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6시에 프레헤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그는 줄곧 손에 들고 있던 재떨이를 놓쳐버렸다 재떨이는 바닥에 나동그라졌지만 깨지지 않았다. 재떨이가 깨져 그를 이 무기력으로부터 끌어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사방으로 유리조각이 튀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재떨이는 깨지지 않았다. 이런 경우,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반짝이는 것은 소설 속에서나 영화속에서의 일일 뿐이었다. 프리쥐뉙 슈퍼마켓에서 파는 이런 싸구려 재떨이가 아니라, 폴의 아파트에 있는 그런 비싸고 작은 유리 재떨이여야 했다.
우리 언제 마지막으로 봤지
반말을 했던가
너는 "언제 한번 놀러와" 하고 환히 웃었고
너를 생각하면
의자와 서랍장을 싣고 서울에서 철산까지 차를 몰고 온 일이 제일 먼저 생각나 그것들은 답십리로 이사해서도 썼고 파주로 오면서 버렸어 여름에 받은 네 편지는 겨울이 돼서야 다 읽었어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 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 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 다듬으며 먹고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늦은 밤이고 아픈 등을 주무르면 거기 말고 하며 뒤척이는 늦은 밤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것은 고작 설거지 따 위였다 그사이 곰팡이가 늘었고 주말 동안 개수대에 쌓인 컵과 그릇들을 씻어 정리했다
멀쩡해 보여도 이 집에는 곰팡이가 떠다녔다 넓은 집에 살면 베란다에 화분도 여러개 놓고 고양이도 강아지도 키우 고 싶다고 그러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하고 몇년은 성실히 일해야 하는데 씀씀이를 줄이고 저축도 해야 하는데 우리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키스를 하다가도 우리는 생각에 빠졌다 그만할까 새벽이면 윗집에서 세탁기 소리가 났다 온종일 일하니까 빨래할 시간도 없었을 거야 출근할 때 양말이 없으면 곤란하잖아 원통이 빠르게 회전하고 물 흐르고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암벽을 오르던 사람도 중간에 맥이 풀어지면 잠깐 쉬기도 한대 붙어만 있으면 괜찮아 우리에겐 구멍이 하나쯤 있고 그 구멍 속으로 한계단 한계단 내려가다보면 빛도 가느다란 선처럼 보일 테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이 어두워질 거라고
우리는 가만히 누워 손과 발이 따뜻해지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