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3/02/16 00:04:49 ID : jzfdTO9Ak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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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름없음 2023/02/16 00:05:27 ID : wFbfQlbfXuo
그녀는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방 한 켠에 앉아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녀가 하는 것이라곤 유달리 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일 인용 의자에 앉아 이따금 글을 읽거나, 밥을 먹는 것 뿐이다. 그녀에게선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느낄 수 없고, 사람의 것이 아닌 기운이 그녀 주위를 둘러싼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방 한편에는 그녀마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그런 그녀를 창문 밖에서 한참 쳐다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행위는 마치 어느 아름다운 풍경을 관망하는 듯했다. 방과 바깥 모두가 고요함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3 이름없음 2023/02/16 00:07:38 ID : wFbfQlbfXuo
그는 몇 주간 그녀를 지켜보면서 그녀가 마치 물고기 같다고 생각했다. 방이라는 작은 어항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며, 그것에 만족하는 듯해 보이는…. 물고기와 그녀 모두 표정이 없으니 그 점 또한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어항에 있는 물고기들을 보며 그녀를 떠올렸다. 그는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집 창문으로 그녀를 보는 행위를 중단하기로 마음먹었다. 어항으로 둘러싸인 그의 방에서, 그녀를 보는 행위와 자신의 방 안에 있는 물고기들을 보는 행위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그는 그녀가 자신의 어항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침대 옆의 탁상 위에 작은 어항을 하나 설치했다. 그곳에 마치 순백색의 꽃처럼 보이는 물고기 한 마리를 집어넣었다. 그는 그 물고기를 그녀라고 생각했다. 물고기는 그녀보다 생명체 같았다. 기분이 좋을 땐 거품집을 만들기도 하고, 그가 다가올 때는 춤을 추는 것처럼 꼬리를 움직이기도 했다. 그는 피식 웃었다. 무의식중에 그녀가 그에게 활짝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럴 리는 없지. 하고 그는 생각을 관두었다.

4 이름없음 2023/02/16 00:07:59 ID : wFbfQlbfXuo
그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그녀에게 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여자에게 남자가 할 법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집 창문으로 그녀를 훔쳐보는 일(그는 그저 스치듯 봤다고 생각하는)을 하지 않지만, 그녀를 훔쳐볼 때보다 그녀가 더 자주 머릿속을 휘저었다. 머리맡의 물고기를 그녀라고 생각하니, 물고기의 움직임이 마치 그녀의 움직임인 것 같았다. 그는 온종일 그녀를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맡의 물고기처럼 행동하는 그녀를 생각했다. 그는 분명히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무엇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머리맡의 물고기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머리맡의 물고기처럼 행동하고, 그를 향해 활짝 웃음 짓는 상상 속의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5 이름없음 2023/02/16 00:08:10 ID : wFbfQlbfXuo
그는 여전히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그는, 그의 무지에도 무지하다. 학창 시절 그의 친구들은 공감 능력이 결여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종종 뻔하디뻔한 B급 신파 드라마를 보고 슬퍼하기도 하고, 뉴스에 나오는 성범죄자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기도 했기 때문에, 내가 사이코패스는 아니지- 하고 그는 그런 말들을 모두 흘려들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을 들어왔던 데에는 원인이 있다. 그는 슬퍼하면서도 슬퍼하는 줄 모르고, 분노하면서도 분노하는 줄 모른다. 슬퍼하고, 분노한 한참 후에 그는 그러했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는 자기의 감정을 잘 모른다, 그의 감정을 모르는 만큼 타인의 감정 또한 잘 모른다. 그런 그가 사랑에 빠졌고, 그의 사랑은 눈먼 자 앞에 놓은 금괴와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6 이름없음 2023/02/16 00:08:18 ID : wFbfQlbfXuo
그는 도어락이 안정성과 편안함을 가정집에 제공하는 데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도어락을 설계하고 제작하고 설치하는 일이, 안전함을 설계하고 제작하고 설치하는 일과 같았다. 5년 전 그는 한 가정집에 도어락을 설치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깔끔하다 못해 휑했다. 도어락을 설치하며 흘끔 쳐다본 집안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다. 분명 집 안에는 사람이 있었지만, 마치 없는 듯했다. 긴 생머리에 적당한 피부색에 적당한 키, 크게 예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모난 곳 없는 얼굴에 그는 종종 눈길을 주었다. 지극히 평범한 여자의 얼굴에는 공허함이 가득해 보였다. 그 이후 그는 몇 년간 그녀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7 이름없음 2023/02/16 00:08:29 ID : wFbfQlbfXuo
그렇게 매일 도어락을 설계하고 제작하며 설치하면서 하루를 보내던 그는 도어락을 설치하러 간 어느 집의 거실에 놓여있던 어항을 보게 되었다. 어항은 작은 바다처럼 보였다. 수초와 돌과 물고기는 정말 그곳이 바다인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는 도어락을 통해 편안함을 주기를 원했다. 이제 그는 물고기들에게, 그리고 다른 생명체들에게 편안함을 제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그는 집에 어항을 하나 들였다. 그곳에 흙을 깔고, 돌을 넣고, 수초를 심었다. 어항 속에 물을 채우며, 마음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키우기 쉽다는 구피를 몇 마리 들였다. 작은 고기들이 어항에서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것을 보며 그는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벅차오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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