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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2/09/11 01:36:41 ID : k3vfWrBAnTS
P에게. 오랜만이구나, 너에게 이렇게 편지를 적는 건. 비록 이전까지의 편지들과 달리 이 내 작은 외침은 전파를 타고 산산이 부서져 공기중에 흩어지겠다만. 감히 품었던 연정이 너에게는 고통일 줄 진작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이렇게 닿지 못할 마음을 키우지 않았을텐데 말이야. 색도 향도 없던 나의 3년의 끝자락, 어째서 그때서야 네가 내 눈에 들어온 걸까.
이름없음 2022/09/11 01:38:06 ID : k3vfWrBAnTS
만약 우리가 조금만 일찍 서로를 알아봤더라면, 그랬더라면 너는 아프지 않았을까? 너의 아픈 입술이 한 번이라도 나의 이름을 머금었을까? 눈도 비, 그 사이 어딘가의 서리가 서리던 늦가을 밤에.
이름없음 2022/09/11 01:40:58 ID : k3vfWrBAnTS
너의 손톱은 언제나 엉망이었어. 어릴 적 우리 엄마는 내게 손톱에 흰 부분을 꼭 남겨둬야 한다고 말했단 말야. 왜 네 손톱은 질서없이 뜯긴 분홍색만이 남아 있을까. 진작 생각해 봤어야 했어. 너덜거리던 손 끝에 살짝 엿보이는 핏자국을 진작 봤어야 했어.
이름없음 2022/09/11 01:46:08 ID : k3vfWrBAnTS
네 눈빛은 달았고 미소는 지독히 향기로웠어. 청춘의 푸르름에 흠뻑 젖어 촉촉해진 눈동자가 내 눈에 닿을 때면 심장의 밑동을 타고오르는 홍조를 감춰야 했어. 너의 사소하고 하찮은 한 마디 한 마디를 난 소중히 귀에 쓸어담았고 그 겨울을 지났을 때 내게 남은 건 너의 메아리같은 잔향뿐.
이름없음 2022/09/11 01:47:47 ID : k3vfWrBAnTS
씁쓸한 뒷맛에 난 그만 사랑을 잃고 말았어. 사랑하던 첫눈은 이제 내게 아픔이 되었으니까. 다시는 첫눈에, 그 황홀경에 홀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이름없음 2022/09/11 01:51:45 ID : k3vfWrBAnTS
네가 좋아하던 노래, 시간, 색깔, 하다못해 수학 공식까지 전부 나에게 너란 우주를 빛으로 채우는 별이었다면 믿을까. 천문학에 잠식되어 우주의 초월감에 괴로워하던 너는, 너 자신 또한 누군가의 우주였음을 과연 알지 못했잖아. 너란 어린 불씨가 꺼지던 늦겨울의 그 새벽. 나는 홀로 너를 기다리며 서툰 숨을 뱉고 있었어.
이름없음 2022/09/11 01:54:44 ID : k3vfWrBAnTS
너의 진갈색 머리칼도, 검다가도 햇빛에 비추면 찬란하게 퍼지던 고동색 눈동자도, 가끔 웃을 때면 힘없이 흔들리던 고개도, 여기저기 성한 곳 없던 네 손도, 뭐가 그리 버거운지 한 숨 두 숨 힘겹게 내뱉던 입김도 한 줌의 재가 되어 서리가 되어 눈송이가 되어 고요히…….
이름없음 2022/09/11 01:55:24 ID : k3vfWrBAnTS
어느 누군가 내게 누구를 사랑하느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늦겨울이라 할테지.
이름없음 2022/09/11 01:55:34 ID : k3vfWrBAnTS
아아, 나는 겨울이 싫다.
이름없음 2022/09/11 01:56:35 ID : k3vfWrBAnTS
너를 아프게 하던 눈송이도, 네 심장을 얼린 추위도, 네게 고통만 지워준 나도 모두 이곳 겨울에 있을테니
이름없음 2022/09/11 01:56:55 ID : k3vfWrBAnTS
언젠가 생각이 난다면 그땐 한 번 들러주길.
이름없음 2022/09/11 01:57:01 ID : k3vfWrBAnTS
너의 H가

레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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