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1/01/19 12:19:12 ID : tunCnV84IK0 49
재작년 12월쯤, 그러니까 막 기말고사를 끝나고 쉴 때 겪었던 일이야. 아이피가 바뀔 수 있는 점 양해 바랄게. 스레딕은 해본 지 얼마 안 돼서 틀리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더라도 이해해줘. 조금 있다가 시작할게.
2 이름없음 2021/01/19 12:21:28 ID : nwreZjArtcp 0
ㅂㄱㅇㅇ
3 이름없음 2021/01/19 12:21:40 ID : ii1hgo1AY9B 0
ㅂㄱㅇㅇ!
4 이름없음 2021/01/19 12:26:00 ID : A7ta8qrtg2L 0
ㅂㄱㅇㅇ!!
5 이름없음 2021/01/19 12:39:02 ID : tunCnV84IK0 0
시험을 12월 초중순에 쳐서 당시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교생은 축제 분위기였어. 방학까지는 몇 주 남았고 남은 기간에는 학교에 출석만 하면서 영화나 보고 과자나 까먹으면 될 거였으니까. 나도 편승해서 매일같이 먹고 마시고 놀면서 학교에 다녔어.
6 이름없음 2021/01/19 12:41:20 ID : tunCnV84IK0 0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지. 그동안 너무 뵙고 싶었던 외할머니를 뵈러 갈 겸 댁에서도 허락을 받고 하룻밤 자면서 놀고 싶다고. 할머니 댁과 가까운 곳에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생겼던 곳도 있어서 겸사겸사. 시험 치기 전부터 가자고 가자고 노래를 불렀던 거라 옳다구나 하고 어머니랑 외할머니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어.
7 이름없음 2021/01/19 12:41:36 ID : mMrwFbjxRBb 0
ㅂㄱㅇㅇ
8 이름없음 2021/01/19 12:45:44 ID : tunCnV84IK0 0
혼자 가기에는 먼 것도 아니고 버스 한 번 갈아타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 동생들은 집에 있고 나만 가기로 했어. 버스카드를 찍었는데 딱 한 번 타고 환승까지 할 금액을 그때 다 써버린 거야. 가서 충전해야지 하고 뒤로 미뤄두고 할머니 댁으로 곧장 향했어. 과자 사온다고 하면서 그 장소에 가 볼 계획도 세우고, 사진도 찍어 볼 생각으로. 가는 길에는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어. 별 탈 없이 도착해서 인사드리고, 하룻밤 머물 때 쓸 짐을 풀었어.
9 이름없음 2021/01/19 12:50:38 ID : tunCnV84IK0 0
그리고 대략 오후 일곱 시 까지 놀고 있었어. 집안일도 도와드리고, 식사도 내가 맡아서 차리고, 설거지 하고 여러가지 하다 보니까 이제 슬슬 계획을 실행해볼 때가 온 거지. 생각해둔 대로 나는 할머니께 요 앞 편의점에서 과자랑 음료수 좀 사오겠다고 말씀드리고 한시바삐 나갔어. 물론 용돈도 조금 챙겼지. 갔다가 명목상이라도 과자도 사 와야 되니까. 버스카드도 충전해야 하고.
10 이름없음 2021/01/19 12:53:54 ID : jbhapQts1bc 0
ㅂㄱㅇㅇ
11 이름없음 2021/01/19 12:58:28 ID : tunCnV84IK0 0
내가 가려던 곳은 할머니 댁이 있는 곳과 사람 키의 두 배 정도만 한 높이에 있는 또 다른 마을을 잇는 계단이었어. 계단인데 벽 안에 있는 계단? 정확히 설명하기 힘들다. 윗마을에 가 본 적은 없고 보기만 했어. 마을 건물 벽에는 굉장히 화려한 꽃 무늬가 칠해져 있었고, 계단의 벽에는 파란 배경에 부엉이랑 너구리가 그려져 있었는데 궁금한 사람 있으면 사진은 찾는 대로 올려볼게. 못 찾으면 할머니 댁에 가는 대로 찍어서 올리고.
12 이름없음 2021/01/19 13:05:26 ID : tunCnV84IK0 0
스레? 제목이 특색이 없는 것 같아서 바꿨어. 그렇게 약간의 돈과 핸드폰만 챙기고 그 계단으로 갔지. 12월이라 해가 빨리 져서 내가 나갔을 때는 깜깜했어. 하지만 난 이제 시험이 끝나서 두려울 게 없는 학생... 이 아쉽게도 아니라서 핸드폰 손전등으로 비춰가며 갔어. 여태껏 본 바에 따르자면 어쨌든 계단이고, 또 위랑 아래를 직통으로 잇는 곳인데도 이상하게 아무도 안 지나다니더라. 그것도 수상하고, 칙칙한 골목인데 그곳만 이상하리만치 화려해서 더더욱 수상했지.
13 이름없음 2021/01/19 13:08:46 ID : Y4Ntii7dU0q 0
ㅂㄱㅇㅇ!
14 이름없음 2021/01/19 13:11:02 ID : tunCnV84IK0 0
호기심 많은 쫄보 알지. 내가 딱 그런 사람이야. 거의 보폭도 평소의 절반 정도로 좁게, 천천히 걸어갔는데 밤골목임에도 계단의 벽은 눈에 띄었어. 조금 더 다가가서, 스치듯이가 아니라 제대로 보니까 계단 앞면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더라. 무척이나 귀여웠어. 귀여운 만큼 기이하다고 할까. 그런 느낌도 스멀스멀 올라왔지.
15 이름없음 2021/01/19 13:16:52 ID : tunCnV84IK0 0
계단에 도착했으니 이제 올라가 봐야겠지? 주변은 깜깜하고 으슥한 골목길인데 의지할 건 핸드폰 불빛 뿐이라 말 그대로 다리가 후들거렸어. 이윽고 난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고, 안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리 높은 곳은 아니었던지라 싱겁게 끝날 것 같더라.
16 이름없음 2021/01/19 13:18:28 ID : tunCnV84IK0 0
그렇게 도달한 계단 윗부분에는 철제 문이 하나 있었어. 이걸 열면 되나 싶어서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열어젖혔지.
17 이름없음 2021/01/19 13:42:08 ID : tunCnV84IK0 0
원래 밖에서 본 모양이라면 윗마을이 나와야 정상인데, 철문 너머에는 계단이 더 있었어. 쫄보가 호기심은 넘쳐서 또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왠지 올라가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냥 가자니 아쉬울 것 같고. 계단을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저 밑에서 발소리가 들렸어.
18 이름없음 2021/01/19 14:04:20 ID : A7ta8qrtg2L 0
ㅂㄱㅇㅇ~
19 이름없음 2021/01/19 16:31:35 ID : tunCnV84IK0 0
계단의 벽 내부로 들어와서 실내가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아스팔트 포장한 길을 질질 끌면서 걷는 듯한 둔탁한 발소리가 들렸는데 지익, 지익 하는 소리랑 터벅거리는 소리가 같이 났어. 누가 지나가나 했지. 이 동네에 어르신들이 많이 사셔서 그중 한 분이시겠거니 생각하려고 했는데 소리가 멀어지는 게 아니라 점점 가까워지는 거야. 그리고 감으로 느꼈지. 이쪽으로 오고 있구나, 하고 말이야.
20 이름없음 2021/01/19 16:38:39 ID : tunCnV84IK0 0
그러다가 들리던 발소리가 우뚝 멈춰섰어. 뭐지 싶어서 내려가볼까도 했는데 그러기엔 난 쫄보였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궁금해진 찰나에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어. 여자 목소리도 아니고 남자 목소리도 아닌? 두 개가 섞여서 나는 괴기스러운 소리 알지? 그런 목소리로 우스운 걸 연신 참는데 새어나가는 소리 같은.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뚝 멈추더니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하고 계단 오르는 소리가 나는 거야. 사람이 아무리 빨리 뛰어올라도 저렇게 빨리 뛰어갈 수가 없는데 비정상적으로 빠른 소리가 가까워지니까 냅다 소리지르면서 철문 너머로 뛰어가서는 문을 걸어잠그고 앞에 보이는 계단을 계속 뛰어올라갔어.
21 이름없음 2021/01/19 16:44:15 ID : tunCnV84IK0 0
그 정체모를 게 문 열라면서 쿵쿵쿵 하고 계속 두드리다가 금속 부서지는 소리랑 함께 아까 들었던 계단 오르는 소리가 저 밑에서 들리기 시작했어. 아직 대학도 못 들어가고 죽기 싫어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서 원통형 공간 벽을 따라 있는 계단을 뛰어올라갔지. 내가 저거한테 무슨 빚을 졌길래 저리 죽기살기로 따라오냐 아 어머니 보고 싶다 자시고 살고 싶다 오만가지 생각 다 드는데 저 위에 대문이 하나 보이는 거야. 저 너머에 뭐가 있든 없든 저거한테 잡히는 것보다야 낫겠지 하고 냉큼 달려서 문을 밀고 나갔어.
22 이름없음 2021/01/19 16:45:07 ID : INtdBffdU2M 0
대체 어느 동네길래 계단 타고 철문열어젖혀야 다른 마을 갈 수 있을까... 메이플 헤네시스-오르비스 왕복보다 더 복잡한 이동방식
23 이름없음 2021/01/19 16:47:29 ID : tunCnV84IK0 0
나중에 갈 수 있으면 사진 첨부할게. 하도 예전에 갔어서 정확한 구조까지는 생각이 안 나는데 아랫마을 윗마을 잇는 계단은 확실히 있어.
24 이름없음 2021/01/19 20:29:57 ID : dzRCjdu5RAY 0
스레주야. 이어서 쓸게. 대문을 밀고 나갔더니 윗마을 풍경은 아니었어. 분명 내가 계단으로 갔을 때만 해도 하늘이 맑았는데 대문 밖의 풍경은 우중충하고, 비가 잔뜩 내리고 있었어. 많이 내린다는 수준을 넘어서 두피랑 어깨가 아릴 정도로 세게 내렸는데, 우산도 우비도 없고 가진 거라곤 핸드폰이랑 과자값 조금이었고... 쫓아오던 건 대문은 못 부수는지 아까처럼 킥킥거리고만 있었어. 소름끼쳐서 냅다 달려서 어디 가게라도 들러야겠다 생각했지. 들른 김에 우산도 사고.
25 이름없음 2021/01/19 20:41:24 ID : dzRCjdu5RAY 0
건물은 현대식이 아니라 고딕 비슷한 양식이었어. 당연히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이 아니라 유럽권 느낌의. 세계사 공부하면서 유럽사에 환장했던 난데 막상 보니까 반갑지는 않더라. 빗물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워서 계속 고꾸라지고 넘어지고 반복했는데 나 빼고 다들 마차같은 걸 타고 다니는 걸 보니까 잘 사는 동네같았고, 필요한 걸 살 만한 가게는 도저히 못 찾겠어서 잠시 쉬고 있던 마부에게 물어봤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을 걸어봤는데 날 보더니 말 그대로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자기 갈 길 가길래... 유일하게 내 말을 받아준 사람이라 아는 영어를 총동원해서 여기가 어디냐 우산은 어디서 사냐 집에는 어떻게 가냐 뭐 이런 것들.
26 이름없음 2021/01/19 20:53:11 ID : dzRCjdu5RAY 0
근데 영어 안 쓰더라.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데 말이 통해서 일단 이건 안심했어. 언어가 통한다는 게 얼마나 큰 부분인지. 다행히 마부에게 물어서 몇 가지 알게 됐어. 첫째, 여기는 유럽이나 특정한 국가가 아니며, 해는 뜨고 지지만 특정한 날짜나 시간이 없다. 둘째, 나 같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은 따로 갈 곳이 있다. 셋째, 내가 들고 온 돈은 화폐로서의 가치가 없다. 즉, 화폐로 쓸 수 없다.
27 이름없음 2021/01/19 20:56:35 ID : dzRCjdu5RAY 0
근데 왜 사람들이 피해요? >데려갈 엄두가 안 나서지. 데려가요? 어디로요? >넌 따로 갈 곳 있어. 더 캐묻지 말고 타라. 그다지 성격은 좋아보이지 않았어. 내가 자기보다 어리니까 반말 쓰던데, 그래도 갈 곳으로 태워준다길래 딱히 갈 곳도 없는 나는 어이쿠 감사합니다 하고 탔지. 뭔가 아는 사람이구나 싶었어. 뭘 믿고 그리 생각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28 이름없음 2021/01/19 21:03:12 ID : wsnPeIIGtuo 0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사람이야...
29 이름없음 2021/01/19 21:05:44 ID : rtdyGmnzPeE 0
ㅂㄱㅇㅇ
30 이름없음 2021/01/20 00:05:34 ID : dzRCjdu5RAY 0
스레에 이런 거 물어봐도 되는 지 모르겠는데 혹시 보고있는 사람 있어? 있으면 새벽까지 풀다 잘게.
31 이름없음 2021/01/20 00:10:16 ID : soZa4E7anvg 0
나 보고있어!! 계속 풀어줘
32 이름없음 2021/01/20 00:22:32 ID : anyGtzfaq7x 0
고마워.
33 이름없음 2021/01/20 00:58:07 ID : dzRCjdu5RAY 0
그럼 이어서 풀게. 마차 안은 별도의 난방도 없었는데 밖과 다르게 무척이나 따뜻했어. 창문은 없었는데, 의자는 푹신해 보였고 상당한 고가 같아서 쫄딱 젖은 내가 앉기 미안했지만 마차 안에서 서서 갈 수는 없으니까 앉았어.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는 출발했고, 분명히 돌로 된 길을 가고 있었을 텐데 덜컹거리거나 작은 진동조차 없이 매끄럽게 굴러갔어. 마치 빙판 위를 굴러가듯이.
34 이름없음 2021/01/20 01:03:51 ID : NArs2lfO9zb 0
ㅂㄱㅇㅇ!
35 이름없음 2021/01/20 01:10:17 ID : y2Fbhe7y1DA 0
ㅂㄱㅇㅇ
36 이름없음 2021/01/20 01:18:17 ID : dzRCjdu5RAY 0
마부의 말에 따르면 그곳은 시간이라는 개념도 없을뿐더러 마차에는 작은 창문 하나도 없어서 얼마나 지났는 지는 모르겠어. 왠지 잠에 들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어서 최대한 안 자려고 노력하다 보니 마차가 멈춰섰지. 이제 내려도 좋다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차 문을 열었는데, 눈 앞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커다란 시계가 있는 건물이 하나 있었어. 얼핏 증기기관 소리가 멀리 있는 나한테도 들려서 기차역 같았는데, 거기서 기차를 타면 되는 건가 싶었지. 앞으로 시계탑 기차역이라고 부를게. 저기요. 기차를 타고 가면 되나요? >내가 그걸 어찌 알아. 네가 알아서 하는 거지. 그런게 어디 있어요? 갈 곳이 있다면서요. >어쨌든 데려오긴 했잖아. 내 일은 여기까지니 더 귀찮게 하지 마. 지금 생각해도 불친절한 마부였어. 뭐 저리 퉁명스러운지 기분이 팍 상해서 더러워서 나 혼자 간다고 냅다 시계탑 기차역으로 가기 시작했어.
37 이름없음 2021/01/20 04:50:04 ID : bA43O8i8rti 0
잠시 깼다... 자고 나서 풀게. 오타났었다!
38 이름없음 2021/01/20 05:02:59 ID : cIHA6lwmla9 0
와 재밌앙
39 이름없음 2021/01/20 05:03:39 ID : pVe0nva04JO 0
홍미롭다 레주 보면 진행 부탁
40 이름없음 2021/01/20 05:04:13 ID : pVe0nva04JO 0
난봤지 ㅋㅋ
41 이름없음 2021/01/20 15:43:53 ID : tunCnV84IK0 0
하늘은 아까처럼 비가 세차게 내리지는 않았지만 구름이 잔뜩 껴서 탁한 흰색이었고, 간간이 물방울이 떨어졌어. 거의 그쳐가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채 그치지 않은 비를 맞으면서, 무릎까지 무성히 자란 젖은 풀잎을 종아리로 훑으면서 달리듯이 시계탑 기차역으로 향했어. 운동화를 신고 있었어서 발이 다 젖었어도 별다른 불편함 없이 웅덩이도 밟아 가며 갔던 것 같아.
42 이름없음 2021/01/20 15:48:04 ID : tunCnV84IK0 0
가까이서 본 시계탑 기차역은 생각보다 훨씬 정교했어. 황동으로 된 기계장치들이 복작거리며 맞물리고 움직이는데 이질감보다는 따뜻하다고 해야 되나. 그런 느낌이었어. 건물의 벽면을 따라가며 찬찬히 보다가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입구로 갔지. 오래돼서 손잡이를 제외하고는 붉게 녹이 슬고 경첩이나 테두리에는 이끼가 낀 철제 문이 있었고, 그대로 밀고 들어갔어.
43 이름없음 2021/01/20 15:56:04 ID : tunCnV84IK0 0
기차역 내부는 어두웠고, 유리 돔을 통해서 들어온 빛 덕분에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어. 사람들도 바삐 움직이고 있었는데 나처럼 평범한 사람 형태가 아니었어. 반투명한 검은색 형상 같았지.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역무원도, 지팡이를 짚고 낡은 모자를 쓴 중년 남성도, 아이 손을 잡고 웃던 젊은 여성도 반투명한 검은색이었어. 갑자기 섞여들어간 나만 동떨어진 기분이었지.
44 이름없음 2021/01/20 16:01:30 ID : tunCnV84IK0 0
여기서 이동수단이라곤 기차 말고는 없었어서 일단 표를 사야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내가 갖고 있는 거라곤 핸드폰이랑 과자값 뿐이니까... 그 과자값도 화폐로 못 쓴다고 했고... 그래서 잔머리를 굴렸어. 역무원에게 가서 다른 역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는데, 기차표 살 돈이 없다고 하기로 했지. 어쨌든 살고 봐야겠으니까 당장 역무원에게 가서 생각해둔 대로 말했어. 그런데 질색팔색을 하더니 너한테 줄 표는 없으니까 돌아가라는 거야.
45 이름없음 2021/01/20 16:09:17 ID : tunCnV84IK0 0
뭐 저런 게 다 있나... 그럼 무임승차라도 할까 하고 저 멀리 선로에서 오는 기차가 역으로 오기를 기다렸어. 유난히 짐이 많은 승객이 있었는데 그 짐에 파묻혀서 묻어가기로 한 거지. 기차 출입문이 열리고, 따라가서 내부에 한 발 내딛은 순간 기차역 안의 사람들도, 소리도 멈추더니 전부 다 나를 보는 것 같은 거야. 사람들이 전부 새까만데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지니까 갑자기 겁을 덜컥 먹었고 뒷걸음질 치면서 짐더미에서 빠져나왔어. 그리고 냅다 윗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달렸어. 여기서 나가면 갈 곳도 없고, 위에 숨어있기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지 귀가 찢어지게 쇳소리가 났는데 돌아볼 정신도 없이 계속 달렸어. 아마 내가 이질적인 존재라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중학생때 운동회 계주 이후로 달리기라고는 한 번도 안 해서 금방 주저앉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몸이 안 힘들더라.
46 이름없음 2021/01/20 16:18:58 ID : rtdyGmnzPeE 0
ㅂㄱㅇㅇ
47 이름없음 2021/01/20 21:46:31 ID : dzRCjdu5RAY 0
1층에서 2층, 3층, 4층까지 갔을까. 4층부터는 계단이 더 없었어. 대신 사다리가 있었는데, 타고 올라가다간 잡힐 것 같아서 곧장 복도로 갔어. 길고 좁은 복도였는데 꽤 멀리서 하얀 빛이 새어나오고 있길래 그쪽으로 향했지.
48 이름없음 2021/01/20 21:57:18 ID : dzRCjdu5RAY 0
초반에는 뛰어갈 수 있을 정도였는데 점점 좁아지면서 중후반부터는 몸을 거의 옆으로 하고 종종걸음으로 갔어. 그 쇳소리는 여전히 시끄럽게 들렸고, 너무 무서워서 뒤를 못 보는 바람에 거리는 어느정도였는지 모르겠다. 끝부분에서는 몸을 욱여넣듯이 갔어. 벽에 기름때가 꽤 있어서 옷이랑 얼굴이랑 다 얼룩지고 더러워졌는데 신경 쓸 겨를이 어딨겠어. 일단은 나가야 살 것 같다는 생각이 최우선이었어서 앞에 뭐가 있고 없고는 상관하지 않고 하얀 빛으로 몸을 던졌어. 잡히는 것보다는 낫다는 마음이었으니까.
49 이름없음 2021/01/21 00:29:30 ID : dzRCjdu5RAY 0
보는 사람 없어도 시간 나는 대로 계속 풀게.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쫓아오던 것들은 날 따라서 떨어지지는 않았어. 처음에는 걷는 자세였다가 눕는 자세로 뒤집어졌는데, 위에서는 구름 사이로 햇빛이 눈부시게 비쳐들어왔고, 창틀은 유리로 막혀있지는 않은지 물방울이 맺혀 있었어. 4층까지 올라갔으니 그 높이에서 떨어진 셈인데, 체감상으로는 더 높았어. 처음에는 빠르게 내려가는 듯 하다가 서서히 느려지더니 푹신한? 느낌이랑 같이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는 속도까지 느려졌어.
50 이름없음 2021/01/21 00:42:37 ID : dzRCjdu5RAY 0
바닥은 상아색 돌로 되어있었는데 맞물린 틈에는 잡초랑 풀꽃이 피어 있었고, 햇빛도 밝아서 정말 예뻤어. 아직도 그 풍경이 생생해. 비릿한 빗물 냄새, 따스한 햇볕,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커다란 무늬와 한 몸인 거대한 하프시코드, 어디서 연주하는 지 모를 현악기 소리까지. 한참을 정신이 팔린 채 음악소리를 듣고 있었어.
51 이름없음 2021/01/21 00:54:22 ID : rtdyGmnzPeE 0
ㅂㄱㅇㅇ!
52 이름없음 2021/01/21 02:45:02 ID : mGk65dVcFju 0
보고있어! 신기하고 흥미롭다
53 이름없음 2021/01/21 02:45:07 ID : dzRCjdu5RAY 0
그리고 그 상태로 홀린 듯이 걸어갔어. 그 예쁜 선율이 들려오는 곳으로. 커다란 유리 돔 형태의 터널 같은 길을 따라서 걷고, 또 걸었어. 이름 모를 꽃들이 섞여서 좌우로 만발한 길이었는데, 분위기는 전혀 어둡지 않았어. 밝고, 꽃향기도 나고, 나비도 날아다니니까 오히려 기분이 좋았지. 현악 연주도 사람이 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 어디서 퍼지기 시작하는 지는 느껴지지만 결코 소리가 점점 커지지도 않았고, 클래식 즐겨 듣는 나도 처음 들어보는 가락이었으니까.
54 이름없음 2021/01/21 02:50:46 ID : dzRCjdu5RAY 0
비슷한 느낌을 들어보라고 하면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꽃의 왈츠? 음악의 베이스는 왈츠였어. 당장이라도 춤 춰야 할 것 같은 음악이었지만 그 음악의 근원이 더 궁금했어서 터널이 끝나가는 지점에서는 걷다 못해 뛰어서 갔지. 나 왜 이렇게 많이 뛰는 걸까. 그동안 안 뛰었다고 여기서라도 뛰라는 건가?
55 이름없음 2021/01/21 02:58:32 ID : dzRCjdu5RAY 0
그렇게 간절하게 뛰어서 도달한 끝에 문은 없었고, 돌바닥이 있었어. 아까 떨어졌던 곳과는 달리 모난 곳이나 틈 없이 정갈하게 맞물려 깔린 돌바닥이었고, 색은 더 하얬어. 출구로 얼핏 보이는 하늘은 새파랬고, 조각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며 떠다니고 있었어. 그리고 새로운 건물도 보이니까 너무 밖으로 나가 보고 싶었어. 그 건물에서 음악이 나오는 것 같았거든. 이쪽으로 오라는 것처럼. 흠뻑 젖은 옷과 머리, 그리고 냉담했던 사람들의 태도는 더 이상 내 관심사가 아니었어. 저렇게 예쁜 풍경이 펼쳐져 있으니까 저 앞으로 나아가면 더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거든.
56 이름없음 2021/01/21 03:12:36 ID : dzRCjdu5RAY 0
하얀 돌길을 따라가니까 대문 대신 아치가 있었어. 그 너머에는 커다란 저택이 한 채 있었고. 고딕 특유의 날카로운 느낌이 있어서 양식은 고딕 같았는데, 단순한 저택보다 성에 가까울 정도로 크고 웅장했어. 그리고 본능적으로 알았지. 지금 이 음악 저기서 나오는 거구나.
57 이름없음 2021/01/21 08:31:53 ID : KY3vcq43U2G 0
ㅂㄱㅇㅇ!
58 이름없음 2021/01/21 11:23:49 ID : dzRCjdu5RAY 0
그렇게 확신이 들기가 무섭게 그 저택으로 향하는데, 그러려면 아치를 지나야 하잖아. 아치를 넘어가려는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팔을 잡아당겼어. 아까 왔을 때는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잡아당겨지는 바람에 뒤로 홀랑 넘어져버렸어. 물론 잡아당긴 그 존재랑 같이. 내가 그 존재 위로 넘어졌는데도 밀쳐내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지. 납치하거나 폭력을 쓰려고, 혹은 다른 나쁜 목적이 있어서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불일 때 뛰어가려는 아이 손목을 붙잡는 엄마 같은 상황이더라.
59 이름없음 2021/01/21 11:29:35 ID : dzRCjdu5RAY 0
그런데 이질감과 불쾌감이 확 들었어. 나보다 키가 훨씬 큰 건지 내 머리가 그 존재 가슴 언저리에 있었고, 그 정도로 가까우면 분명히 온기가 느껴지고 심장박동이나 숨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약간의 온기도 없었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 잡았던 팔도 놓고 있길래 일단 벌떡 일어나서 툭툭 털고, 뒤를 돌아봤어.
60 이름없음 2021/01/21 11:34:45 ID : fe1BdRyMjir 0
음...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날짜나 시간의 개념이 없다면 마부라는 사람은 그 단어를 어떻게 안 거야? 없는 개념에 대한 단어가 존재할 리는 없지 않아?
61 이름없음 2021/01/21 11:43:41 ID : dzRCjdu5RAY 0
마부가 그 개념을 언급한 게 아니라 내가 언급한 시간이란 게 무엇이냐고 되물었어. 그래서 여기는 시간이란 개념이 없다는 걸 알았지. 아, 혹시 지금 몇 시예요? >...? 몇 시가 뭐야? ??? 시간이요. 지금 몇 시냐고 물어봤어요. >시간은 또 뭐야? 시간이 뭔지 몰라요? >뭐야 그건? 처음 들어 보는 말인데, 네가 있던 곳에서 쓰는 말이냐? 아... 네. 제가 있던 곳에서 쓰던 말인데요. >몰라. 그런 거. 내가 모르면 아마 다른 사람들도 모를 거다. 정확히는 아니지만 이런 내용의 대화를 나눴어.
62 이름없음 2021/01/21 11:50:57 ID : fe1BdRyMjir 0
ㅇㅋ썰재밌다 빨리풀어죠~
63 이름없음 2021/01/21 12:52:03 ID : tunCnV84IK0 0
재밌게 봐 줘서 고마워. 그 존재도 어느새 일어났는지 나보다 세 뼘은 큰 키로 내려다보고 있었어. 고양이 같은 인상이었는데 나와 같은 검은 머리에 피부는 굉장히 창백하고 눈은 시뻘건, 그 예쁜 빨간색이 아니라 피 같은 색? 사람 눈은 아닌 것 같았어. 슬렌더한 체형의 남성이었고, 저택의 사용인인지 새까만 연미복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를 제외한 모든 신체부위가 가려져 있었어. 깔끔한 옷차림이 사용인에 걸맞는 품행이니까 그렇겠지? 어쨌든 그 존재의 얼굴이 신기하게도 내 취향과 꼭 들어맞았어. 객관적으로 잘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누가 작위적으로 꾸며낸 것처럼. 왜 이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나중에 알려줄게.
64 이름없음 2021/01/21 13:00:01 ID : 8ryY1g42JQk 0
ㅂㄱㅇㅇ
65 이름없음 2021/01/21 13:03:03 ID : tunCnV84IK0 0
그 존재는 날 빤히 보다가 빙긋 웃더니 말했어 ■ 오, 이런. 저 저택에 가시려는 건가요? 네...? 네. ■ 아무런 준비 없이요? 어... 준비가 필요한가요? ■ 물론이죠. 어떻게 하는 건데요? ■ 간단합니다. 하고서는 하얀 꽃 한 송이를 줬어. 이게 뭐예요? ■ 꽃입니다. 그건 알아요. ■ 하하, 그 꽃은 스노우드롭입니다. 희망과 위안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지요. 저택에 들어가려면 꼭 지니고 있으셔야 합니다. 아... 네. 알겠어요. 난 스노우드롭이란 꽃을 그 때 처음 알았어. 예쁘게 생긴 꽃이라서 선물인가 보다, 하고 기분 좋게 받았지.
66 이름없음 2021/01/21 13:08:49 ID : tunCnV84IK0 0
앞으로 그 존재를 검은 집사라고 할게. 검은 집사는 앞장서서 아치를 통과하더니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어. 받은 꽃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검은 집사를 따라갔지. 아까 검은 집사와 대화할 때까지만 해도 음악이 들렸는데, 아치를 지나가니 음악소리는 멈췄어. 그렇게 들어선 저택 입구까지의 길은 무척이나 길었고, 또 좌우로는 커다란 건물들이 엄청 많았어. 호화롭고 예뻤지. 나 같은 건 평생 뼈빠지게 돈을 벌어도 저택 본채는커녕 옆의 건물 하나라도 못 살 것만 같을 정도로 화려한 저택이었어.
67 이름없음 2021/01/21 14:05:22 ID : 8kla5Wjirzg 0
ㅂㄱㅇㅇ!
68 이름없음 2021/01/21 19:05:56 ID : JTRyNtipcK5 0
개인적으로 이런 저택을 좋아하는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네. 겪었던 일들만 아니면 또 보고 싶을 정도야.
69 이름없음 2021/01/21 19:17:04 ID : q46kq7wJPfW 0
대사는 각색한거지?
70 이름없음 2021/01/21 19:24:29 ID : fXwL9jtcnDt 0
혹시 궁금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
71 이름없음 2021/01/21 19:44:39 ID : TTRzPa008o3 0
흥미롭네
72 이름없음 2021/01/21 21:38:12 ID : 02si4JTO61D 0
대화내용이 문어체+번역체 말투라서
73 이름없음 2021/01/21 21:44:36 ID : dzRCjdu5RAY 0
아하... 알려줘서 고마워. 어색하게 보였다면 미안해. 텍스트로 읽는 거니까 읽기 편한 거랑 내용 이해를 우선으로 썼어.
74 이름없음 2021/01/21 21:56:55 ID : TVgrxWrwK4Y 0
구어체가 더 편한 레스주가 많다면 각색 없이 쓸게.
75 이름없음 2021/01/21 23:27:10 ID : 9gZjxUZfPdy 0
혹시 레스주 무례한 질문이라고 느낄 수도 있는데 혹시 꿈이 아니라 실제로 다녀온거야? 꿈은 약간 의식? 만 가는 느낌이잖아 나같은 쫄보는 실제로 갔으면 막 거기서 죽으면 진짜 죽는 거니까 되게 경계하면서 갔을 것 같아서 기분이 어땠는지도 궁금해 의심하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기분나쁘면 미안
76 이름없음 2021/01/21 23:47:52 ID : dzRCjdu5RAY 0
괜찮아. 하나도 안 불쾌해. 오히려 봐 줘서 고마운 걸. 꿈이었다면 괴담판보다는 꿈판에 썼겠지? 뛰어내렸을 때는 잡히는 게 더 무서운 마음에 무심코 저지른 거였어. 나도 뛰어내리고 나서야 후회했는데 속도가 느려지지 않았다면 떨어져 죽지는 않았더라도 크게 다쳤겠지. 운이 나빴으면 죽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 무모하게 행동했던 것 같아. 뛰어내리고 나서는 음악소리에 홀려서 제정신도 아니었고, 풍경도 아름다웠어서 다치거나 죽을 것 같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어. 검은 집사랑 만났을 때 정신이 들었긴 했지만. 아치를 지나고 제정신이 아니게 했던 기분 좋은 음악이 멈추고 나서야, 그제서야 긴장했던 것 같아. 원래 저택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분위기에 휩쓸렸는데다가 꽃까지 받았는데 안 들어가기도 뭐했고, 돌아가기에는 떨어진 곳에서 갈 길은 걸어온 길 하나뿐이었어서 사실상 선택지는 없었어.
77 이름없음 2021/01/22 00:05:53 ID : 9gZjxUZfPdy 0
오 고마워 되게 신기하고 재밌다 잘 읽을게 진짜 재밌어
78 이름없음 2021/01/22 01:53:38 ID : dzRCjdu5RAY 0
본채 입구에 도착하자 검은 집사가 커다란 문으로 손을 뻗었는데, 세 번 노크를 하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어. 검은 집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지. 혹시 저택에서 일하시는 분이세요? ■ 네, 그렇습니다. 저는 손님으로 온 거고요? ■ 그렇지요. 그럼 저택 주인분은 어디 계시나요? ■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뭔가 이상했어. 난 방금 저택에 도착했고 다른 사람은 만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오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저택 주인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갈 길도 세워둔 계획도 없는데도 기다리고 있다는 그 말 한 마디에 소름이 돋아서 기회를 보다가 도망칠까도 생각해 봤는데 그랬다간 수상하게 보이기만 할 테니까 잠자코 따라가는 수 말고는 없었어. 말이라도 잘 하면 돌아갈 궁리를 하는 동안 편안히 먹고 잘 곳은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뭐라고 말을 할 지 생각해두기로 했지.
79 이름없음 2021/01/22 02:00:48 ID : dzRCjdu5RAY 0
저택 내부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 높고, 호화로웠어. 집채만 한 샹들리에가 로비 천장에 달려 있었고, 계단도 수 없이 많았고, 대리석으로 만든 바닥에 빗물에 젖은 운동화 밑창이 닿으니까 뽀끽거리는 소리? 그런 비슷한 소리가 났는데 듣기 좋은 소리는 절대 아니었어. 검은 집사가 신고 있던 구두가 내는 맑은 소리랑 비교돼서 더 부끄럽더라. 발소리도 죽이고 종종걸음으로 검은 집사를 따라서 갔어. 괜히 머리랑 옷매무새도 정돈했지. 오는 길에 어느정도는 말랐어도 대부분 젖어서 별 의미는 없었겠지만...
80 이름없음 2021/01/22 02:06:20 ID : dzRCjdu5RAY 0
응접실이라서 그런가 저택이 으리으리했어도 오래 걷지는 않았어. 이윽고 검은 집사가 한 방문을 열어주며 들어가라고 했고, 일단 감사하다고 말하고 들어섰지.
81 이름없음 2021/01/22 02:12:54 ID : dzRCjdu5RAY 0
방문을 기준으로 북쪽에 있는 응접실 벽에는 커다란 창문이 하나 있었고, 커다란 목제 테이블을 중심으로 긴 소파가 상하대칭으로 있었어. 저택 주인으로 보이는 존재는 창문을 등지고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역광 때문에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는 안 보였지만 기가 너무 세서 눌리는 기분이었어. 실루엣만 봤을 때 어깨도 무척이나 넓었고, 느껴지는 시선이 무서워서... 두어 걸음 걷다가 결국 주저앉으니까 괜찮냐며 급하게 와서는 조심히 일으켜주고, 소파까지 데려가서 앉도록 해 줬어. 가까이 오니까 그제서야 얼굴이 보이더라.
82 이름없음 2021/01/22 09:18:27 ID : Nvu3u0002mr 0
지금 생각해도 무섭네...
83 이름없음 2021/01/22 11:57:52 ID : 9gZjxUZfPdy 0
ㅂㄱㅇㅇ
84 이름없음 2021/01/22 17:36:23 ID : tunCnV84IK0 0
뱀이랑 여우를 섞어놓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였는데, 눈썹은 또 처져 있고 방실방실 웃고 있어서 사납다기보단 야비하다는? 이미지였어.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은 암적색이었고, 눈은 너무 새까매서 동공이 안 보였지. 옷은 멀끔하게 연미복을 다 갖춰입고 있었는데 검은 집사랑 똑같이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 일으켜줄 때 손이 지나치게 차가웠기도 했고, 풍기는 분위기 자체도 사람 기운은 아니고.
85 이름없음 2021/01/22 17:49:15 ID : tunCnV84IK0 0
¿ 만나서 반가워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꽃은 잘 챙겨 오셨나요? 아... 네. 반갑습니다. 꽃도 챙겼어요. ¿ 좋습니다. 그럼 바로 말씀드리지요. 저택 주인은 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서 목제 테이블 위에 올려놨는데, 호실이 적힌 작은 대리석 조각이 달려 있어서 호텔에서 쓸 것 같은 외형이었어. ¿ 이 저택에서, 오늘부터 태양이 50번째 뜰 때 까지만 머물러 주셨으면 합니다. ...50번이요? 숙박비는요? ¿ 그건 이미 지불되었으니 걱정 마세요. ??? 전 돈 낸 적이 없는데요? ¿ 저는 숙박비를 꼭 돈으로 받지는 않는답니다. 하더니 열쇠를 가져가라는 듯 손을 펼치고 가리키길래 찝찝했지만 일단은 가져갔어. 이 저택이 아니면 갈 곳이 없었는데, 돈도 안 받겠다니 찝찝하긴 했어도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으니까. 대리석 조각은 0928이라고 음각으로 파여 있었어. 즉, 내가 묵을 곳은 928호실이었지.
86 이름없음 2021/01/22 18:25:09 ID : 9gZjxUZfPdy 0
오 왔구나
87 이름없음 2021/01/22 19:34:43 ID : SLf803Crs7b 0
봐줘서 고마워.
88 이름없음 2021/01/22 20:22:37 ID : a9yY8palfTS 0
보고잇어 재밋딩
89 이름없음 2021/01/23 14:26:25 ID : wsnPeIIGtuo 0
말재주가 없어서 걱정했는데 재밌다니 다행이네. 고마워.
90 이름없음 2021/01/23 19:34:12 ID : dzRCjdu5RAY 0
앞으로 이 남자를 저택 주인이라고 할게. 저택 주인이 문을 열고 옆에 서 있는 검은 집사에게 눈짓하니까 집사가 따라오라고 고개를 숙였어. 얼떨떨해서 일단 따라가기로 했지. 가면서 겸사겸사 질문도 하고. 혹시 숙박비 지불하신 분이 따로 있어요? ■ 이미 본인이 지불하셨지 않습니까. 제가요? 언제요? ■ 이 저택에 발 들이신 순간부터요. 돈이 없는데요...? ■ 지불할 수 있는 게 꼭 돈뿐만은 아니랍니다. 아니 난 돈이 없는데... 계속 돈 아니라도 낼 수 있고 이미 냈다는 거야. 이해할 수가 없었지. 대체 뭘 받았길래 저러나...
91 이름없음 2021/01/23 19:55:07 ID : dzRCjdu5RAY 0
검은 집사는 9층의 스물여덟 번째 방으로 안내했는데, 가는 내내 방부제 냄새가 났어. 역할 정도는 아니고 은은하게. 방부제가 은은하다니 이상하네. 어쨌든 집사가 이끄는 대로 가서 0928이라고 양각으로 조각된 대리석 패가 붙은 방문 손잡이에 열쇠를 꽂자 달칵 소리랑 함께 방문이 열렸지. 검은 집사는 편안히 쉬시라며 인사하고는 가 버렸고. 방을 보다가 구두 소리가 안 들리길래 혹시나 집사가 간 곳을 봤는데 아무도 없었어. 스물여덟 번째 방이면 복도의 길이가 꽤 됐을 텐데. 이상하지.
92 이름없음 2021/01/23 20:06:39 ID : dzRCjdu5RAY 0
워낙 이상해 보이는 존재였고 사람도 아닌 것 같아서 조금 쫄긴 했어도 그러려니 했어. 시종이니까 손님에게 해코지는 못 할 테고. 어쨌든. 잡념이 많았는데 방 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죽 둘러보니 그건 금방 사라졌어. 이질감 넘치는 저택 치고는 포근한 방이었거든. 벽지도 침대도 옷장도 아이보리 톤이랑 적갈색에 연한 금빛도 돌면서 정말 깔끔했고, 창문 앞에는 빛바랜 종이 한 장이 있는 작은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하나 있었어. 너무 피곤했어서 종이는 자고 일어나서 확인해보기로 하고, 딱히 가져온 짐도 없어서 양말만 벗고 침대에 털썩 누워서 그대로 자버렸어. 첫 날인데 생각보다 다사다난했네.
93 이름없음 2021/01/23 22:01:21 ID : 062E5WrBs8l 0
이거 절대 악의로 보내는거 아닌데..!! 혹시 그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고 무섭지 않았어?? 그리고 현실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스레주가 안와서 걱정하고 있었을지 않을까..?? 기분나빴으면 미안
94 이름없음 2021/01/24 00:02:18 ID : dzRCjdu5RAY 0
괜찮아. 하나도 기분 안 나빠! 위에서도 말했지만 오히려 기뻐. 당연히 무서웠지... 검은 집사를 처음 봤을 때도 느낌 때문에 순간 소름도 돋았고 큰 키 때문에 위축도 돼서 한참을 시선을 피하다가 말을 걸어오니까 쭈뼛대며 답했던 거고, 저택 주인과 대면했을 때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단 둘이 있기도 싫었고 황급히 열쇠를 가지고 방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었어. 방 안에 들어가자 긴장이 풀려서 경계할 새도 없이 잠들었던 거고. 그때는 정신도 없고 무섭기도 했는데 지금은 쓰기만 하는 거니까 덤덤하게 보였을 것 같다. 말도 많이 더듬었어. 두려운 마음에 행동도 굼떴지... 군더더기까지 쓰면 가독성을 해칠까 봐 일부러 빼고 각색도 더해서 썼어.
95 이름없음 2021/01/24 03:18:58 ID : O60lcrfhxWp 0
ㅂㄱㅇㅇ
96 이름없음 2021/01/24 14:08:19 ID : WnTTRvdzXzd 0
보고있어!!!! 너무 재밌다,,,
97 이름없음 2021/01/24 14:19:01 ID : vhdO5U3O2k6 0
ㅂㄱㅇㅇ!!!
98 이름없음 2021/01/25 01:35:52 ID : slA1zUZeJRB 0
할머니댁은 갔다왔니? 아직안갔나
99 이름없음 2021/01/26 13:45:51 ID : ZcleLe5dO1d 0
ㅂㄱㅇㅇ
100 이름없음 2021/01/26 17:51:32 ID : hwHxwsqoY9w 0
헐 너무 재밌다 보고있어!!
101 이름없음 2021/01/27 02:39:24 ID : dzRCjdu5RAY 0
코로나 때문에 쉽게 못 가는 상황이야. 잦아들고 갈 일 있다면 가서 사진 찍어서 올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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