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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3/02/07 13:50:57 ID : rBz9jtdyGmq
창작소설판 공동 연습장 규칙은, 누구나 쓸 수 있고, 마지막 레스 올린 사람이 새로 스레 팔 것.
이름없음 2023/06/07 21:18:56 ID : rBz9jtdyGmq
시간은 언제나 숲의 가장자리에 걸려있다.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하곤 하던 말이다. 나는 그 말에 늘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말로 그 말을 이해하거나 수긍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날 아침 내 눈에 햇살이 비칠 때 나는 그 말의 뜻을, 마치 그의 의지가 내게로 직접 전해져오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마저도 단지 내 착각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그와 함께한 추억도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제 여기에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곳에 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그의 숨소리가 허공을 맴도는 것처럼 나를 간지럽히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기억이 가진 가장 복되고도 저주스러운 측면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목적 없이 해메던 나의 눈길은 어느새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있을 리가 없는 것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서두르거나 다급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실감이 나지도 않았다. 그가 있었다. 숲의 어디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곳에 그는 앉아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무엇을 말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오랫동안 나는 그를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면 그건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착각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경솔하게 움직이기라도 했다가는 그 환상이 모조리 깨져버리기라도 할 것만 같은. 결국 내가 무언가를 하거나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보다 그가 다시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눈을 감았는지도 모르겠다만) 뜨는 것이 더 빠른 것은 내가 나약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역시도 하나의 운명적 귀결이었을까.
이름없음 2023/06/07 21:22:53 ID : rBz9jtdyGmq
들판은 잔잔하게 파도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가만히 앉아 그 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다면 자주색 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자이너로서의 내 식견은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색이 시간에 따른, 즉 해의 높낮이에 따라서 다른 빛깔을 띄는 가변적인 것이라고도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꽃은 그저 꽃일 따름이며 그 꽃은 스스로가 무슨 색을 띄는지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그 꽃은 어디에나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어디에도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
이름없음 2023/06/07 21:26:29 ID : rBz9jtdyGmq
가을의 꽃처럼, 아직은 저 나름의 생생한 색채를 띈 낙엽들 사이로 먼 곳의 풍경이 보였다. 마치 액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만, 아주 우연히 그렇게 보이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 우연스럽고도 자연스러운 나뭇결의 액자 속에서 호수는 그림처럼 잔잔하게, 그러나 조용하면서도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고 산은 단지 우리를 굽어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름없음 2023/06/07 22:14:26 ID : rBz9jtdyGmq
나는 읽던 책을 한 쪽으로 치워놓았다. 사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은 이미 진작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그걸 여전히 손에 들고 있었던 건 순전히 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걸 포기한 이유 역시 그게 그다지 효과가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내 앞에 선 여자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도 그다지 내색하지 않는지는 몰라도 태연한 얼굴로 차를 다시 홀짝일 뿐이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아직도 그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는 겁니까?" 그녀는 잠시 찻잔을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무 걱정하지마. 우리 뿐만 아니라 아무도 모를테니까. 적어도 아직은." 나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소리치듯 말했다. "그럼 언젠가는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녀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은 차분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자신보다 큰 덩치나 거센 공격성에서나 느낄 법한 그런 분위기가 대체 어디에서 풍겨나오는 것인지 나는 의아했지만 그걸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을 상황도 그렇다고 본인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궂이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건 답변을 기다리거나 바라는 투의 말이 아니었다. 내가 다시 자리에 앉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종이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그건 말로는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보다는 직접 보시는 편이 더 빠를 듯 합니다만." 어딘가 깔보는 듯한 말에 기분이 상했지만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종이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적혀있거나 그려져있지 않았다. 그저 하얀 백지로 보일 뿐이었다. 내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자 그녀는 나지막히 소근거렸다. "곁눈으로 보세요. 곧장 쳐다보지 말고." 나는 그게 뭔가 싶으면서도 일단은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혹시 하는 마음이었지만 조금 시선을 기울인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분명 뭔가가 있었다. 그건 언뜻 인쇄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적힌 혹은 인쇄되어 있는 것이 겨우 단어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에 나는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의. 분명 거기에는 그런 단어가 찍혀있었다. 내가 순간적으로 입을 열어 "정의" 하고 그 단어를 곱씹으려는 순간 그녀는 놀랄만큼 빠르게 팔을 뻗어 내 입을 가로막았다. 그 결과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정..." 하는 의미불명의 발성에 그치고 말았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난 눈으로 보라고 했지 입으로 읽으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에는 여전히 그녀의 부드러운 손가락의 숨결같은 감촉이 서려있었다. 그녀는 곧장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며 자리를 떠났고 나는 잠시 의자에 앉아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사실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는 둥의 방해가 없었다면 계속 그렇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법이었다. 혹은 일을 하기 위해 살거나. 그녀는 둘 중 어느쪽일까.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이라고 하더라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비서는 서류를 한 뭉치, 아니 어쩌면 한 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들고 있었다. 언제부터 혹은 어디서부터 들고 있었는지 내심 묻고 싶어졌지만 그라면 그런 짖궂으면서도 무의미한 질문마저 제법 정확하게 대답할 것 같았기에 그만두기로 했다. "알트, 그럼 이번에도 부탁해도 될까?" "얼마든지요." 그는 묵묵하게 말하고는 내가 건넨 파일을 가방에 넣었다. 그 동작은 워낙 매끄러워서 마치 반쯤 농담처럼 "이 남자, 사실은 가방에 물건을 넣는 일만 20년 넘게 해온 장인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외계인 같은 놈.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건 비난이라기 보다는 감탄에 가까웠다. 그는 단지 대단한 사람이기 이전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으므로. 차는 빠르게 건물을 빠져나와 큰 길을 달렸다. 문득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 건물들의 생김새나 랜드마크,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분위기 따위로 어느정도 자기 나름의 개성을 가지는 골목이나 도심지와는 달리 큰 길은 어느 곳을 가도 마치 복제인간처럼 빼다박은 듯 똑같다. 하기야 실제로 표준화된 공정으로 통일되어 만들어지기 때문에 정말 문자 그대로 빼다박았다고도 복제라고도 할 수 있을테지.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좀 더 잠기기로 했다. 어차피 밖을 보아도 똑같은 것들이 반복될 뿐일테니까. 심지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을 생애의 목표로 삼기라도 한 듯한 그의 비서마저도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이 로봇이 아닌 인간인 것을 증명하기로 하듯이 운전을 자동 조종에 맡긴 채 다른 일로 지루함을 견디고 있는 판국이니 말이다. 의식의 흐름은 물론 처음에는 몰개성한 고속도로들이 가지고 있는 지루한 풍경들에서부터 시작했다. 적어도 이 땅에 산이라는 것이 아직 있던 시절에는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오래된 영화에서 보는 바로는 그랬다. 하지만 그로서는 그 풍경이 정말 어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산이며 나무, 그 밖에 여러가지 것들이 고속도로 주변에 보이던 그 시절에조차 사람들은 고속도로 위에서 보내는 시간을 끔찍하게도 지루해 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 어쩌면 매우 주관적이면서도 모호한 표현이 붙는 주관적으로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는 차에서 몸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그건 상당히 길고 오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건 그가 차를 타고 이동한 거리가 그가 살고 있는 나라의 국경에 가까운 외곽에서 중심 수도까지의 거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또한 나라에 따라서는 그다지 길지 않을수도 있고,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짧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마련이고, 남의 나라에서 누가 차를 타고 어디에서 어디로 가든지 간에 그 거리가 긴지 짧은지를 신경쓰는 사람 또한 그리 많지 않을것이므로 객관적, 이라는 말에 궂이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의 동의까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건 몸이 찌뿌둥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차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는 모순적인 감정 때문이기도 했다. 조금 전, 그러니까 방금 전에 한참이라고 한 것과 대치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문장 서술상 하는 말로서 조금 전에 만났던 여자는 비록 겉으로는 언행이나 말투가 까칠하고 날카롭게 보이기는 해도 그와는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이며, 또한 이성을 갖춘 여성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차에서 나와 마주하게 될 사람은 그 여자와는 전혀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것도 아주 좋지 않은 방향으로. 그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목에서 불쾌한 소리를 낸다고 해서 약속시간을 미루거나 취소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물며 일부러든 실수든 시간에 늦는 것은 오히려 상황만 악화시킬 뿐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명백했다. 그는 짐짓 서두르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비서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거대한 건축물 앞에서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긴장감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 서둘러서 살짝 숨이 가빴기 때문이었다. 비서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이 그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숨을 헐떡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사실 아트는 손수건을 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금 고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아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가 숨을 고르기고 바쁜 와중에 내는 목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야, 벌써 오셨습니까?" 벤두의 목소리였다. 그건 어딘가 놀리는 듯한 말투로 들렸다. 하지만 그 주변에는 그 자신과 비서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게 단지 자신의 착각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아트는 설사 자신이 그 무뢰배로부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고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인물이므로 다른 사람의 행동거지에서 받는 느낌이 주관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벤두는 환영한다는 듯 양손을 활짝 펼치고 있었고 얼굴에도 마치 '코메디언처럼' (이건 그가 벤두의 미소를 떠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붙이는 표현이다) 웃음을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벤두에게서 역겨움 밖에 느낄 수 없었다. 하기야 누군들 저 사람을 오래 알고 지낸 후에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는 중얼거렸다. 물론 소리내서 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치 100년 만에 만난 친구나 가족처럼 껴안을 것 같은 그의 몸짓을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악수로 전환시키려고 애쓰는 것, 그리고 애쓴다는 것 자체가 티나지 않게 노력하는 것 뿐이었다. 다행히도 그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벤두씨.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 말에 벤두는 "그럼요" 하는 대답과 함께 그 대답 자체가 가진 우렁참보다 10배는 더 거창한 몸짓으로 자신이 아주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어필해보였다. "게다가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그는 대체 오늘 같은 날이 무슨 날이냐고, 게다가 더더욱이라는 건 무슨 의미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몰상식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신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보지요?" 하고, 좀 더 정제되고 세련된 방식으로 질문했다.
이름없음 2023/06/09 00:17:06 ID : rBz9jtdyGmq
저 멀리까지 이어지는 해안가. 물과 땅이 빚어내는 경계선은 내게 칼날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칼이라면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칼 또한 없을 것이다. 세상 어느 칼이 날을 뒤로 물렸다 앞으로 내보냈다 하겠는가. 그런 것을 과연 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논리적인 사실 또는 귀납과는 별개로 내 마음은 여전히 내가 속삭였다. 저것은 마치 검과 닮았다고.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나의 내면이 발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이름없음 2023/06/09 00:21:58 ID : rBz9jtdyGmq
아침이 밝아오자, 그는 일어나 눈을 비비었다. 그건 의식적인 행동이라기 보다는, 컴퓨터의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작동하는 것 만큼이나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그런 일이 그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 가릴 것 없이 아침에 그런 비슷한 일을 한다. 개별적으로 세세한 차이점들은 물론 있다. 어떤 이는 그와 마찬가지로 눈을 비비겠지만 다른 어떤 사람은 하품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을 기지개를 켤 것이다. 혹은 그 두가지를 모두 하거나. 그러나 큰 틀에서 보자면 그것은 모두 같다고 해도 그리 억지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유전자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해야 할 행동에 대한 어떤 개념 같은 것도 담겨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날 아침 그가 침대에서 눈을 비볐을 때, 그건 세계의 다른 어떤 기지개나 하품, 눈 비비기와도 구분되는 특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알아차리는 편이 더 이상하겠지만.
이름없음 2023/06/09 00:29:05 ID : rBz9jtdyGmq
아직도 그녀를 잊을 수 없다. 혹은 잊을 수 없다. 어느 쪽이 더 옳으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답할 수 없다. 나는 그녀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날은 잎사귀가 신선한 새 봄의 첫 날이었다. 물론 그 날이 정말 봄의 첫 날이냐고 한다면 나는 으레 사람들이 눈치없는 사람을 대할 때 하듯이 헛기침을 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해줄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 날씨가 어땠으며 하늘이 어땠는지, 그리고 그 날이 어떤 하루였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설령 그가 시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내가 하는 봄의 첫날이라는 다소 근거 없고 어쩌면 아주 부정확할지도 모르는 표현이 사실은 아주 직설적인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날 아침은 평범했다. 물론 지나가던 소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다던가 하는 일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부터 설명할 일들에 대하면 사실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날이 특별한 날이 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그 소가 쓰러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특별한 하루는 언제나 평범하게 시작되는 법이며, 평범함과 특별함 또한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이름없음 2023/06/09 00:35:10 ID : rBz9jtdyGmq
바위 틈에 무언가 끼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해가 거의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조그만 돌 부스러기가 그 안에 끼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그것을 직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중에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는 와중에 그 순간이 그렇게 각색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예컨대 내가 무언가를 느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야 어찌 되었든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말하자면 그 직후 나는 연장을 꺼내서 그 균열을 벌리기로 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는 내가 작업을 끝낼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주었다. 혹은 내가 충분히 빨랐거나. 기왕이면 나는 후자라고 믿고 싶지만. 아무튼 바위 틈을 망치로 곡괭이로 정으로 치고 때린 결과 처음에는 기껏해야 갈라진 틈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새 손이 쑥 들어갈 만한 구멍이 되었다.
이름없음 2023/06/09 00:38:55 ID : rBz9jtdyGmq
하루종일 정답을 고민했지만 색체를 강하게 띄는 구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정말로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 의문은 점점 커져 어느새 '이게 정말 수수께끼이기는 한 걸까' 하는 생각으로 번졌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가 정말 '수수께끼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 그 전에 애당초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한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아,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내 생각이 완전 탈진한 신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이 멈추었다는' 생각이 든다니 그게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는 온몸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것 역시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완전히 바닥에 뻗어 드러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몸에는 힘이 조금도 들어가질 않았다.
이름없음 2023/06/10 14:59:34 ID : rBz9jtdyGmq
어디선가 잔잔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어디라고는 콕 집어 말할 수 없이. 입체음향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잘 모르지만.그런 생각을 곰곰히 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출처와 방향이 보다 분명한 소리가 그 틈을 뚫고 들어왔다. "오랫만이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소미였다. "보면 모르겠냐.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너는?" "그렇게 대충 대답하면 나도 별로 해줄 말이 없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심심하면 다른 애들하고 얘기라도 하던가." "그거야 내 맘이고." 오랫만, 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마지막으로 본 게 겨우 3개월 전이다. 물론 시간에 대한 감각이나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니 그것도 오랫만이라고 할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최근이다. 물론 그 때도 소미는 지금처럼 '오랫만' 이라며 말을 걸어왔었다. 상황이나 말투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지만. "나도 그때 조금 놀라긴 했어." "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왜, 저번에 전철에서 마주쳤을 때 말이야. 너는 거의 말도 못할 정도로 벙쪘던데." "내가 언제?, 그야 그렇게 마주칠 줄이야 몰랐지만......" "됐다, 그냥 내가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르지." "아, 그렇다고 친다 이거지?" "어느 쪽이든 상관 없잖아." 나는 흘리듯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손목 시계를 봤다. 아직 한 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잠깐 산책이라도 할까? 밖에 경치가 좋던데." "그러던가." 나는 그 말을 동의로 받아들이고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가을이 다 되어가고 있다지만 아직은 자기 차례가 끝나지 않았다는 여름의 아우성처럼 공기에는 아직 후덥지근함이 남아있었다. 소미는 조금 거리를 두고 내 뒤를 따라왔다. 그렇게 멀지 않아 이야기하기에 무리는 없는, 그러나 같이 걷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묘한 정도로. "그러고보니 너, 그때 어디 가고 있었던거야?"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그러고보면 참 편리한 대답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에 대한 질문이든 그걸 왜 물어보냐는 말에 이 한마디면 거의 대부분은 뭐라고 더 따지기도 묻기도 모호해진다. 하지만 소미는 아쉽게도 그 대부분에 포함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일이잖아. 사생활 침해 아니야?" "말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잖아." "그럼 안할래." "혹시 수상한 거라도 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마약 같은." "이를테면." "그런 거 아니야." 소미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건 더 이상 그 주제로는 할 말이 없다는 소미 특유의 제스쳐였다. 나는 할 수 없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별로 없었기에 대화는 조금 전의 '그런 거 아니야' 로 끝나버렸지만. 어느정도 걷고 나니 조그만 공원의 끝자락에 닿았다. 야트막한 돌담은 어쩐지 투박해 보이기도 허접해 보이기도, 나름의 정감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돌담일 뿐이었다. 소미는 잠시 그 앞에 서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돌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워낙 의미심장해 보였기에 나도 모르게 덩달아 고개가 올라갔다. '뭐야 아무것도 없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려던 순간, 시야 한 구석에 새카만 무언가가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온 몸 검은 털로 뒤덮인 고양이였다. 유독 색이 검게 보이는 걸 보면 털이 젖어있는 걸까. 잠시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다가 나는 문득 그 고양이가 소미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순간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반면 소미는 되려 고양이에게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아니 애초에 돌담 위를 올려보거나 한 일 따위는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며 "돌아갈까. 조금 덥네." 하고 말할 뿐이었다. 나로서는 방금 내가 무언가 착각을 하거나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뭐라 달리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소미는 별안간 내 손을 잡았다. 그게 정확히 언제였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마치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칼에 찔리고 총알에 관통당하고 나서 얼마간 지난 후에야 자신이 아주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는 걸 깨닫는 것처럼, 어느 순간 섬광처럼 무언가 내 손을 잡고 있다는 감촉이 내 안에 도달했을 때 이미 그녀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애를 바라봤지만 소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 앞을 보고 있었다. 그 기묘함에, 부드럽게 파고드는 손결의 따듯함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름없음 2023/06/10 15:33:16 ID : rBz9jtdyGmq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게 뭔지를 말하려면 먼저 내 소개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장수 풍뎅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벌레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니다. 애초에 말을 할 수 있는 벌레가 평범할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인간의 기준에서일까 아니면 벌레의 기준에서일까. 인간들이야 항상 말을 하니까 '말을 하는 벌레' 라는 개념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애초에 벌레는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까 그건 마치 인간이 '5차원 공간의 생명체' 를 떠올리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철학적인 문제를 물론 시시하다고 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러니 그것은 내버려두고 일단 내가 말을 하는 장수 풍뎅이라는 것만 확실히 해두면 될 듯 하다. 문제의 발단은 코르크였다. 구체적으로는 유리병 입구를 막을 때 쓰는 코르크 마개. 물론 이보다 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여러 이야기, 이를테면 그 유리병이 어떤 병이고 무엇을 담았으며 코르크의 종류가 무엇인지 하는 것도 마음만 먹으면 말할 수야 있겠지만 우선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 날은 여름이 막 시작되고 있는 어느 날이었다. 어쩌면 인간들의 기준으로는 이미 여름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고. 그 날 내 사촌 베일은 다리를 다쳐서 매일 하던 일들 대부분을 할 수 없었는데, 그 중에는 자기 조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벌레에게는 버스나 자가용 같은 교통수단이 없기 때문에, 단지 길을 잘 찾아갈 수 있게 같이 가주는 정도였지만 아직 나이가 많이 어린 조카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도움이었다. 그리고 그런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베일을 도와줄 만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는 물론 의지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베일의 조카와 함께 학교에 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조카와 함께 도착했을 때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혹은 생겼다. 학교가 있던 자리가 큼지막한 구덩이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거기에 학교라고 부를만한 무언가가 없다는 것 만큼은 확실했다. 나는 그저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끔찍한 일이 그저 아무도 그곳에 없을 때 일어났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학교에 조카를 맡겨둘 수 없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카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가게로 갔다. 마침 각종 곤충용 간식을 파는 곳이 학교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완전 폐허가 된 학교 터를 계속 조카에게 보여줘봤자 좋을 것도 없겠다는 이유도 있었다. 잠시 후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생각 이상으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내 납득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대개 하는 말을 조금 바꿔서 말하자면, '벌레 생각은 다 비슷비슷한 셈' 이었다. 나는 차라리 잘 되었다 싶어 이야기하는 벌레들 틈에 끼어 은근슬쩍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죄송한데 학교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하, 참... 저희도 그걸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제법 들어보이는 쇠똥구리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뭐, 이런 일이 한 두번입니까? 그나마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죠." 이번에는 땅벌이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딘가 석연찮다는 느낌이 물씬 배어있었다. "문제는..." 쇠똥구리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왜 일어난 건지 아무도 모른다는거야." 나는 잠시 그 말을 곱씹어 보고는 대꾸했다. "뭐, 대개는 사람이나 큰 짐승이 밟고 지나가서 아니겠습니까? 그걸 피하려고 항상 신경쓰기야 하지만 동물들은 자기가 밟는 곳을 우리가 학교로 쓰는지 똥통으로 쓰는지도 알 길이 없을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요." "그런 거라면 우리도 이렇게 난감해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건 분명히 아니야." 나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분명히 아니라고요, 어떻게 그걸 확신하시죠? 인간들이 사용하는 발 덮개는 그 종류만 수백가지는 될테고, 우리 학교를 짓밟을 수 있는 동물들이 낼 수 있는 흔적은 그보다도 훨씬 다양할텐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고 대화 속을 파고들었다. "제 추리를 들어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장수 풍뎅이씨."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딱정벌레가 그늘진 곳에 있었다. "추리라고? 무슨 추리를 말하는거지?" "사건에 대한 제 추리를 말하는 겁니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 딱정벌레가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도 할머니한테 탐정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는 덧붙이듯이 말했다. "저는 탐정은 아닙니다만, 단지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떠올리고, 그것을 이치에 맞게 연결하는 데는 재주가 있어서요." "그러시군요." 나한테 피해가 될 것도 아닌데 궂이 싸움을 걸 것도 없겠다 싶어 나는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추리라는 게 뭐죠? 어떤 추리를 했다는 거죠?"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할지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그의 언행을 생각하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말할 내용에 무게를 싣기 위함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과연 그 침묵 또는 지연에 대한 추리가 옳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너무 오래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학교는 흔적도 형체도 없이 완전히 박살이 났습니다." 그 말에 여러 벌레들이 앓듯이 신음 소리를 냈고, 어떤 벌레들은 치를 떨듯 날개를 부르르 움직였다. "물론 이런 일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건 현장에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건 바로......"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바로 사건 현장. 즉 무너진 학교 폐허에서 나타나는 형태와 그 주변환경입니다. 그 주변에는 어떤 종류의 발자국과 같은, 짐승들이 낼 수 있는 흔적은 없었습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새가, 조금 큰 새 같은 것이 거칠게 날아와 앉은 게 아닐까요?" 하지만 그는 단언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새는 대체로 높은 가지 등에 앉지 땅에 앉는 일은 드뭅니다. 게다가 새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학교를 그렇게까지 엉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러면 뭐가 학교를 그 꼴로 만들었다는 겁니까? 하늘에서 돌이라도 날아와서 학교를 으깼다고 하실 겁니까?" "어쩌면 그것도 가능성이 없진 않겠지요." 그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이름없음 2023/06/10 21:03:41 ID : rBz9jtdyGmq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작은 몸동작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그 무언의 주장에 수긍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또한 그 이상 따지거나 캐묻지는 않았다. 다만 제각각 다른 타이밍에, 서로 자기 성격에 맞는 정도로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다른 것이라면 고개를 움직이는 방향일 뿐, 달리 할 말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는 그런 우리를 보고 (어쩌면 보지도 않고) 말 없이 몸을 돌려 그 곳을 떠났다. 이것이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 평일에 일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받아들일 수는 있는 일이다. 애초에 평일이라는 건, 적어도 이 사회에 있어서만큼은 일을 하라고 있는 날이 아닌가. 게다가 일을 하지 않으면 수입도 없고, 그렇게 되면 생활을 지속할 수도 없다. 하지만 휴일. 그것도 공휴일에 일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좋고 싫고 하는 차원에서 말하자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고, 설령 그걸 넘어간다 치더라도 무엇보다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즉 다시 말해 불법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 날은 그런 당연한 것이 부차시 될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건 예컨대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거창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대체로 그렇듯, 중요한 일이 항상 거창한 것은 아닌 법이다. 가령 누군가에게는 아침밥을 먹느냐 못 먹느냐 하는 일이 그 날의 컨디션 자체 만큼이나 중요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5분 지각하는 것이 느닷없이 머리를 후려치는 것보다 무례한 일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말하려는 중요한 일, 중대한 사정이라는 것은 그런 개인적 관점에서 다소 벗어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당 부분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날 아침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물론 사람들은 항상 '문제가 없는' 것에 익숙해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 오늘도 문제 없군" 하고 의식적으로 말하거나 생각하는 편은 드물다. 하지만 사람들이 의식을 했건 못했건 그 날 아침에는 분명 모든 것이 정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상적이면서도 따분한 상태는 정오를 지나 오후를 지나면서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날이 저물고 저녁 9시가 되어갈 무렵 무언가 좋지 않은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둔감한 인간들이 이제야 발견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처음에는 경보가 울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 경보가 왜 울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오작동이야' 하는 간단하면서도 알기 쉬운 결론을 내렸다. 토론이나 회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설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것에 동의하기도 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 경보가 꺼지고 나서 십 여 분 동안은 조용했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역시 오작동이었네' 하는 확신을 굳히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계기판이 급작스럽게 요동치기 시작하자 직위나 위치 상 그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던 일부 인원들은 자신들이 가졌던 확신이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전력계의 바늘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보였다. 비록 그 요동은 워낙 미세했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건 분명 도화선과도 같은 시작의 불씨였고, 동시에 그 신호였다. 압력을 비롯해 각종 센서에서 이상 징후가 하나 둘 빠르게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경보음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을 때, 계기판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난잡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어지간히 능숙한 직원이라도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도 그곳에는 시설에서 2번째로 오랫동안 근무한 베테랑이 있었다. 물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것 또한 불행 중 불행에 그치고 말 것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일부 차단기가 적절한 순간에 작동되었고 시스템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곳에는 일부 인력이 빠르게 투입되었다. 특히 화물 구역의 차단벽이 원격으로 작동하지 않았을 때가 가장 긴급했던 순간이었다. 전기 계통에도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어려움과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테랑 감독관의 지휘와 직원들의 사투로 위기를 안정적으로 넘길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어느정도 눈치챌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사고는, 그러니까 사고인지 아닌지 지금도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 사건이 그 날의 가장 중요하거나 가장 나쁜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고 모두가 마음속으로든 실제로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건물 전체가 우르릉 하고 울렸다. 물을 마시던 사람 하나는 사레가 걸려 한참동안이나 기침을 했을 정도였다. 마치 거인이 거대한 망치로 땅을 내려친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이 몸을 움찔 하며 어딘가 숨을 곳을 찾으려는 순간 떨림은 멎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리둥절하는 사람들을 놀래키기라도 하려는 듯 건물은 조금 전보다도 더욱 크고 거칠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서로 대피하라며 소리를 지르면서 낙하나 붕괴로부터 안전한 곳을 찾아 달렸다. 물론 일반적인 건물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그곳에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진은 물론이고 화재며 각종 재난에 모두 대비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피난할 곳을 찾는 것 역시 결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이번만큼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세상이 무너졌다. 어떤 사람은 그 때의 살벌한 풍경을 그렇게 표현했다. 어찌보면 담백하면서도 직설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순간에 다른 이름을 차마 붙일 수 없었던 것일테지. 그 일의 서순이나 순서를 따지는 건 어쩌면 큰 의미는 없을지도 모른다. 가령 처음에는 바닥이 부서졌다. 아니, 그보다는 찢어졌다고 하는 편이 좋을 듯 하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강철 바닥이, 축구장보다 넓은 범위에 걸쳐서 잘라낸 것처럼 사라지는 걸 과연 '찢어졌다' 라고 할 수 있는걸까. 그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다들 이견이 있다. 어떤 이는 비명을 들었다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굉음 말고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하며, 심지어 괴수의 포효에 삼켜지는 것 같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 그 중 어느 것이 사실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대신 이렇게 간단하게, 그러나 끔찍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닥 아래 어딘가에서 거대한 괴수가 나타나 축구장 면적보다 넓은 범위에 걸쳐서 모든 것을 분쇄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것은 너무도 거대한 파괴였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상의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고 현장에는 혈흔은 물론이고 그 어떤 인명 희생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혹여 주변에 자신의 죽음을 알렸을지도 모를 그것들은 모두 저 멀리 하늘 너머로 괴수의 거대한 몸 어딘가에 붙어 있거나, 혹은 그 몸의 일부가 되는 여정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구조팀이 도착했지만 그들 역시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원인도 결과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마저도 결국은 '죽을 사람은 죽었고, 살 사람은 살았다' 고 하는 철학에 가까운 결론만을 내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름없음 2023/07/25 15:36:08 ID : rBz9jtdyGmq
상처는 아물고 메워질지 몰라도 흠집난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는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서리가 낀 검은 마치 그 스스로가 얼음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 서려있는 서늘한 은광은 여전히 그 검이 단순한 철덩어리에서 검으로서 새롭게 벼려졌던 그 순간 만큼이나 예리하게 날을 세우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벽에 기댄 채 허공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검을 보았다. 그 모습은 어딘가 애처로워 보였고 쉬고 있다기 보다는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에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두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반대로 입은 쉴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상처 입은 영혼은,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해, 결국 자신의 쓸쓸함을 스스로 다독일 수 밖에 없지. 하지만..." 그리고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을 때, "상실함으로서 그는 도리어 새로운 목적을 얻게 되겠지." 그녀의 말을 이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어둠 속 어딘가로부터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지만, 일어나 아는 체할 기운은 없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거야?, 한스." "네가 오기 조금 전부터." "엿듣는 걸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어디선가 쿡쿡 웃는 소리가 들린다, 고 데보라가 생각한 순간. 분명 아무것도 없었을 곳에서 망토 한 자락이 휘날리는가 싶더니 그 곳에는 어느샌가 한스가 앉아있었다. "섭섭하네. 피곤해보여서 가만히 쉬게 해줬을 뿐인데." "혼자 있게 해줄 수는 없었나 보지?" 한스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기에 데보라도 달리 잔소리르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거든.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 "무슨 이야긴데? 나쁜 소식이라도 있는거야?" "그건." 한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의도적으로 말을 멈춘 것인지, 아니면 적당한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그러는 것인지는 그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을 뿐 아니라 사람의 얼굴을 책처럼 읽을 수 있는 데보라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이름없음 2023/07/25 16:06:32 ID : rBz9jtdyGmq
어디선가 시큼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물 뿐. 나는 이내 착각이라고 스스로 납득하고는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건 실수였을까. 아니면 내 일평생 중 가장 잘한 일이었을까. 발을 조금 헛디뎠다고, 혹은 미끄러졌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쳤다. 그것은 한 줄의 문장이라기 보다는 언어로 변환되지 않은 순간적인 찰나의 감각에 가까웠기에 둘 중 어느 하나가 맞거나 틀리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내 몸은 이미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차. 통증이 느껴지기도 전에 발이, 어쩌면 다리가 어딘가 잘못 되었다는 예감이, 그리고 잘못하면 죽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온몸으로 퍼졌다. 이윽고 나는 물에 빠졌다. 자발적으로 들어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건 퍽이나 이상한 표현이지만, 또 동시에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피부를 둘러싸는 공기들이 차가운 물에게 자리를 넘겨주기가 무섭게, 마치 그걸 신호로 삼기로 전부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몸 곳곳이, 뒷골목에서 빵 한 조각을 애타게 구걸하는 걸인들 만큼이나 절박하게 고통을 호소해왔다. 순간적으로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것 조차도 자각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혹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채로 물 속을 허우적거렸다. 아니, 어쩌면 쥐가 난 다리 때문에 온 몸을 한껏 웅크렸는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상반된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사정없이 휘저었다. 물 속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한다고, 그리고 물 속이든 뭐든 좋으니 다리의 고통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그때 무언가 예상치 못한 감촉이 몸 어딘가를 휘감았다. 매끈한 감촉이었다. 나는 낯선 감촉에 깜짝 놀라 다리가 아픈 것도, 심지어 내가 물 속에 있다는 것도 잠시 잊을 뻔했다. 어딘가 미끌미끌하면서도 묘한 따듯함이 느껴지는 그 감촉이 점점 내 허리를 깊이 감싸왔다. 왜인지 나는 그것이 무언가가 아니라 누군가의 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렇기를 무의식중에 바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상당히 진정할 수 있었다. 다리의 통증도 거의 멎어버린 것 같았다. 잠시 후에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반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보려고 할 정도로 정신적인 여유도 생겼지만 그 누군가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수면에 도달해 머리를 바깥으로 내밀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던 나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걸까. 내 몸을 감싸던 매끌거리는 감촉도 어느샌가 사라졌지만 정작 나를 구해줬을 그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물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물 속으로 무언가 그림자가 지나가는 듯한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였다. 그것은 사람의 실루엣 같았다. 나는 물 속으로 고개를 넣었고, 뜻밖에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생각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처럼 '아름답다' 라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떠올리지는 않았다. 차라리 머릿속이 텅 비었다고 말하는 편이 올바른지도 모른다. 그녀는 눈을 떼지 못한 채 가만히 있는 나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정말로 그랬을까. 어쩌면 단지 내가 그것을 바랬을 뿐일지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그 입술의 감촉을 잊을 수 없다.
이름없음 2023/07/25 16:12:12 ID : rBz9jtdyGmq
천천히 가자는 말에 그는 도저히 못 듣거나 잘못 들을수가 없는 목소리로 힘차게,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알겠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의 몸은 그 대답이 어쩌면 '네' 와 '아니오' 의 개념을 정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그 엄청난 성량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걸 궂이 특별한 장비나 측정이 없이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내 말에 대꾸하는 게 맞긴 한 걸까?
이름없음 2023/07/27 18:26:15 ID : rBz9jtdyGmq
틈새 안은 고요했다. 단지 이따금씩 바람이 어딘가를 훑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남자는 하던 일도 잊은 채 거의 넋을 잃은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표정만으로도 그가 상당히 놀랐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 방법이 없다. 나는 잠시 그에게 뭐라도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먼저 무슨 반응을 보이기를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저기, 그러니까..." 처음 들은 말은 그것이었다. 불쑥 무슨 말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더니 바로 그 남자가 한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치 할 말은 그게 전부라도 되는 마냥 남자는 한참을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그 남자가 우리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그게 다였던 셈이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이야기를 트기로 했다. "실례지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요? 저희는 이 부근을 조사하는 중입니다만..." 하지만 남자는 어리둥절한 듯이 "조사?..." 하고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웅얼거리기 시작할 뿐이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미친 사람이 아니냐 하는 얼굴로 나를 본 것도 그 때였다. (어쩌면 그마저도 단지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조개야!" 뭔가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고. 그러니까 뭔가 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 남자가 갑자기, 거의 일부러 놀래키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런 상황은 조금도 예상치 못했기에 나는 거의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뒤에서 받쳐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옷이 지저분해지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조개요? 그게 어쨌는데요?"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은 웃옷을 손으로 툭툭 털고는 그에게 반쯤 따지듯 물었다. "조개! 너희들이 찾는 거 말이야!" "아..." 나는 그제서야 대충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조개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발굴하려고 하는 선사시대 유적을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걸 조개라고 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그 남자 뿐이겠지만.
이름없음 2023/07/27 18:51:47 ID : rBz9jtdyGmq
어두워지자,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중에 멈출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망설이거나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선두에 선 자가 빠르게 상황을 살피고 신호하면 뒤에서 따르는 것을 반복하며 그들은 신중하게, 그러나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물론 그 모든 것에는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는 은밀함도 필수였다. 과연 눈 앞을 분간할 수 있을까 싶은 어둠 속에서 그들은 시장과 대로를 지나 거대한 대문에 이르렀다. 거기까지 가는데도 상당한 노력과 기술이 필요했지만 물론 그들은 대문 구경을 하고 돌아가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하단부를 돌로 쌓고 그 위에는 각종 물감을 바르고 약을 덧칠한 튼튼한 목재로 만들어진 대문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그 문 앞에는 문 그 자체 만큼이나 든든해보이는 수비대가, 마치 지금 당장 누군가 급습하더라도 반격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세로 문을 지키고 있었다. 모두가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선두에 섰던 자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고는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는 그다지 그런 은밀한 작전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행색이었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평범한 일상복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한 편으로는 상당히 눈에 띄는 옷차림이기도 했다. 그는 여자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는 문 앞에 있던 수비대의 주목을 끌었다. 설령 그들이 반쯤 졸고 있었더라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여장남자를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 자기 집에 들어가겠다고 우기는 취객을 본 적은 간혹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훈련에도 그런 내용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 근방에서 가장 잘 훈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없었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름없음 2023/07/31 04:55:06 ID : rBz9jtdyGmq
그 때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데 그 마저도 어딘가 석연찮은 것이 어쩌면 그 때를 떠올리는 내 마음이 너무도 괴로워, 사실은 그때 이러이러 했었다고 스스로 꾸며낸 기억인지도 모릅니다. 하기야, 설령 무언가를 느꼈다고 혹은 모호하게라도 기시감을 느꼈다고 해도 무언가가 달라졌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선 의미 없는 얘기죠. 그 날은 비가 쏟아지듯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샤워기 같다, 고 하면 조금 이상할까요. 그건 아무래도 좋겠죠. 사실 비가 왔다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그 날은 비가 특별히 많이 온 날도 아니었고, 비가 오는 대부분의 날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었습니다. 궂이 특이했던 점을 꼽는다면 글쎄, 천둥이 치지 않았다. 정도일까요. 하지만 그것도 사실 어디까지나 '제가 있던 곳에', '제가 있는 동안' 내려치지 않았다. 가 정확하겠죠. 사소한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그 날 저는 학원에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날이 맑았기에 우산은 가져가지 않았고, 저는 달리 비를 피할데도 없는 길 한복판에 있었죠. 갑자기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비는 순식간에, 정말로 하늘에서 샤워기라도 틀어버린 것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네. 젖기 전에, 까지 생각했을 때는 이미 비에 푹 젖었던 거죠. 근처에 비를 피할만한 가게나 나무도 없었기 때문에 달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 달리든 걷든 매한가지였나 싶지만요. 그 때 저는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름없음 2023/09/19 15:01:00 ID : rBz9jtdyGmq
푸르다 푸르다. 일기장에 적혀있는 글은 그게 끝이었다. 무엇이 어떻게 푸르다는 것인지는 한 마디도 적혀있지 않은 채, 날짜도 날씨도 없이 그저 그 두 단어가 덩그러니 흔적처럼 남겨진 것이 그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푸르다는 것이 날씨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숨겨진 글씨라도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아마 둘 다 아닐 것이다. 비록 연도나 월일은 적혀있지 않지만, 하루도 빼먹지 않고, 그야말로 어떻게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단 하루도 어김없이 일기를 적는 그 성격을 감안하면 날짜를 짐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설령 그 일기장 전체에서 단 하루만 날짜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 푸르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마지막 순간을 직감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순간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감성 또는 사고방식의 결과일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마지막 페이지에 낙서라도 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도 평소 그가 쓰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달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똑 부러지고 말끔한 필기체를 보면, 그것 또한 억측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다시 일기장을 덮는다. 사실 이걸 보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가 사라지기 전에 딱 한 번 이 일기장을 본 적이 있었다. 몰래 보거나 한 것도 아니고, 일부러 보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방에서 뭔가를 하다가 우연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와 부딪쳤고, 그때 바닥으로 그 일기장이 떨어졌던 것이다. 마치 보란 듯이, 양쪽으로 촥 펼쳐지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향했다. 물론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볼 수 있었던 건 기껏해야 몇 초 정도. 하지만 그 와중에 내 눈에는 '사람이 죽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들지' 하는, 의문문인지 아닌지도 모를 말이 눈에 띄었다.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내가 당신 일기장을 나도 모르게 잠깐 봐버렸는데, 하고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역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때 물어봤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고.
이름없음 2023/09/19 19:49:52 ID : rBz9jtdyGmq
참 신기한 일이었다. 하루 만에 사람이 없어질 수가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전날에 그렇다할 전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전 날이 문제가 아니라 몇 달, 어쩌면 몇 년 전부터 미묘하고도 사소한 징조가 있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설령 그런 게 있다고 한들 내 머리로는 그게 무엇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관뒀다. 하기야 그 사람이 없어진 마당에 그걸 따진들 무슨 소용일까. 처음에는 문을 두들겨도 반응이 없길래 늦잠이라도 자나 싶었다. 하지만 문이 열려있었다. 하도 조용하기에 무심코 문을 당겼는데 아무 저항감 없이 스르륵 열렸던 것이다. 당혹스럽기도 하고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문단속을 깜빡한 걸까. 실수로 문을 잠그지 않은 채로 자버린 걸까. 아니면 문을 열어두고 나갔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 없을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은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그 때는 그런 가능성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부자리는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책상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물론 평상시에 깔끔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런 류의, 말하자면 일상적인 깔끔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콕 집어 말하자면 어딘가로 이사가기 위해 집을 비웠을 때의 텅 빈 듯한 깔끔함이라고 할까.
이름없음 2023/09/19 19:55:13 ID : rBz9jtdyGmq
꽃은 어디에 있어도 꽃이다. 그런 말은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디서 누가 왜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건 분명 봄이었다. 하기야 봄이니까 자연스럽게 꽃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도 나온 것이겠지만. 한창 청소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누군가와 한가하게 강변을 산책하고 있었을 때였나. (확실히 그 해 봄에는 달리 바쁜 일도 없었으니 그럴 여유도 있었다) 아니면 간식거리를 사들고 오던 길에 우연히 묘한 곳에 핀 꽃을 보고 한 말이었던가. 아니. 애초에 정말 그런 말을 듣기는 했던 것인지 조차 모르겠다.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 기억 속 어딘가에 그런 말이 부연 물 위를 떠다니는 꽃잎처럼 부유하고 있다는 것 뿐. 한숨. 그리고 심호흡.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듯한 하늘을 올려본다. 그리고 다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 되뇌이듯 말한다. 꽃은 어디에 있어도 꽃.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꽃도 꽃일까. 그야 그렇겠지 하고 또 다른 내가 대답했다. 나는 이름 모를 꽃을, 손에 들려있는 그 꽃을 하늘에 힘껏 던졌다. 그야 그런다고 해서 꽃이 하늘에 심어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 하지만...
이름없음 2023/09/23 14:18:58 ID : rBz9jtdyGmq
안개 속에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시야의 얼마 쯤을 눈이 가리고 어느 정도를 안개가 덮고 있는지를 구분하는 건 무의미할 정도로, 안개와 눈이 뒤섞인 듯한 풍경이었다. 아니, 그걸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걸까. 숲 속을 한참 걸어서야 겨우 호수 언저리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물을 담기 시작했다. 실은 가지고 온 식수가 거의 다 떨어져가던 참이었고, 무엇보다도 이 호수는 물이 맑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고생해가며 온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들 한창 이 통 저 통 가져왔다 가져갔다 하며 물을 담는 동안 나는 무전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다시 점검했다. 신호가 다소 약한 게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이런 극지에서는 그 정도만 되어도 사실상 전화선을 깔아놓은 것이나 다름 없다. 신호탄을 써서 위치를 알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신호탄은 최대한 아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무전기로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긴 어렵겠지만... 그것 말고도 방법은 있다.
이름없음 2023/12/05 13:04:31 ID : rBz9jtdyGmq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시라도, 조금이라도, 아니 일초라도 빨리. 머리 속에는 그런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하물며 그걸 내색하지 않는데 쓸 정신적인 여력 같은 건 더더욱 있을 수 없었다. 빗발은 여전히 거칠고 험악했다. 차는 마치 자신의 할 일은 다했다는 듯 뻔뻔한 얼굴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빗물에 시야가 온통 젖으면서도 나는 잠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시동 걸어봐!" 어딘가 먼 곳에서 울리는 듯한, 쉰 목소리가 내 목 안에서 터져나왔다. 차에서 물러나자 이윽고 엔진이 부르릉 하고 몸을 떤다. 그리고는 빵 하고 경적이 울렸다. 이번에도 꽝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다시 차에 덤비듯이 달려들었다. 냉각수 문제는 아니었다. 라디에이터에도 문제는 없다. 대체 뭐가 고장난걸까. 그것도 하필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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