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1/10/14 22:41:16 ID : B9a04MnV82l 0
[꼬마야,] 새까만 연미복을 입은 악마는 머리가 없었고, 발목이 없었으며, 손목 또한 없었다. 신발과 장갑이 둥둥 뜬 채 다가온 그것은 나를 불렀다. 입이 없지만 말을 했고, 눈이 없지만 보인다는 듯 몸은 정확히 내 쪽을 향해 있었다. 암막 커튼을 친 방처럼, 온통 소리가 새까맣게 비워진 적막한 공간에서 그것의 속삭임만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내가 그것을 인식하자, 그것은 중후한 노년의 얼굴을 하다가, 소녀의 얼굴을 하고, 활발한 인상의 여자가 되었다가, 끝내 말쑥한 느낌의 남자가 되었다. 곧 그것에게 손목과 발목이 생겨났다. 형태감 없던 몸체도 어색함이 사라졌다. 다만 그것의 머리카락, 눈동자, 입술, 손톱, 옷... 흰자와 피부를 제외한 모든 것이 암흑이라, 남자는 어둠 속에 파묻힌 것 같은 모양새였다. *
2 관찰자 2021/10/14 23:21:22 ID : B9a04MnV82l 0
옐마는 검은 단발을 꽁지처럼 묶고, 둥그런 안경을 쓴 피곤한 인상의 소녀입니다. 친구도 그럭저럭 있고, 웃음도 울음도 적당히 있는 아이죠. 저 초췌한 눈 밑은 아마,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않아서 생긴 것 같군요. 새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 꽤 재미있는 내용인가요?
3 관찰자 2021/10/16 19:01:27 ID : B9a04MnV82l 0
옐마는 최근 인간이 아닌 것들에게 관심이 생겼습니다. 이를테면 신과 천사, 악마나 정령 같은 것들이요! 이런 건 괴짜들이나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옐마는 이 취미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서 조금 놀랐습니다.
4 관찰자 2021/10/25 22:46:19 ID : B9a04MnV82l 0
동네에서 조금 더 가면 나오는 도시에는, 아주 큰 도서관이 하나 있습니다. 옐마는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먼 구석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양이일까요? 하지만 이곳은 도서관인걸요. 옐마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고전 코너였습니다. 꽤 안쪽까지 들어왔는데, 아까 움직였던 무언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옐마는 다시 나가려는데, 발에 무언가가 걸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5 관찰자 2021/10/25 22:52:12 ID : B9a04MnV82l 0
붉은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기묘한 검은색의 하드커버는 금박으로 가장자리가 파여있었습니다. 책은 옐마가 좋아하는,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가 났습니다. 무엇보다, 얇았습니다. 단단한 표지, 적은 페이지 수. 표지만 아니었다면 마치 동화책 같은 모양새였을 것입니다.
6 관찰자 2021/10/26 21:33:37 ID : B9a04MnV82l 0
고풍스러운 느낌의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습니다. 옐마는 속표지를 확인하려 책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곳 역시, 깨끗한 백지였습니다. 다음 장도, 그 다음 장도...
7 관찰자 2021/10/26 21:41:37 ID : B9a04MnV82l 0
누가 노트를 떨어뜨리고 간 것일까요? 도서관에 공부를 하러 오는 건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니까요. 옐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운터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주인 잃은 노트를 찾아줘야죠! 그러나 사서는 옐마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소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소녀에게서 보이는 것이라곤 등에 맨 작은 가방 뿐이었습니다. "이게 보이지 않으세요? 저를 놀리는 게 아니고, 정말이요?" 맙소사. 옐마는 짧게 숨을 내뱉었습니다. 약간의 소름, 불길함과 함께 소녀는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꼈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마법'같은 무언가를 겪었으니까요! 호기심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옐마는 사서에게 대충 인사하고는 도망치듯 도서관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집을 향해 뛰었습니다.
8 관찰자 2021/10/26 21:59:48 ID : B9a04MnV82l 0
쾅! 방문을 닫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소녀는, 문을 잠근 뒤 가방을 한구석에 벗어 놓고, 침대로 뛰어들었습니다. 소중하게 책을 끌어안은 채로 말이죠. 소녀의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의심 반, 설렘 반이겠죠. 소녀는 신발을 벗고, 방석을 원하는 자리에 놓고, 펜과 종이를 챙긴 뒤 편하게 누웠습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습니다.
9 관찰자 2021/12/30 12:04:07 ID : B9a04MnV82l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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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관찰자 2021/12/30 12:04:44 ID : B9a04MnV82l 0
"-세상에, 그거 설마 농담이야?" 아하핫, 하하, 하. ...고마워, 덕분에 기분이 나아진 것 같기도 해. 소녀는 웃었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표했습니다. 소녀는 더는 그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두 달 동안이나 시달렸으면, 그럴 법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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