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2/04/02 23:02:20 ID : JVgoZbclgY7 0
감정이 사라지면 어떻게 살까? 재인의 음성이다. 다원은 눈을 들어 소리가 난 쪽을 살폈다. 방치된 지 오래인 교내 어항 앞에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재인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슨 변덕인지 아침까지만 해도 단정하던 교복이 엉망이다. 다원은 피곤이 묻어나는 눈가를 서늘한 손으로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다원이 다가설 때까지 재인은 못 박힌 듯 앉은 자리에서 미동도 없는 채였다.
2 이름없음 2022/04/02 23:02:56 ID : JVgoZbclgY7 0
“뭘 어떻게 살아, 그냥 살겠지.” 툭 나온 대답에 재인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진짜 재미없다, 주다원.” “감정이 없어도 죽진 않을 거 아니야. 절망이라는 것도 모를 테니까. 그렇지 않아?” “응, 하긴 그렇겠네….” 재인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실없는 웃음을 뱉었다. 가는 머리칼이 흰 와이셔츠를 타고 폭포수처럼 흘렀다.
3 이름없음 2022/04/02 23:03:30 ID : JVgoZbclgY7 0
“아빠랑 싸웠어, 나.” 무릎에 머리를 묻었던 재인은 고개를 돌려 다원을 바라보았다. 쌍꺼풀 깊은 눈이 어항 그림자에 잠겨 섬뜩하게 보였다. “응.” “집 들어갈 생각 없다고.” “…….” “오늘 자고 가도 돼?” 다원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뭘 새삼스레,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는 말을 삼키려니 속이 갑갑했다.
4 이름없음 2022/04/02 23:03:46 ID : JVgoZbclgY7 0
다년간의 경험으로 터득한 바는 재인을 대할 때 부담을 지우면 안 된다는 거였다. 우리가 가깝다는 부담, 내가 너를 가까이 여긴다는 부담, 혹은 그런 것들을. “와도 돼. 아무도 없어.” “우와.” 재인이 하얗게 웃었다. 순수하게 기뻐서 나온 표정인지, 고마움의 표현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5 이름없음 2022/04/02 23:04:33 ID : JVgoZbclgY7 0
“종 치는데… 안 가?” “이번 교시 체육이야. 째고 나서 어디서든 쓰러졌다고 핑계 대면 되겠지.” 진짜 쓰러져도 좋은 거고. 네가 이따 뒷목 좀 쳐 줄래? 재인이 짓궂게 묻자 다원은 질색하고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가지는 않고 옆에 앉아만 있었다. 그게 익숙하다는 듯 재인은 처음대로 텅 빈 어항만 멀거니 볼 뿐이었다. 다원은 피곤에 일그러진 얼굴을 고수하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가까운 듯 벌어진 거리감, 몇 분째 흐르는 다정하고도 기이한 정적. 둘 사이를 휘도는 분위기가 실상 질식할 정도였으나 본인들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6 이름없음 2022/04/02 23:05:40 ID : JVgoZbclgY7 0
“왜.” “어?” “왜 싸웠어?” “아, 어―” 그러게, 왜 싸웠을까? 재인이 눈을 접으며 물었다. 다원은 그 얼굴이 대답하기 싫은 것을 드러낼 때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몇 번을 묻는대도 대답하지 않을 것 또한. 유재인은 본래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몰라. 여기 죽치고 있지 말고 나가자.” “어딜 가, 가방도 두고.” “네가 무슨 일로 상식적인 대답을 해? 어차피 거기 든 것도 없잖아.” “하긴.”
7 이름없음 2022/04/02 23:06:39 ID : JVgoZbclgY7 0
오랜 시간 무릎을 접어 앉느라 단번에 일어서지 못하는 재인을 일으킨다. 잇새로 앓는 소리가 새자 다원이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잡은 손에 힘을 빼는 것은 세심함이었다. 아무나가 알아채지는 못할 친절. 그러나 상대가 유재인이라면 말이 달라질 친절. “다정하네, 다원이.” “그딴 소리 좀 안 하면 안 돼?” 마주 쥔 손이 출입구를 향한다. 한 마디 언질도 없이 문을 젖히자 졸고 있던 관리 선생님이 퍼뜩 몸을 세웠다. 너희 몇 학년 누구야, 뒤에 대고 외쳐 묻는 소리가 전생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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