기서 나가려면, 지금 밖에 넘치는 귀신을 전부 처리하던지, 아니면 기다렸다가 귀신이 사라지면 나가던지. 여긴 엿같은 곳이야. 상식을 기대하지마."
144 이름없음 2021/01/02 23:51:43 ID : kq3TO067wE2 0
"그 시간이 언제쯤인데요?" "몰라." "네?" "육감으로 알아내야 해. 너, 아직 감각이 그래도 살아있지? 그때가 되면 갑자기 추위가 몰려올거야. 그때가 바로 나갈 수 있는 시간이야."
145 이름없음 2021/01/02 23:52:25 ID : kq3TO067wE2 0
그렇게 말한 후, 레나는 일어나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어디 가시는거에요?" "난 나갈만큼 나가봤어. 많은 것을 부딪혀서 배웠지. 아예 이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노력도 해봤지만... 의미없는 짓이었어. 난 여기 있을거야. 감각이 무뎌지면 돌아와."
146 이름없음 2021/01/02 23:53:19 ID : kq3TO067wE2 0
레나는 그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레나의 말대로, 얼마 안가 몸에 서늘한 감각이 몰려왔다. 더불어 턱의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병원복 상의를 고쳐입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혹시 모르니까 이것도." 로비에 있던 작은 십자가를 집어 손에 쥐었다.
147 이름없음 2021/01/02 23:54:01 ID : kq3TO067wE2 0
밖의 공기가 서늘했다. 안개가 자욱했다.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보고 있자니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거리는 마치 세기말처럼 고요했다.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텅빈 도로 한 가운데를 비틀비틀 걸어나갔다. 가슴이 욱신댔기 때문이다.
148 이름없음 2021/01/02 23:55:06 ID : kq3TO067wE2 0
신호등도 모두 꺼져있는 거리를 걷는 와중에, 도로 저 너머에서 불빛 한 무리가 나타났다. 경사가 꽤 가파른 언덕 아래로, 번화가가 있었다. 빛은 아름답고 황홀했다. 형형색색의 광채가 고요하고 어두운 도시를 밝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거기선 인간미가 느껴졌다. 나는 말도 안 된다는걸 알지만, 혹시나 레나를 만난 것처럼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빛의 숲을 향해 걸어갔다. 너무 낙관적인, 낭만에 젖은 관측이었지만.
149 이름없음 2021/01/02 23:57:05 ID : kq3TO067wE2 0
번화가에 닿기도 전에 눈 앞이 어질어질했다. 숨이 차올랐다. 저질인 내 체력이 원상복구된 것 같았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고나서야 결국 불이 켜진 건물에 다다랐다. 건물 밖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던 나는 벽에 몸을 기댄채로 주저앉았다.
150 이름없음 2021/01/02 23:58:10 ID : kq3TO067wE2 0
깊은 숨을 몰아쉬고 있던 와중에도 주위를 둘러보는건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숨소리를 내고 있던건 나 뿐이었다. 이렇게 화려하고 넓은 번화가인데도,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좌절한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숨이 멎는 줄 알았다.
151 이름없음 2021/01/02 23:59:13 ID : kq3TO067wE2 0
<발신자 : 엄마> 순간 가슴이 놀랐다. 나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모든걸 꿈으로 치부하는 생각이 남아있던 것이다. 그 전화를 받으면, 이 기괴한 악몽에서 깰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나는 무심코 초록 버튼을 슬라이드해버렸다.
152 이름없음 2021/01/03 00:01:18 ID : kq3TO067wE2 0
"여보세요! 엄마! 엄마!" 응답이 없었다. 소리가 안 켜진건가? 나는 벨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지직거리는 소리만 들려올뿐, 응답은 없었다. 전화는 곧 그쪽에서 끊었다. 그제서야 뭔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바로, 쉴 틈도 없이 전화기엔 문자가 수백통씩 전송됐다.
153 이름없음 2021/01/03 00:02:01 ID : kq3TO067wE2 0
<Ao012zKQRAF19912485fGji24f13cz12h1pqjfl> 이런 의미를 추정하기 어려운 문자열과 수열들이 <+96319400259124>이라는 번호로부터 계속해서 전송됐다. 매우 빠른 간격으로, 계속해서.
154 이름없음 2021/01/03 00:04:03 ID : kq3TO067wE2 0
두려웠다. 평상시에도 밤중에 그런 문자를 받으면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나는 문자를 차단했다. 그러자 더 이상 문자는 오지 않았다. 대신 이번엔 카톡 알람음이 딱 한 번 울렸다. 겁먹은 나는 확인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어 카톡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powhoaenam", 프로필 사진은 없었다. 숨이 멎는 기분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155 이름없음 2021/01/03 00:07:11 ID : kq3TO067wE2 0
내용은 두 장의 사진이었다. 하나는 육망성과 그 밑으로 나열된 히브리어, 다른 하나는 약도였다. 히브리어는 형태는 알지만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했기에 넘겼지만, 다른 약도는 익숙한 것이었다. 바로 이 번화가의 약도였기 때문이다.
156 이름없음 2021/01/03 00:07:24 ID : 9dBhzdPg4Zi 0
ㅂㄱㅇㅇ!!
157 이름없음 2021/01/03 00:09:38 ID : kq3TO067wE2 0
약도에는 내 위치가 노란 점으로, 그리고 붉은 점이 목적지로 나타나있었다. 가는 길까지 친절하게 선으로 나타나있었지만, 문제는 여기가 어떤 곳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powhoaenam>이 갑자기 나타나 이런 힌트를 주는 것도 의문스러웠다.
158 이름없음 2021/01/03 00:12:00 ID : kq3TO067wE2 0
앗, 봐줘서 고마워. ㅎㅎ ------ 그러나 의심도 곧 그쳤다. 가보는 것 외엔 다른 수가 없었다. 레나의 말대로라면 어차피 정해진 시간 동안은 귀신 같은 것들이 나타나지 않을테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이었다. 현재 위치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쉬고 그곳으로 향했다.
159 이름없음 2021/01/03 00:14:03 ID : kq3TO067wE2 0
가는 길에 계속해서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엄마"였다. "받지 말자..." 내가 반응을 않자, 전화벨 소리가 계속 바뀌었다. 기본 벨소리, 중국풍의 음악, 스웨디시 랩소디... 소리를 줄여도 음악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거리에서 그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등 뒤가 유난히 서늘한 기분이었다.
160 이름없음 2021/01/03 00:15:03 ID : 9dBhzdPg4Zi 0
혹시 전화는 안 받은 이유가있으까...? 엄마잖아ㅜㅜㅜㅜ 나였으면 무서워서 당장받는다ㅠㅠ
161 이름없음 2021/01/03 00:16:02 ID : kq3TO067wE2 0
걷고 걸어 목적지에 다다르니, 음악이 끊어졌다. 목적지는 내 기억 상으론, 지하철역이 있는 자리였다. (실제로도 지하철역이다.) 하지만, 지하철역의 모습은 간데 없고, 공사장의 모습만이 있었다. 공사장에 도착하자 곧바로 카톡 알람음이 울렸다. <powhoaenam>이 보낸 것이었다.
162 이름없음 2021/01/03 00:17:30 ID : kq3TO067wE2 0
바로 이전에 받자마자 대답도 없이 전화가 끊기고 해석불가능의 이상한 메세지가 계속 왔기 때문에... 단념하고 안 받았었지. ---------------------------- <4F R4 T> <powhoaenam 65p>
163 이름없음 2021/01/03 00:18:18 ID : kq3TO067wE2 0
두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내가 발신하는건 불가능했다. 입력란이 막혀있었다. 메세지의 의미를 파악해야했다. 다행히 그 의미를 이해하는덴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부가 훤히 드러난 공사장에는 층별로 1f, 2f라는 표식이 써져있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r4는 room 4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t의 의미는 해석해내지 못했다.
164 이름없음 2021/01/03 00:20:24 ID : kq3TO067wE2 0
그리고, powhoaenam 65p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했다. 65p는 페이지를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는 것일지.. powhoaenam이라는 어구가 들어간 순간부터 썩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165 이름없음 2021/01/03 00:21:27 ID : kq3TO067wE2 0
나는 공사장의 계단을 걸어 4층으로 올라갔다. 심장이 터질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드문드문 마감처리가 안 된 철골이 훤히 드러나 숨이 턱턱 막혔다. room4, 네번째 방... 나는 계속 그런 공간을 찾아 두리번댔다. 하지만 애초에 그곳엔 방이라 불릴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저 기둥만이 있을 뿐. 대신 기둥들 가운데 R4라는 글씨가 쓰여진 기둥이 있었다. 아마도 기둥의 넘버를 세기 위한 분류였을 것이다.
166 이름없음 2021/01/03 00:22:18 ID : kq3TO067wE2 0
공사장에 널린 공구들이 발에 툭툭 치이는 동안, 나는 기둥 앞에 서서 t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그곳은 너무 어두웠다. 나는 일단 불을 킬 수는 없을까 하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실수로 발을 헛디뎠는데, 바닥에 세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통이 없었다.
167 이름없음 2021/01/03 00:22:55 ID : kq3TO067wE2 0
추위도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에, 내 정신은 전적으로 공포에 지배당했다. 곧 이곳에서 수많은 영혼들의 행진이 시작될테니까.
168 이름없음 2021/01/03 00:23:53 ID : kq3TO067wE2 0
생각이 그치기가 무섭게, 계단에서 무언가 희끗희끗거리는게 보였다. 나는 황급히 야음에 숨어 입을 틀어막았다. 희끗희끗한것은 계속해서 R2 기둥을 배회했다. 슬쩍 살펴보니,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여자는 계속해서 그 기둥 주변을 배회했다. 기이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다가오지 않을 것 같다 생각해 조금 안심되었다.
169 이름없음 2021/01/03 00:25:07 ID : kq3TO067wE2 0
나는 방심한채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어둑어둑한 저 편에서 무언가 밝은게 눈에 띄었다. 거울이었다. 거울은 나와 그 배회하는 여인을 비추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배회하는 여인이 거울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또 한 번 깜빡이자, 여인은 바로 내가 숨은 기둥 뒤에 있었다.
170 이름없음 2021/01/03 00:26:15 ID : kq3TO067wE2 0
입을 틀어막았다. 여인은 눈이 없었다. 코도 없었다. 있어야 할 자리는 녹아내린 피부가 너덜너덜 걸려있었다. 여인은 갑자기 왼팔을 머리위로 치켜들고, 한 팔을 배꼽에 가져다댔다. 춤을 추는 자세였다. 그러더니 빙그르르 제자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들키면 끝장이다. <우우웅..> 그때 내 핸드폰의 전원이 꺼졌다. 진동이 울렸다. 여인은 혼령의 속도로 내 앞에 서서 다리를 굴러댔다.
171 이름없음 2021/01/03 00:27:00 ID : kq3TO067wE2 0
예, 오늘 준비한 분량은 여기까지... 좀 짧은것 같아서 내일부턴 조금 일찍시작해서 분량을 두 배로 늘려볼까한다. 그럼, 봐준 레스주들에게 감사! 오늘은 이만 안뇽~
172 이름없음 2021/01/03 00:27:32 ID : ldAY1ctxV81 0
웅 잘가
173 이름없음 2021/01/03 00:30:37 ID : 2HCi1hardVa 0
굿밤
174 이름없음 2021/01/03 00:35:46 ID : K2MjdBdTO63 0
이제 봤는데 존잼ㅠㅠ 굿밤 잘자!
175 이름없음 2021/01/03 00:48:15 ID : 9dBhzdPg4Zi 0
잘자아!
176 이름없음 2021/01/03 01:03:20 ID : XApf88o1zWr 0
와 너무 잘봤어 ㅠㅠㅠ 끊기 장인이구나! 담에 또 올게 !! ㅎㅎㅎ
177 이름없음 2021/01/03 01:42:22 ID : 1hffbu2twJT 0
너무 재밌게 보고있어ㅠ 꼭 소설 읽는거 같디ㅏ!! 몰입감 최고야ㅠㅜ
178 이름없음 2021/01/03 23:37:36 ID : bvg2NwE9tg7 0
너무 재밌어우유ㅠㅠㅠㅠㅠㅠㅠㅠ
179 이름없음 2021/01/05 14:26:23 ID : xzPclio4Zdz 0
언제오닝
180 이름없음 2021/01/05 14:51:48 ID : VaoNAlu9By3 0
기다리고잇을게
181 이름없음 2021/01/08 20:29:11 ID : kq3TO067wE2 0
스레주다. 너무 늦게 돌아왔지? 어깨에 염증이 생겨서 치료 좀 하고 돌아왔다. 내일 다시 이야기 이어나갈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줘. 기다려준 레스주들 너무 고맙다!
182 이름없음 2021/01/08 23:45:30 ID : 9dBhzdPg4Zi 0
몸잘챙기구...! 낼보자! 와줘서 고마우ㅜ
183 이름없음 2021/01/09 14:06:56 ID : HA6mMqpcE3v 0
건강이 최고지 건강 챙겨!!! 글 너무 재밌어!!
184 이름없음 2021/01/09 14:30:23 ID : IJUY3zRDtfW 0
오 사일런트 힐같은 느낌이네, 재밌다 잘 보고 있어!
185 이름없음 2021/01/09 17:04:08 ID : 0so3VargmK3 0
우와 진짜 재밌다 몰입력이 진짜 장난 아닌것 같아 잘 보고있어 !!
186 이름없음 2021/01/09 23:28:29 ID : kq3TO067wE2 0
그 때 나는 달리고 있었다. 내 뒤에 바짝 쫓아오는 귀신을 피해 정처없이, 그저 앞만 바라보고. 심장이 쾅쾅 뛰어대는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내달렸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갈 곳 없이 그 주변을 뱅뱅 돌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한 은행에 뛰쳐들어갔다. 텅빈 깜깜한 은행, 나는 입을 틀어막고 커튼을 살짝 들춰 창밖을 쳐다봤다. 그 앞으로 처참한 모습의 귀신이 슥 지나가는 걸 보고 기절할뻔 했다. 다행히 귀신은 내가 숨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린 나는 밀려오는 갈증을 느꼈다. 소리를 질러대서였을까. 그리 크지도 않은 은행이었지만, 정수기를 찾는덴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두컴컴한 은행 안, 눈이 안 좋은 나는 한치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187 이름없음 2021/01/09 23:33:34 ID : kq3TO067wE2 0
계속해서 발 밑에 무언가가 치이는것은 고사하고, 혹시나 이 안에도 귀신이 있는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꼈다. 스산한 공기가 내 몸을 감싸며, 그림자 장막이 내 눈을 가린다. 나는 좀 걸려서야 겨우 정수기를 찾아냈다. 하지만 정수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한걸지도. 정수기는 이제 됐고, 나는 다음으로 불을 찾아다녔다. 전원이 혹시 있지 않을까 하고 벽을 더듬어댔지만, 느껴지는건 딱딱한 콘크리트 벽의 감촉 뿐. 결국 불빛 찾기도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벽이 느껴지는 구석에 쪼그려앉아 추위가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 그때가 되면 귀신은 사라질테고, 다시 병동으로 돌아갈 수 있을테니. 도대체 언제인가? 내 추위가 다시 살아나는 순간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다.
188 이름없음 2021/01/09 23:37:15 ID : kq3TO067wE2 0
나는 구석에 앉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암호문의 의미, 도저히 간파할 수 없었다. 마지막 T의 의미도, powhoaenam 65p의 의미도. 그저 나를 속이려는 악마의 농간일지도 모른다. 나를 이 세계에 끌어들여 재미를 보려는 못된 악마의 악취미... 그렇게 생각이 왜곡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행원들이 앉는 자리 중 하나에 있던 컴퓨터가 빛을 발했다. 두둣! 하는 에러음과 함께, 모니터에서 불을 밝혔다. 컴퓨터는 저절로 켜져서 작동하고 있었다.
189 이름없음 2021/01/09 23:40:55 ID : kq3TO067wE2 0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컴퓨터는 저절로 부팅되며, 난해한 문자열을 매우 빠른 속도로 나열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팩스에서 나는 그 소리...가 작게 들리며, 윈도우 배경화면이 보이는가 싶더니, powershell 화면으로 넘어갔다. 이후 또 기계음을 마구 내다가, 전용 프로토콜에 연결됐다. 인터넷은 불가, 컴퓨터가 저절로 연결한 네트워크만 이용할 수 있었고, 기초적인 명령어조차 먹히지 않았다. 네트워크의 이름은 <ㅎㄴㄹ231>, 마지막으로 게시물이 업데이트 된건 20주 전. 작성자는 한 명에서 두 명 뿐이었는데, 유독 한 명의 작성자가 글을 많이 작성했다.
190 이름없음 2021/01/09 23:41:58 ID : Mqkk640q2JX 0
ㅂㄱㅇㅇ
191 이름없음 2021/01/09 23:43:42 ID : kq3TO067wE2 0
내용은 대저 "귀신에 관한 정보", "탈출" 등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의 향연으로 그 내용을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작성자의 이름은 각각 <host>, <unnunu>. 이 중 호스트가 가장 많은 글을 작성했고, 가장 최근에 글을 작성했다. 차근히 글을 읽어가며 나는 생각했다. '혹시 나와 레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그 때, 띠링하는 음성과 함께 새로운 게시글이 올라왔다. [unnunu?]
192 이름없음 2021/01/09 23:48:01 ID : kq3TO067wE2 0
순간 놀라 사고가 둔해진 것인지, 아니면 공포에 젖어 실낱같은 희망에 도취됐는지, 나는 아무런 의심없이 그 게시글을 클릭했다. [제목 : unnunu?] [본문 : 누구세요? 어떻게 접속한거야? (12초 전)] 옛날에 쓰인 하이텔을 아는가? 이건 그런 UI였는지라 단순하기 그지 없었다. 다만 사용자가 현재 네트워크에 접속중인 사람을 알 수 있었다. 네트워크에 가입된 아이디는 많았다. unnunu, hoyung18, dlwl1234 등... 어림잡아 8명 정도 되어보였다. 그 중 접속중이라는 의미의 초록불은 나, unnunu 쪽과 host뿐, 나머지는 음영처리된 상태였다.
193 이름없음 2021/01/09 23:50:33 ID : kq3TO067wE2 0
본문에는 댓글을 다는 기능이 없었다. 그와 통신하려면 나도 새로운 게시글을 써야했다. 나는 주저않고 게시글을 작성했다. 글을 작성하기 위해선 정해진 문법을 따라야했는데, 다행히 문법을 정리한 표가 주변에 있어 참고하면서 쓸 수 있었다. [제목 : 누구세요] [본문 : 이 컴퓨터에 연결된 계정이 unnunu인 것 같은데 전 여기 처음 왔어요. 혹시 사람이세요?] ...답신할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글쓰기. 나는 딱히 사회성이랄게 없었으니.
194 이름없음 2021/01/09 23:53:58 ID : kq3TO067wE2 0
얼마 안 가 새로운 게시글이 올라왔다. host의 글이었다. [제목 : 은빈동 부흥은행] (동네 이름은 가칭을 사용함) [본문 : 거기 계신거면 당장 빠져나와서 수성1동 주민센터로 오세요. 보는 즉시. 이유 묻지는 말고. 당장 튀어.] 글을 다 읽기가 무섭게, 바로 윗층에서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195 이름없음 2021/01/09 23:57:39 ID : kq3TO067wE2 0
질질 끄는 소리는 점점 계단에 가까워졌다. 문을 세게 잡아당기는 소리가 나더니, 잘 열리지 않는지 심한 소리를 내며 문을 덜컹거렸다. 수성 1동? 수성 1동이라면 현 위치인 은빈동에서 5km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애초에 은빈동은 남구, 수성동은 남동구였으니. 하지만 점점 소리는 거세지고, 이곳에 있다간 죽임당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나는 잽싸게 창문에 붙어 거리를 살펴보았다. 귀신이랄 것은 없었다. 거리는 텅 빈채로 한적한 모습이었다. 나는 결심하고 조심히 은행의 문을 열어 몸을 쭉 내밀었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기 전까지는.
196 이름없음 2021/01/10 00:03:24 ID : kq3TO067wE2 0
아까 그 여인 귀신은 문 바로 위에 달라붙어 나를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내가 들어간 직후부터 계속 거기에 숨어있던 것이다. 곧이어 위층에 있던 무언가도 문을 부수고 층계로 꿈지럭꿈지럭 내려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두 다리를 혹사시켰다. 하지만 이미 한바탕 달리기를 하고 난 뒤였고, 난 그리 오래 뛸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빠진 보도블럭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귀신이 내 턱밑에 손가락을 들이댔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십자가를 꺼내보였다. 귀신은 아랑곳 않고 내게 덤벼드는가 싶더니, 이내 비명을 지르며 기화되었다. "효과가 있는거야, 이거?" "야! 빨리 일어나!" 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신을 잡은건 레나였다.
197 이름없음 2021/01/10 00:06:35 ID : kq3TO067wE2 0
"바보같이 앉아있지 말고 업혀!" "네??" "곧 귀신이 몰려올거야. 무슨 깡으로 이렇게 멀리까지 나온거지? 제정신이 아니네!" 레나는 나를 향해 고함을 치며 쪼그려앉아 등을 허락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가던 나는 염치없이 그녀의 등에 업혔다. 나는 체중이 많이 나가는 편이 아니었다. 밥보다 약을 많이 먹으면 살이 찌기 힘드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레나는 나를 업고도 엄청난 속도로 내달렸다. "혹시 운동부셨어요??" "헛소리하지 마!"
198 이름없음 2021/01/10 00:09:48 ID : kq3TO067wE2 0
얼마 안가, 정말로 귀신들이 쏟아져나와 도로를 메워가기 시작했다. 빌딩에서, 공원에서, 가는 길마다 귀신들이 하나둘 빠져나왔다. 레나는 나를 업고 병동까지 죽어라 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말을 시키기 미안했지만, 아까 통신한 host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도 없었다. "레나, 수성1동으로 가야해요!" "수성1동? 거긴 남동구잖아! 여기서 5~6키로미터는 될텐데! 거긴 가서 뭐하려고?" 레나는 숨을 헐떡이지도 않았다. 나보다 한참 오래 여기에 머무른 탓인지, 그녀는 지친다는 감각도 무뎌진듯 했다. "거기에 사람이 있어요!" "사람?"
199 이름없음 2021/01/10 00:11:35 ID : kq3TO067wE2 0
"host라는 사람이 있어요. 아까 저 은행에서...." "그런건 일단 돌아가서 생각해. 밤은 길잖아? 여긴 영원히 밤이지마는." 레나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확실히 그랬다. 그녀는 나보다 이곳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녀의 말을 들어 나쁠 건 없었다. '그런데, 내가 거기있는걸 어떻게 안거지?'
200 이름없음 2021/01/10 00:14:47 ID : kq3TO067wE2 0
예 잠깐 휴식. 어깨 때문인지 이전처럼 글을 빨리빨리 쓰는건 무리네. 많이 쓰지도 못하겠고. 어깨 아프니 잠깐만 쉬겠습니다. 사일런트 힐이라... 그거 좀비게임이었나? 한 번 해보고 싶다. 글을 써본 경험이 적은데.. 아직 부족한 것도 많으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아 레스주 ㅋㅋ 봐줘서 감사합니다!
201 이름없음 2021/01/10 13:30:15 ID : 0so3VargmK3 0
와 몰입감 왜이래 내가 대신 경험하는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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